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여호와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편128:1-6)/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7. 9. 19. 02:18

 

여호와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128:1-6)

 

이 세상은 때로는 살만하게 보이기도 하며 때로는 괜찮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좋아 보이기도 합니다. 정말 극히 드물게 때로는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진짜로 진짜로 아주 극히 드물게 가끔은 행복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대부분은 그냥 버틸만 할 정도이며 목숨이 주어졌으니 살아 가는 것이고 그저 그런 수준입니다.

 

나날이 재미있고 행복하고 기쁘고 그런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매일 일하고 그걸로 매달을 먹고 삽니다. 집에 재물을 쌓아놓고 아무 걱정없이 사는 이는 드물지요. 뿐입니까?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참 많이도 일어납니다. 그리고 알지 못할 미래를 위한 선택은 또 어찌 그리 많습니까?

 

물론 정말 심하게는 죽지 못해 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옛날에 택시에 타면 꼭 운전기사들이 틀던 프로가 ‘이것이 인생이다’라고 있었습니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불행의 연속이고 울음 소리가 계속해서 나오는 제 생각에는 최악의 프로그램인데 문제는 이런 프로그램이 매일같이 쉬지 않고 꾸준히 계속되는 것을 보면 실제로 그런 불행을 연속하여 겪은 이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또 사람들이 이 프로를 방청하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공감이 되는 모양입니다.

 

이 프로의 내용들은 보통 엎친데 덮친격, 설상가상 이거나 첩첩산중이란 말이 어울릴 그런 경우들입니다.

당연한 일이 당연하게 되지 않을 때 우리의 상실감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커집니다. ‘아니 도저히 이럴 수는 없어!’ 그러니까 상식이 통하지 않을 때 우리는 정말 당황스럽습니다. 황당하지요.

 

솔직히 말하면 우리네 삶은 정말 불가측적입니다. 앞을 도저히 예측하거나 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저 문 뒤에 나를 위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저 모퉁이너머 행운이 다가 오고 있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담 너머를 볼 수 있는 투시안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순간 불확실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고 어떻게 되는 지도 모르게 그냥 몸을 내맡기고 대세에 순응해서 거대한 물결 속에 몸을 맡겨버립니다. 그래도 여러 사람이 같이 가는 곳에 나도 함께 하는 것이 나의 불행을 나의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는 길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뭐 같이 나락에 떨어지면 상대적인 박탈감이 덜할 테니까요. 이런 불확실하고 다이나믹한 인생에 가장 확실한 투자, 바로 하나님의 품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정말입니까? 만일 이 말이 정말이라면 왜 수많은 성도들이 어려움을 겪었으며 가난하게 살았으며 결국은 목숨까지 잃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말이 틀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짓을 말씀하실 리가 없으므로 이 말은 맞아야 합니다. 그래요? 일단 우리는 이 말이 맞다고 보고 계속 본문을 살펴봅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성도들이 복이 있다는 구체적인 사례들이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복을 순서대로 살펴봅시다.

 

첫 번째는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여러분 이 말씀을 보고 좀 웃깁니까? 약간 실망 스럽나요?
자기가 일한 것을 먹는 것이 너무 당연하지 이걸 뭐 새삼스럽게 복이라고 하느냐는 생각이 드십니까?

 

이웃나라의 슈퍼볼같은 뭐 8500억짜리 복권에 당첨되게는 못해도 적어도 십몇억 로또에라도 당첨이 되어야 뭔가 복이고 형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건 뭐 내가 내 손으로 일하고 그걸 먹는걸 복이랍시고 자랑스럽게 복의 첫 번째 항목에 이름을 올려놓았으니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창조주께서 주시는 복치고는 너무 째째해서 정말 코웃음이 날 정도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가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이 세상에서 억울한 일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자기가 수고하고 그걸 남이 가로채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자기가 수고하고 애를 써서 겨우 계약을 체결해도 열매는 결국 회사가 먹고 자기는 그냥 월급만 받습니다. 실적을 올리지 못하면 욕을 듣고 짤리고 하지 계약을 체결했다고 해서 그 계약 때문에 회사가 얻게 될 이익의 몇%라도 주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양반입니다.

 

회사에서 멋진 아이디어는 자기가 냈지만 칭찬은 상사가 듣고 그가 승진합니다. 체인점에서 열심히 일해가지고 돈을 벌어서 체인본부에, 이름 하나 빌려준 체인본부에 거액의 라이센스비를 지불하고 거액의 임대료를 내고 이것 떼고 저것 떼고 자기는 정작 인건비 겨우 남겨 질 정도일 때도 많습니다. 게다가 계약 때문에 일찍 장사를 접지도 못합니다. 위약금을 내야 하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장사를 합니다.

