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니느웨 성안에서/홍종일목사(2015.5.3.)

시북(허지수) 2019. 11. 12. 07:59

그 속으로 들어가라

 

메트로라는 무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나왔습니다.

경남 함안군 함안읍 괴산리 조모씨(45,지체장애5급)가 집안방에서 숨져있는 것을 가사도우미 추모씨가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무근육증에 걸린 그는 9년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혼자 살며 가사도우미의 도시락에 의존해서 살아왔다. 도시락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전달되는데

 

추모씨는 도시락을 전달하러 월요일날 갔다가 조씨가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신고했다. 당시 방에는 방보다 높이 설치되어있었던 부엌수도배관의 이음새로 물이 흘러 나오고 있었고 조씨는 젖은 이불을 덮고 숨져있었다고 합니다.

경찰은 잠을 자던 조씨가 동파로 터진 수도관에서 새어나온 물 때문에 이불이 젖었지만 몸을 움직이지 못해 동사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식어가는 체온을 보존하기위해, 젖은 이불을 벗어버리기위해 그가 죽기전 얼마나 몸부림쳤을가를 생각하니 저의 가슴이 아파옵니다.

9년전에 가신 어머니를 따라 갔으니 잘되었다고 해야 합니까?

 

더 이상 우리의 세금으로 마련한 도시락을 축내지 않고 축었기 때문에 이나라의 홍복이라고 해야 합니까?

참으로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아, 너무나 가련하구나!

 

그런데 몇 달전에 제가 용산으로 가는 전철안에서 조금 색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한 남루한 할머니가 사람들에게 객차안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일률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좀 만만해 보이는 사람들만을 골라가며 구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제 앞에 섰습니다. 말없이 손을 내밀고 있는데 전 주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내가 그정도로 만만해 보이냐, 사람 잘못봤다”

그런데 참 천성을 어쩔수 없나 봅니다.

그 할머니가 제 앞으로 올때에 순간적으로 제 눈동자가 흔들렸던것 같습니다.

한푼줄까?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던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마음을 굳게 다잡고 시침을 떼고 가만 앉아있는데 이 할머니는 제 눈동자가 흔들린 것을 간파하고는 제 앞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이제 누가 이기나 두고볼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마침내 그 할머니가 저에게서 뭐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눈치채고는 포기하고 떠나가려합니다.

그런데 떠나기 바로 직전에 제 손등을 자기의 손톱으로 꽉 눌러버립니다.

 

한 몇초동안 아주 세게 그리고 깊숙이

물론 일반인 이면 ‘아니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하면서 손을 털어버릴 수 있습니다. 독한 사람같으면 밀쳐버릴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제가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고 하니 이거 잘못했다가는 내일 아침 신문에 나오겠다.

 

이런 제목으로 말입니다.

“서초동 C교회의 홍모 목사가 구걸을 요청하는 걸인에게 동냥을 주지 않으려고 폭행을 했다. 그 할머니는 지금 전치 2주의 상처를 입고 병원에서 입원가료중이다.”

피부 껍질이 벗겨져서 딱지만 앉아도 전치 2주지만 보통 신문에서 상처를 입어서 전치 몇주라는 기사를 보면 사람들은 엄청난 폭행이 있었다고 생각하기가 쉽상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이렇게 욕하겠지요

동냥은 못줄망정 쪽박은 깨지마라고 했는데... 그 진짜 싸가지 없는 목사네.보통사람이라도 그러지 않을 터인데 하물려 목사가...

기타등등 기타 등등. 엄청난 욕설과 조소가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또 한번 조롱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그냥 그 할머니의 손톱에 찔리면서도 가만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가 손을 풀고 다른 자리로 가는 겁니다.

가고 난 다음에 보니까 손등이 찢어져서 피가 나오고 있습니다.

 

솔직히 그때는 아픈 줄도 몰랐습니다.

혹시 균이 들어가지 않을까하는게 제일 큰 걱정이었기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상처에 침을 발랐습니다. 침에는 균을 죽이는 성분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적이 있기 때문에.

저는 그 당시에 그 할머니가 전혀 불쌍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왜입니까?

제가 그사람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았기때문입니다. 단지 전철안에서 구걸하고 있지만 진짜로 그가 동정이 필요할만큼 불쌍한 사람인지 아니면 이것도 그의 일종의 처세술인지....불쌍하게 보여서 동정을 유발해서 먹고살려고 하는.

저는 오로지 저자신의 안위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메트로 신문의 기사를 읽고 느꼈던 불쌍한 마음이 그 할머니를 향해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신문지상에서 떠드는 이야기를 아무런 생각없이 받아들입니다.

이땅에 절대 빈곤층이 무려 1200만이다.

그러나 아무리 신문지상에서 떠들어 봐야 우리는 그들의 삶이 얼마나 눈물겨운 것인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그냥 아, 쫌 어렵겠구나

그걸로 끝입니다.

