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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베라 - 처음부터 불평하다(민수기11:1-1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9. 12. 8. 15:53

다베라 - 처음부터 불평하다 (민수기11:1-11)

 

이스라엘 자손들의 출애굽 여정을 보면 마치 우리네 인생길의 축소판을 보는듯합니다. 출애굽 길이나 우리의 나그네 길이나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출애굽의 여정도 보면 군데 군데 오아시스를 만나고 또 때로는 물이 없어 먹을 것이 없어 고난을 겪기도 하며 때로는 지도자를 원망하고 더 가지기 위해 이웃과 다투기도 하며 또 권력을 탐해서 지도자에게 대항하고 분열하고 싸우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벌을 받기도 하지요.

 

벌을 받으면 일시적으로 회개하고 정신을 차렸다가도 시일이 지나면 다시 죄를 짓고 우상을 섬기고 탐욕에 휘둘려서 멋대로 살다가 또 벌을 받습니다. 옛날이나 요즘이나 중동이나 우리나라나 언제 어디에서나 사람사는 곳은 다 비슷한 모양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웃고 행복할 때가 있는가 하면 울고 불행을 호소할 때도 있습니다. 몸이 아플 때도 있고 외로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는 사랑을 하고 자녀를 낳고 돈을 벌고 승진도 하고 합격도 하고 행복을 느끼며 장밋빛 인생을 꿈꾸기도 합니다. 비가 오기도 하고 햇빛이 비취기도 하며 춥기도 하고 덥기도 하며 때로 너무나 황홀한 아름다움 속을 걷기도 합니다. 사막가운데서 오아시스를 만난거지요.

 

그러나 그런 기간은 너무 짧습니다. 인생의 황금기는 급속하게 지나갑니다. 그리곤 그 나머지생에서 그 인생의 황금기를 추억하면서 쓸쓸하게 보냅니다.

 

그런가 하면 이들을 털어 먹으려는 외적들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이민족을 치기도 합니다. 성막에서 제사를 지내는가 하면 감사해서 찬송을 부르는가 하면 불평하며 원망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애굽을 바라보면서 지도자와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들을 보면 사람사는 곳은 어디나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의 삶에서 경쟁은 더 이상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거의 모든 것을 가지고 경쟁합니다. 사람들이 항상 옆에 있습니다. 그게 너무 징글징글해서 도시의 사람들을 피해 산속을 가다가 경치가 좋은 곳에 있는 바위에 앉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서 다른 이들이 그곳으로 옵니다. 같이 앉아 있기가 뭐해서 비켜줍니다. 좋은 것에는 항상 경쟁이 있습니다. 서로 빼앗으려 합니다. 좋은 것은 몇 개 없고 사람은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산에 올라 한밤중에 기도할 때는 사람이 없어요. 경쟁이 없습니다. 춥고 고독하고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춥기도 하고 모기도 있고...그런데 그 한밤중의 고독이 무색하게 새벽 네시부터 산에 올라온 등산객들 때문에 잠자리를 벗어나서 내려오다가 맷돼지를 만났습니다. 하마터면 크게 다칠뻔했는데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이 맷돼지를 다른 곳으로 튀게 하셨습니다. 무심코 제가 비춘 후레쉬 불빛 때문에 맷돼지도 엄청 놀란 모양입니다. 바로 앞에서 괴성을 지르고는 옆으로 튀어 갑니다. 만일 앞으로 튀어왔다면 죽은 목숨이지요.

 

회사원들에게 승진은 가장 값진 보상입니다. 그러나 자리는 적고 지원자는 많습니다. 그래서 만년과장이 생깁니다. 자기는 괜찮은데 지켜보는 이들이 수군댑니다. 가시방석입니다.

 

사회가 고도화 될수록, 산업화 될수록 무슨 경쟁이 그렇게 심해 지는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자연적으로 모든 사람이 나의 경쟁상대처럼 보입니다. 어떤 이들은 아주 자그마한 이익을 놓고 머리가 깨질 정도로 싸우려고 덤빕니다.

