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 보는 달란트 비유 (마태복음25:14-)
오늘은 히스기야에서 잠깐 벗어나서 우리 주님의 달란트 비유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이 비유는 워낙 유명해서 자주 설교가 되어진 본문이고 저도 이 본문으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지식도 확장되고 우리가 성경 본문에서 느끼는 영적인 감성이 다르듯이 저의 설교도 달라진 면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확실히 주인이 잘못한게 맞는 듯이 보입니다. 종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이 말한다고 금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금 한달란트 받은 자의 상황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다섯 달란트로 장사하면 장사도 잘되고 이익도 남기기가 쉽지만 한 달란트로는 아무래도 다섯 달란트 자본을 가진 자에 비해서 부족한게 사실입니다.
그러니 한 달란트 맡았던 자에게 내려진 처분이 솔직히 좀 부당해 보입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다섯 달란트 가진 자보다 한 달란트 가진 자에 더 동정적이기 쉽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렇기 때문이지요.
달란트는 돈의 무게단위이지만 이걸 영어로 보면 재주, 재능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배우들을 탤런트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재주를 가진자?
재능이 있는자?
그런데 우리가 그냥 피상적으로 살펴봐서는 알 수 없는 많은 내용이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이걸 속속들이 보고 나면 주인이 결코 과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인의 심정이 바로 이해가 됩니다. 왜 그가 그렇게 화를 내고 그렇게 모질게 말했는지 충분히 공감하게 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는 무엇을 모르는 걸까요?
1.그 종들을 불러 소유를 맡기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라는 말을 보면 주인의 모든 종을 불러서 돈을 맡긴 것처럼 보여 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 주님의 비유는 매우 일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터무니 없는 비유를 들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그런 일을 가지고 비유를 드는 겁니다.
그런데 타국으로 가면서 종에게 재산을 맡기는 주인에게 겨우 세명의 종만 있다고 하는 것은 솔직히 말이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해볼 때 주인이 외국으로 오랜기간 출장을 가는데 종에게 재산을 맡기는 경우가 있습니까? 글쎄요, 제 생각으로는 그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만일 종이 그 돈을 가지고 도망을 가버리면 어떻게 할겁니까? 그리고 종이 독립적으로 경제활동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옛날엔 신분제 사회입니다. 그리고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재산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거액을 소지한 종이라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상행위, 가령 장사같은걸 제대로 한다는게 힘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실생활에서 일어날 법한 일을 비유로 드시는 거지 전혀 일어나지 않을 일은 비유로 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이 종들은 평범한 종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요? 청지기라고 봅니다. 종들 중에서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서 주인을 충분히 대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종이라는 거지요.
상행위를 대리할 수 있는 청지기를 세명이나 둘 수 있는 주인이라면 그리고 그들에게 재산을 맡기고 외국에 오랜기간 다녀올 수 있는 주인이라면 종이 도망을 가거나 재산을 착복할 수 없을 정도로 권세가 큰 주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이 별볼일 없거나 권세가 없다면 그돈 들고 감시하는 사람도 없는데 얼씨구나하고 도망가지 누가 남아 있겠습니까?
우리가 바울서신 중에서 오네시모에 관한 이야기를 알지 않습니까? 빌레몬의 집 종이었다가 도망을 가서 우연히 바울을 만난 오네시모. 당시에 그처럼 도망 노예가 많았답니다. 돈 한푼 없이도 자유가 그리워 도망을 가는데 거액을 맡겼는데 도망을 가지 않는다는건 정말이지 주인에게 충성하는 종이거나 그래서 너무 믿을 수 있거나 아니면 주인의 권세가 너무나 세기에 결코 도망을 갈 수 없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네가 뛰어봐야 벼룩이지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다면 종들에게 그런 거액을 맡기고 외국으로 간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그처럼 주인이 권세가 세다는 겁니다.
제가 무얼 말하려고 이런걸 자꾸 따지느냐면 결국 주인에게는 종이 세명만 있는게 아니라 수십명 수백명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주인의 달란트를 맡은 이 세명의 종은 종들 가운데서 뽑힌 자라고 하는 겁니다. 마치 세상사람들 가운데에서 택함을 받은 성도들 같지요? 천에 하나 만에 하나 택한 성도들 같지 않나요?
