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나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마태복음21:15-22)
이제 다음 주면 우리가 직접 대면하여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정말 오랫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금방이라도 예배를 다시 드리게 될 줄 알았지만 무려 두달이 지났습니다. 아득한 세월같습니다.
두달 전의 그날 수요 기도회를 끝으로 예배당의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코로나의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고 특히나 우리 교회는 신천지 위장교회로 오해까지 받아서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덕분에 나라에서 방역까지 공짜로 해줬네요. 어쨌든 실내가 항상 서늘했답니다. 냉기가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저는 밤마다 예배당을 지켰지만 성도가 오지 않는 예배당이라 참 우리 서로 힘들었고 잘 이겨낸 것을 서로 칭찬하고... 이제 한주일만 있으면 다시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하고 그동안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영광을 돌립니다. 감사합니다.
물론 그 동안에도 전화로 수시로 통화하기는 했지만 얼굴과 얼굴을 대면한다는건 정말이지 신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폐쇄되어있던 예배당에 사람들이 모이고 그리고 건물에 훈기도 생기고 마치 부활의 날 아침 같습니다. 우리는 오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엔 비록 예배당에서 부활절 예배는 드리지 못했지만 진정한, 삶 속의 부활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다음 주일에 부활기념주일로 지킬까하는 농담을 하는걸 들었습니다. 그래요, 정말이지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건강하게 그리고 안전하게 그리고 경제적으로 지키심을 감사 감사합니다.
오늘도 역시 부활절 설교를 이어갑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본문의 배경이 부활절이 되기 전의 상황이기는 하지만 십자가를 지시기 겨우 몇일 전의 일입니다. 정확히는 오 일 정도? 이제 부활절 설교는 오늘로 마지막입니다. 이번 년도에는.
오늘 저는 이 성경 본문 중에서 몇 가지 구절에 주목 하고자 합니다. 뭔 구절일까요?
일단 처음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우리는 오늘 위쪽으로 올라가서 한번 살펴 보아야 합니다. 9절에 보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 두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시면 정말이지 주님의 가긍한 처지가 눈에 보입니다. 과연 이 두 구절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나 다를까요?
하하, 뭐가 다른지도 모르겠는데 뭘 주목해야 합니까?
보세요. 15절에서는 호산나하고 외치는 이들은 어른들은 없고 어린이들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9절에는 ‘수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옹위하며 행진하면서 호산나를 외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 간거지요? 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들만 남아서 호산나를 외치게 되었지요?
그 사이에 무슨 대형 스캔들이 터진게 아닙니다. 주님은 범죄를 저지르고 그게 들통나서 사람들의 대적이 된게 아닙니다. 이 두 구절 사이에 그가 하신 일이라고는 성전으로 들어가셔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것 뿐입니다.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짐승들을 내어 쫓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신 겁니다.
그리고 그에게 나아오는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맹인과 저는 자들이 예수께 나아오매 저들을 고치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하신 다음에 주님의 처지는 급전직하합니다. 만인의 영웅에서 위대한 메시야에서 이상한 사람, 대제사장의 대적이요 모든 이들의 골칫거리로 변합니다.
그가 하신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법을 정확히 지키고 병자를 고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 밖에 없는데도 말입니다.
인간세계의 인심이란건 이렇게나 조변석개합니다. 아니 조변석개는 관두고 조조변입니다. 전혀 잘못한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이익에 따라 욕심의 충족에 따라 상황이 마구 마구 변합니다. 이제 주님은 물에 빠진 사람들을 건져주고서도 보따리를 돌려 주지 않았기에 도둑으로 몰린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그렇게나 아련하고 비정한 인심을 나타내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런 주님이 인간에 대한 환멸이 아니라 인류를 사랑하사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가 찬 일입니다. 자기의 목숨까지 버려서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그는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나귀까지 제공했던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주님을 공궤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더 넓혀보면 주님은 왕이 될 것을 거부하고 성전을 깨끗케 하신 때문에 그날 밤에 묵을 숙소가 없어서 길바닥에서 노숙을 하십니다. 그래서 너무 배가 고파서 새벽에 길가의 무화과나무를 보시고는 열매를 얻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날짜는 약간 다릅니다. 왜냐면 마태는 주제별로 성경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이 시간순이 아닙니다. 즉 행렬이 있던 날은 주님은 성전에 가시기는 했지만 그냥 한번 둘러보고는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그러니까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찾은 그 날에 성전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마태는 성경을 읽는 독자들이 하나님의 분명한 메시지를 충분히 납득하기를 원했기에 그런 식으로 성경을 기술한 것입니다. 시간순이 아니라 주제별로.
