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느부갓네살의 꿈(개정판,다니엘2: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7. 4. 5. 03:55

 

느부갓네살의 꿈(개정판) (다니엘2:1-)

 

우리는 지난 주에 다니엘과 세친구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위해 자기의 목숨도 내어놓고 헌신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네친구들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알아내고 또 해몽하는 부분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가장 극적인 신비이며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실로 성도에게 주는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다니엘과 세친구가 그리고 다니엘이 왕의 꿈을 알아내고 그리고 해몽하는 이 놀라운 신비를 보면서 나를 지금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다시한번 되새기고 또 그 능력에 안도하며 또 든든해 하며 하나님과 이 세상을 함께 하며 승리할 것을 믿습니다.

 

꿈은 우리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신비입니다. 이 꿈으로 우리는 미래의 일을 예지하기도 하고 현실을 자각하며 무의식의 깊은 세계를 관조합니다. 그러므로 꿈은 우리 인간이 영혼을 가진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꿈이 단순히 꿈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에 우리에게 앞날을 예지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선지자 예지자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꿈은 뭔가 현실을 벗어난 신비한 세계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지요.

 

우리는 오래전부터 꿈의 신통력을 믿고 있었고 또 오늘날 많은 이들은 꿈해몽에 특별한 법칙이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에도 꿈을 통한 계시가 여러번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왕의 꿈을 해몽하여 거대한 제국의 총리대신이 된 요셉도 있습니다. 물론 일부는 오늘날에 꿈의 계시성을 부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주의 나심과 알렉산드리아에의 피신도 꿈으로 이루어 진 것이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사렛으로 간 것 역시 꿈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꿈이 가지는 예지성에 대해서 경탄하고 있고 이 꿈을 꾸게 하신 분이 나의 영이 나온 곳, 하나님이며 그 하나님이 여전히 나를 지키고 보호하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든든합니다.

 

오늘 말씀은 느부갓네살의 꿈에 관한 것입니다. 꿈이라!
느부갓네살은 보다 정확하게는 느부갓네살2세를 말합니다. 그는 바벨론의 정복군주로 건축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세계7대 불가사의로 불렸던 ‘바벨론의 공중정원’을 만든 사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가 두라 평지에 자기의 거대한 황금신상을 세우고 여러 민족의 관리들을 모아서 경배하게 한 것을 압니다. 그는 항상 교만하여 인간을 넘어 신이 되고자 했고 그러다가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다시금 겸손을 회복하고 인간 왕으로 만족한 자였습니다.

 

물론 느부갓네살 2세만 신이 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가까이는 태봉의 왕인 궁예가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한 것이나 진나라 시황제가 불노불사의 존재가 되고자 한 것이 일반입니다. 그리고 애굽이나 로마의 왕들은 스스로를 신 또는 신의 화신으로 여겼고 중국의 왕들은 자기를 하늘의 아들 즉 천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왕하고 신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왕이 그만큼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통치했기 때문에 스스로 교만하여져서 신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되려고 한 통치자는 수없이 많습니다. 성경에서도 니므롯이 바벨탑을 쌓고 스스로 신이 되려고 했고 하와 그리고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음으로 신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부갓네살이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왕이 오늘 꿈을 꾸었습니다. 굉장한 꿈이었다는 생각은 드는데 정확하게 자기가 꾼 꿈이 뭔지를 묘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뭐 어쩔 수 없지”라고 그냥 넘어가기에는 그 꿈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잠에서 깨어나 번민하여 다시는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 꿈이 뭔지 그리고 그 꿈이 계시하는 내용이 뭔지를 알고 싶어서 잠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꿈을 해몽하는 일도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리 꿈을 꾸어도 그 꿈을 제대로 해석해 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꿈을 해몽하려고 해도 꿈을 정확하게 묘사활 수 있어야 되겠지요? 사실 많은 꿈은 사람이 잠에서 깨면서 잊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뭔가 굉장한 꿈이었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기억할뿐 구체적인 꿈의 모습은 잊어버릴 경우가 많습니다.