주석서에서는 이 세명의 종을 주인이 가진 모든 종으로 보고 주인이 모든 성도들에게 다 한사람도 빠짐없이 재능과 사명을 준다는 식으로 말합니다만 저는 전혀 다르게 생각합니다. 여기서 달란트를 맡은 종은 청지기요 뽑힌 자라는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한달란트 맡은 종도 꼴찌가 아니라 수많은 종들가운데서 3등으로 당당히 선발될 자라는 겁니다. 그러니 억울해 할게 아니라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그가 자랑스러워한다면 그의 열등감이나 피해의식이나 소극적인 태도도 달라질 것입니다.
2.달란트의 차이
여하튼 주인은 세명의 종들에게 각각 다섯달란트 두달란트 한달란트를 맡기고 외국으로 떠납니다. 주인은 이 돈을 맡기기는 했지만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기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어디에도 주인이 종들에게 돈을 주면서 이익을 남기라고 말한 대목은 없습니다.
다만 종들이 기특하게도 주인의 돈을 맡아 있으면서 이것을 가지고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긴 겁니다. 그런데 정말 웃기지 않습니까? 주인의 돈이지 자기 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나중에 돌아와서 회계하면서 장사해서 이익을 남긴 모든 것을 다 들고 갈 수가 있습니다. 자기가 열심히 일하고 노력했다고 해서 자기 것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걸 주인의 자비에 의지해야 합니다. 주인이 다 빼앗겠다고 하면 꼼짝없이 빼앗기는 겁니다. 주인이 한푼도 주지 않고 다 도로 들고 가도 불평할 수 없습니다. 원래 종이란 그런 존재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활용하려고 했고 성공했습니다. 주인의 인정에 감사하고 주인이 나중에 자기들이 한 결과를 보고 상주실 것을 믿고 주인의 칭찬을 기대하고 최선을 다한 겁니다.
주인이 오랜 세월후에 돌아와서 회계할때에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이 말합니다.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여기 ‘보소서’ 라는 말에는 주인의 관심과 칭찬을 바라는 당당함이 배여 있습니다. 그래요, 비록 자기의 것이 되지는 않지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한 종이 주인의 칭찬을 바라고 또 자기를 믿고 거금을 맡긴 그 신뢰에 보답할 수 있는게 감사하여 자신있게 주인에게 말하는 겁니다.
종은 주인의 칭찬을 바라고 그 엄청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있게 자랑스럽게 주인에게 그 결과를 보일려고 합니다. 제가 이 비유를 보면서 든 생각은 종들이 너무 순수하다는 겁니다. 아직 이들은 때가 덜묻었습니다.
우리는 그럴 수 있나요? 주님이 재림하시고 나와 계산하자고 할 때 보소서라고 당당하게 주님께 말할 수 있나요? 주인의 칭찬한마디를 그렇게나 소중이 여기는 마음이 있나요? 혹시 그 돈중에서 나에게 영원히 줄거라고 생각하고 돈욕심을 내지는 않나요? 어쩌면 주인의 돈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걸 내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맡아 있는 처지에 자기도 주인의 종이면서 다른 이들을 깔보고 무시하고 갑질하고 그렇지는 않나요?
그렇지 못하다면 지금부터라도 그런 당당한 자가 되기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한점 부끄럼이 없도록 행동해야 합니다.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은 내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을 내가 잠시 맡아 있을뿐이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고 선한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내것이라고 착각해서 교만하여 주인을 욕보이면 안됩니다. 혹 주인의 것을 욕심내어 착복해도 안됩니다.
그런데 주인이 달란트를 맡긴 기준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15절에 “각각 그 재능대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각각 그가 가진 재능대로 달란트를 받는 겁니다.
재능은 ‘힘’이나 ‘역량’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주인은 종들의 역량을 잘 알고 그 역량대로 달란트를 맡겼다는 겁니다.
