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와 재판장 (누가복음18:1-8)
우리는 우리가 창세 전에 이미 선택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가 창세 전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택한 자로 정해졌다는 말을 믿어도 됩니까?
글쎄요, 우리는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도 어차피 좋은거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갑시다. 그런데 거꾸로 나쁜 것을 한번 예로 들어볼까요?
어떤 악인이 있다 합시다. 이 사람은 창세 전에 이미 악인으로 낙인이 찍혔다면 이 사람은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낙인이 찍혔고 이 낙인이 변하지 않을건데 실컷 재미나게 살다가 가는 거지 착하게 양심적으로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이건 좀 말이 안되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사람이 악하게 사는 것은 그럼 누구 책임이지요? 이 사람을 악인으로 만든 어떤 분의 책임은 아닐까요?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팔게 된 것이 하나님에 의해 정해졌다면 가룟 유다의 배신은 과연 나쁜 것일까요?
그가 하나님의 일을 위한 도구로 쓰임 받았다면 그의 잘못은 없는게 아닐는지. 오히려 그는 두고 두고 악명을 남기므로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위한 희생양으로 거룩한 순교의 제물로 기억되어야 하는게 아닐까요?
아, 어렵다. 그래요, 여러분 제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알고 있는데 이것이 왜 옳고 저것은 왜 그른지를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때 주일학교에 잘 다니던 친구가 교회의 선생님에게 질문한 말입니다. 제 얘기가 아닙니다. 아직도 이런 의문을 가진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꺼낸 이유는 이런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조금 다른 방면의 주제로 들어가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보고 꺼낸 겁니다.
제가 오늘 집중적으로 다루어 보고 싶은 것은 과연 하나님의 복주심이 아니 복을 주지 아니하려는 작정이 우리의 기도로 바뀔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조금 다르게 말해 볼까요? 누가 있습니다. 그가 이제 집을 사려고 하는데 부산에다 사야하는지 서울에다 사야하는지 아니면 저 어디 깊은 시골에다 집을 사야 하는지 우리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을까요?
정해 놓았다고요?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로 아니 누군가의 기도로 그게 바뀔 수 있나요? 아니면 정해 놓지 않았다고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작정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요?
우리가 생각을 하다보면 이런 저런 생각이 날 수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아, 예수만 믿으면 복받는줄 알았는데 무엇이 이렇게 복잡할까요?
우리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서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을 낸다면 그건 우리 인간의 이성이나 논리로 그럴듯하게 재구성된 ‘합리화’가 될 겁니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으로 골치를 앓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에 직면했을 때 과연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과부와 재판장에 관한 주님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래요, 주님은 이런 이야기에 비유를 들어서 설명하시지 명확하게 이렇다 저렇다 결론을 내리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하하, 자꾸 더 더 깊이 파고 드는 것은 신학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우리는 주님이 주신 이 말씀을 보통 인간의 생각으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참고로 오늘 본문은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다른 마태나 마가복음에서는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1절에 보면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며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들은 ‘제자들’입니다. 주님의 제자들, 보통의 사람들을 일컫는 ‘무리’가 아닙니다.
보통 주님의 가르침이 좀 어려우면 그건 대부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무리는 주님의 그런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이해했더라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럼 제자입니까? 그래요, 우리는 당당한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은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되는 겁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말은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기도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도 낙심하지 말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약간 뒤집어서 생각하면 기도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아니 그런 경우가 많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빨리 이루어지면 감사하고 그렇지 않아도 그게 특별히 뭔가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원래 그렇게 더디 이루어지므로 절대로 낙망하지 말고 계속 기도하라는 말이 되는 겁니다.
사실 본문은 앞장 17장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성도들은 인내하고 하늘 소망을 가지고 기도할 것을 권면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래요,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막 쌓아놓고 있을 정도의 복은 주시지 않아도 필요에 따라 적절히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은혜체험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본문의 비유가 가지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봅시다.
주님은 제자들이 환난과 핍박으로 낙망할 것이 걱정되신 겁니다. 그래서 기도도 하지 않고 될대로 되라고 포기할 것이 걱정된 겁니다. 그래서 낙망하지 말고 기도를 쉬지말라고 권면하시기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겁니다.
