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다(사무엘상16:1-13)/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7. 2. 5. 03:22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다 (사무엘상16:1-13)

 

사람들은 항상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보는 대로 판단합니다. 그래요, 보는대로. 듣는대로, 느끼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만지는 대로, 여러 가지 것들이 있지만 사람의 인식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우리들에게 보는 것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한 것’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옛 속담에도 있습니다. ‘몸이 천냥이면 눈은 구백냥’이라고 이건 뭐 눈의 중요성을 엄청나게 정확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의외로 아주 비합리적인 존재입니다. 왜냐면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상대방의 속까지도 판단하는 경향이 아주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선하게 생겼다 악하게 생겼다라고 하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선하게 생겼다고 해서 선하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악하게 생겼다고 해서 악하다는 확신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선하고 악한 것은 생긴게 아니라 행동하는 것으로 판단해야 되고 오랫동안 그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그를 겪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사로 ‘착하게 생겼네’ 같은 말은 합니다. 그건 그 어떤 판단보다 눈으로 보는 것이 더 앞서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예쁘게 태어나면 그것만으로도 큰 경쟁력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쁜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유무형의 각종혜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잘생긴 남자도 요즘은 아주 인기입니다. 여하튼 아름답거나 잘생겼거나 하는 것은 모두 다 큰 혜택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의 속 중심을 봐라. 하하하, 좀 웃기지 않습니까? 그 속 중심이란건 솔직히 안보입니다. 우리의 눈이 투시의 은사가 없는데 어떻게 그게 보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자꾸 불가능한걸 보라고 하니 답답합니다.

 

여하튼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점점 더 힘들어 집니다. 공부도 하고 봉사활동도 하고 기술도 연마하고 자격증도 따고 게다가 외모를 위해서 살도 빼고 심지어 성형수술도 하고 준비해야 할게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게다가 혈관청소도 해야하고 그래야 중풍도 예방하고 살도 빠지고 하니까 해야 할게 끝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하면 어떻게 되냐고요? 취직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정도의 상태가 되는 겁니다. 젊은이들이 잘쓰는 말로 스펙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취직이 되는게 아니라 취직에서 강점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스펙이 바로 외모이지요.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외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무엘이 사울왕 때문에 매우 슬퍼하게 됩니다. 왜냐면 사울왕이 왕이 될 때의 초심을 버리고 교만하고 욕심이 많아지고 그리고 권력욕에 사로잡혀서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예사로 어기고 별로 죄스러워하지도 않고.... 그래서 사울왕과 사무엘은 이제 각자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부분에 보면 이때부터 사울과 사무엘은 서로를 보지 않게 되었답니다. 나라를 대표하는 왕과 제사장 겸 선지자가 서로를 보지 않는다는 것은 일부러 서로 피하기 전에는 절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입니다. 각종 행사 때문에라도 서로 만나지 않기가 너무 너무 어렵지요. 그런데도 서로 만나지 않은걸 보면 이제 두 사람은 일부러 서로를 피하게 된 것입니다.

 

사무엘은 생각합니다. 사울 왕이 처음 왕이 되었을 때 나이가 사십이나 되었지만 겸손하고 성실한 왕이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모든 이들이 사울이 왕된 것을 기뻐하지 않았지만 겸손과 성실함으로 결국 모든 이들을 감복시켜서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주위 여러나라를 쳐서 강대한 군주가 되었고 그래서 사울은 이스라엘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출애굽을 성공시킨 이후에 지파별로 산거하다가 사사의 시대를 거쳐서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왕국이 서게 된 겁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렀습니다. 모든게 변했습니다.

 

15장의 마지막에는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합니다. 당연하게 후회한다는 표현은 인간들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표현을 ‘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신의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해서 우리가 알 수 있도록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16장이 되자마자 1절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이때 사울은 악신이 들려서 거의 미친 사람이 되어있었고 때때로 광증이 발작할 때는 주위에 있는 사람을 창을 던져 죽이는 그런 무서운 폭군이 되어 있었습니다. 누가 나의 왕위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지 항상 불안과 의심의 눈초리로 주위 사람들을 대했기 때문에 사울의 궁전은 복마전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사울에 대한 연민 때문에 사무엘이 슬퍼한 게 아닙니다. 사무엘은 이제 막 세워진 신생 이스라엘 왕국이 첫 번째 왕부터 문제를 일으켜서 제대로 발전하지 못할까봐서 슬퍼한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그 왕국이 문제가 아니라 그 왕국 안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슬퍼하게 된 겁니다. 나라가 흔들리고 다시금 이웃나라의 지배와 침략과 괴롭힘을 당하게 될 것 같아서 그 백성들의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점점 잊어가는 위정자들 때문에 사무엘이 슬퍼한 것이지 결코 자기가 세운 사울 왕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 때문에 슬퍼한 것은 아닙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통치자는 사무엘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왕을 원했고 사무엘이 인간왕의 패악을 적시했음에도 그들은 인간왕을 원했던 것이고 이제 그 결과가 나온 것이기에 사무엘이 백성들을 생각하고 울적해 하는 것입니다.

