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히스기야의 병과 바벨론(역대하32:24-)/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9. 11. 18. 07:58

히스기야의 병과 바벨론 (역대하32:24-)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절 설교를 위해서 본문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가 진행하는 본문의 순서가 히스기야의 마지막 장입니다. 제가 이 본문을 잘 읽어보니까 추수감사절 설교로 전혀 손색이 없는 본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설교를 하게 된 것도 우리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으로 생각합니다.

 

지난 주 읽었던 본문에서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침입을 하나님의 역사로 격퇴하고 유다의 잔명을 보존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갑자기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므로”라는 기사가 나옵니다. 그때가 어느 때일까요? 앗수르의 침입을 격퇴한 때?

 

솔직히 제가 책을 쓰는 입장이라면 앗수르 군대가 물러가고 난 다음 바로 히스기야의 병에 관한 기사로 넘어 가지 않고 유다의 군민이 서로 어울려서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왕이 축복하는 이런 흐뭇한 광경을 좀 묘사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역대기는 그러지 않습니다. 첫 번째 유월절 이야기는 그렇게 자세하게 기록하면서 앗수르에 대한 승전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의 기록이 너무 적지 않나요? 우리는 앗수르의 침입을 물리친 것이 더 굉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다른 모양입니다.

 

앗수르의 침입을 물리친 이야기는 첫 번 유월절을 지킨 것에 비해 전혀 비중이 없습니다. 승전 후에 이스라엘 자손과 히스기야가 얼마나 기뻐했고 감사했다는 식의 기사를 보게 되면 마음이 흐뭇하지 않을까요? 막 신앙심이 더 생기지 않을까요?

 

그런데 여기 역대기에는 전혀 그런 기사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히스기야가 ‘모든 나라의 눈에 존귀하게 되었다’는 기록만으로 앗수르 군대와의 공방전을 끝내고 뜬금없이 그가 병들었다는 말로 새로운 기사를 시작합니다. 당시 중근동의 패자인 앗수르의 침입을 물리친 것은 정말이지 굉장한 사건입니다.

 

바벨론마저 앗수르의 말발굽에 짖밟혔습니다. 나중에 유다를 멸망시키고 중근동의 패자가 되는 나라가 바벨론인데 그 나라도 앗수르에게 정복당했습니다. 당시에 므로닥발라단이라고 하는 바벨론의 왕은 앗수르 군대를 피해서 도망다니다가 조그마한 구석진 영토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물론 앗수르에게 패해서 몇 번이나 왕 자리에서 쫓겨나고 도망가고 속국이 되고 .... 그러니 그 조그만 유다가 앗수르의 침입을 격퇴했다는건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그러나 역대기 기자의 눈에 그 사건은 그저 그런 사건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참 인생은 한치 앞을 모르는 겁니다. 인생무상입니까? 나라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눈에는 별거 아닌가 봅니다. 역대기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장엄하게 그리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생사를 그냥 담담하게 풀어나갈 뿐입니다.

 

그런데 사실 히스기야가 병든건 앗수르의 2차 침입을 성공리에 격퇴하고 난 다음이 아닙니다. 앞뒤 연대를 맞추어보면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일차 침입이 있던 해인 주전 701년에 발병했다고 보여 집니다. 전쟁 전후중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그해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의 수명 15년이 지나고 죽은게 맞아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전 686년에 죽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마치 앗수르의 이차 침입을 격퇴하고 난 다음 그가 병든 것처럼 묘사합니다. 기사배열이 그래서 착각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러나 성경은 연대순으로 기록하지 않고 주제별로 기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구나 이 책은 성경이지 역사기록이 아닙니다. 역대기의 기자가 강조하는 부분은 인간의 역사와는 달리 따로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장 우선시 합니다. 나라의 흥망조차도 인간의 믿음에 따른 결과이자 부수물이지 별게 아닙니다.

