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택하셨다 (마태21:10-19)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줄여서 부활절. 그런데 역시나 아직 코로나 사태가 끝이 나지 않았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고 있고 해서 이 귀중하고 역사적인 기념 주일도 가정에서 드리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집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것도 정말이지 역사적일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부활절에 교회당에 가지 않는다는 일은 생각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면서도 정확하게 십자가에 달리는 시점이나 부활하는 그 시점에 관한 설교를 약간은 비켜가야 합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부분, 부활의 장에 대해서는 매우 많은 설교가 행해졌습니다. 부활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부활의 장을 조금 넓혀야 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주에 이어서 주님의 행진을 따라갑니다.
예루살렘 성은 솔직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비해서 무지 작은 성인건 확실합니다. 성곽도시의 특성상 오늘날의 대도시처럼 거대할 수가 없습니다. 서울도 보면 4대문과 약간의 성곽만 남아 있지 완전한 성곽도시의 형태를 벗어난 지가 아주 옛날입니다.
그래서 성곽도시의 내부가 작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 안에 성전말고 갈데가 없을까요? 도대체 그 성에는 경기장도 공원도 극장도 식당도 목욕장도 없나요? 당시에 보통의 로마도시들이 가지고 있는 공공시설이 없을까요?
우리가 잘 생각해보면 주님의 예루살렘 기사에서 우리는 주님이 주로 성전에서 무언가 하신 장면만을 보아왔습니다. 물론 다른 장소도 조금은 나옵니다만 주로 성전에서.
심지어 주님은 예루살렘 성내에서 일을 마치고는 성내의 여관에 여장을 푸신게 아니라 성 밖으로 나와서 노숙을 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됩니다. 베다니와 벳바게는 나오지만 예수님에게 예루살렘 성내의 숙소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치고서 장미여관에서 주무셨다는 그런 말은 없습니다. 주님이 베들레헴 여관에서 태어나신 것을 잘 아시지요? 그러므로 당시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당연히 여관이 있지 않았을까요?
나귀를 타신 겸손의 왕 예수께서 백성들의 호산나 소리를 듣는 가운데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그의 행진을 따라간건 아닌 모양입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그의 입성을 반긴건 아닌 모양입니다.
어쩌면 그는 유대 예루살렘에서는 생각만큼 유명하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그의 주 활동무대인 갈릴리가 아닌 유대에서 그는 아직 대세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10절에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그러니까 이는 누구냐고 물어본다고 성이 소동한게 아니라 호산나의 외침으로 성이 마치 지진이 일어난 듯이 시끄럽자 사람들이 예수가 누군지 물어봤다는 겁니다. 이걸 보면 예루살렘에서는 아직 그를 모르는 이들이 많았던 모양이지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당연한 것일 수가 있습니다. 왜냐면 당시는 유월절을 맞이하기 위해 전 세계에 퍼져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에 외국에서 입국한 유대인들은 주님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매년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오는 유대인이라면 이년 전 성전에서 역시나 성전을 정화한 주님에 대해서 알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 당시에 주님에 대한 소동이 이와 같이 크지는 않았습니다.
여기 본문에 “온 성이 소동하여”라고 하고 있는데 이 말은 마치 온 성이 지진에 흔들리듯이 혼란해 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행렬을 따르는 이들이 얼마나 크게 호산나를 외쳤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에 대해 모르는 상태에서 이런 행렬의 주인공에 대해서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유대인 해외동포들이 예수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도대체 저 사람이 누구길레 저렇게 사람들이 따르며 열광적으로 맞이하는가?
당시가 유월절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저들은 유월절을 지키기위해 전국에서 그리고 세계에서 성지순례의 개념으로 온 열성적인 순례자들입니다. 뭔가 거룩한 성에서 하나님의 거대한 신비를 목도하고 싶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 호산나 열기와 행진이 예사롭지 않은 겁니다.
