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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와 이 그리고 파리(출애굽기8:16-25)/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9. 10. 21. 07:38

개구리와 이 그리고 파리 (출애굽기8:16-25)

 

오늘은 신약을 떠나서 구약으로 그것도 출애굽기, 구약 중에서도 아주 옛날로 돌아가려 합니다. 이 본문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애굽에 재앙을 내리시는 본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 정확히 한 개의 패턴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재앙을 내려도 그냥 내리는게 아니라 독특한 흐름의 방식이 보입니다. 우리는 그걸 살펴볼 겁니다.

 

그러나 재앙의 흐름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 기사에서 전혀 말하고 있지 않은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또다른 메시지를 발견할 겁니다. 과연 하나님은 애굽에 내리는 재앙을 통하여서 과연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요?

우리가 세상에서 치열하게 삶을 살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에는 신경을 덜 쓴다는 사실을 혹시 아십니까? 그게 뭐냐면 하나님에 대한 공경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말에 대한 무거움입니다.

 

한자를 보면 믿을 신자가 어떻게 쓰였습니까? 信이란 말에는 ‘인간의 말’이란 뜻이 있습니다. 왜냐면 처음 우리 인간의 말은 믿을 수 있다고 그리고 반드시 믿게 해야 할 만큼 말을 무겁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걸 굳이 거짓말이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우리 인간들은 언젠가부터 말을 함부로 하는 경향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니까 농담이니 조크니 하는 게 아니라 예의상 지나가는말로 또는 해도 안지킨다는 것을 상대방도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로 그러니까 입술 서비스를 하는 이들이 정말 많아 졌습니다. 그때그때만 생각하고 이 말을 함으로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에 전혀 유의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잘 쓰는 말이 있습니다. “언제 밥 한번 합시다”  “다음에 술 한잔 하자” “한번 초대할게” 반대로 “한번 갈게” 이런 식의 말들은 우리도 이제는 안 믿습니다. 그냥 입술 서비스고 그냥 하는 말이지. 그래요, 인간의 말은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그럼 인간의 입은 단순히 뭘 먹는데에 만 사용되는 기관입니까?

 

우리가 입으로 떠드는 말은 단순히 공기를 울리는 소음에 불과합니까? 과연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지으셨나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말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 한 말은 반드시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과 달라서 자기의 말도 변개치 않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린 서원과 약속도 잊지 않고 이루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출애굽 시의 열 가지 재앙 중에서 세 번째와 네 번째 재앙이 나옵니다.
출애굽 시의 열 가지 재앙 중에서 제일 첫 번째 재앙은 무엇입니까? 물이 피가 되게 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몰라도 이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개구리가 땅으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요, 그러면 세 번째 재앙은 무엇입니까? 티끌이 이가 되는 재앙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예, 파리가 애굽땅에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1.두번째와 세 번째 재앙의 차이

 

그런데 두 번째 재앙하고 세 번째 재앙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합니다. 뭔가 같은 재앙이라고 하기에는 좀 다릅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만든게 무엇일까요?

 

하하, 재앙사이의 차이도 모르겠는데 차이를 만든 이유까지 알아야 됩니까? 뭐 몰라도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알게 되면 이 가운데 하나님이 묵시적으로 말씀하시는 놀라운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영적인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물론 신경을 조금만 쓰게 되면 누구나 알 수 있도록 감추신 그런 원리입니다.

 

첫 번째 재앙을 잘 살펴보면 물이 피로 변하는 겁니다. 물을 마시지 못해서 괴롭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에 직접적인 공격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재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집이고 이불이고 개구리가 튀어나오고 버글대기 때문에 징그럽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시끄럽기도 합니다.

 

개골개골 울어대는데 편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개구리가 사람의 몸을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개구리들이 수백만 수천만 마리가 인간을 공격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마 끔직한 일이 일어날 겁니다. 게다가 개구리들이 펄쩍 펄쩍 뛰어다니니까 보통 힘든게 아닙니다.

그런데 이 개구리가 직접적으로 사람을 물고 뜯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재앙부터 재앙의 양상이 달라집니다. 단순히 위협하고 귀찮고 힘들고의 상태를 넘어서서 이제는 직접적으로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재앙으로 생긴 곤충, 벌레 여하튼 그런 것들이 사람을 공격합니다.

