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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최후의 개혁과 요시야(역대하34:1-19)/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9. 12. 1. 21:07

유다 최후의 개혁/요시야 (역대하34:1-19)

 

오늘은 므낫세의 손자요 히스기야의 증손인 요시야에 관해서 살펴봅니다. 요시야는 유다의 역사에서 끝에서 다섯 번째의 왕이지만 실제로는 자주 독립국 유다의 마지막 왕입니다. 요시야 이후의 왕들은 모두 애굽이나 바벨론의 괴뢰였습니다. 허수아비 또는 꼭두각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의 나라가 마음대로 유다의 왕을 세우고 폐하고 잡아가고 풀어주고 합니다. 그러니 요시야를 끝으로 유다의 독립은 끝이 난 것입니다.

 

역대기의 여러 왕들이 차례로 지나갔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가 행한대로 하나님이 갚으신 것을 받았습니다. 선한 일을 한자에게는 복을 주셨고 악을 행한 이에게는 벌을 주셨습니다. 악하다가 회개한 자에게 회개의 기쁨을 주셨고 선하다가 악해진 자에게는 징벌을 내림으로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말로만 회개한게 아닙니다. 회개는 죄과를 치르고 거듭남을 포함합니다. 말로만 회개했습니다 하고 눈물 한사발 흘리면 끝나는게 아닙니다. 그렇게 회개가 쉽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절대로 이루어 질 수 없을 것입니다. 실컷 죄를 저지르고 죽을 때 다돼서 회개한다고 하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역대기의 기조는 뚜렷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자에게 하나님이 징벌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매달린 자에게 복을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의 품 안에 거하라’는 메시지가 뚜렷합니다. 이것은 택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택하신 자에게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것이지 그들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용서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회개의 시간을 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어떻게 보면 택자가 더 괴로울 수도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괜찮고 죄 속에서 마음껏 살아도 생전에는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는데 택자에게는 그게 안됩니다. 하나님의 엄격한 공과율을 따라 살게 됩니다. 상과 벌을 엄격하게 나누고 그 공과를 저울에 달아 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요시야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가 어렵게 됩니다. 요시야는 유다 최후의 종교개혁을 실시한 왕입니다. 무슨 개혁이 그렇게나 자주 일어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댈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은 죄에 무너지기 쉬우므로 끊임없이 개혁해 나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비추어 쳐서 강제로 복종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엔가 옛사람이 자기 안에 되돌아 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보고 하나님의 법이란 거울로 자기를 훈육해야 합니다.

 

요시야는 8살에 왕위에 올랐답니다. 이런 꼬맹이가 왕이 되어야 하는 상황은 절대로 정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가 너무 일찍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버지 아몬은 우상을 음란하게 섬기다가 신하의 반란으로 궁에서 죽었고 그가 어린 나이에도 왕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단지 우상을 섬겼다고 반란이 일어난게 아닙니다. 우상을 섬긴 아몬에 대해 하나님이 분노하시고 징계하셨기에 반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신하의 반란이 일어나서 왕이 죽는 일은 정말 나라에 망조가 든 것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반란 국가라고 할 만큼 반란이 흔했지만 남 유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신하의 반란으로 왕이 죽는 일이 생겼습니다. 뭔가 유다의 국운이 쇠한게 눈에 보입니다. 다윗의 왕통이 만세로 이어질 거라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나 봅니다.

 

이는 유다가 정신적 윤리적 중병에 걸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백성들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떨어졌기 때문에 다윗왕가에 대한 충성심도 같이 떨어지는 겁니다. 물론 이 반란은 백성들에 의해서 진압되고 요담의 아들 요시야가 왕이 되었지만 때문에 그는 불과 8살에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는 삼십일년을 다스렸답니다. 그러면 39살에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애굽군대를 막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옛날 사람이 비록 수명이 평균적으로 짧기는 하지만 왕이 40도 안되어서 죽었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비극입니다. 유다의 마지막 등불이었던 요시야가 죽음으로 유다의 역사는 막을 내린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역사적으로는 유다의 3대 성군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여호사밧과 히스기야와 더불어 3인의 성군에 뽑힌 인물이니까 얼마나 정치를 잘 했을까요? 뿐만 아니라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고 남 유다왕 중에서는 유일한 평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해가 안되는 것이 하나님을 그렇게나 잘 섬긴 왕이 왜 그렇게 일찍 죽게 되었습니까?

