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뿌리는 자의 비유 (마가복음4:1-20)
오늘 본문에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씨뿌리는 자를 쉽게 농부라고 합시다. 그런데 씨뿌리는 자가 씨를 뿌릴 때 모두 네가지의 땅에 씨를 뿌립니다. 우리도 잘 아는바와 같이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가 있는 땅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옥토입니다. 이 네가지의 땅에 씨가 뿌려집니다.
아마 씨뿌리는 자는 옥토에 씨를 뿌리는 것을 목표로 했을 것인데 그 씨앗 중에 일부가 나머지 이상한 땅에 떨어진 것이 아닐까요? 제대로 된 농부라면 자기의 소중한 씨앗을 돌짝밭이나 길가 그리고 가시떨기 사이에 뿌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제대로된 농부가 그런 이상한 곳에 귀중한 씨앗을 뿌렸다는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이유도 우리 주님이 직접적으로 말씀을 하신게 아니라 비유로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귀있는 자’만 제대로 들을 수 있을 것으로 가정 하셨는데 솔직히 우리는 그래도 정확한 비유의 뜻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설마 우리가 귀 없는 자일까요? 주님은 비유로 말씀을 참 많이하셨고 이것을 해석하는데 매우 힘이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비유가 전혀 뜻밖의 해석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3절의 비유에서 주님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들으라.
이 말은 신명기에 나오는 ‘들으라’는 말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들으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하면 ‘쉐마’입니다. 쉐마는 히브리어를 잘 모르는 우리도 아주 자주 들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쉐마라고 하고 시작하면 아무래도 율법적인 아주 중요한 명령을 선포할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이 비유는 그냥 단순하게 재미를 위해서나 또는 들을테면 듣고 말테면 말아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그 쉐마와 비견될 만큼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반드시 주의 제자된 우리 성도들이 들어야 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반드시 들어야 하는 귀중한 말씀이 되는 겁니다. 이는 마치 구약의 율법과 같은 중요도를 가진답니다.
자, 이제 구체적으로 주님이 말씀하신 비유에 대해서 한번 살펴 보아야 합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사실 팔레스틴의 농부가 씨를 뿌리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본문의 내용처럼 농부가 직접 씨를 뿌리는 방식이고 두 번째는 곡식 자루에 구멍을 내고 이걸 짐승의 위에 싣고 가면서 씨를 뿌리는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구멍을 통하여 씨가 빠져나가서 땅에 뿌려지는 겁니다.
당연하게 본문에서는 농부가 직접 씨를 뿌립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뿌리든 아니면 짐승이 짊어진 구멍에서 뿌려졌든 모두 이미 밭이었던 곳의 남아 있는 이랑을 따라서 씨를 뿌리고 그리고 밭을 갈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나무가 있는 곳도 원래는 밭이었습니다. 아마 밭을 그동안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서 이런 이상한 땅들로 변질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본문의 ‘씨뿌리는 자’라는 말 앞에는 ‘그’라고 하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씨뿌리는 자’라는 말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씨뿌리는 자는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구약의 씨뿌리는 자인 하나님을 연상시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아직 때가 오지 않았으므로 자기가 하나님에 비견되는 것을 숨기기위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임을 밝히고부터 유대교의 지도자들에게 핍박을 받기 시작하니까 아마 제자들을 조금 더 성장시키려고 시간을 필요로 하셨을 겁니다. 아직 십자가를 지실 때가 멀었으므로 진리를 귀있는 자들에게만 알게 하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신 모양입니다.
자, 이제 그 땅의 종류들을 한번 살펴봅시다.
1.길가에 떨어지매
먼저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답니다. 글쎄요? 새들은 길가에 떨어진 씨앗만 골라서 먹을 수 있는 재주는 없습니다. 새들이 씨앗을 먹을 경우는 씨앗이 땅에 온전히 심어지지 않고 길 위에 그냥 뿌려져있었기 때문입니다. 땅위에 그대로 씨앗이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들의 눈에 띄었고 그래서 새들이 좋다고 먹어 버린 겁니다.
