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디도서1:5-16)
오늘 우리는 한동안 계속해서 살펴본 에스라서를 벗어나서 신약으로 갑니다. 그중에서도 디도서를 살펴볼 것입니다.
먼저 디도라고 하면 대부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디모데라고 하면 정반대로 잘 압니다. 디도는 디모데와 함께 바울을 따라 전도 여행을 함께 한 자요 바울이 그레데에 남겨서 자기의 사역을 계속하도록 그리고 뒷마무리를 하도록 한 자입니다.
그레데는 그리스 남쪽의 섬 크레테를 말합니다. 이 섬은 지중해 동부에서는 상당히 큰 섬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블레셋 사람들이 바로 이 크레테 섬에서 가나안의 해안으로 이주한 것입니다. 지금도 이 섬은 그리스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그레데 사람으로는 ‘구레네 시몬’이 있습니다. 구레네가 바로 그레데입니다.
요즘 다 잡혀가던 코로나가 아직도 계속해서 산발적으로 발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소형교회와 개척교회등 교회 유관단체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연구모임이나 대학생 선교회 같은데서도 일어납니다. 이들이 방역수칙을 지키지 않았다, 모여서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같은 약간은 부끄러운 내용들이 나옵니다. 여행자체야 나쁜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시국에!
심지어 코로나 사태로 인한 동영상에는 부흥회 동영상도 있습니다. 어떤 여성이 찬송을 부르는 모습도 있습니다. 강대상 뒤편 의자에 앉은 이들은 강사나 사회자로 보입니다. 아마도 목사일 겁니다. 보통의 부흥회 동영상인데 이게 코로나감염사태와 연관되자 마치 사이비 집단의 광신 집회처럼 보여집니다. 마스크가 없어요.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 여성의 찬송이 상당히 괜찮던데 참.
그래서 교회는 정말이지 조심해야 합니다. 더구나 이런 시국에는 더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전과 응전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위기는 곧 기회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자행자지하며 하나님의 법을 우습게 여기면 그 기회를 살리기는커녕 자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 경성해서 기도하고 행동에 신중을 기해야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도는 세상사람보다 더 자기를 잘 제어해야 합니다. 분노조절이 안되거나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쾌락을 탐하게 되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나하나쯤이야 설마 하는 것도 매우 큰 문제입니다. 지나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일이 생기기전에 먼저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 성도는 세상에 비쳐지는 그리스도인을 대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엔 많은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적습니다. 그리고 성도는, 진실된 성도는 별로 없습니다. 그만큼 숫자가 적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 목사의 조건에 대한 설교이지만 이걸 성도의 조건에 적용해도 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힘쓰는 진실된 성도는 그 자체로 보석처럼 귀하고 빛나는 존재입니다. 성도는 목사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대표합니다. 그래서 더 잘 드러납니다. 빛이 나니까 당연히 세상의 눈에 잘 띄고 그래서 모든이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을 위하여 이들 코로나에 걸린 기독교도들이 헌신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 뉴스에 우리나라에서 만명의 코로나 치유자 가운데서 혈장을 제공한 자가 겨우 12명에 불과하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도중에 여기에 동참한 자들이 6명이 늘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감사한 일이지만 아직은 미미합니다.
혹시 이번 코로나에 걸렸다가 나은 기독교도들이 혈장을 제공하여 백신 개발에 이바지하는 것이, 그래서 기독교인의 살신성인의 자세를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까요? 목회자와 목회자의 가족들이면 더 멋있는 이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제 공동체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할 차례입니다.
그리고 교회와 목사를 비방하는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바라기는 이왕 코로나에 걸린거 잘 치료받으시고 완쾌 후에 혈장만 제대로 제공해도 욕은 좀 덜먹지 싶습니다. 많은 기독교도들이 혈장을 제공한다면 “역시 예수쟁이는 다르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은혜로 이번 사태가 잘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 인류는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삶의 형태는 지난 반년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 어느 정도나 지속될지 모릅니다. 그 와중에서도 우리네 삶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뭐 앉아서 굶어 죽을 수는 없다는 말이 틀린게 아니라서 더 답답합니다. 바이러스와 함께 하는 삶이라...
