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새가 날개치며 새끼를 보호함같이(이사야31: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7. 2. 10. 03:00

 

새가 날개치며 새끼를 보호함같이 (이사야31:1-)

 

우리나라는 제가 보면 볼수록 잘못 자리잡았습니다. 그 옛날 우리네 조상이 왜 하필이면 여기에 자리를 잡았는지 정말 한스럽습니다. 지금의 미국북서부에 자리잡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아니면 칠레나 아르헨티나의 남부쪽에 자리잡아도 좋았을텐데요.

 

솔직히 우리나라는 그렇게 약한 나라가 아닙니다. 인구가 무려 8000만에 국토면적이 22만 평방km를 넘는 나름 덩치가 있는 나라입니다. 게다가 무역량으로는 세계 10위 안에 들고 경제규모로는 세계11위이며 군사력으로는 세계 6~7위 정도 되는 강대국입니다. 물론 초강대국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금도 스스로 강대국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못하는 거지요.

 

우선 나라가 두 조각 났고 통일의 길은 난망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 큰 원인은 우리가 너무 강한 나라, 슈퍼파워 옆에 자리 잡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자리잡은게 우리의 비극의 시초입니다. 지정학적 위치가 너무 절묘해서 각본을 짜라고해도 더 이상 나쁘게 짤 수 없을 정도로 나쁜 위치에 있습니다.

 

물론 옛날에는 이런 위치는 아니었습니다. 그 옛날에는 러시아도 없었고 일본은 약했으며 중국도 통일된 나라가 아니었고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넓고 강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 강해졌고 러시아는 극동에까지 세력이 넓어졌고 대륙과 해양세력의 최일선에 우리가 있습니다. 마치 저들의 대리전쟁터의 졸개같은 입장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미국의 이익을 위한 각종 미군기지가 있고 이를 중국은 눈엣가시처럼 여깁니다. 이 편도 들지 못하고 저 편도 들지 못합니다. 초강대국의 횡포에 우리는 지금 전전긍긍합니다. 제가 정치가가 아니라 목사라서 다행이지 나라의 위정자들은 이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플겁니다. 이를 해결한 묘수는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누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양쪽을 만족시키면서 민족의 자존을 유지하고 번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일을 해내는 이가 있다면 그야 말로 민족의 불세출의 영웅입니다.

 

그렇다고 나라를 넘기고 외국으로 이민갈 수도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와 생김새가 비슷한 사람들은 한중일 세나라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데 갈데도 없습니다. 저는 옛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 우리는 전 세계에 영토가 있는 영국과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미국의 백인이나 중남미를 완벽하게 뒤덮고 있는 라틴족이 아닐까? 여기서는 한중일이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아서 엉글거립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황인종을 만나면 정말 마음이 푸근해 집니다. 비록 그들이 한족이나 일본인이라고해도 백인들보다는 훨씬 더 마음이 편해집니다. 뭐 그렇지 않은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냥 겉으로 생긴것 때문에 그래도 외모로 인한 차별은 없겠구나! 이렇게 위로를 받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나라를 버리고 어디 다른 곳에 가서 집단적으로 살아가기도 어렵습니다. 영국인들이야 자기 나라가 너무 추우면 따뜻한 호주나 뉴질랜드로 이민가도 되고 미국인들도 영국인들은 적극 환영이니까 캐나다도 좋고 갈 곳이 많습니다. 하도 못해 바다의 수많은 섬나라들도 있고 여유만만입니다.

 

스페인계통의 사람들은 멕시코부터 아르헨티나까지 본토 스페인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든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캘리포니아나 미국 서남부에서 전혀 언어의 또는 인종의 차별이나 어려움을 겪지 않습니다. 플로리다도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의 땅입니다.