 

느부갓네살 역시 그만 자기가 꾼 꿈의 내용을 잊어버렸습니다. 대략적으로는 기억을 하지만 정확하게 묘사할 수는 없고 그것의 의미는 더더욱 알기 어렵습니다. 그게 굉장한 뭔가를 계시한다는 생각은 들고, 또 그것이 결코 심상치 않다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자기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면 정말 난감합니다.

 

그 누구도 남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그 사람의 꾼 꿈을 재생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셉션’은 예외입니다. 그거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박사와 술객들은 신들 외에는 알아낼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를 알아내서 그 꿈을 해몽하라는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이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입장에서는 너희들이 신과 소통한다고 해서 우리가 너희를 예우하고 먹여 살리는데 이제 그 실력을 보일 때가 되었는데 하지 못한다면 그건 너희가 신통력이 없다는 말과 같으므로 너희 같은 혹세무민하는 무리들은 살려둘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날도 혹세무민하는 많은 사이비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기가 신과 소통하며 신의 명령을 행한다고 말하며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미혹하고 몸과 돈을 갈취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온 사람들을 망가뜨립니다. 이게 오늘날에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여하튼 바벨론의 박사와 술객들은 죽을 지경입니다. 막무가내인 독재자는 무조건 자기의 꿈을 해몽하라고 하면서도 정작 그 꿈의 내용은 말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내 꿈까지 알아내라는 정말 황당한 주장만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왕의 명령을 이행하지 못했다고 모두 사형에 처해질 운명입니다.

 

당시에는 꿈 해석이 현자들의 중요한 역할이었고 꿈을 통해 왕들이나 제사장들에게 계시를 준다고 믿어졌기 때문에 느부갓네살은 자기네들의 신 ‘벨’이 뭔가 중대한 계시를 주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느부갓네살은 소위 말하는 ‘벨’ 신의 제사장들과 무당들 박수와 술객들에게 그 꿈을 정확하게 알아내고 또 그걸 해몽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느부갓네살이 억지를 부린건 아닙니다. 벨신이 뭔가를 계시했다면 벨의 사제들이 벨에게 물어 본다면 당연히 그 꿈의 내용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절에 보면 그걸 이행하기 위해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의 점성가들이 소집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바벨론 왕궁의 신과 연관있는 사람들을 다 불러 모은 겁니다. 점성가들은 별자리를 보고 점을 쳤기 때문에 불려온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은 천문학의 수준이 매우 높았습니다. 다니엘과 세친구 역시 아마 지헤자, 즉 박사나 술사같은 그런 사람들이었을 겁니다. 물론 벨신을 섬기지는 않지만 왕궁에서 그런일을 하기위해 만든 관직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와같이 중동에서는 별의 운행을 보고 점을 치거나 꿈을 해몽하며 왕실의 앞날을 예언하기위해 박사와 술사들이 있었습니다. 일례로 바벨론의 천문학자 ‘나부리만누’ 라는 사람은 별의 운행을 연구해서 지구의 일년이 365일 6시간 15분이란 것을 발견해 내기도 합니다. 고대에는 별자리의 운행이 나라의 중대한 운명과 연관이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에 점쟁이들과 술객들뿐만 아니라 점성가들까지 불러 들인 것입니다.

 

소집된 갈대안 술사들은 왕에게 꿈을 해몽할테니까 왕의 꿈을 자기들에게 이야기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은 대략적인 꿈의 내용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꿈이 뭔지를 알아내라는 억지만 부리고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억지이기는 하지만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자기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왕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뭐 느부갓네살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꿈이 중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것같은데 꿈의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왕이나 신하들이나 모두 답답합니다.

