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베드로 전서3:19-21)
요즘 코로나 때문에 세상이 말이 아닙니다. 코로나로 죽는 사람은 우리나라에서는 잘안나오지만 다른 나라들에서는 굉장히 숫자가 많습니다. 특히 구미쪽 더 좁게 미국같은 곳에서는 하루에 확진자가 7만명을 넘는다고 합니다.
세계가 한몸으로 연결되어 있는 통에 끊임없이 확진자들이 입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숫자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지긋지긋한 전염병은 도대체 언제 끝날까요? 너무 이 코로나가 시끄럽기에 다른 것은 아예 관심사에서 멀어져 버렸습니다.
돌이켜보면 이번 봄에 그렇게나 극성을 부리던 황사니 미세먼지에 대한 이야기를 잘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코로나라는 세계적인 대재앙에 묻힌건지 아니면 코로나 때문에 산업활동이 중단되어서 미세먼지가 없어진건지...
참고로 정관은 일년의 거의 대부분이 맑고 신선한 공기를 자랑하기 때문에 세상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못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순례자의 길이라고 이름 붙인 좌광천길 왕복20km를 걷는다면 한가지 외에는 아무 생각이 안듭니다. 고요한 가운데 만나는 주님 정도?
이 동네가 너무 조용한 곳입니다. 부산 속의 또 다른 세상입니다. 코로나 환자가 단 한명도 생기지 않았다면 말 다한거지요.
부산 시내에서 이곳에 들어오려면 세 개의 터널을 지나야 합니다. 거리는 별로 멀지 않지만 지리적인 여건이 굉장합니다. 참 우리 정관도 역시 부산에 속해 있습니다. 월평을 거쳐서 오시지요? 월평도 부산이고 정관에 속합니다. 바로 그 위는 양산이고 경상남도입니다.
지금 코로나가 옆으로는 광주까지 위로는 대구 경북까지 전진했습니다. 부산 역시 이 나라에 속해 있으므로 피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만 국외 입국자가 아닌 자체 감염은 없는 듯이 보입니다. 그래도 어쨌든 부산에서도 150여명의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습니다. 세부적으로 볼 때 정관에 한명도 없다는 거지요.
처음엔 우리 모두 난리를 만난 듯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사실 호들갑은 아닌게 실제로 외국에서는 막 죽어 나갔지요. 진짜로 무섭습니다. 그런데 어느듯 우리는 코로나에도 무덤덤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빼고 다른 모든 곳은 다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코로나를 주셨을까? 코로나는 언젠가는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점점 더 확산이 되어서 마침내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 될까?
모르겠습니다. 그 미세한 바이러스의 진행 방향에 대해서 정말이지 모르겠습니다. 뭐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미래의 확실한 방향을 모를 때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인류사에 가장 중대한 시점에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세계사의 거대한 한획을 긋는 역사적 시점을 살고 있습니다. 마치 모세의 때에 애굽에 내리는 열가지 재앙을 보는 듯이 거대한 전기가 마련되려 하고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확실하게 알고자 합니다. 믿음이 확실하지 않은 교인 중에는 하나님이 말씀해주시지 않는다면 하다못해 점쟁이를 찾아 가려고까지 생각합니다. 그 정도로 미래에 대해 답답해 합니다.
미망속에서 한치앞을 볼 수 없는 이들에게 저 너머에 과연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최고의 관심사입니다. 너무 궁금합니다. 너무 알고 싶습니다. 저 너머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다행히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점쟁이니 우상이니에 매달리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에 확실히 믿기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고요한 마음과 평온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요동해도 우린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그의 이끄심과 품에 안아 주심을 바랍니다.
