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사도행전12:1-19)/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7. 3. 10. 04:10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사도행전12:1-19)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불가능한 많은 일들을 만납니다. 인간의 힘이, 지혜가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결코 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또 거대한 자연재해나 핵폭발같은 경우에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따져보면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혹시 병원에 가보셨나요? 종합병원. 그 동네에는 크게 두종류의 사람밖에 없습니다. 의사를 비롯한 의료종사자와 환자와 보호자들. 그래서 거대한 병원에 온갖 편의시설과 화초를 갖다 놓아도 실제로 병원에 오래 있고 싶어하는 이들은 없습니다. 특히나 현대인들을 위협하는 암같은 경우에 걸렸다하면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사망합니다. 5년 안에. 그러나 암이란걸 모르는 사람들은 살 확률이 무려 1/4정도나 된답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건지.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암환자의 절반이상이 영양실조로 죽는답니다. 암이라는 사실에 입맛이 떨어지고 마음의 평형이 깨어져서 더 이상 삶에 대한 의지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방사선 치료가 면역력을 약화시키고 뭐 그렇답니다. 넘어져서 중풍이 되고 또 치매가 되고 원인도 알 수 없는 희귀질병에 걸리고....이런 것 뿐만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아니 아예 취직을 못하고 사기를 당해서 돈이 없어지고 가게가 장사가 안되서 문을 닫게 되고....이런 것도 우리에게는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큰 재앙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우리의 뜻대로 잘 안됩니다. 한번 살아 볼려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 들어도 제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뭐 우리나라는 이상해서 불법을 저지르지 않으면 큰 돈이 벌리지 않는 나라라고 하는데 여하튼 안타까운 일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삶에서 손을 놓아 버릴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우리는 한달 벌어 한달 먹는 서민들이기에 꼴보기 싫은 세상이라고 외면하고 산속에서 전원 속에서 유유자적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걱정 저 걱정 한두개가 아닙니다. 그럼 우리보고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래서 기도하란 말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란 말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도록 힘을 내란 말입니다. 막연히 남을 위해서 공의를 세우고 우리가 협력하고 하는 것이 자기에게 손해인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다면 우리는 강력한 그리고 아주 효율적인 사회안전망 속에 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실업의 걱정도, 돈이 없어 생명을 포기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남을 위하는 것은 곧 우리를 위하는 것이고 그 속에 있는 나를 위한일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에 상달된다면 인간의 불가능을 넘어서는 인간 이성으로 도저히 수용하기 힘든 놀라운 이적의 장이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믿고 진심으로 기도하는 이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단지 기도할 뿐인 인간이지만 그 기도를 듣고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식농사를 볼까요? 돈많은 부자들도 고위 직에 있는 이들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게 바로 자식입니다. 그래서 자식 때문에 울면서 기도하는 이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아버지가 오랜 노력 끝에 쌓아 올린 것을 아들 때문에 한방에 날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선거에서 표를 얻으려고 별짓을 다했는데 자녀가 그걸 한방에 무너뜨립니다. 우리가 그런거를 한두번 본게 아닙니다. 그래서 자식농사는 마음대로 안되는 겁니다. 그러나 기도만은 그걸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우리 아버지가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도합니다. 그리고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시지만 그래도 우리는 해야 할 일과 나의 소원들을 아뢰기를 결코 주저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성도들이 가진 가장 큰 특권이며 불가능으로 점철된 이 세상의 일들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들에게 주신 가장 강력한 통화수단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전적으로 기도의 내용이 이루어 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 주실 수 있는 능력있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신약의 이대 거장이라고 하면 베드로와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기독교를 유대인에게 정착시킨 이라고 하면 바울은 기독교를 유대밖으로 전파한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를 세계종교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바울이 베드로보다 조금 더 똑똑했던 모양입니다. 베드로는 아무래도 어부다 보니까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바울에 비해 학벌이 좀 그렇습니다.

 

