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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리라(사도행전6:1-7)/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9. 11. 4. 10:41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리라 (사도행전6:1-7)

 

교회는 크게 두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지요?
예수믿는 사람과 예수 믿지 않는 사람? 그럴리가요. 저는 교회에 속한 모든 이들이 적어도 예수를 믿는 걸로 가정합니다. 예수도 믿지 않으면서 교회에 속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받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글쎄요.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속한 모든이가 성령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남자와 여자? 하하, 재미있는 발상입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에 근거해서 교회 안에는 하나님이 보내신 주의 사자들 즉 교역자와 평신도가 있다고 봅니다. 당연히 교회 안에는 평신도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조금 더 들어가면 교회는 하나님이 파송한 목사와 교인들의 대표인 장로가 모여서 제반 문제를 처리한다고 봅니다. 물론 장로교만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종파는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장로들이 주체라서 장로교는 아니고 장로들의 회인 당회에서 제반 문제를 처리하고 심지어 목사도 일종의 장로로 보는게 장로교의 특징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이런 교회 정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교회의 기본 운영원리입니다. 초기에 수백명에 불과했던 기독교 공동체는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래서 약 이만명에 달하는 거대 공동체로 성장했습니다. 물론 한곳에 이들이 다 모여있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거대한 예배당이 없이 가정교회로 이루어져 있고 지역적으로도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만명이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거대한 예배당을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이들의 형편상 그런 건물을 사거나 빌리는 것은 능력 밖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여기 본문에 보니까 예루살렘교회는 헬라파 교인들과 히브리파 교인들로 이루어진 모양입니다. 물론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보충한 12사도와 예수님의 형제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 보니까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에게 불만이 생겼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수가 많고 그래서 구제도 히브리파 과부들이 독점적으로 혜택을 받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비록 소수기는 하지만 헬라파 유대인들의 불만이 높아진 겁니다.

더구나 예루살렘에 있는 헬라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이들은 예루살렘 출신도 아니고 해외에 생활근거가 있고 그래서 예루살렘교회에서는 소수이고 경제적인 약자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게모르게 구제에 빠지는 등의 차별을 받고는 불만이 폭발한 겁니다.

 

처음 예루살렘 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4:32에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그랬기 때문에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답니다. 왜냐면 성도들이 서로 자기의 재물을 풀어서 공동체를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같은 것도 이때 생겨납니다.

이러던 교회가 더 규모가 커지니까 이제는 몇몇 사람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원만하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제에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고 이것이 헬라파와 히브리파로 교회가 분열되어 싸우는 계기가 된 겁니다.

 

뭐 구제에 빠지면 다시 구제에 포함시키면 되지 이게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할 만큼 큰 문제가 될까요? 그래요, 충분히 큰 문제로 그래서 교회의 분열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거대한 둑이 무너지는 것도 결국은 아주 작은 구멍으로부터 시작되는 거지요. 제때 이 틈을 메꾸지 못한다면 이게 점점 커져서 결국은 도저히 막을 수 없을 정도가 되고 그리고 펑하고 터지는 겁니다.

 

어떤 문제든지 발단은 매우 미미합니다. 그러나 그 시작이 미미해도 끝까지 그렇게 미미하게 남아 있지 않고 점점 커지다가 마침내 교회를 분열시킬만큼 거대해지는 겁니다.

