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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역대하33:1-17)/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9. 11. 24. 23:22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므낫세의 회개와 복권 (역대하33:1-17)

 

히스기야가 죽고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이 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가 12살에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였지만 실제로 이때는 아버지와 공동으로 통치를 한 것이고 단독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된 것은 22살 때 부터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본문을 보면서 놀랍게 느낀 것은 이름은 참 잘지어야겠다는 겁니다. 원래 므낫세라는 이름은 요셉의 아들 이름으로 그 뜻은 ‘잊어버리다’입니다. 요셉이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은 것은 그가 애굽에서 총리고 출세했고 또 아내와 더불어 행복하게 살게 되었고 이제 아들까지 낳았으므로 그 동안의 고난과 고향에의 향수를 잊는다는 뜻입니다. 절대로 나쁜뜻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 행복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잘 보면 히스기야가 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어서 그런지 이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총과 기적을 잊어 버린겁니다. 그는 잊어서는 안될 것을 잊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므낫세라는 이름대로 행동하다가 유다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초래합니다. 더구나 그는 무려 55년간을 왕노릇을 했습니다. 처음 10년은 아버지와 공동으로 통치했기에 빼도 무려 45년동안이나 유다를 나쁜길로 이끈 것입니다. 얼마나 나라가 피폐해졌을까요? 아버지시대의 영광과 종교개혁의 성과는 잊혀졌고 우상숭배와 악행이 말도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2절부터 그의 악행에 대한 기사가 나옵니다. 그는 아버지가 헐어버린 산당을 다시 세웠고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며 일월성신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나아가서 성전에다 우상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망나니가 된 겁니다.

 

또 있습니다. 힌놈의 골짜기 예루살렘 주민들이 쓰레기 버리는 우상숭배의 골짜기에서 아들들을 불에 던져서 우상에게 바쳤고 사술과 점치는 것과 요술을 행하고 이런 자를 신임하여 악을 행했습니다.

 

왕이 이런 짓거리를 하니까 아마 백성들도 이를 본받아 격렬하게 악랄하게 우상을 섬기고 미신을 행한 모양입니다. 조선이 망할 때 진령군이라고 무당에게 군호를 주고 대궐에서 천녀강림같은 의식을 행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고종과 민비가 나라의 피폐를 아랑곳하지 않고 금강산 만이천봉에 돈과 쌀과 비단을 바친일이 생각납니다. 그 전까지 소수 양반만 지내던 제사가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이 기억납니다. 자기들에게 복달라고 한 짓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 나라를 멸망시킨 것을 기억합니다.

 

이렇게보면 유다나 조선이나 똑 같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이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딴 짓을 하는 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으시는데 이는 그만큼 사랑하셔서 질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시고 채찍을 때리는 것입니다.

 

어디서나 하나님은 자기가 세우신 나라를 멸할때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죄가 있습니다. 인과응보라고 하지요. 그런게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그렇게나 신앙인으로 살았지만 그 아들교육은 정말이지 잘못했습니다.

 

열왕기에서는 므낫세의 악행 때문에 유다가 망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집과 나라에 베푸신 큰 은혜를 번개처럼 잊어버리고 인신공양에 각종 미신에 열광했고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옛날 유다 왕들은 참 정신나간 사람들이 많았나 봅니다. 이들은 심지어 자기의 아들들까지 우상에게 불태워 바치는 황당한 짓도 저질렀습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가 그랬고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또 그런 일을 저지릅니다.

 

우리가 성경에 보면 다른나라 왕들도 이런 짓을 많이 저질렀어요. 하나님이 금하신 일, 가장 가증히 여기는 일을 저지르고서도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의 말로는 뻔한 것입니다.

 

므낫세는 단순히 우상숭배만을 행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산게 아닙니다. 그는 열왕기하21:16에 보면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끝에서 저끝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자비의 하나님이시지요. 그러나 당시의 우상들은 인신공양과 혼음 수간같은 말도 안되는 악행을 예사로 저지릅니다. 이들 사교집단에게는 복받는것만 있지 윤리나 도덕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방치하면 나라를 망칩니다. 그래서 사교가 무서운 겁니다. 이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개인 인간을 영화롭게 하려고 하나님을 빙자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 노릇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므낫세와 다를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에게 목을 매고 추종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예루살렘이나 유다의 주민들이 우상숭배를 맹렬히 한 것과 똑 같습니다. 정신차려야 합니다.