우리에겐 그들의 생존문제보다는 내아이를 어느 학원에 등록시킬까하는 것이 더 크고 더 절박한 문제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라고 떠들어대도 내 아이가 이번에 어느대학에 지원할가를 결정하는 것이 나에게는 더 큰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문제와 내문제가 아닌 것은 이렇게나 크게 차이가 납니다.

한 사람에겐 죽고 사는 문제이지만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그와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에.

그 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느끼는 것과 바깥에서 피상적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법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피상적으로 쭉 읽어간다면 전혀 별다른 점이 없을 수 있지만 우리가 한글자 한글자의 의미를 되새기며 접근해 간다면, 아니 우리가 성경본문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다면 정말 놀랍고도 생동적이며 분명한 하나님의 계시가 그곳에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성경의 본문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봅시다

 

어느날 마침내 그에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이제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강제적인 하나님의 섭리로 요나는 자기를 꺾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2000리 북쪽의 니느웨로 떠나게 된 것입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동북부의 거대한 사막을 지나고 유브라데강을 건너고 메소포타미아평원을 가로지르고 다시 티그리스강을 건너야 있는 아주 먼 곳입니다

당시에 그곳으로 가는 길은 결코 안전하지도 쉽지도 않았습니다

 

2.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은 신기하게도 1:2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가 일어나서 도망을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먼저번에는 그가 일어나서 다시스로 갔지만 이제는 일어나서 니느웨로 갑니다

이것이 다를뿐입니다

 

3절에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라고 되어있지요. 그런데 원문에는 앞에”그리고 그때”라는 단어가 덧붙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있자마자 요나가 즉시 순종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첫번째의 명령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과연 변했습니까?

죽음에 이르는 체험이 그를 변화시켰습니까?

글쎄요

우리 조금 더 나가봅시다

 

3.삼일길이라

3절에 보면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니느웨 성을 한바퀴도는데는 삼일이 걸린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이 성은 둘레가 96Km 직경이30Km정도로 고대의 성읍으로는 드물게 아주 큰 성으로 밝혀졌습니다

자 그런데 그 밑에 4절에 보면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라고 해서 니느웨에 도착하자마자 여장을 풀지도 않고 바로 말씀을 외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룻길을 행하며 외쳤다는 겁니다

삼일길이 걸리는 거리를 이 사람은 하루만에 해치웁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여장을 풀지도 않고 성에 들어가자 마자 곧 외칩니다

 

이상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볼수록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많이 보입니다

삼일동안 다니면서 말씀을 전파해야 다 전할 수 있는데 이 사람은 그냥 하룻길만을 행합니다

 

성에 들어가자 마자 여장을 풀지도 않고 전도를 시작하길래 뭔가 대단한 열심에 사로잡힌 것 같았는데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뒷부분과 종합해서 본다면 요나는 아직까지 니느웨에서 복음전하는게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나 봅니다

그래서 그는 서쪽문으로 들어가서는 동쪽으로 일직선으로 다니면서 그냥 건성건성 말씀을 외칩니다

듣거나 말거나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밑도 끝도 없이 그냥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니 이게 그래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전달자가 할 말입니까

최소한 ’너희들이 계속적으로 하나님보시기에 악을 행하면 이제 40일후에는 망하게 되는데 그전에라도 돌이켜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라

그러면 혹 하나님이 이 성을 멸망시키시지 않으실지 어찌 알겠느냐’

 

뭐 이렇게 되야 되는거 아닙니까?

요나는 사실 니느웨백성들이 회개하는게 싫었습니다

할 수 없이 오기는 왔고 저들에게 전하기는 하되 진정 니느웨사람들을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저것들에게 왜 복음을 전해서 저것들에게 살길을 열어줘

저것들은 그냥 죽어야해’

그래서 그는 하룻길만을 행하며 복음을 전해 버린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한사람의 목숨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선지자이지만 그는 전혀 니느웨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았고 단지 의무적으로 마지 못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는 그날 밤을 니느웨에서 묵지않고 바로 성을 나와서 5절에서 보여지듯이 성의 동편 높은 곳에 초막을 짓고 그 그늘아래 앉아서 니느웨의 멸망을 구경하려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게 또 하나 있습니다

하루와 삼일에는 기간의 길이를 넘어서는 본질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삼일이라면 중간에 두밤을 자야 됩니다. 이박삼일, 그러나 하루라면 잘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성에 들어가자 마자 곧 하룻길을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을 보면 그는 성밖에서 밤을 지내고 날이 밝아서 성문이 열리자 마자 들어가서 저녁때에 성을 빠져나온것 같습니다.

즉 요나는 하룻길을 행했지만 결단코 성안에서 하룻밤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니느웨의 어떤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길만을 행하고 저녁 성문이 닫히기 전에 나와버립니다.