그러니까 우리도 마태의 의도에 부합해서 충분히 이 성경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본문이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거하고 일들을 행해야 할 곳은 결국 성전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결국 가야 할 곳은 교회라는 것입니다.
가끔 가다 보면 혼자서 가정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회들의 부정부패에 환멸을 느낀다거나 존경할만한 목사가 없다는 이유, 또는 스스로 게으르다거나 헌금이 아깝다거나 하는 이유로 집에서 홀로 주를 믿는 이들이 약 이백만이나 된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몸을 단장하고 교회당에 가는 것은 집에 그대로 있는것보다는 아무래도 귀찮고 힘들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자기의 입과 몸을 위해 헌금을 쓸 수 있는데 교회에 헌금한다는게 속이 쓰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서 지금 추산으론 약 이백만이나 된답니다. 2백만이라면 정말 엄청난 숫자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그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 기존의 교회, 목사들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 이후인 이제 한국의 교회들이 모두 정신을 차렸을걸로 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올바른 교회를 만들기위해 양심적인 세력들이 교회 안으로 복귀해야 합니다. 누구말처럼 참신하고 신선한 피가 수혈되어야 합니다. 고인물에다가 신선한 물이 들어와야 합니다.
믿음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천하 모든 사람들이 주를 배반하고 신자가 자기 혼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우리 주위에는 참된 신앙을 가진 주의 자녀들이 수백만이나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설교’의 형식을 빌려서 증거되어 지는 하나님의 권도를 받고 또 권면도 듣고 힘을 얻고 끼리끼리 모여서 서로 격려도 하고 그렇게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오늘날 더 이상 성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곳에 모두 모여서 일체의 모든 산당을 폐한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는 전국에 성전한개만 있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지요. 전국에 수만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적으로는 흩어져 있어도 영적으로는 한몸이요 한 뿌리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정통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입니다. 물론 보기에는 몸통에서 분리된 가지에 속해 있지만 모두 한 개의 나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교인들도 새롭게 교회로 나아와서 새로운 기풍을 진작시키는 것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 소망합니다.
그러기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교회들을 깨끗케 해야 합니다. 부활의 십자가 이전에 성전을 정화시키신 주님의 뜻을 받들어 우리는 항상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고 스스로 삼가서 주님의 뜻을 그대로 지키는지 조심해야 합니다. 근신하지 않고 주어진 부와 명예와 칭송에 취하면 이교의 교주가 될 뿐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를 통하여 우리나라에서 아주 존경스럽고 감탄할 만한 목사, 교회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만큼 한국 교회가 썩어서 내버릴 정도가 아니란게 확실해 졌습니다. 그러므로 뜻있는 성도들이 힘을 합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격동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멋진 그리고 든든한 일꾼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비록 당장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어서 쓸쓸히 성을 벗어나 베다니로 가신 주님이시지만, 아무도 그를 맞아 들이지 않아서 베다니의 길가 어디에서 노숙하고 저녁도 아침도 굶어서 무화과 열매를 찾으신 주님이지만 반드시 오늘날에도 어딘가에는 하나님의 참된 말씀에 목말라 하고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성도가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땅의 이곳저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힘써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절마다 드리는 말씀이지만 우리가 종종 착각하는 건 그가 하나님이시므로 전혀 배고프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이시므로 인간들의 모욕과 때림에도 전혀 상처받지 않고 허허 하면서 웃어 넘길 것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건 전혀 진실이 아닙니다. 그는 진정한 하나님이시고 또한 진실로 인간이므로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질고와 고통을 그대로 당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가 신적 능력을 발휘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지만 신적 능력을 발휘하지 않고 인간의 몸으로 그 멸시와 고통을 고스란히 당하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맺은 약속입니다.