주인은 애초에 두 달란트 맡은 종이 다섯 달란트 맡은 종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낼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똑 같이 배로 남겼다고 똑 같은 대우를 하는 겁니다. 그는 다섯 달란트 맡은 자가 충분히 역량이 된다고 생각해서 그에게 다섯을 맡긴것입니다. 만일 두 달란트 맡은 자가 다섯 달란트 맡은 자보다 역량이 더 있다고 판단했다면 두 달란트를 맡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필요 이상으로 오보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어진 일에만 충실하면 됩니다. 그것도 즐겁고 기뻐할 수준이면 됩니다. 무슨 불세출의 업적을 바라시지는 않습니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시고 자녀의 능력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왜냐면 그가 우리에게 재능을 넣어 주신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이 말하고 29절하고 비교하면 충분히 말이 됩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주인의 돈이지 자기 돈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열 달란트 맡은 자가 한 달란트를 더 맡는다고 해서 그가 더 부자가 되는게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다 주인의 것이고 그는 단지 청지기적 사명을 담당하는 것 뿐입니다. 다만 역량이 있는 자가 사명을 감당하면 더 많은 일거리를 준다고 해석하세요.
기업에서 팀장보다 본부장이 본부장보다 사장이 더 많은 일을 하고 당연히 권한도 더 많고 받는 월급도 더 많습니다. 판공비도 더 하겠지요. 그런 겁니다.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것으로 받지만 회사 자체의 주인은 아니라는 겁니다. 주어진 기한 동안 주어진 권한 안에서 맡겨진 일을 할 뿐입니다. 잘하면 기간이 더 연장되고 인센티브도 주고 하지만 결국 그는 일꾼일 따름입니다. 주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종에게 부러움보다는 연민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지휘하다 보면 당연히 자연적으로 권력이 생기고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재미도 있고 보람도 생기고 그리고 주인의 칭찬도 받고 그런겁니다. 그러므로 이걸 돈으로 생각하지 말고 사명이나 사역으로 생각한다면 전혀 다른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니까 일거리가 너무 없고 권한이 너무 적고 받는 돈이 적다고 너무 불평할 필요도 없습니다. 대신에 그는 다른 것을 더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여유, 사랑, 행복, 사람, 즐거움이 더 할지도 모릅니다. 돈이 더 있어야 좋은 곳에서 놀 수 있는게 아닙니다.
제가 지난 화요일 천성산 꼭대기에 갔다 왔습니다. 집사람이 한국해양대학교에서 상담을 하는데 그날이 학교의 개교기념일이라서 노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근교로 갔습니다. 그런데 해발 800이상이 고도까지 차로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차를 타고 가서 주차하고 걸어서 정상에 가서 멋진 경치를 보고 돌아왔습니다. 가지고 간 고구마를 간식으로 먹고 커피와 보이차를 마시고 왔습니다.
산행 중에는 몰랐는데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까 그날 기름은 좀 썼지만 돈은 한푼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돈쓴게 없어요. 신기하기도 하고....그런데도 아주 좋은 산행이었습니다. 저도 즐거웠고 집사람도 즐거워했지요. 신기하지 않나요? 돈이 많아야 꼭 행복한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어느정도의 돈은 일용할 양식이 되지요. 쌓아 놓지 못할 뿐이지 쓸 것은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필요할 땐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너무 돈 없다고 아무것도 즐거운 일이 없으리라고 속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주님이 맡기신 일을 하면서 행복하고 즐겁게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면 주님은 더 큰 것으로 맡기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 또 더 열심히 하면 됩니다. 힘들고 불행한데 굳이 아등바등 일할 필요는 없습니다. 억만금을 쌓아놓고 서로 싸우고 삐뚤어 지고 욕먹고 그렇게 살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진짜 좋아하는 말이 바로 안분지족입니다. 마음만은 천국! 그래요, 그렇게 즐기면서 기다리세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중의법이라고 보고 해석해볼까요? ‘무릇 돈이 많은 자는 돈을 더 벌어 풍족하게 되고 돈이 없는 자는 있는 돈까지 빼앗기리라’는 식의 자본주의 옹호논리로 하셨겠나요?
