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주님은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요한복음15:1-1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7. 1. 25. 00:49

 

주님은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 (요한복음15:1-11)

 

우리는 교인입니까 아니면 성도입니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교인에서 그치고 성도의 자리에 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교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성도가 되는 그런 순서가 잘 지켜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교인으로만 머무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실 교인에서 성도가 되는 과정을 우리는 성화라고 합니다. 거룩해 지는 단계.예배에 참석도 잘하고 십일조 헌금도 하고 종교 활동에도 열심이지만 언제까지나 교인이고 성도가 아닌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이 땅의 기독교가 가진 문제의 대부분이 바로 이런 것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내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예수를 믿지도 않고 심지어 아버지의 명령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자기가 그러한 교인에 불과하고 아직 성도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게다가 교인과 성도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사태를 더 비관적으로 만듭니다.

 

심지어 교인들 중에는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지 않고 구원에 대해서 우습게 생각하기도 하며 나만 잘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깟 구원같은거 말고 돈이나 권세나 부귀와 쾌락을 듬뿍 부어주기를 원하는 그런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세의 부귀와 복락을 위해서 치성을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신에게.

 

우리네 조상들은 옛날 하늘의 해와 달과 별 그리고 산신령과 용왕에게 그리고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에게 심지어 동네의 수호신에게 지신에게 이렇게 저렇게 보이는 존재마다 신으로 섬기고 복을 기원했습니다. 아마 너무 살기 어려워서 신령의 가호가 없이는 한순간도 제대로 살지 못한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습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런 분들은 기독교인되 되고 난 다음에도 그런 습성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의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달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도 해 주시고 저것도 주시고 이래 주시고 저래 주시고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달라고 하는 기도지 뭔가 남을 위해서 하겠다거나 하나님의 나라나 그 의를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그런 기도는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이런 분들이 하루에 몇시간씩 기도한다고 말한다면 하루에 몇시간씩이나 하나님께 달라고 조르는게 되니까 하나님 입장에서 정말 한심하기도 하고 성가시기도 할 겁니다.

 

‘안되면 되게하라’는 말처럼 안주시면 열심히 기도해서 되게 해야 된다는 분도 있는데 여하튼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볼 때는 기가 찬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주일날 교회당에 가고 그리고 예배에 참석하고, 찬송 부를 때면 찬송 부르고 기도할 때는 같이 눈을 감고 말도 가려서 하고 그렇지만 결국은 마음이 허무합니다. 하나님이 계신지 아닌지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 구원이 뭐 그리 중요한 건지 전혀 생각해 본적도 없고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이 짧은 현실세상에서 쾌락과 성공과 부귀를 위해 노력하기에도 바쁜 삶속에서 가장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투자한다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될 정도로 쓸데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최소화 합니다. 그리고 명분이 생기면 즉각적으로 예배를 빼먹습니다. 교회에 결석합니다. 사실상 그런 분들에게 교회 예배에 출석하는 것은 가장 나중에 해도 되는 그런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기독교인입니다.

 

제가 이번에 정말 황당한게 인구 센서스에서 기독교가 신도수가 늘었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어안이 벙벙합니다. 지금 되어 가는걸 보면 절대로 기독교인구가 늘어날 수 없는데 통계상으론 늘었답니다. 그래서 이 땅의 제1 종교가 되었답니다. 물론 전수 조사가 아니라 천만명의 사람들을 택해서 표본조사를 했다는게 좀 걸리기는 합니다. 그래서 완전히 믿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목사로서 맨날 교인이 줄었다고 하는 말보다는 늘었다는 말이 그래도 듣기는 좋습니다. 백몇십만이 늘었다는데 믿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경외가 없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며 사는 바른 삶이 없이 성도는 결코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교인은 될 수 있지만 성도는 아닙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교인이 늘어가면서 성도도 같이 늘어가는 겁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거룩한 무리가 되어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런 일꾼들이 많아 지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호구거리를 위해서 교회를 이용하는 이들이 있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교회에 가주는 이들도 있고 이전부터 아무 생각 없이 다녔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교회에 가는 이들도 있고 사교클럽으로 여기고 가는 이들, 봉사 단체로 생각하고 가는 이들, 심지어 아무것도 안 믿으면 허전해서 다니는 이들까지 실로 다양한 종류의 교인들이 있지만 실제로 이들 가운데 얼마 정도가 성도일지는 모르는 겁니다.