 

제가 미국의 기숙사에 살때 옆집에 백인과 흑인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서 백인은 시골 출신의 목사님입니다. 30명 정도의 신도가 있는 시골교회 목사였는데 한 삼십분을 차를 타고 가야 비로소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아주 깡 시골출신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파사데나로 이사 와서 정말 심각하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황인과 처음 말을 섞어 보고 자기 딸은 황인종의 아이와 친구가 되고 바로 옆에는 흑인이 살고 학교에서 하는 공부는 어렵고 사모님은 스페인어를 하지 못하면 취직을 할 수 없다고 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이 친구는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뭐 제 입장에서는 제 딸하고 그 집 딸하고 친구가 된 걸 왜 그가 그렇게나 이상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충격이 심했나 봅니다. 그런데 저보고 만나기만 하면 학교 개강준비가 다 되었냐고 공부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냐고 이상한 소리를 해서 도대체 왜 그런지도 모르고 담담히 전혀 문제가 없다고 대답했는데 그는 그런 식의 공부는 처음이었고 그래서 학교를 다니는 걸 매우 힘들어 했었답니다. 깡 시골에서 목가적으로 유유자적하게 살다가 경쟁이 있는 인구 14만의 대도시에 와서는 적응이 안되는 거지요.

 

게다가 파사데나에서 삼십분 차로 가면 로스 엔젤레스가 있지요. 천지 차이입니다. 생전 처음 본 사람들이 마치 자기들이 그 땅의 주인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을 보고는 아찔 했을 겁니다. 그래서 병까지 걸려서 한동안 저의 걱정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동안 암이 걸렸다느니 그래서 귀국 후에 그가 죽었다느니 하는 소문이 퍼질 정도였답니다. 저도 그럴줄 알았으면 정말 그에게 잘해 줄걸하고 후회한 적도 있습니다. 뭐 그는 아직 잘 살아 있습니다. 건강하게.

 

인종이란건 항상 이렇습니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지역마다 문화와 환경이 달라서 힘들어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나라를 떠나서 어디로 갈 수 있을까요? 미우니 고우니 해도 이 나라가 그래도 우리에게는 제일 살기가 좋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문화양식에 대해서 이미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적응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곳으로 가면 적응이 어렵습니다. 언어도 그렇고 인종차별도 그렇고 호구거리도 그렇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불평불만을 쏟아 내면서도 여기에서 하루하루를 살아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언제까지나 망하지 않고 존재해서 우리를, 우리의 자식들을, 손자들을 보호해 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돼? 우리는 대통령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고 재벌도 아니고 그냥 하루 벌어 하루 먹는 하루살이들인데?’

 

그래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신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은 좀 뜸한데 옛날에는 호국제단이니 구국제단이니 하는 것이 정말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제단을 쌓고 그곳에서 돌아가면서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런 장소와 그런 사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처들이 많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 옛날 구국기도를 하던 분들이 많이 돌아가시고 후인들은 더 이상 남을 위한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나라와 민족의 평안을 위한 관심을 가지려 합니다.

먼저 이사야 본문에 보면 당시 앗수르와 애굽사이에서 고통받던 유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치 중국과 미국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위해 노력하는 우리나라와 같습니다. 뭐 바로 옆에 일본도 있기는 하지만 그건 뭐 큰 위협도 아닙니다. 우리가 보기보다 통이 커요. 일본쯤이야 전혀 위협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오히려 한국사람들 대담하다고 놀랍니다.

 

세계가 인정하는 일본을 아주 우습게 여기는 유일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자꾸 자기 마음에 안들면 종북 종북하지만 이미 북한은 우리나라하고는 상대가 안됩니다. 그냥 지방 군벌수준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약간 성가신 군벌. 아니면 떼쟁이 동생. 여하튼 당시 이사야 선지자가 직면한 그 현실과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이 너무 비슷해서 우리는 이 본문에서 뭔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자, 이제 본문으로 한번 들어가 봅시다.

 

먼저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앗수르의 위협에 괴로워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애굽을 의지하려고 했습니다. 애굽과 앗수르는 중동 지역의 남북에 있는 이대 강국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앗수르가 애굽보다 훨씬 강하고 결국 애굽도 멸망하고 말지만 당시에 유대인들의 눈으로 볼 때는 앗수르에 맞설 수 있는 나라는 애굽 밖에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애굽에 도움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대뜸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말하니 도대체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화를 피하기위해 더 위험한, 현실적으로 자기네를 공격하고 있는 앗수르에게 항복하고 그 신민이 되라는 겁니까?

