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라(로마서12: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9. 3. 20. 03:11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라 (로마서12:1-)

 

우리는 지난 주에 추석을 지냈습니다. 물론 지금도 연휴는 계속되고 있고 그 연휴는 내일하루 더 있다가 모레 끝이 날 예정입니다. 참으로 긴 연휴였습니다. 그런데 추석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것은 바로 차례라고 하는 제사입니다. 각종 음식들을 차려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그런데 제사지내는 방법을 놓고 사람들이 잘 모르니까 신문이나 방송에서 제사법을 교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제사법이 반드시 맞는 것은 아니랍니다. 가령 붉은 것은 오른쪽에 흰 것은 왼쪽에 놓으라고 하는 제사상 차림법에 정해진 규칙이 없다고도 합니다. 배가 오르고 떡이 오르고 수박에 한과에 생선에 뭐뭐가 막 오르는 법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드릴 제사법은 좀 다릅니다. 우리가 차릴 제사상은 많이 다릅니다. 과일과 고기와 떡을 올리는게 아니라 우리의 몸을 올리는 겁니다. 그것도 죄성에 절은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에 씻어서 거룩하게 된 몸을 올리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겁니다. 산제사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서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막 제물이 되려고 해서 제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거룩한’ 제물만이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하지 않다면 절대로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죄인을 용납지 않으시는 분이시고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에 씻어서 정결케 되어야만 비로소 산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는 바울은 이 말을 명령형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권유하고 있습니다. ‘권유한다’는 말은 원문상으로는 ‘곁으로 부르다’ 또는 ‘위로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이 명령형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 것은 그가 비록 산제물이 되라고 말하고 있지만 스스로도 거룩한 산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보면 대형교회 목사들을 신성시해서 거의 교주처럼 섬기는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세습을 해도 오케이하고 무슨 무슨 나쁜 짓을 해도 지지하는 이들을 보면 이런 경향이 농후해 보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기독교는 주님이 교주이고 우리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앞에 모든 이는 다 같이 천성을 향해 가는 동역자들일 따름입니다. 다만 그 길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며 누구는 구제하고 누구는 긍휼히 여기며 누구는 다스리는 등의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모범을 보일 뿐이라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너희 몸을 드리라’에서 ‘드린다’는 말은 법적으로는 ‘주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맡긴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거룩한 산제물로 드린다는 말은 우리의 모든 것을 온전히 하나님에게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러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가 살아서 우리 스스로 뭔가를 자꾸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우리가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나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며 그가 나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말로서 그를 주님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스스로 주인이 되어 주인이신 주님을 뒤쪽으로 밀어내고 자행자지합니다.

우리의 죄된 속성을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스스로 주인노릇을 하기 때문에 육체의 혈기와 정욕이 불쑥 불쑥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고 그곳에서 내가 주인노릇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의 몸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렇기 때문에 주의 뜻대로 사용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먼저 거룩해 져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를 산제사로 드리는 것은 매일의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합하게 살아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제물로 부족함이 없습니까?

 

바울은 이어서 우리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는 것은 우리를 이 세상과 동일하게 여기는 것이며 세상이 우리를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며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우리행동의 근거를 삼는 것이며 세상의 유행을 좇아 쾌락과 향락에 몸을 내 맡기는 것입니다.

 

옛날에 제가 자랄 때 지금의 가요를 우리는 유행가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요즘 보니까 아무도 가요를 유행가라고 부르지는 않습디다. 세상의 가치관이 점점 더 우리사이로 퍼져들어서 우리조차도 세상에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유행가도 들어보니까 생각보다 괜찮고 그리고 단순히 유행가라고 뭉떵거려 말할게 아니라 여기에도 여러 장르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가요 그리고 팝이니 발라드니 힙합이니 랩이니 하는 식으로 세분해서 말합니다.

 

동성애문제를 볼까요? 동성애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가증한 것입니다. 이런 이를 하나님은 돌로 쳐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서 동성애를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마치 교양인이 아닌 것처럼 관용적인 사람이 아닌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세상의 모든 소수자들이 연대하여 다수자를 패배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소수라고 해서 무조건 옳다고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소수를 지나치게 보호하는 것이 다수의 사람에 대한 차별이 될 수가 있습니다.

 

애초에 다수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상식이란 보편적인 기준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가지는 생각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소수만을 보호한답시고 다수를 거스리기로 한다면 그것도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아 들여야 할 것은 다수의 생각이냐 소수의 생각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닌가에 달린 것입니다.

사실 성경의 진리는 다수결로 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고 여기에 위배되는 것은 모두 불의이며 비진리이며 틀린 것입니다.