 

‘내말을 듣고 아니 하나님의 말을 듣고 인간 왕 대신에 하나님을 왕 삼고 나갔다면!’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자기가 다스리던 백성들이고 지금도 자기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슬퍼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나님도 역시 말씀하십니다. 한 왕을 보았느니라. 역시나 보았답니다. 느낀게 아니라.
보는게 참 중요한 모양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조차도 보았다고 합니다.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신 것은 외모가 아닙니다. 속 중심입니다.

 

자, 그런데 이미 사울의 왕권이 확고한 지금 사무엘이 공공연히 이새의 집에 뿔에 채운 기름을 가지고 간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왜냐면 이건 지금 살아 있는 왕에 대한 반역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건 아무리 사무엘이 사울왕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선택했다고 해도 결코 어길 수 없는 무시무시한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세 종류의 사람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우리들이 잘 압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 이 세종류의 사람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당연하게도 이새의 집에 가서 선지자로 삼으려고 하는게 아닙니다. 제사장은 될 자격이 없습니다. 레위지파가 아니라 이새의 집안은 유다지파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기름을 부으려고 기름 뿔을 가지고 가는 건데 이걸 어떤 왕이 그대로 보아 넘기겠습니까?

 

사무엘이 뿔에 채워갈 기름이 특별한 기름은 아닙니다. 다만 흔한 올리브 기름일 뿐이고 이 기름은 누구 누구에게 기름을 부울 때뿐만 아니라 화장품이나 요리에나 치료에도 사용하는 그런 기름입니다. 다만 그 기름을 붓는 주체가 누군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기름을 붓는가? 누가 붓게 했는가? 가 중요한 것입니다.

 

초대 왕에게 기름을 부은 하나님의 선지자이며 제사장인 그리고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이 기름을 붓습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라고 하셨다고 하는 의미로 기름을 붓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할 것이고 이 와중에 내전이 일어날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랬다고 순순히 왕 자리를 양보할 사울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다시금 지파별로 나뉘어 내란을 겪게 되고 수많은 이들이 죽고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현재의 왕의 버젓이 살아 있는데 기름을 새로운 자에게 붓는 것은 왕에 대한 반역이 되고 이제 늙고 실권이 없어진 사사겸 선지자겸 제사장인 사무엘은 사울왕의 무력에 대항해서 싸울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시대가 변해서 더 이상 사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왕이 서기 전에야 사사가 모든 일을 다 처리했지만 이제는 정치나 군사적인 권리는 모두 왕이 가지고 있고 사무엘은 겨우 제사장과 선지자의 역할만을 감당합니다. 즉 무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사울에게 잡혀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사무엘만 죽는게 아니라 이새의 아들들도 씨 몰살을 당할 수 있습니다. 왕의 자리를 위협하는 자를 남겨 둘 군왕은 없습니다. 그러니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야 ‘하나님이 하셨어요’라고 말하겠지만 당시의 사무엘이 느낀 압박감은 장난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유명한 사무엘이 이새의 집으로 간다면 당연히 사람들은 그가 왜 이새의 집으로 갔는지를 묻게 될 것이고 사울과 사이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 백성들에게 뭔가 다른 암시를 주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가는데에 그럴듯한 핑계가 없다면 당연히 그를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실로 이제 막 생긴 신생 왕국에는 큰 위협이 될 것입니다. 내전은 결국 나라의 힘을 약화시켜서 외적의 침입을 쉽게 만들겠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한가지 꾀를 주십니다.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그리고는 이새를 그 제사에 청하라고 합니다. 방편을 일러 주는 겁니다. 사울의 의심을 피할 수 있는.

