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목수의 아들이라서(마가복음6:1-6)/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9. 11. 1. 04:18

목수의 아들이라서 (마가복음6:1-6)

 

예수님은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고 그 또한 목수이며 그의 형제들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는데 무슨 선지자냐고 말합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맞지요. 그는 마리아의 아들이고 아버지를 이어서 목수를 하고 있는게 맞습니다. 그러나 그는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은 우리와 함께 여기있지 아니하냐” 맞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 이름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요셉, 유다, 시몬 아마 이 이름은 유대인들에게는 엄청나게 흔했던 이름인 모양입니다. 예수님에게 누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고향사람들에게 시집간 모양입니다.

 

참고로 우리는 야고보와 요셉같은 이름을 가진 예수의 형제가 예수님의 형인지 동생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당시에 유대 말에는 형과 동생의 구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형제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예수님이 막내라고 말합니다. 개신교에서는 예수님이 형이라고, 맏이라고 그래서 목수를 하면서 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다고 말합니다. 뭐가 맞는 말인지는 각각 설이 무성합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맞는 말입니다. 이제까지는 그러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같이 자란 처지에 조금 신경쓰일겁니다. 전혀 신비스럽지 않거든요.

그런데 그건 예수님의 가족이 목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집안이 제사장이었다면 존경받는 랍비였다면 사두개인이었다면 이후의 전개가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촌인 세례 요한을 보세요. 사람들이 왜 그의 사역현장에 몰려 들었나요? 왜 그에게 세례를 받으러 사람들이 백장을 쳤나요? 그의 세례는 단순히 회개를 외치는 세례지 성령의 임재도 없었고 당연히 성령의 역사, 기적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든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고위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출생에 천사가 관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도 천사가 나타났는데요? 예, 그렇기는 하지만 예수의 아버지는 고위 제사장이 아니었거든요.

 

이렇게 보니까 고향에서도 충분히 선지자가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단 좋은 집안일 경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것은 좋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났을 경우입니다. 우리 주님이 지금 그렇습니다.
저들은 주님이 행하시는 능력에 놀라면서도, 주님이 말씀하시는 지혜에 놀라면서도 주님을 인정할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고향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신겁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의 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사렛같은 시골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이미 이스라엘이 여러조각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유대와 갈릴리는 대표적인 지역입니다. 유대인들은 갈릴리를 변방의 시골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고장이고 천시받는 지역이었으며 심지어 ‘이방의 갈릴리’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유대의 북쪽에는 사마리아가 있고 그 너머에 비로소 갈릴리가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혼혈족이었기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은 속된말로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 너머 갈릴리에 사는 사람들은 뭐 안봐도 뻔합니다. 그런데다 목수의 집안이라. 지역유지도 아닌 빈한한 집안 출신입니다.

 

결론적으로 나사렛 사람들은 주님을 모시고 신앙 생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린 겁니다. 그리고 자기 고장의 명예를 높일 수있는 기회도 놓친 겁니다. 그래서 결국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뇨?”의 고장으로 남은 겁니다.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받은 사건은 유명한 사건입니다. 예전에 사역 초기에 예수님은 고향에 방문했다가 하마터면 사람들에게 그것도 고향사람들에게 살해당할뻔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탈출하셨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향인데 왜 주님은 그 고향엘 다시 가셨을까요?

주석서에는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가셨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이건 인간적인 생각인데 사역 초기에 배척받았지만 이제 예수님의 명성은 이전과는 비할 바 없이 올라갔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 엄청나게 많은 상황에서 아마 금의환향의 의미도 있었으리라고 보여집니다.

 

너희들은 나를 목수의 아들로 무시했지만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셨다! 이제 보아라! 그런 의미도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지금은 갈릴리 사역기간 중입니다. 아마 마을을 거쳐서 가는 중에 나사렛도 있었을 것이고 나사렛만 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전에 비록 자기를 낭떠러지에서 밀어서 죽이려고 한 사람들 이지만 혹시라도 고향사람들 중에서라도 구원할 자가 있을까 싶어서 나사렛만을 뺄 수가 없어서 들른 것이라고 봅니다. 뭐 그러니까 주석서의 설명이 틀린건 아닙니다.

