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책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 책리뷰

시북(허지수) 2010. 8. 3. 15:43
 블로그의 문을 연지도 어느덧 3년 가까이 되었는데, 처음으로 기독교 관련으로 직접적인 이야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라는 책을 읽고, 생각한 바가 많아서, 정리도 할 겸, 리뷰의 형식으로 그동안 제 마음에 담아두었던 기독교 이야기를 밝혀볼까 합니다. 그럼 이야기를 출발해 보겠습니다.

 저자 : 김두식 / 출판사 : 홍성사
 출간 : 2010년 1월 26일 / 가격 : 13,000원
 페이지 : 336 / 판형 : A5

 저자인 김두식 교수님의 글은 오래 전부터 애독해 왔습니다. 한동대 교수시절, 한겨레 신문에 칼럼 연재를 할 때에도 매번 유심히 읽었던 글이었고, 헌법의 풍경 같은 책도 개인적으로 무척 좋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한 발짝 떨어져서 세심하게 살펴가는 관찰자적인 시선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김두식 교수님은, 그렇게 괴물이 될 수 있는 국가를 경계했고, 교회의 타락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경계하는 시선. 이게 참 멋있었지요.


 오늘날의 교회는 너무나 약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도덕적으로도 우위에 있지 않고,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건지 의문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만 버려질 뿐..." 이라는 성경 말씀처럼, 기독교인들은 그 아름다운 맛을 잃어버리고, 훌륭한 향기를 잃어버리고, 무가치하고, 무기력해 졌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 원인을 저자는 기독교인 특유의 "위선"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른바 잘 보이고 싶고, 완벽해 지고 싶은 욕망, 내가 이런 품위 있는 신앙인 이라는 욕망 때문에, 기독교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게 아닐까요.

 가장 가슴 아픈 지적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중, 그나마 괜찮은 교회라는 곳도, 남을 도우려고 애를 쓰지만, 그 어려운 이웃과 같이 교회 생활 하는 것을 꺼려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다녀왔지만, 교회 생활에서 가장 괴로웠던 점은 "그들만의 리그"를 구성해서 자기들끼리 놀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이웃이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아픈 지에는 무관심하고, 자신의 신앙 고민이나, 인생 고민에 매몰되어 있는 그리스도인. 저는 그런 사람들을 긴 시간 동안 보아왔고, 저 역시 그런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요.

 그 까닭을 저는 "편안한 신앙생활의 추구"에서 찾고 싶습니다. 불편하게 다른 사람들 괴로운 이야기 들어주고 싶지는 않고, 나 하나 마음의 평안을 찾고 위로를 얻으면 되고, 헌금을 통해서 나는 충실하게 믿고 있다는 증명을 하면서, 보기에는 그럴싸하게 기독교인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결국 나누는 것은 없고, 생명력과 영향력이 제대로 살아 숨쉴 수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내 품위는 살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은 상처받습니다.

 해답으로 제시한 것은 기독교의 본질인 하향성으로 돌아가며, 올바른 교회를 위해서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책을 읽는 기간 중에, 하필 전병욱 목사님의 이 설교(http://web.samilchurch.com/sub/bbs/board.php?bo_table=pastor09&wr_id=4264)를 듣게 되었는데, 그 후 한참동안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 설교는 다른 게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깨져서라도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복음이 아니겠는가 라는 메세지 였지요.

 오늘 날은 상처 받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청년들도 그렇고, 희망을 잃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요즘 사회 분위기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잘 살려는 포부를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밤낮으로 노력하고, 스펙을 올리고, 세상의 루저가 되지 않고자 발버둥 칩니다. 종종 가는 도서관에는 볼 때 마다 앉을 자리가 없을 만큼, 젊은이들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양극화는 커져가고, 일을 해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늘어갑니다. 좀처럼 해답은 보이지 않습니다. 희망을 주어야 할 교회? 우스운 말장난 입니다. 여전히 교회는 무기력하고, 기독교인 숫자는 계속 줄어듭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0년 넘게 저를 괴롭힌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웃이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라. 이웃이 춥다면 겉옷까지도 내주라." 열심히 스스로 노력해봐도 이것은 거의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내가 당장 먹고 살기 급하다는 강력한 변명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루쉰같은 작가는 "이웃을 살리다가 내가 죽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일단 추위부터 피한 다음에 결정하겠다"는 명석한 조언을 했는데, 개인적으로 인상깊게 읽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본질적인 예수님의 메세지 -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 는 실현되기가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평생 짊어져야 할 십자가 처럼 무거웠지요.

