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히스기야의 개혁(역대하31:1-2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9. 11. 7. 10:02

히스기야의 개혁 (역대하31:1-21)

 

우리가 이제껏 살펴본 히스기야의 행적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였으며 자기의 백성들과 동포들이 하나님앞으로 돌아오기를 갈망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까지의 히스기야의 모든 행적을 종교개혁의 일환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 히스기야가 또 다른 개혁을 실시합니다. 이제까지 행한 것도 충분히 개혁이라고 할 만한데도 다시 개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한 행위를 이제부터 제도화 시켰기 때문입니다.

 

말은 개혁이지만 실제로는 이제까지 일어났던 개혁의 움직임을 제도화한 겁니다. 이러한 움직임이 일회성으로 끝나거나 자기가 살아있을 때에만 지킬 것이 아니라 자손만대로 지킬 것을 기대하고 제도로 정착시키려고 노력한 겁니다.

 

우리 기독교는 성악설을 믿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죄악중에 태어났고 성령님의 만져주심이 아니라면 죄악중에 살다가 영원히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하고 사악한 존재라고 봅니다.

 

그래서 인간을 죄인으로 보고 날마다 스스로를 쳐서 회개하고 개혁해야 겨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성화되어야 할 존재로 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개혁은 인간에 대한 철저한 불신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목사가 인간을 사악한 존재로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보는게 너무 이상합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인간이 일시적으로 성령이 충만하여서 멋진 삶을 살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은 쉽게 변하고 의지가 약하고 죄를 좋아한다고 봅니다. 착한일을 하기보다 나쁜일을 하기가 더 쉬운, 자연스러운 그런 존재로 보기 때문에 인간을 믿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이유없는 선의는 없다는 속담까지 있을까요?

 

그래서 사람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제도에 의한 통치를 더 믿습니다. 회개하고 깬 사람들이 모여서 그래도 뭔가 잘해보려고 의논하다가 만들어진 합의를 더 믿습니다. 사람이 위선적이기 때문에 남 앞에서는 또 착한척을 합니다. 체면차린다고. 제도란 결국 그런 위선의 산물인 셈이지요.

 

물론 제도도 역시 인간이 운영하는 것이기에 문제가 생길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제도가 생각지도 못한 많은 결함과 부작용을 가질 수도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이나 지식이 불완전하고 미천하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모든 제도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보다 나은 행복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해보고 안되면 더 잘되도록 고치면 됩니다. 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많은 인간이 자기를 쳐서 구원얻을 수 있도록 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또 바꾸어보고 그래서 끊임없이 개혁하는 겁니다.

 

독재국가나 전체주의 국가에서야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지도자에게, 지배층에게 득이 되는 제도를 만들고 법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착취하겠지만 적어도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그런 이상한 법을 공공연히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비록 비능률적이고 부작용도 있지만 사람보다는 제도에 의한 통치를 만들어 나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시행된 제도들을 조금씩 고쳐가는 겁니다. 그래서 정말 좋은 제도로 계속해서 개선해 나가는 겁니다.

 

이제 히스기야는 자기의 개혁, 보다 정확히는 종교개혁을 제도화하려고 합니다. 자율의 영경에 맡겨두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제도화하고 법으로 시행하고 정착시키려고 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이 개혁제도의 근간은 먹고 사는 문제로 귀결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그들이 마음껏 성전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나가는 겁니다. 그뿐 아니라 전국에 퍼져있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생계를 책임짐으로써 전국을 하나님 신앙으로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이게 히스기야 식의 개혁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서 온전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바로 히스기야가 오랜 세월동안 꿈꿔왔던 유다의 모습입니다.

 

수백년만의 유월절이 큰 기쁨과 감동으로 끝이 나면서 유월절에 참석했던 백성들은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뭐겠습니까? 국토를 정화하는 겁니다. 성전을 정화하고 유월절을 거행한 이들은 이제 전 국토를 정화하기 시작합니다. 청소를 시작한 겁니다. 나라곳곳에 세워져 있는 우상의 주상과 목상들을 깨트립니다. 우상의 산당들과 제단들을 깨트립니다.

