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이사야43:14-2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7. 1. 20. 03:50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사야43:14-21)

오늘은 새해 첫 주일이면서 새해 첫날 1월1일입니다. 따지고보면 굉장한 날인데 요즘은 워낙 어수선해서 차분하게 새해첫날을 축하하기가 어렵습니다.

현재의 상황이 실로 만만치 않습니다. 정치 경제적 상황이 정말 위기입니다. 많은 이들이 지금 힘들어 죽겠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한쪽에서는 배부르고 기름진 이들이 많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배부르고 기름진 이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춥고 배고픈 국민보다 잘사는 사람이 많아지면 당연히 더 좋습니다. 해외로 나가는 공항이 복새통을 이룹니다. 뭐 해외에도 나갈 수는 있는 데 아니 추운 겨울에 따뜻한 남쪽나라에 가서 쉬다 오는 여유를 전 국민이 가진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묘하게 양쪽이 극명하게 대비가 됩니다.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 문제는 지금 우리나라가 두갈래로 나뉘는 정도가 점점 더 심화되는 듯이 보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번에 정부에서 실시한 종교인구 센서스 결과가 나왔습니다. 표본조사 인구가 천만명이랍니다. 이전에는 전수 조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대폭적으로 줄었습니다. 아마 조사비용때문이지 않을까 싶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정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기독교가 이 나라의 첫 번째 종교로 떠올랐고 불교와 천주교는 줄었는데 기독교는 백 몇십만명이 늘었습니다. 그래서 불교하고 천주교는 조사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제가 보니까 약 오백만 정도를 인터넷으로 조사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불교도에게 불리한 것은 사실입니다. 개신교도 노령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불교는 그게 더 심하니까. 여하간 이 통계에 저도 약간 어이가 없습니다. 황당하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주로 대형교회에 교인이 늘었고 개척교회들은 3년안에 문닫는 비율이 95%를 넘어 선답니다. 그리고 중소형 교회는 계속해서 쇠퇴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빈익빈 부익부를 나타냅니다. 교회 안에서도 양극화 현상이 벌어 집니다. 물론 대형교회에서는 개척교회나 소형교회에 지원을 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한다고 해도 정말 새발에 피 정도로 찔끔 지원합니다. 자기들을 위해서는 풍족하게 남을위해서는 겨우 생색내는 정도에 그칩니다.

 

그건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개교회주의 때문입니다. 우리 개신교가 개교회 주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게 편리하기도 하지만 약간은 정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뭐 우리는 이제 처음 시작이니까 그 95%안에 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하튼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 날로 더 심해집니다. 이건 경제불황과 정치적 혼란 때문에 더 심해진 것처럼 보입니다.

 

게다가 더 곤란한 점은 새해에 정치적으로는 문제가 해결되고 안정되어도 이러한 경제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경제라는게 우리만 잘해서 되는게 아니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정부나 기업이나 가계가 다 같이 걱정이 태산입니다. 물론 정부나 기업은 현금을 산더미 같이 쌓아 놓았답니다. 그래서 이들에겐 미래가 없어서 걱정이고 가계는 당장 쓸 돈이 없어서 걱정입니다. 그래서 각 가정마다 당장 현재가 문제가 됩니다. 과연 우리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 상황이 시원하게 호전될 수 있을까요?

 

당연하지요. 우리 아버지께서 역사하신다면 이 상황은 당연히 호전되고 우리는 평안한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하여 그렇게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겸비하고 새로워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셔서 자기를 찬송하게 지으셨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욕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과 목사들조차도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무신론자들도 엄청나게 많기는 하지만 이상하게 초대형 교회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뭔가 지극히 부자연스럽습니다. 이것도 자연적으로 교회가 가지는 세속화와 기복주의 신앙때문일까요?

 

성공신화가 가져온 물신주의 풍조가 교회의 대형화를 성령의 임재와 하나님의 복주심으로 착각한 결과일까요? 큰교회는 뭔가 성령이 역사하신 결과라고 생각하고 그곳에는 뭔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가 있다고 생각해서 마구 몰린 결과가 아닐까요?

