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우리에겐 아직 사명이 있습니다(출애굽기4:27-)/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7. 3. 10. 03:18

 

우리에겐 아직 사명이 있습니다 (출애굽기4:27-)

 

우리네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수명은 그래서 80에서 90정도에 그칩니다. 원래 인간의 수명은 120년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사실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120세를 제대로 살지 못합니다. 동의보감에서도 인간의 수명은 120년으로 가정합니다. 조선시대에 120세를 산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거의 신선입니다. 즉 대부분은 100년 근처에도 못가보고 죽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조선시대 평균수명이 40몇년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옛날 우리네 조상들은 한때 거의 천년 가까이씩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복잡해 지면서 점 점 우리는 수명이 줄어 들었습니다.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굶어 죽거나 전쟁터에서 또는 짐승들에게 맞아 죽거나 물려 죽거나 의사와 약이 없어서 병들어 죽거나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사람들은 막 막 죽었고 인간의 수명은 계속해서 줄어 들었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남은 것이 120년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걸 제대로 채우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명이 이렇게 줄어 들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를 더 암울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주어진 수명만큼 건강하게 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 옛날 모세는 죽기 직전까지 눈이 멀지 않고 귀가 어둡지 않고 머리도 새지 않고 정력이 왕성한 그런 이였습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전체적으로 건강하게 되어서 노인의 연령을 65세에서 70세로 늦추어야 된다는 말도 많지만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각종 장기들이나 치아, 눈, 그리고 머리카락까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사들만 살판이 났습니다. 자꾸 고쳐서 사용해야 하니까.

 

교회에서는 70세를 은퇴시기로 잡습니다.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70이 넘어가면 은퇴를 하고 현직에서 손을 뗍니다. 세상의 은퇴는 더 빠릅니다. 회사는 극악합니다. 40대에 벌써 은퇴를 시키려고 난립니다. 우리는 엊그제 소년이었는데 이제 어느새 머리가 희어지고 이빨이 부실해서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하고 장기가 힘들어서 소화가 안되고 피로가 잘 안풀리고 연골이 닳아서 걷기가 힘이 들고  피부는 쭈글쭈글해 지고 기력은 쇠하고 눈은 침침합니다.

 

아직 하나님이 주신 수명은 수십년도 더 남았는데 우리네 몸은 벌써 고장이 너무 많습니다. 잔병치례가 심합니다. 그런데 뒤돌아 보면 딱히 이룬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아쉽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우리네 삶은 절대로 끝난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더하셔서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같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에게는 아직도 해야할 사명이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인생이 그냥 끝난게 아닙니다. 이승만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은 다 70이 넘어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은퇴했다고 해서 결코 인생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직 시작도 안한거지요.

 

오늘 본문의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40세에 애굽의 왕자로 있을 때 히브리민족을 해방시키려는 원대한 꿈을 품었지만 실패하고 왕자의 자리에서 쫓겨나 미디안 광야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지 벌써 40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힘도 약해지고 히브리족의 해방이라는 꿈도 희미해져 갑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기도를 외면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정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던 80세 노인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요, 모세는 무려 40년만에 자기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자기가 비록 평소에 꿈꾸었던 일을 하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지만 기쁘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는 주저하며 변명하고 나아가 회피합니다. 이제는 그가 40년 전과는 달리 나이가 많아 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하나님도 너무 하셨지. 어떻게 40년 동안이나 그 꿈을 이루어 주시지 않을 수가 있지요? 그래서 모세는 이제는 꿈도 희망도 모두 포기했습니다. 매일 매일 그는 양을 치는 단조로운 일상을 보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지극히 무능한 생활인입니다. 그는 아직 자기의 양떼조차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장인의 양을 친지 20년만에 장인이자 외삼촌의 재산보다 더 많은 재산을 만든 것하고 비교하면 초라합니다. 겉보리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를 하지 않는다는 속담도 있는데 이 사람은 지금 40년째 처가살이를 하고 있네요.