티끌이 이가 되었답니다. 사람과 가축에게 올랐답니다. 앞의 두 재앙, 물이 피가 되고 개구리가 물에서 생겨 땅으로 올라오는 재앙은 애굽의 요술사들이 흉내라도 내었지만 이 재앙은 도저히 따라하지 못했고 요술사들이 스스로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가 참 간지럽지요? 그래서 더럽고 힘들지요?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가 좀 많다고 해서 성가시고 그렇지만 이게 사람을 죽이는 그런 고통을 주는 건 아닙니다. 그렇지 않나요?

 

우리가 생각하는 이는 그런 정도입니다. 뭐 옛날 사람들이나, 요즘에도 머리를 제대로 감지 않으면 생기는 이는 성가시고 귀찮지 무섭거나 사람을 죽음에 이를만큼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습니다. 이게 우리가 이에 대해 가지는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우리가 틀렸습니다. 성경은 이를 조금 더 심각하게 말합니다.

 

원문은 단순한 ‘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게 왜 이로 번역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이건 ‘이’가 아니라 각다귀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각다귀? 모기 비슷하게 생겨서 사람들과 가축의 피를 빨아 먹고 사는 벌레입니다. 날아다니면서 쏘고 피를 빠는 겁니다. 얼마나 괴로울까요?

 

각다귀는 개구리와 달리 직접적으로 사람과 가축을 공격하는 재앙입니다. 하나님은 이제까지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은 그러나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보임으로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게 하려는 식의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재앙들도 충분히 굉장한 재앙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살 수가 없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각다귀 떼가 창궐해서 애굽의 사람들과 가축을 공격하고 피를 빠는 단계가 되었습니다. 각다귀 떼가 밤낮없이 달려든다면 엄청나게 괴롭습니다. 더구나 모기처럼 그냥 피만 빠는 것이 아니라 각다귀 떼는 더 독하고 아프기까지 하며 머리털에 콧구멍에 귓구멍에 까지 들어갑니다. 숨쉴 때마다 각다귀 떼가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건 지옥입니다. 이전의 개구리가 튀어나와서 바글거리는 것하고는 차원을 달리하는 재앙입니다.

 

2.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이 두가지 재앙 사이에 도데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재앙의 격을 달리하게 되셨을까요?
단지 귀찮고 징그럽고 애로가 있다는 것하고 괴롭고 고통스러워서 죽을 수도 있다고 느끼는 재앙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왜냐면 이 사이에 바로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했고 거짓으로 우롱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재앙의 강도를 무지막지하게 높이신 겁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괘씸죄가 추가된 겁니다.

 

8:8에 보면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르되 여호와께 구하여 나와 내 백성에게서 개구리를 떠나게 하라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 그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것이니라”
개구리만 떠나게 해 준다면 백성을 보내겠다고 그들이 여호와께 제사를 지낼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 합니다. 개구리를 몰아내 달라고.

 

물론 우리 하나님은 이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고 해도 거짓말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우롱하고 방해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것들에게 정말 내가 천지의 하나님인 것을 보여야겠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나의 사역자로 하여금 더 이상 우롱을 당하지 않도록 힘을 실어 주어야겠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재앙의 수준이 달라지는 겁니다.

 

바로는 거짓된 교리에 속아서 자기도 신인양 건방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자기의 요술사들이 하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재앙이 그에게 닥친 겁니다. 그의 완악함과 교만으로 말미암아 애굽은 망해버렸습니다. 신하들이 얘기하쟎아요. “왕은 애굽이 망한줄을 알지 못하십니까”

 

화장실 들어갈 때하고 나올 때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런 식으로 굴었다가는 하나님의 큰 징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항상 겸비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낮추고 그의 명령을 준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참 아들 목사 만들겠다고 한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이 이해하실 겁니다. 아직 어린아이의 일생을 부모가 대신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 자기 입으로 주의 종이 될 것이라고 서약하지 않으면 그건 효력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으로부터 부모가 주의 정도 받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조심해라”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 또는 “어이그, 정신차려” 정도의 책망은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자기 입으로 하나님께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약속은 절대로 무효로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약속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그 약속을 이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책망 하실 겁니다. 그러니 그 전에 약속을 이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는 개구리를 치워주면 백성들을 보내주겠다고 약속만 한게 아닙니다. 이 바로의 약속대로 하나님이 개구리를 치워주는 일을 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짜가 없다”

 