 

‘이래도 나를 배척하려느냐?’ 본문의 고향방문은 제2차 갈릴리 사역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으로는 마지막 고향방문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이제 이후로는 고향에 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까 고향사람들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 것인데 사람들은 정작 알지 못하고 그 아까운 기회를 헛되이 흘려보낸 겁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학생들 사이에서 심각한 그러나 매우 서글픈 우스개 소리가 유행했습니다. 뭐냐면 아버지가 목사면 성골이고 장로면 진골이고 그것도 아니라면 육두품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장로의 자식이 아니면 아무리 해도 안된다는 겁니다. 담임 초빙을 받기가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때는 그게 무슨말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그 말이 실감나고 있습니다.

 

사실 아버지가 거대교회의 목사라면 그 자체로 큰 혜택을 받은 겁니다. 그 이름값이 아들의 목회에 유무형으로 도움을 줍니다. 담임으로 초빙받기도 쉽습니다. 그런데 정말 황당하게도 아들이 오죽 못나서 갈데가 없었으면 직접 교회를 세습시키는지 정말 부끄럽고 또 황당한 일입니다. 물론 통합측 목사들이나 관계자들이 모두 썩은게 아니기 때문에 뭔가 의미있는 일도 일어나리라 보지만 솔직히 너무 부끄러운 짓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집니다.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교회의 이름을 조롱거리로 만들었습니다. 이게 무슨 기업도 아니고 자기네 사유물도 아닌데 세습이라니 어이가 없습니다. 기업은 상속할 때 세금이라도 내지 이건 뭐 교회라고 세금도 안내고...그리고 저의 목회에 큰 장애물을 만든 겁니다. 전도문을 막은 겁니다. 불신자에게 전도하면 내가 너 먹여 살리려고 교회갈 것 같냐는 말이 나올 형편입니다.

 

세습을 하고 세습에 찬동하고 그 교회가 좋다고 다니는 이 사람들은 솔직히 사탄의 종자들입니다. 한국교회를 죽이고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람하고 일면식도 없고 십원 한장 받은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사람의 욕심 때문에 전도에 큰 손해를 보고 있습니다.
한때 한국이 고도성장기일 때 교회가 세상의 등불이고 동경의 대상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도 없고 돈만 아는 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같아서 길에 뿌리워 밟힐 뿐입니다.

 

사람들이 목사를 더 우습게 알고 교회를 더 우습게 알고 덩달아 하나님의 이름을 우습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껏 하나님의 이름과 교회의 이름과 목사의 이름값이 참 많이 떨어졌는데 아직도 더 떨어질 곳이 남았다는게 신기할 지경입니다.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바로잡으실까요? 아니면 우리가 바로잡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일까요?

 

1절에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여기 보면 ‘떠나사’ ‘가시니’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건 이동의 개념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단어인데 전도하러 마음에 들어갔다가 또 떠나오고 하는 과정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주님이 고향으로 쉬러 간게 아닙니다. 전도 여행 중에 나사렛으로 전도하러 가신 거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이 제자가 되려고 온 요한과 야고보에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잖아요. 이 말은 집이 없다. 회당이 없다는 말이지만 그래서 대신에 그는 어디든 마음대로 가실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 주님은 온 갈릴리를 자신의 교구로 삼아서 이곳저곳으로 다니시는 겁니다. 일정한 거처가 없으니까 오히려 더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겁니다.

 

다음으로 ‘따르다’는 말은 옛날 성경에는 ‘좇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다 더 길게 설명한다면 이 말은 ‘함께 같은 길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도 역시 예수의 사역을 설명할 때 많이 쓰였던 대표적인 단어입니다. 제자들은 스승을 따라 다니고 그와 같은 길위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수의 제자를 자처하는 오늘 우리에게도 변함없이 적용되는 말입니다. 아니 적용되어야 하는 말입니다.