가말리엘 문하라고 한다면 오늘날의 서울대학쯤으로 봐도 됩니다. 그 옛날 조선시대의 화양동서원이나 고려시대의 문헌공도처럼 당시에 유대에서 사립교육기관들이 성행했는데 기숙사도 가지고 있고 시설도 좋은 최고의 기관이 바로 가말리엘이 하는 기관입니다. 여하튼 바울이 성경을 더 많이 적었기 때문에 후세에서는 아무래도 바울의 영향이 더 커진듯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일 뿐만 아니라 많은 이야기 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간증거리라고 해야 되나요? 기적을 몰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원래 기적은 개인의 영달이나 영광을 위해서 나타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이 나타나는 이유는 교회를 세우기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건덕’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래도 교회가 세워지기 전이나 아주 위기의 상황에서 그리고 교회가 아주 약한 곳에서 기적이 많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베드로가 활동하던 당시는 그런 위험한 시기였습니다. 주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 그는 남아 있는 지상의 성도들을 이끌며 당국의 눈을 피해 복음을 전파하고 기독교 공동체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정말 교회에 몰려오는 핍박과 유대인들의 질시 때문에 안팎으로 도전을 받고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보지 않고 주를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모진 핍박과 박해를 이겨내고도 주를 믿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강력한 감동이나 충격적인 기적을 보여주지 않고서는 모진 현실을 이기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제3세계의 선교지에서 아직도 놀라운 이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우리가 종종 듣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유대의 분봉왕 헤롯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 사도를 죽인 사건이 보입니다. 요즘 야고보 순례길이라고 산티아고 어쩌고 하는 그 길을 갔던 사도라고 보면 됩니다. 야고보는 요한과 더불어 예수님을 제일 처음 믿었던 사도입니다. 그리고 최초로 순교한 사도입니다. 물론 그가 주를 믿었던 것은 아마 세속적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기위한 출세를 위한 방편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까지 하게 되는 참 믿음의 사도로 살다가 간 것입니다. 이후에 성경에 나오는 야고보는 사도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본문에서 죽은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요 사도입니다. 여하튼 야고보를 죽이자 유대인들이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대인들이 기뻐하자 헤롯은 백성들의 인기를 더 끌기위해 베드로도 죽이려고 시도합니다.

 

혹시나 싶어서 말씀드리는 거지만 여기 나오는 헤롯은 예수님의 탄생을 맞은 헤롯은 아닙니다. 왕도 아니고 분봉왕에 불과합니다. 나라의 1/4을 다스리도록 로마로부터 위임받은 자입니다. 이 사람은 헤롯의 아들로서 왕위를 물려 받으려 했지만 유대인들이 그를 싫어해서 로마 원로원에 로비를 하는 바람에 왕이 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인기정책들을 많이 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기정책을 펴도 유대인들이 그를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왜냐면 이 사람은 에돔 사람으로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족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계를 깨고 유대의 왕이 되고자 많은 시도를 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나 유대인들이 싫어했던 헤롯이 야고보 사도를 죽이자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은 항상 이와 같습니다. 저들은 똘똘 뭉쳐서 교회와 교인들을 대적하려고 합니다. 자기들끼리는 이해관계 때문에 서로 싸우고 비난도 하지만 기독교를 대항하는 점에서는 뭉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교회와 교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절대로 책잡힐 일은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지켜보실 뿐만 아니라 저들도 우리를 유심히 살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오늘 이야기는 바로 이 헤롯 때문에 생겨납니다. 그는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베드로를 잡았지만 무교절 기간에 베드로를 잡은 즉시 죽이지는 않고 일단 감옥에 가둡니다. 명절에 사람을 죽이지 않는 유대의 관습 때문에 명절이 끝나고 죽이려고 일단 가두어 둔 겁니다. 에돔 사람인 헤롯은 자기가 지극히 유대적이고 유대인의 종교를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에 무교절에 베드로를 죽이지 않고 절기가 끝날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둔 것입니다.

 

지금이야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별 감흥이 없겠지만 그 당시에 이 사건은 기독교에 있어 일대위기입니다. 자칫하면 기독교가 종교로 성립되기도 전에 와해될 수도 있는 절대 절명의 순간입니다. 아무도 베드로를 구해 줄 수 없습니다.

 

베드로를 지키는 군인만 해도 무려 열 여섯명입니다. 네명 한조로 네패를 투입해서 베드로 한명을 지키게 한 겁니다. 그러니까 네 개 조가 한조 당 세 시간 씩 돌아가면서 베드로를 지켰다는 말이고 이것은 결코 경비병들이 자지 않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베드로를 지키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베드로가 헤롯에게는 중요한 인물이고 또 위험 인물입니다. 유대인들은 베드로를 죽이는 것을 보려고 잔뜩 기대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결코 그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제 유월절이 지나면 베드로를 백성들 앞에 끌어내다가 죽이려고 기다리는 겁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헤롯에게 유대인의 인기를 가져다 주고 그로 하여금 아버지를 이어서 유대의 왕이 되게 할 수도 있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렇게나 삼엄하고 중요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놓치면 안되기 때문에.

