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적이 듣고 나아와 이르되 (에스라4:1-5)
처음에 정부나 언론 그리고 의료전문가들이 자꾸 코로나 이전의 삶이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약간 당황했습니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 마음속으로는 ‘그럴 리가 있나? 결국 우리는 이전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랬는데 정말이네요. 마스크를 쓰고 설교라니 놀라운 일입니다. 게다가 입구에 붙여둔 입실기준처럼 손소독제에 띄어 앉기에 마스크에 열화상 카메라에 공동식사금지에 오후예배가 없어지고...
이전보다 조금 더 불편하고 이전보다 조금 더 천천히 나아가고 그리고 인간이 그렇게 위대한 존재가 아니구나 생각하면서 겸손해지고...
그러나 어떤 세상이 온다고 해도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열정은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도 변하지 않고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거나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에스라 4장입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지에서 돌아온 귀환민들이 성전을 재건할 때에 생긴일을 배경으로 합니다. 제가 에스라서를 신학교에서 강의하는데 에스라가 단순한 듯 보여도 10장의 짧은 내용에 아주 깊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열장짜리 적은 내용이라고 그냥 단순히 포로기 이후의 말씀으로 읽고 넘어가지 않고 그 자구 하나하나에 유의하면서 읽는다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진리가 그 속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원래 히브리어는 그 한자 한자 마다 상당히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쓰는 말과는 다른 뜻으로 쓰일 때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걸 고려하고 성경 본문을 읽어나간다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인생의 진리가 들어있고 교훈과 철학이 담겨있고 영적인 신비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역사를 관통하며 세계사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느낄 수 있습니다.
먼저 1절을 보면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여기서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은 포로 귀환민을 말합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루살렘을 중심한 유다땅으로 귀환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겁니다. 단순히 소문으로 들었다는 말 같습니다. “듣자하니 저거들의 신의 성전을 짓는다메?”
본문에서 풍기는 뉘앙스가 딱 이렇습니다. 소문이 들린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그냥 단순하게 의미없는, 이야기의 서두로 들어간 말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여기서 ‘듣다’라는 말은 그냥 들려서, 또는 들리는 소리를 우연히 듣는 그런 ‘듣다’가 아닙니다. 여기서의 ‘듣다’는 실제로는 어떤 소식을 듣고 탐지하고 스파이 짓하려고 애를 써서 몰래 듣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알고 싶어서 여기저기 소식을 탐문하다가 듣는다는 겁니다.
오늘 설교에서 우리가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여기서는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간의 갈등이 나오지만 이걸 성도와 세상이라고 가정해 보면 보다 명확하게 상황이 정리가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는 일을 알고 싶어 합니다. 뭣 때문에 그럴까요? 저들이 우리가 너무 멋진 사람들이라서 동경하기 때문에, 마치 팬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소식을 듣고 싶어하는 그런 심정으로? 천만에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이 듣는 것은 뭔가 기독교인에게 반감을 가지고 저들의 하는 일을 감시하고 때로 이용하고 때로 반대하고 때로 훼방을 놓으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귀를 집중해서 열어 놓으려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기독교인들은 더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세상에 책잡히지 않도록 항상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얼마전에 방역의 모범이 된 두교회 덕분에 언론에서 칭찬을 듣고 불과 며칠만에 감리교 목회자들 모임 때문에 또 욕을 듣고... 이들은 항상 우리를 살펴봅니다. 그리고 우리에 관한 소식을 듣습니다.
2절을 보면 더 깊은 맛이 납니다. 여기 보면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스룹바벨은 포로귀환자들의 대표로 유다의 총독이요 다윗왕가의 후예입니다. 스룹바벨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서 포로귀환민들은 성경의 예언대로 다윗왕국이 다시 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하튼 총독과 족장들에게 ‘나아와’라는 말은 상당히 아이러니합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 당연히 성전건축을 방해하려고 나온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뭔가 흉계를 꾸며서 훼방을 놓으려 겉으론 웃고 속으론 앙심을 품은게 아닙니다.