 

정치꾼들 보면 밥먹고 싸움만 합니다. 이 사람들은 정권을 잡는 것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심지어 나라야 흥하든 말든 신경도 안씁니다. 물론 이 사람들의 직업이 거짓말하고 남을 모략하고 헐뜯는 것이기는 하지만 보통 사람은 정치해서는 안될 정도로 음모를 꾸미는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평안할 때가 없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쟁과 싸움과 이기심이 이제는 하다 하다 남녀가 편을 먹고 싸웁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배필, 짝을 이루게 하신 남녀가, 짝이 아니라 인생의 동반자가 아니라 서로 보면 가슴 설레는 것이 아니라 증오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공격합니다. 서로 가지고 싶은 것을 빼앗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출애굽 여정하고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를 보면 참 많이 느낍니다. 싸우고 원망하며 불평하다가 결국 그들은 사막에서 다 죽습니다. 단 두명을 제외하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은 모두 죽습니다. 덧없지요? 모세조차 강건너에서 가나안을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감사하지 않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분노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오랫동안 지속될 원망과 불평의 시초가 되는 기사가 보입니다. 성경은 항상 자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알리고 싶은 것만을 기록하셨기에 성경이 함구하고 있는 것을 알아 내는 것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다만 어렴풋한 힌트만을 주고 있습니다.

 

1절에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이 구절을 보면 별다른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라운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앞장인 10장에 적힌 내용은 이스라엘 각 지파들이 군사 조직으로 변해서 지휘관들의 지휘 아래 행군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탈출해서 시내산에 당도했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습니다. 언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이러이러한 나의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희들에게 가나안을 유업으로 주고 자손만대 그 땅에서 번성케 하겠다고 하신 그 언약이 시내산 언약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은 더 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니라 가나안으로 진군하는 하나님의 군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서 몸과 마음을 닦고 하나님의 법을 어깨에 매고 가나안으로 출발한 겁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11:1에 불평의 기사가 나옵니다. 백성들이 원망을 했답니다. 그러면 이제까지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원망하지 않았나요? 아니요, 그들은 이제껏 원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달라졌는고 하니 이제껏 이스라엘 자손들은 원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종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면 모세가 그 원망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해서 해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간접적으로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직접적으로 원망합니다. 그것도 악한 말로 원망했답니다. 이 부분은 원문으로 해석하면 아주 나쁜 쌍욕을 하면서 원망했다는 것이 아니라 곤경을 당해서 원망했다는 겁니다.

 

곤란을 인해서 원망을 했답니다. 뭐 솔직히 사람이 살다가 힘들면 하나님도 원망할 수 있지요? 그렇지요? 음, 대답이 없네요. 하하.

 

그들의 원망을 들으시고 하나님이 진노하셨고 불을 붙여서 사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걸 그냥 보는게 아니라 약간 더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실마리가 풀립니다.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그냥 진을 태우기 싫어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신게 아닙니다. 그곳에 원망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망하는 이들이 어디에 있었느냐면 ‘진영의 끝’에 있었다는 겁니다.

 

원래 이스라엘 자손들은 일렬횡대로 가지 않습니다. 행군대열로 진군하고 있습니다. 법궤를 중심으로 네 대로 나뉘어서 행군합니다. 당연히 먼저 가는 이도 있고 나중가는 이도 있습니다. 그래서 진영 끝을 살랐다는 말이 별로 이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만 실제로는 진영의 끝, 즉 행군 대열에서 낙오해서 뒤로 쳐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막을 걸어갑니다. 모두가 새나라에 대한 기대로 힘차게 걸어갑니다. 그러나 사막이니까 덥고 목마르고 때론 무겁고 모래바람 때문에 숨도 쉬기 어렵고 그런 곤경이 닥칩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불평이 많은 이들이 점점 진행속도를 느리게 합니다.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욱하는 마음에 욕합니까?

