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주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사사기6:14-24)/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7. 1. 25. 01:41

 

주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사사기6:14-24)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여 큰 일을 행할 걸로 기대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2017년입니다. 솔직히 2017년이 오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시절 2017년은 우주 여행과 날아다니는 택시가 일상화되고 인공지능 로봇이 집안일을 하는 공상의 세계로 여겨졌습니다. 뭐 지금 인공지능이야기하고 자율주행차에 관한 이야기가 한참 퍼져나가고 있고 줄기세포에 관한 이야기도 퍼졌지만 아직은 모든게 시기상조입니다. 결정적으로 나르는 택시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우리가 지금의 시대를 상상했던 것은  지금 와서 보면 상당히 과한 이야기였습니다. 인류가 조금씩 조금씩 변하기는 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네 삶의 모습은 본질상 동일합니다.

 

제가 고등학교때 생물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인간은 두종류로 나뉜다. 그래서 배꼽 있는 인간과 배꼽 없는 인간으로 나뉘어서 줄을 서게 될거다”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양반이 상당히 진지하게 얘기했기 때문에 미래에는 그렇게 될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주었는데 3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하면 아직 그런 일은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일자리 걱정, 돈 걱정, 건강에 대한 염려 그리고 가정의 위기에 울고 웃고 성내고 기뻐하며 사는 모습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한 유명한 사람의 처음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우리가 다 잘 아는 유명한 기드온입니다. 기드온의 300용사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처음은 결코 담대하거나 용기있는 용사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냥 어디에나 흔히 있는 비겁하고 소심한 소시민적인 모습에 불과합니다.

 

사실은 이런 사람들이 용기있고 담대한 용사들보다, 영웅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아마 모든이들이 담대하고 용기 있고 영웅적이라면 이 세상은 어쩌면 살기가 더 힘들고 어려워질지 모릅니다. 아무도 남의 말을 안듣고 대의명분에 입각해서 혁명과 반혁명으로 날을 지샐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너만 잘났냐? 나도 한번 해보자’ 하면서 들고 일어날지 모릅니다. 너무 너무 대의명분에만 맞게 살고 또 그러한 삶을 남에게 사회에 강요하기 때문에 인간미가 없어지고 유연성이 없어져서 잘못하면 큰 벌을 받는 그런 사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 옛날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이 다스렸던 사회, 어쨌든 오늘 기드온의 모습은 사실 여기 우리네의 모습과 똑 같습니다. 거리의 장삼이사와 같습니다. 특별히 우리하고 다른 멋진 점은 모르겠습니다.

‘양심에 따라 말하지 못하고 혹시라도 내가 불이익을 받게 되면 어쩌지?’ 또는 ‘저 사람이 당하는 일을 보니까 참 안되기는 했지만 나도 살아야지, 굳이 내 일도 아닌데 괜히 끼어들었다가 피해를 보면 안된다’고  눈을 감는 그런 일은 사실상 우리가 흔히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 기드온이 더 친근합니다. 우리와 너무 똑같은 사람으로 똑 같은 식으로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만 세상에 있으면 결국 그 사회는 지옥이 되어 버립니다. 소수의 기득권자를 제외한 나머지 거의 대다수에게는 지옥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비겁함과 불의에 대한 눈감음과 다른 이들에 대한 무관심이 사회를 점점 악하고 살기 어렵게 만듭니다. 당연히 우리도 그걸 알기는 하지만 불행한 일이 설마 나에게까지 닥치겠느냐고 위안하며 내일 또 내일을 외치며 하루 하루를 연명합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기드온 당시의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통치를 받는 시기였습니다. 미디안은 사실 하나의 나라라기보다는 그냥 부족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너무 처지가 열악해져서 나라도 아니고 일개 부족의 지배를 받는 그런 신세로 급전직하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일정한 패턴이 있는데 평화시에는 범죄하고 형편없이 살다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외적의 침입을 받고 살기가 어려워지면 비로소 ‘우리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외치면 하나님은 한 사람의 사사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이 그 어려움에서 벗어 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그 일에 감사하다가 또 세월이 흐르고 평화가 지속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다시금 범죄하고 또 남의 침입을 받아 아우성치고 하는 식으로 세월이 흘렀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했다고 죄를 뉘우치고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빌 때는 항상 그들의 소원을 들어 주셨지만 이게 되풀이 되면서 그들이 당하는 고난의 시기가 점점 길어지고 나라의 국력은 점점 약해져서 이제는 이웃의 아무에게나 만만하게 보이는 지경까지 왔습니다. 따지고 보면 미디안족은 이스라엘의 건국시조인 모세의 처족입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되풀이 되면서 점점 상황이 나빠졌고 그래서 결국 오늘 본문처럼 미디안 부족의 지배를 받는 지경까지 왔는데 이들은 나라를 유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식민지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방임하다가 곡식이 익어서 추수할 때가 되면 자기네의 가축을 끌고 와서 모든 가축들로 하여금 온 곡식을 남김없이 먹어 버리도록 풀어 놓습니다.