 

므낫세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종교는 너무 거룩하고 순해서 싫었나 봅니다. 므낫세가 이렇게 악을 행했음에도 어떤 반란도 일어나지 않고 심지어 백성들도 그를 따라했다는 것을 보면 유다 나라 자체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도덕적 수준이 타락한 겁니다. 양심이란게 없어지고 정도를 지키지 않습니다. 이들은 지금 선을 넘어도 너무 많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앗수르 군대를 동원해서 이들의 버릇을 고치려고 치신 것입니다.

 

앗수르 군대가 쳐들어 와서 므낫세를 사로잡아 바벨론 땅으로 끌고 갔습니다. 성경에서는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고 합니다. 본문에 쇠사슬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구리로 만든 착고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게 복수로 쓰여서 양발에 구리로 만든 착고를 차고 끌려 간 것입니다. 비참합니다. 속국의 왕 대우를 전혀 받지 못한 겁니다.

 

사실 므낫세가 앗수르 왕의 침략을 받고 쇠사슬로 결박되어 바벨론 땅으로 끌려 간 것은 좀 이상합니다. 왜냐면 그는 자기 아버지와 달리 앗수르 왕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고 앗수르왕의 신하를 자처했으며 앗수르의 시책에 적극 협조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므낫세는 앗수르의 22명의 봉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앗수르 궁전을 짓는데 재물을 바쳤으며 앗슈르보니팔이라는 앗수르 왕이 이집트 원정을 떠날 때에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그 정도로 앗수르의 일에 앞장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앗수르 , 그가 그렇게나 떠받들던 앗수르 군대에 의해 잡혀간 겁니다.

 

어떤 역사가는 아마 므낫세가 당시에 일어났던 앗수르 국내의 반란을 이용해서 독립을 꾀했거나 아니면 자주정책을 펼치다가 앗수르 왕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하기도 하지만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믿음의 왕 히스기야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의 신앙을 배우지 않고 할아버지 아하스의 못된 것만 배웠습니다. 그렇게나 앗수르의 침입을 저지하려 했던 아버지와 달리 그는 앗수르의 군대 앞에 스스로 굴복했고 친 앗수르 정책을 앞장서서 시행했으며 이방의 우상을 섬기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패악의 정치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우상을 섬기고 온갖 미신행위를 하다가 마침내 앗수르 군대에 포로로 잡혀서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 간 겁니다.

 

앗수르의 포로 학대는 유명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안죽고 살아난 것만도 다행이라고 봐야 하겠지만 그가 포로로 잡혀갈 동안에 그가 그렇게나 믿었던 우상들이나 미신은 그를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아들들을 불에 태워 인신공양을 했음에도 잠잠했습니다. 전혀 효험이 없었습니다.

 

12절에 보니까 그가 정신을 차린 모양입니다. 앗수르 군대의 포로가 되어 학대를 당하니까 비로소 하나님이 생각난 겁니다. “그가 환난을 당하여...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너무 어려서부터 금수저 물고 태어나서 왕이라고 떠받을어 지다 보니까 천지분간을 못하고 중뿔난 송아지처럼 까불다가 두발에 착고를 차고 포로로 끌려가서 고생해 보니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생각난 것이지요. 마음이 낮아 지니까 정신이 돌아옵니다. 그리고 회개의 기도를 올리게 됩니다.

 

왜냐면 망할놈의 우상을 섬긴다고 자식들까지 불에 던져 태웠지만 우상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게 없습니다. 우상이 원래 그렇습니다. 사람이 만든 나무 철 돌 덩이가 무슨 능력을 발할 수 있나요?

 

그는 정신을 차렸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왕좌에서 끌려 내려와 포로의 신세가 되었는데 이제와서 회개합니다. 과연 효과가 있을까요? 모든 것을 잃고 비로소 정신을 차렸지만 너무 늦었지요. 바벨론 땅에 끌려와서 회개해봐야 이미 늦었습니다. 당시엔 바벨론도 앗수르의 속령이었습니다. 그러니 적지에서 포로의 삶을 사는 그에게 남은 희망이 있나요?

 

너무 많이 늦었습니다. 이제는 그냥 회개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살다가 죽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그의 회개는 효력을 발합니다. 아마 하나님은 그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의 신앙을 기억하셨나 봅니다. 그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어쩌면 미워도 다시 한번 일 수도 있습니다. 므낫세가 아니라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소수의 의인들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면 그 나라가 보호해야 하는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거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보호하시려고 므낫세를 풀어 주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나 잔인하고 악독한 앗수르가 므낫세를 풀어주고 다시 왕위에 복귀하도록 했다는 것은 솔직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변입니다.