 

하나님은 지금 사무엘에게 꾀를 알려 주시는데 사실 이건 본래의 목적을 숨기기위한 방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거짓은 아니지만 뭔가 개운치 않습니다. 아무리 선한 의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진리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상하게 하시는게 과연 온당한 일입니까? 뭐 어쨌든 하나님은 지금 사무엘에게 사울의 의심을 피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길을 알려 주신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은 어디서 한번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내가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이건 옛날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사울이 좋은 가축을 끌고 와서는 변명이랍시고 사무엘에게 한 말입니다.

 

그 말을 그대로 하나님은 지금 사울에게 돌려주려고 하시는 겁니다. 이런 것을 보면 정말 섬뜩합니다. 우리가 아무렇게나 막 말하고 지나가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런 것들 하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기억하시고 보수하신다는 사실을 알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그 제사에 이새와 그 아들들을 청하게 하셨고 그 다음에 할 일은 그때 가서 직접 가르쳐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자, 이제 여호와의 말씀대로 사무엘은 소를 끌고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그런데 사무엘을 맞는 베들레헴 장로들의 행동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성읍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이르되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사무엘이 왔는데 왜 성읍장로들이 떨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뭔가 예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뭔가 자기들에게 큰 화가 미칠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정말 굉장히 귀찮고 힘든 그리고 재앙적인 일에 휘말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왕과 대적하고 있는 전 사사이자 현 제사장 겸 선지자인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아무 할 일 없이 온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뭔가 안좋은 일이 생길까봐서 장로들이 떨었습니다.

 

만일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지금 당장 군사를 내어서 사울을 치라고 하면 꼼짝없이 사울에 반역하는 군대가 되어야 하고 만일 그 싸움에서 지기라도 한다면 일족이 몰살을 당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들은 현재의 왕과 전 사사의 사이에서 죽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평강을 위하여 오셨나이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평강은 솰롬입니다. 완벽한 하나님이 주시는 절대적 평강.

 

사무엘은 장로들에게 말합니다.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하고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성결하게 하고 제사에 청합니다.

 

왜 굳이 베들레헴에 와서 제사를 하는지 왜 이새와 그 아들들을 청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뭔가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막이 있는 실로에서 얼마든지 제사를 지낼 수 있음에도 굳이 적은 성읍으로 와서 장로들뿐만 아니라 이새의 집안까지 초대한건 뭔가 있는게 틀림없습니다. 그 옛날 사울이 왕이 되기 전에 역시 사무엘을 만나서 그와 함께 소의 넓적다리 고기를 먹었던게 기억납니다. 과연 이새의 아들들이 사무엘의 제사에 꼭 필요한 역할이 뭐 있을까요?

 

따지고 보면 사무엘의 이 말은 정말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면 그 암소는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화목제를 위해서 가지고 온 것이기 때문에 평강을 위하여 베들레헴에 간 게 맞습니다.

5절을 잘 살펴보면 마치 그 제사에 성읍의 장로들도 참여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제사에는 성읍의 장로들은 참여하지 않았고 사무엘과 이새와 그 아들들만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에 참여하는 조건이 뭡니까?

 

성결케 하고.
그래요 먼저 성결케 하고 난 연후에야 하나님의 제사에 참여할 자격이 생깁니다. 아무리 그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라도 먼저 하나님 앞에 나가기 전에 자신을 성결케 해야 합니다.

 

‘성결케 하다’란 말은 거룩하게 하다 또는 구별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요 둘 다 같은 뜻이 됩니다. 이 죄악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죄악된 세상에서 떠나야 하고 세상과 구별되어야만 합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 중에 살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세상과 구별되기가 어렵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완전히 거룩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과 완전히 구별되는 날, 즉 우리가 죽는 날 그래서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우리는 완전히 거룩해 져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제부터가 이 본문의 백미입니다. 이제 이새의 집안 아들들이 옵니다. 제일 먼저 엘리압이 눈에 뜨입니다. 이 사람은 이새의 큰아들입니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본 것은 그의 뛰어난 용모와 키 때문입니다. 사실 사울도 매우 키가 크고 게다가 잘생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을 의식하고 있는 사무엘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잘생기고 키가 큰 사람이 눈에 띄는 겁니다. 여기서 ‘보다’란 말에서 우리는 사무엘이 엘리압을 엄청나게 마음에 들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가기 전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3절에 “내가 네가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 지니라”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네가 보고 선택하라고 하신게 아니라 내가 너에게 신호를 줄테니까 그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면 된다고 하신 겁니다.