초대교회에는 안팎의 시련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압도적인 성령의 역사로 점점 거대해진 교회는 이제 한번쯤 숨 고르기를 해야 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숨을 고르면서 내실을 다져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미래의 분열을 초래할 어쩌면 아직은 미미한 균열을 봉합해야 합니다. 그냥 봉합이 아니라 근본적인 수술로 체질을 개선해서 웬만한 시련에 끄떡도 없는 튼튼한 신앙공동체로 거듭나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성장사를 보면 몇가지 굵직굵직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깥에서 오는 박해 말고도 교회 내적으로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제일 첫 번째는 가룟 유다 때문에 궐이 난 12사도의 직을 보강해서 완전한 사도단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맛디아를 투표로 선출해서 보강했습니다. ‘아, 그런갑다’가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개척교회가 조금 커지고 제일 먼저 겪는 문제가 바로 장로선출 문제입니다. 장로가 되지 못한 성도들이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심해지면 친한 사람들을 선동해서 일파가 분리해서 나가고 그래서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는 일이 정말 많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충성 봉사했는데 자기를 알아 주지 않는 동료교인들에 대한 서운함이 말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장로로 뽑아 주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실망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예루살렘교회는 이런 문제가 없이 원만하게 잘 넘어갔습니다. 요셉 유스도가 사도로 선택되지 못했지만 그는 본문에서 보면 이후에도 어떤 나쁜 사건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아마 그는 진정한 주님의 제자였던 모양입니다. 이후 본문에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 것을 보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봉사한 모양입니다. 그는 사도에는 포함되지 못했어도 그 이후로도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한 진정한 성도였던 모양입니다. 요셉 유스도 참으로 기억할 만한 참 성도입니다.

 

다음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건 인명사고입니다. 두사람이 죽은 참 큰 비극적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죄라고 해봐야 사실 별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을 데려 가셨는데 이 사건은 사실 예루살렘교회에 처음으로 맞이하는 큰 사건입니다.

 

자칫 삐끗하면 교회에 큰 어려움이 올 수 있습니다. 분열되고 서로 미워하고 또 사법적인 문제까지도 갈 수 있는 문제입니다. 원수들이 얼마든지 틈을 탈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비교적 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참고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이렇게 가기는 했지만 지옥에 갔다고 생각하면 정말 곤란합니다. 저도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아마 천국에 갔을 겁니다. 대신 하나님에게 약간은 책망을 받았겠지요. “왜 그랬니? 그건 좋지 않은 일이야.”

 

아나니아와 삽비라 문제가 비교적 잘 지나가게 된 것은 이 일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분노해서 죽인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한편으로는 성령의 역사로 기적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불타오르고 기도하고 그러면서 점점 커집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내부의 모순이 커졌던 모양입니다. 인간들이 모인 곳에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문제는 이후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입니다.

 

이런 문제가 표면적으로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네파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진다고 히브리파 유대인들에게 불만을 제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알다시피 무슨 문제든 표면적으로 내세운 문제가 전부가 아닙니다.

여기 1절에 보면 “헬라파 유대인들이...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사용된 ‘원망’이란 단어는 투덜댐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구약시대 출애굽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다고 하는데 사용된 표현입니다.

 

여기서 원망이 심해져서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돌로 치려고 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분노하셔서 이들을 다 죽여 버릴려고도 한 그 원망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점잖은 표현과 달리 상황이 상당히 심각했던 모양입니다.

또한 이들은 ‘사도들’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했다고 합니다. 아마 사도들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보고 무서워서 원망하지는 못하고 실무에 관여한 히브리파 사람들에게 표적을 돌린 걸로 보입니다. 교인들 사이의 원망과 불화가 제일 무섭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정말 어떻게 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심스럽게 살펴본다면 교회내에 헬라파와 히브리파사이에 교회운영에 대한 문제로 갈등이 생기다가 이 문제로 공론화된 겁니다. 아무래도 헬라파 유대인들의 숫자가 히브리파에 비해서 적기 때문에 각종 중요한 자리에서 소외되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왜 너네들만 한자리를 하냐? 우리도 자리를 차지하고 싶다” 이렇게 불만을 표할 수는 없기 때문에 말하기도 좋은 구제 문제를 들고 나온 것 뿐입니다.

 

왜냐면 히브리파 사람들이 일부러 헬라파 과부들을 구제에서 뺀 것이 아니라 미처 알지 못해서 뺐기 때문에 헬라파 사람들도 교회에서 구제를 할 수 있는 직분을 맡아야 헬라파 과부들이 구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은 구제 문제고, 사도를 원망한 것이 아니라 동료 교인을 원망한 것이지만 이게 점점 커질 수 있습니다. 호미로 막을걸 가래로도 못막는다는 말이 이래서 생기는 겁니다.