 

그리고 곡식이 없어지면 가축을 끌고 이동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들이 가축을 끌고 와있을 동안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뒷산의 동굴 속이나 산성에 숨어 있다가 이들이 돌아가고 나면 다시 마을로 내려오는 그런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오래 계속되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먹을 양식이 없어집니다. 자기네들이 먹어야 할 곡식을 미디안의 가축들이 먹어 버리니까 견디지를 못하는 겁니다. 물론 그래도 좀 여유가 있는 강자들은 그래서 산으로 올라가서 숨어서 겨우 조금씩 밭을 일구어 먹고 살았다고 보여집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고려때 몽고군의 침략을 피해 산성으로 섬으로 도망간 것 하고 비슷합니다. 미디안 부족은 자기네들의 수가 적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쳐들어올 때는 아말렉과 동방사람들까지 합세해서 쳐들어 옵니다.
4절에 보면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그러니까 곡식밭에 와서 실컷 먹고 가축들로 하여금 뜯어 먹도록 하고 갈 때는 이스라엘의 가축들까지 싹 쓸어 간답니다. 이런 식으로 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시작한 겁니다. 미디안은 이스라엘을 아예 씨를 말려 버리려고 작정한 듯이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집이 세고 사악해서 웬만해서는 하나님에게 돌아가서 잘못했다고 자기네를 살려달라고 빌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없이 살 때가 더 행복하고 좋다’고 끝까지 버티는 족속들인데도 너무 살기가 힘드니까 비로소 하나님에게 기도한 겁니다. 잘못했다고 엎드려 용서를 구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드온을 들어 사용하시기 위해 그를 찾아오신 겁니다.

 

오늘 본문의 조금 앞부분은 이렇습니다. 백성들의 간구를 들으신 하나님은 사자를 보냅니다. 그 천사는 오브라의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았는데 마침 기드온이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기드온이 몰래 타작하러 나올 줄을 알았기에 그를 만나려고 그곳에 나타난 것일 겁니다. 타작마당에서 타작을 했다가는 미디안사람들이 알게 되고 그러면 모든 곡식을 다 빼앗기고 목숨도 잃을 수 있으므로 몰래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는 겁니다. 당시 곡식구하기가 어려웠던 정황을 생각하면 그래도 기드온의 집은 좀 여유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엄밀히 따지면 기드온의 행동은 정말 철저하게 자기만을 위하는 소시민적인 삶입니다. 굶어죽는 이웃도 모른척 그렇다고 적에게 맞설 용기도 없고 그냥 나혼자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몰래 포도주틀에서 조금씩 타작을 하는데 마침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게 됩니다. 기드온에게는 그래도 타작할 곡식이 있었다는 겁니다. 나중에 보면 염소새끼도 나오고 고운 가루도 나옵니다. 그러니 없는 사람 걱정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또 시대가 시대인만큼 남걱정할때가 아니기는 합니다.