 

저는 사실 이런 두려움이 있습니다. 세상이 동성애를 찬성하는 이가 다수가 되어서 합법적으로 동성애부부가 탄생하게 된다면 그리고 동성애를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처벌받는 법이 생긴다면 21세기 민주주의 하에서 종교적인 탄압이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닐까하는 두려움입니다.

 

이 탄압은 타종교에 의한 탄압이 아니라 무신론자들에 의한 탄압이며 세상에 의한 탄압이 될 것이기에 더 두렵습니다. 다수에 의한 독재는 소수에 의한 독재보다 깨기가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건전한 상식을 가진 이가 하나님의 가치를 가진이가 더 많기만을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선한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분별한다는 것이 성도의 최종 목표인 모양인데 여기서 분별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것과 저것의 차이를 지적하고 알아내는 것입니까?

본문에서 ‘분별하도록’ 이란 말은 ‘증명하도록’ 이란 말입니다. 뭘 증명하나요? 내가 순수하게 하나님의 신앙으로 거듭났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시금석으로 금을 증명하듯이 우리의 순수성을 증명한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깨끗해 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죄악된 세상에서 자기도 모르게 죄악속에 빠져서 죄악의 물에 허우적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선하게 창조되어진 우리 인간은 아담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빠지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선을 행하는 것 보다 악을 행하는 것을 훨씬 더 자연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내가 죄악 속에 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보아 날마다 새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라는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표면상 이 교회 저 교회로 나뉘어 있지만 사실상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단일하고 거대한 공동체를 구성하는 지체들입니다. 그래서 한 아버지를 모시는 형제인 것이지요.

 

12:3의 말씀은 좀 어렵지요? 우리나라 말인데도 너무 해석하기 어렵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그러나 자세히 보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란 말은 너무 쉬운 말입니다. 한마디로 교만하지 말란 말입니다. 스스로 분수에 넘게 생각해서 자기를 너무 높게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래요, 우리가 스스로 절제하지 않으면 자칫하면 교만할 수 있지만 날마다 새로워져야하는 성도는 항상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는 적극적으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은 주어진 은사대로 냉정하게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가 받은 은사는 우리가 댓가를 치르고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감히 받을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호의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뭔가 우리에게 덕이 되었으면 되었지 손해가 나지 않음에도 우리는 다른이에게 주신 은사를 더 크게 생각하고 ‘저 사람보다 내가 훨씬 더 나은데 나는 이것밖에 주지 않고 저 사람에게는 저렇게 큰 것을 주시는구나!’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은 알겠는데 쉽지는 않습니다. 좋은 선물과 좋지 못한 선물의 구별은 있고 또 이것 때문에 좋거나 덜 좋거나 안좋거나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자기를 한탄할 뿐 하나님을 원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선물을 주었다는게 어딥니까?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못받았으면 너도 못받아야 된다고 생각하지 내가 받았으니 너도 받아라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것이 네가 받은 것보다 못하지만 그래도 받았다는게 어디냐고 말하며 서로 자축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이런 사람을 성자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이런 사람을 호구라고 합니다. 좋게 말하면 무골호인?

 

바울이 이런 식으로 말한 것을 보면 초대교회 당시에도 이런 질투와 경쟁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좋게 말합니다. 우리 몸에 많은 지체가 있지만 그것이 다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라고요? 지닌 바를 족한 줄 알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권면은 지금도 외면 받고 있습니다. 여러 지체가 있기 때문에 더 좋게 생각되는, 더 중하게 여겨지는 지체가 되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쟁의 실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여러 지체들이 각자 맡은 일을 하며 서로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가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결코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원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된다고 하는 조건이 있지만 오늘날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려고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내세우고 더 많은 것을 누리려고 제자가 되려 합니다.

 

지체라는 말에는 중요한 한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 지체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아프게 되면 모든 몸 전체가 다 고통을 느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체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으면 몸의 움직임이 제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유기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한몸으로 묶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네가 낫다느니 내가 낫다느니 하는 일을 하게 되면 결국 그 몸은 자멸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애초에 이런 식의 경쟁과 질시가 일어날 것을 대비하여 우리를 한몸으로 묶어 두신 것입니다.