 

5절에 보면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교회가 이런 비상시기에 기도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분명 로마에는 있었지만 다신교를 부정하고,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것을 부정하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기는 일신교에 대해서 로마인들은 도저히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로마가 허용하는 종교의 자유는 모든 신을 골고루 섬길 자유였지 하나의 신만을 인정하고 배타적으로 섬기는 그런 종교는 아니었지요. 그래서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저것들 정말 골통이다’ ‘광신도다’ ‘내 신이 중요하면 남의 신도 중요하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신도 섬기고 저 신도 섬기고 심지어 살아 있는 황제도 신으로 섬기고 죽은 황제는 당연히 신으로 섬기고 황제의 엄마도 신이 되는  이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로마인들에게 기독교는 박멸해야 될 사악한 집단이지 건전한 종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석방시키려는 어떤 로비도 안통합니다.

 

열 여섯명의 군인에게 둘러싸여 갇힌 베드로를 무력으로 탈취하기도 어렵습니다. 뭐 사실상 실천이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베드로를 무력으로 탈옥시켜려다가는 기독교 자체가 공멸에 처할 겁니다. 공권력에 대한 도전은 로마에 대한 반역이고 이런 반역에 대해 로마는 철저하게 보복하는 걸로 유명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유월절 기간이 끝이 납니다. 마지막 날입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앞에 끌려 가서 그들의 여흥을 위하여 죽게 될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는 전 세계로부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몰려와서 혼잡합니다. 마치 예수를 죽이려던 그때와 너무 비슷해 보이지 않나요?

 

4절에 보면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고 되어 있지요? 이 말에는 ‘끌어 올리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지금 베드로는 평지의 감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하감옥에 갇혀 있다는 말입니다. 두 손과 발에 착고를 차고 두 간수의 사이에 있으며 감옥문은 닫혔고 지하감옥에 있는데다가 감옥문 밖에는 역시 두사람의 간수가 지키고 있습니다. 나중에 보면 첫 번째 간수, 두 번째 간수같은 말들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첩첩이 둘러 싸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결코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내일이면 베드로는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위해 세상에서 모여 온 수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헤롯의 인기를 위해서 죽을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정녕 이제 더 이상의 기적은 없는 것일까요?

 

5절에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쉬지않고 계속해서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흘렀고 이제 내일이면 베드로는 참수를 당하게 됩니다. 탈옥은 꿈도 못꿉니다. 그래서 더 하나님의 손길이 하나님의 이적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부족합니다. 불가능합니다.

 

기적은 보통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을 때 잘 일어 납니다. 우리의 예상처럼 인간의 힘이 미칠 수 있을 때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 그런 때 보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다고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만 기대고 기도할 때 더 잘 일어나는 법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상황을 보면 그는 날이 새면, 이 밤이 지나면 목이 잘려 죽을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누워 자고 있었답니다. 몇시간 후면 사형이 될 터인데 과연 잠이 올까요? 아마 보통의 경우에 사람들은 자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차피 몇 시간 후면 죽을 것이기에 눈조차 감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에게 잠은 죽음에 이르는 전조로 공포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앞에 둔 이는 자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자고 있었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음을 나타내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는 몰라도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임을 확실히 믿고 있기에 잠을 잘 잘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그들을 감옥에서 풀어 준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의 기적이 다시 재연되리라는 기대를 이번에도 할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베드로는 잠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잠이 든 겁니다. 그것도 선잠이 든게 아닙니다. 천사가 옆구리를 강하게 쳐야 할 만큼 깊이 잠이 든 겁니다. 과연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입니다.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면 결코 그렇게 깊은 잠에 빠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을까요? 생각조차 하기 싫습니다. 그런 기적을 바라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도 사양하고 싶습니다.

 

천사가 나타나고 착고가 풀리고 간수를 지나서 감옥 밖으로 나온 일은 비몽사몽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베드로 조차도 지금 일어 나고 있는 일이 환상이라고 생각했답니다. 9절에 “생시인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베드로가 볼 때 그렇게나 철저하게 자기를 구속하고 있던 쇠사슬도 착고도 감옥문도 저절로 열려지고 풀어지고 또 자기들이 감옥 밖으로 나감에도 어떤 간수도 병사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환상이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이제 죽임이 가까워져 왔기 때문에 마치 천국에 한발을 걸친 것처럼 환상으로 천사를 본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럼에도 그는 천사의 명령에 따라 감옥 밖으로 나왔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천사는 그를 남겨두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베드로는 이 놀라운 상황에 정신을 차리고 곧 마가 요한의 다락방으로 갑니다. 이곳은 초대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기도하던 요즘말로 하면 예배당으로 사용되던 곳입니다. 마가 요한의 집에서, 아마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사람들이 예배하고 있기에 그곳으로 간 겁니다.

