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무불 가운데서도 건지신다 (다니엘3:1-30)
우리는 지금 삼주째 다니엘서를 보고 있습니다. 오늘도 역시 다니엘서이기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다니엘은 빠져 있습니다. 가끔가다 이렇게 질문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때 다니엘은 어디에 있었나요?
성경학자들은 이때 다니엘은 나라의 중요한 임무를 맡아서 외국에 사신으로 갔기 때문에 국내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설로는 왕이 도성을 나갔기 때문에 왕을 대리해서 도성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뭐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기에 일단 우리는 본문에 집중하기위해서 다니엘 없는 다니엘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꿈을 알아 맞추고 게다가 해석까지 하고 난 후에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이 참 신임을 인정하고 다니엘을 바벨론 지혜자의 우두머리를 삼았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의 요청대로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의 통치자로 삼았습니다. 아마 군수 정도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헤피엔딩으로 끝나는가 싶었는데 느부갓네살의 교만심이 또 도집니다. 이 사람은 고대의 강력한 대제국을 이루었기 때문에 자기가 굉장히 잘난 영웅이고 또 하늘에서 특별히 자신을 인정해서 직통으로 계시를 내리는 선택받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는 망상에 사로잡힌 느부갓네살은 두라 평지에 금신상을 세웁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금신상이 이전에 느부갓네살의 꿈에 나왔던 신상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자기를 상징했을 거라고 말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신상이 느부갓네살의 재위 18년째인 주전586년 예루살렘을 완전히 함락한 직후에 세운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의 활약으로 꿈의 내용을 알게 되고 그 꿈을 알게한 놀라운 하나님 앞에 굴복했지만 그 하나님이 보호하는 유다를 멸망시킨 자기가 실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신이라고 하는 교만한 마음에 사로잡히게 된 때에 자기의 신격화를 위해서 두라 평지에 금으로 신상을 만든 것으로 봅니다.
다니엘의 꿈해몽 사건이 느부갓네살2년에 일어났으니까 한 16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보여 집니다. 뭐 이 정도면 충분히 옛 기억을 잊고 교만해 질만 합니다. 사람의 결심이 사실 그렇게 오래 가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좋은 것만 기억하고 그것도 약간 자기에게 좋게 왜곡시킵니다. 이런 면에서 느부갓네살이란 사람은 그래도 오래 참은 겁니다.
느부갓네살 뿐만 아니라 고대인들은 신의 힘을 그 신을 섬기는 나라나 민족 또는 부족의 흥망성쇠와 연관 짓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을 자기가 멸망시켰으니까 자기가 또는 자기가 섬기는 신이 하나님보다 더 강력하다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하게 되는 겁니다. 이미 유다가 망했으니 더 이상 하나님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위대함을 만천하에 뽐내려고 금 신상을 두라 평지에 세운 겁니다.
사람은 이와 같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하나님 앞에 겸비한 모습을 보이다가 조금만 자기의 형편이 나아지면 바로 자고해서 하나님 앞에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는 하나님의 간섭을 오히려 귀찮아 합니다. 이게 사람 몸에 아마 죄성이 깊이 깊이 박혀 있는 모양입니다. 마치 한동안 죄를 저지르지 않다가도 몸이 조금만 편해지면 죄악을 저지르고 싶어 지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신상이 금은동철흙으로 되었다면 이번에 금신상은 문자 그대로 모두 금입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이 꿈을 해몽하면서 바벨론이 바로 우상의 황금 머리 부분이라고 말한 것이 인상 깊었나 봅니다. 그러면 진짜로 내가 황금의 시대를 열어야겠다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크기가 굉장합니다. 높이가 육십규빗 넓이가 여섯규빗이랍니다. 그러니까 높이는 한 30m. 넓이는 3m. 아파트 십층 높이보다 높다고 보시면 됩니다. 보통 인간의 신체 비율은 높이와 폭이 약6:1입니다. 그런데 이건 10:1이지요? 아마 신상은 위에 있고 밑에는 받침대였을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과 비슷한 비율로 만들고 그 밑에 받침대까지 포함하는 바람에 높이와 넓이가 이렇게 기록된 거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모두 금으로 만든 겁니다. 음, 금이 그렇게나 많다는 것은 좀 그런데 ....
