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시편131:1-3)/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20. 7. 19. 20:41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시편131:1-3)

 

오늘 본문은 겨우 석절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석절이 바로 시한편입니다. 어쩌면 오늘 본문은 야망이 들끊는 젊은이들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맞지 않는게 아니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묘미를 알고 음미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오랜 세월의 경험이 쌓인 사람이라면 참 맞는말 이라고 무릎을 치게 될 그런 말씀입니다.

 

세상은 거침없는 열정이 들끓는 젊음도 필요하지만 절제와 여유를 잃지 않는 중년의 여유와 세상이 아무리 급변해도 가볍게 요동하지 않는 노년의 고요함도 필요한 법입니다.

 

약간 웃긴 얘기이기는 한데 모든 사람이 꼭 미래만 보고 달려나가는 것도 이상합니다. 때로 인생은 뒤를 돌아보며 아쉬웠던 시절, 아름다웠던 시절, 다시 보고 싶은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도 필요한 법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는 신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부족한 것도 많고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고 약간은 죄와 유혹에 흔들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한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겠지만 자기가 가진 나머지 부족을 우리 하나님이 채워주실걸로 믿고 그를 의지하며 바라며 나아간다면 인생에 큰 실패는 없을 것입니다. 아니 고진감래라고 고생 끝에 낙이 올지 모르는 일입니다.

 

먼저 오늘 시는 성전 순례시의 하나입니다. 시편에는 성전 순례시가 총15편이 나오는데 그중에 4편이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고 한편이 솔로몬의 시라고 나와 있습니다. 나머지는 작자 미상입니다.

 

저자가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거니까요. 그러나 다윗이라는 저자를 알게 되면 우리는 그가 어떤 심정으로 이 시를 썼을까를 알게 되고 이 시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됩니다.

 

다윗은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고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왕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야심에 찬 시가 아니라 조용한 성전 순례시를 지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큰일을 하는 것하고 야망을 가지는 것 하고 그렇게 큰 상관이 없는 모양입니다.

 

잠깐 이상하지 않습니까? 안타깝게도 다윗시대에는 성전이라는 건물이 없었습니다. 성막은 있었지만 성전은 그의 아들 대에서야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러니 다윗이 성전에 올라가면서 지은 시는 아닙니다. 다만 후세의 사람들이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른 시라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야망을 보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뭐 좋은 말로 야망이지 보통 말로는 욕심이지요,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과 명령에 대한 준수 여부를 보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그가 아무런 야망이 없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조용한 마음으로 초야에 묻혀 있으려 해도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있다면 들어 사용하시는 겁니다.

 

다윗은 주위 열국을 정벌했지만 사실 이 나라들은 그렇게 큰 나라들은 아닙니다. 모압이니 암몬이니 에돔이니 아람이니 하는 나라들은 다 조그마한 나라들입니다. 아람은 엘리사 시대의 아람과 달리 당시엔 통일을 이루지 못한 상태입니다. 다윗에게 질 수 밖에 없지요.

 

만일 다윗이 하나님을 바라며 고요한 마음을 가지지 않고 자기가 가진 부와 강병을 과신했다면 그래서 더 큰 야망을 가졌다면 아마 그는 애굽이나 메소포타미아로의 진출을 꿈꾸었을지도 모릅니다. 에디오피아니 예멘을 정복하려고 했을 지도 모릅니다.

 

위대한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세계사를 장식한 대제국의 황제가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가나안 땅을 넘어서 자기의 영토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정벌한 주변 나라들도 조공을 받는 정도로 그쳤지 자기나라로 편입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주변 나라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전쟁을 한거지 저들을 쳐서 자기나라에 편입시키려고 전쟁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어쩌면 다윗도 문득 문득 대제국을 향한 유혹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구조사를 실시한 것만 봐도 때로는 마음속에 웅심이 들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기에게 주어진 분복에 만족하고 하나님에게 더 집중하고 주어진 복에 감사했습니다.

 

1.내가 아니하오며

1절에는 총 세가지의 ‘아니하오며’가 나옵니다.

첫 번째가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오며

두 번째가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세 번째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오며’는 당연한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듣는 금령이 바로 교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교만이야 말로 인간을 타락시킨 가장 큰 원인이고 사탄을 사탄으로 만든 원인이요 하나님과 대결하려는 어리석은 역사의 원인입니다. 다윗 역시 본문에서 ‘교만하지 아니하오며’ 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시가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전에 가면서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많을까요 적을까요? 적어요? 모르긴 몰라도 아마 엄청나게 많을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가 나오는 이유는 이게, 이 교만이란게 마음 속에만 머물러 있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선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교만을 아시고 우리가 아뢰는 기도를 절대로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인간이 아무리 높아도 설마 하나님 앞에서 까지 높아질까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높아 진게 바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신이 되려한 것 아닙니까?