왜냐면 주께서 승천하신후에 반드시 핍박과 고난이 올 것이기 때문에 낙담할까 두려워한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영광과 현실 사이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시험이 있습니다. 이걸 통과하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의 복락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어 더 많은 시간을 광야에서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에만 참여하고자 하는 생각은 주님의 제자에게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저는 제자 안할래요” 그런데 그게 우리 마음대로 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더 성숙된 성도의 반열에 올리기를 원하십니다.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과하느냐 재수하느냐의 차이만 있지 이 시험을 회피하고 복은 안 받아도 되는 그런 선택지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기도로 운명이 바뀔 수 있느냐 아니냐에 대한 것’을 알려 주실 목적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신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우리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에는 어떤 답변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건 차차 알아 보고 우리는 본문을 따라 나가봅시다.
어떤 도시에 재판장이 있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두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사람을 무시한다. 참 곤란한 사람입니다.
재판이란건 하나님이 주신 권리로 사람의 권선징악을 실행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해야 할 책임이 있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자기가 맡은 재판에 신중히 접근하고 혹 억울한 일이나 잘못된 판결을 내리게 될까 봐 항상 조심하고 스스로 돌아보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하나님을 무시하게 되면 그 다음은 뻔합니다.
자기 멋대로 자기 마음대로 판결하게 됩니다. 왜냐면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불공평한 재판이 될 겁니다. 그리고 그 사회는 불의한 사회가 되고 맙니다. 재판의 기준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살인을 했는데 집행유예가 되었고 어떤 이는 돈 몇만원 정도의 물품을 훔쳤는데 징역이 10년이라면 이게 과연 제대로 된 판결일까요? 그러니까 재판의 기준은 정말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선악과 죄의 경중에 대한 관념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또 이상하게 힘있고 권세있는 사람은 또 두려워합니다. 여기 본문에 “사람을 무시하는”이란 말이 있는데 이 사람은 힘도 없고 돈도 없고 권위도 없는 안 유명한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비유를 들어 설명하던 그 시절은 유대가 로마의 속국이었던 시절입니다. 당연히 그 재판관은 로마에서 파견된 재판관일 것입니다. 왜냐면 이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방인이고 다신론적 사고를 가지고 있기에 속국의 수호신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에 패배한 무능한 신으로 여겼을 것 입니다.
당연하게도 로마의 관리가 속령의 백성을 존중할 리가 없습니다. 이건 비유이지만 예수님 당시의 시대상과 대입해 보면 이 재판관이 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을 무시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요즘 우리나라의 판사들도 힘없고 유명하지 않고 돈없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엄하게 판결하는 것 같습니다. 여하튼 이런 판사가 한 도시에 있었답니다.
또 한편으로는 한 과부가 그 도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 과부는 아마 매우 적극적이고 또 원한이 있었던 그런 과부였나 봅니다. 아마 이 과부는 적극적이지만 돈도 없고 힘도 없고 유명하지도 않았던 모양입니다. 왜냐면 ‘과부’라는 말이 벌써 유대에서 가장 가난하고 힘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대변해 주기 때문입니다.
옛날 성경에서 가장 가난한 자를 들 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할 때의 그 과부입니다. 전혀 부자가 아닙니다. 당연하게도 재판관에게 자기의 소원을 빌 재물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남편이 없어요? 그래서 부자가 될 수도 없고 이 과부는 자식이 없거나 아직 어리거나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직접 재판관을 찾아와서 원한을 풀어 달라고 간청하지요.
원어의 쓰임새를 보면 이 여자는 계속해서 재판관을 찾아가서 자기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아직도 해결되지 않아서 계속해서 지금도 찾아가서 간청한다는 그런 느낌입니다.
그녀가 그렇게도 원한을 풀어 달라고 요청한 이유는 당연히 원한을 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원이 너무나 간절했기에 끊임없이 그리고 자주 계속해서 찾아가서 간청한 것입니다. 그녀는 재판관에게 공정한 판결을 바라는 것 외에는 어떤 복수의 수단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때요? 하나님 외에 우리가 원한을 풀고 소원을 이루고 복을 받을 수단이 있습니까? 우리도 역시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온전히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기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라는 소원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과부처럼 끊임없이 자주 계속해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들어 줄려면 주고 말려면 말고 마음대로 하세요’ 식으로는 안됩니다.