 

당시 앗수르인들은 공포와 잔인함의 대명사였습니다. 패한 적들, 함락된 성의 백성들을 산채로 매장하는 것을 예사로 하는 아주 잔인한 것들이었는데 그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이면 생존자체가 어려울 수 있는데도 현실적으로 그 앗수르에 맞서서 자기네를 도와 줄이는 애굽 밖에 없음에도 하나님은 지금 그 애굽으로 도움을 구하러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정말 답답합니다. 왜 이 백성들의 현실적인 어려움은 외면하시는지.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를 남 유다로 가정한다면 미국과 중국이 어느 쪽이 애굽이고 어느 쪽이 앗수르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지금 우리의 처지나 당시 유대의 처지나 비슷합니다. 그래서 더 이 내용을 잘 알고 싶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느 나라를 의지해야 하지요?

 

먼저 이 본문의 배경은 앗수르의 침략 때문에 예루살렘이 함락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애굽으로 몰래 비밀동맹을 맺으러 간 사람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가지 마라. 아니 지금 거대한 위험이 목전에 다다랐는데 그럼 그대로 앉아서 목을 늘이고 있어야만 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뭐라도 해봐야 합니다. 저 잔인한 자들에게 백성들과 자신들의 목숨을 맡길 수가 없습니다.

 

먼저 내용을 세부적으로 나누어 보면 1절부터 3절까지는 도움을 얻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의 불신앙을 지적하고 그들은 애굽 사람들과 함께 재앙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의 내용입니다. 다음으로 4절부터 6절까지는 여호와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유다의 운명은 여호와의 손에 달려 있고,애굽이 아닌 여호와께서 그들을 환난에서 보호하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재강조하며 회개를 권면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앗수르도 결국 심판을 받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라. 이게 바로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당면한 어려움을 벗어나기위해 뭔가 인간적인 노력이나 세력에 기대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게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궁극적으로 유다가 이렇게 어려운 것은 너희가 나를 제대로 신뢰하지 않고 나의 명령대로 잘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이 어려움을 벗어나려면 먼저 하나님 앞에 너희의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자세로 잘아야 한다고 그것이 너희가 해야 할 제일 첫 번째 일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본문 시작하자마자 결론이 나왔습니다. 애굽이나 앗수르나 어느 쪽이나 의지하지 말라. 그 어느 쪽도 너희를 이롭게 하지 않고 너희가 살려면 오직 나 여호와만 의지하고 먼저 너희가 도덕적으로 바르고 하나님의 공의가 너희를 다스리게 하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면 된다고 하시는 겁니다.

 

유다는 정말 콩알만한 나라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이 우리나라 경상도만하고 당시의 유다는 지금의 경남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다가 히스기야 때는 약간 넓어져서 경상북도만해졌나요.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했기 때문에 북부에도 약간 영향을 미치게 되었거든요. 여하튼 그 정도의 나라가 지금의 이라크 터키, 이란, 시리아 같은 나라들을 합친 거대한 나라의 침략 앞에 있으니 아찔할 만도 합니다. 그래서 애굽이라도 끌어 들이려고 비밀리에 성을 탈출해서 동맹을 맺으러 간 겁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 당연한 조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순수하게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서 그렇게 간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친애굽파로서 자기네들의 안위를 위해서 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평소 삶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기 힘들만큼 형편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경고하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애굽과 동맹하는 것을 그렇게나 불신앙의 죄로 심판하시려는가 하면 바로 출애굽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옛날 출애굽의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말미암아 출 애굽한 히브리 노예들이 나라를 세웠는데 이제 다시 애굽과 동맹을 맺는다면 말이 동맹이지 당시의 동맹이란건 그 나라의 영향력하에 들어가서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된다는 말이기 때문에 이는 하나님의 출애굽의 역사를 무위로 돌리는 일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당시의 관습상 정치적인 속국일 뿐만 아니라 애굽의 신들을 섬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에 하나님 대신에 애굽의 우상들을 숭배하게 되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가 애써서 탈출시킨 자기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을 극력반대한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이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고 재삼 재사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애굽과의 동맹을 체결하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신앙의 자세로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진노하신 것입니다.