 

솔직히 말하면 앞으로 나아가는게 싫습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만 펼쳐져 있는 이곳을 보니까 가나안이란 곳도 별 볼일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애굽으로 돌아가는게 더 좋은게 아닐까요?

 

어쩌면 이들은 고의로 행군대형에서 벗어나려고 한 건지도 모릅니다. 전혀 모르는 이민족인 이스라엘 속에 편입되기를 싫어한 겁니다. 내가 왜 저사람들의 족속에 들어가야하지? 나는 싫어. 이렇게 생각한 것이 암암리에 표시가 난 건지도 모릅니다.

 

예수 믿어봐야 벌거 없고 오히려 고난만 더하는 것 같은데 차라리 다시 우상숭배로 돌아가는게 좋은게 아닐까요? 무신론으로 돌아가는게 더 낫지 않을까요?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체험하지못해서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진영에서 낙오한 이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이스라엘이 된다는게 아직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관리대상이 된다는게 얼마나 큰 복인지 알지 못해서 불평하고 의심하는 겁니다.

 

이런 심리로 속도가 느려지고 마침내는 진군대열에서 낙오하게 됩니다.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겁니다. 몸이 힘들어서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어 낙오하는게 아닙니다. 가기가 싫어서 억지로 가려니까 짜증이 나서 낙오한 겁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불로 살라버렸다는 겁니다.

 

원망과 불평만을 일삼던 그들에게 하나님은 불을 보내서 살라 버립니다. 시내산에서 출발한지 얼마 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불평과 원망과 낙오함을 그대로 두고 본다면 이 원망이 점점 커져서 다른이들에게로 전염되고 마침내 하나님의 군대가 오합지졸로 변하고 일부는 애굽으로 돌아가고 일부는 가나안으로 계속하고 일부는 도중의 비교적 좋아 보이는 땅에 정착하려 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불평과 원망이 퍼지면 하나님의 군대가 와해될 수 밖에 없습니다. 희한하게도 불평과 원망은 전염성이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진의 끝에 불을 보내어 원망꾼들을 살라 버리신 것입니다.

 

자, 불이 나서 진영 끝을 사르게 되자 어떤 반응이 일어났습니까?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불이 나기 전에는 백성들이 원망을 직접 하나님에게 했습니다. 그런데 불이 나서 진끝을 사르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부르짖었답니다. 이는 모세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하나님께 중재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인구에 희자되는 격언인지 슬로건인지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은혜는 열배로 원한은 백배로” 은혜는 열배로 갚고 원한은 백배로 갚는다는 겁니다. 산술적으로 봐도 원한을 은혜에 비해 열배로 더 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정도만 되어도 굉장한 바르게 자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뼈에 새긴다”고 하지 않나요?

 

물에 새기니까 제대로 새겨질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은혜는 그때 뿐 전혀 기억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뼈에 새기면 절대로 잊을 리가 없지요? 그러니 원한은 반드시 보복하려고 덤빈다는 거지요.

 

모세를 무시하고 하나님에게 직접적으로 원망을 제기했던 사람들이 막상 자기네에게 하나님의 신벌이 내리니까 바로 태도를 돌변해서 모세에게 부르짖었다는 것은 정말이지 굉장한 태세전환입니다.

 

이들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한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모세의 지도권, 중재자로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걸 보면 이들의 마음이 매우 높아 졌나 봅니다. 그게 이제 다시 원위치 하게 된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바로 앞장에서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날 것을 다짐합니다. 그런데 금방 원망이 일어납니다.

 

막상 희망찬 행군이 시작되어도 그들의 삶이 나아진게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가도 가도 사막이니까 잘못 왔다, 속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보다 현실의 고난이 이긴 겁니다.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마늘같은 것을 키울 수 있는 땅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괜히 왔다 싶은 겁니다.

 

성도들의 삶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기도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눈물 흘리며 다짐하고 회개할 때에 가졌던 마음은, 세상 속에서 현실의 삶에서 찌들리면서 금방 사라지고 원망과 불평만이 그 마음을 점령해서 성령의 감동이나 하나님이 주셨던 은혜에 대한 감격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잊어버립니다. 이게 인간이지요.

