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를 타신 주님 그리고 (21:1-17)
시간이 정신없이 흘렀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완연한 봄입니다. 얼마나 시간이 정신없이 흘렀느냐면 활짝 핀 벚꽃이 지기 시작합니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종려주일입니다. 워낙 코로나사태가 힘들었는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느끼지도 못하고 종려주일이 되었습니다.
종려 주일이라고 하니까 별 감흥이 없습니까? 다음 주가 바로 부활절입니다. 그러니까 종려주일이란 것은 부활절이 바로 다음 주로 다가왔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항상 모든걸 주일에 기념하다 보니까 주중에 일어난 일들도 주일로 지켜서 실제 일어난 날짜하고 기념일이 다른 경우가 많지만 종려주일만은 전혀 다릅니다.
종려주일은 말 그대로 주일날, 일요일날 일어났습니다. 가령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은 실제로 날짜가 주중이라도 우리가 추수감사 주일이니 성탄 주일이니 하고 일요일날 지키는데 종려주일은 진짜로 주일날 일어났습니다. 주일날 주님은 나귀를 타시고 승리의 행진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종려주일만큼 극적인 반전을 가져오는 날도 없습니다. 주일은 종려주일인데 그 주는 고난주간이고 그 주의 금요일날 주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에 부활하십니다. 이건 정말 한편의 너무나 극적인 드라마 같습니다. 기뻤다가 슬펐다가 다시 기쁜 뭐 그런 날이 일주일 안에 일어납니다.
제가 문득 길가의 벚꽃을 보니까 너무나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사람들을 피해서 정신없이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아름다운 꽃과 바이러스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봄의 햇빛 아래서 빛나는 벚꽃이 아름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게 아주 섬세한 꽃이에요. 쉽게 떨어집니다. 아차하면 잎이 다 떨어지고 그 다음부터는 푸른 잎사귀만 남게 됩니다.
그러니까 너무 삭막하게만 살지 마시고 눈을 들어 길가에 피어난 꽃들도 보세요. 이 꽃은 지극히 피어있는 기간이 짧습니다. 번개처럼 피었다가 번개처럼 집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시일이 얼마 되지 않아도 가차없이 떨어져 버립니다. 당연히 이 꽃들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겨우내 수고했다고 우리를 위로하기위해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그 아름다움은 감상하시고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찬양할 일입니다.
제 생각에 이 꽃은 우리네 삶이 풍부해지도록 우리네 마음이 아름다워지도록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정부의 방침대로 잘 따르다 보면 머지않아 무더위가 시작될 것이고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코로나 사태가 지나가지 않을까요? 조심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공포심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물론 집안에서 약간은 지루하기도 하고 경제적으로 어렵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망한건 아닙니다. 망하지도 않을 겁니다.
삶이 비록 팍팍해도 우리 하나님을 믿고 그의 도우심과 자비를 믿고 여유를 가지십시다.
이제 우리 주님이 영광의 행진을 시작하신 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의 행진은 또한 죽음을 향한 행진이었고 마찬가지로 역설적이게도 사망 권세를 정복하는 행진이 되었습니다. 그 뜻깊은 종려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오늘 나귀를 타신 주님을 생각합니다.
문제는 나귀를 타신 주님은 헤롯의 궁으로 가셔서 왕위에 오르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전에 가셔서 백성의 왕으로 추대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나귀를 타신 겸손의 왕은 오히려 자기를 내어주고 몸된 성전을 깨끗게 하셨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습니다.
제가 항상 주창한 종교개혁을 우리 주님이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러 오신 주님은 그 전에 먼저 썩어빠진 성전을 정화하시려 채찍을 드셨습니다. 주님은 헤롯의 궁전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집, 성전을 자기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 거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면 주님의 인상은 부드러움과 온화함 그리고 사랑과 용서입니다. 그러나 그런 주님도 부정과 부패에는 채찍으로 징치하셨고 세상과 짝하여 썩어 돌아가는 성직자와 신도들을 징치하시는데 힘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러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은 맞지만 만일 이때 이 승리의 종려 주일에 나귀를 타시고 왕위에 오르셨다면,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 환호와 열광적인지지 속에 왕이 되셨다면 더러워진 성전을 개혁하고 깨끗하게 할 이는 없었을 것입니다.