 

꿈의 내용을 말해달라는 술사들과 무조건 꿈의 내용을 알아내고 해몽도 하라는 느부갓네살의 명령은 무려 세차례나 걸쳐 충돌하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이 꿈의 내용이 너무 복잡하고 굉장히 엄중하기 때문에 신의 계시라는 생각으로 소위 신통하다고 하는 이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알아내지 못하면 죽인다고 협박합니다. 어떤 독재자도 이런 식의 일처리는 하지 않았다고 하는 소위 신통하다고 하는 이들의 항의는 가볍게 무시됩니다. “신과 통한다고 하면서 이걸 알지 못하느냐?”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의 집을 거름더미로 만들 것이요”

 

보다 정확하게는 토막을 내서 죽이고 집터는 거시기 더미를 만들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집터를 폐허로 만들어 오물이 쌓여있는 곳으로 즉 공공변소로 만들어 버린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의 이 말은 결코 허풍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아주 잔인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고대 바벨론의 기록에는 제사장이나 술사들을 집단 학살한 기록이 종종 나옵니다. 이런거지요.
신과 소통한다고 주장하면서 “내가 신탁을 받았는데 누구를 왕으로 세워야 된다더라” 이렇게 말하면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왕들을 항상 이들을 가까이 하고 이들의 조언을 듣지만 반대로 이들을 항상 의심하고 통제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가짜입니다. 거짓 우상을 섬기며 혹세무민할 뿐입니다. 신통력이란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섬기는 신이 가짜인데 무슨 신통력이 생깁니까? 신통력이란게 신과 통하는 힘인데 그가 통할 신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이제 가짜 신을 섬기며 혹세무민하던 무리들에게는 일대 위기가 닥쳐옵니다. 없는 신통력이 갑자기 생길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대 전제군주군가라 하더라도 느부갓네살도 인간인데 같은 신을 섬기는 입장에서 너무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신통하다고 해도 어려운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몸을 토막내서 죽이고 또 그 집을 공공변소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반역자에게 해당하는 형벌을 내린다는 것은 너무 심해 보입니다.

 

그런데 ‘밀러’라는 사람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당시 느부갓네살은 그 꿈의 내용을 기억하지만 그 꿈이 가리키는 것을 반역으로 보고 이 반란이 술사들과 제사장들이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꿈을 이야기하라는 것은 어쩌면 반역의 음모를 꾸미는 종교지도자들을 학살하려는 의도라는 것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느부갓네살의 다음 세명의 왕 중에서 두명이 암살되는 정도로 바벨론의 왕들은 반란과 암살의 위협에 쌓여 있습니다. 왕의 권한이 너무 강하기에 역으로 왕을 잡으면 나라를 뒤집어 엎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도가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전제군주국가에서 왕을 죽임으로 정권을 붕괴시키려는 시도는 항상 있어왔는데 바벨론에서는 이런 일이 더 심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신통력이 있는’ 자들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세상에는 왕의 그 일을 보일 자가 한 사람도 없으므로...어떤 크고 권력있는 왕이라도 ...물은 자가 없었나이다”
어떤 사람도 그 일을 행하지 못하고 당연히 그렇게 명령한 왕도 없다고 말하며 왕과 입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왕은 점쟁이들을 더 몰아 세웁니다. “너희들이 신통력이 없구나, 시간만 끌려고 하는걸 내가 모를줄 아느냐, 시끄럽다. 나의 명령은 확고하다”

 

결국 화가 난 느부갓네살은 왕의 앞에 선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를 다 죽이라 명합니다. 왕의 입장에서는 신과 소통하지 못하는 가짜들을 비싼 돈을 들여서 유지할 필요가 없는거지요. 게다가 가짜에게 속았다는 심정이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권력과 부에 탐욕적이라서 항상 반역의 세력에 이용될 수 있으니까.