 

미래의 왕이 될 재목은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건데 사무엘은 그걸 순간적으로 잊을 만큼 엘리압의 외모에 끌렸습니다. 엘리압은 이름조차도 ‘하나님은 아버지시다’는 매우 신앙적인 이름입니다. 완벽한 외모와 키 그리고 신앙까지 어디 한군데 빠짐이 없어 보입니다. 와우 저 사람이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 앞에 있도다” 사무엘은 엘리압이 하나님이 선택한 왕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 뛰어난 외모 때문입니다. 보세요, 그렇게나 속 중심을 보신다는 하나님의 선지자도 역시나 외모에 끌립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육의 눈을 가지고 있고 그 눈으로 보는게 우리에게 가장 큰 선입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다른건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이걸 알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눈을 조심하라고 그렇게나 당부를 하신 겁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에게 물어 보지도 않고 하나님의 사인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엘리압의 뛰어난 외모만을 보고 혼자 판단한 겁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기름을 부으려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하나님은 사람처럼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속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런데 그 속중심이 형편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미 그를 버렸답니다. 이 말속에서 키가 크고 외모가 잘난 사울에 대한 실망과 그를 버렸다고 하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엘리압도 그와 같은 종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유명한 말씀 언제 들어도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런데 여러분, 우리도 중심을 보고 싶은데 우리는 하나님처럼 투시의 은사가없습니다. 그리고 미래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솔직히 외모가 아니라 그 속 중심을 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 말씀은 저에게 정말 위로가 크게 됩니다.

 

옛날 방송에 나와서 어떤 여자가 그 여자는 유명인은 아니었는데 그 여자가 남자 키가 180이 안되면 루저라고 말했는데 그 다음부터 180이 남자가 루저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그 여자는 여론의 뭇매를 맞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말이 이 나라 남자들의 키에 대한 표준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아예 사람 자체를 보지도 않고 키가 몇센티인지를 보고 그 다음 그 사람을 볼까 말까를 결정짓는 겁니다. 키가 통과되어야 비로소 실물을 보는 것이지요. 이건 사무엘 당시의 사고와도 엄청나게 틀린겁니다.

이 땅의 남자들은 정말 고생이 많습니다. 키도 키워야 되지 스펙도 쌓아야 되고 공부도 잘해야 하고 운동도 해야 하고 술도 잘마셔야 하고 몸에 초콜렛 복근도 새겨야 하고 노래도 잘해야 하고 아부도 잘해야 되고 돈도 많아야 하고 이건 뭐 한도 끝도 없습니다.

 

외모를 중시하는 이들처럼 끝없이 외모의 기준이 올라가서 그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래서 강남의 성형외과산 미녀들이 점점 많아 지는 겁니다. 그리고 이분들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비슷합니다. 다 똑 같은 기술을 가지고 성형을 하기 때문인지 같은 사람이 손을 보기 때문인지. 뭐 그냥 넋두리입니다.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십시다. 엘리압을 마음에 들어 했지만 여호와의 만류로 기름을 붓지 않자 이새는 둘째 아들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의 앞을 지나가게 합니다. 이건 뭐 아들들이 마치 모델이라도 된 것 같습니다. 아미 의자에 앉아서 서로 말을 나누며 지식과 이상을 알아보는 그런 면접도 아니고 그냥 사무엘의 앞을 지나가는 외모퍼레이드 마치 모델의 패션쇼 워킹같습니다. 이래서는 정말 철저하게 외모지상주의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둘째 아들 아비나답은 ‘기쁨의 아비’라는 뜻입니다. 아비나답이 기대를 가지고 사무엘의 앞을 지나갔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나님이 택하지 않았다는데 뭐라고 할겁니까? 셋째 삼마가 사무엘의 앞을 지나갑니다. 이 사람도 아니랍니다. 그렇게 이새는 자기의 아들들을 차례대로 사무엘의 앞으로 지나가게 했지만 아무도 선택되지 못했습니다. 아니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분명히 선택된 왕이 있을 걸로 여겼는데 아무도 선택을 못 받았는데 이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건 여담이지만 이새의 일곱아들 중에서 세명의 이름만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이 세사람이 사무엘의 마음에 든 그래서 잘나고 키가 큰 아들들이었을 걸로 보여집니다. 아마 넷째부터 일곱째까지는 그저 그런 아들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의 마음이 동하지 않았고 그래서 성경에서도 그들의 이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외모지상주의입니다. 안잘난 사람은 이름도 적어 놓지 않았습니다. 인간들은 모두 다 똑 같습니다. 외모가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하고 그렇게 입버릇처럼 외쳐도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눈이 주는 정보를 가장 신뢰합니다.