‘나아와’라는 말은 남녀간의 성관계를 암시하는 말로 그 정도로 좋아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처음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성전을 재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올 때는 정말로 좋아서 나왔다는 겁니다. 저들의 입장에서는 같은 신을 섬기는 신자들이 많아 지고 그래서 자기들의 세력이 커지는 개념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전혀 성전재건을 방해하거나 유대인을 배척하고 괴롭히려고 나온게 아니라는 겁니다. 왜입니까? 이들과 유대인, 세상과 하나님의 성도 간에는 근본적인 생각의 차이가 너무 심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다음에 나옵니다.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우리도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신자이므로 같이 성전을 건축하자는 겁니다. 아니 이럴수가? 믿음의 동지를 만났습니다. 바벨론에서 겨우 5만의 사람들이 돌아와서 예전 솔로몬시절에 수백만의 사람들이 지었던 성전을 새로 지으려고 하니 정말 돈도 없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그곳 사람들이 마음을 움직이셔서 성전을 쉽게 건축할 수 있도록 믿음의 동지들을 마련하여 도움을 손길을 주시는 겁니다. 정말이지 기쁩니다.
이들 사마리안들은 유대인처럼 갓 귀환한 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완전히 기반을 닦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성전재건에 힘을 보탠다면 정말 큰 힘이 될겁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입장에서도 자기네 지역에 사람들이 많아 지니까 세력이 더 강해지고 경제활동도 더 왕성해지고 더 부유하게 살 수있게 되고 너무 너무 잘된 일입니다.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나 유목민 강도떼들이 덤비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그렇게 좋은 마음으로 유대인들을 찾아온 겁니다. 그런데 그 뒷말이 조금 이상합니다. 아니 이상하지 않은가요? 봅시다.
“앗수르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뭐 충분히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전혀 이상하지 않지요?
그런데 앗수르와 에살핫돈이 사마리아로 오게 한 날부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데... 그런데 아무래도 뭔가 찝찝합니다. 자꾸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아, 그래요. 우리 함께 하나님을 위한 성전을 지읍시다. 반갑고 환영합니다. 형제여” 이래야 될 것 같은데 스룹바벨하고 족장들은 놀랍게도 이들의 참여를 거부합니다.
거부로 그치지 않고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아무리 성전재건에 참여시켜 주지 않아도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들이 성전건축에 동참을 요구하는데 단순한 거부도 아니고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는 말은 좀 심합니다.
우리 속담에 웃는 얼굴에 침 못뱉는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웃는 얼굴에 침을 정면으로 뱉었습니다. 왜 이렇지요?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여기 ‘홀로’ 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복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의 참여없이 우리만 건축한다는 말인데 여기엔 당시의 신관에 대한 이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나온 사마리아 사람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게 확실히 맞습니다. 그것도 여기 사마리아에 온 날부터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몰랐던 신을 알게 되고 그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게 뭐 잘못된게 아닌 것 같지요?
절에 다니다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공로를 깨닫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좋은 일입니다. 사마리아에 와서 옛 이스라엘 영토에 와서 비로소 여호와란 신에 대해서 알고 너무 믿고 싶어서 제사를 드리는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오히려 더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는 말은 지역신관이나 다신관을 가진 사람들의 말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을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지만 여기에 와서 이 지역의 신인 여호와를 섬기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되었지 않나요? 전도 받아서 개종해서 하나님을 섬기면 되지 또 뭐가 필요할까요? 그런데 여호와를 섬기려면 자기네의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유일한 신이기에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말은 너희가 여호와를 섬기고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그게 다가 아니라 자기네 민족의 신도 여전히 섬기고 바벨론이나 메대와 엘람의 신들도 섬기면서 동시에 이 지역의 신에게도 제사를 지내는 다신론자는 안된다는 겁니다.
이 신도 섬기고 저 신도 섬기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너희 사마리아인하고 오로지 오직 홀로 하나님만을 섬기는 유대인들하고 성전공사를 함께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세상과도 짝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성도가 아니라 그냥 교인이거나 신자거나 확실하게 성도는 아닙니다. 어쩌면 신자도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배타적으로 오로지 자기만을 섬길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시며 천지간에 유일하게 홀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른 것들은 우상으로 여기시는 분입니다. 인간이 만든 거짓된 것으로 여깁니다.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만든 우상으로 봅니다.