 

히스기야가 꿈꾼 나라는 하나님만 섬기는 나라입니다. 온 백성이 한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품 안에 모여 즐겁게 교제하며 힘을 합쳐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그런 왕국입니다. 그러나 이걸 제도화하지 않고 자기가 죽으면 나라가 다시 우상숭배로 돌아가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그리고 마침내 나라가 멸망해 버리겠지요.

 

바알이나 아세라 숭배는 직접적으로 인간의 탐욕과 본능을 자극합니다. 누구라도 한번 여기에 빠지면 빠져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마력적임을 알고 있습니다. 음탕하고 육욕적이며 인간의 욕망을 극도로 자극하는 의식을 행합니다. 그래서 보통 정신으로는 이걸 이겨내기가 어렵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이 멸망한 원인이 하나님을 배신함에 있음을 자각한 히스기야는 절대로 자기가 다스리는 남쪽 유다에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제사는 아세라 제사에 비하면 너무 심심하고 건전합니다. 그래서 지겹고 재미도 없습니다. 독실한 신심이 아니면 이겨내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더 걱정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유월절을 성공리에 지내고 이제 히스기야는 그 동안의 성과인 종교개혁을 제도화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세히 보면 그가 실시한 종교개혁이란게 별게 없습니다. 그냥 이전 제도를 부활시키고 여기에 소요되는 재물을 마련하는 방안을 제도화 시키는 겁니다.

결국 먹고 사는 문제로 귀결됩니까?

 

좀 부끄러운 말이지만 많은 목사님들이 임지가 없어서 세속에서 일하는 것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이 분들이 임지가 없는 것은 솔직히 이분들이 너무 사람이 좋아서입니다. 투쟁심도 없고, 얼굴이 뻔뻔하지도 않고, 거짓말도 못하기 때문에 경쟁에 발을 들이지 않고 뒤로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중학교때 기억하기로는 돈을 가지고 점심때에 빵과 우유를 사러 가면 저마다 돈을 내밀며 저요 저요를 외치니까 주변보다 더 크게 소리치고 밀치고 악다구니를 지르지 않으면 제돈주고 빵과 우유를 사기가 어렵습니다. 만일 그런게 싫어서 뒤에서 구경하고 있으면 점심시간에 이삼십분은 그대로 지나가 버립니다.

 

이건 좀 웃긴 얘긴데 제가 키가 적은 이유는 그때 그런 경쟁이 싫어서 점심을 굶고 도서관에가서 책을 읽는 일이 많아서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한 요인중의 하나였지 않아 생각합니다.

 

솔직히 우리나라는 사람이 땅덩이에 비해서 너무 많아서 어딜 가나 경쟁이 치열합니다. 오죽했으면 단군이래 가장 똑똑한 친구들이 가장 취직이 안된다고 이야기할까요?

 

임지가 없어서 택시운전을 하는 목사님, 길거리 노점에서 좌판을 하는 목사님도 제가 알고 있습니다. 학원차를 운전하는 분도 알고 있습니다. 겸임교수를 하는 분도 있고 학원강사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학벌은 다 좋으니까 그런일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아마 다른 일에 종사하는 이들도 많을 겁니다. 이런 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일할 수 있는 임지입니다.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물질적으로 보조하는 겁니다.

 

교회의 한쪽에선 돈이 썩어날 만큼 많이 쌓여 있어서 수백억대의 횡령이 공공연히 일어나는데 다른 한쪽에선 돈 한푼이 없어서 생계 때문에 성직을 팽개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목사면 자식에게도 목양지를 물려주는데 그렇지 않은 이들은 소위 말해서 맨땅에 헤딩하다가 그냥 포기하고 좌절합니다.