 

성경은 역사서가 아니기 때문에 자세한 기록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기적이 일어난 건지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기록이 없어요. 열왕기도 역대기도 전혀 여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앗수르의 왕의 변덕인지 아니면 국제정세가 변해서 므낫세를 다시 돌려 보낼 필요가 생겼는지 전혀 언급이 없지만 기적적으로 므낫세는 포로에서 풀려나서 귀국해서 왕위에 복위합니다.

 

모든 것을 잃고 난 다음 그의 회개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되어질 때에도 하나님의 그를 향한 자비가 끊어지지 않았네요.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전능자이시고 이 우주의 주재자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시므로 그가 하고자 하시면 안될게 없습니다.

 

므낫세는 그렇게나 패악을 저지르다가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와서 학대를 당하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 겁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하나님의 복을 받았는지를 생각한 겁니다. 자기가 그동안 정신없이 섬긴 우상과 귀신이 결코 제대로 된 신이 아닌 것을 깨달은 겁니다. 말 못하는 금은철석목의 우상을 섬기고 미신을 좇으며 자식을 불태우고 패악을 부린 것을 회개한 겁니다.

 

그랬더니 모든게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임했습니다. 그는 포로에서 풀려나서 고국으로 돌아왔고 다시 왕좌에 복귀했으며 반 앗수르정책을 펼치고 군대를 만들고 성벽을 높이 쌓고 무기를 준비해서 앗수르와 싸울 결심을 하게 됩니다.

 

제가 항상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은 인간적으로 굉장한 일처럼 보이는 왕좌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므낫세가 어떻게 해서 다시 왕위를 도로 찾았는지 당시 어떤 일이 있었거에 유대가 반 앗수르 정책을 펼 수 있었는지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역대기뿐만 아니라 열왕기에도 기록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관심은 왕좌를 도로 찾는게 아니라 죄인이 회개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회개하고 기도함으로 다시 왕좌를 찾았다는게 기록되었으면 되었지 여기에 누가 힘을 썼고 무슨 일이 있었고 뇌물을 얼마를 바쳤고 하는건 전혀 중요하지 않고 관심도 없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은 겁니다.

 

우리는 히스기야의 아들이 천하의 망나니가 되어 하나님과 사람 앞에 폐륜을 저지르는 것을 보았고 그가 그 벌로 앗수르 군대에 사로잡혀 갔다가 회개하고 다시 왕위에 복귀했으면 비로소 하나님만이 참 신인 것을 깨닫고 앗수르와 반대하는 정책을 펼친 것을 보았습니다.

 

비록 포로생활을 겪기는 했지만 죽을 때는 유다의 왕으로 죽었습니다. “그의 열조와 함께 누우매 그의 궁에 장사되고” 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게 단순한 것 같지만 절대로 단순한 문구가 아닙니다. 의례적인 문구가 아닙니다. 많은 이스라엘의 왕들이 열조와 함께 눕지 못했고 그의 궁에 장사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의 말년은 비교적 평안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포로에서 복귀한 다음의 그의 종교개혁은 불완전했습니다. 철저하지 못했습니다. 15절에 “우상을 제거하며 ”라는 말은 부셔서 없앴다는 뜻이 아니라 멀리 치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성전안에 있던 우상을 부숴버린게 아니라 그냥 곱게 들어서 치워버린 겁니다. 이걸 그 아들 아몬이 찾아내서 다시 세우고 우상을 섬겼기에 그의 종교개혁은 철저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물론 그가 아까워서 우상을 버리지 못하고 어디 치워놓은게 아닐겁니다. 아마 그의 뇌리에는 우상도 기본적으로는 신격을 가진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진 신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마치 불교도가 예수교로 개종하면서 불구들을 불태워 버리지 않고 절에 도로 갔다 주었다는게 이런 심리일 것입니다. ‘혹 불신이 노해서 신벌을 내리면 어떻게 할까?’하는 그런 심리.

 

우리네 마음속에는 항상 죄와 쾌락에 대한 본질적인 끌림이 있습니다. 그 어떤 신이라도 나에게 복만 주면 그게 최고라고 하는 본능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너무 단순하고 유치하지요. 그러나 그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회개하고 죄성을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다시 우리 속에서 죄에 대한 갈망이 일어납니다. 그러다보면 또 넘어지고 욕망에 휘둘리게 됩니다.