 

저의 의문은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도데체 하나님의 섭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히스기야에게 수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신 하나님은 가장 훌륭하게 유월절을 지킨 왕에게는 왜 그렇게 박하게 대하셨을까요?

 

이제껏 의인에게 복을, 악인에게 벌을 주신 하나님은 이번에는 의인에게 비통함을 주셨습니다. 도데체 그의 섭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에게 대한 역대기 저자의 평가는 매우 호의적입니다. 2절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이런 평가를 받은 사람은 유다왕 중에서는 이사람 요시야 뿐입니다.

그랬는데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마찬가지로 납득할 수 없는 많은 불공정한 일들을 마주칩니다. 그렇게나 하나님에게 열심을 내고 그를 섬겼음에도 그의 대접이 너무나 시원치 않습니다. 솔직히 너무 불공정합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절대로 아닌 것 같습니다. 그는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불공정한 일을 하시는 걸까요? 그의 상벌에 대한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의 행사가 너무 들쑥 날쑥이라서, 주먹구구식이라서 제대로 대우 받지 못한 사람의 입장에서 솔직히 억울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짧은 기록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하심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수 있을테니까요.

 

자, 그런데 보면 약간 이상한 기록이 보입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하나님을 섬긴게 아닙니다. 그는 무려 8년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았답니다. 글쎄요...

 

참고로 역대기에서 유다의 왕들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기록하는 이유는 이 역대기의 일차 독자가 바로 포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전 지파가 아니라 유대의 정통성을 보여주기 위해 옛날 남 유다왕국을 중심으로 기술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에 보면 북쪽 이스라엘의 엘리야도 나오고 아합도 나오고 사마리아 이야기도 나오고 하지요? 그건 열왕기 기자의 입장에서 비록 북왕국 이스라엘에 불신과 패악이 넘쳤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각을 가지게 하려고 한 것이고 역대기 기자에게 북 이스라엘은 본받아서는 안되는 패악의 근원인 거지요.

 

역대기는 솔로몬의 성전건축 기사를 제외하고는 유다의 20명의 왕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요시야는 16대 왕입니다. 대수로는 그렇지만 실제로 유다는 요시야가 죽고 난 다음에 급속히 허물어 집니다.

 

요시야는 주전 640년경에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는 이미 앗수르가 쇠퇴해가고 대외적으로 영향력이 급속히 축소되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유다가 자주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직은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 대의 대신들에 의해서 정책이 결정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8살 꼬맹이니까 그냥 어머니와 대신들이 하는대로 정책이 흘러 갔고 이들은 대부분이 친 앗수르파입니다.

 

유다사람들이 정말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이 없습니다. 이미 앗수르가 쇠퇴했는데도 여전히 앗수르를 섬기는 찌질이 들입니다. 시세 대국에 정말이지 어둡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스스로 다스릴 수 없을 때는 유다가 여전히 앗수르의 우상을 섬겼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선대의 대신들이 하는 대로 따랐던 것입니다. 그렇다는 말은 나이든 사람들의 우상숭배에 대한 태도가 매우 단단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그가 16살이 되고 어느 정도 시세를 파악하게 되고 독립적으로 통치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우상을 배격하고 하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6살에 하나님을 찾았고 20세가 되었을 때에 비로소 나라의 우상을 일소하고 나라에 하나님 신앙을 회복하게 만든겁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종교개혁은 매우 단호하고 확고합니다. 단순하게 우상을 멀리 치워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제단을 헐고 태양상을 찍고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렸답니다.

