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사도행전10:1-23)/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7. 9. 19. 01:53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사도행전10:1-23)

 

제가 지난 번에 성령의 인도로 광야길에서 이디오피아 내시를 만난 빌립에 관한 설교를 했습니다. 내시와 빌립의 만남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도 우리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이 두사람의 만남은 조금 과장하면 천년의 만남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다양한 결과를 초래하는 법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인도로 사명과 사람이 만났을 때 그 시너지 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무지무지하게 상승효과를 불러 일으켜서 그 나중이 처음과는 어마어마하게 달라지는 거지요. 우리가 잘 아는 바입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는 과정을 살펴보려 합니다. 이제 복음이 유대인을 넘어 이방에 전파되는 말 그대로 세계종교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그 첫 번을 장식하는 귀중한 만남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런 만남들이 성도들이 예루살렘에서 교회에 대한 박해를 피해 인근지역으로 대피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성령의 역사가 막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앞날은 모르는 겁니다. 위기가 기회가 되고 화가 복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 닥친 박해가 복음이 세계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혹여 나의 잘못이 없음에도 주님을 믿는 중에 어려움을 겪는다면 감사하고 인내하며 소망 중에 기다리십시오. 우리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만나서 복음을 영접한 것은 이방인이 첫 번째로 예수를 믿게 된 기념비적인 일입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만나기 이전에도 이미 하나님을 섬기는 이였습니다. 다만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는데 아마 할례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지 않아도 하나님을 정식으로 섬길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 그걸 거부할 리가 없지요.

 

베드로는 욥바라고 하는 항구 도시에서 은신하고 있었습니다. 욥바로 오기 전에는 룻다라고 하는 곳에 있었습니다. 뭐 욥바나 룻다나 다 사론이라고 하는 지방에 속합니다. 예루살렘 서북부의 갈멜산 평야지대라고 합니다. 갈멜산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와 엘리사의 주 근거지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를 계기로 룻다로 간 것입니다. 다만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서 갔다가 보다는 박해를 피해 흩어진 성도들을 돌아보기 위해 갔다고 봐야 합니다. 요즘 목사들이 심방을 가는 이유하고 비슷합니다.

 

피난지에서 잘 살고 있는지를 보기위해서 룻다로 갔다가 ‘애니아’라 하는 중풍병자를 고치고 인근 욥바에서는 죽은 다비다를 살리고 이제 다시 가이사랴로 가서 고넬료의 집에 세례를 베풉니다.

대개 사람들은 평온하면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습니다. 견딜 수 있는 정도의 시련은 견디고 나가려고 합니다. 목숨이 위험하거나 일대 전기가 없다면 보통은 삶의 터전이나 방식을 바꾸지 않고 어떻게 하든 자기가 현재 있는 곳에서 이겨내려고 합니다. 미지의 세계로 옮긴다는 게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이제껏 익숙했던 것을 바꾼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미지의 세계로 간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것이 바뀐다는 의미이고 이것은 불확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러나 강제적으로 성령께서 성도들을 흩어버리시매 방법이 없습니다.

 

왕왕 여건으로 성도들을 몰아가시면 그게 가장 확실한 소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주위여건이 그럴 수밖에 없도록 나를 몰아갔다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는 거지요.

‘네가 지금 서 있는 곳이 바로 소명’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내가 지금 목사라고 하면 그게 바로 소명이고 내가 지금 군인이면 그게 소명인 것입니다. 내가 뭐뭐 했더라면... 내가 뭐뭐할걸 이런 가정은 가정이지 현실은 아닙니다.

 

시련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는 경구도 있지만 실제로 우리도 어렵고 힘든 일이 없으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면서 오히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 져서 남에게 몹쓸 짓을 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자기도 모르게 목이 뻣뻣해 지고 언사가 퉁명스러워지며 감사를 모르고 남의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대폭발을 경험했고 신자가 무려 20,000명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믿지 않는 이들이 두려워서 가까이 하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배타적인 집단이 되었습니다. ‘너는 들어오지마’ 한 것이 아니라 저들처럼 그렇게 이타적이고 헌신적이며 기쁨에 찬 성결한 삶을 살 엄두가 나지 않아서 선뜻 다가갈 수 없으므로 배타적인 것처럼 보인 겁니다.