 

사실 제국은 외부의 공격으로 망하기 보다는 내부의 모순으로 망한다고 합니다. 갈등 분열 부패 이런 것들이 내부의 단결을 막는 겁니다. 그럴때 외부에서 공격이 가해지면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지는 겁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이런 문제가 생겼다는 말은 다르게 말해서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사각이 생겼다는 말이고 이렇게 사각지대가 생기는 이유는 돌보아야 할 양들이 많아졌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다르게 말해서 교회가 커지면서 필연적으로 이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교회는 사실상 가장 큰 위기상황에 직면한 겁니다. 이것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헬라파 유대인들은 분리해서 새로운 교회를 세울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보면 예루살렘교회가 여러 갈래로 흩어져서 분리되지만 또 그렇게 되는게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서로 비난하며 갈등 구조 속에서 화해하지도 않고 서로 헤어질 수는 없지요.

 

심하게는 아예 교회를 떠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수쟁이도 별수없네!’이렇게 되면 안됩니다. 그래서 이 위기를 해결해야 하는데 여기 사도들이 낸 해답이 있습니다.

 

1.말씀 우선

 

사도들이 모든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사실 교회는 봉사기관이나 자선기관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교제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친목회는 더더구나 아닙니다.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대로 행동하고 그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그 과정에서 힘들어하는 교우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외부로 표현하고 그런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빠진 봉사와 교제 집단은 이 땅에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수많은 단체와 다른 곳입니다. 교회가 하는 일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빠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신앙은 교회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그런걸 다 제쳐놓고 봉사와 접대만 강조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교회가 해야 하는 일에서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2.사람을 택해서 맡기고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일곱명의 사람을 택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들을 칠 집사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집사라고 부른 대목은 없습니다.

 

단지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는 대목만 보입니다. 뭐 우리가 보기는 ‘안수집사’처럼 보이지만 ‘장로’라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단지 사도를 장로라고 했기에 이들을 집사라고 부를 뿐입니다. 어쩌면 이들은 요즘 개념으로 하면 ‘칠 장로거나 예비 목사’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안수집사에 대한 개념이 처음과는 달리 왜곡되었다고 봐도 됩니다. 그러니까 제일 처음 평신도 중에서 첫 번째 개념이었던 안수집사에 대한 비중이 축소되는 식으로. 왜냐면 평신도 장로가 생겼으므로 이들과 구별하기 위해 집사의 직분을 약화시킨 건지도 모릅니다.

 

일단 본문을 아무리 열심히 샅샅이 살펴봐도 집사라고 칭한 부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집사가 아니라 ‘지도자’나 ‘직분자’ 또는 ‘일꾼’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참고로 초기에는 집사의 직분이 (지금의)장로 직분보다 더 전문적이고 서열상 우위에 있었다고 보여 집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것 같지만 이때 뽑힌 일곱 집사들은 순교한 자들을 제외하고 나중에 모두 교회의 감독이 됩니다. 감독을 목사라고 해야 할지 주교라고 해야 할지는 애매하지만 이로 보아 지금 우리가 ‘집사’라고 번역한 이 사람들은 전문적인 교육을 통하여 감독이 될 자들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전통은 계속해서 이어져서 주교청이나 감독청의 집사들이 나중에 감독이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일곱 집사는 요즘의 집사라기 보다는 ‘복음전파자’나 ‘설교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일단은 ‘일꾼’ ‘봉사자’라고 봅시다.

 

주께서 교회를 세우시면서 제일 처음 세운 직분은 사도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세우신 것이므로 사람들이 세우기는 어렵습니다. 맛디아를 보강한 것은 특별한 예외라고 보아야 합니다.

나중에 바울을 사도라고 부르는데 이는 ‘12사도’와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나중에 교회가 많아 지면서 교회의 설립자를 사도라고 부른 모양입니다. 초기 문헌에 이런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바울도 직접적으로 주님을 만나서 사도직을 받았다고 하는데 글쎄요 보는 사람의 관점이 다르니까 이건 나중에 살펴보고 오늘은 본문에 집중합시다.