 

그래요, 개혁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냥 하는둥 마는둥 하는게 아닙니다. 개혁을 미지근하게 하면 반드시 복고세력이 들고 일어나 원위치하거나 아니면 개악이 됩니다.

 

우상을 부수지 않고 아깝다고 다른 곳으로 치워서 보관하는게 아닙니다. 혹 그 우상에 뭔가 신통력이 있어서 그것에 손대면 신벌을 받을까 봐서 적당히 타협하는게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죄의 찌꺼기를 남겨 두면 어떻게 된다고요?

 

그래요, 시간이 지나면 여건이 바뀌면 또 슬그머니 치워버렸던 우상이 중심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하나님의 전에 우상이 서게 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들이 판을 칩니다. 돈신이 주름을 잡고 색신이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날마다 스스로를 쳐서 복종시키지 않는다면 어느샌가 돌아온 우상에게 내 마음을 뺏기게 되는 겁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열왕기하 22장에 보면 요시야의 어머니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빠져 있습니다. 충분히 이름을 뺄 수는 있지요 그러나 문제는 이 병행기사가 모친의 이름을 적시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똑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일부러 그 어머니의 이름을 뺀 겁니다.

 

정확하게는 밝히지 않았지만 요시야의 어머니가 우상숭배자이고 앗수르의 앞잡이로 백성들과 신하들이 우상을 섬기도록 한 배교자라서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시야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때까지 왕위에 오르고 8년을 더 기다린 것입니다. 어머니의 수렴첨정을 벗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침내 16세가 되고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걸 보면 교육이 참 중요합니다. 아무리 스스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해도 부모가 막거나 잘못된 사상이나 신앙을 주입하면 자녀가 제대로 자라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사회의 분위기도 중요합니다. 혼자서 아무리 앗수르를 반대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려고 해도 사회 전체가 하나님을 반대하고 앗수르를 의지하면 뾰족한 수가 없는 법입니다.

 

여하튼 이런 식으로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12년이나 미루어 졌습니다. 요시야는 20세가 되고서부터 비로소 유다 전국을 깨끗하게 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는 앗수르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서 유브라데스 서쪽의 지배권을 상실했고 바벨론과 애굽이 서서히 세력을 회복하던 시점이었습니다. 더 이상 이전처럼 친 앗수르 정책을 답습해서는 안됩니다. 요시야는 이제 더 이상 외국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려고 다짐합니다.

 

요시야가 성경에서 열왕기서나 역대기서에서 전무후무한 왕으로 칭송받은 것은 그가 너무나 철저한 우상 근절책을 실시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은 이유는 단순히 우상을 치우고 만 것이 아니라 부수고 파훼하는 철저한 개혁을 실시했기 때문입니다. 부수기만 한게 아닙니다. 그의 유월절은 아마 히스기야의 유월절보다 더 성경적이고 철저했던 모양입니다. 오죽 했으면 이렇게 유월절을 제대로 지킨 왕은 요시야가 유일했다고 기록했을까요?

 

더구나 그는 우상숭배자들을 죽이고 우상을 빻아서 그들의 무덤에 뿌리는 철저한 개혁을 실시합니다. 그것뿐 아닙니다. 그는 유다만 정화한게 아니라 주인없는 이스라엘 땅까지 그 범위를 넓혀서 이전의 이스라엘 모든 땅에서 우상을 척결했습니다. 이미 앗수르의 영향력은 없는거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요시야의 개혁에 딴지를 걸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국제정세의 변화 때문에 졸지에 요시야는 통일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왕이 된 겁니다.