1.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노아의 때에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여 의인들은 도저히 정상적으로 삶을 살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에서 모두 사라지고 노아의 가정외에는 믿는이를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했던 구별, 가인의 후손이고 셋의 후예고 간에 더 이상 구분이 무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누구의 후손이든 모두 다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의 종이 되어 죄악에 중독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시대상을 창세기6:5에 보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죄악이 세상에 얼마나 관영했는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하게 살려고 하는 이들이 겨우 한가정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믿기 어렵습니다. 인간 세상이 얼마나 캄캄하고 어두운 죄악으로 가득했는지 도저히 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가정이 겨우 한가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롯을 구원해 내시고 소돔을 멸하셨습니다. 세상에 노아 한 가정만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가정을 방주에 태우시고 세상을 물로 쓸어버리셨습니다.
한가정만 남았다는 것은 도저히 더 이상 악을 제어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독불장군은 없다고,
죄악을 막기위해서라도 한 개 이상의 단체 한 개 이상의 공동체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비록 적은 세력이라도 일구고 있어야 거대한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이지 한사람, 한가정으로는 안됩니다. 역부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의 깃발아래 뭉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 당시의 세상을 고쳐서 사용하시기보다는 물로 세상을 멸하고자 계획하셨고 의인을 구하시기위해 노아를 시켜 방주를 짓게 하셨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120년입니다. 그 긴 기간 동안 노아는 방주를 지으면서 장차 물로 세상이 심판받을 때 방주에 타지 않는다면 다 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말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비웃으며 조롱하고 협박합니다. 때로는 생명의 위협까지도 가합니다. 생명의 은인이 될 사람인데 저들은 그것을 모르고 성가시고 귀찮게 굴고 자기들이 증오하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한다고 화를 냅니다.
하나님은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래도 유일하게 자기를 찾고 자기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의인의 가정을 구원하시기 위해 홍수를 동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자기의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려고 무려 120년의 시간을 주신겁니다.
이미 심판이 예정된 땅에서 하나님의 자비로 받은 120년의 유예기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눈에 좋은 대로 향락에 빠져 살았습니다.
성경에서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이 시대상을 보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전혀 존중하거나 경외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은 무려 천년 가까이 살고 또 땅에 네피림이라는 존재가 있어 용사로 명성을 얻었다는 것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교만했을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까?
제가 네피림이란 말을 들으면서 생각나는게 고대 그리스 신화입니다. 여기서 신들과 싸워서 패했다는 타이탄, 거인들하고 네피림이 비슷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이건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 창조되고 난 직후부터 신들과 같아지려 한 인간은 아마 이때에 교만이 극에 달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류를 고쳐서 사용하시지 않고 아예 멸망시켜서 싹 쓸어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만으로 새롭게 시작하시려고 작정하시고는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120년의 유예기간을 주신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역시나 이 세상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뜻대로 사는 이들보다는 압도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자행자지하고 향락에 빠져 범죄를 저지르고 폭압적으로 거칠게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지금 세상을 보면 솔직히 뭔가 고쳐서 사용할 수 있는, 우리가 잘 사용하는 ‘개전의 정’을 기대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문자 그대로 이 땅에 죄악이 관영합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이땅의 곳곳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며 그의 법을 지키려는 이들이 있기에 하나님이 두고 보시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끝이 나도 벌써 끝장이 났을 겁니다.
물론 당시처럼 노아의 가정만 구원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오늘날에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이가 그렇게 많지는 않을 듯 합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대가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이 멸망 전에 우리에게 주신 유예기간이라면 어쩌지요?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고 그래서 소수의 사람으로 이 땅을 새롭게 여시려고 멸망시키기 전 심판의 날을 앞두고 있는 그런 유예기간이라면 이대로 세월만 보내서는 안되지 않을까요?
노아 당시의 인간들처럼 오늘날도 역시나 인간의 교만은 하늘을 찌를 판입니다. 말만 하면 ‘신의 영역을 정복한다’느니 하는건 양반이고 ‘하나님이 어디있느냐?’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조롱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처럼 급하게 자기의 마음을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길게 보시지요. 그래서 인간들의 조롱을 즉석에서 되갚아 주시지는 않지만 피조물이 창조주를 조롱하고 무시하는 상태를 오래 두고 보시지는 않습니다.