 

이건 청천벽력입니다. 왜냐면 다니엘과 세친구까지 여기에 연루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과 세친구는 이제 3년간의 교육과정을 다 마치고 신출내기 지혜자로 뭔가 일을 해볼려고 하는 시점인데 엉뚱한 일에 연루되어 무고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합니다.
세상에는 이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전혀 자기하고는 상관없는 정책이나 사건으로 말미암아 전혀 무고하고 엉뚱한 사람이 고생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번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여기에 연루가 되어서 꿈을 채 펼치지도 못하고 죽을 위기에 처합니다.
13절에 “지혜자들은 죽게 되었고”라는 말의 해석은 “그리고 그 지혜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왕의 앞에 불려온 높은 점쟁이들과 점성술사들은 이미 처형되었고 전국적으로 모든 지혜자들을 죽여서 처형할려고 하는 상황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차례대로 처형을 당하고 있는 중이라는 겁니다.

 

실로 풍전등화의 위기인 것 같지만 실제로 이러한 일은 다니엘과 세친구에게는 엄청난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 다니엘과 세친구가 하나님과 소통하는 신통력을 가졌다는 것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 높은 고관들이 죽고 이제 다니엘이 승진할 수 있는 기회, 기회의 장이 열린 것입니다.

 

종교지도자, 술사들은 당시의 왕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권력가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바벨론의 건국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이고 느부갓네살은 자기의 그 기억나지 않는 꿈 때문에 이들이 반란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 가짜 지혜자들은 제대로 된 다니엘과 세친구와 같은 참 신의 종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제 누군가에게 큰 위기는 누군가에게 큰 기회를 줍니다.

 

우리나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툭하면 교회를 세습하는 가짜 주의 종들은 이제 그만 퇴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라면 이러한 잘못된 풍조를 과감히 비판하고 그 교회에서 탈퇴해야 합니다.

누구에게 위기고 누구에게 기회입니까?

 

거짓말로 혹세무민하던 사기꾼 종교인들에게는 위기이지만 참 신과 소통하던 다니엘과 세친구에게는 기회입니다. 거짓으로 권력자의 눈을 가리고 부귀영화를 누리던 자들에게는 위기이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실력을 기르고 있던 이들에게는 기회인 것입니다.
한다하는 점쟁이들과 술사들이 다 죽는 바람에 다니엘은 바벨론 전 지혜자들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바로 이게 기회인 것이지요.

 

높은 사람에게 아부하고 인맥이다 뇌물이다 하는 필요 없이 다니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단번에 정상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를 참으로 섬기며 실력을 구비하고 있는 자에게 반드시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고 때를 기다리십시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지혜이지 신의 지혜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아닙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비빌 언덕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왕의 명령으로 모든 지혜자를 죽이러 근위대장 아리옥이 궁 밖으로 잡으러 나갑니다. 아리옥의 이름은 수메르어로는 ‘달 신의 종’이란 의미가 있고 페르샤어로는 ‘선한 이란사람’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근위대장이란 말은 ‘학살자들의 우두머리’란 의미입니다. 왕의 ‘지혜자 학살’ 명령이 떨어지자 이 명령을 집행하기 위해 아리옥은 군대와 함께 궁 밖으로 나옵니다. 비상 상황입니다. 왕의 명령으로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자의 손에서 다니엘을 구할 자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우리의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이란 뜻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심판자이기 때문에 아리옥이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아리옥에게 어떻게 지혜롭고 슬기롭게 이야기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의 일을 하나님의 종이 아닌 다른 이들을 통해서도 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다니엘이 지혜롭고 슬기로웠기 때문이며 다니엘이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주의 종에게 주께서 위기상황에서 지혜를 주신거지요.