그러니 사마리아인들이 뭐라고 해도 자기네 신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는다면 저들의 말은 거짓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는데 끼워주지 않은 겁니다.
이게 좀 웃기는 말같습니까? 천만에요. 오늘 우리들도 이런 식의 행동을 할 수 있습닏니다. 아니라고요? 그래요. 그러나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는 것과 이것을 비교하면 전혀 다른거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사탄은 자기가 너무 비호감이라서 다른 얼굴을 뒤집어 쓰고 하나님을 대적하기를 즐겨합니다. 자기도 아는 거지요. 자기가 인기가 없다는 걸.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는데 돈을 이용해보니 이게 굉장히 효과가 좋습니다. 그러니까 돈 숭배를 우리가 맘모니즘이라고 하고 오늘날 가장 큰 우상으로 여기고 있는 겁니다.
사탄은 이제껏 여러 가지의 다른 형상을 이용해서 신도를 유혹하고 성도를 훼방했습니다. 그랬지만 역사적으로 다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돈 신은 이전과 무게가 다릅니다. 너무 너무 강력합니다.
저도 솔직히 돈 앞에서 겸손하라고 스스로에게 말하지만 돈은 정말이지 무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돈과 하나님이 반대의 자리에 있어서 부른다면 우리는 과연 어느곳을 선택하게 될까요?
이러니 이해가 되시지요? 자기네 민족의 수호신도, 이 지역의 터줏대감도 동시에 섬겨서 어떤 신의 진노도 사지 않겠다는 그런 다신론적, 지역신론적 사람하고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하고 어찌 같이 성전을 짓는단 말입니까? 그래서 스룹바벨은 사마리아인들의 제의를 거절한 것입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 밖에 없게 된 겁니다.
이들이 유대인들에게 나아와 같이 성전을 짓자고 말한 이유는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사마리아가 원래부터 유대땅까지 관할하고 있었는데 유대에 남은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행정단위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소수의 사람들을 사마리아 총독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이 땅에 유대인들이 돌아와서 성전을 지으면 그러니까 자기들끼리 짓게 되면 그동안 누려왔던 유대땅을 잃어버릴 거로 생각한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안 그래도 여호와를 섬기는 유대인들이 배타적인데 자기들끼리 성전을 짓도록 두면 성전이 완공되고 난 다음에는 더 배타적이 될까 봐서 같이 짓자고 한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냉정하게 이런 제의를 거절합니다. 그리고 너희는 우리 사이에서 아무런 연고가 없다고 모욕까지 합니다.
너희는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사마리아가 북 이스라엘의 수도였지만 너희는 사실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이방인이고 이스라엘 사람들과의 혼혈이고 이신 저신 막 섬기는 우상숭배자라고 모욕한 겁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은 결과 이제부터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의 가장 큰 대적이 되었습니다. 애증? 사랑하니까 더 증오하는 관계? 이제부터 사마리아인들은 성전재건도 방해하고 성벽 재건도 훼방 놓고 심지어 뇌물을 주어 공사를 방해하고 글로써 유대인들을 무고하기까지 합니다.
사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같은 고향에서 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앗수르의 영토안 이곳저곳에서 북 이스라엘쪽으로 이주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앗수르왕 에살핫돈이 사마리아로 오게 한 날로부터 여호와께 제사를 드린다고 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비록 우리 민족의 신은 아니었지만 이제부터 우리가 이곳에 살 것이기에 이곳의 신인 여호와도 같이 섬긴다는 겁니다. 이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다신론자들인 이들에게 한 신을 더 섬긴다는 것이 전혀 색다른게 아닙니다. 이들은 조상대대로 항상 그렇게 해왔습니다.
한편 유대인 포로 귀환민들은 사마리아인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다짐하여 바벨론의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다 포기하고 고토로 돌아온 이들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사람들 포로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적어도 오륙백만도 넘는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겨우 1%가 돌아왔는데 그 정도로 이들이 여호와 섬기기에 열심이 특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종교적 다원주의를 권하는 이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택도 아닌 일입니다. 그래서 거절한 겁니다.