요즘 일어나는 코로나가 한가지 잘한 일이 있습니다. 기상이변이 물러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겁니다. 이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포기한 이상기후도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인간이 활동을 멈추니까 자연이 활동을 시작한 겁니다. 정말이지 역설적이게도 사람이 활동을 정지하자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회복되려 합니다. 창조세상이 회복되는 일들이 생깁니다. 코로나가 사람을 위협하지만 그동안에 인간이 자연을 위협하고 있었던 거지요.
인간은 어느새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지럽히기 시작한 걸까요?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어지럽혀 질까요? 피조물인 인간에 의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세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이 땅에 재앙을 내리시는 건지도 모릅니다.
제가 오래는 안살았는데 그동안 본 재앙이 몇가지 기억에 남습니다.
러시아와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가 터져서 방사능으로 대재앙을 초래한 것과 일본과 동남아의 쓰나미로 많은 사람이 죽은 것, 그리고 비가 오지 않아서 사막화가 급속히 진행되는데 북아프리카의 차드호가 마르고 중앙아시아의 아랄해가 사라지는 것이 또 기억에 남습니다. 호수야 그렇다해도 아마 바다가 사라진건 역사 이래로 처음이지 않을까요?
베네치아가 점점 물에 잠긴다고 뭐 얼마짜리 수문을 설치했다고도 하고 일본도 일년에 몇센티씩 가라앉고 있다고 하는데....
참 이디오피아의 대기근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래서 검은 유대인들을 이스라엘 자국으로 이송한 이야기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런가하면 더 이상 기근을 당하지 않겠다고 나일강 상류를 막아서 댐을 만드는 바람에 나일강 하류의 수단과 이집트가 전쟁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부족이 심각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최근에 세계적인 전염병이 너무 많이 생겼습니다. 에이즈에 사스에 메르스에 코로나까지 마치 중세의 무시무시한 흑사병을 연상시키는 세계적인 질병들이 너무 많이 발생했습니다. 참 흑사병도 재발했다지요?
뭔가 뚜렷하진 않지만 재앙의 발생빈도가 점점 많아진 듯이 보입니다. 지금 한참 떠들고 있는 아마존의 밀림이 일부 탐욕스런 지주들 땜에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지구의 허파가 병들면 공기의 질이 얼마나 나빠질까요?
마치 이 모든 이상과 재앙들이 한가지를 가리키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노아의 홍수가 일어나기 전의 유예기간 같습니다. 멸망을 향해 가는.
정신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인류에 대한 인내를 거두시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뭔가 하나님에게 ‘저희들이 잘할께요. 저희들도 잘할 수 있습니다’란 신호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것들 확 쓸어버리지 말고 조금 더 두고 볼까?’ 는 생각을 하실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국내에 있으니까 전혀 이 사태가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심각해지고 있고 더 더 악화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초기에 비해 충격을 덜받는 이유는 우리가 그런 상황에 이미 익숙해 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익숙한 상황, 대재앙 속에서의 일상이 익숙해 지게 되면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아주 심각한 위험을 안고 사는 것이고 사람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모르게 되는 겁니다.
아마 경제적이고 육체적이고 약자부터 먼저 파탄을 일으키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가난한 자들, 병든자들, 몸이 약한 자들부터.
이건 뭐 적자생존이니 강자존이니 하는 이야기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도인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라와 인류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래야 사회가 안정되어서 약자도 보호받고 상식이 통하고 여유를 가지는 사회가 되어서 양보의 미덕이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안에서 보호받고 살 수 있도록 그래서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곧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경쟁 가운데서도 사랑이 있고 그래서 약자들도 숨 쉴 구멍이 생기고 그래서 건전한 사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그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우리, 그 공동체에 속하는 우리 성도들이 안전하고 행복해 지는 길이 되기 때문에 나라와 민족 그리고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과 같은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공동체가 한마음이 되는 것이 정말이지 중요합니다. 특히나 성령의 감응체인 교회는 다른 사회하고는 다르게 다수가 선하고 소수가 악해도 되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대다수의 선하고 의로운 분위기에 악이 찍소리 못하고 쥐죽은 듯이 잠잠하고 그래서 전체적으로 악이 발호하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감화를 받아서 아니면 적어도 분위기에 휩쓸려서라도 선을 지향하고 그렇게 그렇게 의의 공동체가 되어야지 악이 횡행하고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무시하고 적대한다면 그 교회는 교회로서의 존재의의를 잃게 될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고 도저히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확 촛대를 옮겨버려?’이렇게 생각하시면 어쩔 겁니까?