 

실제로 세상에서 교회를 생각할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목사가 사장이고 장로가 이사인 기업집단처럼 생각하거나 크게 교회를 잘 봐서 사회사업단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제가 항상 하는 말이지만 교회는 기업도 아니고 사회사업을 하는 단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 영광을 위해서 그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계명을 따르다보니까 자연적으로 사회사업을 하고 이웃을 돕고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목사가 성공한 기업가처럼 생각하고 많은 연봉을 받거나 장로들이 대기업의 이사처럼 생각하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망령된 일이고 이렇게 생각하는 교회가 있다면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또 교인들도 이러한 교회의 현상을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더럽히는 일에 동참하는 것임을깨닫고 이를 비판하고 바로 잡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구원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이가 있다면 그가 아무리 멋있는 삶을 살지라도 사실 그는 착한 기독교인에 불과하지 결코 성도는 아닙니다. 성도는 이 땅에 살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존재이며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일을 해야하는 사람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믿지 않고, 성경에 나와 있는 주님의 기적을 믿지 않고 성도를 논할 수 있다면 그것은 거짓이요 위선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 교인의 자리에서 우리가 성도가 되기를 진심으로 원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더 깊어지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래요, 이제 우리가 말하는 부흥은 단순히 교인숫자의 증가가 아니라 거대한 건물의 신축이 아니라 개개 교인들의 신앙이 깊어지는 그래서 성도가 되는 비율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가 얼마입니까?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당신네 교회에 교인이 몇 명입니까?” 이렇게 묻는 대신에 성도의 숫자를 묻는 다면 너무 이상할까요? 저는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부흥이란 말을 사용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의 명령대로 따르는 이들이 모인 곳이야 말로 진정한 교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서 제일 답답한게 교회를 오해하는 겁니다. 이 분들은 자꾸 교회를 건물로 생각해서 이야기하는데 제가 교인들의 모임,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모임이 교회라고 이야기하면 절대로 이해를 못합니다. 왜냐면 정작 우리도 이제까지 그런 식으로 행동해 왔기 때문입니다.

 

정작 그 건물안에서 모이는 이들 중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가 얼마인지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이제까지는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가 충고합니다. 교회에서 보이는 모든 이들이 성도가 아니라는 사실. 교인들이 많이 있지만 이들 중에 진정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천국과 지옥의 존재와 성경의 진실과 성령의 역사를 믿는 성도는 얼마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 여기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는 성도의 정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거룩한 무리, 성도로 불릴 자격이 있는지 여기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나는 ~이다’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게 뭐 별달리 대단한게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잘 분석하면 정말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나는 참 포도나무요’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요, 주님은 스스로를 참 포도나무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을 원문으로 보면 ‘에고 에이미’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고 에이미, 이게 어딘가 친숙하지 않습니까?

 

나는 전혀 헬라어를 몰라요. 예, 알고 있습니다. 평신도가 헬라어를 알 필요가 뭐 있습니까. 그렇지만 이 에고 에이미란 말을 유대인들이 듣게 된다면 그들은 에고 에이미가 바로 하나님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신명을 떠올리게 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자신을 일러 ‘나는 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헬라어로 바꾸면 에고 에이미. 주님이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보이실 때 하신 말씀이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나다, 에고 에이미.

 

여기 보시면 주님은 자신을 일러 나는 참 포도나무요라고 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이요’ 이런 말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여기에 들어간 말 에고 에이미란 말에서 우리는 주님이 지금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압니다. 그리고 자신을 일러 참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라고 표현하는 이 부분은 실로 주님이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게다가 생각할 수 있는게 다른 나무나 과실도 많이 있는데 굳이 포도나무를 예로 든 것은 좀 생각해 보아야 될 문제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포도나무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팔레스틴으로 옮겨 심었다는 표현도 나오고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포도원으로 비유한 본문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이 말씀하신 참 포도나무란 것은 이스라엘이, 지금 포도나무로 비유되고 있는 이스라엘이 거짓 포도나무 가짜 포도나무란 말입니다. 이게 저는 성도와 교인의 차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참 포도나무. 그게 교인이 아니라 성도를 정의하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참포도나무라면 그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자연적으로 포도나무고 그 포도나무가 맺는 열매는 포도입니다.