 

직분자를 세울 때 아무나 인기있다고 세우는게 아닙니다. 여기 직분자를 세울 때 필요한 조건이 나와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

 

전통적인 분류방법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받는 사람

혹 이렇게도 말합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그러니까 ‘칭찬받는 사람’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이 꾸며주는 그런  한가지 조건으로 보는 이도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네가지 조건이 제시되었다고 봅니다. 세가지가 아니라 왜 네가지인지는 궁금하시지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 그럴 수도 있구나!’하고 여길 겁니다.

 

첫 번째 조건이 ‘너희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을 교회에 속한 회원으로 보고 세워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가 아니라 당장 교회에서 봉사를 해야 하므로 교회를 멀리 떠나있게 된다면 봉사가 안되는데 명예직으로 직분을 줘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뽑을 때 직분을 줄 때 교회안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즘처럼 사람들이 이동이 빈번하고 직장이니 건강이니 때문에 장기간 출타할 일이 많은 때에는 그가 실제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지를 따져서 해당 교회에서 판단하면 됩니다. 일단은 뽑을 때 조건입니다.

그리고 ‘너희 가운데’라는 말속에는 지금 현재 교회의 회원으로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교회원이 아니지만 직분을 받게 되면 교회에 들어온다는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신입 교인도 지양하는게 좋습니다. 적어도 일정한 기간 이상을 교회의 회원으로 있는 자를 뽑는게 교회의 일을 하는데 적합할 것입니다. 해당 교회에 적응도 안된이를 사회적인 명망이 있거나 돈이 많다고 뽑아버린다면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세례교인 이상이 참석하는 공동의회에서 투표를 하게 하는 제도는 상당한 일리가 있습니다.

 

또한 ‘너희 가운데’라는 말에는 ‘투표현장에 있는’ 이란 뜻도 있다고 봅니다. 간혹 투표현장에 없는 이가 너무 훌륭해서 그를 직분자로 뽑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가 현장에 없었음에도 뽑혔다면 그가 얼마나 훌륭한지를 충분히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투표현장에 없다고 하는 것은 그가 진정으로 그 직분을 원하지 않거나 또는 일부러 고사하기위해서 없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유에서던 하나님이 그를 참석지 못하게 하셨다고도 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투표현장에 없는 부재자를 선출하는 일은 지양하는게 좋습니다.

 

두 번째 조건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사실 문맥상으로 보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즉 ‘칭찬받는 사람’에 주안점을 두었는데
저는 이것을 분리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하고 좋은 평판을 얻고 이렇게.

 

교회의 일꾼이 제일 먼저 성령이 충만해야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일에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없이 어떤 일도 하지 말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하게 성령 충만이 제일 첫 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권력 충만이니 명예 충만이니 돈충만이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이 실질적인 첫 번째 조건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충만할 뿐만 아니라 지혜도 충만해야 합니다. 여기서 지혜는 세상적인 이치를 말합니다. 보다 정확히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진리를 잘 활용하는 지혜’를 말합니다. 무슨 일을 할 때 너무 몰라서도 안됩니다.

사람은 참 우직하고 성령이 충만한 것 같은데 일머리가 없다고 한다면 일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교회는 일할 사람을 뽑는 거지 자기들을 다스릴 자를 뽑는게 아닙니다. 명예를 가지고 대외적으로 교회를 대표할 사람을 뽑는게 아닙니다.

 

세 번째 조건은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원문상으로 보아서 ‘성령이 충만하다고 지혜가 있다고 증거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저는 이걸 독립시켜서 칭찬받는 사람을 세 번째 조건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야 당연히 칭찬받겠지만 외부인, 믿지 않는 이들에게서도 칭찬받는 이가 뽑혀야 한다는겁니다.

 

‘세상에 저런 사람이 교회의 장로라니!’ 이렇게 되면 안될겁니다. ‘저 사람이 천국간다면 나는 그런 천국 안갈란다!’ 이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요즘 보면 세상 법정에 서서 지은 죄로 말미암아 비난받고 조롱받는 이들 중에 교회의 직분을 맡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목사도 있고 장로도 있는데 그래서는 안된다는 거지요.