 

우상이 온 천지에 만연한 세상에서 일체의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한 하나님만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은 생계와 목숨이 걸린 일입니다. 저들처럼 우상을 거부하게 되면 삶에 어려움을 겪게 될까봐 그래서 두려워서 가까이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비록 기독교로 개종하지는 못하지만 저런 신념에 찬 삶, 성결한 삶이 참 좋구나!’ 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 신념에 찬 삶에 대한 존중이 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와중에 일어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정말 뼈아픈 사건이자 예루살렘교회에 내린 하나님의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이 죽었고 이러한 사건으로 사람들이 두려워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고 기쁨과 감사 그리고 사랑만이 있던 교회에 벌어진 비참하고 불행한 사건은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언제까지나 좋은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탄이기도 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사탄이 교회에 침투할 수 있기 때문에 너희는 닥쳐올 환난을 잘 막을 수 있도록 기도하라.

 

조선이 망하기 전 왜정시대를 견디도록 평양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준비를 시킨 것입니다. 기도로 무장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모든 세상의 어려움을 이겨낼 준비를 하게 한 것입니다.

 

사탄은 결코 남이 잘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합니다. 더구나 성도들이 잘되는 것은 정말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도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하고 시험에 들게 하고 유혹하려 하고 그렇습니다. 가끔가다가는 동료를 통하여서 낙심하게 만들려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갈 때 더 조심하고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몸이 편할수록 더 겸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의 보호와 인도를 간구해야 합니다.

 

높아 질수록, 잘 될수록 스스로 겸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나는 지극히 무익한 종이라 이런 자세로 나가야만 합니다. 초심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고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주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를 믿고 할 그때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롯다에 있는 성도들에게 갑니다. 거기서 애니아의 중풍을 고쳤고 그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답니다.

 

중풍병자 애니아, 8년이나 된 중풍병자를 고쳤다는 소식을 들은 욥바의 성도들이 다비다를 위해서 베드로를 초청했고 다비다가 살아난 이후에도 베드로는 계속해서 욥바에 있었습니다. 신약교회의 초창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막 일어납니다. 기적입니다. 굉장한 기적이지요.

 

이번에는 욥바로 자신을 찾으러 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와서 그들을 따라 가이사랴에 가서 고넬료와 그 식구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점점 커지다가 마침내 유대인사회를 넘어서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확산됩니다.

 

가이사랴는 유대에 속해 있지만 고넬료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탈리아인 즉 로마인입니다. 그것도 시민권을 획득해서 로마인이 된 이민족이 아니라 정통 로마인입니다. 더구나 그는 지금 로마의 영광을 위하여 유대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는 이탈리아 부대의 백부장입니다. 누구보다 더 기독교를 핍박하고 반대할 듯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를 성령께서 선택하셨고 역사하셨습니다.

 

여기서 보면 베드로가 접촉하고 기도한 사람들은 모두 유대인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기본위에서 예수를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외부로 확산되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질적으로 더욱 성숙하고 깊어짐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령 부흥이라는 것을 잘 살펴보면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의 믿음이 성숙하는 것도 참 중요한 부흥이 됩니다. 무늬만 교인이 아니라 참 성도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보면 하나님의 역사는 일방적이지 않고 쌍방적입니다. 뭐 하나님과 사람사이가 쌍방이라는 말이 아니라 여기와 저기에 동시에 역사하셔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는 의미에서 쌍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저 사람에게 뭔가 볼 일이 있는데 정작 저 사람은 나하고는 전혀 접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미리 가셔서 저 사람에게 나와 함께 일을 하라고 명령하셔야만 되는 것인데 나에게만 역사하고 저 사람에게는 전혀 역사하지 않는다면 저 사람과 함께 일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고넬료에 대하여 부정하다고 생각하지 말 것을 환상 중에 보이셨을 뿐만 아니라 고넬료에게는 천사를 보내어 욥바 피장이 시몬의 집에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넬료가 베드로를 자신있게 청할 수 있었고 베드로는 두려워하지 않고 고넬료를 만나러 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아서 사람들이 이리저리 흩어진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임재가 더 잘 체험되어 집니다. 그렇지 않고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끼리 천년만년 살기를 원합니다’라고 했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도 가끔 산기도를 몇박 몇일씩 갈 때 산에서 너무 좋아서 내려오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 아래 세상이 그립기도 하지만 내려올 때는 항상 산정이 그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을 완전히 외면하고 언제까지나 산중에서만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만일 성도들이 자기들끼리만 언제까지고 좋아서 그렇게 모여 있고 세상사람들은 그들이 두려워서 가까이 가지 않는 그런 상태가 계속되었다면 기독교는 먼 곳에 소수의 사람들이 믿는 약간 독특한 종교집단?  만물에 신이 있다고 하는 보편적인 신관이 아니라 유일신만을 인정하는 배타적인 집단? 아니면 좋게 봐줘서 유대교의 혁신을 외친 개혁파로 존재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존재가 미미해지고 그리고는 사라졌을 것입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달리야 부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여기서 이달리야는 이탈리아를 말합니다. 로마를 수도로 하는 그 이탈리아가 맞습니다. 가이사랴는 헤롯이 ‘가이사 아구스도(케사르 아우구스투스 또는 시저 어거스트)’를 기념하기위해 만든 도시로 요즘말로 하면 신도시입니다. 그리고 이곳은 행정상 유대의 수도입니다.