 

그의 생각으로는 우연히 만난 것 같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그를 주목하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려고 일부러 사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아마 기드온은 처음에 주의 사자를 보고는 깜짝 놀랐겠지요. 아무도 없을 줄 알고 몰래 타작을 하고 가려고 했는데 사람이 앉아 있어서 정말 놀랐을 것입니다.

기드온을 만난 천사는 기드온을 만나려고 일부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은겁니다. 결코 우연히 만난건 아닙니다. 기드온이 얍삽하게 몰래 여기서 타작을 할 것을 알고 계셨기에 그를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기드온을 만나서는 대뜸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합니다. 아마 여호와의 사자 입장에서는 아주 좋은 말로 기드온을 맞이하는 인사였을 것입니다. ‘너무 인상이 좋아서 앞으로 크게 될 분같다 ’는 말이나 같은 말이지요. 그렇다면 기드온은 답례로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누구십니까?” 이렇게 되어야 일이 될텐데 기드온의 대답은 전혀 다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이렇게 나옵니다. 게다가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주의 사자의 인사에 화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원망한 겁니다. 게다가 자기네가 지금 이렇게 비참하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에게 죄를 뒤집어 씌웁니다.

 

이러한 반응 역시 우리네하고 똑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생시로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이 과연 있을지.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기드온에게는 안통하나 봅니다. 자기에게 그렇게나 좋은 말씀을 하는 주의 사자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면 이럴 리가 없다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미디안에게 넘겨서 죽을 고생을 시킨다고 뒤집어 씌우고 불평하는 말을 하는 미디안은 담이 큽니까 아니면 이기적이며 무식한 인간입니까?

 

이런 말을 막 하는걸 보면 기드온은 큰 용사가 될 자질이 보입니다. 하나님이고 천사고 가리지 않고 막나가는 모습이 정말 담대해 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기드온의 이런 현실 인식은 정말 안타까운 것입니다. 저들이 죄를 저질러서 미디안의 손에서 고통을 받는 것에 대해서 자성의 목소리는 없고 남 탓만 있습니다. 그것도 가장 애매한 하나님 탓만 합니다.

 

그런데 기드온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습니다. 자기들이 잘못 살아서 벌을 받게 되면 자기네를 잡아서 벌 준 사람을 욕하고 원망하지 자기네가 잘못한 것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습니다. 마치 경상도에서 들킨죄가 가장 큰죄인 것하고 같습니다. 우리가 잘못했기에 오늘 이렇게 우리가 형편없는 지경에 처했다고 생각하는 이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경제가 몇 년째 계속해서 후퇴하고 있고 정치적으로 극심한 혼돈 속에 있으며 사람들이 나라도 아니라고 ‘헬조선’이라고 외치는 그 이면에는 우리네가 저지른 죄악 탓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죄가 없고 나는 모르고 그래서 나는 억울하다는 이들만 있습니다. 더구나 이런 이들이 그동안 그 죄악된 곳에서 호의호식하며 권세와 부를 누리고 살아 놓고는 그런 소리를 하니 정말 기가 찹니다. 제가 기가 찬게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기가 차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네 상황을 개선하시기위해서 개혁의 칼날을 빼드신 것이고 회개의 채찍을 휘두르는 것이지 결코 우리가 망하고 사라지도록 채찍으로 징계하시는 것이 아님에도 우리의 회개는 정말이지 요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게 아닙니다. 더 잘되게 하려고 지금 이런 고난이 오는 것입니다. 이걸 슬기롭게 극복한다면 이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 튼튼하고 멋진 민주공화국이 될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장 닮은 지상천국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걸 기회로 좋게 변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환골탈태할 생각은 없고 서로의 탓만 하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도 세상의 등불이 되어야 할 교회는 은행에서 빚내서 예배당만 크게 지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건물경쟁에 돌입했습니다. 개척교회의 95%가 3년내에 문을 닫는 현실에서 나만 살면 된다고 중소형 교회에서 수평이동한 교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대형교회들이 전혀 회개할 줄 모르고 권세와 부에 아부하고 있습니다.