 

자, 새해가 밝았습니다. 과연 우리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의 앞에 어떤 상황이 전개될까요? 어떤 여건이 놓여지는 것일까요?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서 사람을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에게 자기들이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뜬금없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사야 당시에는 사실 바벨론은 그렇게 강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강대국은 앗수르입니다. 바벨론은 히스기야와 동맹을 맺어서 같이 앗수르에 맞서자고 사정하는 그런 정도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바벨론에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 갔을 때는 그 바벨론의 강성함과 부유함이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굉장했기 때문에 도저히 유대인들은 포로에서 해방될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한때 친일파들이 조선이 독립하고 일본이 패망한다는 것을 도저히 바랄 수 없어서 친일파가 되었다는 것 하고 비슷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강력한 바벨론을 패망시키시고 유대인 포로들을 고토로 돌아가게 하셔서 성전을 짓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게 하셨지요.

 

그 강력한 일본을 패망시키시고 조선을 독립시키셔서 민주 대한민국을 만드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다면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주재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경 쓸 것은 그의 마음에 드느냐 그렇지 않느냐이지 세계의 여건이 어떻고 누구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고 보호주의가 어떻느니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위한 도구요 과정일 뿐입니다. 그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편에 서기만 하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누구 말마따나 일시적인 어려움은 있을터이나 궁극적인 실패는 없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라는 말에서 ‘사람을 보낸다’는 말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기위해 하나님이 페르시아와 고레스를 보낸다는 말입니다. 고레스는 신흥 페르시아의 왕입니다. 그가 왕위에 올라 유대포로들을 고토로 돌아가고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조서를 내리는데 이걸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걸 보고 우리네 사정이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이 페르샤 사람을 보내어 바벨론을 물리치고 유대인들을 고토로 돌아가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나라에는 미국사람을 보내서 일본을 멸망시키고 조선을 독립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남북한이 나뉘게 되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본문과 같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래도 그 강력한 일본군대를 우리 힘으로 무찌르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강력한 힘 때문에 조선 사람들이 절망하고 있을 때 우리 하나님은 사람을 보내어 저들로 하여금 도망치고 우리가 독립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세상의 굵직굵직한 일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들을 사랑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려는 놀라운 섭리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우뚝 서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큰 법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을 위하여 이 세상의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이가 기도해야 합니다. 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이 사람을 보냈다는 이 구절을 더 적게도 해석하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 하나님이 사람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약함을 해소하고 강하고 능하게 하실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받아 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큰 일을 감당하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강력했던 바벨론을 인간의 힘으로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적은 무리만 남은 유대인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치시니까 그 강성했던 바벨론이 하룻밤사이에 멸망하고 살아 남은 이들은 배를 타고 도망을 가는 처지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이런 일을 하려고하면 도저히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본문에서 자기를 일러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여호와, 거룩한 이, 이스라엘의 창조자, 너희의 왕

 

이렇게 네가지 이름을 말씀하셨는데 먼저 여호와라는 말은 언약의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무슨 언약입니까? 너희가 내 법을 순종하면 내가 너희를 책임지겠다는 그 언약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고 그를 기뻐하면 하나님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반드시 살려 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지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라고 하면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이름은 과거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름입니다. 결국 이 이름은 내가 과거에 애굽에서 너희를 인도해 내었듯이 이제 바벨론의 포로로부터 너희를 인도하리라는 약속인 셈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이사야43장 당시에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되었고 북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게 망했지만 남 유다는 오히려 더 강성해 져서 앗수르의 침입을 막기위해 바벨론과 군사동맹을 맺을 정도로 강한 나라였고 바벨론은 그들의 동맹이었습니다. 현재 힘을 합쳐서 공동의 적인 앗수르에 대항하는 바벨론에 대해서 하나님은 장차 바벨론이 유다를 유린하고 그들을 멸망시킬 대적이 됨을 암시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사자를 보내어 그들을 치심으로 ‘너희가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될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너희의 거룩한 이’라는 말씀에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거룩한 구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의 천지만물을 주관하시지만 결코 세속의 가치에 오염됨을 허락지 아니하십니다. 세상을 만드셨지만 우리가 여전히 세상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가치를 지키고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도인 것이지요. 이 말은 또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냅니다.