 

6절에 보면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시므온과 납달리까지 사면 황폐한 성읍들에도 그러하게 행하여“

오늘날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백성, 사람들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황폐한 땅은 이렇게 종종 버려지기도 한 모양입니다. 많은 백성들을 앗수르로 잡아가고 약하고 힘없는 백성들만 남겨 두었으므로 요시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든 땅에서 종교개혁을 실시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점령한지 백년만에 이미 앗수르는 영토가 유브라데강 동쪽으로 축소되었습니다. 왕위를 둘러싼 내분과 피정복 민족들의 독립 움직임 때문에 유다의 이스라엘 침범을 간섭하거나 방해하지 못합니다. 사실은 그 조그만 땅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참고로 아주 재미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제사장들의 뼈를 제단위에서 불살라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하게 하였으며“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사실 이 일은 이미 280년 전에 예언이 되었고 이제 비로소 성취된 것입니다.

 

옜날 여로보암 시대에 ‘훗날 요시야라는 사람이 태어나서 산당 제사장들의 뼈를 우상의 제단에서 사를 것이라’는 예언이 무려 280년이 지난 다음에 성취된 것입니다. 여기 산당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겼으므로 제사장은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을 말합니다. 놀랍지요?

 

우리가 살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빨리 성취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거나 그의 존재를 회의하는 것이 얼마나 근시안적인지. 하나님은 우리처럼 잠깐 살다 가는 분이 아니므로 그는 장기적으로 보십니다. 그래서 그 긴 시간을 기다리지 못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의심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데 우리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됩니다.

 

므낫세가 우상을 빻아서 가루를 만들지 않고 다른 곳으로 치워버려서 아들 아몬이 왕이 되고 난 다음 그것을 도로 가져와서 우상을 섬긴 것을 상기하고 요시야는 아예 그 우상을 빻아서 가루를 뿌리고 그 제사장들을 죽여서 뼈를 불태운 겁니다. 철저한 회개와 죄악과의 단절.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개혁이랄 수가 있습니다. 떠뜨미지근한 개혁은 오히려 개악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혼란만을 초래하고 실제로 변한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는 그 모양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죄와의 완벽한 단절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전적 헌신이야 말로 오늘 우리가 행해야 할 행동입니다.

 

자, 그런데 국토를 깨끗하게 한다는게 결코 쉽지가 않은 모양입니다. 왕12년에 시작한 정화가 18년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고 합니다. 무려 6년이 걸린 겁니다. 아주 작은 영토를 가진 진짜 자그마한 나라에서도 이렇게나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 정도로 철저하게 그리고 빠짐없이 개혁했다는 말도 되고 그 만큼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뿌리가 깊었다는 말도 됩니다.

 

우리나라를 본다면 수천년간이나 이어져온 우상숭배의 풍습을 뿌리 뽑는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도교 불교 무속 과 각종 미신은 이미 우리 사람들 속에 뿌리깊이 박혀 있습니다. 각종 지방자치단체나 공공기관에서 제사나 우상숭배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헌관이니 뭐니하면서 각종 제사에서 술을 올리는 공무원들이 매우 많습니다. 심지어 교인들도 연초에 신년운세를 보고 점을 치고 귀신의 풍습을 따릅니다.

 

이름난 명승지마다 무슨 신선봉이니 옥녀봉이니 천불산이니 원효봉이니 의상봉이니 도교와 불교의 이름이 가득합니다. 옥황상제도 용왕도 신선도 부처도 마구 마구 봉우리와 대의 이름으로 불려집니다. 마치 이 한반도 전체가 우상의 땅과 같습니다. 지금도 시골같은데 가보면 서낭당이나 수호목들이 있습니다. 마을사람들이 아직도 그 앞에서 동제를 지낸답니다. 놀랍지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명목상의 기독교도가 신구교합쳐서 인구의 1/3에 달하지만 무신론과 물신숭배와 무속과 불교와 도교를 합친 반기독교적 분위기에는 상대가 안됩니다. 게다가 성결을 나타내야 할 목사들과 교회들이 세상보다 더 더럽게 노는데 도저히 세상에 하나님의 영향력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보통 우리는 왕은 뭐든지 다 할 수 있을걸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신하들이나 백성들이 한결같이 ‘아니되옵니다’로 버티면 왕도 결국은 자기의 주장을 꺾습니다. 그만큼 민심이 무서운 겁니다. 그런데 부정과 부패와 탐욕에 찌든 기독교가 세상을 제도하겠다고 나섰다가는 우사나 안당하면 다행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기독교를 싫어하고 증오하면 심지어 공공장소에서 전도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야 된다는 말도 있는 형편입니다.