우리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서 완벽한 인간으로 그 모든 과정을 겪고 인내하는 것이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심이 조건에 포함되었던 것입니다. 그게 우리를 구원할 조건입니다. 그래서 더 슬픕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한 주님은 사랑의 배신자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셨습니다. 호산나를 외친 그 무리들에게 주님은 병을 고쳐주심으로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깨끗한, 율법에 맞는 제사를 지내도록 성전을 깨끗케 하신 주님은 그 깨끗함과 순결한 제물로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구원은 백성들에게 전혀 공감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맹인과 저는 자들의 장애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육체적이고 경제적인 구원 역시 구원받은 당사자 외에는 전혀 환영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제 그의 지지자는 철모르는 그러나 가장 진실된 어린이들 외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제사하는 이들은 하나님이 오셨음에도 자기들의 장사에 방해가 되고 메시야를 연호하는 일들에 대해서 못마땅해 합니다. 성전뜰에서 장사하는 일들이 대제사장의 비호가 아니고서는 어렵습니다. 적어도 그들의 묵인이 있었기에 성전 뜰에서, 정확히는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상인들과 제사장 레위인들이 짜고 제물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십자가에서 인류를 단번에 대속하시기 전에 성전을 정화하시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년 전에도 장사하는 이들을 내어 쫓으셨지만 이년 후에도 여전히 그런 관습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장사행위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형교회에서 더 성행합니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으니까 더 장사가 잘 될겁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권을 노리는 이들이 많겠지요?
그러니 자연히 경쟁이 거세지고 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뇌물이 성행하고 청탁과 협잡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상인은 그렇게 바친 뇌물을 벌충하기 위해 그리고 다음에도 장사권을 따기 위해 더 많은 재물을 모아놔야 합니다. 먹고 살고 돈도 벌고 다음도 준비하고 뇌물비도 있어야 하고 그러니 결국은 물건에 비해 가격이 비싸지고 서로 암암리에 뭔가가 왔다갔다 하고...
마치 조선시대 탐관오리들이 벼슬을 사고 팔고 그래서 그 피해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로 이어지고 마침내 삼정이 문란해져서 조선전토에서 민란이 일어난 그 역사와 같습니다.
교회에서 장사하는 일들은 처음에는 비교적 순순한 목적에서 시작됩니다. 교인들의 편의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게 돈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이권을 둘러싸고 더러운 거래가 이루어 집니다. 그게 결국 교회 구성원들, 신자들의 손해로 이어집니다. 물건값, 인건비에 뇌물비에 차기 준비금까지 포함해야 되니까 결국 그러한 일들이 예수 이름을 더럽히게 되는 겁니다.
성전을 정화하신 주님이 경계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이 장사꾼의 집으로 강도의 굴혈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인간은 결코 오랫동안 순수함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날마다 스스로를 돌아보아 반성하고 회개하고 개혁하는 겁니다. 스스로 할 수 없다면 외부에서 강제로 개혁합니다.
여기서 또 하나 성전에서 주님이 병자들을 고치신 기사를 보면 여기에서 성전의 기본 목적을 우리 주님이 강조하신 거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매우 설득력있는 주장입니다.
사실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맹인의 눈을 뜨게 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일정 조건이 아니라면 지금도 택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다리는 저는자, 옛날 말로는 ‘앉은뱅이’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고쳐서 걷게 만든다는게 정말이지 불가능한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런 자들의 병들을 고치셨다는 것 하고 상인들의 장사하는 것을 내어 쫓았다는 것하고 비교하면서 우리는 성전의 참 목적이 바로 이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고 장사하고 사기 치고 하는 곳이 성전이 아니라 자그마한 권리를 이용해서 부정 축재하는 곳이 아니라 아픈 자들을 고치고 사람들의 불행을 위로하고 치유하며 구원을 주는 장소라는 것을 주께서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대제사장이나 제사장들의 기분을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나 봅니다. 왜냐면 상인들하고 자기들이 아주 긴밀하게 유착된 이익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채찍질은 자기들의 이익을 해하는 나쁜 행동,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주님을 미워하면서 철저하게 그를 배척합니다. 저들의 말을 들어보면 ‘너는 메시야가 아닌데 저들이 너를 메시야라고 외칠 때 왜 나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느냐?’라는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게다가 주님이 하신 그 모든 일들을 ‘이상한 일’이라고 지칭합니다.
원래 원문으로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라 ‘놀라운 일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주님이 병자들을 고치는 그 기적을 보고 놀랐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기적에 순응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배척했다는 겁니다.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이들 사두개인들은, 사두개파 제사장들은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그냥 자기들을 종교 귀족으로 잘살게 해주는 하나님을 관습적으로 섬기는 거지,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거지 진짜로 하나님의 기적이나 영적인 신비를 믿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이들은 천국과 지옥도 믿지 않는데요.