 

다음으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하나님이 하신 말씀대로 하니까 금방 해결됩니다. 그래요, 우리 하나님은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계십니다. 그래서 부르짖으면 응답하십니다.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이에게 내가 복을 주리라는 그 말씀은 절대로 변치 않습니다. 단지 인간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욕망에 휘둘리고 사탄의 주구가 되어서 날뛸 뿐.

 

맨눈으로 그분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현실의 고난 앞에서 막막합니다. 지금 당장 나는 막막한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짜증이 막 밀려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자기의 백성이 어려울 때 그에게 부르짖어 회개하고 도움을 요청할 때 응답하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사실 하나님은 자기의 맹세를 지키고 계신 것입니다. 나에게 말하고 싶은게 있으면 모세에게 얘기하고 그러면 모세가 나에게 와서 아뢰고 그것을 내가 듣고 해결해 주겠다고 하신 그 약속을 어김없이 칼같이 지키고 계십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약속은 변개함이 없겠지요. 그러나 무조건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전제조건을 충족시킬 때 지키시는 겁니다.

 

전제조건이 뭘까요? 뭐겠습니까? 자기의 명령을 지켜 준행하는 자의 호소를 들어 주신다는 거지요. 평소에 자기 말도 듣지 않고 악을 마구 행하다가 막상 어려운 일이 닥치고 하나님에게 울며불며 아뢰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교인이라는 이름은 있어도 신자도 아닌 이, 믿지도 않는 이들의 기도를 흔쾌히 들어 주실까요?

 

하나님이 무조건 처음에 하신 약속을 변치않는게 아닙니다. 변개하지 않는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선한 일을 하면 복을 주고 악을 행하면 벌을 내린다는 그 전제에서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전제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자기의 약속대로 진노하십니다. 아니 자기가 하나님의 약속 이후에 잘못 살아놓고, 이미 하나님의 길을 벗어나고서는 왜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시지 않느냐고 원망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자, 그럼 누가 무엇 때문에 불평과 원망을 했을까요?

사실 성경본문은 4절 앞에서 끝이 나고 4절부터 전혀 다른 장면을 묘사하는 것처럼 볼 수 있지만 이를 연달아 기록된 것으로 본다면 불평과 불만의 근원은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이방인 또는 다른 민족뿐만 아닙니다. 약간 원문을 제대로 해석한다면 ‘그들 중에 섞여 사는’이란 말에 하층민, 오합지졸이란 뜻도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다른 민족들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출애굽시에 함께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더 이상 애굽의 종이 아니라 땅을 가진 가나안의 새로운 나라의 자유민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 이들이 이스라엘 자손들하고 함께 애굽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사실 순수 이스라엘 사람들에 비해 하나님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 다를 수 있습니다.

경제적 사정도 어려웠을 것이고 사회적인 대우에서도 약세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약간은 염세적이고 패배의식도 있고 불만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이걸 겉으로 드러내고 화를 내려고 하니까 명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게 음식입니다. 왜 안주냐?

 

옛날 그 지역에서는 지역 신관을 가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이스라엘 사람들하고 같이 사니까 앞으로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를 섬겨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원래 자기 부족의 신은 아니지만 내가 이스라엘과 함께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길 뿐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온 지상의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믿는 사람들과는 생각 자체가 다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 그러나 사실 로마법에 대한 이해도 공감도 없는 겁니다. 다만 현실의 징벌이 무서워서 귀찮아서 따르는 척 하는 겁니다. 전심으로 로마법을 지키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출애굽한 다른 민족들에게, 신은 복을 주고 지켜주는 존재이지 귀찮게 이걸 하고 저걸 하지 말고 간섭하며 끝없는 인내와 희생을 강요하는 존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내산을 막 출발하고 나서부터 고생길 가득한 나그네길이 싫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평과 원망을 막 늘어놓습니다. 그동안 억지로 참아왔던 이스라엘 민족주의에 대한 불만도 함께 터져나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받을 복은 함께 받고 싶지만 그들이 받을 고난과 인내는 함께 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섞여 사는 무리는 이민족과 어머니만 이스라엘인인 경우가 있고 또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이 있으며 여하튼 사회에서 비주류로 소외된 이들입니다. 그러니 불평이 더 많을 것은 당연합니다.

