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함께 즐거워하라(로마서12:14-)/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9. 3. 21. 04:18

 

함께 즐거워하라 (로마서 12:14-)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설교는 지난주에 이어서 로마서12:14절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제목을 함께 즐거워하라고 지은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여러 가지 제목으로 삼을 구절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함께 즐거워하라’는 구절을 제목으로 삼은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요, 얼핏 생각하면 말이 안될 수도 있는데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가장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니 함께 우는 것도 아니고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뭐 그렇게 어려울까요? 글쎄요, 아마 이 설교를 다 듣고 난 후에는 왜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그렇게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야말로 네 이웃을 사랑하는 가장 큰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함께 진심으로 즐거워하기가 어렵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성도들에게 하는 바울의 권면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은 이제까지는 성도들을 중심으로 우리에게 실천해야 할 덕목들을 권면의 형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조금 더 대외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도가 같은 성도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 믿지 않는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당시는 로마의 대 박해 중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이 권면을 지키는 것도 이렇게 권면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그런 시절입니다. 지금 같은 평화기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엄청난 핍박 중에 있었고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는 말은 정말이지 말이 안되는 그런 시절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로마서는 더 대단합니다. 그러나 따르기는 어렵습니다.

 

참 로마서에 나온 그대로 살지 못했다고 해서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에 나온 실천사항들은 우리 성도가 도달해야 할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이대로 살지 못해도 좌절하지 말고 함께 노력합시다.

 

바울도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이방인과, 하나님의 적과 끝까지 목숨을 다해 싸우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성격상 한번 개종한 후에 정말 철저하게 주님을 믿었고 신앙에 목숨을 걸었던 사도가 너희들도 나와 같이 신앙의 적에 대해 단호하게 배격하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슬람의 이맘들처럼 총과 폭탄이 되어 종교를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라고 강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천국에서 복락을 누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갚으라고 말할 뿐입니다. 너희의 원한을 우리 주께서 갚으시므로 네 손으로 친히 갚으려고 하지 말라고 하실 뿐입니다.

 

이건 우리 주님이 ‘누가 너에게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가라’고 하신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혼자서 로마군대에 반항해 봤자 애꿎은 목숨만 잃을 뿐입니다. 허리에 폭탄을 두르고 알라의 영광을 위해서 적진에 뛰어들라고 선동하는 자들에 비해서 얼마나 성도를 사랑하는 분인지 우리를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대신 너의 억울함은 내가 모두 풀어줄게 그러니 너는 최선을 다해서 그냥 선에 속해서 행복하게 살아라’ 이게 우리 주님이 하시는 요구입니다. 쉬운 듯 하면서도 어려운 요구이지만 그 속에 우리 주님이 약한 성도를 보호하시려고 하는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들은 바울의 권면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결코 권면이 아닙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울이 스스로를 성도들과 함께 여겨서 자기도 실천해야 될, 그래서 함께 실천한 말이기 때문에 권면의 형식을 빌린 것이지 이것은 실제로는 우리 주의 말씀이며 성령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이 힘써 지켜야할 주님의 명령입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명령은 특히 바울의 서신에 나온 주님의 명령은 솔직히 지키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워낙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나오니까 보통 사람들로서는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우리 주님의 해결방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시도도 해보기 전에 포기하지 말고 주의 말씀을 제대로 지켜보려고 노력한다면 우리 주님이 또한 지킬 수 있도록 능력과 여건을 주실 것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참고로 항상 로마서에 쓰인 문체의 특징이 이렇습니다. 같은 말을 되풀이 하는 겁니다. 똑같지 않은 형식으로 그러나 같은 의미로. 이건 항상 강조할 때 쓰이는 문학적인 기교라고 생각합시다. 바울만이 가지는 그런 특징 정도.