대대로 이스라엘의 왕은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탔습니다. 체고도 낮고 몸집이 작아서 전마들에 비해서 많이 모자란 나귀를 타고 왕의 대관식이 벌어지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기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말을 사러 애굽으로 가지 못하게 하셨고 왕의 대관식에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타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탄 왕.
승리의 행진이 추구하는 것은 영광된 자리가 아니라 십자가의 자리였다는 것
환호하고 기뻐하는 이들에게 마찬가지로 자비와 온유를 보이신게 아니라, 마치 정치인처럼 처신하신게 아니라 오히려 단호하게 그러한 세력들과 척을 지시기위해 채찍을 드셨다는 것.
사실 잘한다, 좋다고 환호하는 이들에게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평안하게 할 왕으로 기대하는 이들에게 부드러운 응대 대신에 미소 대신에 관용과 용서 대신에 준엄한 질책과 하나님의 법을 시행하는 일은 정말로 어리석어 보입니다.
이제까지의 온갖 범죄는 내가 다 용서할테니 앞으로는 죄를 짓지 말고 나와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이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사실 나귀새끼를 탔다는 것은 그가 왕이 되실 의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귀를 타신 주님이 왕이 되지 않은 것은 어쩌면 수많은, 호산나를 목놓아 외치는 백성들에 대한 배신일 수 있습니다.
제가 감히 말하건데 우리 주님이 종려 주일의 그 영광을 거부하고 그들의 잘못을 준엄하게 지적하고 성전의 온갖 부정과 부패에 채찍을 휘두르셨기에 그는 왕이 아니라 죄인이 되었다고.
물론 그건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을 그대로 따를 때에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길이기는 한데 주님이 아닌 다른 이였다면 , 주님이 성전에 들어가서 성전 정화가 아니라 온 백성의 환호를 즐기며 그들의 추대를 허용하였다면 그는 왕궁에서 전통적인 유대의 메시야 사역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거지요.
뭐 제 생각입니다. 엉뚱하기도 하고 부질없는 생각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상식으론 그렇습니다. 오늘 교회는, 오늘 성도는, 오늘 목사는 그러해야 합니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해서 잘못된 것도 눈감고 틀린 말에도 찬동하고 오냐오냐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고수하기위해 온 세상과도 싸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나귀를 타신 겸손의 왕처럼 자신을 세상을 향한 제물로 내어놓으신 주님처럼.
지금은 선거철입니다. 수많은 당에서 나온 후보자들이 표를 구걸하고 있습니다. 온갖 공약과 정책이 판을 치고 각종 쇼들이 행해집니다. 약통을 지고 방역을 하는 사람부터 장갑을 끼고 피켓 든 이를 앞세우고 거리를 누비는 이까지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 기발한 행동들이 벌어집니다.
예전에는 지지당을 표하는 맞춤 운동복을 입고 단체로 춤도 추고 했는데 요즘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너무 바깥을 안다녀서 그런지 전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나라의 공복이 되겠다고. 정말 그럴까요? 나라의 머슴이 될까요? 아니면 나라의 압제자가 될까요? 혹 이런 이들이 있습니다. 저를 뽑아주시면 뭐도 하고 뭐도 만들고... 하하, 정말 웃기는 말입니다. 솔직히 저들은 그럴 능력도 없지만 의지도 없습니다. 다만 표가 필요하고 권세가 필요한 겁니다.
우리 주님은 표로 권세를 구걸하는 이가 아니므로 저들의 입에 맞는 공약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저들의 환호를 모른채 하시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시려고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일을 하셨습니다.
성전 정화. 말은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 귀족들과 이들과 연합한 대상인들, 그리고 성전에 깃대어 삶을 영위하는 레위인들 일꾼들 운송업자들 심지어 종들까지 적으로 돌리는 행동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왕이 될 것으로 생각한, 자기를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도 실망시키고 적으로 삼은 겁니다. 결과적으로 워낙 많은 이들을 적으로 돌렸기에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로마의 앞잡이들과 헤롯당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 즉 당대의 정치꾼들을 적으로 돌리는 겁니다. 예수를 죽여도 되도록 명분을 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승리의 행진을 한 그 주에 바로 십자가를 지게 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셨습니다. 벳바게는 예루살렘 인근의 작은 마을입니다. 누구는 벳바게가 예루살렘 입구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벳바게는 우리에게 베다니보다는 덜 유명한 곳입니다.