원래 세상과 짝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기면 세상은 성도를 배타적이라고 비난합니다. 독선적이라고 욕합니다. 그리고 괘씸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한번 접했던 사람들은 기왕에 가졌던 생각보다 더 나쁘게 여깁니다. 얼마든지 방해하고 해꼬지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만을 섬기며 기어코 승리한 사람들의 기록이 바로 에스라서입니다. 당시의 관념으로 세계를 제패한 페르샤의 다신론에 맞서서 겨우 한줌도 안되는 사람들이 여호와 유일신앙을 가지고 승리한 기록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증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 때문에 세상과 척지는 것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절대로 우리를 그냥 홀로 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사마리아인들은 성전재건을 각종 방법으로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4절에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여기서 ‘방해’는 물리적인 방해를 말하지 않습니다. 강제로 사람들을 동원해서 공사현장을 점거하고 공사를 막는 그런 방해가 아니라 유대인들을 위협해서 스스로 성전재건을 못하도록 두려움을 불러 있으켰다는 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성전재건은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내려온 명령입니다. 그런데 이걸 물리적으로 방해한다면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고 이것은 곧 왕에 대한 반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들 딴에는 머리를 굴려서 물리적인 방해가 아니라 각종 다른 편법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가짜뉴스로 힘을 빼기도 하고 자기들의 성세를 자랑하면서 기를 죽이기도 하고.
그 기간이 얼마나 길었느냐면 고레스의 시대부터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성전재건을 방해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레스 임금 다음이 다리오가 아닙니다. 중간에 캄비세스라는 왕도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많은 세월이 흘렀고 그 긴 기간동안 뇌물을 주어 막았다는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뇌물이 들어가면 억울한 일이 참 많이 생기고 정당한 명령이 왜곡되고 약자들이 피해를 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유대인들은 이들의 악성 방해를 물리치고 결국 성전과 성벽을 재건합니다. 그리고 나라를 세우고 번성하게 되고 결국 오늘날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한편 사마리아인들은 어떻게 되었느냐면 현재 이들의 나라는 없어졌고 마을도 없어졌으며 전 세계에 십여년전 기준으로 160여명 정도만 살아 남아서 아직도 그리심산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해외토픽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들과 하나님도 섬기는 자들의 차이가 이렇게나 큽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하나님의 대적과는 이렇게나 결과가 차이가 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그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그를 경외하며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나간다면 우리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항상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나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소유인 성도에 대해서는 물리적으로 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사탄 역시도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그의 지배를 받는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항상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더 열심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방해를 놓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직접적으로 우리를 방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이 있습니다. 멀리서 위험한 일을 본다면 위협을 느껴서 스스로 자제하게 됩니다.
주변 사람이 잘못되고 환경이 나빠지고 대적들이 늘어나고 기세가 흉흉하고 그러면 그걸 눈으로 보고 겁을 먹을겁니다. 그래서 위협도 느끼고 그렇게 우리의 신앙열심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라서는 신앙승리의 기록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히 어떤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내는지를 기록한 문서입니다. 성전도 성벽도 재건되었고 이스라엘 공동체는 비록 미약하지만 내면적으로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고 점차 성장하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모든 일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고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하나님의 역사를 막을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능의 하나님이십니다. 내 하나님은 인간의 욕망들끼리 충돌하고 욕심과 이권을 배분하는 욕망의 현장에서 인간의 욕망을 움직여서 자기의 일을 하십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과 척을 지고 저들과 원수처럼 싸울 수는 없습니다. 너무 어렵고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해야 되는 것이 바로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내 이웃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법으로 삼아 움직이는 세상이 어서 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인간의 이성과 맞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인간 이성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하여 적용해 보세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제가 몇주 전부터 자꾸 강조했던 록펠러 집안의 가훈은 요새 사람이 보면 정말 너무하다 싶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강조하고 희생과 양보만을 요구하는, 뭐 이런걸 가훈이라고 전했냐 싶은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가훈을 실천했더니만 한 대 두 대 세월이 흐르면서 그 결과는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오늘날 세계최고의 명문가문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이 적은 머리로 파악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 역사하십니다.
