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04년2월22일/몇시간의 기다림 그리고 믿음(청년설교8)/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4. 19. 19:20

- 2004년 창신교회 청년부에 계실 때의, 홍종일 목사님 설교문.

지지난주에 우리는 80년짜리 기다림에 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5년짜리 기다림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이제는 하루, 아니 몇시간의 기다림에 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기다림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다림만큼 힘든일도 없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나면 그게 80년짜리 기다림인지 5년짜리 기다림인지
겨우 몇시간짜리 기다림인지 알수 있지만 그 일이 일어나기전에는
과연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할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루사이에 일어난 극적인 기다림에 관해서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시면서 초기에 한참 인기가 급상승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왔고 위로받고 치유받고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갈릴리 호수를 건너다니시면서 사역을 하셨는데
오늘의 이야기는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배를 타고 거라사에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시자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해변가에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사람들과 함께 해변가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고 계셨는데
갑자기 마을의 회당장중 한사람인 야이로라 하는 사람이
주님께 나아와서 주님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는 많이 간청하면서 자기의 딸이 ,
12살난 어린 딸이 죽게 되었다고 지금 가서 한번만 손만 얹기만 해도 낫겠다고
집에 가주시기를 요청합니다

당연히 사랑의 주님께서 이 간청에 응해서 지금 야이로의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삽시간에 주님의 주위로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서 예수님을 둘러싸고 함께 갑니다
왜 이사람들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함께 갈까요?
구경, 그렇습니다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 이겁니다
야이로의 딸이 안되서 반드시 나았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보다는
단순히 오늘도 주님이 이적 한건을 행하시는 구나
이 좋은 구경을 놓쳐서는 안되지!
뭐 전부 이런 마음입니다

보통 의사는 어떻게 합니까?
응급환자가 생기면 총알같이 그를 치료하러 가거나 아니면 응급차가 총알같이 달려갑니다
병의 악화를 막고 심지어는 늑장대응으로 인한 사망이나 후유증을 막기 위함아닙니까

근데 주님의 대응은 조금 실망스럽습니다

회당장은 마을의 존경받는 종교지도자입니다
보통 회당에서는 10명의 직원을 두고 그 중에서 세사람에게 장의 직책을 맡깁니다
그래서 이 회당장은 상당한 명망을 가진 사람을 임명합니다
근데 이런 사람이 겨우 30의 청년앞에 무릎을 꿇고 ,.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둘러싸서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심으로 간청을 합니다
본문에 ‘많이’ 라는 말은 ‘전심으로’ ‘간절히’ 이런 뜻입니다
그리고 지금 죽기직전이니 시간이 없으니 빨리 가셔서 보아주십시오
아무리 중한 질병이라도 죽기전에 가셔서 손만 한번 대기만 해도 제 딸이 살것입니다

믿음 좋고 !
정말 확실한 믿음과 겸손, 그리고 딸에 대한 진실된 사랑
이런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나라 신발이 우리처럼 전투적인 신발이 아닙니다
운동화나 가죽화처럼 양사방을 꽉 둘러싸고 끈으로 쪼아맨 신발이 아니라
그 나라의 신발은 샌달입니다. 느슨한 줄로 걸쳐놓은 ...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님의 앞뒤에서 밀고 밀치며 난리가 났습니다
더 잘보려고...
그래서 좀체 진도가 잘 나가지 않습니다
자연 행렬의 속도가 느릿느릿입니다
회당장의 속은 얼마나 탔을까요
지금 시간이 없는데...죽기전에 가서 손만 대어도 나을터인데...
제발 빨리 좀 갔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엎친데 덮친격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25절에 갑자기 열두해를 혈루증을 앓는 한 여인이 나타나서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몰래 주님의 뒤에서 옷자락을 만진 일이 일어납니다

사실 별거아닙니다
지금 사람들이 주님을 둘러싸고 밀치고 난린데 옷자락이 조금 건들릴수도 있지...
그런데 정말 그런데
세상에 갑자기 주님께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는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외칩니다
참 기가찹니다
지금 안그래도 혼잡하고 서로 밀고 밀리고 밀치고 정신이없는데

아니 옷이 좀 건들릴수도 있지
뭐 별거 아닌거 가지고 꼭 그렇게 난리를 쳐야 합니까?
베드로를 위시한 여러 제자들이 모두 불평스럽게 대꾸합니다
주님 지금 사람들이 이렇게 밀치고 있는 혼잡한 상황을 보시면서
그깟 옷조금 건들린게 뭐 대수라고 그러십니까?