여기서 새는 사탄의 세력을 상징한답니다. 그런데 사탄이 무턱대고 말씀을 먹어치워서 복음이 결실하는 것을 방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탄은 복음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우리의 마음에 스며들지 못하고 겉돌 때 그 틈을 노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길’은 농부가 농사를 짓기 위해서 다니는 농로를 말하기도 하고 또 밭을 가로질러서 농부가 다니는 그 길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요즘의 대로변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사람이 다니는 공용도로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마 그 밭의 주인인 씨뿌리는 자가 농사를 짓기 위해서 곡식을 상하게 하지 않고 왔다 갔다 할 수 있도록 만든 자그마한 농로를 말하는 걸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씨뿌리는 자는 그 길을 따라 씨를 뿌리는 겁니다. 그러다보면 그 씨앗중의 일부가 길가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길가의 땅은 사람들이 계속 밟아왔기 때문에 땅이 단단해져서 씨앗이 심어지기는 어렵습니다. 농부도 농부의 아내도 농부의 아들들도 딸들도 친구들도 밟고 지나가는 길은 단단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땅에 심겨지기 보다는 이리저리 밟히거나 새들에게 먹혀 버리는 겁니다.
땅이 단단하다는 말은 결국 우리의 마음밭이 강팍해져서 단단하게 굳어 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우스개 소리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를 오래 믿으면 믿을수록 마음이 빤댓돌처럼 빤질빤질해져서 감동을 받기가 어렵다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초신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을 수 있는 확률이 훨씬 더 높습니다.
이 설교도 듣고 저 설교도 듣고 특히 요즘처럼 방송에서 유명한 설교들을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귀만 높아져서 웬만한 설교나 말씀은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네 마음밭을 한번 돌아 볼까요? 우리의 마음 밭이 지금 길가와 같은 상황은 아닙니까? 그래서 웬만한 말씀으로는 내 마음에 어떠한 상처도 충격도 감동도 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도 시달리고 뽈려서 아주 뺀질뺀질해지고 단단해져서 속살을 보이지 않는 그런 상태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밭을 기경해서 씨가 뿌리내리고 잘 자랄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떨 때 우리는 일부러 우리의 마음을 강팍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 내면의 슬픔과 소망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척 하는 거지요.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바른 신앙자세가 아닙니다. 사람이라고 한다면 기쁠 때는 기뻐하고 슬플 때는 슬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때로는 화도 내고 분노하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이라는 증거이니까요.
상처받기 싫어서 강한척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밖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씀이든지 내 속에 용납되지 못하고 수용되지 못하고 튕겨나간다면 우리는 더 힘들어 집니다. 그렇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너무 과하거나 해서 사람의 몸이 상하거나 또는 이게 무질서와 혼동으로 흐르지 않도록만 조심하면 됩니다. 희노애락에 대한 표현이 서툴면 오히려 몸안에 병이 쌓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하나님은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지요?
본문에 보면 ‘단순히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라고 합니다. 그런데 원문이 전하는 뉘앙스는 보다 구체적이고 심각합니다. 우리가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 다시 번역해 보면 “그러자 새들이 날아와서는 씨앗을 다 쪼아 먹어 치워버렸다”
수많은 새들이 날아와서 길가를 따라 뿌리워진 씨앗들을 다 먹어 치워버렸다는 말입니다. 새들이 먹이를 쪼아 먹는 모습을 보신적이 있습니까? 새카맣게 내려 앉아서는 정신없이 먹이를 쪼아 먹는데 모든 새들의 눈이 정신없이 굴러가면서 모이를 쪼아 먹습니다. 본문에서도 새들이 보이는 족족 먹어 버렸기 때문에 결코 남는 씨앗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오래 기다려도 그 씨앗들은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울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 보아야 할 것은 새로 상징되는 사탄의 세력 때문에 씨가 뿌리 내리지 못한게 아니라 결국은 우리의 마음밭이 너무 단단한게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새가 극성스럽게 파먹으려 해도 설마 땅속까지 파헤쳐서 먹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길가에 뿌리워진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지 못한 일차적인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겁니다. 괜히 사탄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가 하늘을 날면서 먹이를 찾다가 우연히 씨앗이 땅위에 돌출되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씨앗을 먹어 치운 겁니다.
요즘은 상담이 인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자기의 이야기는 하려고하지만 남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 주지 않아서입니다. 기껏해야 미장원에서 머리하면서 또 발관리, 손톱손질하면서 떠드는 소리를 들어 주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들어 주는 것은 진정한 힐링이 안됩니다. 그들은 영혼에 대한 사랑보다는 돈을 벌려는 목적이 더 앞서기 때문입니다. 오죽했으면 진지하게 오래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상담효과가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너무 무거운 짐이라면 나혼자 다 지고 있으려고 하지 말고 주님앞에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밭에 난 딴딴한 길도 기경하고 파헤쳐서 부드러운 속살이 드러나도록 하십시오. 나는 위로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위로하실 것입니다.