 

그건 하나님의 이름을 떨어뜨리고 세상으로 하여금 교회를 조롱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직분자는 세상에서도, 믿지 않는 이들에게서도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그를 아는 이로부터 ‘저런 사람이 믿는 예수를 나도 한번 믿어볼까’ ‘도대체 예수가 뭔데 저런 훌륭한 사람이 믿을 정도가 될까’라고 할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겁니다. 제가 욕심이 너무 과합니까?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어’ 입니까?

 

네 번째 조건이 ‘일곱사람’입니다. 꼭 일곱이라는 말이 아니라 여러명을 뽑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만일 한사람의 목사와 한사람의 장로나 집사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서로 의견이 다르면 일대일로 팽팽하게 맞서면 어쩔 겁니까? 또 소수에게만 교회 일을 맡겨두면 이는 소수에 의한 전횡이 일어나기 쉬울 겁니다. 또 소수에게 너무 많은 일을 맡겨서 과로로 쓰러지면 어쩔 겁니까? 그래서 저는 여러명의 직분자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공동체가 커지면 커질수록 일을 맡은 사람도 많아 져야 합니다. 권력의 집중이라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혼자서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있고 세상에 다시없이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는다해도 혼자서 돌볼 수 있는 이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일에 맞게 일꾼의 숫자도 늘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일을 적절하게 분배하고 너무 많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적지도 않게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일꾼들의 행복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아무리 교회의 일이 명예직이고 자발적인 일이라도 혼자서 너무 많은 일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과로로 잘못하면 실족할 수 있습니다.

저는 비교적 작은 교회에서 혼자서 너무 여러 가지 일을 열심히 하다가 힘들어서, 일할게 없는 큰교회로 옮기고 뒷자리에 앉아서 왔다 갔다만 하는 교인들을 여러명 보았습니다. 이걸 ‘번아웃’이라고 합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너무 과하게 일을 맡지 않도록 적절한 숫자를 뽑아서 일을 분담해야 합니다.

 

그래도 사람이 모자라면 일을 줄이면 됩니다. 너무 작은 교회에서 장황하게 조직만 벌여놓으면 그 일을 할 사람이 없어지고 그러다 보면 억지로 일을 맡게 해서 안좋은 결과를 초래할 수가 많습니다. 여기 일곱은 말 그대로 일곱명인데 일곱이란 숫자는 하나님의 수 3과 인간의 수 4를 더한 값으로 소위 우리들이 말하는 ‘행운의 수’이기도 하고 완전수로 생각되어 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수3과 인간의 수4를 곱한 12와도 비슷한 개념입니다.

‘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아니면 ‘에이 엉터리’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3.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리라
이렇게 사람을 뽑아서 일을 맡기고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도들이 전무하고자 하는 것은 먼저 기도하는 일과 다음으로 말씀사역입니다. 이것들이 가장 중요한데 그 중에서도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교회의 모든 일에는 기도가 먼저 이루어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없이는 어떤 일도 하기 어렵습니다. 인간적으로 이러이러하겠다고 생각해도 인간의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먼저 기도하고 해야 합니다. 기도는 만능이자 우리를 인도하는 등불이며 우리의 모든 일에 보장이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확신하기도 어렵기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아야 하고 이것을 가장 확실하게 담보할 수 있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연구하고 또 기도 중에서 계시를 받고 성령의 조명으로 말씀에 있는 뜻을 깨닫고 이렇게 말씀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 목사들에게 있어 이런 부분이 좀 아쉽습니다. 목사들이 기도와 말씀사역에 전무하지 않고 이런 저런 일들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행정업무와 봉사활동에도 그리고 기타의 많은 일에 관심이 분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다른 것은 여기 본문처럼 성도들에게 맡겨 두면 됩니다. 그러라고 뽑은 사람들입니다.

