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여호와의 영이 떠나면(사무엘상16:14-23)/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7. 2. 24. 04:57

 

여호와의 영이 떠나면 (사무엘상16:14-23)

 

우리는 흙으로 지음받았지만 여호와의 생기가 들어옴으로 생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육과 영을 함께 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게 모든 문제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영도 완전한 육체도 아니기 때문에 너무나 불완전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일들이 잘될 때 우리는 우리가 마치 신이나 천사인 듯 느끼지만 우리의 삶이 엉망으로 변할 땐 우리가 마치 짐승같습니다. 생존본능만이 남아 있는 짐승.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도움과 간섭이 없이는 한시도 살아가기가 곤란한 존재인 것입니다.

 

짐승들처럼 영이 없다면 우리는 이런 저런 생각 없이 그냥 본능에 충실한 짐승같은 삶을 살다가 갈 겁니다. 야생의 짐승들은 본능적으로 행동하지만 병이 들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신기한 일이지요. 게다가 취직을 할 필요도 돈을 저축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먹이를 먹고는 배가 고파질 때까지 놀다가 다시 배고파 지면 사냥에 나섭니다. 뭐 초식동물은 그도 필요 없겠네요. 지천으로 널린 풀이나 잎사귀를 먹으면 되니까.

 

독수리는 부리가 휘어졌는데 이게 자꾸 자라서 나중에 되면 부리로 모이를 먹을 수 없게 되어 죽는답니다. 그러니까 우리네처럼 이빨이 빠지고 잇몸이 병들어서 죽는게 아니라 계속해서 부리가 자라나서 죽는다는 겁니다. 아마 인간이 개입해서 부리를 좀 잘라 준다면 몇 년 더 살지 않을까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얼핏보면 짐승으로서의 삶도 매력이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뭔가 좀 부족합니다.

 

반대로 만일 우리에게 육이 없이 영만 있었다면 삶, 먹고 입고 쓰고 싸고 하는 모든 문제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일들, 삶을 위한 처절한 투쟁이 필요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영이 무슨 황금이 필요하고 영이 무슨 먹을게 필요하며 영이 무슨 추위를 타고 영이 무슨 형체가 있겠나요? 병도 없고 약도 없고 의사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되면 우리에게는 삶을 위한 여러 가지 필수적인 요소들이 전혀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솔직히 먹을 것, 병에 걸릴 것에 대한 걱정만 벗어나도 우리의 삶은 훨씬 더 쉬워질 것입니다. 이런 존재를 우리 조상들은 신선이라고 했습니다. 산위에 살면서 이슬만 받아 먹고 사는 지, 솔잎정도를 먹고 사는지. 잘 늙지도 않고 엄청나게 오래살고. 힘도 엄청세고, 날아 다니고. 전혀 걱정이 없을 것 같습니다. 불가에서는 이를 두고 해탈이라고 말합니다. 글쎄요, 그러나 육은 우리의 족쇄이기 때문에 완전히 영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죽기 전에는.

 

요즘 제가 잇몸이 좋지 못해서 음식을 가려 먹고 또 소식을 하는데 이렇게 되고 나니까 산해진미나 각종 미식들이 전혀 입에 당기지가 않습니다. 외식이 두렵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박하게 먹어도 우리네는 충분히 잘 살 수 있는데 이제까지는 그걸 제가 몰랐습니다. 나름 먹을만 하고 영양도 그럭저럭 충분한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인스턴트나 설탕범벅 기름범벅의 음식은 이제 못먹겠습니다. 이건 욕심을 줄이는 과정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특별히 우리나라가 유독 사람이 먹는 음식에 장난을 많이 칩니다. 아마 친기업적인 정부의 공무원들이 또는 정책들이 불량, 부정 식품을 만든 이들에게 솜방망이 처벌이나 또는 암암리에 묵인해서 아예 처벌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각종 불량과 부정이 판을 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손해를 보고 오로지 자본을 가진 중간상들만 이익을 보는 구조로 굳어진 우리네 먹거리는 질은 조악하지만 비싸기는 엄청 비쌉니다. 여하튼 신선이 되어서 먹거리에서 해방되면 이런 문제도 거론될 필요조차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쨌든 영과 육을 함께 가진 존재고 먹거리와 정신적인 문제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골치가 아픕니다.