몇주 전에 제가 서울에서 부고장을 하나 받았습니다. 카톡으로 아무개가 사진을 보냈습니다하고 왔는데 무슨 사진인가 보니 제가 잘 알던 권사님의 부고장입니다. 그녀가 모월모일에 소천했다는 내용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직접 문상은 피해주시고 기도해 달라는 그런 내용입니다.
제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 전에 금요기도회에서 그 권사님을 만났습니다. 뭐 그전에도 알고 있기는 했지만 서로 뭔가 대화를 주고 받은건 그날이 처음이지 싶습니다. 뭐라고 하는고 하니 제가 특별 새벽기도의 집회 중에 안수기도를 하면서 뭔가를 바치라고 했답니다. 그게 뭔지를 저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에게 바치라는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저에게는 그냥 ‘주는거’지 ‘바치’지는 않지요. 그런데 솔직히 저도 그게 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말하는 거지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았으니까 그걸 저도 알 수가 없어서 솔직히 말했습니다.
“글쎄요. 권사님 그게 뭔지 모르겠는데 우리 같이 한 주일 기도해보고 다음 주 금요기도회때 제가 말씀 드릴께요” 그래서 그날은 알겠다고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 주가 되었는데 기도회가 끝나고 또 찾아온 겁니다. 그때까지도 뭔지 몰랐으므로 정직하게 모르겠다고 말하고는 다음 주에 다시 보자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분이 화를 벌컥 내는 겁니다.
자기는 너무 아파서 죽고 싶은데 하루 하루가 힘든데 자꾸 다음 주 다음 주만 한다고 화를 내는 겁니다. 하하, 제가 뭐 그 분을 아프게 한 것도 아니고 또 그 아픔을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분노의 대상이 된다는게 어떻게 보면 말이 안되는데 그래도 목사라서 그냥 그럼 다음 주 중으로 집으로 심방을 가겠다고 말하고 그 다음 주에 심방을 갔습니다.
이분이 조울증입니다. 우울증보다 증세가 심하다고 하는. 그런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집으로 오기 전에 기도를 하게 되었는데 머리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뭔가 기적이 나타나지도 않았고 그렇게 기도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기도하면 뭔가 좀 현상이 나타나고 해야 하는데 전혀 그런게 없었어요.
그리고 이틀 후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권사님입니다.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오늘 아침에 갑자기 생각해보니까 머리가 아프지 않더랍니다. 평소에는 항상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죽고 싶었답니다. 게다가 손마디가 류머티스 관절염처럼 너무 아파서 도저히 찬물에 손을 넣을 수 없었답니다. 아마 이것 때문에 새벽기도회에서 안수기도를 받으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보니 머리가 아프지 않아서 너무 신기해서 언제부터 머리가 아프지 않았는지 생각해보니까 목사님이 안수기도를 하고 난 다음부터 아프지 않더라는 거지요. 그래서 혹시 싶어서 찬물에 손을 넣어보았는데 아프지 않더랍니다.
너무 감사해서 물김치를 담아서 주일날 가져다 준다는 겁니다. 괜찮다고 했는데도 끝까지 가져다 드리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하시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과연 그 주일날 물김치를 한통 담아서 가져왔습니다. 이제는 물에 손을 넣어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면서.
그 후에도 그 권사님댁에 다니면서 몇 번 기도해 드렸는데 제가 교회를 사임할 날이 다되어 가고 미국으로 가기 전에 그분이 이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홍목사님이 미국에 가시기 전까지만이라도 제가 기도를 계속받게 해 주세요”라고.
귀국하고는 저는 부산에 그 권사님은 서울에 있으니까 제가 계속해서 기도해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 권사님은 우리 교회 교인이 아니니까 제가 어떻게 관여하기가 곤란하다는 거지요. 여하튼 벌써 세월이 14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아직 돌아가실 때가 이른 것 같은데 부고장이 왔어요. 가슴 아픈 일이고 또 그때의 그 기도가 생각도 나고.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기록하고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잊혀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는 거지요.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제가 요즘 이런 기적들을 간증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는 한국에서 기적을 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기적이 필요 없는 사회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속의 그 하나님, 에스라와 포로귀환시대의 유대인에게 나타나신 그 하나님이 지금도 변함없이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제가, 우리가 바로 그 역사의 증인입니다.