 

이미 이스라엘에는 신분계층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족장이나 지휘관들이 금은을 예물로 하나님께 바치는 모습을 보면 모두가 평등한 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 백삼십 세겔짜리, 칠십세겔짜리, 금 십세겔짜리 그릇을 예물로 바칠 정도의 경제력을 가지고 백성을 다스리는 이들이 이미 있었던 것을 보면 그 반대의 계층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민족과 경제적 약자들이 먼저 공동체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하는 겁니다. 이들은 그 공동체와 동질감을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좋은 혜택은 차지하려 하지만 공동체를 진정으로 자기와 일체화시키지도 않고 애국심도 없기 때문에 공동체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어려움이 닥치면 공동체를 저주하고 분열을 일삼는 겁니다.

 

이들이 뭐라고 불만을 하는고 하니 음식, 맛있는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입니다. 보세요, 배고픈 종이 배부른 자유민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퍼뜨리는 겁니다. 이를 우리는 노예근성이라고 합니다. 정신보다 배가 더 중요한 이들입니다.

 

여기 언급된 음식을 보면 가지가 참 다양합니다. 고기가 나오고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까지 골고루 요구합니다. 사막에서 이런 것을 먹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불평하는 겁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잘 보세요. 섞여 사는 이방인들이 불평을 먼저 시작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에 전염된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단지 물질적인 탐욕 때문에 이스라엘과 함께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불평이 먼저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기쁨은 함께해도 어려움은 함께할 수 없습니다.

 

이방인들이 먼저 불평하기 시작하자 4절에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었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이 약간 혼동을 줄 수 있는데 우리식으로 다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하나님을 떠나서 죄악과 우상 가운데로 나아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울었다는 말이 아니라 잠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시금 하나님을 떠나서 이전의 우상숭배와 죄악의 상태로 옮겨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의 음식에 대한 탐욕은 참 굉장했던 모양입니다. 단지 입이 심심해서가 아니라 이유가 있습니다. 6절에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쇠하여”

 

기력이 쇠한다는 겁니다. 이 말은 정력이 약해진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 정말 굉장한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출애굽해서 가나안으로 가는 비상시국입니다.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려는 비상시국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높고 큰 이상을 가지고 있는게 아니라 단지 정력이 쇠약해질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민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많이 합법적으로 때릴 수 있어서 선택한 모양입니다. 이 사람들은 매주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지 않으면 번개처럼 변개해서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섬기니 기가 찬 족속입니다.

 

사실 공의의 하나님은 공의의 법을 어기지 않을 경우에 일부러 때리지 않습니다. 욥처럼 마귀와의 내기로 더 큰 상급을 주시려고 하지 않는 다음에야 잘살고 있는 착한 신자를 때리실 리가 없지요.

 

그런데 때리고 싶어요. 그래야 사람들이 하나님의 무서움과 엄위하심을 알테니까요.

그때 가장 잘 때릴 수 있는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워낙에 귀가 얇고 불평이 목까지 꽉 차 있을 뿐만 아니라 탐욕이 무한대입니다. 하는건 없고 불평만 많은 민족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기껏 나라를 세우고 겨우 삼대만에 나라가 쪼개지는 놀라운 민족. 긴 사사 시대를 거치고 겨우 세운 나라가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을 거치고 바로 나라가 쪼개집니다. 게다가 유다, 잘 믿는다고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유다의 왕 20명 중에서 겨우 4명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지 나머지는 다 하나님의 분노를 산 왕들입니다. 사사기 때에도 보면 항상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일시적으로 돌아왔다가 몸과 마음이 편해지면 번개처럼 돌변하는 족속들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들은 벌써 나라를 세우기 전부터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약간 우스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원망하는 이유는 몸을 보하는 음식을 제대로 못 먹어서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음식만 제대로 공급되었다면 불평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생선, 오이, 부추, 파, 마늘 엄청 먹습니다. 가게에 가면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팝니다. 고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비싸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그런 음식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렇게나 원망했던 음식 환경이 너무 좋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만족해 합니까? 행복해 합니까? 천만에요. 우리는 그래도 여전히 불평하며 원망합니다. 그건 당연하고 이것도 저것도 하면서 더 더 더 만 연발하면서 여전히 불만입니다. 여전히 원망합니다. 불평합니다.

