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미가7:7-8)
우리는 오늘 코로나 사태를 겪은 이후에 처음으로 에배당의 문을 열고 모였습니다. 장장 석달간이나 예배당의 문이 닫혔고 그동안 우리는 각자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그 전염병의 대유행 속에서도 안전하게, 아무도 병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교회에 모여 에배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서로 건강한 모습을 보니 정말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그동안 석달이나 하지 못했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우리는 이 사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기적의 손길을 체험했습니다.
사실 오늘날 같은 세계화 시대에 우리만 안전하기가 어렵습니다.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에서 무작정 외국인들을 막기도 어렵습니다. 물론 여기에 불만이 많은 분들도 있습니다. 왜 외국인들을 막지 않고 자꾸 들어오게 하느냐? 저들은 동포도 아니고 한국사람도 아니고 검은머리 외국인이다. 내 세금으로 왜 저들을 치료하느냐?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오죽 답답하면 그렇게 반응할까요? 우리는 충분히 저들의 불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잘 나가다가 게이들 때문에 지금 코로나가 지역사회로 급속히 다시 확산되는 추세입니다. 저는 서울사람은 아닌데 부산에서도 서울 클럽에 갔다가 걸린 한사람이 나왔는데 앞으로의 추세가 걱정입니다.
설교 원고를 점검하는 토요일 서울의 박시장이 클럽같은 다중이용 유흥시설의 영업금지명령을 내렸습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이 시점에 개인들의 성욕 때문에 나라를 망치는 일은 분명 자제되어야 합니다.
기껏 석달만에 문을 연 교회가 다시 문닫는 일은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나라를 지켜주소서!
그건 잠시 놔두고 무엇보다 그 위험한 코로나 사태에서 선방했다는 것에 축하를 드리고 정부와 의료진과 국민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교인들도 무사히 생환하게 됨을 서로 서로 축하해야 합니다.
이러니 제가 마치 정부 대표자가 된 것 같지만 우리는 충분히 이 나라의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해도 됩니다. 그리고 지난 석달간 마스크 끼고 소독제를 발라가면서 거리두기를 실천한 것에 스스로 공을 치하하고 축하할 자격이 있습니다.
특히 이번에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헌금을 모아서 개척교회를 돕는 이들이 많았다는 사실에 너무 감사합니다. 아직 이 땅에 건강한 믿음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아마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저도 정말 힘들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뀐듯한 기분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제가 이번에 처음으로 우리 빌딩의 원장들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신천지냐는 확인전화. 하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욕 듣기는 처음이지요? 예, 그러나 이제 그것도 다 옛말이 될 겁니다.
우리는 ‘코로나 심판’을 겪고 한층 더 건강해 질 것입니다. 제가 웃기게도 두가지 논조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코로나에 대한 공포와 인간이 물러간 자리에 빠르게 자연이 복구된다고 하는 그런 두 종류.
이런 전염병의 유행은 보통 사람들에게 말세의 징조로 또 하나님의 음란한 세대에 내리는 심판으로 여겨집니다.
뭐 우리가 죄지은 것도 없는데 무슨 심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개개인의 특별한 일은 제외하고라도 그동안 우리 사회가, 이 땅의 인류가 너무 오만하고 너무 욕망에 차서 정신없이 성공을 추구하며 남을 짓밟고 자연을 수탈하고 약한 자를 억압하며 약탈경제식으로 살아온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속상한 것은 우리나라는 인구가 자꾸 줄어가는데 세계적으로 인구는 지금 폭발적입니다. 인구가 적어야 대접받는다고 주장하는데 문제는 모든 나라가 동시에 인구가 줄어드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출산율이 떨어지니까 노인들이 많아지고 아이들이 줄어듭니다. 결국 누군가는 도저히 노인부양을 감당하지 못해서 파산을 선고하게 될거라는 점입니다.
게다가 게이가 이렇게 판을 치고 그래도 게이들을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일부 언론들의 작태를 보면 정말이지 화가납니다. 잘못된건 잘못된 거지요. 그들은 게이라고 하지 않고 호모라고 하지 않고 성소수자라고 합니다.