 

1.주님에게 붙어 있어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여기 일절에 보면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문맥을 잘 보면 먼저 성도는 주님과 연결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착한 일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예배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합니다. 그는 뿐만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칭해집니다. 그래서 포도나무 가지에 붙어 있기 때문에 포도나무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면 단순히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으로는 부족해 보입니다. 왜냐면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가지를 잘라서 포도나무와 분리시킨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요? 농부되신 아버지께서 잘라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열매가 없어도 주님이 좀 봐주려고 해도 그게 안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열매는 단순히 전도의 열매만을 일컫는게 아닙니다. 그건 오히려 우리네 삶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를 영화롭게 한 열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도록 하는 데기여하게 한 열매, 그 열매를 말하는 겁니다. 믿음의 행위를 말합니다.

 

이 열매는 사람이나 행위나 여러 가지가 포함될 겁니다. 다시 쉽게 말한다면 우리네 믿음 생활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저 사람의 삶을 보면 하나님이 뭔가를 알 수 있어! 예수가 뭘 주장하는지를 알 수가 있어! 교회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가를 알 수가 있어! 이런게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다고 교회 안에 있다고 말로만 떠들지만 실제로는 믿음의 행위가 없는 이들은 성도가 아니고 그래서 그런 가짜 성도는 하나님이 제거해 버리십니다. 무슨 무슨 교회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교회가 아니라 교주 개인의 사교로 변질된 곳들이 있습니다. 이런 곳에 있는 자들은 또한 성도가 아닙니다. 왜냐면 그들은 실제로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에게 연결된 가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참된 믿음의 행실이 없는 이들 역시 성도가 아닙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이 강제로 잘라 버리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좋은 열매를 맺도록 깨끗하게 손질하고 가지를 다듬어 주시며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잘라 버립니다. 열매도 맺지 않으면서 참포도나무에 붙어서 영양분이나 빨아들이면 오히려 다른 건전한 열매맺는 가지에게 갈 영양분을 줄어들게 만드는 해악을 끼치므로 과감하게 잘라 버리는 것입니다.

 

실상은 우리가 교회에서 믿음의 행실을 보이지 않고 세상사람들처럼 살면서도 교인으로 행세하는 많은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장차 성도가 되지도 않겠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를 욕되게 하는 이들이 되어서 교회의 평가를 떨어트리고 그리스도를 모욕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들은 제하여 버림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잘 보면 욕을 많이 먹고 있는 공직자나 정치꾼이 어느날 교회의 장로요 집사요 하고 밝혀지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이들을 많이 봅니다. 천만 가까운 교인들 중에 이런사람 저런 사람이 있을 것은 당연하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고 믿음의 행위가 없는 이들이 그리스도에게 연결되는 것처럼 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참 포도나무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다른 좋은 열매맺는 가지를 보호하고 육성하기 위해 그런 곁가지들을 제거해 버릴 것입니다.

 

일단 우리는 여기서 두가지 성도의 조건을 발견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을 것, 그리고 믿음의 행위라는 열매를 맺을 것. 이 두가지가 성도의 전제 조건이 될 것입니다.

 

2.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 졌으니

 

두 번째로 성도의 조건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말씀으로 깨끗해 지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믿고 그것대로 실천하는 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거룩한 무리, 성도라고 칭해집니다. 사실상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고 칭해진다는게 한마디로 말이 안됩니다. 우리의 몸은 음란과 쾌락과 안락을 좇으며 편한 것과 게으름을 좋아하고 힘써 수고하고 남을위해 정갈히 자신을 닦고 절제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요즘 인스턴트식품들을 먹어보면 입에 너무 짝짝 달라붙도록 맛있게 나옵니다. 그런 것처럼 죄악도 역시 우리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뭐 인스턴트식이 죄악은 아닌데 건강에는 적신호라고 말하지요. 그런 것처럼 우리, 육신을 가진 우리가 육체의 죄악에서 완전히 벗어나 성화된다는 것은 죽기 전에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룩하다는 이름을 가집니다. 성도라고 불립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완벽한 성화를 이루지 못해서 날마다 거룩해 지려고 노력하는 상태기는 하지만 우리는 죽을 때까지 그래서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성화되는 존재, 성도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고 하면 먼저 주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사실상 그대로 믿고 행하지 않고 듣기만 함으로써 거룩해 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누구 말처럼 우리의 귀만 거룩하게 되어서 천국가고 나머지는 지옥에 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3.예수 안에 있어라