 

그 조그만 나라도 개혁하는데 무려 6년이나 걸렸는데 우리는 이스라엘보다 유다보다 얼마나 큰 나라입니까? 그리고 이해관계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있나요?

 

우리는 지금 개혁을 제대로 수행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시작도 제대로 못했다고 해야 합니까? 옛날에 어떤 신학교수님이 우스개 소리로 ‘교회**협회’를 개혁해야 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정말이지 목사로서 무슨 무슨 단체의 감투를 쓴 사람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아차하면 초심에서 벗어나서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 되고 심하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6절에 보면 ”또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스므온과 납달리까지 사면 황폐한 성읍들에서도 그렇게 행하여“ 그런데 여기에 나온 곳은 유다의 영역이 아닙니다. 모두 이스라엘의 영역이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멸망하고 사람들은 대부분 끌려 갔지만 엄연히 남의 나라 영토입니다.

 

여기 보니까 황폐했다고 하지요?

이 말은 두가지로 번역되어질 수 있습니다. 성읍 자체가 황폐하고 황무지라고 할 수 있고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가 황폐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뭐 다른 식의 해석은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개혁은 항상 그렇습니다.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가 황폐하고 허무할 때 개혁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물질적인 부와 문명이 극성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에 비례해서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합니다. 그러니 개혁이 필요합니다. 빈익빈 부익부의 세상에서 극도의 배금주의가 판을 칩니다.

 

개혁은 원래 잘먹고 잘입으려고 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서 천년만년 행복을 누리다가 마침내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겁니다. 행복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물질에 국한된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앞세우고 바르게 살면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아버지께서 주십니다.

 

그 북쪽 황폐한 성읍에서도 우상을 부수고 가루로 만들고 땅을 깨끗하게 하고 사람들의 심령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시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게 총 6년이 걸렸습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계속됩니다.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게 되고 이를 듣고 다시금 가열차게 2차로 종교개혁을 실시합니다. 또한 유월절을 모범적으로 지켜서 이처럼 유월절을 지킨 사람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는 전무후무의 놀라운 칭찬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애굽의 느고가 군대를 북상시키는데 요시야는 군대를 끌고 나가서 유다를 방어하다가 죽습니다. 화살에 맞아 죽습니다. 그의 성공적인 종교개혁에 비추어 그의 말년은 너무 비참합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있던 지역은 원래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라고 해서 북방의 강국이나 남방의 강국이 시시때때로 쳐들어와서 지배하던 곳입니다. 그래서 나라를 보존하기가 참 어려운 곳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륙과 해양세력의 세력이 충돌하는 요충지입니다. 그래서 외적의 침입이 끊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라를 보존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스라엘과 비슷합니다.

 

앗수르의 침입위험이 한풀 꺾이니까 이제는 애굽이 쳐들어 옵니다. 물론 느고는 유다가 목표가 아니라 단지 길만 빌리고 바벨론으로 쳐들어 간다고 말하지만 그건 다 헛소리입니다.