그렇다면 천국이 세상과 똑같아서 굳이 비유를 드실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저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무른 재능에 열심이 있는 자는 더 많은 일거리를 맡아 더 분주하고 중요한 자가 되고 주어진 재능을 가지고도 열심이 없는 자는 있는 일거리까지 빼앗기고 재주도 사장되리라’
조금 더 자세하게 볼까요? 주님이 주신 재주를 가지고 사명을 많이 감당하는 자는 더 많은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이요 주님이 주신 재주를 가지고 나는 왜 이것밖에 주지 않았느냐고 불평하고 일하지 않는 자는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아무런 사명도 받지 못할 것이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항상 소유의 개념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걸 부당하다고 여기지만 이걸 위탁의 개념, 청지기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달란트를 일거리로 본다면 사역으로 본다면 충분히 천국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당시는 은본위제도였기 때문에 주인이 준 금 한달라트가 사실은 은 한달란트일 확률이 높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원문에는 금이란 말이 없고 그냥 달란트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은본위제도 하의 사회였으니까 아마 이게 은 한달란트 두 달란트 그런식 이었을 겁니다. 금 달란트라고 하면 엄청난 돈입니다. 총 8 달란트의 금을 맡겼다는 건데 이건 정말이지 굉장합니다.
히스기야 때의 유다에 쳐들어온 앗수르 군이 47개의 성을 점령하고도 철수한 이유는 금30 달란트를 받았기 때문임을 고려한다면 정말이지 엄청난 돈이지요.
그러나 은이라고 해도 이건 굉장한 거액입니다. 당시 은 한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므로 은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20년 품삯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 다섯달란트 받은 자는 노동자가 백년을 모아야 되는 돈을 한번에 받은 겁니다.
그러니 한 달란트 받았다고 해서 불평하는 것은 정말로 어이없는 일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에 비하여 확실히 작은게 맞지요. 그러나 아무것도 받지 못한 종들이 엄청나게 많고 그 중에서 자기가 세명의 청지기안에 뽑혔다는 것은 더할 나위없는 영광입니다. 그런데도 적게 맡았다고 불평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이 한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게 매우 섭섭했던 모양입니다. ‘가서’라고 하는 단어가 16절과 18절에 쓰였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집니다. 16절의 ‘가서’는 자신의 길을 가거나 출발하는 것을 뜻하는 반면에 18절의 ‘가서’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떠나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앞의 두 종은 사명감에 불타서 자기의 일을 하기 위해 출발한 반면에 마지막 종은 섭섭함과 패배감과 배신감으로 마음으로부터 등지고 떠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도망을 간건 아닙니다. 그는 주인에 대한 배신감에 가득 차서 주인이 준 사명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아주 나쁜 종은 아닌게 그 돈을 가지고 도망가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는 정도지요.
제가 이걸 보면서 든 느낌은 한 달란트 맡은 자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 장로니 권사니 집사니 하는 명칭은 달고 있지만 실제로 천국을 믿지도 재림을 기대하지도 않고 그냥 믿는 척 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비슷하지 않나요? 하나님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나를 더 알아 주지 않는다고 나에게 겨우 이것밖에 주지 않았다고 불평하고 화를 내는 사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택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도입니다. 우리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 지는게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마음이 감동되어야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이고 그건 하나님의 택하심 때문에 성령이 임하셔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받은 것이 적다고 불평한다면 우리를 택해주신 하나님이 섭섭해 하십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사실은 아주 값진 것입니다. 귀한 것입니다. 아무나 받을 수 있는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받은 것에 감사는 없고 불평만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슬퍼 하시겠나요?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은 아낌없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더 많이 받고 싶으면 더 많이 사용하면 됩니다. 일용할 양식의 규모가 더 많아지니까 하나님은 더 주실 것입니다.