이건 하나님이 공짜로 뭔가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이 공짜로 일을 시키지 않고 반드시 댓가를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거꾸로 뒤집어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뭔가를 해 주셨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댓가를 요구하실 권리가 있다는 말도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댓가는 인간처럼 돈이니 먹을 것 같은게 아닙니다. 뭘까요? 자기의 명령을 준행하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고 바르고 착하게 살고...뭐 지키면 결국 우리가 잘되는 그런 댓가를 요구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멍에는 사실 멍에도 아닙니다. 복으로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그걸 메고 그의 인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결국 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 한 약속에 대해서 우리가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요즘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너무 ‘사랑의 하나님’만 강조해서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무조건 용서한다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사랑입니다. 시간을 준다는 의미에서 사랑인 것 이지 아무런 벌도 받지 않고 그냥 잘 살게 해 준다는 의미의 사랑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은 엄청나게 무섭고 엄격하고 엄위하신 분입니다. 그는 위엄이 넘치고 거대하고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너무나 밝고 깨끗하고 의롭기 때문에 죄인들이 그 앞에 도저히 설 수 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죄인의 몸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으므로 죽는다고 여긴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의도적으로든지 아니면 모르고 그랬든지 우리가 잘못하면 하나님이 벌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외면합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그 회개에 수반되는 벌칙이 모두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견딜 수 있도록 형벌이 경감될 수는 있겠지요. 정말 잘하면 집행유예도 있을 겁니다. 내가 한번만 봐준다. 그 기간 안에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가중처벌 받는다는 그런.

 

인간의 방식으로 이야기 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다루실지는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이지 우리가 마음대로 그를 사랑의 하나님으로 용서의 하나님으로 만들어 항상 웃는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의 하나님이 아니란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자기의 자녀도 그럴진대 하물며 하나님의 대적 주제에 하나님을 우롱하려고 했다면 더 가중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각다귀 떼들이 직접적으로 애굽인들과 가축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3.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애굽의 바로 같은 사람을 보면 대부분 마음이 정말 완악합니다. 그래서 우리말로 매를 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용서와 자비를 구해도 들어 주실지 모르는데 아예 더 완악해져서 뻗대다가 한 대 맞을 것 두 대 맞고 두 대 맞고 끝날 것을 열대 맞고 패가망신하는 사태까지 가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잘못한 것 이상으로 벌을 주시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중처벌을 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냐면 하나님은 죄인의 마음을 그대로 두셔서 완악함을 더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조금도 뉘우치거나 겁을 먹어 자제하지 않고 더 더 못된 짓을 하도록 버려 두시는 겁니다. 그 이유는 실컷 때려서 박살을 내 버리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9절에 보면 “요술사가 바로에게 말하되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 하였으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마음을 완악하게 버려두시어 그에게 합법적으로 더 심한 벌을 주시려고 하신겁니다. 참고로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이 원래 착하고 여렸는데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게 아닙니다. 그가 원래부터 완악했는데 그가 착해지도록 강제하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버려두었다는 말입니다.

 

“네 멋대로 해라” 그러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우리가 지는 것입니다.

 

4.악인에게도 기회는 주신다

 

이렇게 각다귀떼에게 큰 고통을 당하게 하신 후에 하나님은 다시 바로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바로 앞에 서라 그가 물 있는 곳으로 나오리니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네가 만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이처럼 하나님은 악인에게도 회개하고 마음을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악인에게조차 긍휼을 베푸신다는 거지요.

악인에게 긍휼을 베푼다고 해서 그들이 죄를 지어도 안락한 삶을 살도록 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킬 기회를 준다는 말이고 재앙을 피할 기회를 준다는 말입니다.

 

자, 네 번째 재앙이 여기에서 선포됩니다. “내가 너와 너의 신하와 너의 백성과 너의 집들에게 파리 떼를 보내리니 애굽 사람의 집집에 파리 떼가 가득할 것이며 그들이 사는 땅에도 그러하리라”

여러분, 너무 우습습니까? 그렇게 큰소리를 치고는 겨우 파리떼를 보낸다고요? 각다귀떼도 견뎠는데 파리가 날아다녀 봐야 그게 그거지, 열대 지역에서 파리가 어제오늘일 도 아니고 별거 아닌 것 같습니까?

 

그런데 여기 파리는 그런 일반적인 우리가 생각하는 파리가 아닙니다. 기껏 보기에 위생적이지 못하고 귀찮은 수준의 파리가 아닙니다. 여기 파리는 ‘개파리’라고 합니다.