 

그리고 보면 우리 민족도 이스라엘 못지 않게 불평쟁이들입니다. 영원한 불만족. 이것과는 상관이 없기는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표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배 고프다” 하하, 어때요. 정말 우리 민족을 잘 표현한 말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공짜로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었습니다. 밤에 이슬이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고 이를 백성들이 거두어서 찧고 삶아서 먹었습니다. 처음엔 꿀과자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기름과자로 부르는 만나를 거저 먹고서도 불평합니다.

 

이들이 뭐라고 합니까? 4절에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하랴”

와! 이 사람들 정말 후안무치가 도를 넘었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뻔뻔해 질 수 있지요? 이 사람들은 일년 전에 신 광야에서 역시나 고기를 안 준다고 불평하다가 하나님이 주신 메추라기를 실컷 먹었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겁니다. 물론 불평하다가 메추라기 먹고 하나님에게 세게 맞아서 곤욕도 치렀지만 하나님이 메추라기를 주신 것은 사실입니다.

 

먹고 싶다면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됩니다. ‘하나님 만나를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이제 다시 고기를 먹고 싶은데 그 메추라기 한번 더 주시면 안될까요?’ 그러면 하나님이 ‘이것들이 죽을라고...’ 이렇게 하시겠나요? 아닙니다. ‘알았다. 내가 너희에게 만나와 더불어 메추라기도 내려주께’ 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지금 모자라는 것, 불만족 스러운 것만 기억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세요. 하나님이 주신 감사할 거리를 세어보세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것들 가운데서 감사해야 할 것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잠기지 못한 교인들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하는 성도들과는 미치는 영향이 벌써 다릅니다. 무뉘만 교인들이 불평과 불만을 전염시킨다면 성도는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을 퍼뜨립니다.

 

천국은 원망과 불평으로 이룰 수 없습니다. 천국은 기쁨과 감사로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더 달라고 기도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하세요. 단 먼저 받은 것을 감사하고 난 다음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고 나서 달라고 요청하세요.

 

감사와 미안함을 가지고 달라고 하면 그가 왜 안 주시겠나요? 우리는 그의 자녀요 그의 백성입니다. 아버지 되신 그가 자녀를 책임지실 것이며 지상의 권력자가 아니라 천국의 왕되신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입히고 먹이실 것입니다.

 

주님도 말씀 하셨쟎아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그러면 그 나머지를 너희에게 더하실 것이라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피해의식에 쩔어 있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단 한번 해보세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도 생각이 있는지 이렇게 변명합니다. 공짜로 만나를 먹고 있는 것에 대한 면피용 발언입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공짜로 주시지만 솔직히 애굽에서는 만나 정도가 아니라 고기하고 각종 과일과 야채를 거저 값없이 먹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만나, 꼴랑 만나 하나 공짜로 내려줘 놓고는 너무 생색내지 말라는 겁니다.

 

인간들이 이 정도면 굉장한 무례를 저지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뭔가 악에 가득해서 비난하는 듯합니다.

 

그런데 따져 볼까요? 이 사람들이 진짜로 고기와 생선과 과일과 야채를 공짜로 먹었나요? 천만에요. 이들은 그걸 고단한 노동에 대한 댓가로 먹은 겁니다. 겨우 음식가지고 품삯을 대신한 겁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걸 ‘값없이 먹었다’고 표현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폄훼하는 겁니다.