2.돌밭에 뿌려지고
두 번째로 씨가 뿌려진 땅은 흙이 얕은 돌밭입니다. 흙이 깊지 않아서 곧 싹이나왔지만 해가 돋은 후에는 뿌리가 없으므로 말라버렸답니다. 흙이 얕은 돌밭, 이게 두 번째 비유에 나온 땅입니다.
우리말로는 흙이 얕게라도 있는 땅인 것 같지만 실제로 원문을 제대로 번역하면 흙이 거의 없는 바위 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흙이 거의 없기 때문에 뿌리가 깊게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싹은 어느 정도 있는 흙 때문에 날 수 있지만 해가 타면 뿌리로부터 수분을 흡수할 수 없기 때문에 곧 말라버립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오늘 본문에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라고 했지만 흙이 얕아서 빨리 씨앗이 발아한게 아닙니다. 원문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문을 참조하면 흙이 깊지 않아서 싹이 빨리 나온게 아니라 싹은 다른 밭과 같은 시기에 나온겁니다.
이스라엘의 해는 살인적입니다. 게다가 그 동네는 비도 거의 오지 않고 물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식물은 깊이 뿌리를 내려야 만이 웬만한 가뭄에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뿌리가 강하다고 해도 바위를 뚫고 식물이 뿌리를 내리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소나무처럼 바위를 뚫고 뿌리를 내리는 광경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여기 씨앗은 소나무 같은 나무 씨앗이 아니라 밀과 보리의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바위를 뚫고 뿌리를 내리는 것은 결코 기대할 수 없습니다. 흙이 거의 없으므로 뿌리에서 수분을 빨아 올릴 수가 없어서 타죽은 겁니다.
우리는 흔히 이를 신앙이 얕은 이가 고난의 환경에 처할 때에 견디지 못하고 변질하고 신앙이 없어지는 것을 뜻하는 걸로 생각합니다. 직접적인 핍박은 아니지만 나에게 주어진 여건이 불리하게 돌아가면 우리는 견디지 못합니다. 알아서 신앙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사실 거대한 바위를 품고 있는 땅을 제대로 기경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돌짝밭을 기경하기위해 쟁기가 있는 것이지요. 곡괭이가 있는 것이지요.
요즘이야 사실 이런 거대한 바위라도 뽑아버리거나 깨버리는 것은 문제도 안됩니다. 그러나 옛날 이스라엘의 농부에게 이러한 바위는 식물의 생장을 방해하는 농사를 방해하는 재앙입니다.
내 마음속의 단단한 바위같은 응어리를 없애버리지 않고는 복음이 뿌리내릴 수 없습니까? 그렇다면 내 마음을 열어놓고 이 바위같은 답답한 짐덩어리를 어떻게 할까를 한번 상담해 보세요.
믿음의 선진들에게 그것도하기 싫으면 목사에게 그겋도 싫으며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기도해 보세요. 이 돌덩이는 주로 아주 큰 걱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기가 불가능해 보일 수 있는 걱정과 근심이 이 바위덩이에 해당됩니다. 그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시는 주님께 아뢰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믿음의 기도가 필요한 법입니다. 언제까지나 바위덩이가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면 나는 결국 시름시름 앓다가 소멸할 수 밖에 없습니다.
3.가시떨기 속으로
세 번째로 씨가 뿌려진 땅은 가시떨기가 있는 땅입니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아서 결실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음,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지요? 식물이 설마 가시에 찔려서 아파서 못자라는 걸까요? 아니면 가시에 지력을 다 빼앗겨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해서 자라지 못하는 것일까요?
솔직히 이 경우에는 가시밭에 씨를 뿌리고 자라기를 바라는게 잘못된 것 아닐까요?