성령님은 죄악이 있는 곳에는 절대로 거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구성원 전부가 성령의 불세례를 받아서 죄성이 불살라져야 비로소 그 공동체가 살아서 움직이게 됩니다.
그래야 교회를 만드신 내 아버지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2.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자
오늘은 제가 새롭게 발견한 심득을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정말이지 신기한 성경구절을 발견했습니다. 물론 제가 제일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닙니다. 저도 책을 읽고 그 저자의 발견을 조사해본 겁니다. 그런데 정말이지 신기한 표현이요 구절입니다.
뭐냐 바로 베드로 전서3:20의 말씀인데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평소에는 이 구절의 모순점을 알지 못하다가 다시 자세히 살펴보니 이 부분이 이상합니다. “물로부터 구원을 얻은 자”가 아니라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라고 한 부분.
마치 물로 세상을 심판한게 아니라 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을 구원하는 수단으로 삼아서 물을 통해서 그 소수의 사람들을 구원하셨다는 구절. 정말이지 이상하지 않습니까?
혹시 오기일까 싶어서 원문을 살펴보았는데 ‘말미암아’가 정확한 표현입니다. 물에서부터 구원했다는 표현이 아닙니다. 원문상으로는 ‘물에 의해서’ 또는 ‘물을 통과하여’ 라는 뜻인데 물을 수단으로 사용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 명확합니다.
그 다음절에 “물은...곧 세례라” 는 표현도 있지요? 역시나 물이 구원의 수단이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런 표현을 사용하셨을까요?
그래요, 하나님은 물을 인류를 심판하는 도구로만 사용하신게 아니라 자기의 자녀들을 구원하는 수단으로도 사용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대적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공포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잘 준행한 그의 자녀들, 성도에게는 그동안의 노고를 칭찬받고 인정받는 가슴 두근거리는 일인 것입니다.
시험을 잘 친 학생이 성적표를 자랑하고 싶어서 성적표를 배부하는 날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시험을 못쳤을 때는 못친 성적표를 집으로 가지고 가서 부모님께 보여드리는 것이 그렇게나 끔찍하지만 시험을 잘쳤을 때에는 어서 빨리 받아서 자랑하고 싶은 마음인 것과 같은 겁니다.
그처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며 인내하고 하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며 산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고대하는, 사랑의 주님께 칭찬받는 일인 것입니다.
세상이 사악해지면 하나님의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고수하며 바르게 살기가 어려워집니다. 죄악이 관영했기에 삶의 질이 문제가 아니라 목숨에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들이 더 이상 창조주를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 사회는 절대로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인간의 편향된 사고와 욕망 덩어리인 본성이 상호간에 충돌하여 이전투구를 벌이는 인세의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게 뭡니까?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의 형벌과 진노를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예 그런 나쁜일은 하지 않으려 하는 겁니다. 그러나 요즘 보면 기독교인들 가운데 여사로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도 자기를 일러 성도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웃으시겠나요?
먹을게 여유가 있고 일할 직장이 있고 수입이 있고 건강이 있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가까운 이들이 있고 그러면 인간은 예의염치를 차리기가 쉽습니다. 아니 보통은 그렇게 차립니다.