 

사실 위기의 순간에 눈에 보이는 사람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신앙입니다. 그게 믿음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 믿음을 높이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라는 표현에서 애굽은 ‘애굽’이라고 쓰여져 있지 않고 ‘미츠라임’이란 말로 적혀있습니다. ‘미츠라임’은 요새화된 왕국이란 말입니다. 듣기만 해도 강력하고 단단한 그래서 그 어느 누구도 정복할 수 없는 강한 왕국이란 느낌으로 들립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애굽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는 엄청나게 매력적인 나라입니다. 더구나 물이 풍부하고 주변이 사막지역이므로 누가 쳐들어 갈 수 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야속하게도 그런 강력하고 단단한 나라가 아니라 자기를 의지하고 신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이란 말에는 지도의 위치상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뜻뿐만 아니라 신앙상태가 내려간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남쪽으로 가는 것 뿐인데 이게 하나님의 눈으로는 영적으로 타락하는 상태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시각차이입니다. 지금 어찌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애굽에 도움을 요청하러 가는 걸 하나님은 자기에 대한 불신으로 여기고 그들의 죄에 대하여 화 있을진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을 의미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 그래요, 유대의 위정자들이 병거와 기병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말과 병거를, 눈에 보이는 그 강력한 전력을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앙모한다’고 번역한 말은 원문으로는 ‘바라보다’ ‘시인하다’란 말이 됩니다. 인격적인 신뢰감을 담아서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진짜로 어려운 일입니다. 평소에는 우리가 그냥 좋은 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루살렘성이 포위되어서 함락의 위기에 있고 적들은 강력한 기병대와 병거를 동원해서 포위하고 있는데 그래 기병과 병거가 필요하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필요할까요? 하나님이고 뭐고 우선 살고봐야 될거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하나님은 저들이 하나님 대신에 병거와 말을 의지한다고 한탄하며 저들에게 화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화있을진저’라는 말은 지금 화가 너희를 덮치려고 오고 있다는 그런 식의 표현입니다.

 

자, 그런데 2절 처음을 보면 정말 신성모독적인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식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누구 누구가 지혜롭다 그러나 하나님도 역시 지혜롭다’는 뜻인 것 같이 보입니다. 아니 그 누가 있어 하나님의 지혜를 넘어설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지혜롭다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지혜롭다입니다.

 

이 말은 당시 유대의 위정자들에게 적용된 말입니다. 그리고 이건 비꼬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의 위정자들은 앗수르의 침략에 맞서 애굽과 비밀리에 동맹을 맺는 것이야 말로 가장 지혜로운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더 한심한 것은 이런 비밀동맹을 하나님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비밀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비밀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바벨탑을 우리끼리 하나님은 모르게 쌓자’라고 한 사람들 같습니다.

 

그랬는데 하나님은 너희만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 역시 지혜가 있으므로 너희들의 그 얄팍한 수를 다 파악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히 그 위정자들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대등하거나 저들의 지혜가 더 뛰어나다는 그런 말은 결코 아닙니다. 스스로 지혜있는 척을 하는게 한심해서 비꼬고 조롱하는 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애굽과 동맹을 맺어도 결국 애굽도 망하고 유다도 망해버렸고 게다가 하나님 모르게 뭔가 한답시고 했는데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에게 화를 선포하고 계시니까 이들의 어리석음과 착각이 굉장한 것입니다.

 

결과론적이지만 유다는 앗수르에게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앗수르는 북 이스라엘은 멸망시켰지만 남 유다보다 먼저 망합니다. 유다는 앗수르를 멸망시킨 바벨론에게 망합니다. 그리고 바벨론은 페르샤에 망하고 페르샤의 고레스왕이 유대인 포로들을 돌려 보냅니다. 이사야서의 예언대로. 그래서 유다가 망한거는 맞지만 순서와 시기가 전혀 다릅니다. 당시보다 훨씬 후대에 망하게 됩니다. 그러니 굳이 애굽을 의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차피 애굽의 군대는 앗수르를 이기지도 못했습니다.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들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들의 집을 치시느니라” 라고 되어 있지요?
‘악행하는 자들’은 당연히 애굽과의 비밀동맹을 추진하려는 유다의 위정자들이고 ‘행악을 돕는 자’는 애굽을 말합니다. 애굽은 졸지에 행악을 돕는 자로 찍혀서 곤욕을 치르게 되는 겁니다. 악인은 이와 같습니다. 악인은 그의 죄로 말미암아 벌을 받지만 악인을 돕는 자는 졸지에 종범이 되어 같이 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악한과는 아예 교류해서는 안됩니다.