 

역대기는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 즉 하나님의 임재가 나라를 보존하는데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기록하려고 했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를 믿음이 곧 나라가 사는 길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개인도 마찬가지 겠지요? 가정의 평안도 결국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 앞에서의 선한 행실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자동적으로 우리의 가정이 평안해진다는 거지요.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을 때 히스기야는 여러 선지자를 통하여 자기의 사망선고를 들었습니다. 죽는다는 거지요. 요즘에야 워낙 약도 좋고 의술도 좋아 졌지만 옛날에 병이 들면 대부분 죽는 겁니다. 특히 신체의 상처 때문에 일부분이 썩어 들어가면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주전 7세기 경에 수술이 될까요? 그러니 히스기야는 자기의 병으로 말미암아 선지자가 사망을 선고하자 죽음을 각오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히스기야의 나이는 아직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죽기는 너무 빠릅니다. 아들 므낫세는 아직 10살도 안된 아이입니다. 왕이 되기에는 너무 어립니다. 앗수르가 주변 나라들을 무차별로 공격해서 정복해 나가는 중입니다. 이미 북쪽 이스라엘 동족들은 앗수르에게 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하던 강력한 아람도 망했습니다.

 

나라도 위기 자기의 몸도 위기입니다.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할 수 있는게 없습니다. 이때 히스기야의 선택은? 그래요, 기도입니다. 유일하게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어요. 그는 인생을 책임지시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저를 살려 주십시오” 거의 모든 경우에 인간 간의 관계나 나라 간의 관계나 각종 사건 사고의 중심에, 문제의 근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풀리면 그 문제들이 다 풀립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생기면 제일 먼저 머리를 굴리지 말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그렇게 합니다.

 

우리네 삶에서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 자기의 목숨을 놓고 기도할 때 그가 얼마나 간절히 얼마나 절실하게 기도할까요? 물론 부모님 , 자식들, 배우자를 위한 기도도 그 못지 않게 간절할 겁니다. 간절한 기도, 진실된 기도, 의인의 기도는 간구하는 힘이 다릅니다. 문제는 그 간절함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것인가 하는 점인데 평소에 그가 하나님과 얼마나 친밀한가에 딸려 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착하게 죄짓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그래야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기적적으로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에게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그의 병이 낫게 하셨고 그리고 그에게 15년의 생명을 연장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25절에 보면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수수께끼같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대강 추측은 할 수 있습니다.

 

역대기만 보면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지만 열왕기를 참조하면 우리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자기의 병을 고침받고 15년의 수명을 더 허락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은혜를 보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면 마음이 교만하여 져서 그렇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건 절대로 이상한게 아닙니다. 인간들은 대부분 이렇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속담에 화장실 들어갈 때하고 나올 때가 다르다는 말이 바로 그겁니다. 그가 죽음 직전에 있을 때는 저를 고쳐주시면 저를 살려주시면 제가 무엇도 하고 무엇도 드리고 하면서 애걸복걸하지만 일단 그가 병이 낫고 살아나면 내가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냉정하게 자기의 손익을 따집니다.

 

원래 인간은 악한 존재이므로 성령의 감동이 없다면 절대로 선해질 수가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선해졌다가도 곧 악해지며 무언가 마음에 소원이 있어 약해졌다가도 그 문제가 해결되면 곧 강퍅하게 변합니다. 이건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어김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너무 그런 사람들이 많으니까 옥석을 구분하기위해 시험을 부과하십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자기의 시험을 통과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시고 차별하셔서 대우를 달리 하십니다.

 

사람들이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해서 보험을 많이 듭니다. 그러나 돈 들어가는 보험은 들면서 하나님에 대한 기도의 보험은 들어 놓지 않습니다. 행실의 보험은 잊어 버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도 놓치지 않고 보시고 기억하시고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모든게 하나님의 재판정에서 판단의 근거가 됩니다.

 

가끔가다 하나님이 멸하기로 작정하셨다가도 그가 회개하면 예정된 멸망이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결코 하나님이 변개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원칙은 절대로 변함이 없습니다.