여하튼 이것을 두라 평지에 세웠기 때문에 멀리서 봐도 아주 눈에 잘 뜨입니다. 두라 평지가 어딘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여러 가지 설을 종합해 보면 바벨론 도성과 아주 가까운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느부갓네살은 수도 부근으로 전국의 모든 관리들은 다 불러서 자기의 금 신상에게 절을 하게 함으로써 충성심을 시험해 보려 한 것입니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서 금이라 번쩍 번쩍 빛이 나기 때문에 아주 멀리서도 잘 보일겁니다. 그래서 이 금신상은 바벨론의 영광과 부를 아주 잘 나타내 보여 줍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바벨론에서는 벨신의 상을 6m의 높이로 세웠는데 그 신상 옆에 식탁을 22톤의 순금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바벨론이 정말 황금의 나라가 맞는 모양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이렇게 자기의 금신상을 세운 후에 전국의 모든 관리를 다 두라 평지에 모읍니다. 중앙관리뿐만 아니라 지방의 관리들도 모두 모이게 합니다. 그리고 모두 신상 앞에 줄을 지어 세웁니다.
이때 선포하는 자가 큰 소리로 말합니다. 나팔과 피리소리를 비롯한 악기 소리가 나면 모두 금 신상에게 절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절하지 않는 자는 풀무불 속에 던져 넣는답니다.
이 풀무불은 절하지 않는 이들을 처벌하려고 일부러 만든게 아닙니다. 금 신상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풀무불이 있습니다. 용광로에서 금을 녹여서 금 신상을 만들거니까 풀무불이 있는데 두라 평지에 선 사람들이 그 풀무불을 직접 눈으로 보면 엄청난 위협을 느낄겁니다. 그러니 왕의 명령을 거부할 엄두를 아예 낼 수 없습니다. 바벨론이 무슨 북한도 아니고 금 신상에게 절 한번 안했다가 타죽게 생겼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악기 소리가 울리자 모든 신하들이 일제히 금신상에 절을 합니다. 모든 이들이 절을 하는데 엉 저 멀리에서 그대로 뻣뻣하게 서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갈대아 사람들이 나와서 이들을 고발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내용이 아주 독특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이거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지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금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져 넣는다는 말도 확실히 선포되었습니다. 그래서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은 이 세사람을 풀무불에 던져 넣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 앞부분에 몇마디가 더 붙어 있습니다.
“왕이 세워 바벨론 지방을 다스리게 하신 자이거늘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어떻습니까?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다고 해서 왕을 높이지 않는다는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왕이 섬기는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도 왕에 대한 충성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고발하는 자는 일부러 그의 죄를 과장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 세사람이 배은망덕의 전형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이를 침소붕대라고 합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맨 앞에 나오쟎아요. 유대사람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약소국 유대의 포로 주제에 높은 자리에 오른게 싫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네 신만 참 신이고 다른 모든 신을 부정하는 그들의 유일신관에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이 신도 섬기고 저 신도 섬기고 그렇게 되면 세상과 둥글게 이 세상과 그렇게 잘 갈 수 있을 터인데 이들 유대인들은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바벨론에 살면서 바벨론의 관리면서 왜 바벨론의 신들을 섬기지 않는지에 대해서 평소에도 불만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을 고집하고 다른 모든 것들을 배척합니다. 너무 배타적입니다. 그래서 항상 두고 보자며 이들을 노려 보는겁니다. 그런데 종교 문제를 제외하고는 이들에게서 뭔가 과실을 책잡을 만 한 일을 찾아 낼 수가 없습니다. 성실하고 진실되면 또한 유능하기 까지 합니다.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겁니다.
그런데 마침 왕의 칙령에도 불구하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은 것을 보고 평소에도 저들의 성공과 지혜가 질투가 나서 견딜 수 없었기에 기회는 이때다 싶어서 그들의 없는 죄도 마구 만들어 내는 겁니다. 사실 진실된 그리스도인에게 죄는 예수 믿는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누군가에게는 괘씸죄가 되는 겁니다.
사실 왕의 입장에서는 좀 섭섭합니다. ‘내가 저를 얼마나 이뻐했는데 어떻게 나에게 반항할 수 있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이들이 절을 하는데 저들만 절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안봤으면 모르겠는데 나도 보고 수많은 이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뻣뻣하게 서 있다는 것은 왕의 체면을 전혀 세워주지 않은 것입니다.
갈대아 사람들은 사실 다니엘과 세친구들 때문에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워낙 뛰어난 두뇌와 신통력을 가지고 있어서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을 만큼 대단한 사람들이기에 정상적으로 경쟁해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 자기들에게 패해서 나라가 망한 약소국 유다의 포로들이 건방지게 자기의 신을 섬기지도 않고 그 신을 우상이라, 말하지 못하는 우상이라 비웃으며 자기네 신앙을 전혀 존중하지 않습니다.