 

그런데 아무리 재주가 없어도 40년을 장인의 양을 쳤다면 그도 역시 자기 소유의 양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지금 장인의 양을 치고 있지 자기의 양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왜 그럴까요? 그가 진정으로 무능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가 너무 게을러서 아니면 낭비벽이 심해서 재산을 모으지 못했나요? 아니면 흔히 하는 말로 사회구조가 좋지 못해서 미디안족이 아닌 사람은 양을 소유할 수 없어서 그렇습니까?

 

그것은 모세가 언젠가는 미디안을 떠나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자기의 모든 꿈을 포기하고 그냥 묵묵히 장인의 양을 치는 목자로 만족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속은 아직도 그 옛날 가졌던 열정들, 꿈들이 숨쉬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은 비록 노인의 몸이지만 우리가 가진 꿈과 열정은 아직 한창 때와 같습니다. 나에겐, 우리에겐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꿈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아직도 쓸만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지 않고 핑계하며 주저하는 듯한 모습을 우리가 봅니다. 그거요 한번 투정 부려본 겁니다. ‘하나님 왜 이제야 찾아 오셨습니까?’ 하는 투정의 표현입니다. 뭐 옛날에는 모세가 언변이 유창했습니까? 아니지요. 그 옛날 40년 전에도 그는 말이 어눌했습니다. 그래서 말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은 그냥 핑계입니다. 섭섭함의 표시이고 소심한 반항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투정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을 그렇게나 원하다가도 막상 오랜 세월이 지나서 어느날 문득 하나님이 ‘그 기도 내가 들어주까?’ 이렇게 물으신다면 투정이 나옵니다.
‘좀 빨리 빨리 들어 주시면 안됩니까?’ ‘우리는 당신과 달라서 유한한 존재인데 아버지여 저에게 너무 시간이 없네요. 조금만 일찍 찾아 오셔서 사명을 주셨다면 제가 얼마나 젊고 건강한 몸으로 잘 할 수 있었을까요’ ‘제가 예전에 부자로 있을 때 명령을 주셨다면 제가 그 재물을 가지고 당신의 일을 할 수 있었을 터인데요’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전혀 다른 계획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는 계획과는 전혀 다른 로드맵을 마련하고 가장 나에게 좋은 맞춤형의 일감을 주시기 위해 때가 차기까지 그리 오래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놀고 계신게 아닙니다. 나를 잊고 계신게 아닙니다. 그는 항상 나를 마음에 두시고 나에게 가장 좋은 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아직 때가 오지 않았다면 이제 비로소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를 향한 그 계획을 기쁨으로 궁금해 하고 기다려도 됩니다. 너무 설레지 않습니까? 그가 나를 향하여 어떤 꿈을 가지고 계신지.

 

오늘 본문에서 모세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이 기쁘면서도 한편 서운합니다. 그래서 핑계합니다. 하나님의 제안을 덥썩 받아 들이기가 심술이 나서 한번 해본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그가 핑계하는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시고 그에게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한 완벽한 조건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게도 열렬히 원했을 때는 꿈쩍도 않으신 하나님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때에 오셔서 자기의 일을 이루려 하십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때, 이미 늦었다고 생각할 때 그가 오셔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너무 늦다는건 없습니다. 우리가 아직 죽기 전이라면 충분히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소명에 응한 모세는 40년간의 망명생활을 뒤로하고 고통 받는 동족들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오늘 그 일이 일어난 무대는 ‘하나님의 산’입니다.

여기에 보시면 모세는 시내산을 하나님의 산이라고 부릅니다. 그건 모세가 본서를 기록하면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기억이 너무 강하므로 시내산을 ‘하나님의 산’으로 부른 것입니다. 성경의 선지자들도 이 하나님의 산에서 놀라운 이적을 체험했습니다.