 

일년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데 수확하기 직전 마지막에 우박이 쏟아져서 농작물을 못쓰게 되고 아니면 정말 배추농사가 잘 되어서 한몫 잡겠다고 꿈에 부풀었는데 자기농사만 잘된게 아니라 모든 배추농사가 대풍이 들어서 배추의 가격이 너무 너무 싸져서 도저히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서 수고하고 농사지은 배추밭은 갈아 엎을 때가 있습니다.

 

기사에 보니까 폭우에 복숭아가 땅에 떨어져서 못쓰게 되었다는데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하지요. 요즘 한창 말많은 달걀. 진드기 잡으려고 살충제를 뿌렸고 그래서 유독물질이 검출되어서 바로 전량 폐기처분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성도에게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 주시겠다는 게 얼마나 큰 복입니까?

 

우리는 언제부터인기 복이라고 하면 공짜로 뭔가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복도 뭔가 하나님이 주실만한 일을 우리가 해야 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그 무슨 ‘일’이 바로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이란 겁니다. 아무것도 안했는데 받는다면 그건 빚입니다. 빚은 나중에 갚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자까지 쳐서.

 

글짓기를 잘 해서 상을 받을 것이 기대되었던 아이가 상을 받지 못하고 정책적인 고려에 의해서 전교회장에게 상을 빼앗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억울한 일이 한도 끝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가 수고한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은 실제로 대단한 복입니다. 수고하지 않고 많은 재물을 얻는 불로소득이 오지 않아서 섭섭 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수고한 것을 남에게 빼앗기거나 막판에 엎어져서 손해를 보는 것에 비하면 정말 건전한 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네 손이 수고하는 대로 먹을 것’이라는 말에는 우리가 수고할 수 있는 건강을 얻을 것과 또 ‘일거리’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직장이 있다는 말입니다. 요즘 제대로 된 곳에 취직하기가 정말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습니다. 먹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일해서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일거리 즉 직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건강은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입니다. 이 두가지를 모두 해결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정말이지 엄청나게 든든하고 감사한 복입니다. 자기 손으로 직접 일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고 또 직장이 있고 그 직장이 충분히 식구들이 먹고 살 정도가 된다면 그게 바로 복 아닐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뒤에 덧붙입니다. 그런데 이게 참 그렇습니다.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내 손으로 수고한 것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정도의 형통이니 복이니라고 떠들 정도는 솔직히 아닙니다. 그러나 잘 따져보면 우리 하나님의 이 복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건강과 직장과 일용할 양식과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을 권리와 자연재해로부터도 보호받을 권리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요? 부족합니까?

 

그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이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두 번째 복을 봅시다.
그런데 두 번째로 여기에 있는 복도 참 그렇습니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 알아야 할 것이 이것이 사실을 그대로 서술한게 아니라 그렇게 되어게 해달라고 하는 축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축원은 제사장이 하나님에게 올려드리는 기도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루어 질 것입니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가 되고 네 식탁에 둘어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아라는 기원문인 것입니다.

음, 이거 복 맞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왜 전부 이 모양이지요? 우리나라로 치면 여우같은 아내가 있고 토끼같은 자식들이 있다는 건데 이게 뭐 대단한 일은 아닌 듯이 보입니다.

 

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 장가도 못가고 그런 사람들이 본다면 아내가 있다는 것 만 으로도 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자식을 가지려고 백방으로 노력해도 안되는 사람에게는 자식들이 있다는게 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건 절대로 복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평범한 가정의 모습에 불과한 듯이 보입니다. 아니 그래 천하를 가지신 주님이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신 복이 겨우 이 정도라면 정말 너무 실망입니다.

 

아, 예수 믿을맘 안난다.

그런데 후렴구가 심상치 않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 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아니 하나님이 이렇게 자신있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주는 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우리가 뭔가 좀 오해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아무리 읽어봐도 뭔가 굉장한 복을 주신다는 그런 자신만만함이 보입니다.

뭡니까?