자기에게 감사하고 믿음을 지키는 자를 보호하시고 복을 주시되 자기를 배신하고 감사하지 않는 이에게 벌을 주신다는 원칙은 결코 변개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 식었다고 느낀다면 그건 하나님이 식은게 아니라 우리가 그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고 마음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백성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이 말에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배은망덕했던 사람이 히스기야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백성들도 그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교만했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게 워낙 고대의 일이라서 연대를 정확히 정하기가 어려운데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히스기야가 선지자에게 책망을 받은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바벨론의 사신에게 자기의 보물창고를 다 보여준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책망을 받았고 장차 그 창고 안의 모든 보물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바벨론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라는 저주의 예언까지 듣게 됩니다. 그래도 오늘 본문처럼 히스기야의 낯을 봐서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겠다는 그런 기사가 역대기와 열왕기에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히스기야가 바벨론의 사신에게 창고를 보여준 것은 그가 교만한 마음을 품어서가 아닙니다. 히스기야는 자기 나라의 강성함을 나타내어서 충분히 동맹을 맺을 만한 나라라고 바벨론이 인식하게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동맹이 되려면 뭔가 서로 대등하거나 이익이 되어야 동맹이 체결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동맹이 아니라 속국이 되는 겁니다.

 

우리나라를 보세요. 한미동맹이라고 하지만 맨날 우리가 끌려 다닙니다. 현실적으로 덩치가 차이가 나는데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허장성세를 펼치면서까지 바벨론에게 자기 왕국을 어필하려고 한 겁니다. 우리가 이 정도로 부유하고 강하다!

 

므로닥발라단이라는 사람이 당시의 바벨론 왕이었는데 이 사람은 앗수르의 속국으로 있는 바벨론을 독립시키고 나아가서 앗수를 물리치고 중근동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당시에는 앗수르의 영향력 하에서 겨우 조그마한 영토만을 가진 별볼일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것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나라를 빼앗기고 도망다니는 신세입니다. 그래서 자기나라하고 손잡고 앗수르를 반대할 세력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의 병이 회복된 것을 축하한다는 핑계를 대고는 동맹을 맺을려고 유다의 국력을 미리 조사하려고 온 겁니다. ‘우리와 동맹을 맺을 만한가?’ 그러니 당연히 히스기야의 입장에서는 자기 나라의 강성함을 보이기 위해 보물창고와 무기고를 보여주게 된 것입니다. 이건 인간적인 외교술이지 결코 교만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이렇게 보려고 합니다. 히스기야가 병에서 회복되고 수명이 15년이나 늘어났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신앙을 어여삐 보셨기 때문입니다. 남북분단이후 최초로 유월절을 제대로 지킨 히스기야의 믿음에 하나님이 감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다시 단장하고 문을 열어서 제사가 다시금 지내지도록 한 것에 감격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심지어 성전의 문과 기둥에 자기가 금을 기부하여 금으로 입히기 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적에 보답하지 않았다’는 말은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 본문에서는 앗수르의 일차 침입과 히스기야의 병이 어느게 더 먼저 일어난 일인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각종 주석서에도 연대 구분을 하지 못합니다. 워낙 옛날 일이니까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저는 히스기야의 병이 낫고 나서 앗수르가 쳐들어 왔다고 봅니다. 그때 히스기야가 어떻게 했는고 하니 자기가 입힌 성전 기둥과 문의 금을 벗겨서 앗수르 군대에게 주고 앗수르의 신을 섬길 것을 맹세합니다. 그래서 겨우 앗수르 군대의 주둔을 막고 철수하게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큰 배신입니다. 예루살렘 주민들도 아마 앗수르 군대에 주어야 할 금을 구하기 위해 성전문과 기둥의 금을 벗겨야 된다고 주장했는지 아니면 적어도 그런 주장에 찬동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것을 가지고 히스기야와 예루살렘 주민들의 배은망덕이라고 하신 것이라는 겁니다.