그리고 속으로 말했겠지요
지금 저사람의 딸이 죽어간다 안합니까
시간 없다 아닙니까
빨리 가야 안됩니까

그래요 맞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가던 길을 멈추고는 누가 내옷에 손댔느냐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는걸 보니까
주님의 옷에 손댄 사람이 제발로 걸어나오지 않으면 전혀 움직이지 않을 테셉니다

거참, 사랑의 주님께서 지금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더 큰일이 뭐 있다고 저러시는지...
저 양반이 인기가 좀 올라가더니 사람이 변했나.............
그래도 주님은 끝까지 자기의 옷자락을 만진 사람이 나올때까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이제 사람들은 도데체 누구야
빨리 나가 하면서 서로를 보고 너지 너지 하면서 야단입니다

마침내 더 숨길수가 없다고 판단한 한 여인이
주님앞에 나와서 엎드려 고백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저는 12해를 혈루증으로 앓아왔습니다
수많은 의원들이 저를 치료했지만
재산만 탕진하고 아무도 저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율법은 저를 부정한 여인이라 하고 남편마저 저를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옷을 만지기만 해도
한번 옷자락을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나을걸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만졌고 이제 나았습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딸아 평안히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래놓고는 다시 여인에 대한 기사는 끝이나고
다시 야이로의 딸에대한 기사로 이야기가 넘어갑니다

근데 여러분 참 이상합니다
왜 여기에다가 뜬금없이 이 기사를 넣어두었을 까요?

여러분 이상 안합니까?
하하 그건 나중에 보기로 하고 다시 이야기를 계속 따라가 봅시다
여인에게 축복하고 떠나보낸후에 다시 주님은 야이로의 집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이적 한 개를 보려고 예수님을 에워쌌던 사람들은 수지맞은 겁니다
본 이적이전에 벌써 오픈 이적을 한 개 보았습니다

역시 종교계의 스타답습니다
세상에 불치병으로 알려진 혈루증을 낫게 하다니!
이제 회당장의 딸을 낫게 하는것도 마저 봐야지
"우리 동네에 이런 분이 계시다는건 우리 동네 , 우리 고을의 자랑이야"

근데 사람들이 다가옵니다
슬픈 기색으로 다가온 이 사람들은 바로 야이로집의 하인들과 식구들입니다
근데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하는데
야이로의 딸이 죽었답니다

모든게 끝났습니다
한번만 죽기전에 한번만 주님이 손을 대면 틀림없이 나을텐데...
그렇게 빨리 좀 가자니까
빨리 안가고 꾸물거리고

그것도 부족해서는
옷만진 사람을 찾는다며 그 난리를 피우더니
결국 시간안에 대지 못하고
죽기전에 손한번 대지 못하고
그만 피어나지도 못한 자기의 외동딸이 그만 가버린겁니다

"주님 그러실 수 있습니까?
당신이 정녕 사랑의 주님입니까?
자기 인기 때문에
한건 했다고 온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자랑하더니
결국 내딸은 죽어버렸습니다!"

소리치며 욕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울고 불고 해도 모자라지 않습니까
근데 야이로의 집안은 굉장합니다

"이제 선생님을 굳이 괴롭힐 필요 없습니다"

그래요
이미 모든게 끝났는데
이제 치료하는 의사 선생님은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선생님이란 단어를 주목합시다
그들은 주님을 주가 아니라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요
선생이라면 이 상황에서 필요치 않습니다
산 사람에게야 선생이 필요하지 죽은 이에게 무슨 선생입니까?
이미 끝났는데...........

