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다(사도행전8:9-24)/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7. 3. 23. 03:12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다 (사도행전8:9-24)

 

오늘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돈으로 사려고 한 한 철없는 사람에 관해서 살펴봅니다. 그리고 복음이 어떻게 세상으로 널리 전파되었는지를 살펴봅니다. 세계로의 복음전파는 아주 특이한 계기로 일어납니다. 대박해, 그리스도인에 대한 대박해로 말미암아 복음이 세계화가 됩니다.

 

보다 더 정확히는 우리들이 알다시피 스데반의 순교와 그 순교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대박해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때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을 제외하고 모두 다른 지역으로 피신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 각자 피한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가만히 몸을 숨기고 은신해 있었던 게 아니라 흩어진 지역에서 각자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다른 지역은 유대인들이 거의 없는 곳이고 이방인들이 사는 곳이므로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직 박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참고로 베드로의 생전에 로마에 의한 대박해가 있습니다. 아직 그 정도로 기독교가 커진 건 아니기에 광범위한 대박해는 없고 유대일원에서만 박해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유대의 기독교인들이 흩어진 곳에서 복음전파가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서도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단순히 복음을 말로 전하는 것뿐만 아니라 표적을 행함으로 복음을 전파합니다. 사실 말로만 복음을 전하는 것만큼 설득력이 떨어지는 일도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다면 올바른 행실이라도 있어야 됩니다.

 

7절에 보면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빌립은 단지 말로만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표적을 행함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했다는 겁니다.

 

특히 귀신을 쫓아내고 중풍병자와 걷지 못하는 자를 걷게 하는 이적을 행했고 이로 말미암아 사마리아의 사람들 중에서 큰 기쁨이 있게 되었답니다. 당연합니다. 의사도 병원도 백약이 무효인 질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니 그 당사자들과 가족들이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그리고 여기서의 기쁨은 영혼이 구원받은 것에 대한 기쁨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하는 일이 바로 이런것입니다. 즉 빌립의 활동으로 사마리아의 한 성에 교회가 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세우기위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엄청난 이적이 나타났다는말입니다.

 

자, 복음은 항상 이와 같습니다. 말하는 것으로만 복음이 증거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쉽게 열지 않고 복음에 대해서 배타적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보면 목사와 복음 배척이 마치 자기의 사명인 것처럼 입에 거품을 물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건 복음이 합리적이냐 아니냐에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예수가 싫을 뿐.

 

만일 교회와 목사가 좋은 일을 했다는 기사가 나온다면 그들은 부러 그 기사를 외면합니다. 뭐 욕을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비상한 이적이 동반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좋은 삶과 사랑으로 저들의 비난을 이긴다고요? 이길 때까지 기독교인들은 얼마나 힘들겠나요? 그런데 아무도 폄하할 수 없는 이적이 일어난다면 적어도 그 이적의 수혜자는 주를 믿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적이 일어난다고 해서 주를 믿거나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는 말도 하는데 물론 그런 이들도 있기는 합니다. 저도 그런 이들을 몇 명이나 알고 있습니다.

 

딸에게서 귀신이 나가면 하나님을 믿겠다고 해놓고 기도함으로 막상 귀신이 나가니까 언제 그랫더냐는 듯이 핑계만 대고 교회가는 걸 피하던 한 사람을 아는데 그의 나중은 어찌될지 안봐도 뻔합니다. 그때는 돌이킬 수 없을터인데도 사람들은 당장 교회가기 싫다는 생각만으로 거짓을 일삼는 겁니다. 세상사람들은 그 정도로 하나님을 믿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런 예외적인 상황은 배제하고 일반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복음이 기적으로 말미암아 더 힘을 얻고 잘 퍼져나가게 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평소에는 기고만장하다가 불가능한 일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신을 찾습니다. 비로소 겸손해 집니다. 비로소 남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때 불가능한 가운데 빛을 절망가운데 소망을 주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이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있다가 불가능한 그래서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는 일이 생기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박해가 일어나서 예루살렘 교회가 흩어지고 사도들과 집사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비상한 일을 이루시기위해 사마리아로 간 빌립을 사용하여 성령의 역사를 맛보이셨습니다. 빌립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소개하고 그를 믿도록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사마리아 사람들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매우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의를 얻었습니다. 사실 사마리아인들도 모세오경을 믿고 있었고 현세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말로만 하는게 아니라 기적까지 나타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그를 칭송하며 그로 하여금 이적을 가능케 한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게 된 것입니다.