 

예루살렘에 로마군이 주둔하고 우상 신전을 세우는 것은 유대인들을 끊임없이 반란에 내몰 우려가 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가이사랴를 수도 삼은 겁니다. 그래서 가이사랴는 완벽한 로마식의 도시이고 유대속의 이방입니다. 원형경기장이니 이교의 신전이니 목욕탕이니 거대한 로마식 회랑같은 것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당연히 이 도시에는 로마 총독이 주둔하고 있고 로마부대 역시 주둔하고 있습니다.

 

아마 고넬료는 식민지 부대가 아니라 이탈리아 본토 즉 로마본토에서 온 군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로마 역시 엄격한 신분제하에 있었는데 평민들은 군대에 투신하면 최고로 승진해도 백부장에 그칩니다. 그 이상 올라가기 위해서는 귀족이거나 특별한 공훈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고넬료 역시 더 이상 승진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이디오피아 내시와는 달리 완벽한 이방인으로 군대에서 제대하면 본토 로마로 돌아갈 수 있는 로마시민권자였습니다.

 

이 말은 고넬료가 복음을 받아 들인 것은 로마에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 귀중한 계기가 되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디오피아 내시가 가사로 가는 길에서 만난 빌립에게 복음을 전도 받았고 그래서 이디오피아가 복음화되는 계기가 된 것처럼 이제 고넬료라는 이탈리아 부대의 백부장이 복음을 받아 들임으로써 복음이 유대인이라는 경계를 넘어가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참 고넬료가 복음을 받아 들였다고 해서 고넬료 한 사람만 예수를 믿었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이 말은 그 집의 권속들이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가족들 친척들 하인들 혹은 신임하는 부하들.

 

1.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가이사랴는 욥바에서 북쪽으로 50km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유대 안에 있지만 이방인들이 더 많이 사는 곳입니다. 그래서 로마군대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곳에 진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식민지 현지병이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파병된 정예부대입니다. 그 부대의 백부장이 마침내 복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를 박멸해야 할 전선의 최선봉에 서야 할 사람이 오히려 복음을 받아 들였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군인들은 매우 보수적이고 애국심이 강하며 이방인의 것에는 매우 배타적입니다. 더구나 다신교 사상이 판치는 로마에서 유일신을 섬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면 로마의 군대에서 공식적으로 섬기는 전쟁의 신이니 술의 신이니 여행의 신이니 군인의 수호신이니 하는 이 모든 신의 제의에 참석하면 우상숭배가 되는데 그런 우상숭배는 절대로 안된다는 유일신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로마는 살아 있는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려고까지 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로마군 백부장이 예수를 믿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지금 가장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는 곳을 뚫으려고 합니다. 복음이 이처럼 역동적이라는 사실은 성령의 힘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무 너무 강력하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아무도 막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2.경건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고넬료를 설명하는 글은 이렇습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제가 이미 말씀드렸지만 로마군인의 백부장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에게 항상 기도하는 일은 실제로 엄청나게 애로가 많습니다. 뭐니뭐니해도 로마는 황제를 현인신으로 섬기는 나라고 군인들은 특히 여러 신들을 잡다하게 섬기며 군대의 공식적인 우상숭배행사가 많이 있습니다. 우상숭배를 엄격히 금지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이 사람을 매우 힘들게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솔직히 기독교인이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인성이 좋고 예의가 바르며 성숙된 민주시민인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졸렬하고 이기적이며 적당히 범법도 하고 그냥 그렇게 복을 간구하면서 사는 보통 사람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기적인 면에 있어서 세상보다 더 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달라고만 기도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이기적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글이 생각납니다. 총신교정에 서 있는 돌비에 목사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 성도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라.