 

물론 그 전에 신학생을 너무 많이 받은 신학교도, 이들에게 목사 안수를 무분별하게 많이 준 교단도 문제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고 헌신의 맹세를 거친 이들에게 자발적인 이탈이 아니라 일할 곳이 없어서 생계 때문에 성직을 떠나게 되는 것은 너무 가슴 아픈 일입니다. 저는 한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70에 공식적으로 은퇴는 해도 그가 목사가 아닌건 아닙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목사입니다. 그래서 더 가슴 아픕니다.

 

일단 히스기야는 2절에 “히스기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반열을 정하고 그들의 반열에 따라 각각 그들의 직임을 행하게 하되”

히스기야가 없던 제도를 만들어 낸게 아닙니다. 다윗시대에 이미 제사장과 레위인의 반열과 직임을 정했습니다. 24반열로 나누어 제사장들이 차례로 일주일씩 성막에서 봉사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이렇게 새롭게 반열과 직임을 정했다는 말은 이전의 제도를 복원했다는 말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의 신앙이 쇠퇴하면서 이러한 제도는 유명무실하게 변했습니다. 게다가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가 성전을 페쇄하고 하나님을 적대하고 난 다음부터는 아예 반여호와 정책이 공공연히 벌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들에게 배척받는 희한하고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성전이 폐쇄되고 또 제대로 제사가 행해지지 않고 또 십일조가 제대로 드려지지 않아서 또 왕실의 무관심으로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삶이 아주 피폐해졌던 모양입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제사장뿐만 아니라 전국에 산재한 레위인의 성읍에서도 이런일들이 벌어진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생계전선에 뛰어들었고 하나님에 대한 봉사의 의미가 쇠퇴해져 버렸습니다. 봉사하고 싶어도 성전은 문을 닫았고 전국곳곳에는 우상숭배가 판을 칩니다. 백성들을 지도하고 종교생활을 장려해야 할 레위인들도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나라가 우상에 탐닉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이것의 가장 큰 원인이 모두 재정적인 문제때문이라고 보고 조세제도를 개혁한 것입니다.

 

저도 목사들의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위한 방안을 몇가지 생각해 보았는데 일단 교단별로 목사들의 사례금 절반은 교단에서 나머지 절반은 개 교회에서 지원하는 방안, 두 번째는 교단에서 목사들의 근무연수나 가족의 수 같은 것을 고려해서 등급을 정해서 모두 지원하는 방안 세 번째는 노회나 시찰별로 일정한 액수를 지원하고 나머지를 각 교회에 맡기는 방안 이런 것을 제가 고려해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뭐 교단이나 노회에서 유명한 영향력있는 사람은 아니고 그러니까 당연히 다 제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지금처럼 마치 교회가 사회의 회사처럼 운영되는 일은 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어쨌든 히스기야는 왕이니까 자기의 개혁방안을 펼칠 힘이 있습니다. 그는 일단 성직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위해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합니다. 결국은 올바른 목사가 올바른 성도를 만드는 겁니다.

 

이것을 위하여 히스기야는 먼저 자기의 개인돈을 기부합니다. 성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일 필요한 것이 바로 헌금입니다. 옛날에는 성전제사. 그래야 고기가 생기니까 이걸 제사장과 레위인과 제사드리는 사람들이 갈라 먹는거지요. 그래서 제사가 없다면 모두 굶게 됩니다. 히스기야는 자기의 재산으로 먼저 번제에 쓰게 했답니다.