지금과 달리 초대교회에서는 예수의 정체를 둘러싸고 그가 누군지에 대해서 매우 큰 논쟁이 있었습니다. 주후4세기초에 로마제국에서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니면 하나님 자신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선지자인지 칼케돈이라는 곳에 모여서 몇 달 몇 년씩 예수의 정체를 두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심지어 동일본질과 유사본질을 가지고도 싸웠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이 똑같다 이게 동일 본질이고요 비슷하다 이게 유사본질입니다. 본질적으로 똑 같다, 아니다. 비슷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다르다. 온갖 신학적 성격적 증거를 가지고 서로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몰린 네스토리우스파가 로마의 영토 밖으로 밀려나서 아랍권에서 전도했고 인도와 중국까지 퍼지게 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네스토리우스파를 당나라에서는 경교라고 불렀습니다. 심지어 신라의 경주에까지 도마의 상이 생겨났습니다. 예수의 제자 도마를 ‘도마 분처’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건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정체를 둘러싸고 논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스스로 하나님이시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를 지시기위해 오셨다는데 모두 동의하고 있습니다. 가끔가다 스스로 예수를 자처하는 이단이 생겨서 그렇지 예수의 정체에 대해서 논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대화를 보면 예수의 이미지, 무리들이 알고 있는 예수의 이미지가 나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자, 잘보세요. 그를 일러 선지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나 메시야가 아니라 단순히 선지자.
그런데 더 중요한 포인트는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그러니까 그는 예루살렘 출신이 아니라 나사렛 출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맞는 말입니다. 맞는 말인데 그러나 이 말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를 깔보며 무시하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는 예루살렘 사람의 절대적 우위가 인정되는 분위기였습니다. 하나님의 도시 성도 예루살렘은 그들의 종교적 중심지이자 정치 중심지로서 영원한 선택된 도시입니다. 그러니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가 이렇게나 무리들의 환호를 받으며 입성하는게 못마땅했던 겁니다. 그런 뉘앙스가 오늘 본문에 녹아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명확하게 둘로 나뉜 사람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발 앞에 겉옷을 펴고 종려가지를 흔들며 그를 옹위하며 행진하는 자들과 그의 행렬을 구경하며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자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자신들이 염원하던 메시야로 받드는 이들과 이는 누구냐고 묻는 이들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나하고는 상관없는 먼 고대의 이방인입니까? 아니면 오늘 우리의 구주가 되신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그냥 내 부모님의 구주인지 아니면 나의, 바로 죄많고 연약한 나의 구주인지?
어떻습니까?
바로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기위한 첫 번째 조건이 나옵니다. 바로 겸손입니다. 자기를 내래놓고 겸비하게 주님앞에 서는 겁니다. 그리고 그에게 호산나라고 외치는 겁니다. 주여 내가 지금 죽게 생겼으니 나를 구원하소서!
매년 부활절은 지나가지만 내가 주님의 그 아픔과 나의 죄인됨과 연약함에 대해서 자각하지 못한다면 그의 십자가 죽으심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위함인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의 부활절과 십자가는 나하고 전혀 상관없는 공허한 행사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과연 부활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지요?
옛날 사람들은 예수를 보고, 성이 소동하는 것을 보고 ‘이는 누구냐’고 물었지만 오늘 우리가 아무리 사람들이 미디어에서 떠들어도 스스로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여전히 이 대명천지에 주님의 이름과 주님의 부활절이 확고하게 정의된 오늘에도 여전히 마음속으로 ‘이 부활절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자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부활절이 유명해지고 있습니다. 뭐 부활의 신비를 체험한다는 측면이 아니라 이번 부활절에 오프라인 예배, 교회예배가 재개되는지 그래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어겨지고 결과적으로 코로나 환자가 늘어나는지에 대해서 주목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세상사람들도 부활절에 대해서 도대체 이게 무슨 절기냐고 묻게 되었습니다.