 

그런데 저는 이 문장을 보고 참 절묘하다고 느꼈습니다. 뭐를 보고 제가 그렇게 느꼈겠습니까?
잘 보세요.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지 않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말이 먼저 나와 있습니다. 이 둘은 비슷한 말 같지만 그 실질에 있어 천지차이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우리 인간들은 사촌이 땅을 사도 시기하는데 같은 교회의 성도끼리 그 사람의 성공이나 기쁜 일을 진심으로 함께 기뻐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형제라고 하지만 서로를 전혀 형제라고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들끼리 사랑하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함께 기뻐하는 것이 함께 슬퍼하는 것보다 먼저 나온 겁니다.

쉽게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성경암송대회를 했다고 해 봅시다. 아니 장로투표를 했다고 해 봅시다. 나는 떨어졌는데 걸린 상대방을 순수하게 진심으로 축하하며 함께 기뻐한다는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남이 잘못되면 그걸 보고 동정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입니다. 어지간히 나쁜 마음을 먹지 않고서는 동정심을 가지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기쁜 일에 축하하는 것은 다릅니다. 남의 집 자식이 좋은 대학에 합격했는데 그걸 순수하게 축하하는 것은 자기 집 자식이 대학갈 나이가 아닐 때는 가능해도 자기 집 자식도 대학시험을 치르고 있고 또 좋은 대학에 못 갔다면 절대로 쉽지가 않습니다.

 

‘내가 저사람 보다 못한게 뭐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게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질시하고 불평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상대를 먼저 존경하라고 하셨지요.

 

다음은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이 말은 약간 표현방법이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식으로 하면 겸손하라는 말입니다. 이게 ‘겸손하라’가 된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겸손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상대방과 눈높이가 같을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때 어린아이의 눈높이에서 교육한다는 광고로 눈높이 교육이 뜬 적이 있습니다. 그래요 나의 시각에서만 보지 말고 저 사람의 시각에서도 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고 그러면 일이 더 잘 풀리게 되는 겁니다.

 

더구나 ‘같은 눈높이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면 서로 마음을 같이 하는 것이 매우 쉬운 일입니다.
이런 말에서 보통의 경우는 형제의 눈높이만큼 높이라는 말보다는 형제의 눈높이만큼 낮추라고 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겸손이 되는 것입니다. 또는 ‘같은 태도를 취하라’는 뜻도 됩니다. 같은 눈높이 그리고 같은 태도는 우리의 단합을 훨씬 더 굳건하게 만들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눈높이가 다르고 서로 태도가 다르면 결국 그 교회는 분열합니다. 분열을 하게 되면 적에게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게 될 뿐만 아니라 구성원들의 총력을 모아서 사탄마귀에게 대항할 수 없습니다. 사탄은 주의 교회를 집어 삼키려고 울부짖는 사자처럼 달려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교만하여 틈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자, 보세요. 그 다음 말이 이어집니다.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체 하지 말라”
뭐 한마디로 분수를 넘어서서 나대지 말고 겸손하라는 말입니다. 이럴 때 보면 바울 사도의 글은 은근히 사람을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서 자신의 지혜를 과신하고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이 글을 보고 기분이 나쁠 만도 합니다.

 

우리는 은근히 스스로를 존귀하고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 나와 맞는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생각하고 자기가 생각할 때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이들하고 함께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하하. 그런데 우리 주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불리셨고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교인들은 그 주님마저도 부인할 것입니까? 그 주님의 제자 된 우리가 주님의 본을 보지 않고 뒤를 좇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께 거저 받은 선물입니다. 내가 지혜로워서 내가 잘나서 지금 이 자리까지 그가 인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차지하고 있는 자리나 위치 그리고 재물 때문에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예전에 본 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재물에는 만족하지 않지만 자기가 가진 지혜에는 만족한답니다. 우리도 아마 이런 식의 생각이 어느 정도 있을 겁니다. ‘내가 안해서 그렇지 만일 했다면 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식. 그래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스스로 높이지는 말 일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사탄의 교만을 너무 너무 싫어하셨듯이 우리의 교만도 마찬가지로 너무 싫어하실 것입니다. 스스로 겸비한 모습을 보이면 주가 우리를 높이십니다.