 

3절에 보시면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려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사람이요 신이 아니라는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이란 말은 아담, 즉 흙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흙덩이에 불과한 그래서 무능력한 잘 부숴지는 그런 존재인데 어떻게 도울 수 있느냐는 의미가 됩니다. 신이란 말은 ‘엘’이지요. ‘힘센 전능자’ ‘하나님’같은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전능자도 아니고 겨우 흙덩이에 불과한데 어떻게 너희를 돕겠느냐?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희를 도와줄 수 있는데 그 신에게 빌지 않고 겨우 흙덩이에 불과한 인간에게 의지하는 너희들이 참으로 어리석다. 그래서 내가 너뿐만 아니라 너를 돕는다고 끄떡대는 다른 흙덩이도 함께 박살을 내버릴거라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사야 때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온 앗수르 군대를 물리친 것은 애굽의 군대가 아니고 유다의 군대도 아니고 하나님의 사자였습니다. 애굽의 군대는 앗수르의 군대와 싸우러 갔다가 크게 패하고 겨우 명맥만을 유지한 채 본토로 도망가고 맙니다.

 

4절의 표현은 아주 문학적인 상징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번역이 약간 오해하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 큰 사자나 젊은 사자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러렁거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유다를 자기의 먹이를 움킨 사자처럼 보호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들이 오는데 이 목자들이 바로 앗수르 군대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보통의 성경구절과는 반대로 적혀 있습니다. 목자들이 몰려와서 위협해도 그래도 사자들이 끄떡도 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도 유다를 전혀 문제없이 보호하실 것임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

그래요, 만군의 하나님이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적들과 싸우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애굽이나 앗수르나 어디든지 의지할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저들이 비록 강력해 보이지만 저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비하면 약점이 많고 제한적인, 쉽게 바스러지는 흙덩이에 불과합니다. 결코 영원히 우리의 의지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지 인간적인 머리를 굴려서 여기에 붙을까 저기에 붙을까 머리를 굴려 봐도 결국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를 잡아 먹으려고 달려드는 저들에게서 누가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내겠습니까?

 

다른 나라들이 마치 우리를 도와 줄 것처럼 온갖 사탕발림으로 해도 결국은 상대방에게 우리를 빼앗기지 않고 자기네가 다 먹으려고 속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라사이에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은 아주 유명한 말이지요. 그 말을 잊으면 정말 곤란한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우리하고의 사이에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가 있느냐고 도의를 따지고 의지를 따져도 웃음거리가 될 뿐입니다.

 

구한말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보존하려고 고종이 미국 공사하고 미국공주에게 뇌물을 한가득 안겨 주어도 결국은 아무런 소용없이 나라는 망해버렸습니다. 심지어 미국 공주는 우리나라를 일본에 넘겨주는 ‘카스라 태프트 밀약’을 참관하고는 우리나라에 와서 고종에게 나라를 보존해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알렌공사는 감리교 선교사면서 공사가 된 사람인데 역시 나라를 보존하게 해 주겠다고 고종에게서 금광까지 받아 넘긴 후안무치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미국공주는 사실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딸입니다. 아마 우리나라는 아직 대통령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 공주처럼 대했던 모양입니다. 민주 공화국에서 대통령 딸이 무슨 힘이 있다고.

 