문득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의 끝에 과연 무엇이 우리를 기다릴지 정말 기대가 됩니다. 환경은 비록 나쁘지만 이 가운데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지금도 우리를 둘러싸고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앞에 서기 전까지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요? 물론 무엇을 이루지 못해도 의미없는 삶은 아닙니다. 꼭 뭔가 거대한 업적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남겨 두신 이유는 분명 우리로 하여금 다 못한 어떤 일을 이루게 하심일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또 보호하시며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 시키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가는 이 길에서 우리는 항상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미지의 세계를 처음으로 가는 겁니다. 이전에 가보지 못했던 길입니다. 미지의 세계는 우리를 설레게도 하지만 두렵게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에게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희망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주가 우리에게 주신 믿음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앞길에 반드시 우리 주님의 보호와 인도가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걸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의 행위를 겸손하게 하고 그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따지고 보면 인생이란게 항상 처음이지 두 번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물어보고 조심조심 그의 인도를 따라 걸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앞길에 그의 가호와 인도가 항상 함께 하시기를 갈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힘들고, 그럴수록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더 필요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그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는?’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남겨두신 이유는?’
오늘 하나님은 우리가 이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게 어렵고 불편하고 성과는 없습니다. 세상은 입을 열어 교회와 교인들을 비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언제는 좋은 여건이었나요? 언제는 저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뭐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의 명령에 따라서 해왔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그가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시키시는 대로 합니다. 그가 우리의 대장 되시는데 우리는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그와 함께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고 나아갈 것입니다.
1.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는
오늘 5절은 내가 너를 그데레에 남겨둔 이유는? 이란 말로 시작합니다.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는 여기 나와 있습니다.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려 함이니.
혹시 오해하실까 봐서 말씀 드리지만 여기의 장로는 오늘날의 장로가 아니라 오히려 목사를 말하는 겁니다. 뒤에 나오는 감독도 역시 목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장로는 유대적 배경하에서 나온 단어이고 감독은 헬라적 배경하에서 나온 말로서 두 단어는 모두 목사를 지칭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바울이 크레테섬에 디도를 남겨둔 이유는 각 지역에 목사를 세우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크레테섬은 큰 섬입니다. 우리식으로 봐도 한 개의 도 정도는 됩니다. 그러니 그 지역에 여러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이 지역교회에 목회자를 세워서 교회가 지속 되도록 하려고 디도를 남겨둔 것입니다. 전도 여행에 데리고 가지 않고 크레테섬에 남겨둔 겁니다.
본문에서 목사를 장로라고 표현한 것은 본래 유대의 전통에서 나온 말인데 이 말에는 연장자, 또는 원로 더 나아가 도시의 재판장이나 공적인 업무를 집행하는 자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원까지 다양한 의미로 발전해 왔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를 목사의 개념으로 쓰고 있습니다.
감독은 헬라적 배경에서 나온 말인데 원래 헬라 도시의 행정책임자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역시 목사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마 헬라의 목사를 감독으로, 이방 문화권이기는 하지만 유대적 배경이 있는 곳에는 장로로 부르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외국에서 살아도 유대인들은 나름대로 회당을 만들고 전통을 유지해왔기에 감독보다는 장로가 더 친숙한 단어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나 요한도 자기를 장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감독의 자격요건에 대해서는 디모데 3장에서도 나옵니다만 서로 비슷합니다. 완전히 똑같지 않은 이유는 개 교회가 처한 환경과 역사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단 장로나 감독을 세우는 것은 교회를 유지해 나가기 위한 가장 첫 번째 조치입니다. 아무래도 목회자가 있어서 교인들을 지도하고 권면하며 그를 중심으로 조직이 되어야 앞으로의 환란에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디도와 디모데를 파송하여 그레데와 에베소에 교회를 더 굳건하게 만들기를 원했고 그 방편으로 목사를 세우려고 한 것입니다.