 

저에게도 이런 하나님과 만난 기적적인 장소들이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 곳을 일러 ‘영암’이라 했습니다. 영적인 바위, 이곳은 도봉산에 있습니다. 도봉산 초입에서 바위계곡을 따라 가다보면 무당들이 굿을 하던 귀신굴이 있고 그 옆으로 바위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절 앞에 높이 솟은 바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위에 소나무하고 다른 나무가 한그루씩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을 체험했습니다. 청년들은 그 옆의 바위들에서 놀라운 신비를 체험했지요. 그래서 저희들은 그 곳을 ‘영암’이라 부르며 결코 잊지 못합니다. 모세에게 시내산은 바로 그런 산이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일생동안 그에게 시내산은 하나님의 산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저에게도 도봉산 영암은 일생토록 하나님의 산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일생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난 장소가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가고픈 그런 곳, 하나님과 만나서 놀라운 신비를 체험한 그런 곳이 있다면 우리네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그가 산위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지만 그랬다고 해도 모든 일들이 즉각적으로 이루어 지기는 어렵습니다.

 

저도 도봉산 영암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고도 집에 와서 하나님이 부과하신 시험에 통과하고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했던 것처럼 산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 자체로는 자동적으로 지도자가 되지 않습니다. 이백만의 백성들을 구원해 내기 위해서 그는 적어도 이백만의 동족들을 대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족들이 자기의 말을 따르고 모세의 권위를 인정해야 비로소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애굽의 바로가 그를 이스라엘의 대표로 인정하고 협상 상대자로서 여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가서 자기가 자기 입으로 내가 하나님을 시내산에서 만났고 그가 나에게 하나님 자신을 대신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살이하는 애굽에서 끌어 내어 가나안에 새로운 나라를 세울 대리자로 삼아 주셨다고 외친다고 해도 아무도 그 말을 보증해 주지 못합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노예 종족이기는 하지만 이백만이나 되는 거대한 무리의 지도자 자리는 나름 매력이 있습니다. 요즘말로 쉽게 이야기하면 식민지의 대표자가 되어서 식민 본국과 교섭하는 자리입니다.

 

대표권이 없는 자와 본국이 협상을 하려고 할까요? 당연히 안하지요. 권위를 가지지 못한 자를 동포들이 인정할까요? 거의 생전 처음 보는 자의 말을 듣고 믿을까요? 미디안에서 건너온 목자의 이야기를 누가 들을까요? 추방당한 왕자의 말을 누가 따를까요? 게다가 그는 애굽의 왕자였지 이스라엘의 왕자가 아니었는데요. 그것도 무려 40년전의. 당연히 안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어떻게 이루어 내셨을까요?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지도자로 세우기위해 그를 위하여 한사람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로 가셔서 모세를 맞으러 광야로 가라고 명하셨고 마침내 오랜 시간 광야를 지나서 하나님의 산에 이르러 모세를 만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고 마침내 일국의 대통령이 되는 자도 처음은 한사람의 열성적인 지지자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가장 충성되고 마음이 잘맞는 한 사람으로부터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는 우리의 지도자로 적합한 하늘이 낸 사람이다. 그는 시내산에서 무려 40년간이나 도를 닦은 신통한 선지자로 하나님을 만나서 우리를 구원하라는 사명을 받고 온 애굽의 전 왕자다” 뭐 이런 식의 소개를 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하나님의 산에서 두 사람이 만나고 서로 인사가 끝나자 마자 모세는 바로 아론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이적을 고합니다. 그것도 적당히 숨길 것은 숨기고 약점은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알린게 아니라 다 고했답니다. 지도자가 되려면 대중에게 거리를 두고 적당히 신비주의 전략으로 나가야 된다는 사람은 보통 사기꾼일 확률이 높습니다. 절대로 그런 사람들에게 속아서는 안됩니다.

 

모세는 지금 마음이 급하고 하나님의 이적에 흥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80년 만에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났고 40년의 목자생활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40년 전에 그가 그렇게나 원했지만 결국 하지 못했던 일을 이제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찾아서 광야를 건너 시내반도를 통과해서 하나님의 산까지 자기를 만나러 온 아론은 사사롭게는 자기의 형이었고 공적으로는 자기의 대변인이 될 자입니다. 그런 아론에게 모세는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고 그가 자기에게 뭐라고 말씀하셨고 어떤 이적을 보이셨으며 우리의 사명이 뭔가에 대해 남김없이 말한 것입니다.