 

사실 축사와 치유의 이적은 사마리아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이적들은 이전에 주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도 늘상 일어났던 그런 이적입니다. 다만 이제는 유대와 이스라엘 공동체를 넘어서서 사마리아까지 그런 이적이 나타난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이렇게 되어 가는 가운데 사마리아에 시몬이라는 자가 있었답니다. 여기 사마리아 성은 사마리아 지역의 수도인 사마리아 성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그 당시 사마리아성은 없어 졌고 새롭게 그 터에 헤롯이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딴 ‘세바스테’란 도시를 건설했기에 본문에서 사마리아 성이라고 부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빌립이 간 곳은 사마리아 지역의 한 성읍이었을 것입니다.

 

시몬은 빌립이 오기 전부터 사마리아에 있었는데 자칭 마술사입니다. 그래서 마술로 백성들을 놀라게 했고 스스로 큰 자라고 주장했습니다. 단순한 눈속임의 마술이 아닌 보다 고차원적인 뭔가 있는 그런 마술이었나 봅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시몬을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며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랐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에둘러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적 존재로 시몬이 군림했다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시몬의 직업이 마술사라고 했는데 이는 다른 말로 박사라고도 표현됩니다. 동방박사와 마술사 시몬은 원문에서는 같은 ‘마고’로 표현됩니다. 마술사가 이상하면 마법사라고 합시다. 시몬은 마법을 이용하여 사마리아에서 신적인 존재로 추앙을 받고 있었는데 빌립이 이제 기적을 행하는 것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그를 따르는 이가 많아 졌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시몬에게는 빌립이 자기의 혹세무민사업에 방해가 되는 셈입니다.

 

시몬은 오랜 세월동안 마술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따르게 했는데 빌립은 진짜로 이적을 행하여 사람들이 따르며 세례를 받기 시작합니다. 귀신이 쫓겨나가고 걷지 못하는 자가 걷게 되고 하는 일은 눈속임이나 마술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빌립의 기적에 매료된 이들은 이제 빌립을 따르며 따르는 표로 세례를 받습니다. 시몬도 그 기적에 매료되어서 빌립에게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시몬도 빌립을 전심으로 따르게 된 것입니다.

 

시몬은 세례라고 하는 의식에 어떤 이적을 행하는 힘이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을뿐만 아니라 전심으로 그를 따랐다고 합니다. 자, 이렇게까지만 끝났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용한 무당의 개종기’ 정도로 이 이야기가 끝이 났을 겁니다. 그러나 시몬의 이야기는 뒤에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그리고 조금씩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비슷한 길로 가는 것 같다가 나중에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이단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렇게 ‘이단’이 되는 겁니다.

 

이제부터 이 설교의 가장 큰 주제가 나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사마리아에 간 빌립이 전도에 큰 성공을 거두었고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믿음을 더 굳게 하기 위해서 사도들 중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했습니다. 아마 당시 사도들 중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가장 비중이 있는 자들이었던 모양입니다. 뭐 비중이라는 말이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두 사도라고 합시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에 가서 무엇을 합니까?
어떤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성령받기를 기도하니” 왜냐면 성령이 임하시면 그 기적이 일어나니까요. 당연히 성령받기를 위해서 먼저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는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기독교는 이성과 논리의 종교가 아니라 체험의 종교이며 그 체험을 가능케 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막상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의 선교현장에 가보니 이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고 하나님의 도를 따르는 것은 확실한데 아무도 성령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사마리아의 신자들이 성령받기를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이 말은 뭐니 뭐니 해도 교회의 꽃이 바로 ‘성령받음’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다면 신앙생활이 너무나 건조하고 어쩌면 힘들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가 오래간다면 나중에는 신앙생활이 싫어지고 불만이 쌓이다가 결국은 세상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매 주일 오전, 그 황금같은 시간을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게다가 자기 수입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돈이 썩어 난다고 해도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입니다. 시간과 돈의 십일조를 주를 위해 바치는데 아무런 특혜도 없고 기쁨도 없고 의무만 있다면 누가 그걸 하려고 할까요? 아무리 강력한 신앙으로 무장하고 그런 삶을 스스로에게 강요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불만이 쌓이게 마련입니다.

 

주께서 나를 구원한 은혜에 감격해서 그렇게 한다고요? 농담이시죠? 인간은 절대로 은혜를 그렇게나 오랫도록 기억하고 은혜를 감사하며 갚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배은망덕의 존재이며 망각의 존재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이득이 없는 신앙생활은 정말 힘들겁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가진 돈을 다 써도 모자랄 정도로 적은 돈을 법니다. 각자의 생활에서 10%가 가지는 것은 결코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어지간한 신앙의 힘이 아니고는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게다가 뭐니 뭐니 하면서 각종 행사에 동원되고 집회에 참석해야 하고 체면치례도 해야하고 하고 싶은 것, 재미있고 쾌락을 주는 것, 이득이 될 것들을 삼가야 합니다.