2.책망할 것이 없고
그래서 교회의 존속에 가장 중요한 목사를 세울 때에 아무나 막 세울 수 없습니다. 뭐 학력이나 재산 그리고 키 ,몸무게 ,발 크기 이런걸 따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기본적인 품성에 대한 기준은 있어야 합니다. 참고로 우리는 여기서 본문을 목사의 조건으로만 보지 말고 성도의 조건으로 보면 좋습니다. 그러면 본문을 남에게 하는 권면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권면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제일 첫 번째로 들고 있는 자격요건이 바로 책망할 것이 없는 자입니다.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정말이지 굉장한 자격요건입니다. 솔직히 웬만한 사람에게는 다 책망할 거리가 있는 법입니다. 그게 없다면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성인인데 설마 목사를 전부 성인으로만 모실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인이 그렇게나 많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책망할 것이 없다는 못마땅한점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모든게 다 책망거리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여기서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실정법을 위반해서 법정에 고소를 당해서 유죄판결이 날 만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 정도로 굵직하고 뚜렷한 죄를 범한 것을 가지고 책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단지 도덕적인 자질을 가지고 시비하는 것을 책망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참 ‘성인’은 어른을 말하는게 아니라 성자를 말합니다. 거룩한 사람. 그러니 책망할 것이 없는 자는 도덕적으로 성자급의 사람을 말하는게 아니라 법률적으로 고소할 것이 없는 사람, 문책받을 것이 없는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특별히 나쁜사람이 아닐 것이 조건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보통 사람은 나쁘고 좋고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고소할 것이 없습니다. 법을 어겨서 법정에 고소당할 정도라면 죄질이 상당히 나쁜 겁니다. 그 정도의 죄를 짓고 문책을 받을 정도라면 절대로 목사로 세워서는 안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너무 윤리 수준을 높게 잡아서 거룩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관점에서 책망할게 없는 정도면 족합니다. 이 정도는 목사가 아닌 일반 성도들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혹 성도라고 하면서 사기죄나 폭행죄나 성적인 범죄를 저지른다면 그는 성도가 아니라 신자도 아니라 교인입니다. 그것도 상당히 자격미달의 교인이 되는 거지요. 그냥 교회만 다니는 자로서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거리로 만드는 한심한 사람입니다.
3.한 아내의 남편이며
한 아내의 남편이란 말에는 당연히 전제조건으로 남자라는 자격이 필요합니다. 요즘 세상에 여목사도 있지만 우리 교단에서는 여목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도 당연히 인정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한다면 당연한 말입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는 여자 성도들이 월등히 많습니다. 그래서 여권을 위해서 여목사를 인정하는게 좋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 여목사를 인정하는 교단들도 있습니다. 저도 당연히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기위해서 여목사를 인정하는게 유리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목사를 지지할 수가 없는데 바로 이 구절 때문입니다. 성경에 명문으로 ‘한 아내의 남편이며’ 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하더라도 이 명문 규정을 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면서 명문규정조차 임의로 해석한다면 이는 인본주의가 됩니다. 절대로 피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전제조건을 충족하고서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말에는 일부다처제를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니면 첩을 들여서도 안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당시 그리스 로마사회에서 일부다처제나 축첩제도가 만연했고 심지어 아내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성공한 남자라는 인식이 팽배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충분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만 목사의 자격요건에는 엄격한 일부일처가 요구되어 집니다. 일부일처를 어긴 성경의 인물들이 많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가 세명이었고 야곱은 네명이었습니다. 이삭은 왜 한명이냐면 이삭이 아내를 무서워하는 공처가였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말년에 실명을 할 정도로 건강에는 자신이 없는 자였고 아내는 대신에 매우 원기왕성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을 속여먹으려는 생각도 한 겁니다. 어쨌든 성경의 인물들이 일부다처를 했다고 해서 성경이 그걸 인정하거나 권장한건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성경은 인간의 악한 본성과 연약한 신념으로 인한 세상풍습을 묵인하신 겁니다.
대신에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집안은 일부다처로 인한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했고 오늘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대립이라는 인류적인 재앙을 초래한 바탕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일부다처나 축첩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디도서가 쓰여지던 시절에도 역시나 일부다처나 축첩은 보편적인 관습이었지만
하나님의 종이 되려고 하면
기독교인이 아니라 기독교회의 지도자가 되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세상관습에 맞서는 정도의 결단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 아내의 남편을 요구한 겁니다.