 

이 파리는 피를 빨아 먹고 삽니다. 그리고 병을 옮깁니다. 그래서 각다귀 떼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골치 아픈 재앙적인 존재입니다. 그런 파리가 애굽 온 땅에 가득하게 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짐승들의 피도 빨고 사람들의 피도 빨고 그냥 피만 빨고 마는게 아닙니다. 병균까지 옮기는 겁니다. 이제 재앙은 전염까지 시켜서 확대 재생산이 되도록 확대되었습니다. 갈수록 태산이 된 겁니다.

 

네가 이래도 내가 우습냐? 우리 하나님께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하나님이 우습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고 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당하고서 ‘앗,뜨거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되기 전에 미리 알아서 조심해야 합니다.

 

이 ‘파리의 주’가 바로 바알세불입니다. 바알세붑이라고도 하지요. 엘리사 선지시대에는 바알세붑에게 병이 낫겠는지 물으러 갔던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가 엘리사 선지자의 저주를 받는 대목도 나옵니다. 이 파리가 병을 옮기니까 사람들은 파리의 주인 바알세불을 섬기는 겁니다. 물론 파리가 병을 거두어 가지는 못합니다. 전염은 시키지요. 그래서 바알세불은 무섭습니다. 전혀 자비를 베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를 베풉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면 ‘어이그’ 하면서 봐주십니다. ‘앞으로 잘해라 쯔쯔’ 정도에다 약간의 훈계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에도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정하신 때까지 우리를 참아 주시는 것이지 무한정으로 참아 주시지는 않습니다. 만일 무한정 참는다면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벌을 받지 않는다면 그 악인의 횡포로 인해 선량한 다수의 사람들은 보호받지 못하고 위험에 무한정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잘쓰는 말이 있습니다. 天網恢恢疏而不失.
하늘의 그물은 성긴 것 같아도 빠뜨리는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천벌이 없다고 태평치고 나쁜 짓을 하다보면 다 보응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십시다. 하나님은 바로의 거짓말, 하나님에 대한 공경심이 없음에 대해 화를 내시고 벌을 내리시고 더 큰 벌을 내리기 전에 또 한번 회개하고 그 벌에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이 정도면 하나님의 자비는 정말 굉장한 것입니다. 그 인내도 인간의 인내와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벌은 악인을 징치하게 되어 있습니다. 악인이 자기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한.

 

5. 구별하신다

 

우리가 애굽에 내린 재앙을 잘 보면 이 재앙이 애굽인들에게만 내린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차피 애굽인들하고 히브리인들이 같이 산다면 그 고통은 히브리인이 당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본문에 없어서 제가 강경하게 주장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문맥을 잘 살펴보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의 재앙은 히브리인도 어느 정도는 당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재앙의 범위를 ‘구별하셨다’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다고 같이 당했다고 말하기도 곤란한게 ‘구별’이란 단어는 없지만 개구리 재앙에서 “네 궁과...네 신하의 집과 네 백성과”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로의 백성에 들어가는지는 솔직히 뭐라고 말하기 어렵네요.

 

그러나 나일강이 피로 변한 것에는 히브리인들도 어느 정도 고통을 받았을 것입니다. 상류에만 피가 되고 하류에서는 맑음을 회복했다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각다귀떼도 보면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어” 여기에 애굽 온 땅이라고 되어 있는데 고센땅도 애굽의 땅이니까 이들에게도 재앙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입니다만 확실하게 말하기는 곤란합니다.

 

그런데 네 번째 재앙에서 22절에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 이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내가 여호와인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

 

네 번째 재앙의 파리는 피를 빨아서 백성들을 괴롭힐 뿐만 아니라 병을 전염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고센 땅에는 파리떼가 침범치 못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지 못하고 하나님의 법으로 통치규범을 만들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악한 세력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피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혼자서만 착하고 고고하면 악당들이 결코 그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들과 같이 악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들의 죄가 탄로날까 봐서 그 착한이를 왕따를 시키고 누명을 뒤집어 씌워서 쫓아버릴려고 합니다.

 

저는 그래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재앙에서 다소 히브리인들이 그 재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살면서 애굽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지 못한 태만의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부터는 그 재앙의 강도가 너무 심하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보호하셨다고 봅니다. 놔뒀다가는 출애굽시에 애로가 너무 클 것이기에 하나님이 지키시려고 구별하셨다고 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별이란게 그런겁니다. 세상에서 구별하여 불러내어 만든 하나님의 택한 자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명목상의 교회가 세상과 전혀 구별되지 않고 세상의 풍조가 스며들어 있다면 세상이 징계를 받을 때 하나님의 징계를 같이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는 삶에서 세상과 구별되지 못했다면 그것 자체로 죄를 지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악한 사회시스템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악한 교회를 그대로 악하게 방치했다면 그 교회가 벌을 받을 때 함께 벌을 받는 것이 전혀 억울한게 아닙니다.