 

참 기가찹니다. 천하를 다 가진 분을 위한 제사장들은 지금 가진게 없어서 직임을 버리고 세상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왕이 이들의 호구거리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상하게 잠잠하시지요? 그건 하나님이 인간들이 스스로 일하는 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있지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니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아침과 저녁의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절기의 번제에 쓰게하고”

다음으로는 백성들에게 명합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을 명령하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몫의 음식을 주어 그들에게 여호와의 율법을 힘쓰게 하라 하니라”

 

지금 당장 처자가 굶어서 죽게 생겼는데 여호와의 율법에 힘쓰기가 어렵습니다. 일해서 먹고 살아야지. 성전에 제사가 행해지고 원래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받아야 할 몫을 받지도 못합니다. 백성들은 이제껏 십일조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이번을 기회로 그러한 것들을 다시 회복시킨 것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자손들이 지파별로 땅을 분배받을 때 레위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스스로 분깃이 되시겠다고 하셨기에 하나님을 분깃으로 삼기로 하고 영토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신앙심이 쇠하고 아하스가 성전을 폐쇄하자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생계를 위해서 성직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지난주에 배운 것 기억하시지요? 유월절에 성결치 못한 제사장들이 양을 잡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그런 성결치 못한 제사장들이 생긴것입니다.

 

이제 히스기야는 다윗이 정한 구제도를 다시 회복시켜서 이들이 하나님의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를 활성화시키고 십일조를 다시 확립하고 원래 레위지파에게 갈 몫을 주도록 명령한 것입니다.

 

신명기14장에서 하나님은 산업 분깃이 없는 그들을 저버리지 말라고 백성에게 명령하셨지만 우상숭배에 탐닉했던 백성들은 레위인을 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흩어졌고 나라가 우상숭배의 장으로 변했고 결과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의 첫 번째로 제사장을 불러 모았던 히스기야는 이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다시 직임을 성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저들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제도를 확립하게 된 것입니다.

 

솔직히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에서 한 개 지파가 성전을 중심으로 봉사하고 또 전국에 흩어져서 백성들의 신앙생활을 권면하고 지도한다면 나라는 당연히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열두지파의 십일조로 레위지파를 받으신 것인데 그 레위지파가 현실적인 빵문제로 십일조로서의 의무를 행하지 않습니다. 못한다고 할까요? 성직자가 그러니 자기 한몸 살기에 급급한 백성들 우상숭배에 탐닉한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십일조를 할 여유도 마음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개혁이 필요한 것이고 히스기야의 영도 아래 종교개혁 신정국가로 돌아가기 위한 개혁이 실시되는 것입니다.

 

개혁이란건 백성들이 지지하지 않으면 결국 실패합니다. 아무리 왕이 혼자서 설쳐도 밑에서 따르는 시늉만하고 지지하지 않는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이 실패합니다. 5절에 보면 백성들이 왕의 명령에 공감하여 많은 재물을 가져왔고 십일조를 풍성히 드렸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이 가져왔는지 그것을 쌓아서 여러 더미를 이루었답니다.

 

그리고 여기 잘 보면 개혁의 순서를 보시면 히스기야가 왕이 되고

제일 먼저 제사장들을 불러 모아 영적 각성운동을 벌였고

다음은 성전을 청소했고

 

그 다음은 온 백성을 불러모아 유월절을 지켰고

그 다음은 제사장이 아니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국토의 우상을 제거하고 산당과 제단을 철거하는 국토정화를 실시했고

그 다음에는 왕이 자기의 재산을 기증하고 십일조를 복원했으면 흩어진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불러모아 이들로 하여금 아무런 생계에 대한 걱정없이 하나님의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자손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동안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각이 없어서 십일조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하스 이전에 요담이나 웃시야때에는 하나님에대한 성전제사자 제법 잘 지켜졌습니다.

 

솔직히 십일조가 너무 아깝습니다. 이거 다 나만을 위해 써도 모자라는데 뭘 십의 일을 또 따로 바치기까지 합니까?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은데...하나님은 부유하고 전지전능하신 신이신데 그가 알아서 하시겠지 뭐 굳이 우리들의 십일조까지 바라시는지?

 

심지어 어떤 이들은 신약시대에는 십일조가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이까지 있습니다. 천만에요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나요? 마태복음23:23에서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여기서 ‘저것도’가 바로 십일조를 말합니다.