그런데 몇일간이나 계속해서 굶고 있고 하루 하루 연명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고 캄캄할 때에 건강이 나빠져서 악만 남았을 때 인간은 상상할 수 없을만큼 악해지기 쉽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한 조각 빵과 한 그릇 밥이 중요하지 무슨 이상이니 인권이니 문화니 사랑이니 감동이니 하는 것은 사치입니다. 전혀 딴 세상 이야기가 됩니다. 그래서 여유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공자도 이야기를 했답니다. “의식이 족해야 예의염치를 안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너무 맞는 말이라서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우리가 이것 밖에 안되는 사람인가? 예, 그것 밖에 안되는 사람이 맞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그가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지 않는다면 그의 사랑이 인간을 떠나게 된다면 우린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잃어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너무 큰 악을 제하고 인간도 제하고 교만도 깎고 그렇게 그렇게 하나님이 창조질서를 회복해 가시는 것입니다.
언제 부턴가 음식과 기후는 인간을 위협하는 아주 무서운 무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햄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햄이 얼마 전에 1급 발암물질로 지정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마트에서 팔고 있기는 하지만 그 소리를 듣고 사먹으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또 사람들이 좋아하는 참치 캔 뭐 하루에 한 개씩 먹다가 수은중독이 됐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무섭지요. 뿐만 아닙니다. 유전자 조작 식품들이 두부에 옥수수에 말도 못할만큼 많습니다.
고등어, 한국산이니 러시아산이니 해도 사실은 일본과 같은 바다에서 난 겁니다. 일본인들이 안 먹어서 안 팔려서 한국에 아주 싼값에 들어오는 모양인데 이걸 싸다고 먹고 싶다고 먹다간 뒷감당이 어렵습니다.
얼마 전에는 쇠고기를 먹으면 안된다는 광우병 파동이 있었습니다. 세상에나 인류와 함께 해온 먹거리들이 지금은 인류의 안전한 생존을 방해하는 큰 방해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조질서가 왜곡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회복시켜야지요. 누구와 함께? 하나님과 함께.
‘안식향산 뭐시기’가 있습니다. 안식향산 나트륨인가....이게 아마 방부제의 역할을 하는 모양인데 거의 대부분의 제품에 들어있습니다. 심지어 쌀도 농약을 듬뿍쳐야 잘 자랍니다. 과일도 마찬가지지요. 포도는 이게 농약인지 당분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입니다.
햄버거병이 걸린 아이들에 관한 기사가 났습니다. 옥시 파동도 있었어요. 치명적입니다. 반도체를 만들다 백혈병에 걸렸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쩌란 말인지.
옛날에 모 대통령이 국정과제로 4대 악을 근절하겠다고 발표흘 했습니다. 그 중에 한 개가 바로 ‘불량식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걸 ‘부정식품’을 말하는 줄 알고 기대를 많이 했더랬습니다.
우리보고 알아서 먹지 말라고 하지 말고 전문적인 인력과 권한을 가진 공무원들이 이걸 선별해서 제조금지나 판매금지를 먼저 내려서 좀 안전한 먹거리가 될걸로 생각했습니다. 항상 사후 약방문에 제품 이름도 제대로 발표하지 않고...기대를 많이 했는데 그런데 웬걸 그게 학교앞 문방구에서 파는 불량식품을 말하는 거라는걸 알고 얼마나 허탈했는지...
목사로서 죄송하지만 다수의 무지한 국민들, 무고한 국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소수의 부자들이 더 부자되게 하는 세상이 좀 제한을 받을 것 같았는데 그런 세상은 없나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지요. 하나님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점점 더워지는가 하면 한편으론 점점 더 추워지고 그런가 하면 빙하가 녹아서 해수면의 높이가 올라가서 해변지대가 물에 잠기고 어쩌고 비가 오지 않아서 사막화가 가속되고 무슨 핑크빛 빙하니 눈이니 기묘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황사 때문에 숨쉬기가 어려워진건 제법 된 일입니다.
죄악이 관영하고 양심을 저버리고 돈과 탐욕을 좇은 사람들로 인한 위험입니다.
옛날 소돔이 생각납니다. 사람들이 롯의 집 앞에 와서 자기들이 상관할테니 천사들을 내어놓으라고 외칩니다. 심지어 롯은 그 도시의 판사였지만 저들은 퇴근 후에도 판사질을 한다고 난리를 칩니다. 한마디로 법을 무서워하지 않는 겁니다.