내가 스스로 주님의 그 부활 신비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내가 그 주님의 부활의 신비를 느끼지 못한다면 오늘 본문처럼 전혀 엉뚱한 대답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는 먼 그리고 약간은 촌구석인 나사렛에서 온 신진 선지자라고 의미를 평가절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십자가 대속’은 옛날의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십자가 피흘림은 당시 이미 왔다 간 그리고 살고 있었던 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십자가 보혈은 지금까지 왔다 간 사람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오고 또 갈 수많은 인류를 위한 대속의 피가 되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리 부활절에 흰옷을 입고 금식하며 철야하며 연합으로 예배하고 특별 부활헌금을 드려도 나의 부활절, 나의 십자가 피흘림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않는데 주의 성찬을 먹고 마심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와있는 이들의 질문과 대답에서 당시의 기득권 유대인들이 아직까지 주님을 전심으로 받아 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통받고 억울하고 힘든 이들이 모여서 그의 행진을 호위하면서 호산나를 외치는 그 순간에도 배부르고, 권력과 부에 취해 쾌락에 취해 세상살이가 즐거운 이들에게 주님은 혹 자기들의 기득권을 빼앗을 그런 먼 이방의 풋내기에, 도전자에 불과할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자기들의 권리를 빼앗을지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종교혁명가일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님은 어떤 의미로 존재합니까? 우리에게 부활절은 어떤 의미입니까? 주님의 십자가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지요? 그의 십자가 보혈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하고 마음을 적셔도 내 마음은 전혀 적시지 못하는 전혀 나하고 동떨어져 흐르는 무의미한 것에 불과합니까? 그렇나요 아닌가요?
조금 더 우리중심으로 의미를 좁혀 볼까요?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그가 하나님이라서 당연히 그를 섬기는게 아니라 그가 자신의 몸을 대속죄물로 내어놓아서 그 피를 믿는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그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기에 우리가 믿고 경배하는 겁니다.
매번 부활절을 지내면서 우리가 주님의 그 십자가 보혈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다면 이번에 한번 진지하게 그 피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예배당에 모이지 않고 각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이때 조용한 가운데서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피흘림이 나하고 관련이 있다고 인정해야 만이 그의 십자가 보혈이 내 마음을 적실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부활절이 굉장한 거룩함과 떨림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연조가 오래되고 점점 우리네 마음이 무뎌지면서 더 이상 부활절이 별다는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그냥 의례적인 행사로 지나갑니다.
더욱이 코로나 사태로 대부분의 교회에서 예배를 가정예배로 전환한 상태에서 보여주기 식의, 멋진 그리고 고급스러운 의식이 사라졌습니다. 웅장한 할렐루야 찬양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오히려 부활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보고 마는 부활절이 아니라 스스로 참여하는 부활절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부활절 예배를 보는게 아니라 부활절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코로나 와중에 그 귀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이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굳세게 붙잡고 나아간다면 머지않아 이 사태가 끝이 나고 한층 더 본질적인 것에 눈을 돌리는 더 건강한 교회 더 건강한 신자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 볼 것은 왜 주님은 그 승리의 행진을 왕궁이 아니라 성전으로 목표를 삼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뭐 유월절이니까 당연한게 아니냐고 할 수는 있지만 아직 유월절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무슨 유월절 기념식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주님은 다른 곳으로 가실 수가 있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행렬의 최종 목적지는 성전이었습니다. 왜 성전입니까? 주님이 추구하는 나라가 지상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다른 어떤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 거해야 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쓰는 구호가 있지요. 성경 중심,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요즘 사람들이 듣기에는 전혀 공감되지 않는 말입니다.
사실 작년에 주님께서 유월절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시다가 광야에서 떡과 물을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주님을 왕으로 모시기위해 난리를 쳤습니다. 만일 주님이 배타고 건너편으로 가시지 않았다면 무리의 소망을 받아 들이셨다면 전혀 색다른 일이 벌어 졌을지도 모릅니다.
이번 해의 호산나 행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백성들 주로 유대 백성들의 갈급한 외침 호산나에 응답하셨다면 그래서 민족의 해방과 왕위 등극, 그리고 나아가 로마를 정복하는 일이 벌어졌다면 솔직히 그건 유대인을 빼고 나머지 많은 민족들에게는 지옥도가 됩니다.