보세요, 십일조보다 믿음이 더 중하다고는 하셨지만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없습니다. 하라고 하셨지요. 원래 사람들에게 재물이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많은 교인들이 재물의 복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옵니다. 자기를 잘살게 하고 복주는 하나님은 얼마든지 환영하지만 자기의 잘못을 꾸짖고 바르게 살도록 잔소리하고 잘못하면 때리고 하는 간섭쟁이 무서운 하나님은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는 재물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에게 재물을 드리는 것에는 인색합니다.

 

하나님의 간섭과 훈육은 우리를 자기의 아들로 여기시는 증표입니다. 아들이 힘들 때 도움을 간구할 때 아버지가 얼마나 잘 도와주실까요? 여하튼 구약시대의 히스기야는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드리도록 했고 백성들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호응해서 십일조를 드렸는데 여러 더미를 쌓을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순수하고 열정적인 신앙이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강제로 헌금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의무적으로 체면치레로 남들에게 보이기위해 헌금을 합니다. 그런 식이라면 드린 헌물이 여러 더미를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더미는 산더미라고 보면 됩니다. 멀리서 지나가다가도 충분히 보일 수 있을 정도로 높이 쌓은 더미.

 

우리가 연인이나 부부사이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자녀에게 부모에게 사랑하는 이에게 뭔가 줄 때는 이것도 주고 싶고 저것도 주고 싶고 더 못줘서 안달입니다. 그리고 준 것을 잘 사용할 때 더 기쁩니다.

 

이들은 히스기야의 기도 덕분에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입었습니다. 육체적인 질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질병과 피곤함과 불안과 두려움에서 놓임받아 하나님의 절대적인 평안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자기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 이전부터 존재하셨고 자기들을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제야 겨우 깨달았다고 하는 사실에 대한 죄송함과 그래도 자기들을 버리지 않고 품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자발적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린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여러 더미의 십일조 헌물입니다.

 

5절에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첫 열매들을”에서 첫 열매라는 말은 처음 익은 열매라는 말도 되지만 원래는 ‘가장 좋은, 가장 중요한’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 십일조를 드리는 물품이 자기의 수확물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너무 많이 쌓여갑니다. 7절에 보면 셋째달에 더미를 쌓기 시작해서 일곱째 달에 그쳤답니다.

 

유월절이 둘째달에 있었고 두 주간에 걸쳐서 유월절을 지켰으니까 이들이 가져온 것은 유월절이 끝나고부터 바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추수를 시작하면서 십일조를 동시에 드렸다는 말입니다.

 

소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성령의 감동이 임했을 때 즉시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고 성령이 역사하셨을 때 즉시 개혁하는 것이고 성령이 임하시면 즉시 회개하는 것이지 내일, 다음에, 있다가 이런 식의 미루기는 더 이상 해서는 안됩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게 되면 그 사이에 사탄이 방해를 하기 때문에 어렵게 붙은 성령의 불꽃이 꺼질 수가 있습니다. 불은 어때요? 불쏘시개도 필요하고 뭔가 태울 것이 있어야 꺼지지 않습니다. 성령의 불이야 전혀 다른 성질이겠지만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에도 사람들의 갈망과 순수한 영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죄성을 잠시 억눌렀을 뿐이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이 임한 즉시 뭔가를 하는게 가장 좋습니다. 시일을 두고 자기에게 가장 유리하도록 이리저리 재게 되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여기 유대백성들 이스라엘 자손들은 유월절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마자 자기의 가장 좋은 것으로 십일조를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운동은 점점 호응도가 높아 져서 갈수록 범위가 넓어 집니다.