우리 인간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역사를 하나님은 지금도 충분히 일으키실 수 있고 또 실제로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14년 전에도 이천년 전에도 삼천년전에도 역사하셨고 지금도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기적 때문에 주를 믿느냐면 그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믿는 겁니다. 그러나 기적은 우리 믿는 이들의 믿음을 더 굳세게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우리가 그 기적을 보는 순간 우리는 영적인 신비를 느낍니다.
보지는 못하지만 느껴지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과학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세상은 실제로는 과학이라는 패러다임뒤에 숨어서 교묘하게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합니다.
이런거지요. 예전에 인도네시아에서 자바원인이 발견되었다고 성경의 창조론이 틀렸다고 온 세상의 언론이 난리를 친 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어릴 때 교과서에서 그걸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과서에서 삭제가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건 사람의 뼈만이 아니라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았던 사람과 멧돼지의 어금니가 만든 착시 현상이었다는게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원래 한 장소에서 무슨 원인의 뼈가 출토된건 전혀 없습니다. 가령 한쪽에서 다리뼈를 발견하면 그걸 중심으로 사방으로 몇킬로 몇십킬로미터를 퍼져나가면서 그런 연관성을 조사하는 겁니다. 어디 흩어진 뼈가 없나? 자바원인도 그렇게 발견된 겁니다. 사람뼈와 돼지뼈의 합성입니다.
어떻게 하든 진리를 밝히려는 것보다는 제가 보기에 마치 성경의 오류를 지적하는게 목적인 듯 보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의 해방? 이런 경향은 유럽의 30년전쟁 후부터 본격화됩니다. 같은 기독교도들이 서로 편을 나누어 신교와 구교가 서로 싸워서 당시 유럽 인구의 2/3가 죽었답니다.
이걸 보고 과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신이 있다면 도저히 이럴 수는 없다. 내 일생을 바쳐서 반드시 신이 없다는 것을 밝혀야 겠다’ ‘우리 과학자들이 무지한 인간들을 계몽해서 신을 섬기는게 미신이라는 걸 밝혀서 교회의 간섭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툭하면 언론에 “신의 영역을 정복했다” 같은 헛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여전히 세상은 어지럽고 아귀다툼이 심합니다. 코로나사태도 있고 미중 무역전쟁도 있고 한일간의 갈등도 있고 중국과 대만간의 통일에 관한 문제도 있고 홍콩문제도 있고 난민문제 멕시코 장벽문제 기타등등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라는 워낙 중대한 사태 때문에 주춤하지만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인간들 사이의 나라들 사이의 갈등과 싸움이 터져나올겁니다.
조금 멋들어지게 말하면 사람들은, 나라들은 한정된 자원을 서로 많이 차지하려고 옆사람을 짓밟고 모함하고 시기하며 질투하고 경쟁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약간은 달라야 합니다.
우리도 나름 경쟁을 합니다. 그러나 그건 선의의 경쟁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누가 열심히 하나님을 믿나? 음 이상합니까? 누가 누가 착한 일을 더 많이 하나?
공정한 경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경쟁의 결과와 상관없이 서로 더불어 보듬고 가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경쟁에서 탈락한 이를 짓밟고 만신창이를 만드는 일은 안됩니다. 이긴자는 진자를 보듬고 위로하고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 공동체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라고 부르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을 실천하며 사는게 어렵지요? 굳이 사랑해야 돼? 남 다주고 양보 다하고 나는 뭐야? 그래요 힘듭니다. 그래서 그 보답으로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려 할 때에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좀 말이 이상합니까?