 

욕망의 대상이 없어진게 아니라 옆에 치워놓았으니까 그걸 그대로 도로 원위치 시키면 됩니다. 만일 대상이 없어졌다면 새로 만들어야 되니까 힘이 들텐데 창고에서 도로 갔고 나오면 되니가 얼마나 편할까요? 그래서 철저한 회개가 필요한 겁니다. 아마 므낫세는 이 우상을 치우면서 설마 자기 아들이 도로 갖고 나와서 사용할 줄은 몰랐을 겁니다. 죄성이 이렇게 끈질깁니다.

 

안그래도 연약한 인간은 순간 순간 죄에 굴복하고 세상과 타협하고픈 유혹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전혀 하나님의 훈도를 거부하고 믿음안에서 양육해 줄 이가 없다면 그 신앙이나 도덕이 얼마나 타락하게 될까요? 그 타락의 정도가 말도 못하게 심해서 짐승과 같은 수준까지 내려갈 수가 있을 겁니다.

 

옛날에 야스퍼스라고 하는 철학자가 그랬답니다. 인간은 천사와 짐승의 중간적인 존재라고 어떨 때는 천사처럼 고귀하다가도 어떨 때는 짐승처럼 잔인하고 천박하다고 말했답니다. 제가 대학교 들어가서 처음 철학수업을 들었을 때 교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 철학자도 사람을 잘 보네요. 우리의 마음속에 철저한 회개와 끊임없는 개혁이 수반되지 않으면 번개처럼 옛사람으로 돌아가서 죄 안에 뒹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답게살려면 위아래로 넘어서는 안되는 선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선을 지키는게 참 어렵습니다. 위로는 잘 안넘어가지만 아래로는 쉽게 아주 쉽게 넘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느 선 안에서는 마음대로 놀고 행복하게 지내도 됩니다. 그런데 성도 역시 인간인고로 그 선을 넘고 싶어지는 본능적 충동이 가끔씩 불쑥 불쑥 솟아 오릅니다.

 

그 선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요약한 사랑이라는 계명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라는 그 계명이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성도로 안전하게 살 수 있게 해 주는 선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자기의 품안에서 마음대로 살고 행복하라고 하셨습니다. 단 하나님이 정하신 선만 지키면 되도록 하셨지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인간은 그 선을 넘어 하나님의 금기에 자꾸만 도전하려 합니다. 이미 인간의 몸속에 죄성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개혁이란 것은 매일같이 그러한 인간적인 욕망과 죄성을 억누르고 교정하고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상의 그 누구도 개혁이 필요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번먹은 마음이 영원히 가지도 않습니다.

 

므낫세는 유다의 선한 왕 신앙의 왕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초반에 아주 포악하고 우상을 섬기며 아들들을 인신공양으로 불태워 죽이는 사악한 폐륜의 종자였습니다. 그러다가 바벨론땅에 끌려가서 앗수르군대의 학대를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떠 받들려 지고 포시럽게 자랄 때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상을 섬겼지만 막상 포로의 신분으로 두발에 착고를 차고 학대를 받자 하나님을 다시 찾았고 회개했습니다. 보통은 뒤늦은 회개가 별다른 효과를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냥 회개한 죄인으로 죽는게 어리석은 악인의 말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가능가운에서 가능을 허락하시는 분으로 그는 모든 것을 잃은 므낫세에게 놀랍게도 왕자리를 다시 돌려 주셨습니다.

 

흥하게도 하시고 쇠하게도 하시며 망하게도 하시고 성하게도 하시는 역사의 주인, 천지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놀라운 특권층입니다. 세상에 이런 금수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리석어서 우리의 영안이 어두워서 그 놀라운 신분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선 너머에 있는 금기를 추구하여 하나님으로 하여금 분노케 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왕자의 신분을 하찮게 여기고 죄의 노예, 사탄의 노예가 되려고 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일까요?

 

우리는 이미 좋은쪽에 서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하나님의 편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품안에서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만이 우리 모든 행복의 원천이며 구원의 주시며 영생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이번 한주도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19년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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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은 시편의 말씀을 묵상할 때, 교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내 생각부터 자꾸 앞세우려는 습성에 일단 멈추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본성이 죄악을 좇기 쉽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쳐다보려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도한 후, 들어주시면 그것대로 감사하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으로 그 또한 감사하며,

범사에 감사가 넘칠 수 있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참 신앙이 아닐까 묵상해 봅니다. / 2019. 1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