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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창세기1: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12. 9. 02:49

 

태초에 하나님이 (창세기1:1-)

 

요즘은 과학의 시대이며 이성의 시대입니다. 사람들의 학문수준이 상상할 수 없을만큼 올라갔습니다. 옛날처럼 미신과 야만이 판을 치고 맹신과 굴종이 당연시 되는 세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부의 사람들은 더 이상 종교는 필요하지 않고 종교는 시대착오적인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는 존재하고 종교 역시 건재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모든 종교 중에서 세상으로부터 가장 많은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은 바로 기독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성경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학문은 성경과는 다른 사상을 전파합니다. 끊임없이 성경과 충돌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 학문 특히 유럽의 근세이성은 성경과 교회의 권위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그 옛날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의 간섭 없이 살려고 했던 니므롯의 무리들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결국 실패했고 인류는 대 혼란에 빠졌습니다.

인간의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 신의 간섭으로부터의 독립은 인간의 오랜 숙원입니까? 글쎄요, 인간의 숙원이라기 보다는 사탄의 숙원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그것의 가장 으뜸은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성경말씀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그게 옳느니 옳지 않느니 하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이 성경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신앙의 근거이며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저는 믿습니다.

 

성경의 내용이 부끄럽습니까? 너무 얼토당토 않는 내용이 많아서 전설이나 신화 같습니까? 아니면 무슨 기적이 그렇게 많이 일어나는지 소설 같습니까? 이제 우리 정말 성경이 믿을만한가 아닌가를 한번 살펴보십시다.

 

1.태초에 하나님이
잘 보세요. 태초라는 말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우리는 이때까지 ‘창조하시니라’의 ‘창조’에만 집중했지 ‘태초’라는 말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에만 정신이 팔려서 정작 성경의 기술 방식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태초’라는 말은 성경이 성경인 것을 증거하는 강력한 단어입니다.

 

우리가 옛날 얘기를 보면 처음에 어떻게 시작합니까?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누덕산 누덕봉에 누덕 도사님이 살고 계셨어요” 이렇게 시작합니다. 머털도사 일탄이 이렇게 시작하지요.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머털도사 이야기뿐이 아니라 대부분의 옛날 이야기들은 다 그렇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동화만 그렇게 시작하는 것도 아닙니다. 미국이나 유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모호하게 시작하지 않고 ‘태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태초라는 말은 ‘시간의 처음’이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시간의 시작에라고 되어 있고요. 이 말은 시간은 자연적으로 저절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처음 시작된 순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고 당연히 시간이 어느 순간에 시작된 순간이 있는데 그때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시간의 때를 노린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를 기해서 시간이 흐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빛을 만드셨거든요. 그 빛이 바로 시간을 만드는 시작이 되는 것이지요. 그 이전에는 흑암만이 있었답니다.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면 시간은 영원 전부터 흐르고 영원 후까지 계속해서 흐를 걸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도 시간의 지배를 받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최근에 과학자들은 시간도 처음 시작된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자연적으로 있어 왔던 것이 아니라 어떤 창조적 행위로 말미암아 비로소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모세의 시대에 이미 시간의 처음 시작이라는 개념을 알고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녕 놀라운 신비입니다. 아무리 애굽의 학문이 뛰어나다해도 고대의 한계가 명확한데 그걸 어떻게 모세가 알 수 있겠습니까?

 

조금 더 어렵게 생각하면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그는 영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공간과 시간이라는 그 틀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만이 아니라 육체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는 우주 만물은 시간이 흐르지 않을 때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보고 유한한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모세의 시대에 쓰여진 성경이 그 철학적이며 현학적인 개념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 ‘태초’라는 말이 성경이 정말로 굉장한 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입니다.

 

옛날 제가 어릴 때 동네 친구들과 논쟁한게 생각납니다. 그때 친구들 세명이 시멘트 바닥에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합니다. “우주는 무한하다” 꼬맹이들이니까 무한이란 말 대신에 ‘끝이 없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제가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아니야 우주는 끝이 있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두 친구들과 입씨름을 했습니다.