 

눈물 콧물 흘리며 제발 살려 달라고 빌 때에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신 것은 그리고 이적을 보이신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큰 역사입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이적에 대해서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신을 받아 들이는 것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그러니 배신이고 배덕입니다. 당시의 화친조약은 그 신까지도 받아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앗수르의 말발굽에 치이는 것 보다는 앗수르의 신도 좀 섬기지 뭐! 하는게 예루살렘 주민들의 여론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속이 상하신 것입니다.

 

목숨이 살아났는데 히스기야는 그것보다는 나라의 보존전략이라고 친 앗수르 조약을 맺고 앗수르가 요구한 금과 은을 제공하는 것을 더 중요한 것으로 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부를 요구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제일 주의를 요구하시지 ‘누구 누구 신 하고 같이 하나님의 도우심도 있지만 아무개의 힘도 있고 또 우연히 잘 맞아 떨어져서...’ 같은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섭섭해 하십니다. 우리가 볼 때 하나님의 힘이 별로 들어가지 않은 것 같아도 모든 사건의 이면에 작용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절대로 과소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우리가 전쟁의 전후를 잘 생각해보면 이미 남 유다의 47개 성읍을 점령하고 예루살렘 성을 목전에 둔 앗수르 군대가 돈 몇푼에 물러간다는건 말도 안됩니다. 힘으로 뺏어 버리면 되는데 뭣 때문에 이미 점령한 영토를 포기하고 물러갑니까? 그 안에 뭔가 앗수르 군대에게도 거리끼는게 있습니다.

 

뭐냐면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키는데 앗수르 군대의 희생이 매우 클 거다. 아직 배후가 완전히 평정되지 않았는데 유다의 공략에만 전념할 수 없다. 멀리서 식량과 물을 공급받으면서 장기적으로 싸울 여건이 불비하다. 같은 여러 사정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하튼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병을 고쳐 주셨고 15년의 수명을 연장해 주셨는데 그 보답이 바로 앞서 히스기야가 성전 문과 기둥에 입힌 금을 도로 벗겨서 앗수르에게 주는 것이니까 얼마나 황당하셨을까요?

 

뭐 어쩔 수 없기는 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앗수르 군대는 눈앞에 위협적으로 버티고 있으니까 보이는 것에 겁먹고 금을 벗긴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그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히스기야가

태양을 뒤로 물린 그 기이한 이적을 본 히스기야가

왜 이번에는 하나님께 엎드려 간구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요?

너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그냥 앞뒤 가리지 않고 홀딱 넘어간 겁니다.

 

당시에 나라와 나라 사이의 화친 조약은 그 나라의 신을 함께 섬기는 조항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이제 앗수르의 신도 겸하여 섬기게 되었고 백성들이 앗수르의 신을 섬기는 것을 막지 못하고 그냥 지켜볼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께 대한 배신이고 곧 그 마음이 교만하여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래 외교를 하다 보면 나라의 힘을 부풀리고 상대방에게서 뭔가를 더 얻어내려고 궤계와 음모도 꾸미고 하는 겁니다. 보물창고를 보여준 것이 그렇게나 큰 죄가 아니라 친선조약이 가지는 우상숭배가 배신이요 교만이라는 겁니다. 더 이상 하나님에게만 의지하지 않아도 충분히 우리가 머리를 써서 또는 우리 힘으로 나라를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하나님 입장에서는 물에 빠진* 살려놨더니 보따리 내놔라 하는 격입니다. 금을 벗긴 성전의 문과 기둥은 얼마나 지저분해졌을까요?

이 정도면 충분히 하나님이 배신감을 느끼실 만 합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분노와 책망에 정신을 차리고 친 앗수르 정책을 폐지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고수하다가 앗수르의 2차 침입을 겪게 된 것입니다. 2년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참 다사다난합니다.

 

아마 그 와중에 바벨론 사신이 ‘반 앗수르 동맹’에 유다를 끌어 들이려고 찾아 온 모양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31절에 정말 의미심장한 글이 보입니다.