 

여하튼 이렇게 사람은 영과 육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탈이 많이 납니다.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기에 우리는 정말 어중간한 존재입니다. 신을 동경하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짐승의 행태를 취하기 쉽상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짐승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서 항상 주의하고 조심하고 하나님의 품안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한마디로 신전의식이 중요합니다. 신의 눈앞에 있다는 의식,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의식이 있어야 그나마 욕망과 본성을 억누르고 하나님의 성도로서의 흉내라도 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자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악령도 사탄이 부리는게 아니라 여호와께서 부리는 악령이랍니다. 그래서 공중권세 잡은 자라는 사탄도 역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신민일 따름인 것이므로 결코 하나님을 배반하고 사탄에게로 가는 이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좋은 것을 버리고 나쁜 것을 취하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 바로 앞 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그를 다음의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물론 그가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해서 바로 왕이 된 건 아닙니다. 이미 사울이라는 왕이 있고 그의 권력도 굳건합니다. 그를 따르는 삼천명의 친위대도 그대로 있습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해서 당장 바뀐게 전혀 없습니다. 아마 사울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아서 다음번의 왕으로 뽑혔다는 것 자체를 모를 겁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다윗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우려고 하실까요?

 

그런데 우리는 아주 의미심장한 구절을 발견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떠나자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했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이 흙덩이에다 자기 자신의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령을 만든 존재입니다. 그래서 흙덩이가 걷고 뛰고 말하고 생각하며 느끼고 감동하고 감동을 주며 사랑하고 시기하는 일들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영이 떠나가면 우리의 몸은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뭐 이제까지 한두건을 제외하고 예외는 없었습니다. 에녹과 엘리야를 제외하고 심지어 모세와 베드로도 다 죽음을 맞았습니다. 우리가 죽은 것을 보고 돌아간다고 하지요? 그건 우리의 영이 나온 곳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땅으로 영은 하나님에게로.

 

우리의 영이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므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 가운데 이미 놀라운 진리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세월이 너무 오래 흘러서 우리가 사용하는 말의 기원을 알지 못할 뿐, 진실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자, 여기서 제가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누구나 성령이 떠나면 악령이 들어오느냐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과연 뭐가 정답일까요?
사실 본문을 아무리 살펴봐도 여기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없습니다. 그런데 16:1에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아마 보통사람들에게 성령이 떠난 자리에 바로 악령이 자리잡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버린자, 유기한 자에게 악령이 자리잡는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 이유는 하나님은 편재하지만 사탄은 편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편재란 말은 동시에 여러곳에 함께 거한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나에게 임하시고 저 사람에게도 동시에 임하시고 물건너 바다건너 다른 대륙의 아무개에게도 동시에 거하실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탄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탄이 이 아무개에게 거한다면 그는 동시에 정 아무개에게는 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탄의 졸개인 귀신이 필요한 겁니다. 동시에 거하지 못하므로 일의 효율성을 위해서 중요순으로 장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떠나도 비어 있는 채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어 있는 마음에 악령이 자리 잡기가 쉬운 겁니다. 귀신이 나갔다가 비어 있고 소제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일곱귀신을 데리고 돌아온다는 기사를 보신적이 있을 겁니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그냥 비어있는 채로 있을 것이고 그런 비어 있는 심령에 악령이 자리 잡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자리하고 있다면 감히 악령이 침노치 못합니다. 그래서 텅빈 사울의 마음에 악령이 틈타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을 확고하게 지키고 보호하므로 감히 하나님의 영이 점거하고 있는 곳에 악령이 침범할 수가 없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버리신 고로 하나님의 영이 떠나셨습니다. 아마 사울은 매우 중요한 사람이겠지요? 왕이니까 당연히 중요할 겁니다. 그러니 악령이 그에게 들어온 겁니다. 그러나 그에게 들어온 악령은 영원히 정주한 상태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들어왔다 나갔다하는 상태입니다. 만일 악령이 확고하게 정주한다면 그건 귀신들린 사람이 되는 것이고 보통은 왔다 갔다 하는 걸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울의 이후 상태가 그랬습니다. 악령이 들릴 때도 있고 정신이 맑을 때도 있고.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하나님을 믿는 자는 성령의 자녀고 불신자는 사탄의 자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원래 다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사탄에게 일시적으로 점유당하고 그 세력권 하에서 그 영향력 하에서 사는 것 뿐 입니다. 물론 그 사람들 중에 분명히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하나님의 버린바 된 자가 있겠지만 우리 하나님은 미쁘사 모든 이가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 죄에서 해방되어 다시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길은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미리 ‘저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어! 또는 저 사람은 악마의 자식이야, 영원히 저주받을 자야!’라고 정죄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은 철저하게 바꿉니다. 그래서 그 역사의 결과를 우리가 예단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를 회복할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사울처럼 하나님이 직접 ‘내가 그를 버렸다’고 언급하게 된다면 그는 이제 악령의 장난감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보호가 그에게서  거두어 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스스로 악령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했다는 것은 악령조차도 사탄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 하에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버리신 사울 대신에 다윗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이제 슬슬 다윗을 왕궁에 등장시키려고 하시는 겁니다.