 

이건 처음 조건인 ‘주께 붙어 있어’라는 말과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붙어 있는 것보다 더 나아간 상태를 말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예수 안에 있고 예수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럴 때는 우리말로 혼연일체, 일심동체라고 하는 거지요. 그 정도의 단계까지 나아가야 비로소 성도가 된다면 성도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어야 성도가 되는거지만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가 예수 안에 있고 예수 안에 우리가 있는 그런 상태가 되면 좋은 일이 무지 많아 집니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많이 맺는 답니다. 그러니까 성도 중에서도 아주 모범적인 성도가 된다는 말입니다. 먼저 우리가 예수께 붙어 있으면 성도가 되는데 이제 예수와 한 몸이 되면 더 좋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열매를 맺는 답니다. 어떤 분은 성령의 9가지열매를 뜻한다고 하는데 신앙생활, 우리네 삶에서 믿음의 행위로 나타나는 좋은 열매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걸 많이 맺는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이 볼 때도 하나님의 멋진 성도로 인정된다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서 더 좋은 그리고 더 많은 열매를 맺도록 깨끗하게 손질하고 다듬고 해 주신다는 겁니다. 그는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는 거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원래의 기독교 원리를 보면 당연히 이래야 할 것 같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에 영양분을 공급하고 뭔가 특별한 비책과 보조 장치를 통해서 열매를 맺게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이러한 일에는 철저하게 빈익빈 부익부의 자본주의 논리가 통합니다. 있는 자는 받아서 더 풍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그건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이 생각보다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지만 있다면 주님과 연결되어서 그분의 말씀대로 따르기만 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아주 쉬운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엄격한 효율성을 강조하시는 겁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 욕을 하지 않고 남을 시기하고 질투해서 폄하하며 고의로 누명을 뒤집어 씌우는 것은 사실 성도에게는 하라고 해도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악에 속한 세상사람에게는 아주 쉽습니다. 마치 숨쉬듯이 쉬운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이렇게 보면 누구나 성도가 될 수 있지만 성도와 비성도는 마치 다른 종류의 사람 같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남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주고 욕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음모를 꾸며서 다른이를 함정에 빠트리고 하는 일이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작은 범죄를 저질러도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뛰고 밥맛이 없어지고 그것만 생각하면서 후회가 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죄에서 벗어나거나 그 일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불편해 집니다. 그것은 우리네 마음속에 예수님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모든 행동을 그분의 말씀으로 재단하고 규율해서 그것이 우리네 양심이 되었기 때문에 죄를 저지르면 마음이 불편해 지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도에 한걸음 다가간 모습입니다.

 

우리네 마음이 강퍅해져서 또는 닳고 닳아서 둔감해 진다면 그건 우리가 성도가 아니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지고 날마다 놀랍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솜씨를 대자연 속에서 거대한 인류 역사 속에서 찾아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고 놀라고 감탄하고 그래서 결국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를 찬송하게 되며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억지로 좋은 믿음의 열매를 맺으려면 처음에는 상당히 힘이 듭니다. 그러나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다면 성령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우리는 일상이 그런 믿음의 열매를 맺는 행동이 됩니다. 오히려 그 범위를 벗어나면  불안해 집니다.

 

실제로 우리 안에 예수가 거한다는 것은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의 행동을 규율하고 간섭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 말씀을 듣는데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살고 그 말씀을 내 행도의 기준으로 잡는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다스리는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규율하는 내 마음 즉 내가 하나님의 소유물이 되고 그런 이들이 모인 곳이 교회가 되며 그런 교회가 모이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신민 하나하나를 성도라고 부릅니다. 교인이 아닌 성도, 이게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입니다. 우리는 모든 교인들이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저절로 이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요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 우리가 예수로부터 분리된 경우는 결론이 나옵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게 되고 결국은 밖에 버리워져 말라버리고 그걸 사람들이 모아다가 불질러 버립니다. 포도나무 가지야 별로 두껍지도 않고 탈것도 별로 없으니까 금방 다 타버릴겁니다.