 

니므롯이 바벨탑을 쌓고 신과 같이 되려고 한게 아닙니까?

네피림들이 나서 세상을 요란케 한게 아닙니까? 그게 바로 마음이 교만해져서입니다. 교만은 신처럼 되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결론은 패망이지요.

 

지금도 인간의 교만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타락하고 난 후에 줄곧 신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것을 부추기는게 바로 사탄입니다. 창조주를 향한 피조물들의 끊임없는 반란, 그걸 보고 사탄은 비웃습니다. 사탄은 선악과를 인간에게 준 것이 아니라 교만을 준 것입니다. 신이 되고자 하는 스스로 신처럼 높아 지고자 하는 교만을 넣어 준 것입니다.

 

원래 본문의 교만은 ‘높아지다’라는 뜻입니다. 조금 더 풀어서 해석한다면 ‘신분이 존귀해지고 그래서 마음이 높아진 상태’를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벼슬이 높아지고 돈이 많아지고 학력이 높아지면 당연히 마음이 높아집니다.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게 되므로 스스로 마음이 높아지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간중심의 사고방식 즉 인본주의에 따른 결과입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노력해서 내가 내가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내가 잘해서라기보다는 운이 좋아서, 어쩌다보니 잘나게 된 겁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댓가 없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높아 지고 잘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더 정확히는 하나님의 덕분입니다. 그가 그 사람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있기에 선한 청지기로 쓰시려고 주신 재능과 기회 덕분입니다.

 

그걸 부정한다면 그는 패망입니다. 미래가 없어요.

 

여기 ‘아니하오며’ 라는 말은 히브리원문으로 ‘로’라고 합니다. 강력한 금지의 ‘로’입니다. 영어의 no 하고 비슷하지만 히브리어에서 ‘로’를 쓰면 매우 강력한 금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식으로는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 정도의 의미입니다.

 

다윗은 성전을 오르는 순례자가 자기의 일생에 절대로 해서는 안될 것 세가지를 들고 있는 겁니다.

 

첫 번째가 교만입니다.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오며”

두 번째가‘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이지요? 옛날 성경에서는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입니다. 원문으로는 교만이나 오만이나 비슷한 뜻입니다.

 

그런데 교만이 마음속에만 머물러 있어서 남은 모르는 상태라면 내 눈이 오만해지면 이제 눈빛으로 교만이 새어 나옵니다. 그래서 남들도 알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라고 했지요?

 

세 번째는 마음속의 교만이 눈빛으로 흘러나오고 그것이 마침내 인간의 행동으로 실행되는 것을 말합니다.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옛날 성경은 ‘기이한 일’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큰일은 ‘자신을 위한 그리고 자신을 위대하게 하고자 하는 큰일’이란 뜻입니다. 남을 위한 큰일, 인류를 위한 큰일이 아닙니다. 오직 나를 위한 큰일입니다. 당연하게도 하나님이 들어 주실 리가 업습니다. 결국은 패망입니다.

 

기이한 일은 ‘내 자신이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이란 말입니다. 이걸 ‘기이한’ 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스스로 신처럼 높여서 손만 얹으면 병이 낫고 무불통지하게 되고 예언을 하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까마득히 하늘에 닿은 바벨탑? 사람들이 보고 세상에 저걸 어떻게 쌓았지? 그걸 기이한 일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밋들.

 

그러니까 세계정복이나 재벌같은 것을 꿈꾸거나 기적의 손이 되고자 하는 그런 욕망, 도저히 우리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그런 일을 꿈꾸는 것을 말합니다. 대형교회의 목사들 중에서 많은 이들이 사이비교의 교주가 되었지요? 다 그래서입니다.

 

심지어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을 하나님하고는 상관없이 순전히 나의 능력으로만 이룰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렇게 세가지를 하지 않겠다고 시를 지어 불렀지만 따지고 보면 한가지에서 시작합니다. 바로 교만입니다. 나는 위대하다. 너무 위대해서 내 앞에 그 누구도 심지어 하나님도 방해가 될 수 없다. 이건 거의 정신병 수준입니다. 여하튼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가면서 교만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고요하게 평온하게 하기를

2절에서 다윗은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이라고 말합니다.

놀랍게도 한글로는 전혀 그럴 것같지 않은데 히브리원문에는 역시나 ‘로’가 쓰입니다. 이번에는 ‘임 로’라는 말로 쓰입니다.