 

사울은 몰랐겠지만 다윗의 수금소리가 악령을 떠나가게 하는데 효험이 있다는 것은 다윗의 수금소리 자체에 치료의 효과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한 것입니다. 아니라면 누구나 수금 잘 타는 자가 수금을 타도 악령이 떠나야 할 것인데 그런 말은 없습니다. 당대에 설마 다윗보다 수금을 잘 타는 자가 없었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독 다윗을 들어서 사용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이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자기가 버린 사울에게 악령으로 번뇌하게 하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의 부리신 악령이라고 했는데 ‘부리신’ 이란 말은 원뜻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온’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악은 마귀로부터 나온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사고방식이고 선과 악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은 악에 사탄이 틈타는 것을 그대로 보아 넘기는 즉 방임하는 것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무한정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버린 이에게는 악령이 들어가는 것을 묵인하시고 그 악령이 사람을 번뇌하는 것도 허용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기한 것은 사울의 신하들도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왕을 번뇌하게 하온즉”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들도 사울의 번뇌가 하나님이 부리는 악령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악령을 부려서 사울을 번뇌하게 한 것에 대한 신하들의 처방은 수금 타는 자를 불러서 악령에게 사로잡혀 번뇌하게 될 때 수금을 타면 낫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신하들이 비록 ‘낫는다’로 말하고 있지만 그들은 수금을 타서 번뇌하게 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좋아진다’고 말하고 있지 완치되는 것으로는 결코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수금을 타는 것은 선지자들이 종종 황홀경에 빠져서 예언을 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으로 일반인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방식으로 여겨졌습니다. 엘리사도 자기가 예언을 하기 위해 수금 타는 자를 부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악령이 임할 때 수금을 타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게 되고 그러면 자연적으로 악령이 물러갈 수 밖에 없다고 본 것입니다.

 

사울은 하루 종일 악령에 사로잡힌 상태인 것은 아니고 멀쩡하다가 가끔씩 갑자기 악령에 사로잡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신병과는 조금 다른 것이고 귀신들림과도 좀 다르다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마침내 사울은 자기를 위하여 수금 탈 자를 구하라고 신하들에게 명령하게 되고 이 때문에  다윗이 천거되었습니다.

18절에 “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 하더라”

 

사울이 수금 잘 타는 자를 구하라는 명을 내리자 사울의 신하 중에 젊은 신하가 베들레헴에서 다윗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힘도 세고 싸움도 잘하고 언변이 유창하고 게다가 모범이 될 만한 자이며 더더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악령이 버틸 수 없으므로 사울이 구하는 조검에 가장 부합하는 사람입니다. 여러 수금 타는 이가 있겠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수금 타는 이’는 다윗밖에 없다는 거지요.

 

이렇게 보면 하나님은 다윗을 사울의 왕궁으로 불러 내기위해 그에게 가장 알맞은 조건을 만들어 내신 겁니다. 즉 다윗을 부르지 않으면 안 되도록 여건을 조성하신 겁니다.

 

그런데 본문의 기사를 읽으면서 우리는 16장의 전반부에서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 다소 막연하게 왕이 된다고 했지만 이제 하나님은 그 후속조치로서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단계를 밟고 있습니다. 왕이 되려면 먼저 사람들에게 왕이 될 재목으로 소개가 되어야 합니다.