 

처음에는 4절에서처럼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에서 5절의 ‘이스라엘 자손’으로 범위가 점점 넓어 집니다. 아마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까지를 포함해서 유대전국의 사람들에게로 십일조를 드리는 일들이 확산된 겁니다. 처음 수도에서 이제 나라 전토로 그리고 북쪽의 동포들 일부에게로 점점 범위가 넓어 집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단순히 히스기야의 명령 때문에 일어났다고 보면 곤란합니다. 왕이 명령할 수는 있어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자원하여 드리지 않았다면 결코 여러 더미를 만들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헌금은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의무적으로 드려서 마음속으로 아까운 마음이 든다면 글쎄 그 헌금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까요?

 

3월부터 7월까지 드렸다고 하는데 이건 태양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이 아니라 유대력입니다. 그러니까 유대력3월은 맥추절이고 7월은 수장절입니다. 그러니까 첫 수확물을 드리기 시작해서 가을걷이까지 계속해서 십일조가 발생하는 모든 것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7월이 끝나면 그 다음은 겨울입니다. 우리식으로 11월 이후. 그러니까 더 이상 농작물을 수확하지 못할 때까지 계속해서 드렸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렇게 보면 십일조를 드리는 당연한 규례를 지킨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렇게 장황하게 십일조를 기록한 것은 이제까지 이렇게 정확한 십일조를 드린 경우가 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한 거창한 무언가를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그냥 우리가 당연히 해야할 것만 제대로 해도 복을 주십니다. 그러니 뭐 거창하게 로또맞아서 백억을 받으면 십일조로 예배당을 지어 드리겠다는 말은 안해도 됩니다. 그냥 자기의 현재 처지에서 능력 안에서 규례대로 하면 됩니다.

 

이런 여러 더미의 십일조 헌물을 보고 히스기야는 매우 기뻤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송축하고 백성을 위하여 축복했습니다. 사실 이런 축복기도가 진짜배기입니다. 보는 순간 너무나 감격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감사하고 그리고 축복해주고 싶고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축복의 기도가 나오고 이런 것은 그 마음속에 성령의 감동이 임하셨다는 말이고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시려고 먼저 기도를 시키신 것입니다. 그 말대로 들어 주시려고.

 

그러니 어찌 그 백성들이 복을 받지 않겠습니까?

 

10절에 보면 대제사장 아사랴가 말합니다. “백성이 예물을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 시작함으로부터 우리가 만족하게 먹었으나 남은 것이 많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에게 복을 주셨음이라 그 남은 것이 이렇게 많이 쌓였나이다”

 

만족하게 먹고 남았다고 합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이나 헌물 가운데서 먹는게 당연하지만 필요한 만큼만 그러니까 먹고 살만큼만 취하고 남은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그게 너무나 당연한데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예물을 많이 바치나 적게 바치나 사람의 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당시는 사람들이 하루 두끼를 먹었지만 지금은 세끼를 먹습니다. 더 이상 먹을데가 없어요.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예물을 많이 바치는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엄청난 연봉을 받습니다. 어떤분은 와이셔츠나 넥타이를 너무 많이 선물받아서 한번 한 것은 두 번 사용하지 않을 정도랍니다. 물론 그 목사님은 그런 남는 것은 부교역자들에게 선물한답니다. 어차피 선물 준 사람 때문에 한번은 해야 되고.

 

옛날 필리핀의 독재자 부인은 그 집 신발장을 열어보니까 명품구두가 수천켤레가 진열되어 있더랍니다. 이처럼 설마 그 많은 것을 남 안주고 진열하고 보면서 만족감을 느끼려는 분은 없겠지요?

 

필요한 만큼 충분히 사용했으면 나머지는 다른 이들에게 돌리세요. 그게 바로 기독교 정신입니다. 주기 싫습니까? 하나님의 자비를 바래서는 안됩니다. 그런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을 겁니다. 더 많이 받고 싶어요? 그러면 더 많이 사용하세요. 기부도 하고 아무개 아무개도 먹여 살리고 몰래 좋은 일도 하고... 하나님은 다 아시므로 더 필요하다고 인정하시고 더 주실 것입니다. 명예와 품질까지 높여서 돌려 주십니다.