주변부터 하나님의 법을 지키게 단속하지 못한 것도 분명 죄이기 때문입니다. 따지고보면 하나님은 크고 거대한 뭔가를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에게 이미 주신 재능을 벗어난 뭔가 위대한 업적을 요구하시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이 나에게 뭔가 큰 것을 요구한다면 그건 하나님이 이미 우리의 몸에 그 재능을 주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은 나의 몸과 영혼을 따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 둘이 연합하여 이 세상에서의 나라고 하는 인물을 만드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재앙은 계속됩니다. 다섯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이어지고 결과는 역시나 하나님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바로가 아무리 악해도 그 재앙을 견디지는 못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권력이 세고 부하고 힘이 세도 신과 대항하여 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말세지말’을 당한 오늘날 인간이 갈수록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옅어지고 심지어 믿는 이들 조차도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마음이 많아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그의 계명을 준행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들의 마음만은 결코 흐트러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비록 잠시 하나님이 자기의 분노를 미루시고 징계를 연기 하셨지만 그는 인간이 아니므로 절대로 잊거나 자기의 약속을 어기거나 흐지부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일단 한번 분노를 쏟으시면 아무도 그의 진노를 피할 인생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쁘고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다가도 스스로를 문득 돌아보아 내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고 있는지 그의 앞에 경외심을 보이며 겸비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혹 그에게 한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게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거나 일컫게 만들지나 않았는지 살펴볼 일입니다.

 

제가 제일 처음 드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재앙기사에 정말 우리들에게 하고자하는 말씀을 숨겨 놓았다고. 그래서 아버지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며 그를 경외하는 자들이 그 메시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그래서 그가 주시는 보호와 상급을 받도록.

숨겨진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고 그에게 한 약속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바로는 눈앞의 재앙을 물리치기에 급급해서 하나님께 거짓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거짓이 공식적으로 드러나자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재앙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에게 노하신 것처럼 우리가 그를 기만하거나 우롱하더라도 그에게 거짓을 아뢰더라도 용서치 않고 징벌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랑의 하나님에 너무 안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천지의 주재요 우리의 창조자요 주관자이십니다. 그가 우리를 주관하시고 움직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면서도 그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서는 안될 것이요 그에 대한 순종과 겸손의 자세를 잃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참고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정도로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것 교만이지요, 인간이 하나님과 대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교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교만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그 인간에게 온갖 것들을 다 주셨습니다. 아름다움 선함 그리고 재주와 지능과 철학적 사고까지 모두 모두 주셨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주셨지요. 그런데 그만 그 자신감이 너무 흘러 넘쳐서 옛뱀의 꼬임에 넘어가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한 것이 실수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것도 우리 인간의 교만 때문입니다. 바로가 낭패를 당하고 애굽이 멸망하는 것도 교만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결코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기를 원하십니다. 내로다 하는 자존심과 교만한 맘을 버리고 하나님의 앞에서 겸손을 유지하세요. 그가 나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세요.

 

그리고 그가 나에게 주신 재능과 몸과 여건에 만족하고 감사하세요. 하나님은 감사하고 경외하며 순종하는 자에게 더 주실 것이며 더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세요. 부득이 지킬 수 없다면 하나님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세요. 혹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오만방자한 것이 있는지는 항상 살펴보며 주의하세요.

 

이번 한주도 하나님 안에서 겸비하며 그를 찬송하며 승리하는 한주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8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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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이번 이야기는 좀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몇 가지로 인상적인 대목을 정리하면, 인간이 아무리 똑똑해봐야 하나님 앞에서는 툭 치면 쓰러질 뿐이라는 것이지요. 게다가 하나님은 거짓말 하는 것을 진짜 싫어하는구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은 실천부터 시작하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약속한 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주일 예배를 귀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선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돌봐주신다는 믿음을 변치 않는 것입니다. 살아가다보면 좋은 날도 만나고, 어려운 날도 만나지만은....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주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믿고 계속해서 선함을 실천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때때로 실망해도, 또 나눠주고, 베풀고, 사랑을 주고...

 

사람들은 혹시 뒤통수를 친다지만, 하나님은 그러시지 않거든요. 잘하였도다 칭찬하시고, 자녀들에게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바르고, 건강하고,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응원하고 기도합니다. / 2019. 가을.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