그런데 주님은 그 말들을 무시하시고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죽어서 끝났는데 더 이상 선생님이 필요없습니다

여기 36절에 들으시고란 말은 원뜻이 무시하고 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런말을 귓등으로 들어 넘기고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여기서 ‘두려워’는 원뜻이 염려하다란 말입니다
다시말해서
염려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참 내 이미 죽어서 모든게 끝났는데 뭘 염려하지 말고 믿기만 하란 말입니까?
그리고는 보십시오
또 이상합니다
그랬으면 뭔가 즉각적인 조치를 취해야 되는데
갑자기 베드로, 야고보, 요한외에는 아무도 따라 오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적을 보려고 이제까지 예수님을 둘러싸고 밀고 밀리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세명 빼놓고는 못따라오게 하신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갑자기 그들을 따라오지 못하게 했을까요?
그것은 사람들의 믿음 없음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기사를 이렇게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능력이 많은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구경하려고 모여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그러나 아마 이 세제자는 달랐던것 같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구경꾼들과 합세해서 주님이 지나치게 자기의 인기에 연연하고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죽어가는 자를 위해서 열심을 내지 않았다고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이를 무시하며 염려하지말고 믿기만 하라고 한다고
불평하며 화를 내며 비웃었을 것입니다
이미 끝난것이다
당신은 이미 끝났어
그러니 딴데 가서 알아보시지
그러게 선생님 죽기전에 좀 빨리 가자니까 안듣고 엉뚱한 일이나 벌이더니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과는 달랐단 말입니다.
그가 하나님 자신인줄 알았으므로

주님의 마음은 참 답답하셨을것 같습니다
그는 일반적인 선생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에게는 시간이나 공간, 그리고 환경이 주는 불가능이란게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불가능이 있다면
그건 주님을 우리가 모시지 못했기때문이지 시간이 늦어서가 아니고 공간적으로 너무 멀어서도 아니고 하지못할 불가능해 보이는 여건때문도 아닙니다

그런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야 원래 그렇다 칩시다

그런데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기의 제자들마저도 주님의 진정한 실체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를 소유하고 그와 더불어 동행하는 한 불가능이란게 존재하지 않음을
그들은 혈루병을 앓던 여인을 고칠때 알아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를 알지 못하고 구경꾼들에 동조해서
불평하며 원망하며 무지에서 나온 막말로 떠들어대는 것을 보고는
주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세제자만 데리고 가신것입니다

아이의 집에서 주님은 비웃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것이 아니라 잔다
그리고는 부모와 세 제자외에는 다 내어보내시고는
소녀의 손을 잡고는 ‘달리다굼’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소녀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달리다굼
이것은 어머니들이 소녀들을 아침에 잠에서 깨울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얘야 일어나라, 간밤에 잘잤니
그렇습니다
밤에 잘자고 아침에 아이들을 깨우듯이
주님은 그렇게만 불가능하고 끝장난듯이 보이는 일들을 정말로 장난처럼
가볍게 가능으로 바꾸십니다

그렇습니다
불가능이란것은 우리가 주님을 모시고 있느냐 아니냐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느냐 아니냐로 판단되는 것이지
시간과 공간과 주위환경으로 판단되어질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믿음으로 주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판단하거나 제한하지 맙시다
이미 모든게 끝난것 같은 시점에서도 주님에게는 결코 끝이아닙니다.
시작일뿐입니다

- 홍종일 목사 (現 정관영암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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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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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개인적인 이야기이며, 아래부터는 시북군의 이야기 입니다.)

 믿음.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말이자, 가장 지켜지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믿는다는 것의 힘은 얼마나 위대한가. 긍정적으로 자신을 믿고 돌파해 가는 사람은 얼마나 멋진가.
 나의 꿈은 겨자씨 만큼이라도 진정성 있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믿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어서, 행동으로 따르고자 하는 것이 나의 꿈이기도 하다.

 신앙이 훌륭한 점이 무엇인가? 신앙을 가진 사람은 결코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병원 등에서 종교를 가지라고 권유하는 것도, 자신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분명 낫기 때문에 그러하리. 나도 어릴 적에 몸이 안 좋아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였던 시간이 있었다.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불명확하다. 엄청나게 먹었던 약 때문일까, 열심히 기도하던 작지만 소중했던 신앙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 때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반드시 나을 것이라는 확신. 그래서 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었던 병을 이겨내고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의학계에도 이렇게 성장하면서 병이 나은 케이스가 있다고 한다. 나도 그 케이스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었는데, 그 이유 중에 하나는 긍정적인 믿음이었다고 생각한다.