왜냐면 답답한 사람이 우물판다고 답답한 쪽은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전혀 겁먹지 않습니다. 답답할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매달릴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여기 본문에 과부가 재판관에게 “원한을 풀어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원문으로 보면 이런 뜻도 있지만 더 정확하게는 “재판을 집행해 주소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뇌물에 의해서 판결을 굽게 하지 말고 공정한 재판을 받게 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재판이 공정하기만 하면 나의 원한은 반드시 풀린다고 믿습니다. 그만큼 내가 잘못한게 없고 억울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불법을 저지른 부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린 판사를 비난하지요? 마찬가지로 성경은 불법을 저지른 가난한 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린 판사도 비난해야 합니다. 성경은 판사가 가난하나도 해서 일방적으로 유리한 판결을내리지도 말 것을 당부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경은 판사가 진리의 편에서 판결할 것을 요구합니다. 부자고 가난한 자고를 떠나서 공평하게 재판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 과부 역시 자기에게 유리하게 판결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재판이 아닌 정당한 재판을 요구하는 것이지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과부의 간청은 전혀 잘못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기도를 재판에 대한 청구로 비유했으니까 기도에 이 비유를 적용시킨다면 우리가 기도할 때 끈질기에 낙담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당연하게도 불법적인 이익을 위한 기도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 비유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혀 일하지 않고 남의 실수나 오판으로 큰 이익을 보게 해 달라는 기도가 응답을 받을까요?
이런거, 저 땅이 한평에 백만원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저 사람이 갑자기 마음에 변덕이 와서 한평에 십만원에 저에게 팔 도록 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그게 제대로 된 기도일까요? 당연히 아니지요.
시험을 형편없이 쳤습니다. 제대로 매기면 점수가 매우 낮을 겁니다. 낙제점이지요. 그런데 저 사람의, 채점자의 눈을 어둡게 해서 저 사람이 착각하게 해서 제가 높은 점수로 합격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은 안된다는 말입니다. 다만 제가 열심히 공부한 것을 제가 제대로 기억하고 잘 판단해서 실수가 없도록 해 달라고 기도한다면 아마 하나님이 들어 주시지 않을까요?
정당하게 제 실력이 평가받을 수 있도록 제 노력이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제가 노력한 것을 제가 먹을 수 있도록 이런 식으로 기도해야 기도가 이루어 진다는 말입니다. 과부는 재판관에게 자기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려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정단한 공정한 판결만을 요구합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정당한 공의가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약간 다르게 생각합니다. 남에게 피해가 가고 약간은 부당해도 나만 잘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은연중에 많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공의를 실현하시는 분이시지 나에게만 부당한 이익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악을 싫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기도에서도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도록 해 달라는 그런 기도가 응답받습니다. 아니 그런 기도를 우리가 하기를 원하십니다.
4절에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실제로 이 재판관은 얼마 동안만 안 듣고 그 다음에 들어 준게 아닙니다. 이 재판관은 아무런 이득도 없는 과부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재판을 진행할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 동안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 동안 이 재판관을 과부가 찾아가서 제발 재판을 집행해 달라고 요청한 겁니다. 재판만 제대로 되면 당연히 승리할거니까 뇌물을 받아 판결을 굽게하거나, 권력자에 의해서 판결이 왜곡되는 것이 아니라면 정당한 재판이라면 당연히 승리할거니까 정당한 재판을 진행해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5절에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재판관은 이 과부가 자신을 너무 번거롭게 하므로 이런 괴로움에서 벗어 나려는 단순한 목적으로 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줄 재판을 진행할 마음을 먹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괴롭게 했으면 얼마나 자주 찾아와서 괴롭게 했으면 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이방의 재판관이 이 과부의 간청을 들어줄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괴롭게 하리라’는 말의 뜻은 ‘때려 멍들게 하다’입니다. 실제로 과부가 재판관을 때려서 멍을 들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과부가 너무 자주 자신에게 간청하고 이를 거절했을 때에 불쌍한 과부를 능멸했다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될까 봐서 이를 막으려고 과부의 요청에 의해서 재판을 진행할 마음을 먹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위해서 어떤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산증거를 보이시기 위해 아무개의 기도를 이용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 아무리 그에게 빌어도 결코 복을 주지 않고 오히려 패가망신하는 걸 봐라” 같은 오명을 뒤집어 쓰지 않기 위해서 성도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비유에 빗대어서 설명한다면 그렇다는 겁니다.
이 재판관은 정의실현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이 여자가 괴롭히는 것으로부터 놓여나고 싶어서 재판을 진행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7절에 주께서 말씀하신 참 주제가 나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불의한 재판장도 힘없는 과부가 계속 졸라대니까 그게 귀찮아서 괴로워서 과부의 간청을 들어 주지요? 그런데 의로우신 하나님이 자녀들의 기도와 간구를 왜 안들어 주시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재판장하고 과부하고는 전혀 아무런 사이가 아닙니다. 다만 그 재판장의 관할하에 사는 백성?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특별히 사랑하는 자녀들입니다. 당연히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실겁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당연히 그 자녀들의 기도를 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자녀들이 과부처럼 그렇게 끈질기게 간절하게 매달렸는지는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억울한 원한을 풀어 준다는 거지, 이미 입은 피해를 갚아 준다는 거지 공격적으로 뭔가를 해주신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 주여! 제가 로또 일둥에 당첨되면 제가 예배당을 하나 지어 드리겠습니다. 아니면 선물시장에서 대박을 치면 제가 선교를 위해 거액을 기부하겠습니다 같은 기도하고는 달라야 합니다. 그런건 하나님이 들어 주실지 안들어 주실지 여기에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겁니다.