좋아요. 성 소수자. 그럼 성 다수자들이 그들 때문에 피해를 보고 저들의 기분을 맞추어 주어야 한단 말입니까? 도데체 극 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다수자의 권리를 제한해야 한다는 웃기는 생각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물론 그렇지 않아도 젊은이들은 결혼도 출산도 족쇄로 여기고 기피합니다. 그들의 향변은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어차피 부자들의 노예를 낳을바에야 차라리 애를 낳지 않겠다는 저주인지 푸념인지 신념인지...
기성세대에 대한 그들의 불만은 충분히 공감합니다. 인간이 귀한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옛날에는 권위주의 정권 때에 우리국민들은 정말이지 제대로 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애를 안낳고 스스로 멸종을 택하겠다는 저주는 정말이지 너무 서글픕니다.
젊은이들, 화를 푸세요. 오히려 더 멋진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주시고 동참해 주세요. 그리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갈길은 멀지만 이미 우리는 첫발을 내딛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사람귀한 줄 알아야 된다고 본때를 보인다고 애를 안 낳겠다는 말은 좋아요. 그러나 인구가 줄어든 우리나라를, 경제 활력이 떨어진 우리나라를 주변 나라들이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힘없고 탐스런 먹이를 가만 두고 있을 맹수가 어디 있을까요? 설마 다른 나라를 믿고 있지는 않겠지요? 세상에 믿을 사람, 믿을 나라가 있다고요?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주만이 나의 구원이 되십니다. 그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1.오직
오늘 본문은 7절에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면 본문의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앞 절과 관계가 애매해 집니다. 1-6절까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오직’이란 말보다 오히려 ‘그러나’로 시작해 보면 뭔가 이해가 바로 옵니다.
세상이 이렇게 힘들고 형편없어져도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고 자행자지하며 음란하고 죄를 지어도 그러나 나는 여호와만을 우러러보고 의뢰할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 성경이 ‘그러나’가 아니라 ‘오직’이라고 번역한 것은 나름대로 의도가 있습니다. 세상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기본 신앙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주님을 더불어 바라고 믿을 수 없다는 거지요. 그리고 혼탁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바라는 이들이 그만큼 적다는 거지요.
그래요 세상이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더 바라고 의지하고 믿어야 합니다. 왜냐면 이 모든 어려움을 피하게 하실 이는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2.나는
계속해서 본절을 자세히 보면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라고 하고 있지요?
우리나라도 그렇고 히브리 사람도 그렇고 말할 때 주어를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나는’ 이런 식으로는 잘 말하지 않습니다.
길을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어디갑니까? 집에 갑니다. 보통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어디로 갑니까?” “나는 집으로 갑니다” 이렇게는 말하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주체가 누군지 알기 때문입니다. 말 안해도 당연한 것을 괜히 힘들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걸 발음경제원칙이라고 합니다. 될 수 있으면 간단하게 발음하기.
그렇게 ‘내가’를 강조하지 않아도 내가 하는 말이니까 당연히 ‘내가~한다’는 것을 상대방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은 간단하게 쉽게 그래야 바로 그 말의 뜻이 와닿는 거지요.
특히 히브리어에는 동사가 이미 주어를 암시하는 기능을 합니다. 내가 집에 가는지 네가 집에 가는지 우리가 집에 가는지 ‘간다’는 말을 보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도 ‘나는’이란 말을 굳이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을 알려면 먼저 4절을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들어가는 내용은 아니지만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내용입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나는 하나님의 성도다’ 라고 말하지만 그런 사람 조차도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이웃을 가만히 찌르는 가시처럼 까칠하게 굴고 상처를 준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회 도덕이 그만큼 땅에 떨어지고 윤리가 쇠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이 사라진 세상에서 그러나 나만은 하나님을 우러러며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일정한 정도를 넘어서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상대를 향하여 무례해지고 까칠해진답니다. 심지어 쥐들의 실험에서는 수용공간의 50%에 쥐 숫자가 도달하자 그때부터 새끼를 낳지 않고 서로 공격하는 공격성이 부쩍 높아 지더랍니다.