 

다음으로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악으로 악을 갚는 다는 것 ‘갚는다’는 말에는 징벌과 보상의 의미가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그럼 누가 징벌과 보상을 결정합니까? 심판주, 우리 하나님이 그걸 결정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 누구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을 필요가없습니다. 다만 기도할 뿐입니다.

 

우리가 우리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다 갚아 주십니다. 악한 일을 한 이에게는 더 큰 악으로 선한 일을 한 이에게는 더 큰 선으로 갚아 주십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이 심판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기만 하면 됩니다.

 

로마 황제가 핍박을 하고 박해를 하는데 그 어떤 기독교인이 있어 황제와 싸울 수 있습니까? 그래서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한 말은 가망성 없는 복수전을 꿈꾸다가 처형될 수 있는 기독교인들을 위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거대한 국가권력과 맞서 싸울 것을 강요하고 종교를 위해서 순교를 요구하면 힘없는 성도들은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그러면 그의 악을 우리 하나님이 나대신 갚으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는 말씀은 원문의 뉘앙스를 살려 다시 말하면 이렇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선한 일들을 계속해서 도모하라’ 어때요? 우리 주님은 남을 위해서 하는 선한 일이 결국은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은 명확합니다. 내가 선한 일을 권하는 것도 다 너희를 위해서다. 어떻습니까? 내가 선한 일을 함으로써 세상이 보다 더 밝아지고 그리고 그게 결국은 나에게 더 큰 보상으로 다가오는 그런 삶, 그런 세상 그게 바로 천국에서의 삶이고 천국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땅에 천국이 임하게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어울리는 인간이 되려고 하면 우리 역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가능하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서로 원수처럼 엉글거리지 말고 화목하게 지내라는 말입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들과.

 

이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전국적인 호구정도 되거나 무골호인이거나 간이고 쓸개고 다 빼놓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사실 이렇게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 또 아주 어려운 요구를 우리에게 하고 계신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안에 답이 있습니다. 그냥 항상 절대적으로 평화롭게 지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 보면 ‘할 수 있거든’ ‘가능하면’ 화목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을 때는 당연히 못하는 겁니다. 아니 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카톨릭에서 조선조 말 제사 때문에 수많은 천주교도가 죽자 로마법왕의 명으로 조선의 천주교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정말 황당한 일입니다. 로마 법왕은 사람입니다. 그가 한 말로 성경을 넘어서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일에까지 우리가 외부인과 화목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화목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신앙를 배신하고 우리함께 복락을 누리자’고 하면 그걸 수용하는 것이 바로 화목하게 지내는 겁니다. 그것은 화목하게 지내라는 본문에 부합하지만 보다 더 큰 본문의 원칙인 ‘가능한 한’ 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안에 있어야하는 더 큰 원칙에는 위배됩니다. 그건 절대로 가능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과 싸우고 얼굴을 붉히더라도 하나님을 배신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계가 설정된 것입니다.

 

보세요. 바로 나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그래요 우리 손으로 원수를 갚으려고 위험을 무릎 쓸 필요가 없습니다. 평판을 떨어뜨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원수는 우리 힘으로 갚기가 어려울 만큼 거대한 세력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니 악에 찬 저주만 퍼붓고 끝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복수할 수 없는 나약한 자신에 대한 연민과 한탄으로 폐인처럼 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수는 하나님에게 맡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당하게 자신의 자녀가 대우받아서 아파하는 것을 그냥 보실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위로를 주시고 원수에게는 보응을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는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 지를 만천하에 보여 주셔서 앞으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주님은 자기의 자녀를 지키시고 보호하셔서 원수가 감히 손을 뻗지 못하도록 만드십니다.