로마를 정복하려는 전쟁이 벌어지면 천하가 요동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근시안적이고 단답형의 해결책이 아니라 이 지상에 마귀가 다스리는 경쟁의 사회, 능률 지상주의, 인간도 수단과 도구로 여기는 삭막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법으로 다스려지는 은혜와 관용 그리고 사랑의 나라를 만들고자 하신 것이고 그렇기에 그는 최종 목적지를 성전으로 잡으신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는 더 이상 사람들, 어른들은 호산나를 외치지 않습니다. 다만 아이들만이 ‘호산나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치며 뛰어다닐 뿐입니다. 약삭빠른 어른들은 예수께서 행렬의 방향을 성전으로 틀 때부터 벌써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린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하신 일이 뭡니까? 바로 성전을 정화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을 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우리 주님이 성전에 가셔서 처음 하시는 일이 바로 성전 정화입니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세 번의 유월절을 보내셨고 그중에 두 번을, 처음과 마지막을 성전에 방문하셨는데 첫 번째 하신 일이 바로 성전 정화입니다. 그러니까 성전에 가실 때마다 장사꾼들의 장사하는 것을 보시고 이를 내어쫓고 깨끗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대속 이전에 하신 일이 바로 성전을 깨끗케 하신 겁니다. 여기서 약간 비약을 해봅시다. 우리 몸을 성전이라 하신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보이는 성전에 대한 정화와 마찬가지로 우리 몸의 정화가 이루어져야 함은 당연한 말입니다. 부활절을 맞이하기 전에 먼저 우리 몸이 깨끗해 져야 합니다.
이전의 그들이 성전을 정화했다면 지금의 우리는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 내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죄가 없이 깨끗해 지는 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 됩니다. 오늘 우리 주님은 성전을 깨끗게 하심으로 주님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시고 십자가로 향하신 것입니다.
죄를 씻는 방법은 엄청 간단합니다. 믿기만 하면. 그래요, 주님의 십자가 보혈공로를 믿기만 하면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대속’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이걸 우리는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기위한 두 번째 조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정화하는 과정을 잘 살펴보면 매매하는 모든 사람을 내쫓았다고 합니다. 교회를 이용해서 자기네 이익을 추구하는 이는 정말 곤란합니다. 주로 성전건축이나 리모델링, 교회당 공사, 장비나 비품 구입 기름값 기타등등의 일에서 부정직하게 행하여 하나님의 돈을 착복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주님께서 내어 쫓으신 장사꾼들입니다.
성직 매매도 근절해야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치부하는 자들을 주님은 죄없다 하지 않으시고 성전에 거할 수 없다고 채찍으로 때려 내어쫓으십니다.
여기 보면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었다고 합니다. 비둘기는 성전제물 중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이 바치는 제물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가난해서 소나 양으로 제사할 수 없는 이들이 바칠 수 있는 제물인 겁니다. 그래서 돈의 유무에 상관없이 누구나 하나님 앞에 제사할 수 있도록 하신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시에 성전제물을 파는 이들은 비둘기 제물에 대해서 정가의 80배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비둘기 파는 사람들이 언급이 되었답니다. 이 사람들 정말 징그러운 사람들입니다. 그 가난한 사람들의 돈까지 빼먹으려고 혈안이 되었네요. 종교장사가 이래서 무섭습니다. 잘못된 신념에 관련되면 이렇게 무섭습니다. 모 사교집단에서 전도를 못한 이들에게 얼차려를 주고 벌금으로 110만원씩을 거두어서 교주가 착복한 것을 아시지요?
성전내에 장사꾼들이 이렇게 판을 치게 된 이유는 바로 편리를 위함입니다. 그리고 욕심 때문입니다. 그것도 권력이라고 그걸 이용해서 이권을 누리려고 함입니다. 정말이지 가소로운 일입니다.
성전을 깨끗케 하신 주님이 다음으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14절에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맹인과 저는 자들이 고침을 받았답니다. 그러나 이들의 질병을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고쳐주신게 아닙니다. 이들이 먼저 주님에게 병고침을 받기위해 나아온 것입니다. 주님이 다가가신게 아닙니다. 이들이 먼저 도와 달라고 손을 내민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독립 유대의 왕이라는 화려한 자리를 멀리하고 오히려 낮은 곳에서 병자들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약간 비약적으로 말한다면 그는 강단에서 높은 곳에서 주목받는 곳에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대신에 낮은 곳에서 현장에서 섬기셨습니다.