 

보세요, 십일조가 여러 더미를 이루어서 충분히 먹고도 쌓아 둘 정도라면 십일조를 얼마나 많이 드렸다는 말일까요? 이건 반대로 백성들이 받은 복이 그만큼 많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설마 받지도 않았는데 십일조를 드리는 이는 없겠지요? 저들이 하나님을 충심으로 섬기자 하나님은 저들이 즉시 하나님이 주신 복을 깨달을 수 있도록 풍성풍성하게 주셨다는 겁니다.

 

어떤 이단들은 돈을 빌리면 거기서 십일조를 제하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 말도 안됩니다. ‘받을걸로 믿고 먼저 드려라’는 말은 얼핏 들으면 신앙이 매우 좋은 것처럼 들리지만 수입의 십일조라고 적혀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행동입니다. 뭐든지 과하면 좋지 못하니까 주어진 규례대로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얼마를 주실지 알고 미리 자기가 계산해서 십일조를 합니까? 그렇게까지 안해도 충분합니다. 그런걸 요구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문제가 많은 사람입니다.

 

여하튼 그해에 소출이 너무나 많아서 십일조도 덩달아 많아진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역시 선순환입니다.

 

천국이 별게 아닙니다. 선순환이 일어나서 온 구성원이 행복을 느끼는게 지상천국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히스기야가 먼저 소와 양을 베풀고 백성들이 기뻐하고 이걸보고 감동한 제사장들이 축복하고 다시 백성들이 기뻐서 십일조를 드리고 이걸 보고 또 감동한 히스기야가 축복하고 하나님은 자기이 자녀들이 이렇게 서로 사랑하며 감사하는 삶을 보시고 더 복을 주시고...이런식으로 계속해서 점점 더 좋아지는게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먼저 시작하는 사람이 있어야 겠지요? 여기서는 왕이 먼저 시작했지만 현재는 있는자들이 먼저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구성원 전체에 복을 주십니다. 권력이고 돈이고 건강이고 재주고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때에는 청지기적 사명을 다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왜냐면 이 모든게 아버지의 것이고 나는 단지 그것들을 관리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표시로 드리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이신 주인에게 바치는 세금이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내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셨다고 그래서 이 모든 것의 원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증표입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성전에 방을 마련해서 쌓아 두고 성직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답니다. 창고를 새로 지은 것은 아니고 원래 창고로 사용되던 방인데 그 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더러운 걸 청소하고 재개장한 방입니다.

 

이 뒤의 본문은 주로 이렇게 재물을 분배하는 것에 관한 기록입니다. 누구에게 얼마를 주고 누구에게 뭘 주고 이런 식으로 기록이 이어집니다. 주로 제사장과 그 가족 그리고 레위인과 그 가족에게 재물이 분배되어 집니다.

 

다만 16절에 “삼세 이상으로 족보에 기록된 남자 외에 ”에서 삼세는 삼십세의 오기로 보여집니다. 왜냐면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기 위해서는 삼십세가 되어야 했고 족보에 기록할 때도 삼십세부터 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30부터 직임을 시작했다면 레위인은 이십세부터 시작합니다. 십일조를 가지고 제사장뿐만 아니라 레위인들에게도 식물을 분배합니다. 식물뿐만 아니라 돈은 안주나요? 하하, 당시 사회에서 먹고 사는 문제는 정말이지 힘든 문제입니다. 오늘날처럼 대량생산에 대량소비의 시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식물이 곧 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치를 위한게 아니라 생계를 위해 식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날로 하면 사례금을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수체계를 정했다?

 

또한 이 성물을 분배받을 수 있는 자는 18절에 “ 이 회중은 성결하고 충실히 그 직분을 다하는 자며”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스스로 성결하여 하나님의 성직을 제대로 감당하는 자만이 식물을 배분받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성결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직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기의 것을 내어 주시지 않습니다.