 

이 사람들 굉장하지요? 종살이가 힘들다고 제발 살려달라고 눈물로 부르짖어놓고는 막상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살려 주니까 이제는 먹을게 없다고 마실 물이 없다고 데모합니다. 그래서 물과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니까 이제는 생선하고 야채하고 과일을 못 먹어서 정력이 약해진다고 징징댑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뭐라고 합니까? 진상이라고 합니다. 진상. 이스라엘과 그 속에 같이 사는 이방인들은 진상입니다. 그것도 그냥 진상이 아니라 매우 심한 진상입니다. 사람들이 봤을 때 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진상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복을 주시고 싶을까요?

 

입만 열면 애굽과 비교하고 주어진 것은 무가치하게 여기고, 우리 속담에 남의 손에 떡이 더 커 보인다고 하지만 너무 심합니다. 결국 이들은 두사람 빼고는 아무도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모세조차 강 건너에서 가나안 복지를 보기만 하고 죽습니다.

 

원망과 불평의 끝은 결국 죽음입니다. 정당한 불평이 아니라 이건 생떼를 부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미워서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을 한번 비난하고 싶어서 어거지를 부리는 겁니다. 그러니 결국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성경은 불이 난 지역을 그냥 ‘다베라’라고 불렀다고 하고 맙니다. 다른 말이 없습니다. 다베라 하면 이후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징계와 자기 조상들의 불평에 대해서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여기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영적인 다베라가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가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지 않다가 멸망한 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교훈을 얻지 않은 모양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이 아직도 있는 이유는 개혁돼야 할 죄인들이 아직도 많기 때문입니다. 한번 회개하고 너무 착하게 살아버리는 의인들만 있다면 개혁주의 신앙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12월 둘째주입니다. 12월은 올 한해를 마감하는 달입니다. 그 동안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당연히 여기고 주어지지 않은 것만 불평하며 원망하는 것은 사랑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는 행동입니다. 더 많은 것을 받지 못하게 하는 잘못된 행동입니다.

 

주어진 것을 감사하고 그를 찬송하며 기다리면 새해에는 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합시다. 그러므로 불평과 원망을 그칩시다. 절대로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모자라지 않습니다. 절대로 나에게 원망과 불평을 받을 만큼 하나님이 우리에게 섭섭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곁에서 사랑의 시선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며 힘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에 감사합니다. 감사하며 찬송하는 멋진 연말을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19년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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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일자리를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곳에서 적응을 못하고, 병이 재발하는 모습에 매우 충격을 받았고, 좌절도 했습니다.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일자리가 두 개가 되었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는 별로 자신은 없습니다. 힘도 듭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간다면, 그 언젠가는 오래 전에 계획했던,

말 그대로... 매우 오래된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생전에 목격할지도 모릅니다.

나의 광야 생활은 길겠지만.... 포기하지 않고,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 사랑을 외치면서, 감사로 살아나간다면,

 

그 언젠가 행복한 날이, 조금은 더 편안한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여전히 내게 있어서 하나님은 무서움의 존재이고, 두려움의 존재이지만....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왔던 그 말씀이 바로 두려워 말라 라고 여기고, 확신한다면,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의지하여, 오늘 할 수 있는 일들에 소중한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기를 매우 간절히 전심으로 열망합니다.

 

나는 어리석어서 내려놓음과 같은 고급스러운 삶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이 기회를 통하여, 하나님 역사에서 누군가에게 힘과 기쁨을 줄 수 있는

보다 나은 터닝 포인트를 찾게 되는 30대의 마지막 순간이기를 기도합니다.

달려갈 길을 느릴지라도 한 걸음씩만 내딛게 되는 힘을 주세요.

아무리 스스로가 하찮게 보여도, 절대로 불평같은 건 입에 담지도 말고,

 

축복받은 인생임을 깨닫고, 오늘도 감사하면서, 다만 오늘도 감사하면서 살 수 있기를. / 2019. 12. 추운 겨울에. 시북(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