그래서 애를 낳지 않는 저출산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하지요? 우리네 노인들과 우리네 자식 손자들은 어떻게 하지요? 그때까지 이 땅에 한국어가 국어로 남아 있을까요? 그때까지 한국인이 이 나라의 주인으로 있을까요?
오늘 본문 7절에서 중요한게 바로 ‘나만은’ 이란 말입니다. 세상이 말세지말을 당하여서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해지고 음란해지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세상으로 나가는 그런 판이라도 나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믿을 것이므로 너희도 나를 본받아 세상과 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하고 싶어서 ‘나는’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가 항상 걱정하던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물론 걱정하기는 하지만 약간은 포기상태? 그런 문제가 있는데 그게 바로 저출산으로 인한 나라의 멸망입니다. 지난주엔가 기사가 난 걸 보았는데 옥스퍼드 교수가 예측하기를 저출산으로 인해 나라가 없어질 나라로 우리나라를 꼽았습디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금세기 안에 인구가 1/3로 감소하고 나라가 없어진다는 거지요.
그리고 그전에 이미 인구비율의 왜곡으로 인해서 경제활동이 파탄이 나고 점차 망한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제가 생각을 해보니까 저는 걱정이 없어요. 그런데 제 자식 때에는 그들이 한창 활동하고 가정을 이루고 살아갈 때에 이런 경제적인 파탄이 오고 자식들이 죽기 전에 나라가 없어지는... 제가 생각해도 너무 끔찍합니다.
지금처럼 코로나를 잘 극복하고 경제적으로도 선방한 상황에서 비관적인 전망을 말한다는게 너무 말이 안될 것 같지만 앞으로는 경제가 더 어려워질 것이고 자민족 중심 고립주의가 생겨날 것이고 당연히 인종차별이 많아질 것이고... 과연 우리의 후세들은 어디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하니 참 지금 우리가 잘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보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그래서 미가는 본문에서 그렇게나 ‘나’를 강조합니다. ‘세상이 비록 악하고 미쳐 돌아가도 나만은 그래서는 안되겠다’ 그러니 당신들도 나를 본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세를 보여달라는 겁니다.
나는 여호와를
나를 구원하시는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가 한 절에서 무려 네 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요 하나님 앞에서 ‘나’가 그렇게나 중요합니다.
3.여호와를 우러러보며
그래서 우리의 선택은, 우리가 취한 해법은 하나님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이나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로 말미암아 일본은 우리가 한 수 아래로 보고 있고, 중국은 두수 아래로 보지만 그 동네가 사람 숫자가 너무 많아요. 일본은 몰라도 중국은 숫자상 도저히 경쟁이 안됩니다.
남북한이 하나로 뭉쳐도 방어가 어려운 판에 둘로 나뉘어 서로 싸우니까 이건 뭐 주변 나라에게는 그저 먼저 주워 먹는 사람이 임자라는 그런 식입니다. 일본이 방사능 오염지역이 너무 많아요. 국토의 1/3가량 된다는데 게다가 국토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다니까 새로운 땅이 필요합니다. 지진에도 안전하고 해일에도 안전한 나라 사막화의 위험도 없는. 그래서 일본인들은 남한을 노린다는 겁니다.
한편 중국은 북한을 노린다는 거지요. 동해상으로 직접 진출하려고 한답니다. 유사시에 북한에 진주할 25만의 군대를 국경에 배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은 이를 방관하거나 중국에게 주기 보다 차라리 일본에게 주려고 한다는 겁니다. 혼자서 중국을 상대하기가 이제 버겁다는 거지요.
몇 주 전에 기사가 났는데 그걸 보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황당해했습니다.
북한이 붕괴하면 주변 나라들이 다 갈라 먹는다는 거지요. 정말이지 웃긴 것들입니다. 그 지도의 출처는 미국입니다. 그러니 어느 나라도 신뢰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믿을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밖에는 없습니다.
국익에 따라 우방이니 혈맹이니 하는 것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어제의 우방이 오늘의 적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맹목적으로 이웃 강대국은 믿다가는 정말이지 큰일 납니다.