 

성직자 다운 모습은 사라지고 교회다운 모습은 보이지 않으면서 마치 자본주의의 총아처럼 가장 혜택받는 모습을 보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네는 이게 모두 하나님의 은혜고 우리가 잘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축복을 받는다고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헛소리를 지껄입니다.

 

어떤 대형교회 목사님, 이분은 사실 참 좋은 목사님인데 여하튼 이 분이 자기의 사례금이 많다고 하는 이들에 대해서 “성공한 ceo가 그 정도를 받을 수 있지”라고 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실망을 안겼으며 세상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여러분, 개척교회의 95%가 개척 3년안에 문을 닫는데 그 개척교회가 왜 망합니까?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과 교회가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흐려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에 가기를 싫어해서 그런 것도 분명 있음에도 ‘왜 부흥이 안된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고 자아도취에 빠져서 하나님도 무시하고 사람도 무시하고 동료 목사들을 조롱합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중세의 부패한 천주교회를 보는 듯 합니다. 백성들은 굶어 죽어 가는데 그 위에 올라타서 영주와 함께 백성들을 착취하는 그런 성직자들, 옛날 사회시간에 사회선생님이 성직자를 잘못 적어서 승직자라고 적었습니다. 그래서 한 학생이 “선생님 글자가 틀렸습니다. 승직자가 아니라 성직자 아닙니까?” 하니까 “뭐 이렇게 쓰도 된다”고 하던 그 말이 자꾸 생각납니다.

 

교회에 대해서 지극히 비판적이었던 그가 지금의 교회를 봤다면 아마 그때 교회를 비판했던 것을 오히려 미안해 할 정도로 그 당시는 교회가 그래도 제법 역할을 했더랬습니다. 적어도 당시에 기독교인들은 정직과 성실이란 면에서는 인정을 받고 있었는데 최소한 남에게 해는 안끼친다는 공감대는 있었는데 지금은 정직하지도 않고 성실하지도 않으며 청빈이란 말은 어디 외딴 무인도에 버려둔 것처럼 부유함과 사치가 말로 다 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그리고 주로 남에게 해를 끼치는 부류가 바로 기독교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 모양 이꼴이 된 겁니다. 그런데도 소위 사회 기득권층은 어떤 반성도 없습니다. 학자와 성직자들은 끊임없이 이런 사회를 비판하고 견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돈의 노예가 되어서 오히려 자기들도 기득권층인양 이들의 범죄에 끼어서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잘못된 길로 오도하고 있습니다.

 

언론이란 것도 정직하게 사실만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사실을 가공해서 왜곡해서 보도합니다. 그래서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립니다. 사회의 범죄에 일조를 한 겁니다. 그래놓고 사회가 어려워지면 나는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남 탓하기가 바쁩니다.

 

기드온의 말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나는 밥먹고 사니까 나라와 사회라는 것은 나는 모르겠다. 내만 살면 되지 내가 이웃까지 신경써야 돼?’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이웃이 알면 혹시라도 곡식을 꾸러 올까봐 몰래 포도주틀에서 타작하려는 주제에 남탓은 잘합니다. 그는 아예 이웃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함께하는 큰 용사’같은 것은 전혀 반갑지가 않습니다.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잘못되면 남 탓이고 잘되면 내 탓입니다. 지극히 소인배적이며 근시안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드온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보인 모습이 오늘 우리가 보이는 모습의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똑같아서 저도 놀랐습니다.

 

자, 봅시다. 우리가 아무리 잘못해도 ‘그래 괜찮아 괜찮아 전혀 벌을 줄 생각도 없어 그냥 너는 복이나 받고 혼자서 잘 살아라’고 하면 좋겠지요? 그렇다면 그건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 무당의 잡신입니다. 무당은 아무리 비윤리적이고 사회 파괴적인 일이라도 돈만 많이 주면 굿도 해 주고 부적도 써주고 해서는 안되는 일도 되게 해 준다고 하는 아주 비윤리적인 일을 하기에 그게 종교가 못되고 미신으로 끝나는 겁니다.