 

제가 대형교회의 부정부패와 사치를 공격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교회라고 하는 한몸 속에 같이 속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잘못하면 우리도 함께 비난받고 고통받으며 그 결과에 구속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드디어 6절부터는 우리에게 각각 주신 은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소개된 것에 먼저 소개되고 나중 소개되는 순서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더 낫다 라는 우열개념이 아닙니다. 성경은 서로 다르다고 했지 우열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 성경은 은사를 일러 우리의 열심이나 노력여하에 따라 받고 아니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다양하게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은사를 받았으니 네가 받은 은사보다 더 낫다라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 저에게는 왜 겨우 이런 은사만을 주시나요’하고 불평할 수도 없습니다. 이건 우리의 노력이나 자격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우리 주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은사라고 할 때 이 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뭐냐면 우리가 약간 잘못알고 있는 ‘카리스마’입니다. ‘카리스마’의 원뜻은 ‘거저 받은 선물’ 또는 ‘부여된 은총’입니다. 우리가 흔히 카리스마가 있다는 말로 사용할 때와는 전혀 다른 뜻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은사는 결국 성령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아쉬운 감은 있어도 불평할 수는 없습니다. 거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제일 처음 은사로 언급되고 있는 예언을 보면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믿음에 어울리게 예언하는 은사’라는 말입니다. 예언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이 예언을 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언은 믿음에 어울리게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음의 장성한 분량대로 예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서 또는 받지도 않은 것에 대해서 예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의 분수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믿음의 분량에 따라 우리가 알 수 있고 받은 대로만 예언하라는 말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것을 중언부언해서 예언한다면 이 예언은 듣는 이를 미혹하게 만들 것이며 자칫 이러한 예언으로 형제를 실족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받지 않은 것을 예언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거짓말이 되는 것이지요.

 

그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음에도 상대방이 알고자 하기 때문에 억지로 예언하고자 하면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아야 할 정도만큼만 보여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주가 주시지 않은 것을 굳이 억지로 예언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언은 믿음의 분량을 넘어서는 것이므로 전혀 우리의 분수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참고로 우리가 예언이라고 하면 장래의 일을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예언은 이것을 포함한 하나님 말씀을 바로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알기 쉽게 풀이해 주는 것도 역시 예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자기의 각색이 들어가면 곤란해 집니다. 더구나 신학적 근거가 없는 주관적인 해석은 정말 곤란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분수대로 예언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또한 본문의 예언에는 권면과 위로도 포함됩니다.

 

그 다음으로 나온 것이 섬기는 일입니다. 이게 가르치는 일보다 더 먼저 나왔다고 하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본래 목적하는 것이 가르치는 일보다 더 먼저 섬기기를 원해서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무언가를 알고 그걸 가르치기 보다는 섬기기를 우리 주님이 강력하게 원하시기 때문에 이게 더 먼저 나온 겁니다.

섬기는 것을 한마디로 하면 봉사하는 직입니다. 그런데 섬기고 봉사한다면 도대체 무슨 직분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집사를 말하는 겁니다. 그럼 자연히 가르치는 것도 직분이 있습니다. 뭡니까? 교사. 그래요, 바울은 본문에서 집사를 교사보다 앞에 기록합니다. 초대교회에서 교사는 목사와 동의어로 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사를 교사보다 앞에 기록한 것은 그만큼 교회에서 섬기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설마 목사보다 집사가 더 좋은 것이라고 강변 하려고 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사람의 직분에 대해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가치를 부여하신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교사는 계속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기독교가 무엇인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은 당연하게도 말씀의 선포와 더불어 교회가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할 부분입니다.

 

그 다음으로 들고 있는 은사가 바로 권위하는 일입니다. 권면하고 위로하는 자를 말합니다. 신앙이 약한 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힘을 북돋우는 일을 합니다.

다음으로는 구제하는 자입니다. 이 사람은 성실함으로 구제에 임해야 한답니다. 성실을 여기서는 신실함이란 뜻으로 사용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을 유지하는 초지일관의 뜻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처음 가진 마음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가지 초심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구제하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지요.

 

왜냐면 구제를 하다가 주위사람들의 칭찬이 계속되면 자기도 모르게 명예욕이 생기게 되어서 허명을 구하게 되거나 때로는 구제하는 것이 아깝게 생각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이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입니다. 다스리는 자는 구제하는 자보다 더 순위가 뒤로 밀립니다. 그러므로 결코 다스리는 자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는 것하고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하고는 많이 차이가 납니다. 그러므로 앞에 서서 뭔가를 주창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화려한 무대에 서지 못하더라도 걱정하거나 안타까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비와 상급을 믿고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면 됩니다.