이 당시의 병자들은 단지 병만 든 부자나 귀족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들이 지극히 가난하고 힘든 자라는 뜻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렸다시피 육체노동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으며 근근이 살아가는 이들이 몸에 병이 있다면 더구나 앞이 보이지 않거나 잘 걷지 못한다면 아무도 그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일을 못하기에, 물론 재산도 없기에 구걸밖에 할 수 없는 자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에게 병을 고침받은 이 사람들은 평소에 성전에서 구걸하는 자라고 보아도 됩니다. 아니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성전으로 병고침을 얻기위해 나아왔다는건데 아무래도 성전에서 구걸하다가 주님을 보고 나아 온게 더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쨌든 이들은 주님이 자기들의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이라고 믿고 그래요 믿고 그리고 나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이 부활하심을 믿습니까? 그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의 예표임을 믿습니까? 주님은 자기의 질병이 고쳐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나온 이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충분히 나를 고치시고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실 수 있다고 믿어야 만이 고침을 받고 구원을 얻고 영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죄가 있다면 결코 주님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앞에 나가기위해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함 받아야 합니다.
이어서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가 나의 병을 고쳐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가 나를 구원하셔서 영원한 죽음에서 영생으로 인도하실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고 나아가야 부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가만있는데 더러운데 우리가 주님의 부활에 절대로 참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지만 죄인그대로 있어서는 안되고 그들이 회개하고 깨끗해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피흘림이 필요한 것이지요.
처음 부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주님에게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지금 구원해 주소서!
병을 고쳐주는 것은 그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이고 그에게 경제적인 여유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구원인 것입니다.
그래요 주님은 백성들이 요구하는 칼과 무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믿음으로 그들 구원하셨습니다. 궁극적인고 전인적인 구원을 베푸시기전에 먼저 저들의 다급한 상황을 해결하셨습니다. 육체적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에이, 우리가 믿는 구원은 그런게 아닙니다. 건강이나 돈도 중요하지만 영혼이 구원받는 구원이 참 구원이 아닐까요?
좋습니다. 그래요 바로 그 일, 그 궁극적인 구원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난 몇일 후에 이루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루셨지요.
무리들이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칠 때 그 부르짖음이 바로 그 주에 응답받게 된 것입니다.
구원의 여정, 구원코스가 나옵니다.
겸손하라 다음이 죄를 회개하라 그래서 깨끗해 져라 다음이 믿고 다음이 주께 나아오라 그리고 다음이 구원입니다. 육체적인 구원에 이어 궁극적인 영혼구원까지 전인적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매년 부활절이 지나갑니다. 날짜도 막 달라집니다. 그러나 부활의 의의는 기독교에서 절대적입니다. 사실 지난 주는 고난주간이었습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이미 코로나 때문에 우리 모두는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고난 중에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각종 신학적 논쟁이 있지만 그러나 목숨보다 귀한건 없습니다. 이론으로 선동하지 말고 현장에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건 더 중요합니다.
누군가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코로나 사태가 인류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올거라고 말합니다. 끊임없는 개발과 발전에 인성이 매몰된 이 세상에 코로나로 인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원을 약탈해서 더 발전하고 더 부유해지고 더 편리해지고의 시대가 지나간다는 겁니다. 더 이상 대형화가 선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제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고 좋은 집보다 화목한 가정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의 변화가 온다는 겁니다.
더 더 더를 외치는 삶이 행복한가요? 비교하고 욕하고 경쟁하는 삶이 힘들지 않은가요? 남이 불행해야 내가 행복해지는 삶이 올바른가요?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나쁜가요? 꼭 서로 서열을 나누고 비교하고 상대적으로 가치를 매기고 해야 할까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돈으로 나누어야 할까요? 남에게 보이는 것이 중요할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감람산에서 될 수 있으면 자기에게 주어질 잔을 받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셨지요. 그러나 결국은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셨지요.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지요.
그리고 3일간의 사망에서 깨어나셔서 마침내 사망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비록 힘들지만 부활의 빛을 기쁨으로 맞이하기위해 인내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힘들고 고통스럽고 때로 지루하고 생계도 불안하고 여러 가지가 어수선하지만 해결이 멀지 않았습니다. 광명의 아침이 머지 않았습니다.