고넬료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온 집안이 함께 회심했고 또 백성을 많이 구제했다고 합니다. 식민지에 주둔하는 군대 장교는 보통 식민지 백성들을 아주 우습게 여깁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사람취급을 안합니다. 그런데 이 고넬료는 백성을 많이 구제했다고 합니다. 예수를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된 것이지요.

 

당시에 고넬료 같은 이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즉 유대인의 회당에 참여하고 관습과 율법을 존중하기는 하지만 할례는 받지 않은 그런 사람. 사실 이방 종교가 대부분 음탕하고 저속했기 때문에 경건한 이들에게는 맞지 않는 면이 많이 있었고 그래서 당시에 윤리적이거나 양심적인 이들에게 유대교는 상당히 인기를 끌었습니다. 다만 할례라는 한가지만 행하지 않았을 뿐 나머지는 모두 지키는 이들. 아마 고넬료도 그런 이들 중 한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특이한 것은 고넬료가 백성들을 구제했다는 대목입니다. 구제도 그냥 한게 아니라 ‘많이’ 했답니다. 우리 기독교도들이 가장 먼저 행해야 할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그 ‘이웃’의 가장 앞자리에 부모형제가 있습니다. 가족이 있습니다. 그걸 생략하고 생판 모르는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사랑이라는 이 단순하면서도 절대적인 명제를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사랑없는 기독교인만큼 무서운게 없다고 율법적으로 정죄만 하는 깐깐한 사람이 되면 여러 사람을 힘들게 하지요. 그런데 고넬료는 백성을 많이 구제하는 일을 했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먼저 실행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행함이 없는 말로만의 믿음이 판치는 세상에서 상당히 특이한 자, 그는 로마인이요 이방인입니다.

 

게다가 고넬료는 구제에 그치지 않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를 그냥 어쩌다 한번씩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항상 기도합니까? 모든 일에 제일 먼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시작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간구합니까?

 

이 세가지를 실천한 사람 고넬료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신비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넬료의 믿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3.환상 중에 천사가 나타나
제 구시쯤에 환상 중에 천사가 고넬료에게 나타납니다. 유대시간으로 제구시는 오후 세시를 말합니다. 이 말은 기도시간이란 말이고 기도 중에 고넬료가 환상을 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 시간에는 제사장이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렸고 이 시간에 기도한다는 것은 바로 그 희생제사에 참예한다는 의미가 있어서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기도시간입니다.

 

그래서 고넬료가 비록 유대인은 아니었지만 유대인들처럼 제 구시에 기도했다는 것이고 그 기도시간에 천사의 환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밝히’ 보였다는 것을 보면 비몽사몽간에 본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보았다는 겁니다. 고넬료가 나타난 천사를 보고 “주여 무슨일이니이까”라고 한 것을 보면 그는 정말 확실하게 본 모양입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천성산에서 기도할 때 첫날밤에 천성산의 입구 무지개 계곡에서 잠이 들었는데 물가여서 자꾸 밤에 일어나게 되었답니다. 뭔가 좀 무섭기도 하고 이상해서. 그랬는데 꿈속에서 주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너의 뒤를 지켜줄테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잠을 푹 잔 기억이 납니다. 뭐 그리고는 천성산 이봉으로 올라갔고 뭐 그렇기는 합니다만 요즘은 천성산의 멧돼지 때문에 가기가 좀 꺼려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천성산에서 잘 때마다 멧돼지를 만나니 확실히 좀 그렇습니다.

 

옛날에 서울에 있을 때는 도봉산에 갈 때 개들을 만났는데 여기는 멧돼지입니다. 세월이 많이 바뀐건 아닌데 산에 짐승들이 많아 졌나 봅니다.
여하튼 고넬료는 기도시간에 환상을 또렷하게 보았습니다.