 

우리는 가끔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 없이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생기면 내 힘으로 내 돈으로 내 지식으로 내 인맥으로 배경으로 뭔가를 해 볼려고 하다가 결국 ‘할 수없네 이제 기도나 하자’고 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만 하고 가만 앉아 있어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부터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능력을 달라고 우리에게 도움을 줄 손길을 순조로이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시작하는 겁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잘 헤쳐나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성도가 사는 방식입니다.

 

틈만 나면 그 만능의 기도를 하지 않고 나 혼자서 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그가 성도가 아니라서 지요. 예, 맞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도가 되지 않으려는 이유는 그 몸속에 자리 잡고 있는 뿌리 깊은 죄성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네가 좋아하는 쾌락을 즐길 수 없어’라고 하면 마치 마약환자가 금단현상이 와서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일단 재활에 성공해서 일상생활이 가능해져서 그냥 살다가도 문득 여유가 있고 한고비 넘기면 어김없이 다시 먀약이 그리워지는 그런 죄성 때문에 끊임없이 하나님 없는 삶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있는 삶을 살게 되면 자기의 쾌락을 추구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마음에 자리 잡고서는 이건해라 이건 하지마라 이렇게 말하니까 견딜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건 바로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그 역시 교만해서 스스로 하나님처럼 높아 지려 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아이콘인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에게 경배하는 것을 보려고 하는 것이지요. 사탄은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적하기 위해서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므로 용도가 없어지면 비참하게 폐기되는게 하나님을 떠난 자의 말로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4.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

 

8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면, 주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우리는 알리딘의 마술램프를 얻는 것처럼 됩니다. 나혼자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라든지 또는 남에게 해를 끼치고 나만 즐겁자고 하면 안되겠지만 그렇지않고 하나님의 대의에 어긋나지 않는 선이라면 우리의 소원을 주께서 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의 행위를 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리고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아주 명쾌한 결론입니다.

 

성도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겁니다. 우리의 믿음의 행위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 주님의 제자가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되려고 하면 주님 안에 있어야 되고 주님 안에 있어서 믿음의 행위를 해야 하며 그걸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러면 결국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지요.

 

주님의 제자가 된 이에게는 기도의 응답이라는 놀라운 보답이 주어집니다. 이기적이거나 남을 해할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의에 포함되는 것을 구하기만 하면 우리는 무엇이든 응답받고 아니면 더 좋은 것으로 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즐겁게 되는 놀라운 멋진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꾸 음습하고 퇴폐적이며 성적인 쾌락만을 쾌락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것 없이도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습니다. 음, 사람이 반듯하게 살아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직 모른다면 참 성도의 기쁨을 모른다면 이건 정말 크게 안타까운 일입니다.

 

욕을 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친구들과 행복하게 시원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자극적으로 놀지 않아도 잔잔한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지 않고도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습니다. 오히려 착한 일을 하고 남을 돕고 그리고 난 다음에 느끼는 즐거움과 보람은 무엇보다 클 것입니다. 게다가 보상도 많쟎아요.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올 한해 우리 모두 교인에서 성도로 한걸음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믿음이 커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는 그런 성도가 모인, 제대로 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참된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기를 바라고 승리하는 2017년, 한해가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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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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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기독교인에게는 너무나 자주 들어왔던 주제이지요. 주님은 포도나무라는 이야기. 우리가 기독교인인 이상 주님 뜻을 따르는 삶을 추구해야 하고, 또한 그 길에서 벗어날 경우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 인데요. 오늘 따라 참 가슴 깊숙한 곳을 울렸습니다. 고모님께서는 저를 두고 지금부터 영어공부라도 열심히 해서, 훗날 선교를 돕는 일을 하는 건 어떠니 라는 말씀을 매년 하고 계시답니다. 사명을 찾아보라는 의미겠지요.

 

제 나름대로는 매주 설교를 열심히 올려서 많은 사람들이 보고 간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홍 목사님은 이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큰 교회에서 설교를 준비하거나, 개척교회에서 설교를 준비하거나 그 정성과 노력은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 즉 우리가 그 삶에서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할 때,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다 지켜보고 계신다는 이야기 였습니다. 그런 성결한 태도는 우리를 한 차원 높은 삶으로 인도합니다. 그래,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걸어야지.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우리는 성도가 되어가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어린아이 신앙, 달라고 떼만 쓰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문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였지요.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새해에는 꼭 올바른 삶을 뚜벅뚜벅 걸어나가 봅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격려하실 것입니다. / 2017. 0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