 

강대국의 군대가 약소국의 땅을 짓밟고 지나가는데 그냥 길을 비켜준다는 것은 그 땅에 사는 백성들에게는 대재앙입니다. 또 국경을 돌파하고 들어와서 갑자기 나라를 점령하려고 들면 막기가 어렵습니다. 왜군이 ‘정명가도’라고 하면서 명나라를 칠 길을 빌려달라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보통 나라들은 국경을 방어하려고 국경을 따라서 성과 요새를 짓고 군대를 보내어 지키게 합니다. 국경이 지리적으로도 방어에 용이한 지형이 많습니다. 그러나 일단 국경을 돌파하면 아무래도 방어력이 약합니다. 그러니 뭐라고 해도 왕의 입장에서는 막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요시야는 전혀 잘못한게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죽었습니다. 전사, 애굽 군대의 화살에 맞아서 죽습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요시야를 더 도우셔서 그로 하여금 애굽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더 부강하게 만들어 주셨다면 우리는 ‘역시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주시고 영화롭게 하셨네! 감사합니다’ 했을 겁니다.

 

하지만 히스기야에게 보이셨던 그 놀라운 기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친히 앗수르의 군대를 치신 하나님의 역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왜 요시야에게 비참한 죽음을 주셨을까가 참 고민스러운 부분입니다.

 

예루살렘은 주전 597년에 바벨론에게 함락되고 그 뒤에 다시 유다가 반항하자 바벨론은 10년후에는 아예 예루살렘성을 파괴해버리고 사람들을 끌고 가 버립니다. 이게 바로 유대인들의 바벨론 유수라고 하는 겁니다. 요시야때 애굽이 쓸고 아들대에 바벨론이 쓸어버립니다.

 

요시야가 죽고 23년만에 유다가 공식적으로 멸망하지만 실제로는 요시야의 죽음 이후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면 요시야의 뒤에 있는 4명의 왕들은 애굽과 바벨론에 의해서 폐위도 되고 잡혀가기도 하고 이미 독립국의 왕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역대기 기자는 말합니다. 느고의 말처럼, 하나님의 명령으로 느고가 말한건데 요시야가 이를 듣지 않았다고. 느고가 말하기를 자기는 단지 유다의 영토를 통과할뿐 그래서 북방으로 바벨론과 전쟁을 치러 가는 것일뿐 결코 유다를 공략할 의사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곧이 곧대로 믿어서 길을 열어 준다면 그는 왕도 아닙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모략과 거짓이 횡행하는데 어찌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느고의 군대를 저지하지 않을까요?

 

비록 느고가 21절에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요시야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는 애굽사람 느고가 한 말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가 거짓말을 할 수도 있는 거니까.

 

요시야가 애굽왕 느고의 군대를 막아선 것은 혹시나 앗수르가 다시 살아나게 될까봐서입니다. 느고는 북방으로 군대를 끌고가서 갈그미스란 곳에서 신흥 바벨론과 중동의 패권을 가르는 전쟁을 하려고 했습니다. 요시야가 볼 때는 이 전쟁으로 두 나라가 힘이 빠진 사이에 앗수르가 다시 살아나서 자기 나라를 괴롭힐까봐 느고의 군대를 막아선 것이기 때문에 당시의 국제정세를 살펴서 한 굉장히 지혜로운 조치였습니다.

 

인간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지혜로운 조치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이 전쟁 때문에 요시야는 죽고 유다는 망하게 되고 느고도 결국 바벨론에게 패해서 쇠퇴하게 됩니다. 느고가 그렇게나 요시야와 싸우지 않으려 한 이유는 대적과의 큰 전쟁을 앞두고 힘을 빼기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느고가 유다와 싸우지 않았다면 바벨론과 더 잘싸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므낫세와 그 아들 아몬의 악정을 보시고는 반드시 유다를 멸하겠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요시야가 더 하나님께 매달린 것입니다. 자기 나라를 보존해 달라고.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돌리기는 역부족이었던 모양입니다. 이미 너희의 악이 한계용량을 넘었으므로 내가 더 이상 너희를 용서할 수가 없다고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대신에 요시야에게는 불쌍하다고 그의 눈으로 나라가 파괴되고 외국에 끌려가고 하는 것은 보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가 전사한 것이 그의 큰 불행이고 하나님의 무자비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가운데서도 자기의 사랑하는 요시야를 위해서 그는 백성들의 사랑 가운데서 왕으로서 죽게 하셨다는 거지요.