왕이 신이라고 하는 사상이 중동지역에 있었는데 이런 것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왕은 사람이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자기가 왕같으면 정말 화가 날만합니다. 그러함에도 왕은 어떻게 된건지 이 사람들을 총애하고 이 사람들을 두둔합니다. 그래서 더 화가 납니다.
동족이 아니라 이민족을 더 사랑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정말 일처리를 빈틈없이 합니다. 게다가 아주 유능합니다. 왕이 싫어할 수가 없습니다. 업무면에서 보면 그렇게 뛰어난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속으로만 앙앙불락하고 있었습니다. ‘어디 두고보자’그래요 ,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도를 이렇게 벼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잘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 완전히 벌거벗고 있다고 생각하고 전혀 감추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로 감출수가 없쟎아요. 그런데 이런 처지의 기독교인이 특히 목사가 교회를 세습하고 그걸 감추려고 뭐 분립이니 합병이니 하고 은퇴를 했음에도 담임목사를 모시지 않고 ...꼼수를 부린다고 해서 세상사람들이 이걸 모르겠습니까? 하나님이 이걸 모르시겠나요?
제발 이런 낯부끄러운 짓은 하지 맙시다. 할려면 차라리 교회라고 하지 말고 기업이라고 하던가. 제발 정신 차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라도 좋사오니 하면서 다니는 교인들은 도대체 뭡니까? 저들 역시 불법의 공범입니다. 저들이 불법을 따르지 않고 비난했다면 어떻게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 질 수 있었겠습니까?
더 이상 기독교인의 비리가 교회의 비리가 목사의 치부가 저녁뉴스를 통해서 전국으로 중계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도 정말 부끄럽습니다. 목사라고 하는 이 신성한 단어가 이제는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이때 외국으로 사신의 임무로 나갔기에 국내에 없었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왕이 없는 왕성을 지키기위해 왕성을 지켰다는 설이 있습니다. 다니엘을 위해서는 참 다행입니다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그만 꼼짝없이 금신상에게 절하게 된 겁니다.
만일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져져 타죽을 겁니다. 솔직히 참 고민되는 부분입니다. ‘그까짓거 눈 딱감고 금신상에게 절 한번 하는게 무슨 죽을죄인가? 하나님도 이해하실거야. 우리는 항상 죄인이고 회개하면 또 용서해 주실 거야!’
또 눈앞에서 펄펄 끓는 풀무불을 보면 아무래도 막연히 상상하는 것에 비해 더 섬찟합니다. 그래서 더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자 하는 용기가 안생깁니다.
어떻습니까? 그럴듯하지 않나요? 지금 절을 안하면 죽이겠다는데 한번 하고 회개하면 되지 절한번 안해서 죽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이 세친구들은 절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절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꼼짝없이 왕의 명령을 거역한 죄로 풀무불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세계의 여러나라 사람들이 이 자리에 있었겠지만 유독 유다사람들만 문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신관으로는 다신론이기 때문에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에 절하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그런데 유독 유다의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자, 한번 생각해 봅시다. 당시 두라 평지에 유다의 후손들은 이들만 있었던게 아닙니다. 아마 유다의 포로들이 더 있었을 것입니다. 열왕기하에 보면 느부갓네살이 그달리야를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한 사실이 나오는데 이들은 그럼 절을 했을까요? 당연히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풀무불 속에 던져지는 사람 명단에 없지요. 그렇게 다 같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부해도 결국 목숨의 위협 앞에서는 신앙이고 민족적 자부심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에 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사람만은 거부했기 때문에 더 큰 문제가 된 것입니다. 물론 더 대단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셔서 그들을 보호하게 된 것입니다.
왕은 이 소식을 듣고는 13절에 “노하고 분하여...끌어오라 말하매” 보세요. 왕은 자기의 권위를 손상시킨게 자기의 명령을 거역한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는 소식을 듣자 노하고 분하여 끌어오라고 명했습니다. 노하고 분하여는 비슷한 말인데 이걸 연달아 사용할만큼 화가 났다는 겁니다.