더구나 내가 계속 끈질기고 간절하게 기도해서 남에게 갈 복을 빼앗아 온다는 개념은 절대로 성립될 수 없습니다. 정욕대로 구하는 기도는 들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의 말씀이 상당히 찝찝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뭔가 앞뒤가 안맞는 것 같지요? 원한을 속히 풀어준다는 것 하고 믿음을 보는거 하고 뭔가 상관이 있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아무리 어려움이 닥쳐도 낙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고 소망하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냥 관념적으로 믿는다 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성도로서 확실하게 행동하는 그런 믿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도를 따르는 삶을 사는 그런 믿음, 끈질기게 기도하는 그런 믿음을 말합니다. 시련과 환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며 소망을 두는 그런 믿음을 말합니다.
그런 믿음을 말세에 보겠느냐는 말이지요? 요즘 보면 우리나라에도 그렇고 명목상 교인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한국에서 내노라 하는 목사들과 교회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저들은 다 가짜입니다. 음, 좀 심했네요. 죄송합니다. 대부분으로 수정합니다. 저들중에 그래도 몇 명은 참 신자 성도가 있을 수 있겠지요.
여하튼 언론에 나오는 저런 것들은 정말 우리 주님이 말씀처럼 진짜로 실천적인 믿음을 가진이들이 아닙니다. 800억이니 270억이니 하는 저들은 정말 교회를 기업으로 만든 사탄의 자식들입니다. 십여명의 여인들을 어떻게 한 저들은 색마입니다. 이중첩자? 교회 안에 침투해서 요직을 맡아서 지속적으로 안에서 교회를 붕괴시키는데 일조하는 간첩?
하하, 또 과격해 졌네요. 그래요, 정말 하나님의 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도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서 육신의 벌도 받겠지만 최소한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양심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조금만 어렵거나 남들보다 잘되지 못하면 하나님이 없다하고 세상으로 내빼는 이들이많습니다. 이들을 보고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음, 제가 이 구절을 보고 말장난을 한번 해볼까요? 그래요, 주님 세상에서 참된 믿음을 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주님의 몸된 교회안에는 참된 믿음들이 많을 겁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이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안에 있는 성도들은 세상과 달리 참된 믿음을 주님께 내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참기만하라니까 너무 막막합니까?
아닙니다. 주께서 이미 비유로 우리의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답하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혹시 싶어서 말씀드립니다. “그들에게 오래참으시겠느냐”는 말씀에서 그들은 누구를 말합니까?
여러 설이 있지만 본문을 잘 보시면 이 문장에서 주어는 한 개입니다.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소망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이대로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영광스런 이름을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복주시고 영광으로 옷 입히실 것입니다.
그걸 믿고 변함없이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에게 기도하고 믿음으로 주의 길을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산증거가 될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와 권능을 행하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택한자로 일컬어 질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기도한 여러 성도들은 공개리에 하니님의 영광을 증거하게 될 것이며 한낮의 태양처럼 모든이들이 그 증거를 똑똑히 보게 될 것입니다. 낙망하지 말고 더 인내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영광된 승리를 얻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또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8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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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하나님께 매달리면 하나님께서 지켜봐 주시고, 돌봐주신다는 이야기... 그래서 어쩌면 다행이고, 어쩌면 감사하며, 또한 특별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잠깐 언급한다면, 하나님의 계획은 때로는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인내, 혹은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은 오늘 통화에서 웃으시면서 2019년 설교들도 잔뜩 있으니 매일 마음껏 하나씩 올려보라고 권해주셨습니다. 요즘 교회에서는 왕들의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는데, 아니 글쎄 히스기야 같은 훌륭한 왕은 드물다는 게 참 인상적이었어요. 오늘날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신앙을 가지려는 사람은 드문게 아닐까 싶기도 했네요. 그래서, 예수 믿고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십자가를 메고, 어려운 길을 선택하고, 하지만 그것이 세상을, 이웃을 밝게 만든다면, 그 정직함이 얼마나 사소하지만 위대한 일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 더 적극적으로 간구하며, 또 행동 역시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그런 호흡이 살아 있는, 멋진 크리스천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19. 가을에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