 

지도자는 자기의 꿈을 대중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스스로를 약간 신비하게 포장합니다. 사람들이 웃고 넘길 가벼운 잘못이나 약점은 과감하게 공개하지만 진짜로 사람들이 싫어할 약점이나 과오는 결코 공개하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언제 한방에 훅 갈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모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자기와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형 아론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합니다.

 

27절에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 는 말을 봅시다. 하나님은 80세가 될 때까지 장인의 양을 치고 있던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애굽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갑자기 40년 전의 꿈을 이룰 기회가 찾아왔지만 모세는 이미 젊은 날의 패기가 다 사라졌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자기가 애굽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수 없는 이유를 대기 시작합니다.

 

‘말을 잘 못한다. 혀가 뻣뻣하다. 나는 보낼만한 사람이 아니다’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핑계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시고는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아론에게 나타나셔서 모세를 맞이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말 잘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14절)라는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아론에게 모세를 맞으러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이미 하나님의 일은 모세가 알지 못한 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한탄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던 그 시간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 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론이 애굽의 고센에서 시내반도 남쪽 끝에 있는 시내산까지 오기까지는 적어도 40일 이상이 걸립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하나님이 가시나무 불꽃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시기 40일 전에 하나님은 미리 아론에게 나타나셔서 모세를 맞으러 출발하도록 하신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기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동시에 양쪽에서 역사하십니다.

 

이런 일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처녀 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총각이 보니까 처녀가 참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너무 처녀를 골똘히 사모하다 보니 그만 하나님이 자기에게 그 처녀와 결혼하라고 하신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처녀에게 하나님이 나와 당신이 결혼하기를 원하신다고 말하고는 기도해 보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처녀는 그 총각에게 전혀 마음이 없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 총각을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도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그 총각은 내 배필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 총각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그 총각은 아예 처녀가 살고 있는 3층 여자 기숙사 방밑에 자리를 펴고는 자기와 결혼해야 한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처녀는 동료들의 보호 속에 있게 되었고 수업도 갈 수 없었습니다. 여학생 기숙사를 나가서 강의실로 가다가 그 총각에게 잡힐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말썽이 되어서 교수님들이 회의를 하고 그 총각에게 자제를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결혼은 안 되었지요. 아마 처녀와 총각은 둘 다 각자 집으로 돌아간 걸로 압니다. 따로.

 

여러분, 만일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이 맞아야 일이 될 때 하나님은 결코 한 사람에게만 신호를 주시지 않습니다. 물론 몰라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이가 다른 사람에게 알려 주어야 할 때도 당연히 있습니다. 그러나 평등한 두사람이 만나서 뭔가를 해야 하는 경우, 특히 결혼 같은 경우에 하나님은 자기의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도 여건도 환경도 조성하십니다. 나에게 그 마음을 주셨다면 상대방도 그 마음을 받아 들이도록 여건을 조성하시거나 아니면 그 사람에게 동시에 역사하십니다.

 

야곱과 라반의 경우에도 그렇고 사울과 아나니아의 경우에도 그렇고 본문의 모세와 아론의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일을 이루기위해 그렇게 그렇게 몰아 가십니다.

 

그런데 어떤 광야인지, 광야의 어디인지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는 없습니다. 위치상 시내반도일 확률이 높고 아니면 애굽으로 가는 길의 어딘가에 있는 광야일 것이지만 광야라고 해서 손바닥만한 곳이 아닙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아득하게 넓은 광야들이 이어져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여기 본문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말씀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아론은 하나님이 모세를 제대로 만나게 하실 걸로 믿고 나갔고 기대대로 모세를 만났습니다.

원문은 소위 ‘와우 계속법’이라는 기교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와우 계속법’은 그리고 그가 뭐 했다. 그리고 거기서 누구를 만났다. 이런 식입니다. 어떤 일이 즉각 즉각 이루어 지는 급박한 과정을 서술합니다.

 

그러니까 광야로 나가자마자 아론과 모세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 사막에서 정해진 길이 특별히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도중에서 두 사람이 만났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이와 같습니다. 그의 명령대로 행하기만 한다면 아무리 그것이 추상적으로 보여도 당사자에게 놀랍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 때 그의 말은 상당히 추상적이고 범위가 애매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답답한 것은 인간의 언어로 자세하게 알려 주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무조건 내 말을 순종하라고 하셨지만 너무 추상적입니다. 그런데 일단 그의 말을 순종하고 출발하기만 하면 일이 제대로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아무 의심 없이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이적, 사인을 보여 주십니다.