여하튼 벳바게는 아마 감람산의 동편에 있었던 마을이고 베나디의 인근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벳바게를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덜 익은 무화과의 집’이란 뜻입니다. 아마 이 마을에 무화과 나무가 많이 자랐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마을이 좀 어슬펐던 모양입니다. 잘 익은 무화과가 아니라 덜익은 무화과니까.
이전에 스가랴 선지자는 메시야의 발이 감람산에 설 것임을 기록합니다. 과연 우리 주님은 메시야 사역의 절정인 승리의 행진을 시작하기위해 감람산 동편의 벳바게로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 두제자를 보내시며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여기서 하나 더 부언해야 될 것은 예수께서 겸손의 왕으로 나귀를 타신 것이지만 실제로 어미 나귀가 아니라 새끼 나귀를 타셨다는 겁니다. 놀랍지 않나요? 나귀를 탄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가 메시야 이심을 드러낼 수 있음에도 그는 굳이 어미 나귀가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겸손과 겸비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보통 왕들이나 장군들이 개선식을 할 때는 대부분 말을 타지 나귀를 타지 않습니다. 나귀를 타고 전쟁을 한다는게 좀 이상하지 않나요? 물론 압살롬은 전쟁터에서 나귀를 타고 도망을 가다가 머리털이 나뭇가지에 걸려서 죽었지만...
말이 아닌 나귀를 탄다는 것은 전쟁이나 정복왕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겸손과 평화를 상징하는 왕으로서 나귀를 타도로 되어있습니다.
옛날 솔로몬도 왕위에 오를 때 나귀를 탔지요. 정확히는 성경에 노새라고 되어 있는데 열왕기상1:33에 보면 다윗이 솔로몬으로 하여금 왕이 되게 하려고 “내 아들 솔로몬을 내 노새에 태우고 기혼으로 인도하여”
그러니까 왕의 전용 노새가 있었고 이 노새에 탄다는 것은 곧 왕이 된다는 의미를 가진다는 겁니다. 우리 주님 역시 평화의 왕으로 겸손의 왕으로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제가 이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아니 자기 것도 아닌데 제자들에게 나귀를 풀어서 데리고 오라는 말이 과연 타당할까요?
이건 솔직히 도둑질이 아닌가요?
주께서 이러한 상황이 될 것을 미리 아시고 제자들에게 대답할 말을 알게 하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주가 쓰시겠다는 말 한마디에 즉시 나귀를 풀어 가져가는 것을 허락한 나귀 주인은 누구일까요?
보다 정확히 본문을 살피면 ‘주가 쓰시겠다’는 말 안에 생략된게 있습니다. 그.
그러니까 원문은 ‘바로 그 주가 쓰시겠다’ 이 말입니다. 나도 알고 너도 아는 바로 그주가 쓰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나귀 주인도 나귀를 풀어가려는 제자들을 알고 또 주님을 섬기는 제자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귀 주인이 예수의 제자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글쎄요, 아무리 주가 쓰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선뜻 나귀를 내어 준다는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주님의 최후를 위한 모든 일이 너무나도 부드럽게 형통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노숙을 다반사로 하시고 배고픈 것을 여사로 여기는 주님에게 나귀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제자에 최후의 만찬 장소를 제공하고 음식까지 제공하는 제자가 있고 수십만의 군중이 그를 환호함으로 맞이하고 그의 행렬을 따라 행진한다는 것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모양새입니다.
이건 다 그리스도의 최후의 종려 행진이 모두 구원사역을 이루시기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하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에게 십자가를 지우시기 전에 그의 행진을 차질없이 진행되도록 세밀하게 준비하셨다는 겁니다.
주님은 확실히 대중 정치가의 자질은 없습니다. 인기 영합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모든 무리들의 바람과는 딱 반대로 행동합니다. 그는 부패한 성직자들을 징치하고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기위해 허리끈을 풀어서 채찍으로 삼아 휘두르셨고 장사꾼들의 상을 뒤엎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짐승들을 성전 밖으로 쫓아버리셨지요.