 그러다보니 마음 한 구석에 성공에 대한 열망이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성공해서, 내가 잘 되서, 기부도 하고, 남도 많이 돕고, 근사한 기독교인으로 살겠다는 마음... 그야말로 현명한 방법입니다. 나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저자는 이 점을 냉철하게 지적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신앙으로 포장된 욕심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 있는 그 곳에서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시작하라고 당부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하향성을 간직해야 할 기독교의 참모습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요. 사실상 예수님은 당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얼마나 근사한지 관심이 없습니다. 얼마나 이웃(타인)에게 잘하면서 사는가에 관심있을 뿐입니다.

 세상은 돈, 섹스, 권력 이런 상향성을 추구하기가 쉽습니다. 만약 자신의 꿈에서 저 3가지 요소를 빼버린다면, 무엇이 남을까를 생각해보고, 저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야말로 텅 비더군요. 안정된 직장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살면서, 남들 시선 받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그 숨겨진 이면을 파헤치면 "포장된 욕심 덩어리" 임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나 하나 그럴싸하게 살려는 욕망이 "멋진 비전" 으로 포장되어 있었던 겁니다.

 책에서 매우 인상적이었던, 헨리 나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는 뛰어난 영성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그 비결이 늘 고민하고 쉽게 선택하지 못하고, 괴로워 했다고 합니다. 상처입은 치유자 입니다. 그 점에서 저는 크나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초등교사를 하는 후배는 "아이들의 고민이 많고 깊음에 놀랐고, 내가 어린 시절 그와 비슷한 고민으로 괴로워 했다는 것이 아이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상처 입는 다는 것은 나쁜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보다 더욱 괴로웠던 시간을 보낸 사람은, 고통의 시간이 있는 사람은, 그 때문에 더욱 깊이 어떤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만해도 제대로 걷기도 힘들고, 화장실도 혼자 못 가던 1-2년 남짓한 시간이 있었기에, 혼자 고민하면서 일기장에 자욱히 글을 쓰던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밑바탕과 철학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괴로운 시간을 통해서 생각 정리의 방법을 스스로 익혔나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은 더 근사해 지기 보다는, 더 괴로워하고 상처 받는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자기 학대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웃에 무관심한 기독교는 맛을 잃은 소금이라는 의미 입니다)

 예수님을 닮겠다, 예수님을 사랑하겠다, 예수님을 좇아서 살겠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런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성경에 말하기를 - 그는 곱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못하며, 멸시를 받고,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질고를 아는 자입니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습니다. 그가 상하고 찔림은 우리 허물, 우리 죄악 때문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아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제 갈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이사야53장)

 저는 이 말씀이 계속 마음에 맴돕니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게 아닐까요. 나눠주고, 용서하고, 이웃을 아끼고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불편한 말씀 보다는, 폼나고 부유한 구약시대의 성공한 신앙인들과 자신을 오버랩 시키면서, 듣기 좋은 근사한 말씀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제 갈 길로 가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인이 아닐까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정작 저도 예수님을 좇아서 살 자신은... 솔직히 없습니다. 두렵습니다. 버림 받는 것이 두렵고, 놀림 받는 것이 두렵고, 고생하면서 살 것이 두렵기만 합니다. 그래요. 상처 입기가 두렵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없어도 그렇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시선이 안 닿는 곳 까지도 볼 수 있을 만큼, 다른 사람의 고통에 민감한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한 걸음이나마 이런 방향으로 살아가다 보면, 그 후 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많이 길어졌네요. 인간은 한 번 인식이 확장되면, 다시 되돌아 올 수 없다고 합니다. 인식의 열매라는 것은 그런 거지요. 예를 들면 바둑의 고수가 몇 수 앞이 훤히 보이기 시작하면, 지금 그 한 수를 두고도 심히 고민해서 바둑돌을 놓게 됩니다. "내가 지금 하는 행동들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어떤 느낌으로 와닿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어쩌면 말 한 마디를 놓고도 몇 번이나 고민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경지까지 가서, 나의 이웃을 편안하게 안아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참된 나의 꿈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결론은 어떤 친구가 되어줄 것인가. 이렇게 정리되는군요. - 어쩌면 5리도 채 못 갈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함께 가는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에서 이만 마치겠습니다. 블로그에서 괜한 종교 이야기로 조금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부디 어느 철부지 기독교인의 자기고백이었다고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