문제는 경제력이나 국방력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도 충분히 강하고 부유한 나라이지만 문제는, 정말 생각해야 할 점은 도덕 수준입니다. 윤리의식입니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신앙심입니다.
무신론자가 공산국가도 아닌데 이렇게나 많은 나라는 세계적으로 없습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종교인구가 무신론자보다 많습니다. 비록 이교를 믿어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무신론자들은 너무 많습니다.
모두가 자기의 소견에 좋은대로 행동하게 되고 자기가 모든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되면 사람들은 이기적으로 변합니다. 자기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한 자가 됩니다.
전형적인 소인배는 그렇게 행동한답니다. 옛날에 모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하려고 노력한다. 그분은 기독교인입니다. 아마 하나님이 그렇게 훈련시킨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절대자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행자지한다면 사람은 어디까지 이기적이고 악해질지 모릅니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천사와 짐승의 중간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자칫 잘못하면 한없이 잔인하고 야비해 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더 이상 이게 올바른가 아닌가로 심판하지 않고 나에게 유리한가 아닌가로 판단하는 세상이 된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칙이 작동할 수가 없습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이 오면 침묵하는 다수의 좋은 사람들은 손해를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세에 더 발악을 합니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더 많은 이익을 추구하려고.
세상에서 뽈리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양심이 무뎌지고 하나님을 아는 영이 잠들게 된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법칙이 작동하지 않게 된다면 그 누가 우리의 사회를 위해 고언하려 하겠나요?
제가 이번 코로나사태의 종식때까지 하루에 한끼를 금식하는 여종을 알고 있습니다. 놀라운 신앙입니다. 자기하고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코로나의 종식을 위해서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아닌데 민족의 안녕을 위해서 기도하는건 정말이지 감동적인 일입니다. 우리에겐 아직 이런 기도하는 종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이 땅에 희망이 있다는 겁니다.
4.하나님을 바라보나니
그래서 ”그러나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을 보면 요즘 무서운 생각이 드는게 지금 경제활동을 재개하라고 총기를 들고 시위대들이 주 의사당을 점거하는 일이 벌어지고 총과 총알을 사재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러면서 정작 마스크는 안 쓸려는 모습을 보면서 이게 바로 지옥으로 가는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동네가 지금 120만의 확진자에 7만여의 사망자를 기록중인데 전혀 우리 기준으로 안전하지 않은데도 죽겠다고 난립니다. 답답하고 배고프고 나가고 싶어서...
병 걸려 죽으나 굶어 죽으나 같다는 생각으로 외치는 겁니다. 내일은 없는 이들의 생각입니다. 이게 더 큰 비극을 초래할터인데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동안 사재기한 총과 총알을 가지고 만일 ’죽이고 뺏들고‘가 시작된다면 그게 바로 지옥인 것이지요. 그래서 사탄의 법이 작동하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정직하고 선량하며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본 기사가 기가 찹니다. 코로나 사태로 세계적으로 2600만명이 실직하는 동안 억만장자의 재산은 467조가 늘어났답니다. 와우 정말이지 끔찍합니다. 이런 식이면 결국 폭동이나 대혁명이 일어나서 죽고 죽이는 무서운 사회가 올 수 있습니다. 제발 이런 세상이 그치고 사랑과 화합의 사회가 오면 좋겠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서로 단결하여 그걸 극복하는게 아니라 그 위기를 기회로 재산을 증식하는 일이 정말이지 하나님 앞에서 벌어진다는게 너무 죄송합니다. 목사로서 성도로서 그런 풍조를 막기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하는데 정말이지 답답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죄악 중에 있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온통 세상에 눈이 팔려 하나님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보내시는 신호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래서 이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이가 없어 진다면 이 세상이 암흑 속에 빠지고 부패를 방지할 제어장치가 없어진다면 그 다음은 멸망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아무리 광란해도 나만은 하나님을 믿고 그만 바라볼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7절에 보면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하나님을 바라보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러러보는 것 하고 바라보는 것 이렇게 두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약간은 다른 의미입니다.