자, 고넬료에게 천사가 나타난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천사는 먼저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바가 되었으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지금 사람들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를 청하러 보내는 것이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고 기억하신바가 된 때문에 내려주신 특별한 은총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고넬료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그를 최초의 이방인 개종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성경책에 기록되게 하셔서 오고 오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알도록 만드셨습니다. 아마 고넬료는 자기가 이처럼 유명해 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우리는 또 한가지 의문을 갖습니다. 만일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지 않고 천사가 직접 ‘너는 구제도 열심히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보기 드물게 진실된 신앙을 가졌으므로 내 너를 어여삐 여겼으니 내 너를 성도로 칭할 것이니 이제부터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예배하라’ 이렇게 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천사가 굳이 베드로를 청하도록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그의 사역의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도구라고 하면 너무 이상합니까? 좋아요.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인간을 움직이기 보다는 자기의 사역자를 사용하여 그로 하여금 주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을 더 선호하십니다. 그것은 그의 사역에 중심적인 역할을 인간으로 하게 함으로써 그에게 성취감과 복을 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자기가 만드신 인간으로부터 영광 받으시는 것을 즐겨하십니다. 사실 그가 우리 인간을 만드신 목적 자체가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 만드셨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자기가 만드신 인간이 행복하고 즐겁기를 원하십니다. 사탄이 인간의 불행을 좋아하는 것은 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파괴하고 흠집을 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지 인간 그 자체야 그에게 뭐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노예나 미리 프로그램 된 대로만 움직이는 로봇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기를 원하셨기에 인간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는 것을 그렇게 더 좋아하시는 겁니다.

장난감도 직선코스만 왔다 갔다 하는 태엽 감는 그런 기차는 별로입니다. 물론 자기가 직접 움직이는 것이 제일 별로지요. 아주 어린 꼬맹이들은 자기가 자동차를 직접 움직입니다. ‘부릉부릉’하면서 손에 들고 움직여도 재미있어 합니다.

 

그러나 조금 자라면 이제 태엽을 통해서 움직이고 더 자라면 모터로 움직이는 그런 장난감을 좋아하고 나중에는 원격으로 조종이 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다가 장난감이 아니라 진짜를 원하기 시작합니다. 지금 인간이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더 성능을 향상시키려고 하는 이유를 보면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천사는 베드로를 소개하면서 그의 정확한 위치를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무두장이는 유대인들의 관습상 부정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들과 교류하기를 꺼립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부정한 자의 집에 유숙하고 있으므로 율법의 정결례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당시 로마군인에 대한 유대인의 관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인과 접촉하는 것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기에 유대인들은 이방인과의 교제를 꺼릴게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대하려고 할 때 ‘그가 나의 초대를 받아 들이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무두장이의 집에 거할 정도로 율법의 정결례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이방인인 자기의 초대도 꺼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고넬료에게 베드로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거하는 것을 알려 준 것입니다.

 

여기서 유숙한다는 말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손님으로 대접하고 숙식을 제공한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런 일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여행할 때 두벌 옷이나 전대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바로 이런 집들이 곳곳에 있고 내가 이미 너희가 묵을 곳을 예비했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예를 따라 베드로 역시 성도의 집에 거하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숙식은 비교적 장기에 걸쳐 계속된 모양입니다.

 

4.욥바로 보내니라
환상을 본후 고넬료는 하인 둘과 병사 한명을 뽑아서 이들에게 자기가 본 것을 다 말하고 욥바로 베드로를 찾으러 보냅니다.

 

그런데 여기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에서 하인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노예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원문상 하인은 ‘한 집에 살면서 집주인의 권세아래 있는 자’를 말하는데 성경에서 흔히 나오는 종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이를 보면 고넬료는 노예가 아니라 자기가 신뢰하는 하인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군인을 한명 끼운 것은 이들 두 하인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는 꼬박 하루정도 걸리지만 오후3시에 환상을 본 즉시로 하인들을 욥바로 보냈기 때문에 중간에 하룻밤을 자야 했고 이 때문에 하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가 신뢰하는 군인을 딸려 보낸 겁니다.