그래서 기적은 없다고 믿고 있는데 백주 대낮에 중인 환시리에 기적이 그것도 불치병을 낫게하는 기적이 일어나자 이를 이상한 일들이라고 표한 겁니다.
그래요, 정말이지 이상한 일들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야가
그 능력으로 사람들을 동원해서 왕위에 앉지도 않고
상인들을 심판하여 처벌하지도 않고
스스로 채찍을 휘두르는 일을 한다는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극에서 말합니다. “저 죄인들을 매우 쳐라”이러면 나장들이 죄인들을 잡아서 곤장으로 매우 칩니다. 사또가 직접 하지 않습니다. 체신머리 떨어진다고 사또는 단상에 근엄하게 앉아 있고 명령만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스스로 채찍을 빼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그렇게나 많은 지지자들이 호산나를 외침에도 스스로는 어떠한 권리도 행사하지 않으니까 정말이지 이상한 사람, 이상한 일들이 되는 겁니다.
보통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려고 합니다. 그리고 먹고 살만해지면 사람들은 슬슬 딴 생각을 합니다. 명예가 필요해 집니다. 그러다가 명예를 얻게 되면 실제적 권세를 얻고자 합니다. 그런데 권력도 돈도 싫어하는 이가 있다면 이는 세상이 도저히 감당치 못하는 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두개인 제사장들이 볼 때는 이상한 일을 하는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는 권력과 돈으로도 조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상한 사람.
유대의 전승에 보면 맹인이 보게 되고 앉은뱅이가 걷게 되는 일을 메시야가 오시면 하시는 일로 전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역시 메시야가 오시면 하는 일로 표시했습니다. 그런 역사가 실제로 벌어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체험했고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장의 눈에는 그냥 ‘이상한 일’입니다. 왜냐면 그는 주님을 메시야로 믿고 싶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한 30년 쯤 지나서 그리스에서 바나바와 바울이 기적을 행하자 그 지역의 그리스 신관들이 화환과 제물을 가지고 사람들과 함께 몰려와서 바나바를 제일 높은 신인 제우스, 바나바는 풍채가 좋고 뒤에서 무게를 잡고 있고 바울은 앞에서 말하니까, 이분이 좀 안생겼어요. 그래서 초라하게 보인다고 제우스의 대변자 허매, 헤르매스 라고 불렀지요. 그리스 신화에 보면 제우스가 제일 높은 신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이 놀라서 자기들의 옷을 찢으며 자기들은 신이 아니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금 이 장면과 너무 많이 다릅니다. 결국 대제사장은 절대로 주님을 구주로 믿지 않으려고 한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보세요. 믿고 싶은 이들은 자그마한 기적을 보고도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믿기 싫은 자들, 믿음을 거부하는 이들은 큰 기적들을 보고서도 절대로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메시야가 오셨다고는 못해도 ‘이상한 일’이 뭡니까?
이미 유대교는 극도로 타락해서 이제는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기점으로 유대교가 아니라 기독교가 되었다는 거지요.
우리 기독교는 지난 이천년 동안 끊임없이 개혁되어 왔습니다. 평화의 종교, 사랑의 종교라면서 끊임없이 종파를 나누어서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한게 정말이지 이상한 일입니다. 유독 기독교에 이단이 많지요? 그건 바로 바르게 하나님을 믿기 위함입니다. 바르게 살기 위함입니다. 예수 열심히 믿으면 기적이 일어나고 능력이 생기고 하니까 자기가 예수가 된 줄 착각하는 이들이 생긴 겁니다. 우리는 또 이런 모습을 못봅니다. 그냥 두면 하나님이 섭섭해 하십니다.