이들이 왕의 앞에 끌려 나오자 화가 난 가운데서도 왕은 이들에게 한번 더 기회를 줍니다. 아마 왕도 이들의 뛰어난 능력이나 인품이 아까워서 죽이기 싫었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자기의 회유에 감복해서 저 콧대 높은 것들이 신상에 머리를 숙였다고 홍보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기회를 줄테니 악기 소리가 나면 금 신상에게 절하라고 타이릅니다. 악기소리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마 절하라는 신호음일 뿐만 아니라 금신상의 낙성식을 축하하고 더 장엄하게 만들기 위한 일종의 오케스트라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러나 이 소리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켜야하는 시련의 소리인 것입니다.
왕이 직접 신하에게 이렇게 기회를 주고 타이르는 일은 잘 없습니다. 특히나 느부갓네살2세는 폭군으로 유명한 사람인데 정말 엄청나게 많이 양보한 겁니다. 이만하면 왕의 체면을 세워줄만 합니다.
안그래도 이렇게 다시 한번 살아날 기회를 줄까 싶어서 갈대아 사람들이 고발할 때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10절부터 “왕이여 왕이 명령을 내려...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음을 당하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세친구를 고발하기 전에 혹시라도 왕이 말을 바꿀까 싶어서 먼저 확실하게 왕이 내린 명령을 상기시킵니다. 왕의 입에서 나온 구두 명령은 결코 변개하지 못하는 법이 되기 때문에 그걸 못박기 위해서 미리 이렇게 말한 겁니다. 그리고 세명의 유다인들을 고발했습니다. 그럼에도 왕은 노한 가운데서도 세친구들을 아껴 그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줍니다. 만일 이 기회에 금 신상에게 절해버리면 고발한 자기들은 뭐가 됩니까?
아마 평생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미움을 받아서 복수의 대상이 될 겁니다. 적어도 이 고발자들은 그렇게 여길겁니다. ‘누가 자기를 죽이려고 한 자들을 용서할까?’ ‘그래서 이들이 결코 높은 자리에 앉아서는 안돼’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왕이 너무 총애했기 때문에 아마 이 세친구들은 더 미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뭐 우리가 생각해도 충분히 그럴만합니다. 이민족 포로들이 높은 자리에 앉고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전혀 죄가 없어서 비난할 거리가 종교문제 밖에 없다면 속에서 천불이 날만합니다.
이렇게 왕의 양보를 받아서 두 번의 기회를 받은 세 친구들도 너무 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이건 정말 왕에게 정면 대결을 선언한 겁니다. 왕의 체면을 전혀 세워주지 않습니다. 수많은 신하들이 세 친구들의 대답을 지켜보고 있는데 그들은 왕의 손에서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 내시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왕의 이름을 막 불러 제낍니다.
조선시대에 왕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냥 왕이라고 주상이라고 금상이라고 불렀지 그리고 죽고 난 다음에 묘의 묘호로 무슨 영조니 정조니 철종이니 했지 그들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세 친구들은 담대하게 왕 앞에서 그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건 이미 자기의 목숨을 내어 놓고서라도 결연하게 항쟁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들에게 목숨은 전혀 문제가 안 되나요? 이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살았는데 아직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수많은 이들이 가진 것이 많아 질수록 지위가 높아 질수록 잃을 것이 많아 질수록 믿음이 변합니다. 가난할 때 낮은 자리에 있을 때 백수일 때는 저에게 뭐만 해 주시면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뭐를 하고 뭐를 하고 일생을 주님을 사랑하고 하면서 말을 잔뜩 늘어 놓습니다 만 막상 세월이 흐르면서 초심을 그대로 유지하는 이는 참으로 드뭅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자기가 잘나서 받은 걸로 생각하고 하나님에게 드린 서원은 깡그리 잊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걸 잊으신게 아닙니다. 다만 그가 그 서원을 이행하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 뿐입니다. 이걸 오해해서 사람들은 자고하다가 결국은 몸과 마음을 버리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 들은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한 말을 어기는 것은 그를 모욕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희롱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만만하게 여기는 행동이라는 것을.
저는 이 부분이 참 마음에 듭니다.
18절에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나는 하나님이 나를 구해주실 것을 믿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배반할 수 없다는 그 말이 저를 울립니다. 그래요, 아주 적은 이익과 편리 때문에 하나님을 배반한다면 하나님 역시 그를 아주 가볍게 취급하실 겁니다. 지금 당장은 잘되는 것 같아도 그런이의 말로는 비참해 집니다. 하나님이 가볍게 여기시는 이를 누가 들어서 무겁게 존중받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19절에 이 말은 듣고 느부갓네살은 “분이 가득하여...얼굴빛을 바꾸고...평소보다 칠배나 뜨겁게 하라하고”
웃기지 않습니까? 평소처럼 하면 안 타죽습니까? 어차피 타 죽이려고 풀무불을 피워놓고서 평소보다 칠배나 뜨겁게 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괜히 자기가 엄청 화났다는 것을 보여 줄려고 쇼를 한 겁니다.