 

담임목사는 당회장입니다. 그래서 당회장으로서 이런저런 업무에 많이 관여를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일들에 사사건건 관여하게 된다면 목사에게 본연의 업무인 기도와 말씀 사역에 소흘해 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 인간적인 일에 관여하다 보면 영성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교회일에는 돈이 따르는 일이 많은데 돈을 밝히다가 영성을 해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제일 좋기는 현행 제도상 담임목사가 당회장이기는 하지만 이 당회장권은 가장 최소한으로 행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여러 일들에 너무 시시콜콜 관여하는게 좋지 못합니다.

물론 담임목사의 목회철학에 따라 여러 사업의 방향이 달라지고 교회의 평신도들은 목사의 목회철학을 반영해야 된다는 등의 그럴듯한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적인 행정학이니 경영학이나 처세술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합시다.

 

목사가 다른 일은 모른다 하고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만 전무하는 이것이 비록 비효율적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목사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무하는 것이 제일 좋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고 목사가 각종 봉사업무나 행정업무까지 관여하다가는 정말 억울하게 비난을 받을 수가 있고 교회 분열의 씨앗을 제공할 수 있으며 교인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사도들이 한 말을 보면 아마 문제의 ‘구제’는 사도들이 담당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구제자의 명단까지는 작성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냥 명단에 있는 대로 구제한 겁니다. 그러니 헬라파 사람들도 사도들이 아니라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한 것입니다.

속사정을 잘알기 때문에 그렇게 원망하는 이들의 불평이 사도가 아니라 실무자에게 간겁니다. 그러나 모르는 이가 봤다면 구제 문제로 사도들이 원망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약간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온 무리가 기쁨으로 뽑은 이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중에서 니골라 한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여섯명 모두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니골라는 아예 이방인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자입니다. 그러니까 이 일곱명의 지도자 중에는 히브리파 유대인이 한명도 없습니다.

 

이것은 정말 이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히브리파가 압도적으로 많을터인데도 이들이 선출한 사람들 중에서 히브리파가 아무도 없다는게 너무 이상하지 않나요?

혹 히브리파를 뽑아서는 안된다는 무언의 약속같은게 있었을까요? 소수인 헬라파만 있다면 이는 다수에 대한 역차별은 아닐까요?

 

그래서 제가 조심스럽게 가정해 봅니다. 아마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히브리파인 12사도들이 충분히 대변할 수 있기 때문에 선출된 일곱명의 일꾼은 원망을 제기한 헬라파와 한사람 유대교에 입문한 이방인으로 뽑은게 아닐까? 그러니까 교회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 히브리파인 다수파에서 양보한 것이 아닐까하는 겁니다.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는 합니다. 그냥 무작위로 뽑았는데 성령의 역사로 모두 비 히브리파가 뽑혔을 수도 있기는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로써 예루살렘 교회는 소수파까지 아우르는 더 공평하고 사려 깊은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성비율은 나중에 교회가 세계로 확산되는 준비단계로 보여 집니다. 물론 인간이 준비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준비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처럼 너무 많은 일을 혼자서 하려고 하거나 효율적인 인간적인 일머리가 아무래도 약한 목사가 일에 관여한다면 그렇게 지혜롭게 되지 않을 확률도 많습니다. 그럴바에야 아예 모든 행정업무나 시시콜콜한 교회의 잡무에서 한발 물러서서 교회의 영적인 지도를 위해 기도함으로 영성을 쌓고 말씀을 전하고 연구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자신의 지혜와 경험을 너무 과신해서 혼자서 무리하게 일을 지도하고 내 고집대로 하려고 하면 반드시 문제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목사는 그런 업무를 내려놓는게 좋습니다.

 

그렇게 되자 7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했다고 합니다.
가깝게는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했답니다.

 

그래요, 행정학이니 경영학이니 하는 학문은 인간 조종술을 배웁니다. 그러나 교회는 인간을 조종해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곳이 아니라 주의 성령이 역사하시는 영적인 공동체이며, 누가 누구를 조종하는게 아니라 서로서로 섬기며 희생하고 사랑하는 곳입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영성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역사하시는 곳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욕심을 조금 내려놓으면 됩니다. 당회가 서로 양보하고 섬기는 자세를 견지하면 됩니다. 성도들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직분을 맡은자가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일꾼이라는 자세로 임하면 됩니다.