 

설마 우리 하나님을 무당들이 섬기는 잡귀들과 같이 생각하는 분은 없겠지요? 만일 그런 심보를 가진 분이 있다면 크게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본질상 공의와 거룩을 해하는 일은 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시도에 벌을 내리시는 거룩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매수하려고 아무짝에도 가치가 없는, 오직 인간에게만 가치가 있는 종이 쪼가리를 몇가마를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께는 전혀 어필하지 못합니다. 또 그래야 그게 진정한 신입니다.

 

하나님에게 어필하려고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면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따르고 그의 품안에서 그를 기뻐하며 살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생각날 때 한번씩 찾아서 어떻게 해볼려는 생각, 나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 사회의 범죄와 고통에 관심이 없고 나와 내가족만 생각하는 그런 기도에는 응답지 아니하십니다.

 

지금 나라와 민족을 위한 거대한 사명을 맡기려고 찾아온 하나님의 사자에게 기드온이 이처럼 소시민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랬는데 하나님의 사자는 기드온을 꾸짖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굉장합니다.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이 사태가 누구의 탓이냐고 따지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제시를 하는 겁니다.
‘이 너의 힘으로 구원하라’는 말인데 ‘이 너희 힘’이 어떤 힘이냐면 그건 바로 하나님이 주신 힘을 말합니다. 기드온은 사실 자신이 너무나 미약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래 무슨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용사가 될 만한 자질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뜸 하나님의 사자가 자기에게 찾아와서 내가 너에게 힘을 주었으므로 너는 그 힘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고 하십니다.

 

자, 여기 잘 보면 기드온과 하나님의 사자, 즉 하나님과의 사이에 전혀 대화의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을 탓하고 원망하는데도 “그건 그렇지 않아 그게 어떻게 된 것인고 하니...” 같은 변명이나 설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기드온에게 ‘이 너의 힘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가라’고 하십니다. 이 앞에 단 한번도 내가 너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할 힘을 주겠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기드온의 불평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 속에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는 말만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라고 되어 있지요? 그건 물어 보는 말이 아니라 내가 너를 보냈다고 확언하는 것입니다. 다만 약간 문학적으로 기교를 부린 것 뿐입니다.

 

네가 그렇게나 내탓을 하는데 이제 더 이상 불평만 하지 말고 네 손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이미 너를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파견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네 몸속에 너는 모르겠지만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할 힘이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너에게 준 힘이 있는데 가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게 불평하며 다른 이들에게 탓을 돌리고 앉아 있지 말고 내가 너를 보냈으므로 네가 가서 한국을 구원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다. 그리고 그럴 힘을 이미 내가 너에게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때요? 우리의 몸속에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이미 한국을 구원할 힘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은 정말 가슴 벅찬 사실이 아닙니까?

 

너는 지금 이렇게 낮은 모습으로 비겁하게 소시민처럼 살고 있지만 나는 너에게 나라와 민족을 구원할 힘을 이미 주었다 그러므로 너는 일어나 네 민족을 구원하라는 거대한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문과 방송의 머리를 장식하는 큰 인물이 아닌 것은 뭐 확실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이 민족을 위해서 기도할 거대한 힘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썩음을 방지할 소금의 역할을 주셨다는 것을 그럴 능력도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나라를 구원할 사명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남 탓만 하고 넋 놓고 있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일을 할 사명을 받고 여기에 파송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기드온처럼 소시민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용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이 그렇게 쉽게 지나가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기드온과 하나님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먼저 기드온은 하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서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별로 없습니다. 사람들은 솔직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매우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에게는 자기가 별거 아닌 존재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은 세상에서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기가 일쑤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 와서 자기에게 힘을 주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이건 볼 것도 없습니다.