 

마가 요한의 다락방은 유명합니다. 이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이며 베드로의 통역을 맡았고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행한 사람입니다. 초대교회의 집회 장소가 바로 여기 마가 요한의 다락방이었고 베드로는 감옥에서 풀려난 다음에 제일먼저 걱정하며 기도하고 있을 교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리자 로데라 하는 여자아이가 나와서 영접하려다가 베드로인줄 알고는 너무 기뻐서 미쳐 문도 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베드로가 대문밖에 섰다고 외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이 부분을 유심히 살펴야 합니다.

 

그들, 지금까지 간절히 베드로를 구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던 이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구나! 할렐루야”가 아니라 “네가 미쳤다”입니다. 여러분 이게 이해가 되십니까?

 

이들은 베드로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지만 정작 베드로가 풀려나서 집으로 오자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이성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 반응이 ‘미쳤다’입니다. 정작 베드로가 풀려난 것을 믿지 않을거면 그들은 도데체 왜 기도한 거지요? 도대체 무얼 기도한거지요?

 

베드로는 비록 죽어도 하나님의 품으로 잘가게 해 주세요? 베드로가 죽고 난 다음 더 이상의 성도의 희생이 없게 해 주세요? 우리들의 목숨을 살려 주세요?
설마 이런 기도를 하고 있지는 않았겠지요?

 

그래도 로데가 계속해서 베드로가 맞다고 주장하자 “그러면 그의 천사라”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데는 장미라는 뜻이고 아마 마가 요한의 집에 있는 어린 계집종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른 성도들이 심지어 어린 소녀보다 더 믿음이 약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세상물이 많이 든 우리 어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그대로 받아 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나에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경험과 지식과 상식으로 가공되어서 들어오기 때문에 주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것저것 생각하는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뇌가 받아들이지 않는 기적을 보고서도, 듣고서도 믿지 못합니다. 내가, 내 눈이 그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은 결코 듣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기적들을 거부하고 그렇게 되자 결국 오늘날 교회들에서도 기적이 점점 사라지게된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성령님의 역사를 부인하고 의심하고 그의 역사를 제한하게 된다면 성령님은 우리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시며 역사를 쉬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 한반도에 교회가 부흥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성령의 역사를 간구하는 기도이며 그런 믿음이며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성결을 유지하는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미 성결하지 못하여 더럽다면 회개하고 다시금 눈처럼 희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실 것입니다. 그는 거룩한 영이기시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행동이 다르게 되면 그건 우리가 정말 간절히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풀려 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고 해 놓고는 정작 베드로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말은 믿지 않는 그런 황당한 일은 일어나서 안됩니다. 비가 오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고는 우산을 챙겨가는 아들을 나무라는 아버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마가의 다락에 모여 있었던 그들은 정말로 기도의 능력을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두뇌로 성령의 무한한 능력을 제한하지 맙시다. 이건 되고 저건 안되고 이렇게 나누지 말란 말입니다. 나의 경험과 나의 지식과 나의 사고체계가 우리 하나님을 제한하고 속박하도록 두어서는 안됩니다. 왜냐면 우리 하나님은 어디에서든 성도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치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가 어려울수록 더 놀라운 일을 행하시며 홀로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며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며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주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겁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기적이 나의 눈앞에 더 이상 성령의 기적은 없다고 주장하는 21세기 이 한반도에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역사가 지금도 나를 보호하시며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 그러한 멋진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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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베드로를 두고 기도했는데, 정작 풀려나니까 믿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황당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합니다. 이번 주에는 제 아버지께서 계단에서 넘어져 많이 다치셔서 정말 큰일날 뻔 했습니다. 머리를 다쳤는데, 피도 흥건하고, 구급차를 불러 큰 대학병원에서 CT까지 찍어야만 했지요. 다행히 머리에는 이상이 없다고 하네요. 옛날 중국영화에서 본 것 같은데 사람은 사실 쉽게 죽는 약한 존재는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만한 걸 천만다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하나님의 보호와도 같다고 홍 목사님이 설교했던게 기억납니다.

 

저는 영화 리뷰를 쓰면서, 별 일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도 실은 참 좋은 일인 것 같다 라는 말을 가끔 글 말미에 쓰곤 했는데, 그게 정말로 이번 주에는 현실이 되었네요. 사건 사고로 물들어 버린 하루는 자극이 될 수도 있지만, 자칫 비극이 될 수도 있어서 두렵기도 합니다. 시편 23편 처럼 주님께서 물가로 인도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거기에 쉼과 회복이 있어서, 우리가 다시 힘내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해야 겠습니다. / 2017. 03.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