“얘들아, 나는 아직도 너희를 지켜보고 있고 보호하고 있어.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 말고 나만을 믿고 따라와라” “내가 있으니 결코 너희에 대한 상급이 없지 않아” “지금은 악인이 떵떵거리지만 최후의 심판정에서 한번 보자” 이렇게 말씀하시는게 기적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탄도 역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도 역시 우리를 궁금해하고 무슨 소식이라도 들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뽀시락 하면 알고 싶어하는 겁니다. 왜요? 비난하려고. 욕하고 모함하려고 온갖 궤계를 베풀려고 들으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세상은 우리가 저들과 어울려서 둥글둥글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이런거 정말 적응이 안됩니다. 뭐냐면 카톨릭 신부들이 사월초파일날 절에 가서 축사를 하고 설교는 아니겠고, 스님들이 성당에 가서 성탄절 축하를 하는 행동들은 적응이 안됩니다. 하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세상에서야 넓은 마음을 가진 대인배라고 칭찬하고 대서특필해서 이런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난리를 치지만 이건 하나님의 법에는 명백히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언젠가 먼 훗날 하나님이냐 세상이냐의 선택을 강요받는 세상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금박을 입은 거대한 철이나 구리나 돌의 형태로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보호하십니다.
세상이 요동하고 환경이 급변해도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언제까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앞에 설 때까지 그가 우리를 지키고 이끄십니다.
포로지에서 막 귀환해서 사람도 별로 없고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모든게 낯섭니다. 한편으론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왔다는 감격도 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돈도 없는데 자기들의 힘에 넘치는 성전을 지어야할 임무까지 띠고 있다면 함께 성전재건에 동참하겠다고 나오는 사마리아인들을 배척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뭐 돈에 표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돈이든 성전재건에 사용하면 되는 거지 유별나게 굴 필요가 있나요? 그런데도 이 어리석은 포로 귀환민들은 오직 하나님을 외치며 세속주의와 결별하고 종교 다원주의자들과 결별하고 오직 하나님을 고수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어려움도 많았고 중간에 16년이나 공사가 중단되었고 이런 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결국은 신앙의 순수성도 지키고 성전도 재건했고 예루살렘 성벽까지 재건하게 되었습니다.
에스라는 이런 기적의 기록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산증언입니다. 비록 눈으로 보기에는 초라하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므로 그가 하시는 일에 중단은 없다는 겁니다. 혹 이 설교를 성전건축설교로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우리네 마음의 성전은 이미 우리의 마음에 든든히 그리고 굳세게 서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니까 초조해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어쩌면 코로나 사태는 현재 예배와 교회의 형식에 일대 전기를 마련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시각을 가지고 나아가는 겁니다.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
누구와 함께? 하나님과 함께! 누구와 함께? 하나님의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가 함께 하시기를 그래서 변하지 않는 믿음을 유지하시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20년 5월 24일 주일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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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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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다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믿기. 오직 예수 라는 말을 묵상하기. 그로 인해서 손해를 겪고, 본문 말씀처럼 16년간의 시간의 지연을 겪기도 합니다. 인간의 시선으로 보면 터무니 없습니다. 돈도 귀중하고, 시간은 더없이 귀중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곧 인생이라는 격언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선은 다릅니다. 질투의 하나님이시며,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서 헌신한다면 그 16년보다 더 값지고 중요한 게 있다는 게지요. 하기야 히스기야의 수명도 연장해 주시는 전능자 시니까요.
알려진 신학자의 언어로 잠시 표현한다면, 직선으로 달려가는 빠른 길은 어김없이 최악의 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빠르고, 효율적이고, 투자가 바로 결과로 이어지는 코스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이 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지금 힘든 순간을 지내고 있지만 저는 그럼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힘을 내겠어요. 그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 제 눈에는 당신이 보이지 않고 제 귀에는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교회에 출석해서 찬양하고 말씀들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가길 원해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많은 세월이 흘러서... 하나님께서 "신앙을 지켜가니 잘하였도다 아들아, 딸아, 돌아보렴, 네가 너와 함께 하였단다." 라고 깨닫는 날이 오지 않나 생각합니다. 찬송가 가사 처럼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이미 얻은 증거대로 늘 믿으며, 인내로 승리하는 멋진 성도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 2020. 05. 시북 (허지수) 덧붙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