나라사이에 약속을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결국은 자기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때에 따라서 말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바뀌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자기의 말을 변개하거나 약속을 파기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신실하고 의로우사 우리가 그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는 한 결코 우리를 배신하거나 저버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이 불확실한 시대에 가장 확실한 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드 때문에 우리나라가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중국이 우리를 둘러싸고 서로 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뭐 미국은 우리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인종도 다르기 때문에 영토욕심은 없다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맞는 말일겁니다. 그냥 우리를 적당히 산업화시켜서 자기네 물건을 사용하는 소비시장으로서 만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야 합니까? 미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고 당연하게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유불리에 따라서 배신하고 거짓을 일삼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가 날개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그것을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새가 날개치는 것’은 다른 짐승 들 즉 뱀이나 다른 새들이 새끼를 잡아 먹거나 하려고 둥지를 위협할 때 어미새가 날개를 퍼득이며 주변을 날아 부리로 쪼거나 갈코리같은 발로 집어서 던져 버리는 그런 광경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냥 새라면 뱀하고 싸울 때 위태위태하겠지요? 그런데 이 구절에 맞춘 또 다른 구절을 우리는 잘 압니다.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같이’ 라는 그 구절을 생각해 보세요. 그 새가 그냥 새가 아니라 날짐승 중에서 왕인 독수리라고 생각해 보세요. 감히 다른 뱀이나 새들이 견딜 수 있을까요?

 

앞 절에서 사자를 예로 들었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짐승의 왕인 사자들이 지키는 먹이를 무슨 수로 빼앗습니까? 마찬가지로 독수리가 지키는 둥지를 무슨 수로 빼앗겠느냐고요? 그래요,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나 끊임없이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참고로 5절 하반절에 ‘호위하며 건지며 뛰어넘어 구원하리라’ 하셨지요? 여기서 호위하고 건지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뛰어넘는건 뭘까요? 바로 유월절에 주의 사자가, 애굽의 장자를 치는 주의 사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을 뛰어넘어가면서 그들을 보호한 것을 상기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 하나님은 보호하고 보호하여 우리를 지키시는 전능자이십니다.

 

그런데 무조건 ‘하나님을 의지합니다’하고 있으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될까요? 천만에요. 우리 하나님은 일방적인 선언에 속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행위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뭔가 거창하고 거룩한 일을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아주 작은 것에서 부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고 노력하려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국민들은 이기적이고 음탕하며 위정자는 거짓을 일삼고 교활하다면 그런 나라에 아무리 교회가 많다고 해도 우리 하나님이 즐거이 지키고 보호하시지는 않습니다. 이 한반도를 하나님이 보호하는 것이 멸망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있는 일이라고 인식하게 해야 합니다.

 

뭐에 가치가 있느냐면 돈을 많이 생산해서 가치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를 확고히 세우는 일에 가치가 있다고 여기게 해야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나라를 보호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돕고 사랑하며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서로 즐거워하고 위정자는 하나님이 맡기신 권한을 가지고 하나님의 공의로 이 땅을 판단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도말하며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재판하는 그런 멋진 나라를 만들게 되면 군대가 부족하고 경제가 약간 어렵고 인구가 모자라고 땅이 작고 자원이 빈약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우리 사회가 병들고 잔인해 지고 음란해 지며 각박해 진다면,

 

사람들이 이기적이 되고 서로 시기하고 발목을 잡고 같이 죽자고 마치 사망열차처럼 멈추지 않고 같이 누가 죽는지 해보자고 덤비는 그런 세상이 된다면 그게 바로 지옥일 것이고 마귀의 영역일 것이며 그런 땅은 우리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멸하고 제하여 버리실 것임을 우리가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복하고 멋진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이 세상을 움직이고 하나님의 공의가 온 영역으로 넘쳐 흘러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지상 기지로 우뚝 서는 그런 멋진 나라가 된다면 하나님이 아까워서라도 결코 이 나라를 악의 세력에 넘겨 주지 않고 길이 보존하며 번성케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살 일입니다.

 

먼저 우리 교인들이 먼저 그렇게 실천할 일입니다.
그 일에 우리 교회가 앞장서겠습니다.
그런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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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예전 찬양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앞이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세요. 앞이 캄캄하다는 표현은 우리에게 힘든 현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그 때 기독교인에게는 기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훌륭하게 삶을 살아낸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의 길을 인정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은 우리가 약하다는 것이 아니며,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렇게 사실은 우리가 간구 속에서 성장할 수 있으며, 기도 속에서 신앙이 깊어져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앞서가려는 습관을 버려야 할 테지요. 어려운 일 앞에서도, 힘든 현실 앞에서도 무너지거나 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더욱 힘을 내고, 기도하면서, 하루를 열심히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기도는, 그리고 주님의 함께하심은 우리의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고 믿습니다. / 2017. 02.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