 

이게 중요하지는 않겠지만 그 뜻을 풀이한다면 ‘만약이라는 가정조차 불필요한 확실함’을 말합니다. 너무 너무 확실해서 혹시라도 안되면 어떨까 같은 걱정이나 가정은 필요 없는 그런 상태입니다.

 

일절에서 교만하지 않겠다고 하는 그 맹세에 기초해서 내 영혼이 고요하고 평온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겁니다.

 

평온이란 말은 누가 와서 내 마음을 흔들려고 해도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말하고 고요란 말은 그런 상태 즉 고요한 상태가 되려고 스스로 어떤 일도 하지 않겠다는 시인의 의지가 들어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보다 자세하게는 비록 여건이 불리하다고 해도 나는 절대로 허황된 생각으로 나를 격동시키지 않고 마음을 평온하게 가지겠다는 그런 의지가 들어있는 말입니다.

 

보통 실망은 어떤 때에 생깁니까? 뭔가 바라는 바가 있기에 생기는 겁니다. 전혀 바라지 않는다면 실망할 것도 없는 법입니다. 그러다가 뭔가가 주어진다면 오히려 비록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기뻐하게 됩니다. 우리가 잘 쓰는 서프라이즈는 생각지도 못한 깜짝 선물을 표현합니다.

 

내가 돈도 많고 몸도 건강하고 벼슬도 높고 사랑하고 사랑받아서 나는 아무 부족함이 없다는 마음에서 나오는 평온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을 다 가졌기에 다른 것을 탐하지 않는 고요가 아닙니다.

 

나는 지금 비록 부족하고 없는 것 투성이라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한 것을 말합니다.

 

기사제목만을 봤는데 자극적입디다. 젊은 직장인이 하는 말입니다. 은행계좌에 돈이 천만원이 그대로 들어 있다면 돈이 썩는 것 같이 여겨진다는 겁니다.

 

이걸 주식에, 부동산에 투자하고 코인에 투자하고 그러면 이게 몇십 퍼센트가 오를지 몇배가 될지 모르는데 가만 놔두는 것은 돈을 썩히는 것과 같이 여겨져서 도저히 가만 있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는 어디에 집을 사서 돈이 몇억이 올랐니 몇십억이 올랐니 하는 말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돈되는 곳으로 몰려 다니는 것입니다.

 

그걸 안하겠다는 겁니다. 돈도 없고 세력도 없고 뭣도 없고 하지만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서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그가 나의 결국을 지켜주시고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허락하실걸 믿는 겁니다.

 

오늘 다윗은 이런 마음 상태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2절은 그런 말입니다.

 

다윗은 이런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 더 이상의 욕심도 없고 불만도 없는 그런 상태를 표현하면서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엄마 품에서 젖을 실컷 먹고 젖을 더 이상 먹을 필요가 없어서 풍족한 상태에서 더 이상의 욕심이 없이 품 안에서 새근새근 자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고 보면 좋습니다.

 

솔직히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다 주어졌습니다. 배부르고 편안하고 충분히 사랑받고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요? 바로 이런 상태와 같다는 겁니다. 내 몸이 아니라 내 영혼이.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아이일 때는 바라는 것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엄마의 품이지요. 엄마의 젖입니다. 저것만 있으면 부러운게 없었습니다.

 

나머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다 해줄거니까.

 

그러다가 우리가 점점 커가면서 필요하고 부족한 것이 많아 졌습니다. 엄마가 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게 점점 많아 집니다. 어쩌면 자란다는 것, 커간다는 것은 욕심이 많아진다는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그는 우리가 아무리 자라고 늙고 커가도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시고 전능하신 존재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은 정말이지 무궁무진합니다.

 

젖뗀 아이? 그래요,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면 우리는 걱정이 없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요동하고 급변해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세상이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육신적으로 보면 부족하고 불편하고 그래서 필요한 것 불평할 것들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혼이 평온하여 마치 젖뗀, 그러니까 젖을 실컷 먹어서 배가 불러서 방금 젖을 뗀 아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하러 교회에 나올 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해놓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달라는 기도만 계속됩니다. ‘~달라’가 끝이나면 기도도 끝이 납니다. 심지어 우리가 달라고 하지 않은 것 까지 알아서 챙겨달라는 기도로 끝을 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해서 우리의 감사가 너무 적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에 비해서 너무 과한 요구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오늘 다윗처럼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아무런 불평과 불만없이, 인간적인 욕심없이 너무 욕망 때문에 초조해 하지도 말고

언젠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실걸 믿고

나는 오늘 하루 하루를 주님이 주신 이 귀한 건강과 재물을 가지고 시간을 가지고 가치 있고 보람있게 살아 갈거라고 다짐하고

어떤 유혹이 와도 고요하고 어떻게 세상이 변해도 평온을 유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3.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비록 3절뿐이지만 두절의 기도를 마치고 이제는 개인적인 기도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기도가 나옵니다. 우리도 이 정도쯤은 해줘야 합니다. 너무 개인적인 기도만 하지 말고 개인적인 기도가 끝이 나면 공동체를 위한 기도 , 남을 위한 기도 정도 넣어 주는게 좋습니다.