 

‘경건한 사람’이라는 말은 고넬료를 지칭할 때도 사용된 단어로 욥바로 가게 된 군인은 고넬료와 오랫동안 동고동락하며 그 집안과 지속적인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그래서 일종의 가병 비슷한 사람이고 또한 고넬료와 신앙이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하’라는 말은 옛날 성경에는 ‘종졸’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원문적으로는 ‘변함없이 헌신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시적인 군대내 하급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넬료에게 오랜 기간 헌신하고 충성하는 군인임을 나타냅니다.

 

게다가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베드로를 찾아가서 그를 초대하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천사를 보았음과 그의 명령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즉 아랫사람이라 할지라도 무조건적인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래야하는지 이유를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아무리 공식적인 부하라고 할지라도 인격을 무시하거나 인간적인 매력이 없을 경우에 직장 상사에게 헌신하거나 충성하는 것은 힘듭니다. 이를 우리는 면종복배라고 하지요. 앞에서는 하는 척 하지만 뒤에서는 욕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고넬료의 인간성이 보입니다. 이 사람은 용의주도할 뿐만 아니라 아랫사람의 고충도 이해하고 또한 인간의 성취동기에 대한 이해가 있는 유능한 군인입니다. 여하튼 이 사람 고넬료는 빨리 천사의 명령대로 고넬료를 만나기위해 환상이 끝나자 마자 즉시 사람을 욥바로 보냈습니다. 이미 오후 세시를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하루를 더 기다리는게 힘드어서 빨리 보고 싶어서 사람을 즉시로 보낸 겁니다.

 

한편 베드로는 제육시에 기도하러 시몬의 집 옥상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고넬료의 집에 천사가 환상 중에 나타난 시간에 비해 세시간이 앞선 시간이 아니라 고넬료가 천사를 본 그 다음날 육시입니다.

 

성령께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는 미리 앞서 가셔서 그 일이 순적히 이루어지도록 준비를 하십니다. 왜냐면 지금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를 찾아서 욥바로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오기 전에 베드로의 기도시간에 환상을 보이신 것입니다. 기도를 하다보면 뭔가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징조가 보이는 법입니다. 바로 그 징조가 베드로에게 나타난 겁니다.

 

여기서는 고넬료의 경우처럼 천사가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먹을 것이 보입니다.
당시 베드로는 점심시간이므로 매우 시장했던 모양입니다.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하하, 죄송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점심을 먹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우리나라에서도 그 당시에는 점심이 없었습니다. 조선시대 왕이나 간단한 요기 정도의 점심을 먹었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심이 없었습니다. 여기 본문의 시대는 우리나라로 치면 삼국이 막 형성될 때 정도의 옛날입니다. 점심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입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분명히 사람들이 식사를 준비하는 중이었고 베드로는 먹지 못해서 배가 고팠답니다. 이거 어찌된 일입니까? 손님으로 유숙하면서 점심까지 차리라고 강짜를 부렸을까요? 교권으로 억눌러서 점심까지 차리게 했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오전 10시에 아침을 먹고 저녁6시에 저녁을 먹는 하루 두끼가 보편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베드로가 배가 고팠다는 말은 그가 아직 아침을 먹지 못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왜 그런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베드로는 어제 저녁이후로 먹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배가 고플 겁니다.

 

그때 환상이 나타나는데 먹을 것으로 나타납니다. 지금 배가 너무 고파서 웬만한 것은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금식하시고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에 임하셨을 때 사탄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을 연상시키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늘에서 내려온 그 보자기의 내용물이 도저히 먹어서는 안되는 것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땅에 있는 각종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참고로 고넬료가 본 ‘환상’과 베드로가 본 ‘환상’은 원문으로는 다른 단어입니다. 그러나 크게 보아 별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보자기는 사실 그릇이랍니다. 그 그릇이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었답니다. 이 말에는 약간의 상징성이 있습니다. 아마 이 ‘네 귀’라는 말에서 의미하는 것은 사방 즉 동서남북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하 각 지역을 다 포함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 내용물을 보세요.