가시밭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가시나무가 자라는 밭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면에서 돌밭이나 길가보다는 그래도 환경이 나은 편입니다. 그러므로 식물이 자라기는 자랍니다. 그러나 결국 결실하지는 못하고 여기에서 그칩니다. 우리의 짐작처럼 가시나무가 지력을 다 빼앗아 가버리기 때문에 식물이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라더라도 엄청난 영양분의 공급을 확보하지못해서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하고 곡식낱알이 열리지 못하는 겁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에서는 밭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손길이 조금만 닿지 않고 관리가 안되면 바로 자라는게 가시나무입니다. 이게 우리나라도 옛날 황폐한 땅에 나무를 심는다고 제일 먼저 심은게 가시나무입니다. 그 중에서 아카시아. 이게 황폐한 땅에서도 정말 잘 자란답니다. 그리고 이 나무는 사계절 내내 자랄 뿐만 아니라 자라는 지역도 점차 넓어진답니다. 번식력이 정말 왕성합니다. 그래서 다른 식물은 아예 자라지를 못하게 막습니다. 그래서 다른 식물들이 모두 고사하게 됩니다.
‘기운을 막았고’란 말은 ‘질식시키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그런 식물종들이 많이 있어서 산의 수종을 고사시키고 마구잡이로 자라는 지역이 넓어져서 골치가 아픈데 팔레스틴에서는 가시나무가 그런 나무입니다.
가시나무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나무이고 그래서 다른 식물이 자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실하려고 하면 엄청난 영양분이 필요한데 그 영양분을 흡수하도록 가시나무들이 놔두지를 않습니다. 왜냐면 다른 식물과 가시나무가 함께 자라기 시작하면 가시나무의 성장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시나무가 다른 식물에게 필요한 영양분까지 다 흡수해 버리므로 결국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해서 곡식은 결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자라는 것, 뿌리를 내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결실하지 못하다면 뿌리를 내리지도 못하고 죽는 거나 곧 말라 죽는 거나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씨 뿌리는 자는 그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결실해서 그걸 추수해서 곡식으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나무 밭이나 씨 뿌리는 자에게는 같은 것입니다. 모두 쓸모없는 무익한 땅이 되는 것이지요.
4.좋은 땅에
마지막으로 씨 뿌리는 자는 좋은 땅에 씨를 뿌립니다. 여기 저기 낭비된 씨앗이 많은 가운데 그래도 그 일부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심기워졌고 뿌리를 내리고 싹이 자라고 결실합니다. 좋은 땅이라서 결실했겠지만 다르게 보면 결실했기에 그 땅이 좋은 땅으로 여겨진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일단 씨부터 먼저 뿌리고 그걸 뒤집어 엎어서 기경합니다. 그러므로 씨앗이 뿌려진 곳이 좋은 땅인지 아닌지는 한번 파봐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길가에’ ‘돌밭에’ ‘가시떨기에’ ‘좋은 땅에’이렇게 나와 있는데 실제로 원문의 의미는 ~에가 아니라 ‘~안으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씨앗은 땅의 거죽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는 역동성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움직이고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참고로 아무리 씨앗이 역동적이라고 해도 우리의 마음밭이 그래도 식물이 뚫고 들어갈 정도로는 부드러워야 합니다.
여하튼 좋은 밭에 뿌리워진 씨앗은 결실하여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한알의 밀알이 떨어져 썩어서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은 우리 기독교의 기본 원리입니다. 내가 썩어지지 않고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흙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길가에 굴러 다니면 결국 새들이 낼름 와서 쪼아 먹어 버립니다.
깊은 흙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뿌리로 수분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해서 해가 뜨면 말라 죽어 버립니다. 가시나무밭에서는 어떤 식물도 가시나무들의 횡포를 이기고 결실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씨앗 스스로는 땅을 선택할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씨앗은 그냥 뿌리워질 뿐입니다. 그게 좋은 밭일 수도 있고 나쁜 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씨앗보다는 결국 땅의 상태가 더 중요한 것이지요.
5.귀있는 자는 들어라
그리고 주님은 ‘귀있는 자는 들어라’고 하셨는데 주님의 제자들은 아마 귀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10절에 보면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묻고 있습니다. 못알아 들은 거지요. 아마 주님의 제자들도 우리와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번의 비유에 대해서 상세히 말씀을 풀어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의 이 비유에는 놀라운 반전이 숨어있습니다. 우리가 얼핏 생각하기로는 네가지 다른 상태의 밭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한가지 밭이 있을 따름입니다. 왜냐면 우리처럼 밭이 있는 곳에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씨를 뿌리고 그곳에 밭을 만드는 것이 이스라엘의 농사짓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밭을 일구기 전에 돌도 섞여 있고 가시도 나는 땅도 있고 길도 옆으로 나있고 그리고 순수한 밭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길가도 돌밭도 가시떨기도 있게 된 것은 이전에 밭으로 사용했던 땅보다 훨씬 밭의 범위를 넓힐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밭으로 사용했던 흔적이 남아 있는 이랑을 따라 씨를 뿌린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범위를 넓힌 것입니다. 물론 이랑의 흔적이 일부 사라진 곳도 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감안하고 범위를 넓혀서 씨를 뿌린 겁니다. 그래서 이랑을 따라 옛날 밭이었던 지경의 범위를 넓혀서 뿌리게 된 겁니다.