 

먼저 우리가 살펴봐야 할 대목은 ‘결실한 포도나무’입니다. 결실했다는 말은 원문상으로는 ‘생육하다’ ‘번성하다’ 란 말입니다. 아내가 자식을 많이 낳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게 포도나무라는 말과 결합해서는 조금 더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포도나무는 성경에서 무화과와 더불어 풍요와 안락함을 상징하는 과일입니다. 포도나무에 알갱이가 꽉 영근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열린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이것은 마치 성도의 가정이 아내로 말미암아 풍요해짐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안그래도 풍요를 상징하는 포도나무가 ‘결실’을 했다면 이는 얼마나 번성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인가를 상상하면 지금 하나님이 하신 이 복이 단순히 자식을 많이 낳는다로 끝나는게 아니라 아내로 말미암아 가정 경제가 풍성해 지고 그 풍성함이 집안 구석 구석까지 미쳐서 전반적으로 그 집안을 풍성하고 원기왕성하게 만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옛날에 며느리가 잘 들어오면 그 집안이 불일듯이 일어나고 며느리가 잘못 들어오면 집안이 쇠한다는 그런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여자들의 입장에서는 기가차고 억울하고 황당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다르게 보면 옛 조상들도 여자가 가정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를 잘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겨우 살림하고 밥하고 자식 키우는 정도로 폄하되는 가정주부의 역할을 이렇게까지 과대하게 표현했겠지요.

 

지혜롭고 덕스러운 여인이 가정에 끼치는 영향은 지대합니다. 오늘날 이 나라가 이렇게 부유하게 된 것은 남자들이 열심히 일해서라기 보다는 여자들의 헌신과 희생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교회의 입장에서는 여자성도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기독교 국가는 이룰 수 없었을 것이기에 더 그렇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여자를 포도나무로 표현한데는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포도나무는 홀로 서기가 안됩니다. 포도나무가 자라기 위해서는 지지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포도나무인 아내가 잘 되기위해서는 튼튼한 지지대인 훌륭한 남편이 필요하다는 것을 또한 나타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남편과 아내의 화합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보면 남자와 여자가 서로 편을 먹고 비난하고 싸우는 모습을 보면 기가찹니다. 이런 극단적인 이성비하가 교회 안에서는 없기를 바랍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사랑하고 보호하며 존중할 관계이지 내가 낫니 네가 낫니 하는 그런 경쟁관계는 아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지 않고 서로 미워한다면 가정이 이루어 질 수 없고 사회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라는 말은 경제적이고 풍요로움을 일컫는 표현일 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서로 의지하며 사랑한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요즘처럼 이혼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해로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조강지처와 이혼하지 않는 이유가 어진 아이를 낳기 위함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럴까요?

 

다음으로는 자식들에 관한 표현입니다. 요즘 우리나라가 출산율의 저하로 초비상이 걸려 있습니다. 100조원을 투자하고도 겨우 출산율이 1.17에 불과하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30년마다 인구가 반으로 준다는 거지요. 뭐 여기에 동의하지 않고 자식을 낳지 말고 모두 자기 한몸 편하게 살다가 이대로 죽자고 하는 이들도 있기는 합니다. 우리나라 인구가 너무 많아서 경쟁도 심하고 살기도 어렵다는 말을 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구 비율이 문제입니다. 나라전체가 문제입니다.

 

노인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1/3을 넘어선 나라, 아이가 거의 없는 나라에 무슨 활력이 있을 것이며 미래가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활력이 돌고 생동감이 있고 번영하려면 젊은피가 계속해서 공급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네 골목에 아이의 떠드는 소리가 사라졌습니다. 울음소리, 웃음소리, 시끄럽게 떠들 때는 참 시끄럽다고 여겼는데 불과 한세대가 다 가기 전에 골목은 조용해 졌습니다.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조용합니다.

 

개인적으로 애도 낳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고 적게 벌고 많이 쉬고 충분히 즐기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늙어지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요? 자식도 없이 아내도 없이 남편도 없이 홀로 쪽방에서 쓸쓸히 늙다가 고독하게 죽어요?
돈이 없어 폐지나 줍고 골골하다 이 세상을 떠나요?

 

여러분 두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중국이 쇠약해진 우리나라를 결코 그대로 두고 보지 않습니다.
지금, 같이 늙어가지만 그래도 우리보다 세배나 큰 일본이 그대로 두고 보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나라를 일본에 합병하면 일본 입장에서는 중국하고 해볼만 합니다. 그러니 미국도 괜히 힘들게 중국을 견제한다고 힘빼지 않고 일본을 적당히 부강하게 만들어서 조종하면서 중국을 견제하는게 더 쉬워 보입니다.