우리가 그냥 대충 대충, 또는 대강 대강 주님을 믿는다면 그걸 용인했다면 이단도 없고 사교도 없고 개혁도 없고 그냥 전통과 권위만, 인간의 이익만 있었겠지만 하나님의 법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대 제사장같은 사람들은 당시에 사두개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보통은 옛날 제사장 사독의 일파와 그 후손들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전합니다. 우리가 성경에 보면 나오는 바리새인은 공식적인 계급은 없이 내가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하는 민간에 퍼져 있던 열심있는 율법주의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이들 사두개인은 그냥 종교 귀족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이들은 하나님 때문에 먹고 살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전혀 믿지 않습니다. 이들은 성경도 구약의 모든 내용을 다 믿는게 아니라 모세 오경만 믿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도 믿지 않습니다. 천사도 믿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있는 것은 그냥 현세에 복락을 누리는 것, 그리고 자기들의 기득권만을 믿습니다. 모세오경에 보면 제사의식에 관해서 장황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그걸 믿는 겁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가장 덜 믿는다는 일이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지요? 이들은 종교 귀족으로 유대의 국회격인 산헤드린 공회원이 되어 떵떵거리기나 하지 실제로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하는 일은 군림하고 착취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처음 사두개인의 정체를 알았을 때 정말이지 놀랐습니다. 세상에...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깡그리 소멸시켜버리셨습니다. 주후 67년에 예루살렘성이 로마의 디도군에 함락될 때 성전이 부숴지고 사두개인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나님 덕분에 잘 먹고 잘살고 존경받고 군림하고서도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멸시하고 그 능력을 부인한 자들을 하나님은 결코 그냥두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요즘 일부 사람들이 논쟁을 벌인답니다. 인터넷 예배가 예배냐? 당연히 인터넷 예배도 예배입니다. 그러나 저는 인터넷 예배를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인터넷 예배를 지켜보지만 말고 스스로 예배하고 설교 정도를 보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가장이 중심이 되어서 가정예배를 드리고 그리고 목사의 설교를 보고.
그럴 처지가 안되면 가장이 설교도 하고. 거창하게 설교라고 부르기가 뭣하면 그냥 말씀을 간단하게 보고 몇마디 언급하고.... 그러니까 보지만 말고 보는 이들도 예배에 참여하라는 겁니다.
자 그리고 한가지 논쟁거리가 더 생겼습니다. 그럼 인터넷 성찬은 성찬이냐? 목사가 집전하지 않는 성찬이 효력이 있느냐? 이것 가지고 서로 신학적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좋지만 이게 자기의 생각과 다르다고 서로 이단으로 만들지만 않으면 됩니다.
워낙 처음 있는 일이라서 아직 이론적으로 정립이 안되었는데 이번 부활절을 기점으로 여기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미래적으로 언급하고 성경을 찾아 보고 그리고 결론이 나리라고 봅니다.
솔직히 우리 교회도 다음 주일부터는 문을 열려고 합니다. 그동안 정말이지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들 모두 건강하게 계시다는데 참 감사합니다. 이 주일만 더 참으면 서로 얼굴을 보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인내하고 기도하고 교회가 문을 열 때 기쁨으로 다시 보기를 원합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갑니다. 이 모든 일을 마치고 그리고 주님은 베다니로 가셨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에 거하신게 아니라 그 인근의 시골마을로 가신 것입니다. 왜 인근의 베다니로 가셨지요?
성경 본문은 베다니로 가는 부분을 약간은 의도적으로 오해하도록 기술했습니다. 즉 주님은 호산나 행렬 때 첫날엔 그냥 성전을 둘러보시고는 베다니로 가셨다가 노숙하시고 배를 굶고는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찾으려 하셨고 그러면서 그날 성전을 깨끗게 하셨습니다. 물론 그날도 베다니로 돌아가신건 맞습니다. 어제도 저녁에 베다니로 오늘도 베다니로.
마태는 주제별로 기사를 배열했습니다. 시간순이 아닙니다. 앞에 기술되었다고 해서 앞선 사건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오해하도록 했을까요? 그것은 마태가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들에게 깨닫게 하고 싶은게 있으셨다는 말입니다.
무엇일까요? 주님이 홀로 쓸쓸히 예루살렘성을 벗어나셨다는 거지요. 그렇게나 주님을 열렬히 환영했던 자들은 그가 왕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단지 성전을 깨끗케 하는 걸로 끝내자 실망하고 그리고 지지했던 만큼 미워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기득권자들과도 싸우고 지지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그렇게 그렇게 주님은 점점 고립되어 갔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오직 홀로 되셨습니다. 사랑하던 12제자들 마저 주를 버렸고 심지어 그 열둘 중의 하나는 그를 팔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인류를 구원하는 기다란 역사가 이제 비로소 결실을 보는 겁니다. 부활의 주님으로.