참 요즘은 우리나라도 간통죄가 폐지되기는 했지만 우리 성도에게는 절대로 폐지된게 아닙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란 말은 우리 성도들이 반드시 지켜야하는 철칙입니다. 하나님의 법입니다.
게다가 여기는 또 다른 숨겨진 조건이 있습니다. 뭡니까? 목사는 가정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어느 주석에는 이 구절이 반드시 기혼을 요구하는 건 아니라고 말했지만 결혼제도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제일 먼저 적용하신 제도입니다. 그리고 결혼한 인간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목사의 숨겨진 요구 조건입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룸으로써 모범을 보여야합니다. 요즘 그런 건강하고 좋은 가정이 드물지요? 툭하면 이혼하고 싸우고 울고 찌르고 짜르고... 이런 부모들을 보고 자라난 아이들이 결혼에 넌더리를 내는건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결혼이 아주 좋은 것이라고 하는 실제를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걸 목사가정이 해야 합니다.
독신이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더 좋은 상태가 바로 결혼이어야 합니다. 그러기위해서 제일 첫 번으로 지켜야 될게 바로 일부일처입니다. 성적인 순결이 제일 중요합니다. 배우자에게 속한 성결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게 성결이 되는 겁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가정에서 아이들을 잘 양육하여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일꾼들을 더 널리 펴지게 해야 합니다. 건강상의 문제 외에는 아이를 낳는데 힘쓰고 그리고 양육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도록 해야 할 책무가 목사들에게 있습니다.
교인들에게만 애 낳아라, 둘은 낳아라, 결혼해라 이렇게 말하지 말고 스스로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요즘처럼 애를 낳지 않는 세상에서 신앙교육을 잘 받고 자라나는 아이들이 많아 진다면 내일의 이 땅은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불신자는 갈수록 수가 줄고 애를 낳지 않으니까
믿는 신자들을 자식을 많이 낳아서 신자들이 많아 진다면 언젠가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해 질 겁니다. 전도가 안되면 자녀라도 많이 낳읍시다. 그리고 잘 가르칩시다. 이게 목사의 자격요건입니다.
4.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고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
앞에서 자녀를 잘 키우는게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지만 이제 성경에서 명문으로 요구합니다. ~한 자녀를 둔 자.
우리는 자꾸 이 구절을 보고 ‘~한’ 이란 말에 주안점을 두려 합니다. 왜냐면 자녀를 낳지 못한 사람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결혼도 안 한 사람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제 조건이 ‘자녀를 둔 자’입니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좌우지간 먼저 자녀가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조건입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자에게 목사 안수를 원칙적으로 주지 않습니다. 30세에 목사 안수를 받을 건데 총각이라면 앞으로 반드시 결혼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안수를 받습니다. 이것도 보면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 있습니다.
목사의 자녀가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자녀가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것도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먼저 요구되는 것은 자녀를 가진다는 겁니다. 아니 자녀가 있어야 도덕적으로 잘 양육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방탕하지 않고 불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목사가아니라 목사의 자녀가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목사의 조건에 들어간 이유는 자녀를 가진다는 것은 목사가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음, 제가 너무 쉽게 말했습니까? 요즘은 자녀를 가진다는것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건강의 문제라고 보아야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시험관아기도 나오고 이 시험관아기가 제대로 자라지 못해서 장애를 가지게 되고...저도 잘알고 있지만 혹 옛날에는 이런 일이 별로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먼저 자녀를 가진다는 조건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녀를 가진 자들만 그렇지 않은 자들에 비해 까다로운 조건이 더 추가되는 겁니다. 공평하지 않습니다. 사실 가지많은 나무에 바람잘날 없다고 자녀가 없다면 이런 조건은 매우 쉽게 통과가 됩니다. 자녀가 없는데 무슨 불순종이니 방탕이니가 문제가 될까요?