 

다스리는 자가 부지런함으로 해야 된다는 말은 단순히 부지런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 부지런하다는 말 속에는 ‘진실하다’ ‘열정이 있다’는 말도 포함됩니다. 자기가 속한 조직에 대한 열정이 없이 사람들에 대한 진실됨이 없이 그 공동체를 다스린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저는 다스리는 자를 장로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형제를 불쌍히 여겨서 자비를 베푸는 자를 말합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사랑에 가득차서 온유한 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남에 대한 동정심을 가진 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역경가운데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자를 말합니다. 이런 자들이 그리스도의 자비를 남에게 잘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한도 없이 나올 것 같았던 은사들이 여기서 끝이 납니다. 남에게 구제하는 것이 다스리는 것 보다 더 뛰어나고 봉사하는 것이 가르치는 것 보다 앞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잊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인은 결코 남을 지배하고 이끌고 지시함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 역시 그러한 것보다 섬기고 구제하고 긍휼히 여기는 것을 더 중히 여기십니다. 아마 마지막에 긍휼을 베푸는 자를 든 것은 아무런 은사도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남을 긍휼히 여길 수 있고 내 행동을 온유하게 할 수 있으며 낙망한 자를 권면하고 힘이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이게 구제하는 자와 다른 점은 아마 큰 물질이 없이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만 있다면 누구라도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참된 성도라면 누구도 예외없이 한가지 이상의 은사는 다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요구하는 실천방안들이 나열되고 있지만 이건 다음으로 미루어야 될 것 같습니다. 너무 한꺼번에 많은 것을 요구하면 우리 성도들이 한가지라도 제대로 해보려고 하기도 전에 주님의 요구에 압도되어 질려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건 다음에 하십시다.

 

우리는 서로서로 사랑하고 도와야 하며 보듬고 가야하는 지체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룹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론적으로는 잘 알고 있지만 심정적으로 동의하지 못합니다. 자꾸 우리는 교만해서 높아지고자 하고 형제와 같아 지기보다는 특별해 지기를 원하며 형제의 것을 탐내며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한 몸에 속하지 않은 듯이 행동하고 형제를 짓밟아야 높이 올라갈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탄의 법칙이지 하나님의 법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은 다스리는 것보다는 섬기는 것을 더 높이 치고 가르치는 것보다 구제하는 것을 더 귀히 여깁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렇게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시는 주께서 그렇게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림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도라는 것을 증명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보호하시며 어둠가운데서도 장애와 환란가운데서도 인도하십니다. 대신에 우리는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주님께 드림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걸어다니는 산 증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뭔가를 보여주는 산증거들입니다.

지난 10일간의 연휴가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그동안 즐거웠던 것도 슬펐던 것도 힘들었던 것도 다 잊고 이제 그리스도의 산증거로 하나님 앞에 우리를 산제물로,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시기를 그래서 우리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흠향하시며 복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8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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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이 설교 말씀에서 저는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귀중하게 여기시는 것은,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는 다르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지금 이 순간도, 우리 마음 속에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물을 꺼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 하나님 보세요 나 완전히 주님만을 바라는 주바라기에요 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자신이... 저는 없습니다.

 

저는 세상 노래도 참 많이 듣고요. 성경책 대신에 도서관에 가서 이런 저런 분야의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고요. 하나님이 제일 우선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 때가 참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랑스러운 기독교인이 아니라, 부끄러운 민망한 창피한... 숨고 싶은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섬기는 것보다는 섬김 받기를 좋아하는 나... 멀어도 한참 멀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오늘도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제가 제일 들으며 마음 아픈 이야기들은 "대체 교회 다니는 사람이 왜 그러냐?" 라는 질문입니다. 그래요. 그 예전 홍세화 선생님의 글에서 본 것처럼, 학문과 종교는 세상의 흐름, 자본주의의 흐름과 다르게 우뚝 서 있어야 하는데... 이건 뭐 휩쓸려 가는 것 같습니다. 돈 안되는 학과는 이제 하나씩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은, 대부분이 - 화려한 큰 교회, 웅장하고 아름다운 음향기기 - 앞에서 압도되어 버리고 맙니다. 아! 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은, 어떻게 그렇게 본능적으로 끌리는지... 눈과 귀가 참 밉습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며, 작은 교회에서 울며 기도하는 그 작은 소리마저 주의 깊게 다 듣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힘내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동행하심을 믿으며 힘든 현실 앞에서 오늘도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제게 힘주세요! 힘들어요! 하나님 제 편이 되어주세요! 용기 있게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게 인도해 주세요! 라고 힘써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예뻐하시고 보듬어주시고 보살펴주실 꺼에요. 그는 치료자이시며, 위로자이시며, 전능자이시므로.

 

하나님 앞에서 참 많은 실수를 했던 인생이지만, 저는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그것을 신앙이라고 감히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만족합니다. 저는 감사합니다. 이제 힘들어도 현실을 똑바로 마주보며, 지지 않고자 힘을 내게 되었습니다.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을 리가 절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힘들 때, 주저 앉아 있을 때, 울고만 있을 때, 우리를 업고서라도, 당신의 놀라운 뜻대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셨음을 고백합니다. 노력합시다. 계속해서 노력합시다.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구별되어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쁜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몇 번이고 노력합시다. 우리는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 201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