먼저 ’우러러본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주시하다‘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파수꾼이 사방을 주시하고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의 ’바라보다‘는 말은 주목한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소망 중에 기대하며 인내하고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앞의 ‘우러러보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면 뒤의 ‘바라보다’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고대하고 인내하며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이 본문은 아주 간단하지만 깊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이 두가지를 다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집에서 그냥 멍하니 있는 것, 속으로 믿기는 하지만 어떤 믿는 행동도 따르지 않는 것은 사실 믿는 것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마음속으로 아무리 강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겉으로 보기에 어떠한 그리스도인다운 행동도 없다면 불완전한 신앙입니다. 식사 기도도 하지 않아요, 성경도 읽지 않아요, 당연히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불의를 보고 화내지 않고 의인의 핍박에도 잠잠합니다. 그건 성도가 아닙니다.
신자의 표를 낸다고 한다면 눈뜨고 일상생활 중에 잠시 ‘주여, 저를 지켜주세요’ 정도. 속으로 하는 기도인데 겉으론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오죽했으면 그 사람이 예수믿는 사람인지 몰랐다는 반응을 사후에 남기게 된다면? 정말이지 놀랍지요?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나요? 하나님이 자기를 찬양하라고 주신 입을 꽉 닫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아닌척 하고 산 사람에게 하나님은 어떤 처우를 하실까요?
대부분 이런 식으로 하다 보면 자녀들에게 신앙을 넘겨 주기가 어렵습니다. 믿음을 상속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건 자녀교육의 실패입니다. 그러므로 고대한다면 눈으로도 보고 마음으로도 기대해야 합니다. 영육이 조화를 이루어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보세요. 7절 끝에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전문을 다 보면 ” 내가 여호와를 우러러 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면 좋겠습니까? 그가 나의 기도를 들으시기를 원하십니까? 내가 기도 응답 받기를 소망하시나요? 그렇다면 마음으로도 육신으로도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하고 믿는다는 표시를 보이세요.
나의 행실이 어지럽고 혼탁하며 음란한 세상에서 성도의 지표가 되도록 노력하세요. 세상 모두가 한 푼의 이익에 눈이 벌겋게 되고 욕정에 눈이 멀고 인간의 도리가 땅에 떨어진 세상에서라도 나만은 내 가정만은 하나님을 바라며 의지하세요. 그러면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코로나 사태가 좀 잠잠해 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랜 기다림 끝에 모였습니다. 다시 예배당의 문을 열었고 서로 마주하며 행복합니다. 그런데 날씨가 추워지면 늦가을부터 다시 코로나가 유행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백신이나 치료제나 나오지 않은 다음에는 코로나의 종식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제는 옛날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에서도 여호와만을 바라며 믿고 행동하는 우리 성도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그가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행위가 점점 악하여지고 자연환경이 점점 열악해 져도 결코 실망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이 세상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며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요 그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그를 소망하며 경외하여 그의 길을 따르는지 아닌지에 있지 다른 상황의 변화와 여건은 모두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일들의 열쇠입니다.
6.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8절 전반부에서 미가는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뭐 솔직히 미가가 지칭하는 특별한 대적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애굽이니 앗수르니 바벨론이니 하는 특별한 대적을 두고 말하는게 아닙니다. ”김 아무개, 박아무개, 이 아무개가 나의 원수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특별한 대상이 아니라 가상의 적을 두고 실제로는 하나님의 선택받는 자들에게 말하는 겁니다.