목사의 자격요건에 자녀가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아서도 안되고 불순종하다는 비난을 받아서도 안된다는 조건이 들어있는 것은 쉽게 말하면 교회 안에 신도들의 자녀들에게서 이런 이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목사의 자녀들 중에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런 자녀가 있다면 교회 안에서도 덕이 안되고 교회 밖에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자녀에게도 여기에 해당하는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 자라나는 청소년들 청년들에 대하여 걱정이 많습니다.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며 음란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청년 청소년들은 그렇지 않지만 때가 때인지라 젊은이들에 대한 눈길이 곱지 않습니다.
코로나 사태 하에서도 술집이나 클럽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거린다는 기사가 연일 나가고 청소년들은 피시방이니 노래방이니 학원에서 코로나를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기사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젊은층에서는 게이에 대하여 상당히 긍정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에이즈 환자의 연령층이 점점 내려간답니다.
한때 젊은이들은 이 나라의 기둥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는 모두 이들 앞서간 젊은이들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들의 눈물과 땀과 피가 오늘날 이 땅의 국민들이 누리는 인권을 만들어낸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대의를 보는게 아니라 소아에 너무 집착합니다. 자기의 적은 권리에는 철저하면서 이웃의 아픔에는 무관심한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돈이 없다 없다 하면서도 사치품에 목을 매고 하룻밤 쾌락을 위해 부나방처럼 덤벼듭니다.
우리나라에 코로나가 창궐할때는 외국으로 장기간 작정하고 여행을 갔다가 우리나라에서 잠잠해지고 놀러간 곳이 코로나로 만신창이가 되자 특별기를 띄워서 데리러 와달라고 난리입니다. 그들 때문에 아무리 국내가 깨끗해져도 코로나로부터의 완벽한 자유는 불가능했지요.
그래서 오늘날 참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더 필요합니다. 건전한 가정에서 건강한 가치관을 가진 청소년들이 더 필요합니다. 그걸 목사의 가정에서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야 합니다. 성도의 가정에서 해야 합니다.
흔히 우리들이 하는 말로 자녀는 마음대로 안된다고 그래요. 맞습니다. 우리는 마약이나 남색으로 또는 성범죄로 음주운전을 한 자녀로 인해 힘들어하는 잘난 부모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자식 농사는 어려운 법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녀의 양육에 관해서는 성령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오늘 우리가 이렇게 멀쩡하게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우리 부모님들의 눈물의 기도 덕분입니다.
우리가 자라면서 얼마나 부모님 마음을 아프게 했고 그들을 노심초사하게 했을까요? 자식은 부모의 생명고혈을 먹고 자라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불확실한 존재입니다. 키를 키우는 확실한 방법은 없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키를 키울 수 있는지 공인된 그리고 보편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자식의 키를 키울 수 있는지!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식을 올바르게 키울 수 있는 방법 역시 없습니다. 100%확실한 방법은 없습니다.
물론 우리도 최선을 다하지만 성령의 역사하심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겁니다. 또 드는 생각은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행복하게 잘 살아야 자녀들이 결혼하고 싶어하고 사랑하고 싶어하고 가정을 가지고 싶어하고 자녀를 낳고 싶어하는 겁니다.
이건 쫌 말하기 그런데 부모들의 위선적인 모습 때문에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는 중직자들의 자녀가 많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모범이 중요한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본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부모의 본을 보고 성실하고 성결한 자녀가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는 합니다. 그래서 좋은 본을 보이는 것은 우리와 자녀세대를 동시에 행복하게 만드는 중요한 방법의 하나이지 확실한 방법은 아닙니다.
사실 이 조건, 자녀를 잘키워서 비난받지 않는 사람으로 만드는 조건을 만족시키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목사의 자녀들이 방탕하지 않고 불순종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믿음 안에서 멋진 아이들로 성장하게 하는 것 역시 중요한 목사의 조건입니다.
목사의 사역의 장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다음으로는 가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또 이건 목사의 조건, 성도의 조건을 떠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목사는 자기만 잘 살아서는 안되고 가정도 화목해야 합니다. 사실 이건 목사에게만 해당되는 조건이 아닙니다. 성도에게도 해당되는 조건입니다.