 좌절하거나, 실망하거나, 포기할 필요가 없다. 사람의 눈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라서 여기가 끝이고 더 이상 안 된다고 생각할 때조차, 분명 어딘가에는 또 다른 길이 있기 마련이다. 그 길을 정확하게 보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항상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이 일도 잘 풀리는 것도 그러한 까닭이리라.

 하물며 기독교인이 인상을 찌푸리고, 안 된다, 힘들다 라면서 불평과 짜증을 늘어놓는 것은 한 마디로 믿음 없는 모습일 뿐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안 될 것 같아도, 해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정말 안 될 일조차도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지금 정말 삶이 힘들다고 생각되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지금의 힘든 터널을 통과하면 환하고 멋진 더 나은 세상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설령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소중하게 당신을 만든 그 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결코 아니다. 당신은 그 자체로 소중하며 사랑 받고, 사랑 할 자격이 있는 중요한 사람이다.

 내게도 정말로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었으면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남과 더불어서 살아가고자 한다. 내 친구의 힘듬에 같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예민한 사람이고자 한다. 왜냐고? 늘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주님 안에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한 가족이라고. 나도 모든 사람을 한 가족처럼 생각할 수 있는 넓디 넓은 마음을 가지고자 더욱 분발해야 겠다. 사랑하며 살자. 그리고 긍정적으로 살자. 불가능, 그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by 시북 (2008년 2월의 글)

무엇을 보느냐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듣고, 무엇을 읽느냐도 참으로 중요한 것 같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직접 옆에서 지켜봤음에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귀 기울여서 듣지 않았기 때문일까.
자신만의 판단 기준이 있어서, 거기에 미흡했던 예수의 모습이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하지만 예수님은 항상 그러했다. 일반적 기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실 때가 많았다. 대체 왜?

한 가지 명확한 것은, 내가 바라는 예수의 이상적인 모습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서, 내가 제대로 예수님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같으면 당장 지금 사람이 죽어가는데
혈루증 여인 따위는 나중에 돌보는게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주님은 그러시지 않으셨다. 믿는 마음 하나를 그토록 소중하게 대하신 것이다.
항상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귀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만 같다.
무엇보다 미루지 않고 만나주시는 그 마음이 계속 뇌리에 오래도록 남는다.
시간이 흐르면 좀 더 이 이야기의 의미를 더 생각해 볼 수 있을지도... (2010년 8월, 씀)

 2012년 4월. 아직도 알 수 있는 것은 특별히 없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다. 가던 길을 가다가 다른 일에 에너지를 쏟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소홀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경쟁력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문득 고 노무현 대통령의 버스비유가 생각난다. 버스는 빨리 가야한다, 안 그러면 죽는다고 더는 사람을 못 태운다고 급한 버스가 지나간다. 한 여자가 태워달라고 간절히 손을 흔든다. 그 때 서야 하는가, 가야 하는가. 효율 우선의 보수주의는 가고, 공동체 우선의 진보주의는 선다고 한다. 둘 중에 누가 옳다고 말하기가 너무 어렵다. 여자를 태우고 가면, 목적지에 못 가서 다 망한다는 위험성을 쉽게 무시하기도 어렵다. 적어도 정의의 측면에서, 또는 예수님이었다면, 그 여자를 태우고 갔을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이 문제를 고민한다. 내가 기득권을 가진 버스기사 였다면, 난 어떻게 했을까. 난 내 욕심을 내놓을 수 있을까. 물론, 난 가난하므로 진보적인 생각이 익숙하지만, 내가 부자였다면, 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우스운 이야기로 들릴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의 작은 손길의 기부도 위대하고, 부자의 부자다운 거대한 기부도 역시 힘이 있다고 나는 생각해 본다. 결국은 비율의 문제겠지. 얼마만큼 진심으로 이웃을 생각하느냐의 진정성의 문제겠지. 그런 생각을 해보는 만 서른 즈음의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