아마 그가 앉은 곳은 성하고 상당히 떨어진 곳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안의 상황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전체적인 성의 윤곽만 보이는 그런 먼거리에 앉았을 것입니다

 

너무 가까이에 있다가 성이 멸망할 때 같이 망하면

파편이라도 튀면

불똥이라도 튀면 안되겠지요

그런데 또 하나

우리가 이런걸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도봉산이나 북한산에 올라서 도시를 내려다 보면 도시의 윤곽은 또렷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걸어다니는 사람이나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들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너무 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불에 타죽기 싫어서

‘ 아빠 나살려줘

여보 죽기 싫어요’

하고 외치며 울며 뛰는 사람들이 보인다면 아무리 철담을 가진 무정한 사람이라도 그 정경이 슬퍼서 하나님께 저들의 멸망을 멈추어 달라고

저들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눈앞에서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불속에서 울부짖는다면 사람으로서야 어찌 긍휼을 품지 않겠습니까

그게 싫은겁니다

요나는 그 성중의 단 한사람이라도 개인적으로 만나서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말입니다

 

고대의 여관은 대게 성적인 타락을 동반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사람들은 여행할 때 그 성중의 보통사람의 집에서 묵기를 원해서 성문어귀에 서거나 광장 또는 시장 같은 곳에 서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저녁때 집으로 돌아가면서 손님들을 자기집으로 데리고 가서 하룻밤 유 하게 합니다

이러한 전통은 고대 근동의 아주 좋은 전통입니다

 

만일 요나가 이와 같이 개인의 집에 들어가 신세를 지게 된다면 그리고 그들과 식탁을 같이 한다면 그는 요나의 친구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요나는 그들이 니느웨 성이 무너질 때 그대로 같이 멸망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아예 요나는 그런 곤란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성에 들어가자 마자 바로 직선거리를 다니며 밑도 끝도 없이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라고만 외치고 바로 성문을 나온 것입니다

 

글쎄 이게 전도라고 할 수 있습니까

물론 아니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요나는 전심을 기울인 것 같지도 않고 진심으로 사람들이 회개할 것을 원하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니느웨 사람들하고는 전혀 어떤 특별한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4.그래도 회개한다

그런데 여러분

참 안타깝게도 요나의 그와 같은 건성 건성의 외침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5절 보십시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베를 입은지라”기가 찹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한술 더 뜹니다

왕은 그 소문을 듣고는 바로 옷을 갈아입고 재에 앉았답니다

 

그리고는 조서를 내려 악한 길과 강포에서 떠나고 짐승들도 금식시키고

‘여호와께 부르짖으라

혹시 그가 뜻을 돌이켜서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솔직히 이렇게 되면 하나님도 어쩔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잘못 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매달리는 데는 하나님도 어쩌실 겁니까?

결국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돌이켜서 니느웨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요나에게 말씀 하십니다

 

여러분

선지자가 자기의 말씀선포가 즉각적인 반향을 가져온다면 기뻐해야 합니까

화를 내야 합니까

 

진정한 선지자라면 그는 당연히 니느웨의 회개 때문에 기뻐해야합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는 대신에 하나님께 원망하며 항의 합니다

 

왜 원망하고 항의합니까?

니느웨 사람들이 미웠기 때문에

왜 분을 냅니까?

그가 니느웨 사람들과는 아무런 사랑의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한다는 것

관계를 맺는 다는 것은 이렇게나 다릅니다.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은 이렇게나 다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어렵고도 딱한 사연이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나에게 전혀 동정심을 일으키지 못한 것은 그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아니었기때문입니다.

 

왜 아무런 관계가 아닙니까?

내가 그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관계는 앎으로써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고 그와 더불어 특별한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을 더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더 잘 알 수 있습니까?

그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를 더 많이 만나야 합니다.

 

묵상은 단순히 생각하는 단계를 떠나서 그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그를 만나는 것은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내가 그의 길안에서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그의 길 안에서 움직일 때 나는 하나님과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일단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라는 특수한 관계가 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전혀 걱정이 없습니다. 그가 다 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올 한해도 하나님의 길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를 예배하여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서 승리하시는 성도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15년 설교 원고 / 2019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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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관계 맺음의 중요성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관계 맺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고, 노력과 정성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매우 놀랍게도 깊은 통찰에 의하면, 인간의 큰 기쁨, 가장 큰 기쁨은 관계에서 온다고 합니다.

아무리 비싼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다고 해도, 그 기쁨은 한계가 있다는 점이 매우 놀라웠습니다.

 

주변을 둘러보고, 소중한 사람을 챙겨봅시다. 그리고 소중한 그 한 사람을 위해서 정성을 쏟아봅시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매우 거창한 말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저 안부 전화 한 통 하는 것. 그것이 출발인지도 모릅니다.

2019. 11. 가을날에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