 

“얘들아, 너희는 내가 낳은 내 자식들이야. 그러니 서로 싸우지 말고 잘살아” 하는 데에다 나만 나만을 구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속상해 하시겠나요? 여기서 나만 잘살려고 하면 결국 저 아들은 저 딸은 힘들어 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 사실에 눈감고 나만을 외치면 아버지 하나님이 결코 좋아히시지 않습니다.

 

아니면 우리의 아버지께서 “쟤는 남 생각은 하나도 안하고 자기만 잘되게 해달라고 천날만날 기도하는데 아무래도 조금 더 성숙해야 되겠어! 복을 받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 하실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마지막으로 기도를 마치면서 이스라엘 전체에게 하는 기도문을 넣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에게 요구하는 기도는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이 기도문의 후렴구는 다윗의 시에 자주 나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들어있다면 다윗의 시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그런데 뭘 바랍니까? 앞에 2절에서 나왔습니다. 내 영혼이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바라라는 겁니다. 나만 그렇게 바랄게 아니라 너희 이스라엘 사람 전부 다 자기의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하기를 영원히 바라라는 겁니다.

 

우리가 모든 것의 중심을 하나님으로 본다면 이 기도는 당연히 나올 수 밖에 없는 기도입니다.

 

이것도 문제고 저것도 문제고 이게 없고 저게 없고 이게 불편하고 저게 불편하고 우리네 인생에 장애가 한두개가 아니지요?

 

이런 저런 일들이 주기적으로 생겨서 도저히 내가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어 보이지요? 그러나 그 모든 문제의 주인이시며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능력자 하나님을 기다리고 그가 해결해 주실 것을 바라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우리 인간과 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그래서 그 모든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에게 열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여기서의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이 세상을 만드실 때에는 피조물인 이 인간으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창조주를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죄악된 본성으로 스스로의 쾌락과 이익을 꾀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위해서 형제를 해치고 죽이는 상황까지 나아갔습니다.

 

심지어 그것을 위해서 사탄과 하나님을 저울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세상을 그대로 두고서는 그 안에서 인간이 행복해 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우리가 사는 사회가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나의 입장에서는 공동체는 됐고 나, 내가 더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우리’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면 싫으나 좋으나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회가 평안하지 않다면 우리가 고요하고 평온해 질 수가 없습니다. 살인범과 사기꾼이 들끓고 강도와 절도가 판을 친다면 무서워서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요즘같은 세상에 폐쇄된 장원도 아니고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혼자서 고립을 하고 있다가 결국은 도태되고 멸절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집밖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당해서 멸망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집안뿐만 아니라 집밖도 중요한 겁니다. 내가 잘살기위해서 우리가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혀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이 아니라면 되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인간의 천성은 절대로 변하지 않고 성령님께서도 그를 변화시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기질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신다는 이야기도 하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우리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뭐니 뭐니해도 하나님입니다. 그는 모든 문제 해결의 중심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걸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보통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나라고 뭐고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못견뎌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권능을 의지하고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중국 공산당이 교회를 핍박하는 것도 역시 교회가 공산당보다 더 인기가 많고 더 응집력이 강하기 때문에 국가보다 더 큰 권위가 정권을 전복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나라가 반교회적으로 된다면 그 안에서 생활하는 성도들은 정말로 힘이 듭니다. 초기 로마시대의 교회들은 그런 어려움 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외부적인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에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공포보다 하늘의 힘을 더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루 하루 숨죽이며 살면서도 하늘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상이 아무리 요동하고 어렵고 병균이 판을 치고 사람들이 우왕좌왕해도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하게 유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역시나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그 전능하신 역사를 믿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너무 급격히 부자가 되려 하거나 높아지려 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권력과 부는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므로 급격히 그런 것을 구할려면 반드시 남을 이겨야 됩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경쟁에서 진 사람들이 반드시 원한을 품고 보복하려 들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급격히 출세하게 되면 남들의 이목을 끌고 질시를 받게 됩니다. 질투하는 마음으로 꼬투리를 잡아서 괴롭히려고 덤비면 정말이지 막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만 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아니라고요? 내가 힘써서 일한 결과라고요?