 

저도 속으로는 ‘그래 우주는 무한할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한번 입 밖에 꺼낸 말을 뒤집어 엎을 수가 없어서 끝까지 우주는 무한하지 않고 유한한 걸로 주장했습니다. 물론 꼬맹이들이 아무리 유식한척 해봐야 아는게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정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과학자들은 우주가 무한하지 않고 유한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우주를 무한하다고 생각하고 시간은 자연적으로 저절로 흐른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에 우주보다 더 크고 위대한 존재는 없는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우주는 유한하고 그 유한한 우주를 여행하려는 시도가 지금 맹렬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하나님이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하나님으로 표현된 ‘엘로힘’은 원래는 ‘신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단수가 아니고 복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표현하는데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한분 하나님, 유일하신 신을 표현하는데 어떻게 ‘신들’이라고 여러 신을 나타내는 말을 사용하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을 표현할 때는 항상 ‘엘로힘’이라고 표기합니다. 신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원래 하나님을 나타내는 엘로힘은 신들이라는 복수형태의 말로 쓰입니다. 그런데 이 엘로힘은 사실은 장엄복수라고 해서 권위와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복수형으로 사용해서 그 신이 얼마나 크고 장엄하며 전능한지를 나타내는 그런 언어관습이 있답니다. 셈족어 계열에서 그렇답니다.

 

그렇다면 혹시라도 하나님이 여러분인 것은 아닐까요? 여러 신들이 동시에 창조에 참여한게 아닐까요?
어떻습니까? 여러 신들이 창조를 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유일신을 섬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우리 기독교는 아주 편해집니다. 이 신도 믿고 저 신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너무 배타적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자기신만 신이라고 하고 다른 신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여러 신이 창조에 관여했다면 더 이상 우리를 유일신을 섬긴다고 다른 신을 배격한다고 배타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주 나이스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확실히 매력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결코 여러신들이 창조를 한게 아닙니다. 왜냐면 ‘창조하시니라’는 말 안에는 한 신이 창조했다는 개념이 명확하게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말입니까? ‘단지 창조하시니라는 말에서 우리가 한 신이 창조했는지 두 신이 창조했는지 여러 신이 창조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하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에는 ‘창조하시니라’는 그 단어 자체로 한 명이 창조했는지 둘이 창조했는지 여러 명이 창조했는지 뭘 창조했는지 까지 다 알 수 있도록 단어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를 성경언어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명확하게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헷갈리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복수로 쓰고 ‘창조하시니라’는 단수로 썼다는 것은 얼핏 우리들에게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연상시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세분인 것 같은데 자꾸 하나님은 한분이랍니다. 그래서 엘로힘 복수 창조하시니라는 단수. ‘하나님’과 ‘창조하시니라’는 단어가 그렇게 오묘하게 여겨집니다.

 

3.천지를
여러분! 여기 ‘천지’라는 단순한 말에도 놀랍고도 깊은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하늘과 땅’이란 말을 한자로 쓰면 ‘천지’가 됩니다. 성경에서는 ‘천지를’ 이란 표현으로 ‘그 하늘들과 그 땅을’ 이라고 사용했습니다. 하늘이면 그냥 하늘이지 ‘그 하늘들’은 또 뭡니까? 그리고 왜 땅은 또 복수가 아니라 단수입니까?

 

사실 히브리인들의 하늘 개념은 하늘이 세 개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첫 번째 하늘은 우리가 보는 하늘, 즉 새가 날아다니고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을 말하고 두 번째 하늘은 그 너머에 있는 하늘 즉 해와 달과 별이 있는 우주를 말하고 그 너머 세 번째 하늘은 천국이 있는 하늘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 이렇게 세 개의 하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천지를 ‘하늘들과 땅들’이라는 이상한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오늘날과 같은 과학적인 지식이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 히브리인들은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과 해와 달과 별이 있는 하늘을 구분했고 또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을 구분했다는 겁니다. 이게 다르게 바꾸어 보면 굉장히 과학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먼저 대기권의 하늘과 대기권 밖의 우주 그리고 유한한 우주 너머의 세상으로 나누었다는 것은 현대 과학자들하고 비슷한 생각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우주도 유한하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는데 고대 히브리인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하늘을 세 개로 나눌 수 있게 되었는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나 중국의 고대 관념에는 하늘이 한 개입니다. 그래서 호랑이를 피해 나무위에 올라간 오누이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타고 올라가서 하늘의 해와 달이 되었다는 전래동화가 내려오지요.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그 하늘을 세 개로 나누었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의 단순한 구절 속에, 온 인류가 이제껏 쌓아온 지식이 아주 그대로 쉽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저작물, 성경 속에 드러나 있는 겁니다.