오늘날 마귀의 궤계로 인해 가정이 점점 해체되고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한창 배울 때 1인 가정이란 말은 거의 저주에 가까운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오늘날 1/3이상의 가정이 1인 가정이랍니다. 그러므로 화목한 가정은 신자들의 증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기본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가정입니다. 사랑하고 보호받고 안전하고 그리고 내일을 보게 하는 가장 최소의 그리고 가장 필수적인 단위는 가정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에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이 두 쪼가리들이 합쳐서 완전한 한 개의 개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사회는, 공동체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건전한 가정을 만든다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필수적인 덕목입니다. 나라와 교회의 존립을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한 조건입니다.
두 번째 조건이 한 아내의 남편이 되는 겁니다. 세 번째는 착한 자녀를 갖는 겁니다. 이 두가지를 합치면 집안을 잘 건사하는 잘 다스리는 좋은 가정을 이루는게 바로 목사의 조건입니다.
옛말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란 말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수신’에서 나아가 ‘제가’를 하려고 합니다. 수신에서 제가까지가 바로 목사의 조건입니다. 이게 되어야 교회도 나라도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나만 잘하면 된다는 것은 지도받는 일반인들의 입장이지 지도자의 입장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지도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성도의 일거수일투족은
다른 이들의 귀감이 되어야 하고 사표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의 지도자이자 안전판입니다. 하나님에게 이 세상을 향한 노여움에 재고를 요청하고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요청할 수 있는 귀중한 축복의 통로이자 인맥입니다.
가끔가다가 생각하는게 하나님이 이 나라를 버리시기로 작정한 것은 아닐까? 물론 아닐겁니다. 그렇다면 정말이지 큰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마구 내뱉은 욕설의 찌꺼기를 보면 정말이지 암담할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지독한 이기심과 방탕함과 음란이 도를 넘어섰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코로나의 잔불이 이어지는 것도 결국은 게이클럽이 원인입니다. 뭐 다른 원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쉽게 인정하기는 어렵지요.
살다살다 남자와 여자가 편을 갈라 싸우는 이런 사회도 처음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돕고 한몸을 이루라고 하신 남녀가 경쟁하고 싸우고 질시하며 미워한다면 그 사회가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남과 북이 동과 서가 가진 자와 못가진 자가 노인과 청년이 싸우더니 이제는 남녀가 싸우다니 기가 찹니다. 무슨 막장국가도 아니고 뭡니까? 이래서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요구할 수 있나요?
인맥이 있어야 출세한다고 말하지요?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인맥이 있어야 하나님의 분노가 수그러 듭니다. 세상모두가 갈바를 알지 못하고 미망속에 빠져있을 때 그래서 우리 하나님을 실망시킬 때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성도요 자녀인 우리가 나서서 저들을 위해서 빌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인맥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의 역할이 더 더 더 말세지말을 당한 이 때에 소중한 것입니다.
요즘 우리 교회가 제대로 된 멋진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지 못해서 저도 참 걱정이기는 한데 아직까지 끝난게 아닙니다. 자꾸 ‘교회발 코로나감염’이라고 뉴스에 나오지만 실제로는 교회 발이 아니라 게이 발입니다. 그게 퍼져서 교회의 교인들이나 목사들이 감염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흘렀다고 게이들의 만행은 잊혀지고 목사들만 보도가 되는데 하나님은 코로나 확진 교역자와 가족들 교인들을 좋은 곳에 사용하실 겁니다. 방역수칙대로 조심하고 걸렸다가 나은 분들은 혈장도 제공하세요.
목사와 교인들이 이기적인 자가 아니라 누구보다 선하고 착한 존재임을 보일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뜻하지 않게 코로나에 감염된 이들은 이제까지 보호하고 입히고 인도한 하나님의 이름에 덕이 되는 일들을 할 기회입니다.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나라에 도움이 되는 멋진 성도와 목사가 될 수 있습니다.
방탕하다는 말은 도덕적으로 문란하거나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불순종한다는 말에는 부모의 말에 불순종한다는 뜻이 첫 번째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포함합니다.