 

글쎄요?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연약하고 비합리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과 인도와 보호가 필요한 것입니다.

 

다윗이 마지막 절에서 하나님을 바라라고 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처분만 바라고 앉아 있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우리에 대한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법을 적극적으로 준행하며 바르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 불법을 저지르라는 유혹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을 믿고 그만 바라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다른 말로는 지혜자요 승리자입니다.

 

다윗은 다 가졌습니다. 돈 권력 미인 그리고 강대한 군대 심지어 백성들의 칭송까지. 돈에서 명예까지 가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족함이 없으니까 혼자서 속편한 소리 하는 것 같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강력한 군대와 엄청난 부를 가진 왕이 그 권력을 억제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다윗은 여러명의 아내가 있지만 남의 아내를 빼앗았다가 하나님의 큰 징계를 받았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앞에 겸손하지 않았다면 겨우 그것 때문에 나를 비난하느냐고 아마 나단 선지자의 목을 베어버렸을 것입니다.

 

고대의 왕들은 보통은 음탕하고 잔인했기 때문에 실제로 남의 아내를 빼앗은 경우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징계를 당연히 받아 들였고 끝까지 하나님 앞에 한사람의 피조물로 있었습니다.

 

“아니 내가 내돈 들여 성전을 지어 드리려는데 그것도 못하게 막느냐? 쓸데없는 소리말고 비켜라. 내가 황금과 백향목으로 성전을 지어 드릴 것이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다윗의 성전’ 대신에 ‘솔로몬의 성전’이지요.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 앞에서 성전 건축자의 명예를 포기한 것입니다. 엄청난 부와 넓은 영토 그리고 평화면 되었지 더 이상은 욕심내지 말자고 한 것입니다. 성전은 내가 세우지는 못하지만 재료라도 준비해 두자. 그리고 아들이 세우게 하자.

 

그는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 맡기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절제한 것입니다. 인간인지라 때로 범죄하고 때로 분노하고 실패하더라도 결국엔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서 겸손하게 서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토를 정해 주시면서 ‘하맛 어귀에서 애굽시내까지’의 넓은 영토를 가나안으로, 이스라엘의 강역으로 정해 주셨습니다.

 

다윗의 전성기 때에도 사실은 이 영토를 장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만 더 노력하면 우리말로 잘만하면 성경이 말한 역사적인 위업을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얼마나 얼마나 그 영토가 탐이 났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까지 참았고 그리고 아쉬운 결말을 맞았지요? 그러나 그런 그가 사실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으로 불려집니다. 북쪽으로 하맛어귀까지 밀고 올라간 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 모릅니다. 그를 기리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부화뇌동하고 정신없이 광분하여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은 하나님보다 나를 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헤를 믿지 못하고 인간인 나의 지헤를 높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그의 사랑과 섭리를 믿으세요. 인내하고 그의 명령을 준행하는 이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으세요. 그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분, 사랑의 아버지이심을 믿으세요. 한번 사랑한다 하셨다면 절대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개치 않는 분임을 믿으세요.

 

그래요, 세상이 아무리 급변하고 요동해도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바랄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항상 동행하며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그리고 하나님의 지도를 따르는 이 사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20년 7월 12일 주일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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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마음이 차분해 지는 독특한 설교말씀 입니다.

무리해서 욕심을 내지 않는 삶이라, 참 많이 와닿게 됩니다.

저는 마음 속에 종종 할 수 있는데까지만 이라고 생각합니다.

온 힘을 다해, 전속력을 다해서, 물론 그것도 좋지만,

 

매일 할 수 있는데까지 노력하고,

내 덕분이야 대신에, 당신이 있어서 고마워요 라고 생각하기.

 

링컨 대통령의 초창기 이야기를 읽고 있습니다.

그가 먼저 좋은 잡화점의 점원이 되자,

그 마을 사람들 300명 중에 277명이던가... 수 많은 사람들이 표를 주었습니다.

링컨은 선거라는 큰 판에서는 비록 낙선했지만, 그 삶이 헛되지 않았음에서, 매우 힘을 얻었고,

빵값 밖에 못 벌면서도 재기를 위해 노력했고... 시간이 많이 흐르자, 모두가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좋은 이웃이 좋은 대통령이 된다는 것.

인생은 다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

다 주시지 않아도, 감사로 채워나갈 수 있다는 것.

 

높아짐이 아니라, 낮아짐에 오히려 비밀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2020. 07. 시북 (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