이건 마치 우리의 복음에 대한 지경을 넓히려고 하는 시도와 비슷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밭이 만들어 지기 전에 미리 씨를 뿌리기 때문에 네가지 땅에 씨를 뿌린 것은 씨뿌리는 자가 보기에는 그 앞의 네가지 모든 땅이 다 잘 다듬는다면 충분히 씨가 뿌리내릴 수 있는, 밭이 충분히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사실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씨앗의 일부가 그런 땅에 떨어지게 된 겁니다. 똑같은 씨가 뿌려졌는데 결실하고 결실하지 않고의 차이는 결국 땅의 상태가 중요한 것입니다.
땅의 차이란 결국은 우리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밭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결실하고 결실하지 않고의 차이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네가지 땅의 비유에서는 땅은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마음밭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여건이 암울해도 우리의 노력여하에 따라 좋은 밭이 될 수 있고 우리의 마음먹기에 따라 곡식이 뿌리를 내리고 결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밭을 기경해야 합니다.
가시나무가 무성한 것은 세상의 온갖 근심걱정과 욕심이 가득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가시나무가 성장력이 좋은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은 욕심과 죄악은 급속도로 자랍니다. 일단 우리의 마음밭에 가시나무가 하나 생긴다면 그때부터 이 가시나무를 자라면서 다른 모든 식물종들을 말려 죽여 버립니다.
이 걱정과 욕망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우리 마음에 자리 잡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속에 가시나무가 거대한 밭을 이루지 않도록 미리 미리 죄악의 싹을 욕심의 싹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에게 뿌려진 씨앗이 결실할 수 있습니다.
돌밭을 볼까요? 내가 너무 강해서 남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웅크리고 있다면 그게 바로 돌밭이지요. 겉은 아주 약간의 부드러운 흙으로 덮여 있을지라도 속은 단단한 바위덩어리라면 그 어떤 말도 그 어떤 복음도 나를 두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그 어느 것도 나의 자존심을 해칠 수 없어!라고 생각한다면. 그 어느 누구도 나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 없어!라고 마치 모든 이들과 싸울 듯이 도사리고 있다면 그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불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성도가 세상의 닳고 닳은 사람들처럼 처세에 능하고 이해에 빠르면 곤란합니다. 가끔가다 그런 모습, 돈거래에 능하고 소위 처세가 뛰어나고 그래서 유연한 처신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도에게는 어느 정도 순수하고 부드러운 구석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때묻지 않은 것들이 있어야 합니다. 알고도 당해 준다고 세상살이를 할 때 너무 야박하게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가령 이런 분이 있습니다. 교회 갈 때 택시를 타고 갑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5000원이면 될 거린데 약간 다른 길로 가서 6000원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 기사에게 막 퍼붓는 겁니다. 평소에 5000원이면 충분한 거리를 무려 6000원이 나오도록 돌아서 왔다고 인간이 그렇게 살면 안된다는 둥 그 천원가지고 잘먹고 잘 살아라는 둥 한다면 교인들에 대한 평판을 혼자서 다 깎아 먹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몇백원 깎으면 그것가지고 뭐할 겁니까?
예수쟁이가 무슨 봉이냐고 하실지 모르지만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겁니다. 사실 우리는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해도 꽤나 유명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다는 소문이 나서 불신자들에게 단단히 인식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자고 우리를 주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성도라는 생각으로 항상 모든 일에 깨어 경성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안본다고 하더라도 본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돌아보아 흠잡을 수 없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제가 요즘 그렇습니다. 저희 아파트에서 제가 목사라는게 알려지고 정관에서 제가 목사라는게 알려져서 저도 모르게 저를 주시하는 이들이 늘어 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추리닝 차림에 마실도 잘 다녔지만 이제는 옷차림에도 신경을 쓰게 되고 함부로 남에게 화도 내지 못하고 뭐 그렇습니다. 불의를 보고도 화를 내지 못하고 한번 억누릅니다.
꼭 사람들이 봐서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아니라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보고 계실 겁니다. 그래서 과연 우리가 제대로 된 옥토인지 아닌지를 가늠하고 계실 겁니다.