 

주님은 집도 회당도 없이 길을 다니시면서 전도하셨는데 호화롭고 거대한 회당에 비싼 아파트에 뭐하자는 말인지 모이면 자동차 자랑하고 교인이 몇 명인지 서로 비교하고 우리의 표상이신 주님은 가난과 청빈을 강조하셨고 자기를 위하여는 돌로 빵도 만들지 않으셨던 분인데 우리는 이것도 내거 저것도 내거 모두다 내거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거를 가지고 주의 일에 유익을 주는게 아니라 나만을 위하고 주님의 교회는 오히려 망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지금 주님의 제자를 자처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절대로 우리는 주님의 제자를 자처할 수 없습니다. 아니 해서는 안됩니다.

또 하나 1절 하반절에 “제자들도 따르니라”는 말은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그를 좇고 있다”는 뜻인데 주님이 제자들이 주님을 따른다는 것을 여실히 나타내려고 일부러 이렇게 기술한 것입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는 오늘 우리들은 과연 주님의 제자입니까? 주의 제자를 자처한다면 그가 가신 길을 따르고 있나요? 어떻습니까?

 

2절에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주님이나 전통적인 유대인이나 모두 안식일을 지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유대교가 아닌 새로운 종교를 창설하시려고 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유대인들이 먼저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먼저 우선권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거부합니다. 왜냐면 그가 목수 출신이기 때문이고 이방의 갈릴리 출신이기 때문이며 전통적인 랍비의 문하에서 학문을 쌓은 이도 아니고 사두개인도아니고 심지어 바리새인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두개인이 유대의 종교귀족을 의미한다면 바리새인은 인정받은 율법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뭐 굳이 따진다면 중산층? 그러므로 예수님보다 훨씬 출신이 좋습니다. 예수의 말씀에 따르기는 체면이 문젭니까?

 

그런데 여기 회당은 유대인들이 교리를 가르치던 곳으로 원뜻은 ‘함께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여기서 회당장의 허락만 얻는다면 가르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생각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개인회당이나 집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각지에서 주로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안식일을 맞이해서 회당에 전통적으로 오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주님은 먼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가르치다는 말은 교회의 사역가운데 중요한 세가지 사역중에 하나입니다. 가르치고 전파하고 고치고의 세가지 사역중에 하나입니다. 보다 원문을 정확히 번역하면 ‘가르치기를 시작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르치기를 시작하자 이를 듣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그 지혜의 말씀에 깜짝 놀란겁니다. 깜짝 놀라서 압도되고 그래서 충격을 받은 겁니다. 분명히 목수의 자식이며 스스로도 목수인데 어떻게 저런 지혜롭고 권위있는 말씀을 전할 수 있느냐라고 생각해서 깜짝 놀란 겁니다.

 

목수의 자식은 설교를 잘하면 안됩니까? 목수의 자식은 지혜있는 말씀을 하면 안됩니까? 그의 말씀은 능력과 권위를 가지는데 그는 정작 목수입니다.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놀란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도 잘할 뿐만 아니라 능력까지 행했던 모양입니다.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라고 하고 있으니까 아마 당시에 주님은 말씀을 가리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기적도 행하셨던 모양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배척합니다. 놀랍고 압도되고 그래서 주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목수의 아들이지 현직 목수가 그런 말씀을 할 리가 없어, 저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으리가 없어!

이게 인간이 가진 한계입니다. 인간은 항상 그렇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는게 아니라 그 배경을 보고 먼저 판단합니다. 그래서 선입견을 가지고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능력까지 부인하지는 못하니까 귀신의 왕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낸다는 누명을 뒤집어 씌우려고 합니다. 배타적입니다. 마음에 조금도 주님을 받아들일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이들의 눈에 예수는 목수이지 절대로 거룩한 선지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 능력을 보면서도 예수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만일 눈의 편견을 깰수만 있었다면 나사렛사람들은 영원히 예수의 고향사람으로 그의 복음사역의 동역자로 영예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인데 죄사함받고 천국의 앞자리에 충분히 설 수 있었을 터인데 그만 아까운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라는 말은 ‘소피아’라고 합니다. 우리들이 많이 들어본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지혜라는 말에는 신의 선물이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이 선물로 준 지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지금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라고 묻고 있지만 속으로는 이 지혜와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집불통들은 끝끝내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합니다. 인간은 이렇게나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지혜와 마찬가지로 권능이란 말 역시 하나님의 힘, 구원을 이루는 힘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미 마음속으로 이 지혜와 권능의 기원에 대해서 짐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 선지자가 고향에서 존경받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목수의 아들은 정말이지 존경받기가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입니다.