 

“그러나 바벨론 방백들이 히스기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그 땅에서 나타난 이적을 물을때에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

 

여기서 이적은 태양이 10도를 뒤로 물러난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바벨론 방백의 사신이 물어본 겁니다. 그때에 ‘그것은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말하는지 아니면 ‘제가 정말 재수가 좋았어요’ ‘운이 좋았어요’ 라고 말하는지 알고자 하신 것입니다. 자기의 몸에 나타난 기적을 행하신 분으로 자기를 꼽고 감사하는지 알고자 하신 겁니다.

 

태양이 히스기야의 수명을 위해서 뒤로 물러갔다고 하는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는 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를 당당히 전파하는 자가 됩니다. 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자기의 하나님에 대한 단심을 당당히 증거 하는 성도가 될 겁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이 시험에서 실패합니다. 그는 하나님만이 이 땅의 주인이요 역사의 주재자라고 하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앗수르의 위협에 맞설 동맹국이 필요했고 그래서 뭔가 현실적인 것으로 유다의 부강함을 보이려고 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다. 그러므로 내가 함께 하면 우리가 반드시 앗수르를 이길 것이라고 말한게 아니라 내가 가진 부와 군대가 이 정도기에 충분히 앗수르에 맞설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히스기야를 그렇게나 이뻐하셨던 하나님이 얼마나 섭섭하시겠습니까?

 

태양의 그림자까지 옮기면서 이적을 보이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남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나았다는 말을 하기를 부끄러워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앗수르에게 이길 수 있다는 말을 하기를 부끄러워하고 현실의 군대와 부를 더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니 이게 바로 배신이요 교만인 것입니다.

 

그렇게나 애닳게 애걸복걸하던게 목숨이 늘어나자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이 아니라 외교적인 방법, 인간적인 방법으로도 충분히 나라를 보존 할 수 있다고 믿은게 바로 문제가 된 것입니다.

 

물론 히스기야는 나중에 이것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승리하다가 그 품에서 평안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항상 그러십니다. 27절부터 보면 “히스기야가 부와 영광이 지극한지라 이에 은금과 보석과 향품과 방패와 온갖 보배로운 그릇들을 위하여 창고를 세우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산물을 위하여 창고를 세우며 온갖 짐승의 외양간을 세우며 양떼의 우리를 갖추며”

 

이 뒤에도 히스기야의 영광과 부에 관한 기록이 이어지다가 바벨론의 사신이 올 때 히스기야를 시험하신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것들을 주셨습니다. 나는 ‘받은게 없어’라고 말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한이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베푸신 것은 눈으로도 보이기도 하고 볼 수 없기도 하지만 그의 은혜와 사랑은 정말 끝이 없습니다. 이제껏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그 은혜는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설교를 작성하다가 아주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뭐냐면 여기 본문에 히스기야의 첫 번째 유월절에 관한 기사는 나오지만 두 번째 유월절에 관한 기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한두해를 왕노릇한게 아닙니다. 그런데 유월절 기사는 한번 밖에 안나옵니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성경이 그냥 생략한 걸까요?

 

저는 이 ‘교만’과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않았다’는 단어를 보면서 히스기야가 두 번째 유월절은 사정상 생략했든지 아니면 처음 유월절보다 더 못했기 때문일 것으로 봅니다. 히스기야가 첫 번 유월절에는 수송아지 천마리와 양 칠천마리를 회중에게 주었다고 당당히 기록되었지요? 그러나 뒤에 수명도 연장받고 물질의 복도 받고 그래놓고는 두 번째 유월절에 관한 기사가 없어요. 아마 흐지부지 되었던지 아니면 규모가 축소되었든지 했을 것으로 봅니다.

 

은혜를 입기 전에는 그렇게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된다고 종교개혁을 일으켜 놓고는 정작 복을 받고 나니까 은혜를 입고 나니까 그래서 여유가 생기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했기 때문에 유다의 멸망을 완벽하게 막지 못하고 시기를 지연시킨 정도로 그치게 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남 유다의 왕들 가운데서는 가장 신앙이 좋은 왕으로 여겨집니다. 진짜로 히스기야의 신앙은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하나님의 실망도 있었고 시험도 있었고 그리고 시험에 실패하기도 했고...전 이게 우리 성도라고 생각합니다.