 

하늘이 나를 선택해서 왕으로 세웠다고, 하늘이 나를 선택해서 민족의 구원자로 세웠다고 난리도 아닐 겁니다. 당연히 자고하고 자부심이 굉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스스로 아직 자신감을 가지지 못하는가 봅니다. 자기의 집안도 약하고 자기는 그 중에서도 더 약한 존재라고 손사래를 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도저히 감당할만한 자가 아니라고 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자기를 높이 평가하고 사명을 맡긴건 좋지만 미디안을 물리치기까지는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기드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미디안 사람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는 말은 미디안을 물리치기가 아주 쉽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제조건이 붙지요? 내가 너와 함게 하리니.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지금 우리가 이렇느냐는 말도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도 나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지 아닌지를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모든 일이 잘되고 형통하면 그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시가 될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방식이 문제가 되고 있지요. 큰 교회를 이룬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시다. 그러므로 그런 큰 교회의 목사가 잘못된 일을 해도 절대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뜻을 오해한 것이고 누명을 뒤집어 쓴 것이고 얼핏 보면 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사실은 그에게 하나님의 큰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뿐만 아닙니다. 나아가서는 부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가난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저주인데 하나님이 그냥 저주할리는 없으므로 뭔가 잘못된 것이 있기 때문에 아직도 저 모양 저 꼬라지로 산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외부의 표시가 기껏 그런 물질에 사람 숫자에 건물의 규모에 있다면 그 하나님은 물신이지 맘몬이지 결코 천지의 하나님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하나님에게 자기가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표징의 구체적인 과정은 생략하고 보면 하나님의 사자는 바위 위에 국을 붓게 하고 지팡이 끝을 내밀어 바위에서 불이 나오게 해서 고기와 무교병을 살랐고 그 사이로 사라지는 표징을 보입니다.
그러자 비로소 기드온은 그가 하나님의 사자라고 믿고 자기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자, 여기서 좀 어리둥절합니다. 분명히 여호와의 사자는 사라졌는데 무슨 이번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아니라 여호와가 직접적으로 언급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여호와는 어떻게 된 겁니까? 도대체 성경의 기술방식은 이해하기가 곤란합니다. 너무 난해합니다.

여기 여호와는 실제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음성으로 그 마음 속에 말씀하신 걸로 보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직접 대면하여 보고 이제 죽게 되었다고 한탄하는 그것까지는 실제 상황이고 그 기드온의 마음속에 한 음성이 들리는데 바로 ‘너는 안심하라’는 말입니다.

 

이건 원문 그대로 하면 ‘너에게 평강’ 솰롬이란 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울고 두려워하며 죽게 되었다고 떨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내가 결코 두려워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그런 마음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확신을 가지게 되자 하나님은 다음 단계로 기드온을 이끄십니다.

이 이후, 그 날 밤에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또 다른 일을 요구하십니다. 이제껏 그에게 용기를 북돋우신 하나님은 이제 그에게 직접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 아주 큰 일은 아닙니다. 아니 또 다른 면에서는 큰 일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반란을 일으켜서 미디안과 싸우는 것에 비하면 작은 일이지만 자기 집안의 종교를 정화하는 그래서 집안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나아가 바알이란 신을 부정하고 여호와 신앙을 세우는 큰 일이 되기도 합니다. 이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볼 때는 바알을 부정하고 여호와를 섬기는 일이 단순하게 보여도 그 당시 사람들에게 바알을 부정하고 여호와 신앙을 찾는다는 것은 아주 큰 일 입니다. 바알신당을 때려부순게 들통나자 사람들은 기드온을 불태우자고까지 주장하게 됩니다. 뭐 그 당시 바알을 훼방한 자라는게 굉장히 큰 파격이었다는 겁니다. 솔직히 사람의 가치관을 바꾸는 일은 의외로 간단하면서도 아주 아주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신관을 바꾸는 일은 정말이지 어렵습니다.