목사나 성도의 가정에서 믿지 않는 자녀가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끔찍합니다. 왜냐면 믿음이야 말로 우리가 이 험난한 세상을 안전하게 살아갈 가장 큰 유산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많은 지식을 습득하게 하고 좋은 스펙을 쌓게 한다고 해도 믿음보다 더 큰 스펙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직통하게 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 유일한 방법을 두고 딴 것을 찾아봐야 헛수고입니다.
믿는 부모가 훈육하는 말씀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합하는 것이지만 이걸 제 고집대로 내세우면서 듣지 않고 속을 썩이는 자녀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녀에 대해서 제대로 훈육해야 합니다. 안된다면 기도할 일입니다. 그래도 안되요? 눈물흘리며 더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 대화하고 권면하고 그리고 희생하고 헌신하십시오.
‘믿는 자녀’는 우리가 결코 양보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조건입니다.
방탕하고 불순종한다는 것은 매우 주관적일 수가 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불순종이란 말에 거부감을 가집니다. 무조건 네가 최고라고 네가 중심이라고 네 멋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이게 바로 사탄의 함정입니다.
가정을 해체하고 서로간의 사랑과 믿음을 파괴하고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듭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아내와 남편 간에 단절을 꾀합니다. 이웃 간에 분열을 야기하고 공동체를 분리 시킵니다. 이미 분리되었다면 이제부터는 갈등을 유발합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아무도 의지할 수 없게 사방으로부터 고독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자녀교육은 정말이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녀교육을 잘하기 위해서 좋은 가정 건강한 가정이 필수입니다. 나는 안되는데 너네는 그렇게 살지마라고 이야기하는게 무슨 설득력이 있겠습니까?
그 최소한의 요건, 좋은 가정을 가지기위하여 정말이지 최소한도록 필요한 것이 한아내의 남편인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조건을 약간은 완화시킵니다. 방탕하고 불순종한 것으로 남에게 책망을 받고 또는 법적으로 고소를 당할 정도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조건을 완화시킵니다.
비록 자녀의 생각을 우리가 좌지우지할 수는 없어도 큰 사고를 치고 물의를 일으켜서 법적으로 고소를 당하지 않을 정도로는 키울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물의가 없는 가정을 이루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가족이란건 결국은 가장 이타적인 운명공동체이므로 그 안에서 해결되는 단위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전제로 하는 이런 운명공동체는 내부의 문제를 외부나 법정에 호소할 만큼 막장이 아닙니다. 당연합니다.
요즘보면 이런 당연한 일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가정이 많습니다. 얼마나 심각했으면 법에 호소할 정도겠습니까? 사랑과 희생과 자원함이 기본인 가정에서 법의 강제가 개입한다면 그건 더 이상 운명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아닙니다.
이제 성경은 계속해서 목사의 조건에 대해서 말하면서 감독의 조건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장로의 조건이나 감독의 조건 모두 목사의 조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도의 조건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됩니다. 다음 주에도 목사의 조건은 계속됩니다. 조건이 참 많습니다. 오늘 조건은 오히려 간단한 겁니다.
제가 항상 강조하는 성도는 교인보다 신자보다 더 높은 개념입니다. 신앙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인정이란 면에서 더 고귀한 자입니다. 세상에 교인은 매우 많습니다. 신자, 믿는자도 어느 정도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는 매우 적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히 목사에게 주어지는 조건을 성도에게도 적용시키려고 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멋지고 생동감 있는, 힘있는 공동체가 될까요?
우리는 모두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육신이 약하여 성경에서 요구하는 조건을 그대로 충족시키기가 어려운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의 허물이 외부에 의해서 단죄되는 경우까지 가서는 안됩니다. 우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교인들끼리 편을 갈라서 싸우고 법정에 소송하고 거짓증거하고 이렇게 되면 그건 이미 교회라고 하기가 어렵습니다. 차라리 그럴바에는 좋게 헤어지세요. 그래서 선한 열매를 누가 많이 맺는가로 경쟁하세요.