 

사무엘이 너무 이상해서 물어 봅니다. “네 아들들이 다 여기있느냐”그렇지요. 아들들 중에서 분명 왕으로 선택하신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일곱 아들이 다 지나갔는데 아무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래서 네 아들들이 더 없느냐고 물어본 겁니다.

 

자, 드디어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은 항상 늦게 나타나는 법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지금 뭐하고 있나요?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여러분, 이새도 이새의 아들들도 뭔가 느낌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한창 사울왕과 사이가 좋지 않은 사무엘 선지자 겸 제사장이 뜬금없이 베들레헴으로 와서 제사를 지내는데 직접 암소를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제사에 성읍 장로들도 아니고 자기와 자기의 아들들을 초청했습니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조금이라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뭔가 이새의 집에 큰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사무엘이 사울을 왕이 되기 전에 제사음식을 먹는 식사 자리에 초대한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베들레헴 성읍의 장로들은 사무엘을 맞으러 나가기까지 했는데 그들이 아니라 이새와 그 아들들만 초대한다는 것은 뭔가 아주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풍깁니다.

이새는 지금 속이 바짝 바짝 타 들어갔을 것입니다. 자기의 아들들 중에 한명이 왕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흥분되고, 한편으론 두렵고 꿈만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걸 몰랐다고 해도 순수하게 이스라엘의 전 사사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인 사무엘, 사울 왕을 선택해서 기름을 붓고 나라의 기틀을 세운 이스라엘의 큰 어른을 만나서 제사와 연이은 식사자리에 초대를 받는다는 것은 젊은이들에게는 엄청난 영광이요 이야기 거리입니다. 막 자랑할만 한 겁니다.

 

이 당시 이새의 집안이 이스라엘의 명문가는 확실히 아니었던 듯한데 그런 측면에서 사무엘과의 식사자리는 이들에게 엄청난 가문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들 누구라도 참석하고 플 겁니다. 그러나 양을 방치하고 갈 수는 없습니다. 결국은 누구 한명이 남아서 목자노릇을 해야 합니다. 이런걸 보면 이새의 집에는 목자 삯군 목자도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누군가는 식사 자리에 빠지고 양을 쳐야 하는데 그 일을 다윗이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당시 감정이 여기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어쨌든 다윗이 자기의 일을 묵묵히 감당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신데렐라는 식구들이 모두 왕궁 무도회에 참석하는데 혼자 집에 남아서 설거지와 청소를 하게 되어 막 울지요. 그래서 요정 대모도 만나고 이렇게 이야기가 되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새의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다윗이 막내기는 하지만 얼마든지 양치는 일을 안하려고 빼고 도망가고 매달릴 수 잇습니다. 그랬는데도 그는 자기의 형제들이 왕이 되려고 사무엘의 앞을 걷고 있을 때에도 양을 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성결케 한다’는 말은 어쩌면 목욕재계하고 아주 좋은 옷으로 갈아 입는다는 말과 비슷한게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보면 다윗은 지금 전혀 그럴 입장이 아닙니다. 그는 들에서 양을 치던 그 복장 그대로 제사의 식사자리에 참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건 왕궁에서 왕과의 연회에 참석하는 것하고 비슷한데 오히려 사람숫자가 더 적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는 그래서 더 조심스러운 일인데도 다윗은 전혀 자기를 꾸밀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나하겠노라”
사무엘은 식사도 하지 않고 다윗을 데려오기를 채근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자기를 꾸미기위한 시간을 전혀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다윗은 손해를 본 겁니다. 마치 면접장에 가면서 낡은 추리닝에 샌들을 신고 간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래도 육신의 눈으로 보나 관습상으로 보나 양복에 구두를 입고 신은 이들과는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 목욕에 화장에 머리까지 제대로 갖추고 온 사람들 자기의 외모를 어필하려는 이들과 확연히 차이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뒤늦게 나타난 주인공 다윗에게 대하여 어떻게 표현합니까?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기서 ‘빛이 붉다’는 말은 피부색이 붉을 정도로 어리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해서 아주 어린건 아닙니다. 성경학자들은 이때 다윗의 나이가 만으로 15세 전후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는 말에서 우리는 약간 당황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고 해놓고는 정작 선택된 자는 역시나 외모가 아름다운 자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못난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살 가치도 없습니까? 잘날 사람 뒤에서 배경 1,2,3 말고는 아무것도 아닙니까?