 

데뷔라고 하지요. 신입회원이 사람들 앞에 선을 보이면서 등장하는 겁니다. 시골 구석에서 몇 마리 양이나 데리고 있으면서 나는 하나님이 이 나라의 왕으로 삼으신 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알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왕으로 성장할 계기가 있어야 되었고 하나님은 사울의 악령을 이용하여 다윗을 높일 계기를 마련하신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아마 사울의 신하, 젊은 신하와 만났을 때 또는 그가 보는 줄도 모르고 수금을 타고 있었을 때 이 일을 계기로 사울의 왕궁에 진출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수금만을 탄 게 아니라 무용이 뛰어나고 구변이 있고 모범적인 자에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라는 인식을 심어 주려고 일부러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그는 자기의 일상대로 생활하는 중에 우연히 그를 본 신하가 사울의 명령에 다윗을 기억하게 된 것일 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취업이 어려운데 어디서 어떻게 점수를 따게 될지, 스펙을 쌓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냥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고 그 모든 일의 결말을 하나님이 지으시겠지요. 다만 그 인생길을 가는 동안 드는 생활비, 돈은 우리를 두렵게 하고 번뇌하게 하지만 그것도 역시 악령이 주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대의를 위해서 살기만 하면 그 나머지를 더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안주면 어떻게 하느냐고요? 그러면 벌면 되지요. 요즘 취직이 어렵지요? 그러나 반드시 솟아날 구멍이 있습니다. 우리네 속담에도 있듯이 하늘이 하는 일에는 후박이 없답니다. 후하고 박함이 없다는 거지요. 이걸 안주면 저걸 주겠지요. 믿고 기다립시다.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고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도 믿음입니다.

 

여기서 사울에게 하나님이 악신으로 장난을 친 것은 다윗을 등장시키려는 목적이었습니다. 보세요. 이렇게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분은 아닙니다. 자기가 선택한 자에게만 자비와 긍휼을 베풉니다. 한때는 하나님이 직접 사울을 선택해서 왕으로 세우기도 했고, 그에게 힘과 지혜를 주어서 동서사방과 싸워서 이기는 상승장군이 되게도 했지만 그 몇 번의 명령불이행과 교만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무시 때문에 그는 지금 하나님의 버린바 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하나님이 악신을 부려서 사울을 번뇌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마 악신이 임했을 때 사울은 거의 광인 수준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 수금을 잘 타고 있는 다윗에게 창을 던져서 그를 벽에 박아서 죽이려고 했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버린바 된 자는 비참합니다. 자기가 뭐하는지도 모르고 악행을 저지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선택을 받는 자가 되도록 먼저 노력해야 합니다. 그건 하나님이 선택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할 일이 없다고요? 왜 없습니까? 우리는 인간인고로 인간의 측면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할 말로 우리가 신입니까? 우리가 선택받았는지 아닌지를 미리 알 수 있게? 우리네 인생이 끝날 때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 미리 포기한다든지 미리 예단하지 말고 그냥 우리 인간의 할 도리를 다하면 됩니다.

 

인간의 도리가 뭐지요? 하나님이 만든 거대한 울타리 안에서 형제와 서로 화목하게 잘 사는 것이 바로 그의 뜻입니다. 그 사람의 운명을 모르니까 전도하는 겁니다. 판단은 아버지가 하고 실행은 우리가 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아버지 앞에 사람을 데려다 놓으면 됩니다. 또한 혼자서 너무 많이 가지려고 형제를 짓밟고 그의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시기하고 분쟁하는 것은 그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읽으면 마치 준비된 게임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한 개의 일이 일어나면 이 일을 위해서 미리 몇 개의 일들이 단계별로 준비되었다가 조금씩 조금씩 드러나는 그런 게임. 이름하여 ‘다윗, 왕 만들기 프로젝트’같지 않습니까?