솔직히 많은 돈을 가지고 장사해서 더 많은 부자가 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자본이 많을수록 더 쉽게 돈이 벌립니다. 4층짜리 건물은 별거 없어도 백층짜리 건물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중소기업보다 대기업이 대기업보다 재벌이 장사가 더 쉬운 법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로 배의 재산을 만들었다고 해서 대단한건 아닙니다. 뭐 극단적으로 다 까먹거나 손실을 보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이들은 재능이 좋아서 주인에게 뽑힌 자들입니다. 내 돈을 맡겨도 결코 손해는 없겠다고 생각해서 선택된 자들입니다. 주인이 외국으로 가면서 맡길려고 뽑은 종이니까 충분한 역량이 되는 이들입니다.
3.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주인이 돌아와서 재산을 맡긴 종들과 회계합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종은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답니다. 두 달란트 맡은 종은 두 달란트를 더 남겼답니다. 둘 다 배로 성장한 겁니다.
노동자 백년치를 번 종을 보고 주인이 한 말이 뭡니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돈을 두배로 만들었으니 당연히 잘한게 맞습니다. 게다가 그 돈을 가지고 횡령도 안하고 게으름도 부리지 않았으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이 맞습니다. 저라도 칭찬이 막 나갈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뒤엣 말을 보세요.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아니 그게 정말 적은 일입니까? 아니지요. 엄청나게 큰 일입니다. 노동자 백년 품삯을 더 가져왔는데 적은일 이라니요. 주인의 통이 정말이지 큽니다. 그리고 열 달란트를 만든 종에게 적은 일이라고 한 주인은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라고 말합니다.
정말이지 주인은 열 달란트가 별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이제 종의 착함과 충성됨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많은 것을 맡긴답니다. 그러니 주인은 엄청난 재물을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두 달란트 맡아서 두 달란트를 더 번 종에게도 주인의 대응은 똑 같습니다. 역시나 적은 일에 충성된자 라고 칭찬합니다. 그리고 많은 것으로 맡긴답니다.
비록 주인은 돈은 차이를 두어서 맡겼지만 그들의 노력에 대한 보상은 똑 같이 합니다. 자기가 처음에 준 돈이 다르듯이 벌어 들인 돈이 다른걸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주인이 다섯, 둘, 하나로 나누었기에 굉장한 차별을 둔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섯이나 둘도 주인의 눈에는 역시 적은 것에 불과합니다. 주인이 본격적으로 많은 것을 맡길만한지 시험하는데 편의를 따라 약간의 차등을 둔거지 우리가 생각한 만큼의 큰 의미는 없습니다.
그러니 한 달란트를 맡은 자가 한 달란트를 남기거나 해도 전혀 문제가 없이 똑 같은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뭐 자본이 적으면 장사하기가 어려운건 사실입니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에서 그건 너무나 큰 핸디캡입니다. 그러나 만일 한 달란트 맡았던 종이 한달란트를 더 벌지 않고 약간만 더 벌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본전을 까먹고 손해를 봤다면 주인은 뭐라고 했을까요? 솔직히 우리는 주인의 반응에 대해서 속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고르고 고른 자에게 맡겼습니다. 우리가 자원한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결국 주인의 사람보는 능력이 안좋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정도만 하고 넘어 갑시다. 그리고 답은 나중에 생각해봅시다.
4.주인의 즐거움
주인이 주는 보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닙니다. 열 단란트를 주어도 결국 그건 그걸 가지고 장사를 해서 재산을 불리라는 거지 너 가지라고 준게 아닙니다. 그러니 보상이라기에는 뭔가 좀 부족합니다. 그래서 주인의 보상은 다른데 있습니다. 뭡니까?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겁니다. 무슨 종류의 즐거움일까요? 앞에서와 같이 천국 잔치를 말하는 걸까요? 잔치가 그렇게나 중요한 겁니까?
글쎄요,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에 앞서서 뭔가 수식어 비슷한게 붙어 있습니다.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아마 이 즐거움이 주인의 것을 맡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많이 맡은 자에게는 이 즐거움이 주어지는 모양입니다. 직장인에게 주어지는 월급, 보너스, 각종 복지 혜택? 글쎄요. 우리는 자꾸 돈의 개념으로 보상을 생각하니까 주로 돈에 관해서만 생각되는데 주인의 즐거움이 뭔지 여기에 참예하는 것이 매우 큰 보상인건 확실합니다.