 

구한말에 일본과 미국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넘겨주는 카스라 태프트 밀약을 맺은 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때는 러시아를 견제한다고 그런식으로 했는데 이제는 중국을 견제한다고 그럴 수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제2의 카스라태프트 밀약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습니다. 그래서 문제인 거지요.

 

우리는 흔히 북구의 스칸디나비아 국가가 인구도 적은데 얼마나 잘 사는지를 언급하며 인구가 더 줄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러시아의 침공에서 독일의 침공에서 살아 남으려고 얼마나 치열한 전쟁을 치러왔는지를 알게 되면 결코 그런 소리 못합니다.

 

국가를 계속해서 풍요롭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 구성원의 도덕적 성숙과 윤리적 성숙이 필요하고 그 나라 정부의 정의감이 평균 이상이어야 하고 어느 정도 경제적인 먹고 살 꺼리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자식들이 많이 있어야 하는 것은 두말한 나위가 없습니다. 요즘 초등학교 선생들은 적게 뽑는다고 교대생들이 데모를 하고 난리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지방에 안가고 서울에만 있으려고 했다는 게 드러나서 욕을 들어먹었지만 결국 애가 없어지면 이렇게 실업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상에 둘린 자식들은 국가적인 큰 자산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이 그런 식의 남을 위한 사회와 국가를 위한 복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의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자식들을 어린 감람나무로 표현했다는데 주목해 봅시다.

 

감람나무라!

감람나무는 큰 감람나무로부터 생명력을 받는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자식들이 부모의 우산아래서 부모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잘 자라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식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는 푸념을 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부모 자식간에 폐륜적인 일들도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부모와 자식간에 서로 존경하며 사랑하고 보호하는 그런 이상적인 가정을 만들어 주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게다가 감람나무 열매, 올리브를 가지고 할 수 있는게 참 많습니다. 먼저 올리브로 기름을 짭니다. 그 기름으로 당연히 요리도 하지만 몸에도 바릅니다. 소독기능도 있어서 치료도 됩니다. 게다가 재목도 사용하고 결국 어린 감람나무는 자라서 큰 감람나무가 될 것이고 이 나라와 사회에 그리고 가정에 유익된 일을 많이 많이 하는 그런 인재로 성장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자식농사는 절대로 마음대로 안됩니다. 그것을 우리 하나님이 우리 대신에 잘크게 해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화목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자식들이 좋은 인재로 자라서 쓰임 받고 정말 걱정할게 없는 이상적인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돈벼락을 내려주고 금은보화를 쌓을 곳이 없도록 퍼부어 주고, 감투가 높아서 존귀한 자가 되고 와 같은 그런 복이 아니라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그러나 실제로 달성하기가 심히 어려운 복을 주시겠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집에 금은을 산처럼 쌓아놓아도 화목하지 못하고 근심 걱정이 많고 자식들이 걱정된다면 그건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요 비극이지요.

 

그래서 성경도 당당하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뭐가 복입니까? 요즘 노키즈 존도 많아 지고 맘충이라고 비난하는 말도 많아 지고 애하나 키우는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데...그래요.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라고 말합니다.

 

감람나무는 우리식으로 말하면 올리브나무를 말합니다. 풍요와 번영의 상징 올리브 나무! 부부가 서로 화합하고 사랑하며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를 존경하며 사랑하고 이런 가정은 우리의 이상이지만 실제로 세상에서는 참 얻기 어려운 복이기도 합니다. 그 얻기 어려운 복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1절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에서 ‘사람, 자’에 대한 언어가 다릅니다. 앞에서 쓰인 단어는 그냥 일반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두 번째에 쓰인 단어는 일반 보통 사람이 아니라 용사, 대장부같은 잘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부자요 높은 사람이라도 아내와 자식에 관한 복을 얻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좀 이해가 되시죠?
돈많고 권세가 있어도 자식은 어떻게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전직 모모하는 인사의 자식들과 사위가 마약혐의로 시끄러운 것을 아시지요? 모모하는 사람들이 배우자 문제 때문에 망신당하고 고통받는 것을 아시지요? 그래요 아무리 자기가 홀로 설 수 있을 만큼 세력이 크고 부유하다고 큰소리쳐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이는 결코 그런 안락함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를 진실로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이기 때문이지요.

 

세 번째로는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시온에서 무슨 복을 주실는지? 게다가 예루살렘이 번성하는 것을 보는 것이 나에게 꼭 복이 될까요?