 

다윗이 평소에 거만하고 방탕하게 살았다면 사울의 젊은 신하가 그를 극찬했을 리가 없습니다. 여기서 ‘준수한 자’라는 말은 잘생겼다는 말이 아니라 ‘모범적인 인간’이란 말입니다.
아마 사울의 신하가 봤을 때 사자와 곰에게도 용감히 맞서고 또 때로는 수금을 타면서 시나 노래도 하고 이런 모습을 보고서 그는 매우 인상에 남아서 기억해 두었다가 사울왕의 명령이 있자마자 급히 그를 천거하고 있습니다.

 

수금을 잘 타고 하나님이 함께 해서 악신이 버티지 못할 그런 사람이라는 기준에 딱 맞을 뿐만 아니라 언변이 화려하니까 왕이 심심하지도 않을 것이고 사람이 싸움을 잘하니까 혹여 수금소리를 듣고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방심하다가 왕의 신변에 위협이 올 수도 있는 데 그도 방지하고 또 모범적이므로 왕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좋은 자질들은 다 갖춘 그를 드디어 왕의 궁정에 불러오게 만든 것입니다.

 

사울의 신하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라고 고했지만 무엇 때문에 그가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여겼는지에 대한 근거는 여기에 없습니다. 뭐 그가 그렇게 느끼게 된 특별한 무언가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그가 하는 일들이 형통하고
위기의 순간에 살아나고
악한 세력들이 침투치 못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약한 자를 보호하는 한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즐겨하는 그런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그를 보는 순간 ‘아, 하나님의 성도구나!’하고 깨닫게 행동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고 바로 ‘아, 하나님의 성도구나’하고 여기도록 그렇게 살면 언젠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한 곳에 부르실 것입니다.

 

나이가 많다고
때를 얻지 못했고 배경이 없고 인맥이 없다고
절대로 기죽거나 힘들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후의 과정은 좀 보면 웃깁니다. 왕이 다윗의 집에 그를 사용하는 댓가로 뭔가를 준게 아니라 오히려 이새의 집에서 왕에게 다윗을 통하여 예물을 보냅니다. “떡과 한 가죽부대의 포도주와 염소새끼를 나귀에 실리고”
이새의 집과 왕의 집을 비교하면 왕의 부가 이새의 집의  수백배도 넘을 것인데도 이새는 왕에게 예물을 드리고 또 왕은 그걸 당연하게 받아 들입니다.

 

우리 하나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너무 부유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의 예물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뭔가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은 없거나 아니면 쥐꼬리만큼 드리고 날마다 시간마다 달라고만 해도 다 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우리 하나님도 먼저 받는 것을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물론 그는 영이시므로 물질이 아니라 영적으로 정성을 보실 것 같습니다. 물질이라는 것도 결국은 우리네 정성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귀한 것인 정도에서 받으실 것입니다. ‘인간들이 그렇게나 소중하게 여기는 물질을 네가 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나를 위해서 그것을 나에게 예물로 가져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기뻐하셔서 더 주실 걸로 봅니다.

 

자, 더 웃긴 것은 뭡니까? 원래 사울은 다윗을 수금 타는 자로 불렀습니다. 왕실 악사지요. 수금만 한번 씩 타면 됩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을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무기를 드는 자로 삼고” 자기의 무기를 드는 자로 삼았답니다. 무기 드는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무기 드는 자는 결코 낮은 자리가 아닙니다. 보통 보면 왕이 가장 신임하는 자에게 이 일을 맡깁니다. 다윗은 소년의 몸으로 수금을 타는 재주 때문에 불려 왔지만 왕의 신임을 얻어 왕의 수행비서가 된 겁니다. 그것도 ‘병기 드는 자’라는 아주 중책을 맡게 된 겁니다. 이것은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공부를 한 것과 비슷합니다. 시위대장이 만나는 자가 범상한 자 일리 없습니다. 모두 나라를 다스리는 대신이나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과 접촉하고 상대하는 동안 자연적으로 치국의 도를 배운 것처럼 오늘 다윗 역시 왕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왕이 하는 업무를 배우는 겁니다. 왕 직을 위한 인턴이 된 거라고 보시면 좋겠네요. 처음부터 목동이 왕의 자리에 앉는다고 해서 왕 노릇을 제대로 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배우는 것입니다. 명목은 수금 타는 왕실악사로 불렀지만 그는 왕의 신임을 얻어 왕의 ‘무기 든 자’가 되었습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정말 보잘 것 없는 자리에 앉지만 그를 접해 볼수록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보이고 성실하고 화합하는 것이 보여서 그를 중용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의 특징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혼탁한 세상에 한줄기 빛으로 나아온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복으로 더하실 것입니다.