 

3절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보세요, 깜짝 놀란 이유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배경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잘아는 과부 마리아와 목수네, 이걸로 모든게 설명이 끝난겁니다. 더 이상의 다른 설명은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이걸 보면서 웃긴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차별받는 것은 참지 못하지만 그 심중 깊숙한 곳에서는 저 사람정도면 우리를 다스리고 억압하고 지배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만일 대제사장의 아들었다면 헤롯왕가의 자식이었다면 아니면 이전 마카비왕조의 후손이었다면 아니면 명망높은 귀족이었다면 아마 이들은 앞다투어 예수의 귀향을 환영하고 그의 가르침을 받아 들이고 그를 칭송하기 바빴을 것입니다.

 

이들은 목수의 아들이 저런 지혜를 가지고 저런 능력을 행한다는 것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목수의 아들 주제에 우리 앞에서 가르치려 든다는 생각을 먼저 한 것입니다. 그 마음 깊은 곳에서는 시기심이 들어차 있습니다. 우리를 다스릴 정도의 집안 출신이 아니라 우리하고 같은 어쩌면 우리보다 더 못한 집안 출신이 선지자 노릇하는데 대한 시기심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발목을 잡아서 끌어내립니다. 그걸로 인해서 자기가 올라가는 것은 아님에도 단지 시기심 때문에 같이 죽자고 끝어내립니다. 왜냐면 ‘감히 주제파악도 못하고’의 마음을 먹기 때문입니다. 이게 온당합니까? 같이 살자도 아니고 같이 죽자라니 너무 한심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게 바로 인간입니다. 조금 더 풀어서 말하면 인간이라는 종족의 특성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귀하게 창조하신 자기의 생기를 불어 넣어서  생령이 되게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들은 지금 예수님을 모욕하려고 일부러 어머니의 이름을 들고 있습니다. 이 말속에는 지금 요셉이 죽고 마리아만 살아남았다는 뜻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어머니 아무개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에는 상대를 좀더 비하하려는 모욕적인 뜻이 들어있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상 비록 아버지가 죽고 없어도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모욕적인 표현이랍니다.

 

지금 이들은 일부러 현실을 외면하고 예수를 욕보이려 일부러 아버지 요셉이 아니라 어머니 마리아의 이름을 들고 있습니다. 정말 지독히도 못난 사람들이고 나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열매를 보고서도 전혀 그 나무가 무엇인가를 생각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냥 무조건 잘못되었고 싫다는 고집쟁이들일 따름입니다.

이렇게 고향사람들의 배척을 받은 주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따지고보면 두 번째 방문에서 고향사람들의 반응은 정말이지 장족의 발전을 한 겁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한 정도가 아니라 절벽에서 밀어서 죽이려고 시도한 자들인데 이제는 그래도 뭔가 배척으로 끝나네요. 아마 처음에 죽이려고 하다가 뭔가 큰 안좋은 일을 당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더 배타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이고는 싶은데 죽일 수는 없고...웃기지 않습니까?

 

형제 누구누구와 누이들이 자기들과 함께 있다고 하면서도 죽이려 했다는게 믿어 지시나요? 시기심과 질투는 이렇게나 맹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질투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조차도 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니 보고 알기는 했겠지만 입을 열어 시인하거나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저는 이렇게 당부합니다.
우리가 놀라운 기적을 보았나요? 놀라운 지혜의 말씀을 들었나요? 그렇다면 인간적인 시기와 질투는 내려놓고 인정할건 인정하세요.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 아무개를 통하여 역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세요. 그 길이야말로 나도 그 하나님의 지혜를 능력을 맛볼 수 있는 그래서 그 영광에 참예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아마 당시에 크게 유행하던 경구나 격언같은 말인 모양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런 식의 사고를 많이 했던 모양입니다.