 

게다가 ‘자식의 자식’이라면 겨우 손자인데 이건 전혀 오래사는게 아닙니다. 적어도 자식의 자식의 자식까진 봐야, 그것도 건강하게 봐야 ‘아, 뭐 이정도면 그래도 오랜산다’ ‘이게 하나님의 복이구나!’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요즘은 사람들이 오래 살아서 환갑잔치도 안한다는데 이건 뭐. 성경이 지금 너무 고리타분하고 시대에 뒤떨어진거 아닙니까?

 

여기 세 번째의 복은 제사장의 축도문 형식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의 마지막에 제사장이 축도하면서 ‘이러이러한 복을 주세요’할 때의 그 형식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시온은 성전이 있는 곳을 말하지요. 하나님의 전에서 복을 받으라는 말이 됩니다. 조금 더 의미를 넓게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으라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복을 갈구해서 여기저기 복을 준다는 곳에는 마구 몰립니다. 산과 강과 바다를 보면 거대하거나 장엄한 곳에는 어김없이 촛불이 켜져 있고 산신이나 해신에게 빈다면서 뭔가 제단이 차려진 곳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구 팔공산에 갓바위가 영험하다고 사람들이 몰리고 뭐 이런 실정이지만 성경은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옴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괜히 하나님을 제외한 딴 곳에서 복을 받을 줄 알고 여기 저기 기웃거려봐야 시간낭비 돈 낭비요 사람만 힘들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라는 말도 역시 기원문입니다. ‘너는 번영을 보아라’고 축원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란 말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번영을 본다는 말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서울사람들만 사람이고 나머지는 다 별볼일 없다는 그런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그냥 유대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장소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평안하고 행복을 누리고 복을 받아 잘 살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 우리 사회가 평안하고 행복하고 번영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곳에 속해 있는 나도 더불어 행복하고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복을 받고 잘되려면 그가 속해 있는 영성공동체 교회가 건강하고 좋아야 함과 같습니다.

 

나라에 내란이 벌어지고 범죄가 판을 치고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고 산사태에 홍수에 이런 식이면 그 안에 사는 개인의 행복은 요원합니다. 그러므로 평생 동안 살면서 평안하려고 하면 이 나라가 평생토록 평안하고 번성하며 안정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개인만의 복이 아니라 개인이 속한 사회, 집단, 공동체의 복을 중요하게 생각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나만 잘살면 되지 나라나 이웃이나 공동체는 어떻게 되도 나는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가 당연하게도 번영할 리가 없지만 공동체가 번영하지 않고 쇠퇴하고 불안하고 공포스러우면 당연히 그 속에 사는 개인 개인들이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을 받으려고 하면 먼저 우리가 사는 공동체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하며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와 나라가 안정되고 번영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언젠가부터 우리는 나라나 공동체, 사회의 번영과 나를 떼어놓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왔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이 나라와 사회의 번영이 나의 번영과 내가 복을 받고 잘 사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가짐을 깨닫고 우리 모두가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가 우뚝 서고 억울한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며 의로운 자가 헤택을 받고 보호받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네 자식의 자식을 본다’는 말은 겨우 손자를 볼 정도로 산다는 말이 아니라 여호와로부터 받은 복이 당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식과 손자 대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잘 사는 것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 없다는 삼대 부자를 만들어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복을 대를 이어서 계승하라는 축원인 것입니다. 이 정도면 복이라 할 만합니까?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는데 앞에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나라 전체가 하나님의 법으로 다스려지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속에서 행복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또 그래야 그 속에 있는 개인이 복을 받을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평강을 마지막으로 빌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여기서 비는 평강은 솰롬입니다. 절대적으로 평안한 상태를 말하는 ‘솰롬’이 이 나라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특별히 이곳에 모인 성도들에게 임하게 될 것을 축원합니다.

 

그렇게 되려고 하면 이 나라 모든 이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하고 하나님의 법이 이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원칙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공의가 한반도 남쪽과 북쪽에 그리고 이 민족이 사는 모든 곳에 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 역사의 중심에 우리가 함께 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 교인 모두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이와 같은 복을 다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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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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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우연히 이 문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끝내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때로는 견뎌내야만 하는 힘든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그 때, 꼭 힘을 내기를 응원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특히 나쁠 때 최선을 다할 줄 알아야 해.(인생의 일요일 들 중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비춰주시고, 일으키실 것입니다. / 2017.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