부활절은 솔직히 매우 간단히 지나갈 절기가 아닙니다. 주께서 죽음에의 행진, 또는 부활에의 행진을 하시는 일주일 동안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의 1/3을 차지합니다. 십자가 형벌을 앞두고 이제 곧 제자들을 떠나 하늘로 돌아가실 그 역사적인 순간을 앞두고 얼마나 하고 싶은 말씀이 많았을까요?
마치 애를 길가에 내보내는 것 같이 안심이 안되어서 이것도 저것도 언급하신 겁니다. 이때는 이렇게 하고 이런 일은 이렇게 하고 저 때는 저렇게 하고... 그러므로 마태복음은 뒤로 갈수록 더 진국의 교훈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주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한 말씀들에 대해서 당시에는 뭐가 뭔지를 몰랐습니다. 그냥 또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구나! 심지어 이번에야 말로 주님이 왕위에 오르실 걸로 생각해서 자기의 아들을 하나는 오른쪽 하나는 왼쪽에 두어달라고 청탁하는 어머니도 나오지요.
이걸 보시고 주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그 십자가 고난이 없이 영광이 없음에도 아무도 십자가는 생각도 않습니다. 그리고 영광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열매만 따먹으려고 합니다.
그게 너무 부끄럽고 그래서 생각해보니 그때 주께서, 그때 선생님이 나에게 하신 그 말씀이 너무 귀하다고 생각해서 마태는 성경의 1/3을 마지막 일주일 동안 하신 말씀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문득 창밖을 보니 이제 어느듯 완연한 봄입니다. 때론 날씨가 쌀쌀해서 두껍게 입을 필요도 있었지만 결코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네요. 어느듯 앙상한 산과 들에 새파란 푸르름이 가득합니다. 꽃들이 활짝 피어 있습니다. 진달래인지 철쭉인지가 지천에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우들 정말이지 너무 오랫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잘 참아 주셨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더 사랑하고 위로하고 격려하신 것을 감사하며 또 주께서 그 모든 노력에 칭찬을 더하실 것입니다.
이런 코로나의 경험은 사상 최초의 일입니다. 생각하기는 한번으로 지나가는 경험도 되겠지만 어쩌면 주기적으로 이런 일들이 점점 더 자주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그의 보호하심과 섭리를 믿습니다. 이번 기회에 사교와 이단과 세습과 부패에 대해 심판하신 주님의 역사를 믿습니다.
코로나에 약이 없는데도 혈장치료, 그러니까 이미 코로나를 이겨낸 사람들의 피가 효과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떠올립니다. 오늘로써 부활절에 관계된 설교는 끝을 맺으려 합니다만 주님의 피, 우리의 죄를 속하려 흘리신 그 피의 효능을 믿고 그리고 감사하면서 일년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천국은 사모하는 자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도 역시나 그 피를 사모하는 자의 것입니다. 내가 사모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십자가 사역은 헛되이 지나갑니다. 모든 믿는 이들에게 효능을 주지만 믿지 않는 이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효능도 없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듯이 산에서 들에서 세월의 흐름이 푸르름으로 나타나듯이
우리 교회에 들어온 모든 이들이
제 설교를 듣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푹 젖어 들게 될 것을 믿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그에 대한 믿음으로 점점 젖어 들어서 마침내 푸르름으로 가득한 교회와 가정이 될 것을 믿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사랑이 교회를 넘어서 지역사회 그걸 또 넘어서 이나라와 이 땅에 넘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그렇게 될 지어다.
- 홍종일 목사님 2020년 4월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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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올해 들어 처음 올리는 목사님의 설교. 무엇을 그토록 바쁘게 살았는가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지혜로움은 새로운 것에 있는게 아니라, 과거에 있던 일들을 세심하게 비추어보면 뜻밖의 것들이 보입니다.
돌변하는 인간의 모습은 인간에게 기대를 걸고 희망을 걸어야 하는 대상이 아님을 냉정하게 비춰줍니다.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기적임을 배웁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위로를 나눠주고, 인생의 고난 앞에서 지지 말라고 응원해야 함을 배웁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짊어지고 걸어가야 할 나만의 십자가 가 보일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원망이나 불평대신,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겠습니다.
그렇게 결단하며, 하나님 곁으로 다가서는 용기를 낼 수 있기를. 저는 이 시간 바라봅니다. / 2020. 04. 시북 (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