 

유다는 총 20명의 왕 가운데서 겨우 네명 정도가 하나님을 잘 섬긴걸로 볼 수 있습니다. 나머지 16명의 사악한 왕들이 나라를 우상의 지배하에 두었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정의 대신에 탐욕과 독재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탐학했지요.

 

그 죄악의 무게를 요시야의 개혁이 이겨내지 못한 것입니다. 요시야가 죽자 사람들은 앞다투어 그를 기리고 한탄했습니다. 예레미야도 요시야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가를 지었습니다. 25절에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요시야의 아들이 왕이 되었지만 애굽왕이 석달만에 그 왕위를 폐했고 애굽으로 끌고 갔답니다. 그리고 벌금으로 금 한달란트와 은 백달란트를 내게 했다고 한 것을 보세요. 이미 유다의 경제력이 매우 약하게 되었다는게 여기서도 보입니다. 히스기야는 금 삼십 달란트와 은 삼백달란트를 앗수르에 조공으로 바치고 살아났지요. 그런데 이건 벌금인데도 이것밖에 거두지 않은 것은 유다의 국력이 약해져서 벌금을 많이 부과해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므낫세와 요담이라는 악당들이 그 오랜 세월동안 악을 행함으로 나라가 아주 약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요시야의 개혁이 더 절실했고 더 긴급했고 더 철저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성경은 요시야의 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잘 섬겼기에 복을 받았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군대를 이끌고 느고의 군대와 자웅을 결하려 한 것을 보면 상당한 강군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마지막 힘을 다 짜내어서 군대를 만든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요시야의 패전으로 유다는 국운이 끝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후손들은 애굽에 끌려가고 혹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고초를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내가 비록 하나님 앞에 단독으로 선하고 의롭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가 속한 공동체의 악의 무게가 선의 무게에 비해 너무 무거우면 결코 징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수의 의인을 뽑아내서 환란을 피하게 하시고 나머지는 옥석구분없이 멸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다는 저울을 가지고 의와 악의 무게를 달아서 엄격하게 판단하신다는 겁니다. 구약시대엔 이런 하나님의 법칙이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다만 신약시대엔 우리 주님의 십자가 달리심으로 그가 흘리신 대속의 보혈공로로 처벌이 유예되고 경감된 것일 뿐입니다. 회개의 시간을 더 주시는 것이지요.

 

유다의 멸망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보기를 원합니다만 선악 간에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저울로 달아보았을 때 유다의 악이 선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은 확실합니다. 심지어 요시야의 아들들과 손자들은 이전보다 더 포악하고 어리석고 우상숭배에 몰두하여 하나님의 자비까지 잃어버립니다. 역대기에서는 그 네명의 이름 뒤에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는 말이 공통적으로 나옵니다.

 

이미 하나님의 심판의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있습니다. 영적으로뿐 아니라 지혜있는 자가 아니 지혜는 관두고 정상적인 생각을 하는 자가 보기에도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입니다. 왕들마다 이 나라 저 나라에 끌려가는게 보통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올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다는게 바로 유다백성들의 뿌리깊은 우상숭배 근성, 죄성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유다의 역사에서 선한 왕들은 정말 가뭄에 콩나듯이 혹가다가 한번씩 나옵니다. 심지어 선한 왕의 아들이 가장 사악한 왕이 되기도 합니다. 이들은 돼지요 짐승이라 하나님의 역사와 기적을 직접 보고 겪었음에도 전혀 느끼지 못했나 봅니다.