이런 식의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나귀새끼가 아니라 덩치가 큰 말을 타고 입성하셨어야 합니다. 자기를 따르는 이들에게 높은 자리를 보장하고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충성맹세를 받고 난 다음에야 할 수 있는 폭거입니다. 그러나 그는 일반적으로 필요한 조치는 전혀 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만을 쫓았고 그래서 십자가를 지게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돌아갈 천국이 있으므로 배짱을 부려도 됩니다. 세상 권세가 그를 감히 구속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잡히신 것은 그의 스스로의 의지로 말미암은 것이지 대제사장의 종들의 무력에 잡히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주님을 지킨다고 칼을 빼어 말고의 귀를 자른 베드로의 수고도 헛된 것입니다. 감히 이 세상에서 그 누가 주님을 속박하고 체포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그 어느 것도 주님을 가둘 수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제물로 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주께서 잡히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공생애 초기에 고향 나사렛에서 사람들이 뒷산의 절벽에 그를 밀어 떨어뜨리려고 할때에 저들의 눈을 어둡게 함으로 그곳에서 헤쳐나오신 일을 기억하시면 이번에도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영광의 종려 주일. 이제 사람들은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종려 가지를 흔들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며 소리칩니다. “호산나 다윗이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바로 여기 호산나라는 말에서 우리는 왜 그들이 그렇게 삽시간에 주님을 적대하고 죽이라고 광분하여 외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원컨대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70인역에서는 한층 더 강조하여 ‘지금 구원하소서’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백성들은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이 듭니다. 로마의 압제와 이방인에다 잔인한 헤롯왕의 압제와 종교귀족들의 수탈에 찌들린 백성들은 자기들에게 해방과 안식을 가져다 줄 그러니까 지금 당장 구원해 줄 메시야를 환영한 것이지 먼 후세의 위대한 구세주를 기다린건 아닙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서 정치적인 위력을 발휘해서 그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나라의 해방과 압제에서의 자유를 요구한 것입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그런 구차한 삶 말고 성경속 에 나왔던 무화과 아래 누우며 포도주를 마시며 감람유를 짜는 그런 안락한 삶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최종목표가 그게 아니었습니다. 육의 나라가 아니라 영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의 지금 당장 구원해 달라는 호산나라는 요구하고 전혀 맞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어떻게 참았는데 또 더 참아? 우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인내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할 것을 요구하는 주님이 미웠던 것입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지금 당장 폭압과 수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애타는 심정을 몰라주고 기껏 하나님의 집이니 하나님의 법이니 하는 주님이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이게 생각납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 여기서 포도원 주인은 한명 이지만 일꾼들은 많이 있습니다. 게다가 저녁이 되도록 일거리를 구하지 못해 광장에서 서 있는 이들도 많았다고 하지요?
우리 주님의 비유는 현실과 동떨어진게 아니라 현실을 은연중에 많이 내포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직업도 땅도 없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품팔이하는 이들이 매우 많았다는 겁니다.
오로지 몸뚱이로 육체노동을 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들이 눈이 어둡거나 다리가 불구이거나 귀가 어둡거나 해서 노동을 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건 구걸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주님이 그들의 장애를 고치신 것은 그들의 장래를 고친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구걸하지 말고 일을해서 먹고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운이? 좋아 일거리를 구해서 일을 했고 품삯을 받았지만 내일은 어찌될지 몰라서 암담한 그런 이들에게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니 먹힐까요? 지금 당장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호산나를 외치는 이들에게 먼 미래를 소망하라는 말은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왕위에 오를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자마자 가장 강력한 주님의 박해 세력이 된 겁니다. 왜냐면 지금 당장 자기들을 구원해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사실 사람들은 너무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을 바라왔습니다. 그 사이에 마카비 왕조가 있었지만 성경에서 예언된 다윗의 후손이 왕좌에 올라서 이전의 부강한 나라를 이루기를 원했습니다. 나라가 강해진다는 것하고 백성들의 고단한 삶이 무슨 상관일까요
그들은 다윗왕국이 재건되면 자기네들의 삶이 나아지고 이전에 성경에서 말했던 꿈같은 풍요함과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사람들의 열망도 커져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은 이런 백성들의 기대가 배신 당했을 때에 그들이 어떻게 반응 할지를 모르시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십자가 고난이 보통 어려운 길이 아님도 충분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감람산에서 밤새 기도하실 때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졌다고 하지요. 그 잔을 마시지 않으려고 그렇게나 거듭 거듭 기도하셨지요.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은 바로 이 승리의 행진에서 우리 주님이 지상의 왕국의 아니라 하늘의 왕국을 택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사망에서 살아나신 부활절을 한주 앞두고 슬프지만 아름다운, 겸손의 왕이 행하신 승리의 행진, 종려주일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종려가지를 길에 까는 것은 승리의 왕에 대한 경배와 환호의 뜻입니다. 그들이 괜히 종려가지를 꺾은게 아닙니다. 괜히 호산나라고 외친게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웃고 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억눌리고 고통받았던 그들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영혼의 외침이었습니다.