 

네발 짐승과 기는 짐승 그리고 새. 이 세상의 모든 짐승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큰 보자기라서 담는 것이 가능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 짐승들 가운데 유대인들이 먹어서는 안되는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소나 양뿐만 아니라 뭐 돼지나 뱀같은 것. 사실 이 보자기에 담겨진 것은 천하의 모든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먹게 되는 것은 복음이 천하에 퍼질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베드로에게 이 환상이 의미하는 것은 이방인들을 부정하다 하지 말고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차별 없이 복음을 전해서 교회 안에 포용하라는 뜻입니다. 더 적게는 지금 너를 찾아서 초빙하려고 오고 있는 고넬료의 사람들을 따라 의심하지 가서 고넬료를 믿음의 형제로 받아들이기 위해 그의 초대에 응하라는 계시인 것입니다.

 

그 전까지 베드로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는 있지만 먼저 할례를 받아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들만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까지 베드로는 이방인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열리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환상 중에 그들도 다 내가 거룩하게 한 백성들이므로 부정하다고 배척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환상은 베드로의 편견, 이방인은 부정하므로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편견을 깬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세계 선교의 대 명령을 뜻하는 계시이기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튿날 욥바의 몇몇 성도들과 함께 고넬료의 집으로 갑니다. 24절에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이미 고넬료는 훌륭한 가정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만나 발 앞에 엎드리어 절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미 베드로의 권위가 예루살렘교회에서 굉장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베드로가 개인적으로 겸손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이미 교회의 사도로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넬료가 베드로를 초청하는 일에 자신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 같은게 초청한다고 와 주겠나?

 

우리 하나님은 한편에는 네가 초청하면 반드시 베드로가 여기 올 거라는 확신을 주시고 또 한편으로는 이방인이라도 내가 만든 똑같은 피조물이므로 너는 부정하다 여기지 말고 고넬료를 만나러 가라 이렇게 하나님은 쌍방에게 다 같이 역사하셔서 복음을 세계로 전파시키는 계기를 삼으신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사실 사람의 말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상대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 지를 모르고 그래서 상대를 불쾌하게도 하고 상대로 하여금 자기를 무시하도록 하기도 하고 이런 저런 사고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네 만남에 먼저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먼저 가셔서 길을 닦아 두셔야 만이 우리가 쉬이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 길을 개척한다면 정말로 어려울 것입니다.

 

이제 초대 기독교회는 고넬료를 받아들임으로 최초의 이방인 교회를 받아 들이게 된 겁니다. 물론 국외는 아니지만 최초의 이방인 개종자, 그리고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교회가 지상에 선 겁니다. 이것은 장차 기독교가 인종을 초월하여 보편적인 교회로 뻗어 나갈 것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퍼진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퍼져 나온 겁니다.

 

저도 이런 만남을 하기를 원합니다. 저도 이런 복음의 확산, 성령의 역사의 확산에 함께 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령께서 저를 앞서 가셔서 저를 위해 우리를 위해 길을 닦아 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앞날에도 우리 주께서 먼저 가셔서 모든 장애를 허물로 함정을 메우며 닫힌문의 놋쇠빗장을 꺽으시며 평탄대로를 만드실 것을 소원합니다.

 

또한 우리 성도들도 이 거대한 성령의 역사에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기도하는 습관 중에 스스로를 절제하고 신실하며 근신하는 깨어서 경성하는 삶 중에 우리의 신앙생활가운데 성령께서 불현 듯 찾아오시는 놀라운 역사의 안에 함께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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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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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뻗어나가는 그 시초를 알 수 있는 귀중하고 재미있는 설교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 주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대우하는 모습은 참 대단합니다. 저는 가끔 한 사람을 보면서, 한 세계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세계가 하루 아침에 변화될 수 없듯이) 그만큼 한 사람의 생각이 갑작스럽게 바뀌는 일은 드문 일이기에, 오히려 고넬료가 보여준 것처럼 평소의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평소 얼마나 가까운 이들을 잘 돌보고 있는가를 다시 생각합니다. 가족, 친구, 이웃을 배려하는 삶. 짧은 인생 속에서도 나눔이 있는 모습. 그렇게 관점을 조금 달리 한다면, 살아가면서 자꾸만 무엇인가를 쌓아가려는 삶 보다는, 사람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삶이 훨씬 더 풍요로움에 근접한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현대인의 깊은 병인 우울함은 자기 속에만 생각이 파묻혀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2017. 0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