법도 사라진 사회!
남자를 보고 남자가 음욕이 불일듯하는 사회! 그래서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했지요.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비극입니다. 오늘날의 인류는 확실히 그때의 소돔과 고모라보다 깨끗합니까? 자신할 수 있나요?
이렇게 죄악이 사회에 관영하게 되면 일개인의 힘으로 이를 뒤집기는 어렵습니다. 사회 전체가 죄악을 당연시 여기게 되고 여기서 양심적인 사람은 도저히 살기가 어렵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규칙을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가는데 혼자서 규칙을 지킨답시고 걸어간다면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냥 경쟁이 아니라 그게 식량배급줄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그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합니다.
죄악이 당연시 여겨지는 사회는 의인의 무덤입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뭔가 사회를 깨끗하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자그마한 시도도 처음부터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잘하면 왕따요 조롱이지만 잘못하면 집단 린치에 사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필요한 겁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이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보다 집단이 개인보다 공동체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법입니다. 너무 힘들지 않게 혼자서 투쟁하다가 지쳐서 쓰러지지 않게 그래서 서로가 권면하고 격려하고 그렇게 그렇게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마저 오염되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서지 않는다면 그러면 하나님은 촛대를 옮기실 것이고 죄악된 망령된 장소를 쳐서 무덤과 황페한 땅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사실 노아의 시대에 세상은 너무 악했습니다. 사람들은 악하여져서 함부로 폭력을 휘둘렀고 하나님을 증오했으며 약자를 착취하고 남의 것을 탐내어 함부로 죽이고 상하게 하고 빼앗았습니다. 나의 상처가 상대의 목숨보다 더 중합니다. 그래서 마구잡이로 폭력과 살인을 저지릅니다. 현세의 지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롯을 구해내셨고 노아와 그 가족을 살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악을 멸한 홍수가 오히려 의인 노아의 가족에게는 구원이 된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죄악을 쓸어버리고 적어도 의인의 자손으로 새롭게 시작할 기회가 생긴거니까요.
3.물은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성경은 바로 이 말을 하기위해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말을 한 겁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참고로 여기서의 세례는 지금 우리가 하는 것같이 물을 찍어서 머리에 바르는 정도를 말하지 않습니다. 보통 지금도 세례는 장로교처럼 하지 않고 사람을 물속에 완전히 잠기게 했다가 나오도록 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보니까 강단 뒤편에 큰 욕조를 가져다 놓고 세례받는 사람이 그 안에 푹 잠겼다가 나오고, 옷은 입고 있습니다. 큰 수건으로 몸을 싸고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강대상 옆으로 난 문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교파에서는 실제로 강에 가서 세례를 거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물로 말미암아’ ‘물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물에 들어갔다 나와서 물세례기는 한데 단순한 물세례가 아니라 성령세례가 되는 그런 물세례입니다. 하나의 의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탄의 지옥권세를 깨트린 것으로 본다면 물속에 들어갔다 나옴으로 말미암아 거듭났다는 증표를 주는 것으로, 그 모형으로 보면 좋겠습니다.
단순히 물을 통과해서 우리의 육신의 죄가 씻긴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전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했기에 우리가 이전에 몰라서 지은 하나님에 대한 무시와 범죄를 버리고 이제부터 그를 경외하여 영생에 들어가기에 합한 삶을 살려고 마음먹었기에, 성령이 인치신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구원받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례를 강조하기 위해 노아의 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이야기를 했지만 저는 오늘 세례가 아니라 물 자체에 중점을 두려 합니다. 인류를 완벽하게 쓸어버리는 대재앙을 통하여 그 덕분에 구원을 얻었다는 이 말에는 냉엄한 현실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한없이 사랑하기만 하셔서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짓고 아무리 하나님을 무시하고 대적하고 저주하고 무법천지로 살아도 허허 웃고만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엄위하시고 전능하신 분으로 죄는 참으실 수 없어서 돌진해서 부숴버리고자 하시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본능적으로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죄인들은 어서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는
믿지않는 세상사람에게는 대재앙이지만
믿는 노아에게는 구원의 상급이 된 겁니다.