 

다니엘은 자기를 죽이러 온 아리옥을 만나 왜 지혜자를 죽이려 하는지에 대해서 물었고 아리옥의 말을 듣고는 그에게 느부갓네살에게 청해서 형의 집행을 연기해 달라고 청합니다. 자기가 왕의 꿈을 알고 또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아리옥은 다니엘의 청을 받아 들여 그를 죽이지 않고 느부갓네살에게로 데리고 가서 느부갓네살을 만나게 합니다.
여기서 다니엘은 왕과 독대하게 되고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쩌면 아리옥을 만나기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왕과 독대할 기회를 가지기를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내 속에 온갖 재주와 꿈이 있지만 이걸 제대로 알아주는 이가 없고 나를 왕의 앞으로 인도해 주는 이가 없어서 그냥 썩히고 쓸쓸히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땅의 수많은 실업자들도 그런 이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실망하고 좌절해서 스스로를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쌓고 기도하며 기다리십시오. 기회가 옵니다. 주께서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고 매달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확신에 차서 기다리십시오.

 

아리옥은 누군가에게는 위기이며 죽음의 사신이지만 실력을 갖추고 있는 자,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자, 하나님과 더불어 소통하는 자에게는 기회이며 선한 자입니다.
비록 ‘학살자들의 우두머리’이지만 그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에게는 기회이자 출세의 발판입니다. 물론 다니엘이 왕의 꿈을 알아내고 왕의 꿈을 해몽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는 합니다.

 

어때요? 오늘 우리에게 겉으로 보기에는 큰 위기가 닥치는 것 같습니까? 그러나 근심하지 마십시오. 그 위기는 다른 이 에게는 잔인한 학살자로 다가오지만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우리에게는 기회로 다가옵니다. 나를 왕에게로 인도할 징검다리로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이런 큰일이 없었다면 다니엘이 어떻게 그 신분으로 왕과 독대를 하겠으며 왕의 앞에 서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인맥과 학연, 지연이 판치는 세상에서 어떻게 그가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비상한 시기이기 때문에 그에게 차례가 가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왕에게 몇일의 말미를 요청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세친구에게 그 일을 알리고 함께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위기의 순간에 해법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거든요,

 

18절에 보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사...그들로 하여금 구하게 하시니라”

어때요? 기도도 그냥 할 수 있는게 아니네요. 하나님이 이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려고 이들에게 기도하게 하십니다. 기도한다고 다 이루어 지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걸 이기고 더 크고 놀라운 일을 할 힘을 주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뜻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다니엘과 세친구의 합심 기도는 도저히 인간으로는 알 수 없는 은밀한 일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뭐 해주세요 뭐 해주세요 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니엘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여기서 ‘자비’는 어머니가 그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처럼 긍휼히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비록 하나님의 자녀이기는 하지만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를 호소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의 꿈을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보여주셨고 다니엘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나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여”라고 찬양합니다. 과거 위기의 순간마다 나타나셔서 위기를 해결하신 그 하나님, 나의 조상들이 간구할 때마다 나타나셔서 그 간구를 들으신 그 하나님께서 오늘도 변함없이 나에게 나타나셔서 나의 간구를 들으셨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다니엘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늘의 별과 달이나 태양보다 더 높은 곳에 계시는 분이시며 또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주적인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시는 나에게 가까이 계신 분이기도 함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에게 그가 꾼 꿈을 이야기하고 역시 그 꿈을 해석합니다. 그래서 지혜자들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게다가 왕이 그에게 절하며 그가 섬기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듭니다. 천하의 다니엘이 아무리 신통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기회가 없었다면 그도 그저 그런 삶을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시는 분이시며 자기의 사랑하는 자를 결코 잊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만 하면 언젠가는 우리를 들어서 놀랍게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신과 소통한다며 왕의 자문역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고 살던 갈대아의 점쟁이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이 신과 소통하지 못함이 드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온갖 인간의 미사여구로 왕에게 아부하고 왕에게 변명해도 그들이 신통력이 없다는 사실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왕에게 영원히 살라고 아부해도 그 아부가 통하지 않는 순간이 옵니다. 우리가 ‘만세 만세’라고 할 때 만세는 ‘만년간 살아라’는 뜻입니다. 하하. 만년을 살면 그게 인간입니까 신이지.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아부를 하고 그 아부를 받은이는 그게 또 기꺼워서 허허거립니다. 그게 인간의 거짓입니다.