 

4.창조하시니라
창조라는 말은 무에서 유를 이루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있는 것에서 또 다른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을 가지고는 창조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물건을 만드는 것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현재를 자르듯이 나누어 버리고 전혀 새로운 것을 있게 하거나 시작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절대적 창조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5.혼돈하고 공허하며
우리가 혼돈과 공허라는 말을 듣게 되면 뭔가 공허하고 허무한 삶 같은 것 즉 도교에서 말하는 공허와 사탄의 세력이 판을 치고 모든 질서가 뒤죽박죽이 된 혼란한 상황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혼돈과 공허는 그렇게 철학적인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은 아주 단순한 말입니다. 단순히 그 창조당시의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시기전의 지구 상태를 묘사한 글일 뿐입니다.

 

혼돈이란 말은 다른말로 형태가 정해지지 않았다. 즉 부정형이란 말입니다. 아직 지구의 형태를 공모양으로 할지 네모난 모양으로 할지 아니면 삼각형으로 사다리형으로 할지를 정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직 만물이 창조되기 전이므로 당연히 땅이 비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어있다는 말을 공허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뭔가 있어 보이는 말이지만 아무것도 없다는 단순한 말입니다.

 

어때요? 이렇게 보니까 전혀 철학적이거나 뭔가 심오한 말이 아니라 지구의 상태를 단순히 묘사한 말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천지창조의 기사를 설화니 신화로 신비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사실관계를 적어 놓은 것입니다. 전혀 비과학적인 말이 아닙니다.

 

6.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라는 말도 보면 뭔가 그럴듯해서 심오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아직 빛이 없어서 어둡고’ 이런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직 빛을 만드시지 않았으므로 어두울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자꾸 이 기사의 구절들을 오묘한 뜻으로 심오한 뜻을 내포한 글로 파악하려 하기 때문에 천지창조 신화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천지창조는 단순한 사실일 따름입니다.

 

7.운행하시니라
여기서 운행하시니라는 말은 조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운행이라고 하면 비행기나 기차나 버스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지점에서 어떤 지점까지 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관념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영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은 캄캄한 물위를 하나님이 구름을 타고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여길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치 설화같습니다. 누덕봉에 사는 누덕도사님이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날아 가는 것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우리 성경이 주는 표현상의 모호함에서 비롯된 오류입니다. 뭐냐면 그 운행은 하나님이 왔다 갔다 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구를 운행시키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운행은 어디서 어느 지점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돌리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이 운행이란 말을 원문으로 살펴보면 마치 어미새가 알을 품고 부화를 기다리면서 알을 돌리고 있는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 중세 갈릴레오가 교황청의 이단 심문관에게 놓여나서 문을 나서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했다는 말은 좀 맞지가 않습니다. 성경은 이미 그 옛날  처음으로 적을 때부터 지구가 돈다고 기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세의 신부들이 그런 글자하나도 제대로 해석할 수 없을 만큼 무식하지 않았다면 당연하게 지구가 도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운행’이란 말을 사용한 성경의 놀라운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은 땅이 평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본 사람들 당시의 히브리인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구가 분명히 평평한데 왜 하나님은 지구를 새알처럼 둥근 곳으로 표현했을까, 게다가 지구는 돌지 않는데 왜 지구가 도는 것처럼 표현했을까? 같은 의문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 하나님이 어미새가 아기새를 부화시키기위해 그 위에 앉아서 돌리듯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했구나!’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넘어 갔습니다. 그랬는데 지금 와서 보면 이 표현은 정말 굉장히 과학적이며 정확한 표현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성경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대전제에 따라 모든 성경의 구절들을 방어해야 합니다. 단 한단어도 틀릴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문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며 이를 수호합니다. 가령 중간에 얼핏 모순되는 서술이 나오면 봐라 성경이 틀렸다 이렇게 단정할 것이 아니라 이건 뭔가 의미가 있을거야 라거나 이게 모순이 아니라 해석이 문제가 아닐까와 같이 생각하고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래서 성경의 어려운 문제 얼핏 모순되게 보이는 문제들을 모두 성경난제라고 말합니다. 풀기가 어려운 문제다. 그래놓고는 하나하나 맞추어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진리, 성경의 정확무오성을 말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기독교는 다른 구전에 의한 종교나 추상적인 禪같은 것으로 대충 넘어가는 종교와도 다르기 때문에 항상 세상 학문이 발전하면 할수록 도전이 거세지고 당연히 여기에 더 많은 지식으로 응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세상의 종교 중에서 가장 많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가령 우리 기독교가 산속에서 추상적인 화두나 던지고 생각하고 깨닫는 그런 종교라면 그 자체가 진리니 아니니 하고 시비를 걸 건덕지 자체가 없게 됩니다. 사람의 생각은 정해진 것이 없고 다양한 형태로 생각하고 발전하고 논리적으로 추론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간밤에 신이 와서 그렇게 된다고 했다고 주장하는 그런 종교라면 아예 시비의 원천이 봉쇄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이런 거지요. 최근에 어떤분이 북한이 2년안에 붕괴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통일 대박이라고 했고 또 개성공단을 폐쇄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2년안에 북한이 붕괴하느냐고 묻습니다.