‘존경받지 않음’이란 말은 단순히 소극적으로 존경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로 ‘비천하게 여겨짐’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것에서 나아가 비천하게 여겨진다는 겁니다. 단지 그들과 친숙하고 그들사이에서 자랐다는 이유로, 자기들과 비슷한 또는 자기들보다 못한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로 전혀 선지자로서의 존중을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오히려 비천하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정말 황당하지요? 인간의 질투심은 정말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5절에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왜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을까요? 신이신 주님이 사람들의 배타성에 충격을 받으시고 권능을 행하시지 못한 것일까요?
그렇게보면 사람들의, 받아 들이는 사람들이 믿음이 기적의 요건인 것일까요?

 

하하, 그럴 수도 있지만 여기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살펴야 할 것은 번역상의 문제입니다. 여기 본문은 “안수하여 몇몇 병자들을 고치신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권능도 행하시지 않았다” 이렇게 고쳐야 합니다.

병행구절인 마태13:18절에는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대상들의 믿음이 기적의 아주 중요한 요건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데 기적이 나타날 수 있을까요?
기적을 간절히 사모하고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소망하는 자에게 기적이 나타나고 성령이 임하시는 것이지 ‘나는 전혀 믿지 않으니까 낫게 해줄려면 해주고 말려면 말아라, 어차피 낫지도 않겠지만 정 한번 기도해보겠다면 특별히 허락해주지, 비록 귀찮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이런 생각을 가지고있는 이에게 기적이 나타날 리가 없습니다.

 

결국 6절에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믿지 않아서 놀랐다는 겁니다. 다른 마을에서는 그런 기적이 나타나고 말씀이 선포되면 회개가 일어나고 통회의 역사가 일어나는데 나사렛에서는 배척하니까 놀랐다는 말입니다. 근데 원문의 뜻은 그냥 단순히 놀랐다가 아니고 안타깝게 여겼다는 겁니다. 구원의 길이 열렸는데도 선입견 때문에 질투심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고 안타까워 하신겁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이스라엘의 모든 지역을 다 다녔다는 말은 아니고 갈릴리의 몇몇 마을을 방문했다는 말입니다. ‘그’라고 하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 모든 촌에’

 

비록 고향에서는 배척을 받았지만 여기에 상관없이 원래의 정해진 마을들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나사렛 사람들만 손해를 본겁니다. 그 당시 병원도 없고 의사도 없던 시절, 있어봐야 완전히 미신의 무당비슷하고 돌팔이들이 판치던 시절 그마저도 치료비가 비싸서 도저히 일반인들은 제대로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던 시절에 주님이 오셔서 낫게 해 주시겠다는데 그 기회를 놓쳐버린 겁니다.

 

사실 예수님의 주위에 사람들이 몰리고 오히려 사람들을 피해서 다녀야 할 정도로 서로 밀치고 옷을 잡아 당기고 하는 광경을 보면 주님을 만나서 그에게 자기의 처지를 호소할 기회를 얻는 것도 엄청나게 경쟁률이 치열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귀한 주님이 그들에게 친히 오셨는데 질투심에 사로잡혀 눈앞의 엄청난 기회를 놓쳤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리고 자존심이 중요하기는 하겠지만 자기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는데 부모형제자매의 자식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데 자존심을 내세워서 주님을 배척한다는게 과연 가능합니까?

 

아직도 배가 부른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아니어도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정작 그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뇨’의 사람입니다. 바깥에서는 나사렛을 기지촌이라고 깔보고 우습게 여기는데 정작 자기들은 다른사람들이 추앙하고 따르는 주님은 자기 고향출신이라고 우습게 여기고 배척해서 정말 황금같은 기회를 놓쳐버리니 정말이지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은 흔히 감정의 동물이라고 합니다. 우리속담에도 말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다급하고 절박하다면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독생자 예수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셨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피흘림으로 대속하신 그은혜 때문에 오늘 우리가 주의 전에서 주께 예배하고 있습니다.