왕의 이 철없는 쇼 때문에 군대의 용사 몇사람 즉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태워 죽이려고 잡고 있던 이들을 태워죽였답니다. 불이 너무 뜨겁고 격렬히 타면서 아마 이들의 옷에 불이 옮겨 붙었다가 타 죽게 만든 것 같습니다. 솔직히 이 사람들은 무슨 죄입니까?
참 허망합니다. 악인의 밑에 있는 사람들의 목숨은 이와같이 초개와 같이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을 결단코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중하게 여기는 것은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길 정도로 무겁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자, 느부갓네살 왕이 열이 받아서 평소보다 칠배나 뜨겁게 하라고 명령을 한 덕분에 온도가 너무 올라서 태워 죽이려고 던져 넣으러 가던 용사들이 타죽었는데 정작 풀무불에 던져진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전혀 이상이 없이 말짱합니다.
왕이 이들을 보고 깜짝 놀라서 일어나는데 세명을 던져 넣었는데 불가운데서 네사람이 있답니다.
자,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분명히 세사람을 결박해서 던져 넣었는데 불구덩이 속에는 타 들어가는 세사람이 아니라 네사람이 그것도 결박도 되지 않고 멀쩡한 모습으로 걸어다니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그리고 네 번째 사람의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같답니다. 아마 온몸에서 거룩한 광채가 났던 모양입니다. 느부갓네살은 그래서 깜짝 놀라서 일어난 겁니다.
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신학자들은 네 번째 존재를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라고 하는데 느부갓네살은 신들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일단 왕의 눈에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의 종들을 보호하려고 친히 풀무가운데 임한 것은 그의 생각으로는 일대 충격입니다.
전혀 말도 하지 않고 이적도 보여 주지 않고 그냥 자기들이 절하고 제물을 바치는 것을 보고만 있는 인간이 만든 조형물에 불과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를 신뢰한 자기의 종을 보호하기 위해 친히 임재한 그 모습에 느부갓네살은 경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자기의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서 그를 찬양하고 그를 가볍게 일컫는 이들을 죽이고 거름더미로 삼겠다는 새로운 칙령을 반포하게끔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에도 이런 기적들이 있으면 참 좋겠지요?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시고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면 그 어려움에서 우리를 건지시기위해서 역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절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고 왕은 뭐라고 합니까?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종이라고 세 사람을 존대합니다. 황당하지요? 신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낯빛이 변할 정도로 화가 나서 평소보다 풀무불의 온도를 더 뜨겁게 하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용사 몇 명이 죽었는데 이제는 세사람에게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나오라고 합니다.
불 밖으로 나오라는 건 아마 그들이 상하지 않고 자기가 본 것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한 것인 모양입니다.
그럴 리가 없어! 절대로 불가운데서 안전할 수가 없는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만 하면 그분의 뜻에 들기만 하면 우리가 어떠한 어려움에 처했을지라도 우리를 살리십니다.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친히 불구덩이 가운데에 임하셔서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아마 거룩한 광휘에 억눌려서 불이 세친구를 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하듯이 불이 전혀 그들을 사르지 못하는 겁니다. 마치 모세 앞의 홍해처럼 세 친구가 걸어가는 곳의 불이 갈라져서 뜨겁지 않게 다니도록 한 모양입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탄 냄세도 없었더라”
사람이 불에 타 죽지 않고 무사한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 불에 그슬린 흔적조차도 남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마치 아예 처음부터 불이 없었던 것처럼 바깥과 똑 같았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기만 한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불구덩이 속에서도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왕의 불같은 분노 가운데서도 살아나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고 더불어 자기들에게도 더 좋은 일들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수가 없지요.