 

제가 이 말을 좀 다르게 해석해 볼까요?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의 쾌락과 죄에 탐닉하고 이기적인 성공만을 추구할 때 결코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과 성별을 좇아 세상의 가치를 버리고 하나님의 법을 더 우선하도록 요구하신다는 겁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나머지를 더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그 나머지를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렇게 되는 것이지 먼저 우리의 이익과 성공만을 구한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법에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선순위를 먼저 바로 세우도록 요구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일러 ‘이스라엘의 창조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이스라엘이 아직 나라를 세우지도 못하고 아직 노예로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자신이 친히 이스라엘을 세우셨고 그들에게 법을 주셨고 또한 나라를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나라가 어디에서 왔는지 언제 세워졌는지 또는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통설은 우리나라를 단군할아버지가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단군 할아버지는 한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단군은 고조선의 임금 명칭이지 결코 특정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단군왕검이라는 말에서 단군은 제사장을 말하고 왕검은 임금을 말하므로 제정일치사회를 나타낸다고 말해집니다. 뭐 우리가 여기서 본격적으로 역사를 강의할 필요는 없고요 여하튼 우리나라를 누가 세웠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라고 해야합니다.  우리가 단군할아버지가 우리나라를 세웠다고 말하는 것은 고조선의 임금들이 이 나라를 세웠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는 겁니다.

 

제가, 이건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 약간의 근거만 가진 아주 미약한 근거만 가진 사견인데 전 우리나라가 이스라엘의 일 지파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뭔 소리고?’ 이렇게 여기실 분도 있는데 그냥 재미로 들어 보십시오. 과연 일리가 있는지 없는지.

 

우리나라의 그때 임금이 왜 하필이면 단군입니까? 그 ‘군’이라는 말은 임금을 말하지만 큰 국왕같은 임금을 말하지는 않고 작은 나라의 임금을 말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단지파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단지파가 빠져 있습니다. 혹시 그 단지파의 족장을 단군이라고 하지 않았을 까요?
하하하, 너무 웃깁니까?

 

제가 신학교에 가서 처음으로 히브리어를 접하고 상당히 놀란게 그 히브리어의 체계가 우리나라말하고 너무 비슷하다는 겁니다. 가령 우리나라의 문자는 분명히 세종대왕이 창제한 걸로 되어 있는데 자음과 모음으로 나뉘어 있지요. 그런데 히브리어는 자음만을 성경에 기록하고 모음은 그냥 점으로 표시합니다.

 

가령 옆으로 두점이나 아래에 한 개의 점이나 세 개의 점같이 점으로 모음을 표시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 적어도 조선시대까지는 우리나라의 모음은 다 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같은 경우에 o을 빼고 보면 이건 세 개의 점이 연결된 데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옛날 고어에 하나님을 ᄒᆞ나님이라고 썼던 것을 알고 계시지요? 점이 한 개 두 개 세 개로 모음을 표시하는 것은 정말 너무 비슷합니다.  이건 말로 설명이 곤란하네요. 한글 프로그램이 제대로 표시를 못하니까 참 곤란합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삼신’을 보면 ‘天一’과 ‘地一’과 ‘太一’로 표시하는데  천일을 하늘 아버지로 지일을 하늘 아버지의 아들로 태일을 천지간에 가득한 덕량으로 이야기합니다. 뭔가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비슷하지 않나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

 