 

뿐입니까? 요즘 일당이 얼만데 시급이 얼만데 무보수로 식당 봉사니 차량봉사니 또 주일학교 교사니 성가대원이니 이런 일을 하면서 몽땅 무보수에 잘못한다고 잔소리까지 듣습니다. 웬만해서는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적당히 적당히 주위의 눈을 속이고 재미를 볼 수 있음에도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보시기에 그걸 하기가 어렵습니다. 음 예는 생략합시다. 여러분이 곰곰이 생각하면 다 아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더 재미없는 담백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강림이야말로 그 담백하고 재미없고 어쩌면 힘들기까지한 신앙생활을 즐겁고 재미있게 할 수 있는 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기독교 신앙생활의 백미인 성령을 받지 않은 것을 보고는 베드로와 요한이 이들이 성령을 받로록 위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그래요, 그래서 저는 우리 성도들이 성령을 받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위하여 나의 필요와 쾌락을 절제하고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더 기쁘고 보람있게 여겨질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다면 세상에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부러울까요?

 

어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재미있으려고 교회 다니는 것은 아니다’ 예,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몸소 체험한다면 교회 다니고 사람들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기도로 풀고 하는 과정이 너무 너무 재미있고 보람차고 그리고 기쁠 수 있습니다.

 

막 암이 걸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치유 받고 귀신이 쫓겨나가며 불치병에 걸린 이들이 기적을 맛보는 이런 일들, 미래의 일을 예언하고 사람들을 올라보 인도해서 절망에서 건져내고...게다가 주를 믿지 않는 이들의 영혼이 지옥에 갈 걸 생각하면 안타깝고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그들도 함께 주를 믿게 하려고 노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하는 이들이 성령을 받는 것을 시몬이 보았습니다. 신기합니다. 자기만 성령의 역사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누구에게 안수했는데 그도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는 자기도 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서 돈을 드리면서 말합니다.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시몬은 몰라서 그랬을 것입니다. 성령님은 누가 가라고 한다고 가고 오라고 한다고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고 그의 마음대로 오기도 가기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절대자이며 주권자이시기에 누구의 안수기도로 성령이 임하는 능력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성령을 오해하고 그분을 모욕하는 행동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지요? 성령을 거스리는 죄는 결코 사함을 얻지 못한다고.

 

그런데도 시몬이 돈을 드리면서까지 청한 것은 성령이 그만큼 굉장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마법사인 자기가 행하는 것보다 더 놀랍고 큰 일을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돈을 드리면서 청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 성령을 받은 이들이 행한 가시적인 능력은 방언과 예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자 병자들이 나음을 입는 것을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몬이 ‘보았다’는 말에서 우리는 그의 탐심을 볼 수 있습니다. 정욕의 눈으로 성령의 은사가 행해지는 놀라운 광경을 보고 나도 그것을 갖고 싶다는 탐욕이 생겼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기도하면 좋았을 것을 그는 돈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책망 받고 저주 받은겁니다.

 

아마 시몬에게 누가 알게 해 주는 이가 없었던 듯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돈을 가지고 그 능력을 사려고 한 것을 보면.

 

시몬은 이런 말을 베드로에게 했다가 크게 책망을 받고는 두려워서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했다고 합니다. 시몬의 기사는 여기서 끝이 나고 그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초대교회의 전승에 시몬이란 이름의 어떤 한 사람이 복음 사역을 교묘하게 방해했다고 하고 이단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가 바로 이 시몬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모르게 둔 채로 끝을 냅시다. 그 이후로부터 ‘시모니’라고 하면 성직을 돈으로 사는 행위를 말했다고 합니다. 성직매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사실 이것과 좀 다릅니다. 성직을 매매하는 것이 아니라 ‘안수하면 안수받은 이가 성령을 받는 능력’을 사고 싶었던 것이지요. 세상에 이런 능력을 돈을 받고 판다면 얼마나 굉장할까요?