 

그들의 기득권은 맥없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실력이 없는 거짓된 아부와 인맥, 뇌물과 배경은 위기의 순간에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통력, 신과 소통하는 능력, 하늘의 하나님과 통하는 능력을 가지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그에게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방법으로 왕궁의 교육을 이수했지만 더없이 큰 위기를 맞이합니다. 왕의 재위2년째는 다니엘이 3년의 교육을 막 마친 해입니다. 만일 그가 지혜자가 되지 않고 아직 교육을 받는 학생이었다면 아리옥을 만나서 죽을 위기에 처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하기위하여 기도할 기회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기의 실력을 나타낼 기회, 왕의 앞에서 왕의 꿈을 말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실된 종에게 세속의 위기는 곧 기회이며 그를 통하여 그는 자기의 실력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무런 배경도 재물도 없는 약소국 유다의 포로 소년이 출세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이들에게는 비빌 언덕이 없거든요.

 

세상에서 오는 위기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기회이며 출세의 징검다리입니다. 왜냐면 그 모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이가 바로 나의 주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위기의 순간에 합심하여 기도하며 아버지의 자비를 구할 수 있습니다. 위기를 넘어 기회를 잡도록 주가 계획하신 역사에서 우리는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잡는 것입니다.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며 나에게 없던 비빌 언덕도 만들어 줍니다.

 

더 이상 슬퍼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목숨이 아직 남아 있는 한 우리에게는 좌절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할 기도할 힘이 있기에 아직 끝난게 아닙니다.

 

학살자들의 우두머리 아리옥은
달신의 종인 아리옥은
실력이 없고 거짓으로 미혹하며
출세한 자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사신이지만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만이 나의 심판이심을 믿으며
하나님과 교통하며
기도하는 자에게는 다시없는 기회입니다.

 

이 일로 다니엘은 바벨론 모든 지혜자들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왜냐면 다니엘로 말미암아 지혜자들의 목숨이 살아 남았고 그의 신통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지요.
왕의 꿈을 알고 그 꿈을 해몽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비빌 언덕이시며 나의 보호이시며 나의 인도자이십니다. 내가 하나님과 친하고 내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며 하나님 안에 있다면 내가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모든 일을 한다면 우리도 충분히 다니엘과 같은 역사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내 조상의 하나님, 다니엘의 하나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은 지금 나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다니엘같은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


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가끔은 기독교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 C. S. 루이스 같은 사람은 지옥으로 가는 길이 평탄한 길에 안주할 때라고 묘사했을 까요. 곧 고난 주간 인데, 다음 주에 부를 찬송 - 갈보리 산 위에 - 를 보면, 험한 십자가 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렇게 고난과 어려움이 있는 삶이 우리를 성숙 시키고, 발전 시키며,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단 말인가요. 신앙이 뿌리 내려 있는 사람은 어려움이 파도처럼 와도 삶을 쓰러뜨리지 못한다고 말하던 것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합니다.

 

다니엘에게는 생명에 위협이 닥쳐오는 고난과 위기가 딱 그랬습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마치 발판 삼아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고, 매달리고, 기도하고,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나님, 견뎌나갈, 버텨나갈 힘을 주세요."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딸, 사랑하는 아들의 기도를 결코 외면하시지 않으실겁니다.

 

때로는 하루아침에 삶이 기적처럼 변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늘 어떻게 올바르게 살아야 할 지를 고민하며, 열심히 하루하루를 주어진 바 "소중히" 살아갈 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인도 하심을, 보호 하심을 느끼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오늘의 힘듬을 감사하며 살아가네요. / 2017. 04.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