 

내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길 것을 맹세하고 깊은 어둠 속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개혁에의 열의를 불태울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눈물짓고 목이 쉬도록 부르짖을 때도 있지만 금새 세상에 적응해서 욕망의 노예가 되어 눈에 불을 켜고 엉글거리기도 하는 불완전하고 연약한 인간.

 

그러나 전체적으로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큰 은총을 받았고 평안한 삶을 살다 갔습니다. 다만 자식 교육은 잘못시켰는지 아들 므낫세는 유다 후기의 가장 악한 왕으로 손꼽힙니다. 아하스하고 쌍벽을 이룰 정도로 악당인 자가 바로 히스기야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보면 히스기야라고 해서 완벽하지는 않다는 것이 많이 드러납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살다 보면 신앙이 상태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합니다. 세상에서 사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이는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인지상정이지요. 곧 죽을 것 같아서 정신없이 울고 불고 매달린 때도 있지만 몸이 다시 건강해지고 죽음이 멀리 떠나자 마음이 높아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갚기는커녕 인간적인 방법에 의지하고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고 하나님보다 인간을 의지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돈 신과 권력의 신과 애욕의 신을 더 숭배하는 인간인 것이지요.

 

솔직히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자기의 전을 금으로 입히라고 시킨 적이 없습니다. 인간들이 좋을 때는 금을 입혔다가 불가피할 때, 부득이 하다고 판단될 때, 심지어 싫고 불쾌할 때 하나님이 미울 때는 입혔던 금을 도로 벗기고 입혔다가 벗겼다가.

 

그런데 이런 식으로 몇 번만 하면 성전의 내부가 얼마나 더러워질까요. 얼마나 지저분해 질까요? 게다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생길까요? 그렇기에 처음부터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새기거나 만들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면 이걸 만들어 놓고 금을 입혔다가 벗겨서 사용하다가 기분 좋을 때 사정이 좋아질 때 다시 입혔다가 이러면 얼마나 모양이 웃기겠나요? 인간의 손 끝에 농락당하는 듯이 보이는 것이 얼마나 웃기겠나요?

 

히스기야도 그렇습니다. 앗수르 군대가 오니까 자기가 입힌 성전 기둥과 문의 금박을 벗겨서 앗수르 군대에 준 겁니다. 자기 창고에는 은은 많아도 금은 별로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성전의 금을 벗겨서 준 거지요. 그래서 백성들을 구했으니 정말 잘한 겁니까? 앗수르 군대가 물러가게 했으니까 정말 잘된 겁니까? 우리 하나님은 항상 이해를 해 주실겁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은 무슨 죄입니까? 인간들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은 인간들의 손끝으로 농락당하기를 좋아하지 않으셔서 스스로 자기의 형상을 만들지 못하게 하셨는데 그러니까 성전 기둥과 문과 내부를 금으로 입혔다가 벗겼다가 하면서 하나님을 웃깁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무엇을 얼마나 많이 주셨는지는 몰라도 히스기야의 영광이 극에 달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강한 군대도 소유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가지고 나라의 잔명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입니다.

 

앗수르의 군사력은 얼마나 강대합니까? 바벨론의 힘과 끈기는 또 얼마나 굉장합니까? 하나님이 아니고는 절대로 저들 사이에서 나라를 보존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강대국이 된 양 자랑하고 마음이 높아져도 결국 모든 것을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추수감사절이라고 해서 올해도 떡을 하고 과일을 진열하고 맛잇는 식사를 준비합니다. 그런데 이번 년도에는 떡을 길거리에서 돌리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사람들이 떡을 받아도 시큰둥해요. 심지어 받지 않으려는 이들도 많습니다. 수세미는 좋아하는데 참 희한합니다.

이 떡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물질로, 헌금으로 마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주심을 감사하는 우리들이 먹어야지 교만하고 마음이 높아진 이들에게는 가당치 않습니다.