 

언젠가 삯꾼 이야기를 했지만 요즘은 삯을 받는 정도로 일하는 이도 잘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은 자기의 신분을 항상 상고하고 성결하게하여 직무에 충실한 자에게 성물을 허락하시는 겁니다.

 

성경 본문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그가 행하는 모든 일 곧 ... 하나님을 찾고 한 마음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그가 시작한 모든 일에 그가 전심을 기울였고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형통케 하셨다는 말입니다. ‘일심으로’ 는 전심으로란 말입니다. 한마음,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상태. 그러니 전심이라는 뜻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이 일 저 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로 마음이 나뉘고 분주하고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고 하나님의 성품과 사탄의 습성을 동시에 고려하고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을 겸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일에 형통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세상에 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 집중해야 하고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하는 모든일을 형통케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보통은 겪는 세상살이의 패텬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새롭게 결단하고 그 결단대로 행동하고 그래서 회복되고 복을 받고.... 이 정도만 하면 좋을텐데 대부분의 경우에 사탄의 시험이 있습니다. 오늘의 이 본문 다음에 앗수르가 쳐들어 옵니다. 그래서 유다가 잔명을 보존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패합니다. 앗수르 군대의 포위 속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고백이 참인 것을 증명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다 압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응답받았고 온갖 부귀와 영화가 그에게 찾아 옵니다. 그리고 또 시련이 옵니다. 마치 파도같습니다. 쉼없이 몰아 칩니다. 일정한 주기를 두고 끊임없이 몰아 칩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신데 걱정할게 없습니다. 그가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보호하실 것임을 우리는 너무나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하나님과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보호를 청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하나님과 친해야 합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에 전혀 연락이 없던 친구(?)가 십여년만에 처음 연락을 해서는 청첩장을 준다면 글쎄 가고 싶을까요? 축의금을 갖고 가고 싶을까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과도 끊임없이 교제가 있어와야 우리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도 그의 도움을 즉시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죄의 담으로 분리되어 있던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 죄의 담을 허물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그래서 예수 공로를 의지하고 예수의 사랑을 믿고 나오면 됩니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이 바로 우리가 먼저 믿고 회개하고 구별되어야 합니다. 구별된 자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 속에 들어온 죄가 없어진 우리의 영은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영과 하나가 되려고 합니다. 신령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된겁니다. 우리와 하나님이 함께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만 되면 세상에 걱정할게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놀라운 일을 우리의 두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죽음 가운데 삶이 절망 가운데 희망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걸어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기대여 세상을 이깁니다.

 

승리의 그날까지 우리를 스스로 개혁하고 성결하게 하고 하나님이 주신 책임을 다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가운데서 승리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19년 설교 원고


――――――――――――――――――――――


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잠언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3장 12절에는 매우.... 인상적인 구절이 있습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개입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물으시는 겁니다. 너는 정말로 나를 신뢰하느냐. 너는 정말로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정말로 나의 길을 걸어갈 테냐.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가장 먼저 드릴 수 있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확실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네? 나는 드릴 게 없다고요? 천만에요.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것이 있습니다. 그 귀중한 것이 바로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시간을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 시간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배 시간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다시 하나님을 찾고, 간구하며, 부르짖는 그 사랑의 순간들이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을, 인간이 측량할 수 없으나, 우리가 스스로를 개혁해 나가며,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고자 결단할 때, 주님께서 하늘에서 보시며, 잘하였도다 칭찬하여, 우리의 삶의 길을 아름답고 울퉁불퉁하고 더욱 행복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인생은 작은 것이 중요합니다. 작은 실천이 중요합니다. 저는 묻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시간을 내어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을 귀중히 여기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인생 자체가 변화됨을 저는 믿습니다. / 2019. 11. 가을날에 시북(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