그가 지은 방주는, 120년을 걸려 지은 방주는 새로운 죄악이 청소된 세상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겁니다.
그러나 역시 물만으로는 안되나 봅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지만 포도주를 마시고 죄악된 습성에서 민망한 상황을 만들었고 역시나 죄악에 물든 가나안은 할아버지에게 죄를 짓게 되고 노아 역시 정신없이 아들과 손자를 저주하는 슬픈 죄악의 역사가 바로 시작되게 된 것입니다.
죄성이 그 안에서, 위기가 지나자마자 다시 싹을 틔운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구별되이 구원받은 성도들로 구성되었다고 하는 교회라도 그 안에서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여느 집단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노아라도 한갓 포도주로 말미암아 죄성을 도입하게 됨과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일러 시대의 마지막 등불, 구원의 방주라고 하지요? 그런데 교회마저 오염되고 타락되었다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싸운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것 같나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물로 씻어서는 사람이 일시적으로는 깨끗해 져도 영원히 깨끗해 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불세례로 마음속에 죄악의 본성까지 불살라 버려야 비로소 인간이 죄악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성령! 그래요 성령께서 임하시도록 그를 경외하며 죄를 멀리하고 기도하고 그를 바라십시오. 그렇지 않고는 답이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우리가 코로나로 인하여 엄청난 위험 속에서 살고 인류 앞에 큰 위기가 도래한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하나님은 이번 사태를 통하여, 이번 사태로 말미암아 이 땅에 가득한 죄악을 좀 쓸어버리고 좀 더 세상을 정화하셔서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 보다 맘편하게 이 세상에서 살게 하시려는게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이번 사태를 통하여 하나님을 떠났던 이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인간의 교만이 줄어들며 자연이 회복되고 그것이 또 인류의 생존을 연장시키는 구원의 수단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구절이 자꾸 생각이 납니다. 천국에 대해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천국은 네 마음속에 있느니라”
그런데 지금 우리네 마음속을 봐도 도저히 천국을 소유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천국이 임할 수 있게 사전 터를 닦으시려고 코로나를 소환하신게 아닌가, 코로나를 통하여 인류를 시험하시는게 아닌가, 아니면 코로나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려는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치 천국의 모형이 되어야 할 교회가, 안식처가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더 복잡하고 더럽고 힘들게 하고 세상보다 더 악한 모습을 보이고 그러면 이 사회는 누가 개혁하고 지키지요?
마지막 등불이 꺼지면 하나님은 과연 이 땅을 어떻게 하실까요? 그러므로 먼저 우리가, 우리 성도가 우리 교회가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곳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이 요동하고 시세가 급변해도 우리네 마음은 항상 평온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고요해야 합니다. 왜냐면 저번 주에 말씀드렸다시피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품에 안으사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믿는 사람
바로 우리가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의 후손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얻을 것입니다. 그의 피를 믿음으로 구원 얻을 것입니다. 코로나가 창궐한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께 도전하고 악이 관영한 이 세상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이번 한주도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20년 7월 19일 주일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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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관점이란, 참 놀랍지요.
누군가에게는 세상의 멸망이었던 무서운 사건이,
신의 관점에서는 그 일 덕분에 세상이 새로 시작되는 구원의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나에게 불어닥친 어떤 불행하고 슬픈 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나의 삶을 다르게 바라보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정직하게 살아가기 가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 나라는 아이를 안 낳아서 멸망할 수 있지만,
사실은, 정직이라는 정신적 가치를 잃었기 때문에 멸망할 지도 모릅니다.
속여서 갈취하고, 그래놓고 오히려 큰 소리치는 일이 반복되고,
그 억울한 눈물이 쌓이고 쌓이면, 하나님의 손으로 한 나라가 지워질까 두려워 합니다.
- 2020. 07. 시북 (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