 

제가 나라를 볼 때 이 나라의 도덕적 타락상과 죄악상이 도를 이미 많이 넘었습니다. 그런 판에 한두사람의 선행으로 나라가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쳐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썩어 버린 공동체는 소수의 의인을 불러내서 그들은 살리고 공동체는 멸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공의를 지금도 묵묵히 실천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에게 시간을 조금 더 주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공로 때문에 사정을 조금 더 봐주시는 겁니다. 결코 하나님이 의롭지 않아서 그가 존재하지 않아서 그가 힘이 없어서 간섭지 않으시는게 아닙니다.

 

가정과 개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오래 참으시기에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는 수가 있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절대로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저울은 지금도 우리의 선악을 달아보시고 심판의 명분을 쌓고 계십니다. 마침내 눈금을 넘어서 저울추가 일방적으로 기울어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다고 판단되면 그의 가혹한 분노가 쏟아질 것입니다. 그 누가 아버지의 진노를 이겨낼 수 있나요? 그 누가 그 진노를 견디지요?

 

저울추가 완전히 기울기 전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불신자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귀의해야 함과 동시에 교회 안에서도 회개와 개혁의 자정작용의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의 울음과 통회 자복함이 있어야 합니다. 체면치례가 아니라 진실로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자복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아니 회개했다고 말만 하고 죄악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그건 회개가 아닙니다. 공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은 지금 심판을 취소한게 아닙니다. 단지 그때를 기다릴 뿐입니다. 죄악의 총량이 저울추를 완벽하게 기울게 할 때를 기다릴 뿐입니다.

 

돌아보면 콩알만한 교회가 민족과 나라를 대표하는 듯이 설치는게 너무 웃깁니까?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안에서 영교하고 기도로 서로 통합니다. 하나님 앞에 단순히 교인이 아니라 성도가 된다면 한 사람이 천을 두 사람이 만을 대신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우리가 떳떳하게 서도록 더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이해도 한달이 남았습니다. 연말은 항상 아쉽고 슬프고 또 아름답습니다. 열매가 너무 적어서 아쉽고 희망이있기에 아름답습니다.

내년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기적과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대로 하나님의 품 안에서 의롭게 살기만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형제를 돕고 그의 법을 준행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즐겨하며 불의를 미워하고 하나님 편에 서서 그와 함께 나아간다면 머지않아 놀라운 기쁨과 굉장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가 우리 성도에게 주시는 궁극의 평안 샬롬의 상태에 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말 것입니다.

 

이제 12월이 시작되었습니다. 12월은 전체로 성탄절입니다. 성탄의 주님을 기억합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변한 건 없습니다. 당연히 내일의 나가 변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를 둘러썬 여건도 환경도 변합니다. 심지어 사람의 마음마저 변합니다.

 

여기서 변하지 않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자기의 피로 대속하여 구속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가 한번 성탄절을 보낼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더 나은 삶을 살고자 다짐힙니다. 더 멋진 성도가 되고자 다짐합니다. 그리고 희망도 낭만도 품습니다. 그러면 된겁니다. 그렇게 그렇게 우리 인간은 조금씩 조금씩 더 나아진 모습으로 하나님의 앞을 향하여 걸어 갑니다.

 

멋진 주일을 보내고 보다 나아진 ‘바른 삶 성도’의 모습으로 본격적인 성탄의 달인 12월을 맞이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19년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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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요시야 왕의 이야기도 제게는 그런 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뻐하셔서 일찍 데려가셨다는 이야기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싶긴 하네요. 다수가 악을 섬기는 곳에서는 어쩔 수 없이 도망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옛 말에도 도망도 하나의 비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인간은 본받기 쉽고, 물들기 쉽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남을 험담하고, 공격하기를 즐기는 매우 못된 습성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는 상대하지 않는 현명함과 결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또 좋은 인연을 만나게 해주신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나쁜 길에서 떠나고, 정직한 길에서 노력하는 그런 단순하고도 아름다운 우리의 즐겁고 만족하는 영혼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2019. 12.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