인내하고 기다린다면 마침내 전염병의 공포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웃으며 서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중국에서 전염병으로 많이 죽었습니다. 서구에서 정말 많이 죽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모든이들이 코로나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공포가 휘몰아 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천년전 부활의 주님은 오늘 코로나 때문에 숨죽이며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부활의 기적을 주실 것입니다.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더 나은 삶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보다 근본적이고 보다 정서적인 그런 사회를 주실 것입니다.
사실 부산은 해외 감염자의 유입말고는 자체 감염자가 없습니다. 더구나 정관은 이런저런 명목의 확진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청정 지역이지요. 그래서 더 감사합니다. 그래도 외부에서 유입이 될 수 있으니까 조심하는 겁니다.
오늘 부활절에 우리가 모이지 못했습니다. 기독교의 이대 명절인 이날도 우리는 가정에서 각자 모여서 예배합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우리는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웃으며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며 기쁨으로 음식을 나눌 것입니다. 그 전에는 약간의 수고와 고통이 따르는 법입니다.
지난 두달간 정말 잘 견뎌 주셨습니다. 비록 서로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형제 사랑이 변치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사랑이 쇠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먼저 육체가 구원함을 받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믿기만 하면. 그가 나를 위해 죽으렸고 그 보혈로 내 죄가 씻겨져서 내가 희어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나는 구원얻을 수 있습니다.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신 그 주님의 부활이 이제 펼쳐집니다. 그 장엄하고 신비로운 부활이 코로나 사태의 종식으로 다시 한번 일어납니다. 우리네 가슴속에 부활의 신비를 되뇌이며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주님을 사모하고 기도하고 기다립시다. 부활절은 지나가지만 머지않아 코로나사태를 지나고 기쁨의 부활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질 지어다. 서로 사랑하고 행복하게 되어질 지어다. 주여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소서!
- 홍종일 목사님 2020년 4월 12일 주일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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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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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저는 언제나 주님께서 약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었다는 사실에 감동하곤 합니다. 가만히 두고 보질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일으키시고, 고쳐주십니다. 믿는 마음만 있다면! 우리네 인생길 역시 약해질 때가 물론 있습니다. 돈이 떨어질 때,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때, 직장에서 고통받을 때 우리는 힘들어 하고, 사실 그렇기에 기도하기도 합니다. 집에서 산책을 나오는데 오래된 찬송가가 마음 속에서 전해져 옵니다.
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했나요. 앞이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세요. "내 인생은 도대체 왜 이래! 나는 왜 이것 밖에 안 될까!" 불평한다고 해서 좋아질 리 없습니다.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감사의 습관이며, 기쁨의 태도 입니다. 뭐... 인생길에는 당연히 고난이 찾아옵니다. 그럼에도 이 일을 통해서 내가 더 주님께 가까이 가고, 때로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나 기적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바로 거기에 신앙의 놀라운 비밀이 있습니다.
자주 쓰는 종교적 표현으로 말한다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은 더 크게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접근하여, 너무 삶이 평탄한 길만 걷는다면 하나님의 체험의 개입과 간섭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C.S.루이스 식으로 말해 구부러진 길도 있고, 울퉁불퉁한 길도 있고, 각종 표지판도 있어서, 저절로 기도하는 것이 진짜 성도가 아닐까요. 하나님은 기도하는 인생에 만나주신다. 그것이 제가 경험한 신앙의 길 입니다.
하나님을 한 번 믿어볼까? 하고 망설이는 사람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자유가 무한히 확장되어 있어서 오히려 사람은 공허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건 아닌데 잘 알면서도 술독에 빠져 지내는 사람은 늘어가고, 무기력에 빠져서 하루하루 우울한 사람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 때 두드립시다. 이단 사이비 말고, 정통 교회의 문을 두드려서, 진짜 멋진 목사님을 만납시다. 함께 기도하며 승리해 봅시다. 그 인생 절제의 길이야 말로, 그 나눔과 교제의 길이야 말로, 인생을 더 풍요롭게 만드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아, 하나님이 만든 이 세계.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이 세계. 나도 믿음으로 동참하고, 참여해서, 찬송가 노래 가사처럼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이름 믿고, 기쁜 마음 얻으리! 그 놀라운 주인공이 되기를! / 2020. 04. 27. 시북 (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