뭐라고 말하는고 하니 먼저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대적들이 나의 실패를 기뻐하는 것은 너무 이른겁니다. 왜냐면 나는 엎드려질지라도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믿는다고 까불더니 꼴 좋다!“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넘어진 나를 일으키실 것이요 넘어졌다 일어난 다음에는 엎드러 지기 전보다 더 강하게 더 힘차게 활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쉬고 다시 일어나니까 당연히 힘이 보충이 되고 새롭게 힘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의 하나가 바로 한번 주류에서 이탈하면 절대로 다시 주류에 편입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두가 아등바등하면서 주류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요 에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도에게는 예외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모신 성도가 가는 곳이 바로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성전이요 하늘궁전인 것처럼 하나님의 성도가 가는 곳은 길이 되고 형통해 지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원래의 예언적 의미를 살펴보면 미가는 이스라엘이 비록 멸망할지라도 다시 나라를 회복할 것을 말하는 겁니다. 비록 지금은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만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 심판은 미워서가 아니라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신천지 때문에 코로나가 확산되었지요? 신천지를 제하고 건강한 영적인 사회를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게이들 때문에 코로나가 확산되었지요? 게이를 미워하고 바른 건강한 성생활을 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비록 어려움을 겪고 곤란에 처해도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이대로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셔서 높이 들어 올리실 것을 믿기에 우리는 대적 앞에서 당당하게 기뻐하지 말라고 외칠 수 있는 겁니다. 먼저 스스로 자신과 주변을 둘러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법대로 살면 됩니다. 먼저 우리 안에 죄를 제하고 하나님앞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어두운데 앉을지라도’에서 우리는 단지 넘어졌을 뿐만 아니라 어두운데 앉은 멸망한 나라의 백성된 이스라엘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뭔가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나아갈 때하고 ‘아무 희망이 없다’고 하는 정도의 상태 하고는 천지차이 입니다.
7.나의 빛이 되실 것이다
어두운데 앉아있기에 사방이 캄캄하고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한치 앞도 볼수 없는 불안하고 암담한 현실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어두운데 앉아서 절망속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빛입니다. 빛만 있다면 더 이상 그곳이 절망적일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빛, 이 절망적인 어두운 현실을 밝혀줄 빛은 어디에 있지요?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그래요, 여호와 하나님이 빛이 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비록 지금 어두운데 앉아 있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모신다면 빛을 소유한 것이 되고 그러면 그곳은 더 이상 어두운데가 아닌겁니다. 그런데도 빛을 모시지 않을 것입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을 모시지 않을겁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불안하고 불평만 할겁니까? 망하게 되었도라고 한탄만 할겁니까?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 귀결됩니다. 이게 정말 웃긴 말 같습니다. 과학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논리와 이성이 판치는 세상에서 모든게 합리와 효율로 대변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모십니다.
불가능한 것,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것에도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답이라는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술술 풀리게 되리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신앙선조들의 기록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보아야만 믿는 세상에서
눈이 가장 정확한 경험인 세상에서
우리는 보지 못하고 믿을 것을 요구받습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능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치 바람같습니다. 보이지는 않아도 그 세기와 낙엽이 날아오르고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얼굴이 따갑고 눈을 떨 수가 없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감각적이므로 보는 것을 제일로 치지만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소중한 것이 많습니다. 사랑과 행복은 보이지 않습니다. 감동은 느끼는 것이지 보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아버지시며 이 우주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복지부 장관이 모 신문과 인터뷰한 기사가 나오는데 백신이 나오지 않은 다음에는 해외여행은 어렵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또 하나의 기사는 손씻기하고 마스크 착용을 생활화하니까 감기니 수두니 눈병이니 각종 전염병이 싹 사라졌다는 이야기.
또 어제는 저 윗동네에서 게이클럽에 간 사람이 코로나를 퍼뜨린 이야기가 기사에 실렸습니다. 용인인지 이태원인지 하룻밤 사이에 5군데의 클럽에 갔답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발정이 나서 그렇다고 욕을 합니다. 명단에 적혀있던 연락처의 3/2가 거짓이랍니다. 그래서 지금 전국이 게이발 코로나의 확산세에 난리가 났습니다. 비상입니다.
그런데 곧 이어 모 신문이 이렇게 말합니다. 게이라는 걸 굳이 밝혀야 하나? 게이하고 코로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 뭐 틀린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처음에 게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면 게이들이 욕을 덜 먹고 무사히 넘어갔을 겁니다. 그런데 그걸 밝혀서 욕먹는게 아쉬웠나 봅니다.
그 신문은 제가 이름은 밝히지 않겠지만 직원들 월급은 안 주면서 게이 옹호가 전체 국민의 목숨보다 소중한 걸까요? 게이가 양지로 나오고 누구나 게이가 되는 그런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걸까요?
민족이 멸종이 되어도 게이들의 인권이 더 중하다고 진심으로 믿는 걸까요?