우리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는데 하나님은 그리 하시고 더하여 복을 쏟아 부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느부갓네살이 아주 웃기는 사람입니다.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죽인다고 하더니만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경솔히 말하는 자는 몸을 쪼개고 그 집은 거름터로 만든답니다. 왜냐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 같은 신이 없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요 우리 하나님 같은 신이 이 세상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유일하신 분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신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통력을 가진 듯이 보이는 무당이나 점쟁이나 박수는 어떻고요? 그거는 사탄이 하나님의 사역을 훼방하려고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들을 자기의 노예로 만들려고 하는 눈속임에 불과합니다. 크고 넓고 성공의 길처럼 보이는 길이라도 하나님의 진정한 길로 가지 않는 자는 반드시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크고 넓고 큰 문을 일단 들어서면 갑자기 낭떠러지가 있어서 그대로 지옥 무저갱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길, 아무도 찾지 않지만 하나님이 가라 명하신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애써서 하나님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결과는 왕의 조서에서 하나님을 높인 것으로 끝이 아니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도에서 더 높아 졌답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군수에 불과했다면 이제는 도지사가 되었다는 그런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까지도 내어놓은 이들에게 결코 공짜로 보내지 않고 하나님의 복을, 상급을 듬뿍 안겨주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서 우리는 너무 기쁩니다.
이제 4장을 보면 느부갓네살은 완전히 하나님에게 순복하고 그를 받들기로 한 것처럼 보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목숨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벼슬이 더 높아 졌고 이제 하나님을 정식으로 믿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왕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높였기에 더 이상의 중상이나 모함은 없을 겁니다. 정말 모두가 다 행복하게 결말이 났습니다.
지금 우리를 한번 보십시오. 우리는 사실 다니엘의 시대처럼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 목숨의 위협을 받는 그런 상태는 아닙니다. 일부 공산국가나 아랍권에서는 예수믿는 것이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리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마음껏 믿을 수 있는 상태로 있고 물질적인 풍요 속에 있습니다. 물론 상대적인 빈곤이 문제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기준에서 보면 밥을 못먹어서 굶어 죽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없겠지요?
그러나 그 좋은 환경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과연 풀무불앞에서도 자기의 신념을 꺾지 않은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같습니까? 아니 그정도는 바라지도 않고 내가 그래도 나의 삶가운데서 먼저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의 명령대로 살리라는 그런 삶의 태도정도를 가지고 있나요?
남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을 조롱거리로 만들려고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그의 욕됨을 막기위해 논쟁할 준비가 되어 있나요? 아니면 자기도 마치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처럼 못들은척 하며 눈만 끔뻑이고 있나요? 어떻습니까?
더해서 교회가 세속화되고 죄악이 침투했다면 이를 몰아내고 막기위해 앞장설 준비는 되어 있나요? 아니면 뭐 그렇게 별나게 믿겠냐. 그냥 조용하게 교회 마당만 밟고 왔다 갔다 하면 되지 하고 있나요?
사탄은 예로부터 우리의 목숨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조종하려 했습니다. 사망권세 앞에 인류는 무릎꿇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앞에서도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앞에 사탄은 도저히 어찌할 수 없어 항복하고 만 겁니다. 사망의 권세가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사람, 세상의 부귀와 향락으로 조종할 수 없는 사람, 그래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그런 기독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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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솔직한 이야기를 쓰자면, 설교 시간에 꾸벅꾸벅, 정신은 온데간데 없고, 문득 아차 싶어서 깨어나보니 마치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주로 저녁시간에 일을 해서이긴 하지만, 설교 시간에 안일하기만 합니다. 변명이지만, 저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야간근무를 하는 분들은 설교 시간이 마치 단잠 시간과도 같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게다가 이 다니엘 설교는 벌써 여러 차례 들어서, 익히 알고 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 하나님은 이 잠꾸러기 신자들을 봐주실까요? 하하, 그래도 다시 설교를 올려보면서, 본문을 차근히 읽어볼 수 있으니 참 즐거운 일입니다.
저는 본문에서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설 수록 비겁해지기 쉽다는 대목에 공감했습니다. 어제 밤 영화를 보는데, 거기에서도 사람이 행복해지면 (잃을게 많아지기 때문에) 겁쟁이가 되고 나약해 진다는 표현이 있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도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보여준 용기는 실로 대단한 것입니다. 한 번만 고개 숙이면, 자신의 지위와 행복을 보장받을 수 있는데도,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확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들의 어리석음(?)은 세상을 움직이고, 왕을 움직이게 되는 전설로 기록되게 되었습니다. 세계를 바꾸는 이들은 어리석고, 우직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저는 좋아합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숭배하지 말라, 지금 이 시대에도 충분히 유효한 경고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날에도 역시 황금, 돈이 우상이 되어서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기독교인은 단호하게 NO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기에서 건져내시는 전능하신 분임을 믿고, 즐겁고 알차게 매일을 살아갈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 2017. 04.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