나무로 동네마다 세워두었던 천하 대장군과 지하 여장군은 이스라엘 인들이 섬겼던 바알과 아세라 주상과 같고 산당은 서낭당과 같지 않나요? 자, 이만하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저는 우리나라를 아무래도 하나님이 만드신 것 같습니다. 그가 이 나라의 창조자이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고조선에 있었던 팔조법금이 십계명과 비슷한 것이 아주 많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뭔가 두 나라사이에 큰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 나라가 하나님의 창조로 만들어 졌다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세상적으로 타락하고 삐딱선을 타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이혼율이 폭증하고 동성애가 퍼지고 간통죄가 폐지되어 성적으로 타락하는 이 모든 일들이 우리 하나님이 만드신 본래의 뜻을 왜곡해서 이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사탄의 나라로 만드는 것 같아서 이것을 막고 정화하기위해 기독교인으로서 해야 될 일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 나라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이 민족 사이에서 유지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공개리에 표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가지고 불의에 맞서는 것을 결코 부끄러워해서는 안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너희의 왕’이라고 하셨습니다. 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죽이고 빼앗고 공포를 조장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왕은 우리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왕은 그 백성을 보호하며 그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존재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바로 그런 역할을 우리를 위하여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우리의 진정한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적어도 교회에서라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라고 하면서도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우리 멋대로 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진정한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세상의 임금들은 아무리 성군이라고 해도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억누르고 지배하고 다스라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인간왕이 호화로운 생활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은 백성들에게서 빼앗지 않으면 다른데서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왕은 스스로 농사를 짓거나 공장을 돌려서 음식과 물건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것을 빼앗을 뿐입니다. 물론 많이 빼앗느냐 적게 빼앗느냐는 있지만 빼앗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왕은 백성들에게서 곡식과 돈과 물건들을 빼앗아서 자기를 추종하는 이들에게 주고 그들의 충성을 받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빼앗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우리에게 자기의 자녀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의 부요함과 권능은 다함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법을 제대로 따르고 서로 사랑할 것만을 요구합니다. 왜냐면 그는 우리의 착취자가 아니라 보호자요 공급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과거에 애굽에서 자기의 백성들을 인도해 낸 일을 상기시킵니다. 16절과 17절에 보면 “바다 가운데 길을 큰 물 가운데 지름길을 내고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려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같이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걸 조금 더 박진감있게 번역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바다에 큰 길을 내시고 거센 물길을 뚫고 한 길을 내신 이,그들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거꾸러뜨리시고,꺼진 심지처럼 사그라뜨리시려고 병거와 기마를 출동시키시고 군대와 용사를 출동시키신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어때요?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정말 큰 일을 행하리라고 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므로 마음 든든히 먹어도 좋습니다. 세상걱정을 그만 접어도 좋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한번 돌아 볼까요? 우리 하나님은 이전에 내가 어려울 때 나를 모른다 하지 않으시고 나를 도우셔서 지금의 내가 여기에 서 있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내가 군에서 힘들어 할 때, 취직을 못해서 힘들고 서러울 때, 돈이 없어서 인생이 암담하고 잿빛 같을 때에도 나와 함께 하셨고 도움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갑자기 몸이 안 좋아 졌을 때에 사람들이 별 이유 없이 나를 비난하고 누명을 뒤집어 씌웠을 때에조차도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도움이 되셨습니다. 광야 한가운데서 갈바를 알지 못하고 쓰러져 있을 때에 찾아 오셔서 일으켜 세우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그는 나를 영원히 지키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자, 이제 뭔가 새로운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단순히 이것으로 끝나는게 아닙니다. 마치 뒤에 뭔가 굉장한 말씀을 하시기위해서 먼저 이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나님은 여기에서 굉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뒤이어서 본문은 19절에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뭔가 새해에 듣고 싶은 멋진 말 같지 않습니까?
‘이전 일’이란 것은 출애굽시에 행해진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건 잊어서는 안되는 기억일터인데 하나님은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왜 하나님은 이전 일을 기억지 말라고 하셨나요?

 

그것은 과거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펴신 팔로 애굽의 군대와 백성들을 치셨지만 그래서 그들을 진멸하고 죽이셨지만 이제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베푸실려고 하십니다.

 

솔직히 저도 우리 하나님께서 미래에 어떤 방법으로 구원을 베푸실 지는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추측하기로는 더 이상 물리적으로 죽이고 살리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죽음과 구원에 연관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세상 문화와 정신적이며 영적인 미혹에 빠져서 허우적대는 현실에서 우리의 영을 새롭게 하시고 새로운 문화적인 기풍을 진작시키시고 돈과 권력이 우리의 존엄과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사용되도록 하시지 않겠나 하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그러니까 왕이 아니라 대통령이나 수상이 서고 민주주의를 채택하여 모든 이들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자유롭게 낼 수 있는 상황에서 위정자들을 치시고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에 뭔가 책임을 묻는 그런 징벌과 구원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할 따름입니다. 음, 이건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앞으로의 구원이 이전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놀랍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전의 구원이 우물을 새롭게 파는 정도라면 이후의 구원은 새롭게 강물이 흐르고 바다가 넘쳐나는 그런 정도의 규모가 될 정도로 커질 것이기에 이전 것을 기억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세 번째로는 이제 반드시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것이기에 더 이상 옛날 것을 기억하고 그것에만 의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봐라 책에서 이러이러하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어’라고 하는 것보다 ‘보라 지금 여호와의 구원의 전능한 손길을 보느냐 저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이니라’라고 이야기할 수 있기에 더 이상 과거의 일을 기억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그것을 구태여 기억하지 않아도 책으로 상기시키지 않아도 모두가 다 눈으로 하나님의 거대한 일을 목도할 것이기에 기억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새 일’은 구원의 새 역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새 일을 행하리라’는 말에서 우리는 그 구원의 역사가 이미 가까이에 임박했음을 짐작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머쟎아 그 역사를 눈으로 보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임박한 정도를 넘어서 이미 ‘하나님의 새 일’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놀라운 역사가 산 넘어 까지 왔고 이제 저 산굽이를 돌면 너희 눈에도 보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나타낼 것이라”