제가 이걸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이건 순전히 제 생각이고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번 코로나를 통해서 인류를 약간만 심판하시면서 얘들아, 이래도 바르게 살지 않을 거야? 이래도 세상으로 다니면서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을거니? 나는 너희를 만든 창조주요 너희의 아비야. 그런데도 아직 정신차리지 못하고 나를 적대하며 원수의 종노릇 할 거니?
에이즈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은 게이들을 무차별적으로 비난했습니다. 비역질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소수의 사람들과 게이들이 힘을 합쳐 에이즈가 게이들 때문에 생긴게 아니라는 논리를 자꾸자꾸 퍼뜨렸습니다. 통계는 거짓말 하지않습니다. 게이들이 에이즈 확산에 주요한 원인자임이 확실한데도 애써 외면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고 자기를 합리화합니다. 세상의 동의를 받으려고 합니다. 이건 천생적이므로 고칠 수 있는 질병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천만에요. 다만 그들은 그렇게 믿고 싶을 뿐입니다.
빛인 하나님을 모시기만 하면 우리가 앉은 이곳이 결코 절망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모시기 싫어하는 이유는 빛이 있게 되면 어둠 속에 묻힌 죄악들이 드러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죄라는 독버섯은 음지에서 자라고 어둠을 먹고 퍼지는 겁니다. 그러니 빛이 싫을밖에요.
하나님을 모시면 더 이상 죄가 우리의 주인노릇을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나 하나님을 받아 들이기를 싫어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더 커지면 커질수록 하나님이라는 빛을 모신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러면 덩달아 빛도 커지고 넓어지고 그리고 어둠이 물러가고 세상은 천국이 될겁니다.
물론 하나님이라는 빛은 결코 한 개로 모자라서 두 개 세 개가 있어야 되는 그런 불빛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인간을 통하여 역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모시는 이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되찾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마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이 돌아와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아버지를 경외하는 것을 흐뭇하게 보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라“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이라“
아멘 . 내 주의 말씀이 이루어질지어다.
코로나가 워낙 위중하니까 제가 오늘은 어버이 주일인데도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아직 혹시 부모님을 찾아뵙거나 뭔가 하지 않으신 분들은 늦지 않았습니다. 오늘이라도 아니면 이번 주말이라도 꼭 찾아뵈고 효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그냥 마음속으로만 느끼는게 아니라 표시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행복해 집니다. 그래야 우리가 모두 기뻐집니다. 그래야 사랑이 더 단단해 집니다. 사랑해야 위기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인류가 존속할 수 있습니다. 효도는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계명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의 제일 첫머리에 위치하는게 바로 효도입니다.
아멘 또 아멘. 효도하는 성도들이 될지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지어다.
- 홍종일 목사님 2020년 5월 10일 주일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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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책에서 읽었던 짧은 구절이었는데, 잘 잊혀지지 않네요. 나라의 멸망은, 먼저 정신부터 쇠락하고, 그 다음에 주저앉는다. 저는 목사님께 자주 건의(?)하고는 합니다. 목사님들이 바로 서기 시작하면, 얼마나 세상이 좋아질까요, 어쩌면 나라가 다시 사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요!
또 한 가지 오래 전 보았던 영상이 생각납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미국에서 총기사고가 발생해서 많은 이가 사망한 사건이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추모 연설을 하다가 잠깐 멈추더니 갑자기 어메이징 그레이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305장) 를 무반주로 부르는 게 아닙니까. 저는 그 때 미국이 정말 놀라운 나라구나를 느꼈습니다. 물론 기독교 신념으로 세운 국가이긴 하겠지만, 그 선조들의 믿음을 여전히 기억한다는 것이 무척 신기했습니다. 슬플 때, 절망스러울 때, 여전히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영적 삶이 이것 밖에 되지 않음을 봅니다. 입으로만 주님을 믿었고, 용기 있게 살지 못한, 우리 모두의 잘못입니다. 그래도 주께 가오니, 이 나라를 죄악의 길에서 돌이키게 하시고, 지켜주시고, 마침내 정직의 길이 승리하는 빛나는 나라로 다시 일으켜주세요. / 2020. 05. 시북 (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