오늘 주님은 네가지의 땅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이건 모두 한 개의 밭일 따름입니다. 각각 나누인 다른 종류의 밭이 아닙니다. 한 개의 밭에 있는 땅의 성질이 네 개입니다. 그런데 이 각각 다른 땅은 이전에는 한 개의 같은 밭이었습니다. 곡식이 자라고 추수하고 그래서 이랑이 그대로 남아 있고 일부는 이랑이 허물어 지고, 농사를 위해서 가운데 농부가 다니는 길도 있고 또 미쳐 손질이 안돼서 가시나무들이 자라고 그렇게 된 것이지만 이전에 여기서 농사를 지어서 곡식들이 결실했던 곳입니다.
자, 그리고 맨 마지막의 좋은 땅을 살펴봅시다. 본문에서 좋은땅의 상태가 어떤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좋은 땅이라고 해놓고는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했답니다. 그래요, 좋은 땅의 조건이 별게 아닙니다. 그냥 결실을 충분히 많이 하면 그게 좋은 땅이 되는 것입니다.
딱딱한 길가도 곡괭이로 파헤치고 쟁기로 갈게 되면 밭이 되는 거지요. 암석 돌밭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돌을 골라내고 흙을 쏟아 붓고 물을 주고 하는 거지요. 가시나무들이 자라있는 곳은 가시나무를 말끔히 베어내고 뿌리를 뽑고 해야 합니다. 좀 힘들 겁니다. 그러나 그 어느 밭도 못쓸 황무지로 내버려두지 않으려고 마음먹는다면 충분히 식물이 생장하는 밭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이 중요하지요. 나는 절대로 건드릴 수 없어! 하면서 토시고 있으면 그대로 돌짝밭이 되고 길가가 되고 가시덤불이 되는 겁니다. 씨 뿌리는 자는 부지런히 일어나서 씨를 뿌립니다. 여기도 저기도 부지런히 씨를 뿌립니다. 물론 떨어진 씨앗이 다 자라서 결실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땅의 종류가 어떠하든 간에 그 땅은 모두 충분히 밭으로서 기능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씨를 뿌려도 우리가 주님의 복음을 거부하고 마음 문을 닫아 걸고 한번 두고보자 하고 적대적인 자세를 취한다면 결코 우리 마음 밭에 뿌려진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고 자라서 결실하지 못할 겁니다.
뭐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을 하고자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인 여건이 엄연히 존재하고 그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여하에 따라서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로 차이가 나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밭을 기경합시다. 부드럽게 촉촉하게 그리고 풍부하게 영양분을 잘 공급하도록 평소에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행동합시다. 언제 우리의 마음밭에 성령의 씨앗이 뿌려질지 모릅니다. 일단 우리가 준비된 자라면 우리의 마음 밭에 성령의 씨앗이 뿌려질 때 그것이 발아해서 결실해서 놀라운 소출을 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경건의 생활을 하고 항상 기뻐합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것입니다.
아이고 목사님, 모르는 소리 하시네. 세상살이가 쉬운게 아닙니다. 예,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같으면 하나님의 자비를 믿고 사랑의 하나님에게 맡기고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합시다.
그러면 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뿌려진 씨앗이 발아해서 백배의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일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일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마음 밭을 가꿀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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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열심히 하자! 라는 한 줄 요약이 되겠네요. 저는 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어린 시절, 주일 학교에서 정말 귀가 닳을 만큼 자주 듣곤 했습니다. 그런 영향이 남아 있어서인지(?)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 정말 좋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마음이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 하다는 느낌? 땅으로서는 조금 이상한 표현입니다만... 아무튼 부드러운 마음이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사회에 대해서 날카롭고 냉철하게 판단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공감합니다. 안 그러면 정말 사기라도 당해서 힘들어 질 수 있을테니까요. 다만 늘 마음에 따뜻함이 있어서, 사람을 귀중하게 대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하루를 살아갈 수 있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열심히 시간을 보내면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한 주, 일 년을 보내면서 마음이 더 비옥한 옥토로 자라갈 수 있으면, 아 저 사람은 참 괜찮은 기독교인이었구나 라고 사람들에게 회자될 수 있다면, 참 좋지 않을까요.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오늘도 기도하며 노력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의 인생과 시간을 아끼고, 이웃을 힘껏 사랑하기를! / 2016. 12.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