여기 보면 ‘진노하심에 맡기라’고 되어 있지요? 이 말은 하나님에게 진노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려라는 말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섣불리 보복하겠다고 설치다가 거대한 성령의 역사를 막아 버리는 결과를 가지고 올 수도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은 저자에 상관없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취사선택해서 버릴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지 말고 맡기라고 했다고 해서 이게 그냥의 권면이나 제안으로 생각하면 정말 곤란합니다. 히브리어 문법에서 ‘~하지 말고 ~하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개입없이 뭔가 사사롭게 하려는 것을 절대로 금하십니다. 왜냐면 그분은 절대자요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며 그는 전능자요 천지의 주재이시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능력없이 우리가 뭔가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우리가 위험에 처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은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만일 사사로운 보복이 자행된다면 그건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며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닌 내 뜻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하는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대주재되심을 거부하는 불신이기 때문입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이 말을 얼핏 보면 우리에게 엄청난 인내를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감히 원수에게 보복은 꿈도 꾸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잘 보세요.

 

‘원수가 주리거나 목마르다면’ 이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이미 패가망신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보응으로 이미 그가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위험을 무릎 쓰고 보복하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이미 그는 강자가 아니라 약자, 그것도 형편없는 약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누구나 건드릴 수 있는 약자가 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것, 그것이야 말로 그에게 복수하는 진정한 길이 되는 겁니다. 그도 사람이라면 자기가 그렇게나 못되게 굴었는데도 자기에게 잘해주는 것에 대해서 얼굴이 빨개질 겁니다. 부끄러워서. 미안해서.

 

일설에 의하면 숯불을 머리에 두는 행위는 회개한 자가 회개의 표시로 숯불을 담은 냄비를 머리에 이는 것을 가리키는 애굽의 풍습을 생각나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요, 그렇게 그렇게 악인을 하나 하나 정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굴복이 아닙니다. 정복입니다. 이는 그도 그 악인조차도 그리스도의 품안으로 품는 거대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령의 역사가 승리함을 나타내는 것이며 우리가 그의 충실한 종이며 자녀이며 제자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자기는 가난해서 아무것도 없는데 그는 여전히 남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강약이 바뀐겁니다. 당연히 그의 보복이 두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졸이고 있는데 관대하게 대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승자의 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자체가 내가, 우리가 이겼다는 표시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그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관대함에 탄복하고 부끄러워하며 순복하게 될 것입니다. 뭐 순복하지 않아도 그 지경까지 갔다면 이미 우리 손으로 보복할 필요조차도 없어집니다. 그래서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두는 것이 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여기서 악은 악마 마귀를 뜻합니다. 그래요 우리는 당연하게 악에게 승리하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합니다. 선은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가 이미 사탄에게 승리하신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품으로 들어감으로써 사탄에게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악마에게 지는 경우는 우리의 욕심으로 인하여 안목의 정욕으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품에서 나오는 경우 외에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요, 선이라는 무기 ,그리스도라는 무기가 있는데도 악마에게 진다는 것은 스스로의 욕망에 이끌려서 주님을 배신하고 마귀에게 굴복하는 외에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했습니다. 정말 탁월한 선택입니다. 영원히 이 선택을 바꾸지 말기를 바라고 또 우리의 후대에게도 올바른 편을 제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뭐 이렇게 따지고 보면 우리 주님의 명령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바울의 사진을 보세요. 참 안생긴 분입니다. 안질에다 작은 키에다 안짱다리에다 메부리코에다 벗겨진 머리에다 외모로 보면 결격사유가 한두개가 아닙니다. 이걸 극복하려고 아마 더 열심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여자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돈도 다 버리고 외모를 보시지 않고 속중심을 보시는 주님에게 집중할 수 있었을 걸로 보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바울보다는 훨씬 육체적으로 뛰어납니다. 이건 제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세상에 관심이 너무 많고 여자에 관심이 너무 많고 세상이 주는 안락과 향락에 솔깃해 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하나를 명심해야 합니다.