5.한 달란트 맡은 종의 오해
솔직히 주인이 사람을 잘못 본 죄도 있습니다. 아무 일도 안하고 땅에 파묻어 두었다가 그냥 들고 온 것을 보면 애초에 저런 자에게 거금을 맡겨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게으르고 어리석은 자를 알아보지 못한 주인도 잘못이 있지 않나요?
뭐 일단 주인을 하나님으로 비정하면 우리는 주인의 잘못에 대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은 그 종이 그런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에게 거금을 맡긴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렇게 땅에다가 파묻어 두고 원금을 그대로 가지고 온 종도 그걸 들고 도망을 가지는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어떤 종도 도망을 가지 않습니다. 아예 여기에서 도주한다는 선택지는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지상의 인간은 죽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게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디 깊은 산속에서 들어가서 살더라도 남태평양의 무인도에서 살더라도 아니면 안데스 깊은 오지에 가더라도 주님의 눈길 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혼자라고 생각하고 자행자지 해서는 안됩니다.
자, 그런데 마지막 종의 잘못은 뭐냐면 크게 두가지입니다. 한 개는 우리가 잘 아는 돈을 땅에 파묻어 두고 시간과 돈을 썩힌 죄입니다. 주어진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기본적인 목적을 위배한 죄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를 선택해서 거금을 맡길 만큼 믿어 준 주인을 오해한 죄입니다. 그는 주인에게 뭐라고 합니까?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내가 두려워하여”
이 사람 말은 정말이지 모순입니다. 굳은 사람이고 심지 않은데서 거두는 사람인줄 알았다면 두려운 주인의 채찍이나 매질을 피하기 위해 주인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전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니 굳은 사람에다 심지 않은데서도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도 모으는 자라면 자랑스럽거나 든든하게 여겨야지 두려워한다는 건 또 뭡니까?
원래 종은 주인의 위세를 업고 삽니다. 왕의 종은 벼슬아치요 세도가의 종은 지방수령은 눈아래로 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일 해방 노비의 노예라면 어떨까요? 그러니 종의 생각처럼 주인이 그렇게 무섭고도 유능한 자라면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든든하게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두렵다고 여겼다는 건 주인에게 그냥 핑계요 변명입니다.
주인은 종의 고백을 듣고는 더 화가 난 겁니다. 그리고 종을 아주 호되게 혼내려고 결심한 겁니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큰 권세를 가진 주인은 많은 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세명을 뽑아서 청지기로서 자기의 재산을 위임한 겁니다. 신임한 거지요. 그런데 그 은혜를 세상에 이렇게 갚다니!
그리고 감사와 존경이 아니라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마치 무슨 돈에는 피눈물도 없는 괴물처럼 생각하다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 진노한 것이지요.
게다가 주인은 충분히 그 종에게도 장사해서 이를 남길 재능을 주셨습니다. 다만 그가 처음부터 주인을 오해해서 주인을 두려워하기만 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을 발휘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게 문제지요.
6.원금과 이자
당시에 은행이 있었을까요? 신용있는 은행에 돈을 넣어 놓고 이자를 받는게 가능했을까요? 솔직히 당시에 은행이 없었습니다. 아마 큰 장사치들이 사설 금융업 대부업을 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사채업자들이지요. 당연히 이들은 위험도 높지만 이익도 많이 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언제 망할지 모르고 또 돈을 떼어 먹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국가 기관이 아니므로 언제 상황이 바뀔지 모릅니다. 그러니 한 달란트 맡았던 종이 저금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주인이야 워낙에 큰 권세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무리 사채업자나 대부업자라고 해도 한 수 접어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 그사람에게 가지 않았을까요? 그 무서운 주인의 이름을 대면 아마 틀림없이 안전하게 돈을 투자할 수 있었을터인데요.
7.부익부 빈익빈
우리 주님은 물질보다 사람을 더 중히 여기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 낮은 자 약한 자의 친구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비유를 보니까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받은 자에게 주라고 하시면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게 바로 현대인이 가징 싫어하고 경계하는 ‘부익부빈익빈’인데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걸 돈이라고 하지 말고 재능이라고 사명이라고 일거리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렇다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주어진 재주를 가지고 최선을 다하면 그 일이 윤리나 하나님의 법을 어기지 않는 한 하나님이 칭찬해주시고 사랑해주실 것입니다.