옛날 중세에는 법정에서 재판하지 않고 서로 결투로 선악간에 판단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성도는 선한 열매를 누가 누가 많이 맺나로 판단하면 됩니다. 우리의 이견이 분열을 초래했다면 과연 누가 더 옳은지는 하나님이 판단하실텐데 우리가 맺은 의로운 열매들로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이게 중세 기사들이 결투처럼 판단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하하, 너무 나갔나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백성들간에 싸우고 시기하고 분열하는 것을 금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은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건강한 가정이 목사의 조건이라면 역시나 건강한 가정이 성도의 조건입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모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들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지체들끼리 형제자매들끼리는 싸워서는 안됩니다. 지체들끼리 형제자매들끼리 서로 싸우고 시기하는 곳을 우리는 콩가루 집안이라고 하지요. 아버지께서 보실 때 얼마나 보기 싫고 슬프실까요?
서로 웃고 도우고 사랑하고 이게 바로 우리 아버지께서 요구하시는 모습니다. 그가 보시고 좋았더라고 되어야 더 사랑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이 세상에서 승리하게 되는 겁니다. 복 좋아하시지요? 그 복을 받으려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웃고 좋아야 합니다. 형제의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장로의 조건에 별 다른게 없습니다. 매우 기본만 적어 두었습니다.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고
착하고 성실한 자녀를 둔
이 세가지 조건은 참으로 간단합니다. 그러므로 지키기도 쉽습니다. 건강한 가정! 아멘입니까?
그런데 가지는 세가진데 솔직히 이걸 자세히 살펴보면 엄청나게 지키기가 어려운 조건입니다. 책망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작정하고 파 뒤집으면 책망할 것이 나오지 않을까요? 뭐 한 아내의 남편이란건 요즘은 대부분 잘 지키니까 생략합시다. 권력자 부자 사기꾼인 아니면 다 한 아내의 남편입니다.
착하고 성실한 자녀를 두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만은 되지 않는,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되는 조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마지막 조건을 위해서 더 열심히 기도하고 겸비하고 눈물짓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더 매달리는 겁니다.
다음주에는 감독의 조건에 대해서 살펴볼 겁니다. 이건 엄청나게 가지수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이것부터 충족해야 감독의 조건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성도가 무엇으로 세상을 이깁니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기는 겁니다. 우리에게 부족함이 있다면 후히 주시는 아버지께 간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 천하의 주인이시며 부족함이 없으시며 불가능한 것도 없으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초심으로 돌아가라. 기본이 중요하다. 기본으로 돌아가라. 그래요 오늘날 우리 기독교는 너무 거대하고 너무 화려하고 너무 배불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잊어버린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때이며 이제는 기본부터 다시 구축해야 할 때이며 이제는 쓸데없는 것을 내려놓고 근원적인 것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기본은 나자신 그리고 가정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이곳에 아직도 살려두신 이유는 이곳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항상 생각하고 스스로 삼가고 힘쓰며 간구하는 우리들이 되시기를 바라고 또 아버지께서 코로나 사태 가운데서도 승리케 하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셔서 다음 주에도 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20년 6월 7일 주일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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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저는 이 글을 올리는 시점에서 미혼이기 때문에, 남편이 되지 않았고, 자녀를 두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되고자 하는 첫 번째 조건에 시선이 갑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 삶입니다. 일을 해오면서 책망을 들었던 적이 있어서 유독 기억이 납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고객에게 더 잘하라, 고객을 반갑게 맞으라 이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사실은 써놓고 보니 기본이지요. 그런데도 그 기본에 느슨해 져가지고,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적이 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뭐, 저만 그런 건 아니었나 봅니다. 지미 카터도 사관학교 생도 시절에, 제독이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나? 라는 질문에 몹시 당황하여 부들부들 떨었다고 합니다.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자만하고 있었지만, 제독이 봤을 때 성적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었다는 거죠. 바로 태도의 문제입니다. 어쩌면 교회는 억울하고 힘들 수 있겠지요.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간다면 좋겠습니다. 개인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책 제목을 약간 패러디 하여, 좋은 삶을 넘어 더 멋진 삶을 향해서 살아갈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쉽지 않을 겁니다. 변화는 어렵습니다. 유혹은 많습니다. 노력하기란 힘이 드는 법입니다. 그렇기에 힘내기를 응원합니다. 잘 하실 수 있을꺼에요. 화이팅! / 2020. 06. 시북 (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