한 덩이 빵과 한 모금 포도주를 요구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살과 피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 살과 피는 또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많은 사교주들이, 많은 이단들이 바로 이 승리의 행진에서 마음을 잡지 못하고 그래서 넘어진 것입니다. 안 그래도 힘든 이들의 등에 올라타서 무거운 짐을 올려놓고 자기까지 올라타서 빨리 뛰라고 채찍을 휘두른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그만큼 대접받고 부귀영화를 누렸으면 되었지 그걸 세습해서 자식들도 부귀를 누리기를 원한 이들이야 말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 자들입니다.
종려주일 예루살렘 문앞에서 주를 주를 맞이하는 사람들 주를 따르는 사람들이 외친 그 외침은 정말이지 눈물겨운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온다’는 말은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라는 시편118:2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방금 백성들이 외친 말을 다시금 우리식으로 풀이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러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해 주소서”
삶에 지치고 힘들어하면 억울함을 당해도 하소연 할 곳 조차 없는 백성들에게 하나님만이 구원이 되시고 소망이 되신 것입니다. 종려 주일은 참으로 즐겁고 기쁜 날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런 백성들의 간절하고 처절한 외침을 외면해야 하는 슬픈 날이기도 합니다.
종려 주일은 온 백성과 주님이 하나 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 날이지만 또 한편으로 인간의 비뚤어진 그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백성들의 민낯을 보인 날이기도 합니다.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 싶으면 겉옷까지 깔고, 종려 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치기도 하지만 이익이 되지 않고 오히려 손해가 된다 싶으면 언제 그랬더냐는 듯 돌아서서 돌로 쳐죽이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칠 수 있는 자들의 처절한 민낯이자 삶의 현장에서 그대로, 인간욕망의 깊은 본성에서 울려 나는 소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종려 주일도 귀하지만 이 종려 주일의 일주일 뒤에 부활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과연 올해에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님의 부활을 확인시켜 주실지 정말이지 궁금하고 기대가 됩니다.
연합집회로 모이고 흰옷을 입고 철야 기도를 하며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는 일은 이제 아득한 옛 추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오늘을 사는 우리도 주님의 부활을 사모합니다. 그가 부활했듯이 우리네 삶에서도 부활의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코로나로 얼룩지고 두렵고 공포 스러운 모든 옛것을 이기고 밝고 힘찬 새날의 빛이 비취는 그런 부활절을 소망해 봅니다.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 눈으로 주님이 주시는 기적을 똑똑히 목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기적에 함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20년 4월 5일 주일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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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인터넷 바다에서 원하는 정보를 얻기가 더욱 편리해졌고, 검색엔진은 신이라고 칭송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글을 읽었습니다. 일본 도쿄에서 무차별살인을 저지른 이가 하루 종일 휴대폰을 손에서 놓치 않았다고 합니다. 자아가 과잉되어서 폭발해 버린 것입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인간은 가만히 놔두면 악의 방향 쾌락의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고 간파했습니다. 그래서 절제를 미덕으로 삼아, 훈련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생각의 방향을 조심해서 정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알코올 의존, 정신적 병세는 현대가 되면 더 늘어나기 쉽습니다. 세상이 그 방향으로 부추기니까요. 더 너의 가능성을 짜내어 봐, 넌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이것도 해봐, 저것도 해봐, 유혹합니다.
저는 단호히 잘라 말하겠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도 아름다운 것이 사람입니다. 상처를 입은 인생이라도, 감사의 태도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너무 몰아붙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이어스 찬양 가사와 같습니다. 연약함 그대로 사랑하시며, 나의 모든 발걸음 주가 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인도를 구하고 기도해 봅시다. 주님의 인도... 그 말이 좋습니다. 더 빠르게? 더 효율적으로? 아니오. 세상의 바람과는 다르게 살아도 얼마든지 좋습니다. 어쩌면 그 인내와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인간의 고귀함이 담겨 있지 않나 싶습니다. / 2020. 04. 28. 시북 (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