 

하나님은 계속해서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겠다’고 하십니다.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듣기만 해도 뻥 뚫리는 느낌입니다. 듣기만 해도 풍요와 안락이 몰려오는 느낌입니다. 사실 사막에 강이 흐르면 그 주변은 초목이 자라나고 짐승이 모여들고 곡식이 자라고 나무는 열매를 맺고 강에는 물고기가 헤엄치고 그래서 마치 지상낙원처럼 변하게 됩니다. 사막이 결국은 물이 없어서 초목이 말라 죽고 식물이 자라지 못하기 때문에 불모지가 된거지 물만 제대로 공급되면 사막은 옥토로 변할 겁니다.

 

끝없는 광야에 길이 나면 사람들은 더 이상 방향을 잃고 해매지 않고 목적지를 향하여 제대로 안락하게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사실 광야에는 길이 없어서  와디의 바닥에서 대상들이 여행을 합니다. 강바닥이 바짝 마른 곳이 평평하니까 길 대신 사용하는 거지요. 그런데 그곳은 결국은 마른 하천바닥이지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문제가 많습니다.

 

옛날 시스라의 철병거 군대가 그 강바닥을 진행하다가 홍수 때문에 전차바퀴가 뻘 구덩이에 잠겨 전차가 움직이지 못하고 바락의 군대에 패하고 죽은 일이 있듯이 유사시에는 결코 안전한 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와디’니까 주로 계곡인데 계곡 주위에 산사태니 도적떼니가 여행자들을 위협합니다. 그런데 평지에 광야가운데에 길이 난다면 이 얼마나 행복할까요?

 

사실 역사적으로는 광야에 길을 내는 것을 바벨론에서 유대로 올 수 있도록 광야에 길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말로 생각하지 말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심을 기뻐하는 온 세상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로 여깁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이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앞 길을 대로와 같이 여실 것이며 우리의 산업을 살찌우고 평안하고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더 이상 물이 없어 사막을 헤매는 것 같이 고통 받지 않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앞길을 알지 못하여 이리로도 저리로도 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일이 없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막의 강물을 자신의 택한자에게 마시게 하시겠답니다. 그래요, 올 한해 물질이 풍족하게 되시기를 또한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물질을 가지고 좋은 일에 많이 많이 사용하시기를 또한 바랍니다.
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래가 캄캄하다고 좌절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자에게 길을 여시고 물을 공급하시며 하나님의 큰 새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하나님의 지으신 바인데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하여 지으신바가 된 존재들이며 그분의 택하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세상 사람들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미래를 걱정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취직이 안되고 쓸 돈이 없고 장사가 안되고 교회가 문을 닫고 뭐가 안되고 못하고 같은 비관적인 전망 때문에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만드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법을 좇으며 그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기만 하면.
이제 우리는 새로운 곳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도 곧 조만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미 어딘가에서는 그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머쟎아 우리도 그 역사를 경험하고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뻐하며 순종함으로 올 한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런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잊을 만큼 크고 놀라운 새로운 하나님의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할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 계속해서 우리에게 공급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며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네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보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존귀함을 세상이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며 우리를 지으신 자이시며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법에 순종하고 그의 명령에 따르며 그의 보호 속에서 올 한해도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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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새해가 멋지게 밝았습니다. 2017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입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너무 유명한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신다는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꼭 예전에 읽었었던 자전거 비유가 생각나게 합니다. 앞자리를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이끄시는 놀라운 길을 한 번 경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 길은 때로는 놀라울 것이며, 경이로울 것이며, 행복할 것이며, 신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성실히 살도록 노력한다면 좋겠습니다.

 

덧붙이자면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내용인데 제국 역시도 나라가 망하기 전에 정신 부터 몰락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정신이 가지는 힘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정신 차리고 살자! 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기. 이웃을 아끼며 소중하게 대하기. 사람을 귀중하게 여기기 같은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그래요. 우리 멋진 한 해를 맞이해 나갑시다. 기쁨이 함께 하기를! / 2017. 0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