 

예배에 나와서 내가 당신의 나를 위해 피흘리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만 하면 나의 죄가 사해지고 하나님의 사라이 되고 무궁무진한 기적같은 일들을 맛볼 수 잇을터인데 알량한 인간의 자존심이나 시기심으로 나에게 주어진 이미 나에게 오신 주님을 놓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약장수 말대로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언제까지나 우리의 회개와 헌신을 위해서 기회가 우리를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며 언젠가는 그러나 반드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야 하는 심판이 약속된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네 삶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내일과 미래를 생각해야 합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니까 너무 쉬어서, 너무 식상해서, 너무 흔해서, 너무 귀찮아서, 그게 뭘 별거라는 생각에 우리 주님이 나에게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된 우리들은 주님의 길을 제대로 따라야합니다. 제발 제발 하나님의 눈에서 떳떳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니 제대로된 변명이라도 할 수 있는 수준이라도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고향에서 배척받으셨는데 결론이 이상하게 납니까? 배척받는 주님을 불쌍히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신입니다. 그러므로 배척한 사람들 그래서 구원의 기회를 놓친 이들이 불쌍한거지 주님이 손해날 일이 없습니다. 불쌍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상히 여기시고 끝 전도여행을 다시 시작하자 뭐 그렇게 된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으면 결국 우리가 불쌍해 지는 겁니다. 주님이 아니라 내가 손해입니다. 주님이 우리곁에 오셔서 나를 믿으라고 하실 때 나에게 헌신하라고 하실 때 기회를 나에게 주실 때 주님에게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회가 항상 오는게 아닙니다. 주님은 이번 방문을 끝으로 더 이상 고향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땅을 치며 후회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이렇게 주의 전에 모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를 찬송하는 영광을 입었습니다. 왜 영광이냐고요?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요?

 

이 세상에서 억울하고 힘들고 답답한 것을 아뢰고 해결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게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하나님과 직접 통할 수 있다는게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입는다는게 얼마나 큰 영광이요 특권입니까? 그러므로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고 마음껏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무더운 여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다른 지역은 덥다덥다하는데 여기는 그래도 조금은 지낼만합니다. 그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제 말은 ‘빨리 여름이 끝났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이 무더운 여름 하나님과 만나서 그가 주시는 은혜에 더 깊숙이 들어가서 더 좋은 것을 많이 많이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어 주십사’하는 겁니다.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하나님과 만나고 놀라운 은혜의 세계에 푹 잠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들 각자각자에게 충만히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8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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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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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지난 주 설교 말씀을 듣다가 크게 놀랐습니다. 목사님이 화내시는 것을 제가 거의 처음 본 것 같습니다. 바로 일부 교회 목사님들의 부적절한 행동 때문에, 작은 교회들이 너무 큰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매우 속상해 하셨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교회라는 곳이 재밌는 곳이었습니다. 선교원도 있었고, 많은 아이들이 어울려서 신앙 교육을 받았고, 함께 야유회도 가고 그랬습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사람들이 믿을만하다는 분위기가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내가 교회는 안 다니지만, 자식은 교회에서 커가며 부모님을 공경하도록 교육받았습니다. 그 아름다운 모습들이 지금 한없이 추락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작은 교회 목사님들의 소리가 안 들리기 때문에, 지금 기독교가 이 모양인데 왜 다른 교인들은 동조하고 침묵하고 있냐고 한없는 비난세례가 폭풍처럼 이어지고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한국 기독교는 위기이며, 달라져야 하는 시점에 있다고 크게 소리치는 목사님들도 충분히 계십니다. 종교가 부패해서 썩어가면, 그 정신, 그 도덕성이 썩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나라의 존립마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인간의 부패함이 국가의 멸망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그는 어떤 분이셨는가를 우리는 새로 배워야 할 것입니다. 가난해도 충성되기를. 사랑받고, 사랑주는 교회가 되기를. 그래서 다시 깨끗해지는 기적의 대한민국으로 힘차게 일어서기를 저는 응원합니다. / 2019. 가을.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