 

제가 가끔 가다가 보수와 진보간의 싸움을 보면 정말 별거 아닌 걸로도 싸우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어떤 경우에 신문에도 나지만 정말 별 것아닌 일, 누구를 대통령으로 지지한다는 그걸 가지고 서로 싸워서 이웃사촌이 원수가 되거나 심하면 칼부림까지 나는 것을 보면 기도 안찹니다. 그러나 당사자에게 그 일은 아주 큰 일 입니다.

 

기드온의 집안에 있는 바알제단을 파하고 아세라 상을 찍고 이게 나무우상입니다. 그리고 산성 꼭대기에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쌓고 아세라 상을 찍은 그 나무를 가지고 장작으로 번제를 드리라는 말은 대외적인 혁명 이전에 집안의 정신적인 혁명을 요구하는 일대 사건입니다.

 

따지고 보면 자기 집안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무슨 나라와 민족을 위한 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수신제가하고 치국평천하 하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과 함께 하려고하면 자기 집안의 바알과 아세라 부터 찍어 버리고 자기 집안의 우상숭배부터 타파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에게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와 반드시 함께 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켜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이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큰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 집안의 종교부터 정화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앞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 집안은 므낫세에서 약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 약한 우리 집에서 조차도 가장 작은 자입니다. 이래서야 외부인들을 동원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횃불을 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친인들 중에 아무도 심지어 가족 조차도 자기의 말을 듣지 않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의 말을 듣겠습니까? 그러므로 반드시 기드온은 하나님이 요구하신 이 일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당신이 나의 주된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한 이렇게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네가 나의 명령을 제대로 지키는 나의 자녀인 표징을 보여라.

 

어떻습니까? 이게 공평한 것 같지 않습니까?

이게 공평하게 여겨진다면 이제 우리가 하나님이 평생 나와 함께 하시고 그가 나의 아버지가 되신 표징을 보이라고 요구하기 전에 먼저 내가 그의 아들 됨과 그의 자녀된 표시를 보여야 합니다. 내가 그의 명령을 제대로 준행하고 그의 법대로 살아 가는 것을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자연적으로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표징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기드온이 하나님이 시키신 이 일을 제대로 해 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드온이 그래도 하나님을 의심하고 이런 저런 표징을 요구한 일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용사는 일조일석에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의심하기도 하고 회의하기도 하고 또는 소심해서 숨기도 하고 엇길로 가기도 하면서 그래도 결국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일을 하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 이 나라와 민족을 구할 길이 열려 있습니다.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저렇고 하면서 비평하고 한탄하지만 말고 이제 그 일을 바로 내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위해 먼저 우리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표징이 요구되어 집니다.

 

그렇다면 먼저 그가 나에게 우리에게 요구하신 명령을 제대로 준행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고 나면 자연적으로 그가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평생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그렇게 한걸음씩 하나님께 더 나아가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바라고 그렇게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그래서 이 나라의 동량이 되기를 또한 원하고 작게는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이 한해 승리의 길을 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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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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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시는 기준이 무엇일까, 어떤 사람을 당신의 일을 위해 사용하시는가 호기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물론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이겠지요. 그런데 살펴보면 기드온도 그렇고, 어딘지 모르게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을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바꿔쓴다면, 우리가 비록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주님께서는 오늘 얼마든지 찾아와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건넨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함께 주님의 일을 하지 않겠니?

 

오늘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함께, 다른 삶을 살아가지 않겠니? 기도하는 삶, 감사하는 삶,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겠니?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겠니?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실테니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하루 하루 경이롭게 맞이해 보지 않겠니?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한다면, 우리는 두 번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스데반은 돌에 맞아서 순교할 때 조차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르게 살기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구별되어서 깨끗하고 청빈하게 사는 삶이란, 얼마든지 우리에게는 선택의 문제이고 결단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성결하고, 아름다운 삶의 길을 담대히 걸어갈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 2017. 0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