일 잘하는 이에게 더 많은 일을 맡긴다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그 일 잘한이에게는 다른 면으로 보상하는 겁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보상. 우리식으로 말하면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면 주님과 더불어 왕노릇하는 보상.
이제는 세상이 밝아져서, 아직도 좀 어두운 면은 있지만, 부모라고 해도 자식에게 좋은 직장을 주기는 어렵습니다. 개인기업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면 우리는 충분히 아버지의 빽으로 좋은 자리에 취직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빽으로 충분히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갑질은 전혀 들키지도 않습니다. 왜냐면 그들 불신자들은 이런 기도의 효능을 안믿을테니까요.
얼마나 웃깁니까? “너 기도해서 취직했지? 무효야, 그리고 청탁으로 감옥에 집어 넣을거야” 절대로 이럴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에게 투자하세요. 그에게 시간을 드리세요. 그와 평소에도 친밀하게 지내세요. 기도하고 구제하고 전도하고 선한 일을 행하세요. 그게 바로 그와 친밀하게 지내는 비결입니다.
주어진 일에 열심을 내면 얼마든지 즐거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주신 일거리를 열심히 할 일입니다. 그가 주신 재능으로 할 수 있는 일인데도 피하고 눈감고 있으면 안됩니다.
8.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한 달란트 맡았던 종에게 내려진 처벌은 가진 돈을 빼앗은게 아닙니다. 어차피 그건 자기 돈이 아닙니다. 주인의 것을 가지고 위탁받아서 뭔가 일을 해야 하는 겁니다. 귀찮아요. 땅에 파묻어 둘 정도로 게으른 종에게 뭔 새로운 일을 맡기겠습니까? 그러니 돈을 뺏어간게 절대로 벌이 아닙니다.
벌은 이겁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솔직히 바깥 어두운데 내쫓으라는게 이 종이 받는 벌의 전부입니다. 아마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과 정 반대의 처벌인 모양입니다. 바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지 아닐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가 틀림없이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건 주인의 즐거움이 그 정도로 굉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굉장한 것을 얻지 못하고 쫓겨난 것은 충분히 이를 갈며 울고 슬퍼할 정도라는 확신을 주인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어 쫓는 것으로 처벌이 일단락됩니다.
9.그러므로 천국이다
우리가 처음부터 보면 주인은 재능대로 달란트를 나누어 줍니다. 우리가 그냥 보면 재능을 뜻하는 달란트나 돈이나 무게 단위인 달란트가 같은 말처럼 보이는데 안타깝게도 재능은 달란트가 아니라 ‘뒤나민’이란 말이 쓰였습니다. 힘이나 역량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종들의 가진 바 역량을 평가해서 다섯 둘 하나씩 나누어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달란트 맡았던 종이 땅에 그 달란트를 묻어 두었다가 가져온 것은 주인이 그에게 있다고 평가한 재능, 힘과 역량을 발휘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운게 됩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긴 것은 돈 몇푼 더 불리려고 종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주인은 자기의 종들을 매우 사려 깊게 선택했고 뽑아서 그 역량대로 돈을 맡긴 겁니다. 이유는 이들에게 더 큰 것을 맡기기 위함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재벌 회장이 직원을 뽑아서 크게 키워서 자기 사람으로 쓸려고 시험한 겁니다.
지금은 돈을 맡겼지만 주인이 외국에서 돌아올 때에 더 놀라운 것으로 주시기 위함입니다. 역량이 충분하지만 노력하지 않고 그 재주를 사용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종이 없는지 미리 걸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주인이 로마에 가서 유대의 왕위를 받아 왔고 그 청지기들에게 큰 권세를 맡기려고 했다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유능한지 정직한지 충성심이 있는지를 평가하기위해 돈을 맡겼다고 생각해보세요.