 

이때 신이 그랬다고 한다면 모든게 끝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시비도 이의도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이 그랬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지금 북한의 상황이 어떻고 국제 정세가 어떻고 남한과 중국의 상황이 어떻고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도 몰라. 그러나 그게 맞아.왜냐고? 신이 그랬거던’ 이러면 모든게 ok.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을 믿음의 기초로 삼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누구라도 연구하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 두 구절 창세기1장 1,2절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므로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성경을 과학적으로 파고들면 아무래도 빈틈이 보이고 모순된 점이 나올 것이라고 하는 막연한 가정을 그 밑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을 너무 우습게 보면 안됩니다. 우리는 각자 각자의 삶에 바빠서 정신없이 앞만 바라보고 옆도 바라보지 않고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나가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 바쁜 와중에서도 우리를 정확하게 하나님이 사용하실 위치로 몰고 가십니다. 여건에 따라 정신없이 달려왔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이 위치에 와있는 나를 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위치에 우리가 서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부여하시고 그 일을 이루실 여건을 허락하시고 그리고 그 일을 이룰 수 있도록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 하나님의 손에서 놀 때 가장 행복하고 가장 성공할 수 있습니다. 원래 가을하늘은 맑고 구름한점 없이 파란게 특징입니다. 그런데 요즘 그런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은 정말 몇일 되지 않습니다. 항상 뿌옇게 되어 버렸습니다.

 

멀리서 보면 도시가 전부 회색의 스모그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숨도 잘쉬고 잘 살아 갑니다. 정말 희한하지요? 산위에서 도시를 바라보면 저 더러운 스모그속의 사람은 당장이라도 병이 걸려 죽을 것 같은데도 정작 그 속에 사는 우리는 지금 스모그 속에 갇혔는지에 대한 자각도 없습니다. 그건 우리가 그만큼 스모그에 내성이 생겨서 이겠지요.

 

제가 처음 서울에 갔을 때 무려 일년동안이나 기침을 했습니다. 그리고 검은 가래가 나온적도 있었지요. 그땐 목감기가 한번 걸리면 50일씩 가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점점 적응이 되니까 서울도 나름 살만해 졌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 갔다가 소도시지요 부산의 정관, 신도신데 전원도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서 한몇년씩 살다가 한번씩 서울에 가는데 정말 답답합니다.

 

그리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우루루 다니니까 아찔하기도 합니다. ‘와, 이런데서 어떻게 살았을까?’ 그래도 그 당시에는 그 속에서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그래도 잘 살았습니다. 막상 바깥에서 보는 것과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이렇게나 다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지식을 추구해서 하나님과 동등되려고 했고 그 하나님의 간섭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했으며 하나님이 주실 수도 있는 징벌을 피할 수 있을만큼 화려한 문명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목표들은 항상 생각지도 못했던 또 다른 암초를 만나서 좌절되었고 오늘날까지 인류는 신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벗어나면 자유롭습니까? 마음껏 자행자지할수 있어 보입니까? 천만에요.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면 사탄의 손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이전보다 더 큰 절망 속으로 빠져들고 결국은 영멸에 처해집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인간의 모든 멍에를 없애 준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준 멍에는 가볍고 쉽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지 ‘너희의 모든 멍에는 내가 싹 다 없애 줄게’라고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과학을 성경을 반대하는 수단으로 삼지 말고 성경을 잘 분석해서 그 속에 담긴 과학적 진리를 찾으려고도 한번 노력해 볼 일입니다. 언젠가 이스라엘이 성경의 구절, 어디에서 역청구덩이에 빠졌다는 그 구절에 의문을 가지고 일대를 조사한 결과 유전지대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처럼 아직도 남아 있는 많은 성경의 신비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게 되기를 또한 바랍니다.

 

성경이 진실에 대해서 계속 의문을 가지고 도전해도 결국은 진실만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시도는 또 다른 불행을 초래할 뿐입니다.

 

사실 일반인들이 성경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파헤친다고 분석하고 연구하는 일은 잘없기는 합니다만 너무 그런 일에 혹여라도 심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문제, 무오성에 대한 문제는 하나님에게 맡겨 버리고 우리는 단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신 것만을 유념하면 됩니다.