 

이거 하나님 자신이 한 말씀과도 바로 모순됩니다. 그런데 원문을 잘 분석해 보면 ‘눈이 빼어나고’ 부분이 바로 ‘모습이 아름답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정작 ‘얼굴’이란 부분은 ‘모양’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아름답다’는 말은 우리가 항상 한탄했듯이 아름답다는 말도 되고 선하다는 말도 됩니다.

 

여기서 성경이 겉모양의 다른 부분이 아니라 눈을 들어 외모를 표현한 이유가 바로 눈이 마음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눈이 안 예쁘고 탁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형편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라 옛날부터 사람들이 그렇게 믿어 왔기 때문에 다윗의 내적 아름다움이 외적으로 까지 나타났다는 것을 표현하려고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제일 좋기로는 내외적으로 잘난게 제일 좋겠지요? 아직 어리기는 하지만 양보의 미덕도 가지고 맡은 일에 묵묵히 충성하며 그리고 꾸준히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은 다윗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일어나서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다음대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기름부음을 받고 바로 왕이 된 건 당연히 아닙니다. 지금 이 행위는 어쩌면 다윗과 사무엘이 공모하여 반역을 일으킨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이제 그냥 평범한 이스라엘의 목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스스로를 준비하고 갈고 닦아야 합니다.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요, 스스로 민족의 구원자임을 자각하고 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기름부음을 받고도 15년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왕이 됩니다. 그전에 그는 영광을 얻기도 하고 왕의 낯을 피해 자기의 부하들과 망명을 떠나서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기도 하고 그렇게 그렇게 어려운 일들을 다 겪고 결국은 이스라엘 민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됩니다. 지금까지 세계 역사에 나온 자들 중에서 가장 부유한 왕이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외모가 어떻든 간에 모두 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사자로 부름을 받아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게 임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 주의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시길 바랍니다.

 

외모지상주의 세상에서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지금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렇게나 하고 하나님 앞에 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는 대신에 속 중심을 보십니다. 그래서 그 앞에 설 때는 우리의 속을 성결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온갖 악독과 음모와 죄악이 가득해도 겉만 멀쩡하다면 사람들은 속아 넘어 갑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속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에 하나님 앞에 설 땐 성결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내고 그의 앞에서 음식을 나눌 때 사무엘이 성결케 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요, 하나님 앞에서의 성결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전제조건입니다.

죄악된 마음에 성령님은 오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성령과 동행하려면, 그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려면 우리는 속 중심을 먼저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이 한해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성결케 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며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미 기름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택한 자녀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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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저는 일곱글자가 떠올랐습니다. "인생을 소중하게" 또는 "시간을 소중하게" 입니다. 말도 함부로 하지 않고, 당연히 행동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신 삶을 보내기 위해서는, 목사님의 즐겨 쓰는 표현법을 빌려, "가열차게" 보내는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뜨겁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의 모습, 그러나 성결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얼마든지 노력할 수는 있는 게 아닐까요. 아무렇게나 하고 살기에는 우리의 삶은 참 멋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인간은 참 신기합니다. 열심히 하루를 보내고 돌아왔을 때의 뿌듯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 함께 길을 걷고, 이야기를 나눌 때의 행복감이 분명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그런 게 있지 않았을까요. 나는 그래도 참 열심히 내 일을 하고 있었다는 자부심. 우리가 이런 당당한 마음 가짐을 갖게 된다면, 훨씬 더 자신의 시간을 소중히 아껴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테고요. 성경에는 그렇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 다이어리 맨 앞 장에 써 있는 문구를 공유합니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길 때까지는 자신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할 때까지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다르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아끼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시간은 소중해지며, 그 때부터 우리는 눈부신 일들을 꿈꾸며 행동하며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번뿐인 인생에서 우리 결코 지지 않기를. / 2017. 02.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