주인의 즐거움은 무엇일까요?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일 수도 있고 종의 신분에서 면천되고 고귀한 신분을 하사하는 것일 수도 있고 단순한 장사가 아니라 진짜로 거대한 일, 정치일 수도 있고 봉사일 수도 있는 그런 일을 맡기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주인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주인의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주인이 가진 자신감이 들어 있습니다. 누구라도 이 정도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이라면 절대로 아쉬워하거나 부족하다고 여기지 않을 정도의 충분하고 넘치는 영화로운 포상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종들에게 이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으로 기준을 정하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언론을 보면서 느낀게 뭐냐면 우리나라에서 큰일을 하는 사람치고 죄를 짓지 않은 이가 거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검찰이 꼬투리를 잡으려면 뭐라도 잡힌다는 거지요. 물론 검찰이 깨끗하다는 얘기는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큰일 안하는게 오히려 더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 식으로 보면 부산 변두리의 개척교회 목사도 별로 나쁜 포지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남에게 꾸지 않고 일용할 양식이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하, 그렇다고 해서 제가 하나님이 큰 일을 맡기실 때 싫다고 빼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우리 인간은 어디 하늘에서 바위에서 땅에서 솟아나거나 떨어진 중뿔난 존재가 아닙니다. 창세 전에 이미 안배하신 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흙먼지 가운데서 우리를 만드셔서 하나님의 영을 불어 넣으셔서 사람이 되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육체와 영이 틀림없이 조화를 이루는게 당연합니다. 원래 하늘이 사람을 낼제에는 후박이 없답니다. 심청전에서 심 봉사가 하늘을 보고 넋두리 하잖야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 단란트를 주셨다면 틀림없이 이것을 상쇄하는 뭔가 다른 것을 주셨을 겁니다. 다섯 달란트를 주셨다면 뭔가 이를 상쇄하는 페널티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너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 처사에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달란트를 가지고 얼마나 남겼냐가 하나님의 포상 기준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서 최선을 다했느냐가 포상조건이 되는 겁니다. 이 사람도 100% 저 사람도 100% 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액수의 차이는 묻지도 않으시고 똑같이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역량도 중요하지만 아버지를 잘 이해하고 부지런한 것도 참 중요합니다. 나를 사랑하셔서 뭔가 나에게 주고 싶어서 이런 것을 맡기신 것이라는 정신상태로 일하면 얼마나 재미있고 보람찰까요?
‘이것 가지고 나에게 꼬투리를 잡아서 혼을 내려고 한다’고 여기면 될 일도 안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나를 위한 사랑을 믿으세요. 하나님의 나를 위한 사랑을 불신하는 자는 미안하지만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할 리가 없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고 그의 법을 제대로 지키고 무엇보다 그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주신 역량대로 그가 맡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려고 노력해 보세요. 틀림없이 주어진 일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겁니다. 왜냐면 우리를 만드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신데 그가 우리의 역량을 잘못 파악해서 우리에게 전혀 맞지도 않는 과중한 사명을 주시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고 그의 섭리를 믿고 그의 품안에서 감사하며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살면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그의 선하심을 믿고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는 지금도 우리를 감찰하시며 감당치 못할 시험은 주시지 않으십니다.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감사할 일이 너무 너무 많아 지기를 바랍니다. 추수감사절을 기다리는 일주일동안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19년 설교 원고
――――――――――――――――――――――
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한 달란트면 뭐 어떤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해, 열심히 살아가는 그 모습을 주님이 예뻐하시는 겁니다. 저는 어린 시절 공부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가끔 들어왔습니다. 노력해서 명문대학을 나오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용기 백배하여 여러 차례 도전했으나,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긴 세월이 흘러서 조금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은 학교를 어디 나왔는지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거에요.
오늘 올바르게 이웃을 사랑하고 있니? 네가 할 수 있는 사명을 해내고 있니? 라고 물으신다는 거에요.
도망치고 싶겠죠. 나만 생각하면 그만이겠죠. 그러나, 바로 그 마음을 돌이킬 때,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부지런하게 노력하겠다고 더 다짐해 봅시다. 인생은 여전히, 지금 이 순간. 오늘 여기에서부터 입니다. / 2019. 11. 가을날에 시북(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