그러면 멋진 교회가 되어서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될 것이며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제대로 감당하는 참 교회가 될 것이며 세상 사람들까지도 칭송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교인들을 위로하며 기쁘게 하며 사랑하는 가족같은 공동체가 될 것이며 나아가 운명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우는 교회도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기위해서 힘쓰고 서로 사랑하며 모든 지체들이 상처입지 않고 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그런 교회가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으로 덧붙여, 말씀을 ‘전하는 것’과 구제‘하는 것’에 쓰인 단어는 원어로 ‘디아콘’입니다. 그리고 두 곳에서 똑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말씀을 전하는자와 구제하는자가 사실은 동등하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물론 말씀과 구제 그리고 목사와 평신도가 다르기는 하지만 이는 기능상의 차이 즉 하는 일의 차이지 신분의 차이는 아닙니다. 목사를 우리가 우대하는 이유는 그가 영성을 더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가 담당하는 말씀 사역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혹여 잘못된 말씀을 전함으로 교회가 이단이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교육받고 검증받아야 하는 겁니다.
 
더구나 평신도들 사이 즉 장로 권사 집사들 사이에 우열을 나눈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목사와 장로와 권사와 집사는 그 맡은 기능에 따라 나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들이 합력하여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대한 이 세상의 교회를 구성하는 지체이며 함께 신앙의 길을 가는 동역자이며 각 개인들이 하나님과 통하는 성전입니다.

 

세리 출신의 마태가 내가 돈문제는 꽉 잡고 있다고 교회의 회계와 재정을 맡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사람 한사람 기둥같은 일꾼으로 잘 성장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본연의 목적을 잘 이루는 그런 교회가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8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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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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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나는 일꾼이었습니까? 자신이 없었습니다. 예전에 교회에서 제가 참 좋아하던 형이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매우 좋아했던 게 기억납니다. 저는 이번 설교를 올리면서, 신기한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자랑하는 운영 원리들, 행정, 경영, 심리, 효율 이런 쪽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라는 생각이 매우 강하게 들었습니다. 하기야, 인간적인 지혜가 대단하다고 해서, 그 끝이 오히려 교만 혹은 과신이 된다면, 건강까지 해칠 수 있는게 아닐까 걱정도 됩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때때로 우리가 곧바로 잘 알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예컨대 일본에서 매우 존경받는 어느 목사님의 경우, 교인수가 열명도 채 되지 않는 교회에서 신앙을 키워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그렇게 작은 교회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할 수 있는 일들을 조금 더 진지하고, 무겁고, 성실하게,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 충성된 모습을 보인다면 좋겠다 싶습니다. 하나님은 기억하시는 분이시라 믿습니다. 우리의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요. 살아가기란 얼마나 험난하고 고단한 일인가요.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얼마나 많던가요. 속상하고 억울할 일... 왜 하필... 등등 하지만 우리가 이겨내고, 다시 회복될 수 있기를 저는 기도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여전히 하나님을 노래하기를 소망합니다. 드디어 2018년에 메일 받았던 내용을 오늘에서야 다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2019년 메일 편을 업데이트를 하기 위해, 홍종일 목사님께 연락을 얼른 해야겠네요. 역대하32장을 비롯해서, 엄청나게 감동적인 명설교가 많이 또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현대에 와서 교회는 이토록 커졌기에, 사탄은 그게 너무나 싫기에, 영적 전쟁은 오늘도 치열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교회를 깨부시고 싶은, 비방은 넘쳐날 것입니다. 원래 가짜는 많고, 진짜는 귀중한 법입니다. 우리가 진짜 인생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진리 속에서 강건한 영혼으로 살아가며, 설사 세찬 파도가 덮쳐 배가 뒤집어진다 할지라도, 또 다시 일어나, 나는 선하게 살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렇게 외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2019. 11. 가을날에. 시북(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