 

얼마나 다윗이 사울에게 신임을 얻었느냐면 왕이 이새의 집에 사자를 보내서 그를 내 측근에 중용하겠다는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신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무기 든 자가 되었지만 본래의 역할도 무시 못 할 만큼 잘 하고 있네요.

 

2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니라”

 

이건 보통의 일이 아닙니다. 수금소리는 만능의 치료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이 탄 수금소리는 사울을 악령으로부터 해방시켜 그의 뇌가 상쾌하고 나아지도록 만든 겁니다. 그러니 사울왕이 그를 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당장 다윗이 없으면 언제 악령의 지배를 받아서 번뇌하게 될지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수금을 탄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역시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다른 이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행동해도 다른 이들과 달리 하나님은 형통을 더할 것입니다. 역사가 일어나도록 우리의 도구에 우리의 사역에 우리의 직장에서 두드러지게 할 것입니다.

악신이 떠난 사울은 결코 영원히 악령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죄를 품고 있기에 그가 하나님의 품을 떠났기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가 없을 때 언제든지 다시 악신이 그에게 들어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었습니다. 그래서 밀고 당기는 피말리는 일들이 시작됩니다.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은 결코 쉬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후 13년간 다윗은 처절한 고생을 통해서 왕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아마 그의 13년은 되풀이할 수 없을 큰 고통이고 수고였을 것이며 많은 다른 이들에게도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 모든 것을 다 이기고 왕위에 오르자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대왕이 된 것이고 그 부와 권세와 위명이 천하에 울리게 된 것입니다.

 

대기만성이라는 말,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이 말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립니다. 그가 나에게 주실 더 크고 놀라운 일을 보기를 원합니다. 결코 그가 나를 여기에서 그치고 끝내게 하실 분이 아님을 믿습니다. 왜냐면 그와 나는 보통사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명령을 소중히 여기며 그 언약을 잘 지켜 준행하였으므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을 만 합니다. 그러므로 결코 그의 나를 향한 사랑이 그칠 리가 없습니다. 그는 사람이 아니고 신이므로 인간의 합리나 이성 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그가 하지 못할 일은 없습니다.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 우리에게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기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당연히 사랑하는 우리들을 향해 기적을 베푸실 것을 또한 믿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니라고 해도 그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며 ‘너의 그 믿음과 간구가 옳다 옳다 그리고 응답받았다’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사울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총신이 되었습니다. 물론 앞으로 왕이 될 때까지 다윗에게 남겨진 고난은 수도 없고 그 세월도 많지만 그 도중에라도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우리가 좌절하고 낙망하지 않을 안식과 위로를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 성도에게 하나님이 자비와 긍휼이 오늘도 함께 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그 섭리가 찬연하게 드러나게 될 것임을 믿습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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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얼마전 읽었던 한 소절이 딱 생각나네요. 사막에서도 견딜 수 있는 것은, 어딘가에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런 이야기는 희망이 되고, 위로가 되어줍니다. 오늘 설교의 다윗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은 무조건 만사형통이라기 보다는, 힘든 일도 겪고, 시련도 겪으며, 배워가고 마침내 완성되어 가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모범과 겸손이라는 것은 정말 큰 덕목임을 알 수 있네요.

 

다윗도 왕이 되기까지 13년의 처절한 고생이 있었는데, 어쩌면 우리네 인생길도 지금 너무 쉽게 자포자기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봐야 합니다. 인생과 시간은 너무나 귀중한 것임을 매일 아침 일깨워야 합니다. 그렇게 힘을 내어 살아갈 때, 가끔은 오아시스 같은 기쁨도 만나서 웃기도 하며, 삶이란 참 특별하고 재밌는 것임을 느끼기도 하겠지요. 당연히 우리가 늘 행복할 수는 없더라도, 열심히 하루를 지낸다면, 행복도 가끔씩은 문득 우리 곁에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성경구절 처럼, 신앙이 자라, 기뻐하며, 기도하며, 감사할 수 있기를. / 2017. 02.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