 

사탄이 우리를 흔들기위해 제시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우리 하나님의 것이고 그가 주시는 것은 영원하지만 사탄이 제시하는 것은 찰나에 불과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절대로 절대로 미혹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일시적으로 이용할 뿐이지 주인이 아닙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그래서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보여야 할 지혜로운 자세입니다.
물론 지금 당장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큰 길, 대로를 활보하는 이들이 더 행복하고 멋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멸망으로 이끄는 길이요 우리를 사망으로 인도하는 죽음의 길입니다.

 

우리는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며 그래서 좁은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우리곁에 항상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아서 내가 불안합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까지 수천년간 우리 주님의 역사를 체험한 신앙선진들의 증거를 그대로 받으면 됩니다.

 

우리 주님은
성경에서 역사하셨던 그 놀라운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품으로 안내하기 위한 보혜사로서 역사하시며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소망가운데 인내하며 하나님의 보상과 위로를 기다립시다.

 

거대한 로마제국의 박해가 지속되고 있는 그때에 바울 사도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혹여라도 신앙순결을 지키기 위해 로마당국과 맞서 싸우고 이미 처형된 동료 성도의 복수를 위해서 그들을 습격할까봐서 이 말을 했다고 여겨집니다. 만일 성도들이 로마당국에 대해서 그들의 압제에 대해서 무장해서 반항한다면 이는 반항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 됩니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자위를 위해서라도 무장하고 반항했다면 아마 제대로 된 반항도 못하고 목숨을 잃게 되고 기독교에 대한 전면적인 군대의 공격으로까지 번지게 될 것입니다. 제국을 위험에 빠뜨리는 종교다 라고 하는 딱지가 붙어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대 박해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들이 로마를 상대로 혁명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충실한 로마시민임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애초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안위를 위해서 기도하고 개별적으로 복수하지 말 것을 당부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도만하고 너는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주께서 부르신 직업에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그 일을 통하여서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로마서를 단순히 기독교 윤리서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은 피끓는 심정으로 사랑하는 양떼를 보호하려고 이 글을 쓴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사랑을 전한 것입니다.

 

세상이 점점 흉악해 지고 있습니다. 자연재해도 점점 심해집니다. 이제 전혀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세상은 새예루살렘의 도래처럼 우리에게 낙원을 약속하는게 아닙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치열한 경쟁과 사탄이 득세하는 것을 보아야 하는 어쩌면 새로운 형태의 지옥도가 펼쳐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가운데서도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며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기다립니다. 우리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닥친다 해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한 인간인고로 두렵고 떨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이 바로 나의 보호자시며 인도자심을 믿고 그만 따라서 주님의 손을 꼭 붙잡고 주의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소망이 머지않아 응답받을 것이며 머지 않은 미래에 우리는 승리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결코 낙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도 말고 초조해 하지도 말고 그를 확실히 믿고 나아가십시오.

 

어느 순간 우리주님의 품안에서 행복함을 누리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굴하지 말고 소망하며 기뻐하며 기도함으로 나아갑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지는 거룩한 산제물입니다. 그렇게 거룩하게 살아가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8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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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나아가는 삶... 그것은 어쩌면 조금 더 피곤해 지는 것인지 모릅니다. 조금 더 애써야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냥 게으르게 누워서 아무 것도 안 하면서, 괜히 하나님 주세요 주세요 아기처럼 그러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행동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선을 다해서 오늘을 보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분명 우리 주님께서 오늘도 수고가 많았구나 하고 위로해 주시며 달콤한 잠을 선물해 주시는 듯 합니다.

 

함께 즐거워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삶이 되겠습니다.

그런 다짐을 젊은 날에 이렇게 남겨놓을 수 있어서 무척 뿌듯합니다.

나만 즐거운 삶이 아니라, 더 큰 뜻을 품고, 힘내볼 수 있어서... 그 험한 길이 어쩌면 행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201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