 

성경은 절대적인 진리이므로 그 속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것도 난제라고 생각하고 풀다보면 저절로 다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지가 발달하면 할수록 더 성경의 진리를 잘 알게 될 것이고 더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수긍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방어하도록 하고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품안에서 행복된 삶을 누리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이 구절을 보면서 느끼는 신비와 경외감 그리고 감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믿고  확신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떠나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 선언에 더 가슴 먹먹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는 그 선언은 이 세상의 모든 시비와 도전을 제압하는 단호한 능력입니다.

 

17세기 초 유럽에서 30년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래서 신교도와 구교도 간에 무려 30년동안 치열하게 싸웠는데 이때 유럽의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서로 동맹관계와 이해관계에 따라 각 진영에 들어가서 싸운 결과 이 전쟁이 끝날 때는 유럽인구가 무려 1/3로 줄어들었답니다. 그래서 이러한 현실을 보고 인문주의자들은 종교, 특히 기독교에 대한 환멸에 빠졌고 자기들의 사명으로 이 땅에서 교회를 박멸하는 것을 삼았다고 합니다.

 

이 때의 사상적 영향이 지금도 남아 있어서인지 학문하는 이들 가운데 성경과 교회를 반대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연하게 교회는 오류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하고 또 지금도 개혁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세상 학문과 종교가, 세상 지식과 성경이 서로 모순되거나 충돌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 역시 학문의 발달에 따라 점점 더 진실이라는 것을 더 많은 이들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구가 둥글다고, 지구가 돈다고, 지구에는 대기권안과 대기권밖의 하늘로 나뉘고 우주 역시 결코 무한하지 않으며 시간은 저절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처음 순간이 있다는 이런 과학적 진리들은 세상의 학문이 발달하면서 비로소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선언을 부끄러워하거나 잘못된 것으로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구절이 단순히 믿음으로만 받아 들일 수 있는 반과학적인 구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 불확실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의 진리가 내일은 오류로 바뀔 수 있고 오늘의 문명이 내일의 야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이 모세의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은 그만큼 성경이 진실만을 기록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신기합니다. 따지고 보면 정말 신기합니다. 그 옛날에 지은책이 어떻게 이렇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을 수 있는지 정말 신기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오래전에 지은 책으로 남아 있는 것은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입니다. 사본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내용을 보고는 기절초풍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내용의 음탕함이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게 진짜 화랑세기다 아니다로 떠들썩 했습니다.

 

지금은 이게 진짜로 받아 들여 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화랑세기는 겨우 천삼백년 전의 책입니다. 그것 말고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책은 거의 고려시대 중기이후의 저술입니다. 그런데 그 몇배의 세월이전의 기록물이 완전체로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 아닙니까?

 

세상은 성경을 비판하려고만 했지 어떻게 그 오랜 세월동안 성경이 전해져 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일부러 관심을 안주는 것 같습니다. 그 신비를 인정하고 감탄하면 마치 하나님에게 지는 것 같아서 입니까?

 

기독교가 무슨 인류의 공적이나 자신의 철천지 원수라도 되는양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읽게 되면 어느 순간에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이며 그 부수적으로 진리와 신비에 경탄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죽은 책이 아닙니다. 아직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놀라운 역사가 이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고 요한이 말했지요.  성경을 많이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속에 잠기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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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저는 가끔 그런 재밌는 생각을 합니다. 성경을 믿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노력하다보면,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어서 신비한 일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거에요. 저는 특히 하나님의 아이콘잉라는, 기독교인들의 삶의 태도에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높아지려고 하기 보다는, 낮은 사람을 돌아보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기독교인들은, 항상 자신감에 차 있는 이른바 내가 왕이다 라는 사고방식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약한 자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중의 일부는 좋은 사람을 만나서 축복을 받는 것도 목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행복해 지는 것을 보면 정말 기쁩니다. 저도 시간은 걸리더라도 좋은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또한 이런 재밌는 생각을 합니다. 혹여 천국에 들어갈 때, 내 입술만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말로만 교인이었던 것은 아닐까 반성하게 됩니다. 며칠 전 보았떤 헐리우드 영화 배트맨 비긴즈에서는 사람은 행동으로 말한다고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행동은 얼마나 기독교인 다웠나? 얼마나 주님 보시기에도 괜찮았을까? 어렵고 힘든 질문일 수 있겠지만, 감히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점점 성화 되어가는, 성도의 모습이 되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나는 조금 모자라고, 나는 이점이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정직하게 살아가면 주님께서 갚아주시고 채워주시는 날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재밌께 힘내며 즐겁게 살아갈 수 있기를, 힘낼 수 있기를 / 2016. 12.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