 

사실 우리나라가 참 많이 부유해졌습니다. 그 맛있는 떡도 시피하게 보니까요. 그런 정도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자랄 때 국민소득 1만불에 집집마다 자가용이 한 대씩 있는 복지를 꿈꾸었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선진국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예전에 까마득한 옛날에 그걸 다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불행해졌고 더 불만이 많아졌고 더 경쟁이 치열해 졌지 더 행복해지고 여유로워지고 남에게 관대해 진게 아닙니다.

 

진정한 선진국도 되지 못했습니다. 의식이 물질의 부를 따르지 못하는 천민자본주의 국가가 되어 버렸습니다. 돈신을 최고로 섬기고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모릅니다.

 

마치 본문에서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이 이것도 저것도 풍성히 주셨고 심지어 목숨도 주셨지만 그가 마음이 높아져서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한국교회가 정신없이 성장하다가 이후로 한 이십년동안 쇠퇴를 거쳐서 이제는 하향 평준화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늘지도 줄지도 않고 줄어든 상태에서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기는요? 결론은 회개입니다. 민족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제대로 회개해야만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습니다. 뭘 회개해야 합니까?

 

이렇게 풍성하게 주셨음에도 여전히 서로 싸우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모략질하고 음모를 꾸미고 질시하는 것을 회개해야 지요.

뭘 회개해야 합니까? 그렇게나 많이 주셨는데 하나님 당신이 나에게 해준게 뭐가 있습니까 하면서 원망한 것을 회개해야 지요.

뭘 회개해야 합니까? 거짓말하고 무고하고 강간하고 살인하고 고문하고 궤계를 행하고 동성애하고 부정과 부패하고 이 모든 것을 회개해야 지요.

 

이 나라와 민족의 내일을 위해서 통회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거대한 나라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행복하고 즐겁고 평안한 나라를 달라고 기도해야 지요. 민족의 통일을 달라고 기도해야 지요. 저 북녘땅에도 하나님의 교회가 우뚝 서서 주일날 함께 한 하나님께 예배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지요.

 

그리고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첫 번 유월절에 온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했던 것처럼 뭐든지 첫 번이 참 감격스럽지요. 첫 사랑 첫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지만 그러나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복 주심에 감사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제가 요즘 거리를 걸으면서 문득 문득 놀라는게 뭐냐면 우리 나라가 이렇게나 아름다웠나 하는 겁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이렇게나 아름다웠어? 이렇게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맑고 푸른 하늘 밑에서 밝고 따뜻하게 빛나는 태양과, 단풍이 물들어서 곱게 흩날리는 낙엽과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건강하게 걷게 하신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부모 형제 자녀들 나의 사랑하는 이들, 나의 교우들이 건강하고 형통하게 하신 것을 또한 감사합니다. 동역자들이 서로 돕고 사랑하는 것이 또한 감사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정작 필요할 때 남에게 꾸지 않아도 되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래서 또한 감사합니다.

 

나의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아버지여 우리의 감사와 찬송을 받으시옵소서!

 

감사와 기쁨 즐거움 그리고 나눔의 추수감사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년 추수감사절에는 우리의 삶이 더 즐겁고 더 감사한 일들이 더 많아 지기를 또한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19년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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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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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본문을 읽으면 저는 히스기야가 참 좋습니다. 그가 인간적이기 때문이며, 영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실수를 범하였으며, 자신을 과신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예뻐해주셨던 것이 보입니다. 왜냐, 그는 하나님께 최소한 구할 줄 아는 사람, 두드릴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제가 자주 하는 기도 입니다. 막막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수명까지도 개입하시는 분이십니다. 전능자 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계획이 있음을 믿고, 오늘을 좀 더 진지하게 열심히 살게 됩니다. 열심히 하루하루를 견뎌가면,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면, 주님께서 그 수고를 채워주시리라 믿습니다. 이번 한 주도 영혼이 강건하기를 응원합니다. / 2019. 1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