 

모세와 아론이 서로 만나게 되는데 어디에서 만났습니까? 하나님의 산에서 만났답니다. 이 말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하나님의 산에서 아직 떠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서 아론을 너의 대변자로 삼아라고 말씀하신 훨씬 이전에 이미 아론을 섭외하셔서 그로 하여금 모세를 만나러 오게 하신 겁니다.

 

이 상황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면 하나님은 나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사명을 주시기 훨씬 이전에 그 일을 위한, 나를 위한 여건을 조성해 놓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부름에 아멘하고 응답하기만 하면 일이 되도록 환경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아론은 모세의 동역자입니다. 모세는 아론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애굽으로 갔습니다.

 

자, 생각해 보세요.
어느날 전 애굽의 왕자가 와서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해 내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왔으므로 모두 내말을 따르라고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알겠다고, 당신의 우리의 지도자라고 인정하고 따르겠습니까? 무려 200만에 달하는 무리의 지도자가 되는 일이 그렇게 쉬울까요?

 

당연히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과연 모세에게 어떻게 자기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하셨습니까?

29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이게 문제입니다. 모든 장로들이 모인 앞에서 이적도 행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명도 전하고 한다면 어쩌면 일이 간단하게 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애굽당국의 눈을 피해 어떻게 이백만의 지도자인 장로들을 모을 수 있지요? 고센전역에 흩어져 살았을 장로들을 어떻게 애굽 당국의 눈을 피해 한자리에 모을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서 말하는 ‘장로’는 ‘연장자’ ‘노인’을 뜻합니다. 그러나 문자적인 뜻대로 노인이면 모두 장로가 된 것은 아닙니다. 여기 모인 장로들은 지파의 대표나 아니면 가문의 가장일 확률이 높습니다. 이스라엘에는 12지파와 70개의 가문이 있습니다. 말이 가문이지 실제로 웬만한 부족 수준은 넘어 서는 거대집단입니다. 아론이 바로 이스라엘 지파의 장로들을 모으는 일을 했습니다. 동족과 모세를 연결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아론이 모세와 장로들간의 만남의 자리를 주선한 겁니다.

 

실제로도 애굽에 가서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한 사람은 모세가 아닌 아론입니다. 지팡이를 던져 뱀은 만드는 시범을 보인 자도 역시 아론입니다. 모세의 대변인인 아론은 말만 대신할 뿐만 아니라 이적까지도 대행했습니다. 일단 모인자들을 믿게 하는 것은 비교적 쉬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자 모든게 해결되었습니다. 아론이 행한 이적을 보고 장로들은 모세에게 하나님이 사명을 주셨다는 말을 믿게 되었답니다. 모세가 무려 80이 되어서, 우리식으로 하면 만80이 되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요?

 

그렇다면 그의 형 아론은 도대체 몇 살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아주 늙은 형제들을 사용하셔서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역사에 다시 없었던 그리고 이후에도 없는 놀라운 신비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꿈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면 우리의 육체적인 나이하고는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백성이 믿으며”-‘와야 아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쓰는 아멘이 바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장로들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답니다. 모세와 아론이 비록 몇가지 이적을 행했다고 해서 모든 이스라엘 장로들이 그들의 말을 믿었다는 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나중에 보시면 애굽의 술사들도 지팡이를 던져 뱀을 만드는 일은 할 수 있었답니다. 그러니 그 정도의 이적만으로 백성들을, 노련한 장로들을 설득하고 그들을 믿게 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모두 믿고 하나님께 경배했다는 것은 굉장한 역사입니다.