우리에게는 정말 다행스럽게도 성령의 능력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걸 만일 돈으로 사고 팔고 할 수 있었다면 저는 아마 재벌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아직도 세상적인 시각으로는 가난한 목회자일 따름입니다. 저 스스로는 크게 부족함을 느끼지는 않지만 때로 누구는 가난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목회자의 청빈은 자랑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의 부요함이 오히려 욕됨입니다. 목회자의 부는 그도 욕되고 그가 나타내는 주님의 이름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의 종에게 충분한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너무 안달복달할 필요가 없겠지요.

 

베드로도 요한도 돈에 전혀 좌우되는 인물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돈으로도 조종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세상이 그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가진 것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성령의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는 세상을 만드시고 세상을 움직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므로 인간이 가진 조그마한 것들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성령을 움직인다고 표현하면 좀 이상하지만 그분에게 그래도 어필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분에 대한 간절한 믿음과 간구의 기도만이 성령님에게 닿을 수 있게 만들 것입니다. 또한 성령은 더러운 곳에는 결코 임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임하기를 원한다면 재물을 준비할 것이 아니라 깨끗한 마음과 강렬한 믿음 그리고 간절한 기도가 필요할 것입니다.

 

오랫동안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신적 존재로 숭배 받아온 시몬 조차도 성령의 은사가 너무 좋아 보였다는 걸 보세요. 성령 받은 성도들이 볼 때 세상이 초개같이 여겨지는 것도 다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성령의 은사는 너무 너무 굉장하고 너무 너무 크고 좋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강림으로 성장하고 부흥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선고는 준엄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 지니라”

 

요즘 성직을 돈으로 살려고 하는 자가 있을까요? 뭐 없을 걸로 믿습니다. 다만 장로나 권사 집사 투표할 때 사람들에게 선물이나 향응을 베풀고 하는 일은 있을 겁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꼭  그걸 받은 자들이 표를 찍어 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아마 영향은 좀 미칠 걸로 보입니다만 그래도 그걸 가지고 성직매매라고 하기는 좀 그렇네요.

 

저는 자랄 때 절대로 이런 투표전에 향응을 베풀거나 금품을 살포하는 등의 선거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교육받았는데 아마 아직도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이런 규칙을 지킬겁니다. 물론 저의 동료 목사님들 가운데는 선거전에 금품살포나 향을제공같은 그런 행위도 성직매매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담임목사 자리를 매매하는 행위입니다. 제가 들은 이야긴데 서울의 중형교회인 모 교회에서는 최종적으로 담임목사후보가 된 이에게 돈 3억을 내라고 했답니다. “어차피 개척하려면 돈이 들지 않냐? 그리고 그걸로 어떻게 교인을 모을 수 있느냐. 그러니 차라리 기반이 잡힌 교회에서 담임을 하는데 돈 3억이면 싸게 먹힌다”

 

말이야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건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동이며 그리스도를 파는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갈가리 찢어서 욕되게 하는 망령된 행실입니다. 왜냐면 교회는 우리의 것이 아니고 누구의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암암리에 널리 퍼져 있답니다. 정말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해서도 안되고 여기에 동조해서도 안 됩니다. 묵인하는 것도 안 됩니다. 그런 교회가 있다면 뛰쳐나오는 것이 자신과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지 않게 하는 일입니다.

 

옛날 조선시대에 세도가에게 뇌물을 바쳐 고을의 원이 된 이들은 그 돈을 백성들에게 도로 뽑아내기위해 각종 비공식적인 세금을 징수하고 부자들에게 트집을 잡아서 재산을 빼앗았는데 오만냥에 사또자리를 샀다면 그는 십만냥을 뽑아 냅니다. 왜냐고요? 이미 뇌물로 준 오만냥에 더해서 다음 벼슬자리를 위한 뇌물로 오만냥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여하튼 매관매직은 조선을 망하게 하는 아주 큰 악습이었는데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목사가 본전이 생각나서 그 돈을 뜯으려고 한다면 돈있는 교인들을 우대하고 교회의 각종 공사에 수의 계약으로 리베이트를 먹고 물건을 살 때 뇌물을 받게 된다면 그 교회가 온전하겠습니까? 또 세상은 얼마나 교회를 우습게 보겠으며 하나님은 얼마나 웃음거리가 될까요? 건전하지 못한 자녀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게 된다면 하나님의 징계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은이 있다고 해서 교회에서 대우 받으려는 생각 역시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돈이 필요 없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에도 돈이 많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 돈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자랑하고 대접받고 사치하라고 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재물은 하나님의 것으로 그가 우리에게 잘 사용하라고 위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재물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입니다. 언제든지 주인이 정산하라고 하면 손을 떼고 내어놓아야 하는 덧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가진 이는 그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일 그 재물을 가지고 자기만을 위하여 사치하고 정욕대로 사용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할 때에 회계하시고 그에게서 재물을 빼앗을 뿐 아니라 징계의 채찍도 휘두르실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를 경원시하며 미워했고 교류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성령의 역사로 깨어진 것입니다. 물론 주님이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신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이 성령의 역사는 단순히 일부의 사람을 복음 안으로 초청하는 정도가 아니라 헤어진 옛 이스라엘 공동체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마 오순절 성령의 역사와 똑 같은 역사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래요, 성령은 공동체를 재건하는 능력을 행하십니다.

