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연말 - 내 인생은 병에 치여 이대로 끝날 뻔 했다.
의사 선생님은 매우 냉정하셨다. 초음파 결과 보이죠? 어서 대형병원 응급실 가자.
곧장 CT 라는 것을 찍었다.
다음 날 오전, 급히 수술대 위에 누웠을 때, 살기를 희미하게 바랐다.
그리고 입원실.
일어나세요. 아직 잠들면 안 돼요. 여기 어딘지 알겠어요?
높은 톤의 간호사 선생님 목소리가 생생하다.
수술 흔적으로 몸은 여전히 너무 아팠고, 이른바 무통주사를 부탁드렸다. 그래도 아팠다.
며칠이나 더 흐르고 나니, 살아있음이 실감났고 걷는 것부터 다시 시작한다. 하나 둘 셋 넷.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선생님도,
대학원 진학도 미련없이 포기할 셈이었다.
또한 지난 날의 모든 잘못들마저 눈이 녹듯이 물처럼 흘러내려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12월 9일 무렵 수술 부위의 네모난 밴드를 떼어낼 수 있었다. 통증이 거의 없었다.
늦은 저녁, 한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선생님 잘 지내세요?"
나는 그 때 병원 응급실에서 보았던 첫 번째 단어를 기억한다. "정직"
연락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짧은 대화는 끝이 났지만, 그 "타이밍" 만큼은 신비로웠다.
.
시편 1편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악인, 죄인, 오만한 자가 같은 라인이고,
나쁜 생각, 나쁜 길, 나쁜 자리가 있다는 것이 같은 라인이다.
그렇다면, 복 받는 삶은, 무엇을 따르는 것인가. 그 기준이 2절에 나온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첫째, 하나님의 법칙을 좋다고 가까이 하는 것.
둘째, 낮이고, 밤이고, 생각하는 것.
단지 이것이 전부이다.
21세기의 1/4 정도가 흐른 지금. 인류는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지금 시대는 상호 신뢰가 부서진, 인류 첫 시대인지도 모른다.
말을 믿지 못한다.
.
나는 이렇게 하여, 두 번째의 죽음 고비를 넘겼다.
십년 전, 그 때도 타인의 도움을 받았고, 이번에도 타인의 도움을 받았다.
주님께서는 왜 나를 또 한 번 살려두셨을까.
여전히 무언가, 내가 세상에서 할 일이 있어서 일까? 깊게 생각해 보다가도...
이내 깨닫게 된다. 조금은 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보자. 이것이 소명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특히 성직자가 아닌, 내 위치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추측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위선이다.
그저 떠오르는 것은, 내게 구하라, 내게 기도하라, 같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이 생각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시기에, 때에 따라, 알맞게 이루어 주신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아채고" 사느냐, "그냥" 사느냐 의 차이가 내 조심스러운 결론이다.
죄를 범했던 다윗 같은 사람 조차, 하나님께 묻는 태도가 있어서 사랑받았다고 한다.
이 지점에서 현대인은 모순에 빠진다. 그래서 물어봐야 침묵하실텐데... 라는 회의감은 클테니까.
그렇다면 나는? 나는 꾸준히 오랫동안 하나님께 물어본 적이 없다.
하나님 없이도 제법 살아지는 것 같아. 라는 허상 속에서 - 세상에 진득히 오염되어 있는 것이다.
병원 입원실의 숨막힐 듯한 공기와, 병원 바깥의 시원한 바람이 상상 이상으로 완전히 다르다는 게 중요하다.
.
낮이고, 밤이고,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그것이 즐거움과 노래가 된다니...
이것이 신앙이고, 은혜의 길일테지.
세상의 꾀들은 매력적이고 달콤하게 말한다. 이렇게 살면 얼마나 편한데... 탐스럽지 않니...
그래서 어딘가에 눈을 뜬다는 것은, 때로는 심히 두려운 일이 된다.
한 가지만으로 행복하던 인생은, 눈을 뜸으로 인해, 열 가지를 가지고서도 갈망의 늪에 허우적 거리게 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 한다면, 인생은 달라지는 것일까?
목사님들께서는 항상 이 지점에서 믿고 일단 가라고 강조하며 말씀을 마무리 하시곤 한다.
그래도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대전제 하에, 감히 써본다면,
"주님,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성도가 좀 더 애정이 갈 꺼 같다.
구약성경에는 기도 대신에 우상숭배로 빠지며, 하나님을 외면하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쉬지 말고 기도 하라는 말씀은, 밤새워 기도하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우상숭배 하지 말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긴 생각과 묵상을 짚어내려오면, 질문은 다소 바뀐다.
오늘 하나님을 즐거워 하고 계세요?
아니면, 우상에 기대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벌써 잊고 잊나요?
부디 필요없는 것을 버리고,
소중한 것을 알아채며 살아가도록,
나는 낮이고, 밤이고, 이제야 주님 앞에 선다.
하나님께서는 적어도 내게 말씀하셨다.
"얘야, 좀 더 너의 지혜를 버리고 천국에 오는게 좋겠구나.
얘야, 좀 더 너의 혀를 버리고 천국에 오는게 좋겠구나."
2025년. 아마 주님은 -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외롭게 문 밖에 서서 기다리고 계신지도 모른다.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 그 문을 열고 주님의 살아계심을 따르는 것이고,
너무 숨막히게 바쁜 시간 속에서는, 주님이 계실 곳이 없다.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존재"로 하루를 즐거워하는 것.
부디 그런 인생이 되게 해주세요.
멋지고 근사한 인생 아니더라도,
작은 인생이더라도, 하루를 소중히 여기게 도와주세요.
- 2025. 12. 09 ~ 12. 10. 시북 (허지수) / 수술을 무사히 끝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