 

저는 여기서 한가지를 더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이 모세를 그렇게나 오랫동안 연단시키시고 나이 80이 되어서야 부르신 이유가 혹시 이 장로들 때문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신분제 사회라고 해도 새파랗게 어린(?) 나이40의 왕자가 나이가 지긋한 장로들의 눈에는 애송이로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 앞에서 나를 따르라 하면 따르겠습니까? 아마 ‘웃기고 있네’ 이렇게 콧방귀나 끼지 않으면 다행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노인공경사상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로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들보다 나이가 많아야 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로란 말이 실제로는 수염이 긴 사람, 노인 이란 뜻이기에 장로들 앞에서 지지를 호소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들보다 나이는 많은데 몸은 더 젊고 더 싸움도 잘하고 이렇게 된다면 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 신의 사도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또한 수백년간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애굽의 신들을 만드는 노역에 동원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들게 되었다는 것도 놀라운 역사입니다.

이 날 후에 모세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받았습니다. 바로 밑에 5:1에 보면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라고 되어 있지요. 여기서 “그 후에”란 말이 바로 ‘모세를 선지자로 인정한 후에’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방법은 종종 인간의 상식을 벗어납니다. 상궤를 벗어난 방식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나서도 이게 지금 잘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염려합니다. 목표는 주어졌지만 구체적인 방안이 나오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될지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염려하지 마세요. 우리 아버지의 하시는 일은 우리가 도저히 생각지도 못하는 방법으로 진행될 때가 많지만 지나고 보면 그분의 전지함과 전능함이 돋보이는 기가 찬 방법으로 밝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맡기에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나의 동역자나 조력자를 통하여 그 일을 채우시고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나는 하나님을 믿고 그의 뜻을 따르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고독한 중에 무기력한 중에 나를 찾아 오셔서 위로하시고 사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합니다. 내가 지금 힘들어서 어찌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의 위로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내 기도를 외면하시는 것 같아 보입니까? 그분의 공의가 전혀 실현되지 않을 것처럼 보입니까? 어떤이에게는 40년이 걸린 일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들이 하나님에게 부르짖고 무려 80년이 지난 때입니다.

 

못살겠다고 당신은 어디계시냐고 외치자 하나님의 대책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해서 애기를 낳는 것입니다. 그 애기가 모세인데 모세는 무려 80세에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가 하늘보좌에 상달되고도 자그마치 80년을 기다린 겁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이러다가 늙어 죽겠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은 자기의 사명을 다 끝내지 못한 이는 부르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상급을 주시려고 우리가 더 큰 일을 끝내도록 기다려 주십니다. 그러니 그냥 하나님의 선한 뜻을 믿으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때는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를 결코 모른다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그가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의 삶에서 꿈이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내가 믿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향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기다리는 동안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말이 좋아 최선이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다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말고 그의 자비의 손길을 기다리며 기쁘고 즐겁게 주와 함께 가라는 당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어느날 불현 듯 찾아오시고 오랜 나의 소원을 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 속에 거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내가 쓰임 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기쁨으로 주님의 손을 잡고 나가는 영적인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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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목사님께서 즐겨 쓰시는 설교이고, 개정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그가 일하시는 방법을 상세하게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었네요. C.S.루이스의 언급대로 바닥이 부드러운 길, 평탄하고 완만한 길은 사실 지옥으로 가는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편안한 삶을 너무 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때때로 기회가 닿을 때는 나눔을 실천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함께 살아가도록 노력한다면 충분할테지요.

 

사촌형님도 이번에 목사 안수를 받아서, 얼마 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보고 초보 성직자의 삶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아이가 있어서 재우다보면 새벽 2시에 잠들어, 새벽기도를 위해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는 삶. 매일 처럼 수면 부족에, 설교 준비, 예배 인도에, 정신 없이 힘들 때도 많다는 것. 저는 딱 응급실 의사 선생님의 삶이 생각났습니다. 사명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올해 몇 번 블로그에서 언급했지만, 저는 사명감이 없는 사람입니다. 꿈이 뭐니? 라고 묻는다면, 저는 빈 손이예요. 라고 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씩을 느리게 배워갑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 앞서가려는 욕심 보다는, 믿음을 가지는 기다림을 미덕으로 삼아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눈앞이 캄캄한 힘든 현실 앞에서도 오늘의 감사함을 잃지 않는 기독인이 되고 싶습니다. / 2017. 03.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