 

성령은 인간적인 모든 생각과 고려를 뛰어넘어서 역사하십니다. 오랫동안 스스로 신적 존재를 자처하며 사람들의 숭배를 받아온 자가 보기에도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매력적인 것이었습니다.
돈에 목매는 물질만능 주의자인 시몬도 겁을 낼 정도로 성령받은 이의 역사는 굉장합니다.
성령은 만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성령이 임하시도록 기도하고 주의 성령이 임하시도록 깨끗함을 회복하고 주의 성령이 임하시도록 행동합시다.

 

우리 교회에 그 옛날 사마리아에 임하셨던 그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모두 성령의 은사를 충만히 받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 충만한 자가 된다면 우리교회는 저절로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될 것이며 공동체가 살찌며 자연적으로 그 공동체에 속한 내가 살찌고 그리고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려움이 마구마구 계속해서 닥칩니까? 목사는 기도할 것입니다. 직분자는 기도할 것입니다. 그래도 교회의 어려움이 그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돌아보아 하나님의 분노를 촉발한 것이 있는 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게 없는데도 불행한 일이 계속된다면 혹여 공동체의 구성원 중에 하나님께 책망받을 일을 하는 이가 있는지를 살필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사람이 절대로 없다? 그렇다면 기존에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겸비하며 엎드려 하나님의 진노가 그칠 때까지 기다릴 일입니다. 머지 않아 새로운 날이 오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임하며 성령의 위로가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저절로 열려질 것입니다.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능력이여 임하시옵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하늘의 놀라운 기쁨을 맛보게 하시고 고난에 처한 나에게 오셔서 위로하소서. 아멘 아멘 내주의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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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어휴, 깜짝 놀랐네요. 담임교회 자리가 매매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매우 충격적 입니다. 그렇다면 왜 목사님은 이런 적나라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가 깨끗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즐거운 것이 많습니다. 얼마든지 담배를 즐기고, 음주를 가까이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과 이별하고, 돈을 모아서 하나님께 우선하는 - 가령 십일조 같은 약간은 금욕의 삶을 사는 것, 그런 담백한 삶, 맑은 삶이 주는 선물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한다는 거지요.

 

저는 절대로 흡연자, 음주자를 비난하려는 건 아닙니다. 제가 별로 깨끗한 사람 아니거든요. 담배 끊기 아주 아주 어렵습니다. 사람이 하루 아침에 변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에, 한 번 술맛을 보면, 소주 한 잔의 깔끔함, 맥주 한 캔의 풍부함이 얼마나 짜릿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꼭 그런 길만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도 안 됩니다. 영화광인 저는 이다 라는 수녀가 나오는 영화를 봤는데, 담배와 술 같은 즐거움을 경험하고서도, 나는 그 길로 가지 않을테야 라고 말 없이 결단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자신의 옷을 단정히 입는 거지요. 우리가 어떤 태도, 어떤 길로 걸을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그 결단이 우리의 미래를 바꿀 수 있으니까요. 금연, 금주, 공익광고를 쓰려는 건 아닙니다. 하하.

 

살아오고 나니 흔적이 남더라고요. 한 번 잘못된 선택을 하면, 그 다음은 습관이 되고, 아무렇지도 않게 되고... 가진 것은 나를 위해 쓰는 게 당연하게 여기게 되고, 벌면 벌수록 가난해 지는 지름이 또 찾아오고... 그런 삶에 스톱을 외치고, 소중한 경험을 위해서 살겠노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게임 수집할 돈을 NO라고 한 번을 참아보고, 대신 돈을 차곡차곡 모아보고, 그 대신 영화감상으로 행복을 찾고... 삶은 얼마든지 무지개처럼 다양한 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답은 없지만, 나만을 위한 소유의 바벨탑 대신에, 내가 진짜 살아보고 싶었던 길이 무엇인가를 고민해 보니까 참 좋았습니다. 늘 우리의 소중한 시간과 꿈들을 응원하겠습니다. / 2017. 03.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