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2년4월22일/이 재앙(출애굽기8:16-19)/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4. 25. 14:23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4월 22일 주일 예배

이 재앙 (출애굽기8:16-19)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에게 내린 ‘이’ 재앙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합니다. 우리로서는 의아하겠지만 ‘이’역시 애굽 신의 상징입니다. ‘겝’이란 신입니다. 땅의 신이랍니다.

먼저 이 재앙은 아무런 경고 없이 즉시 주어집니다. 첫 번째 사이클의 마지막 재앙이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은 이전에 이미 두 번이나 경고하셨고 회개할 시간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번에 즉시로 재앙을 내리셨다고 해서 회개할 시간이 없었다고 , 말도 없이 재앙을 내렸다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바로는 이전의 개구리 재앙에서 개구리가 물러가면 히브리인들을 풀어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그말을 믿고 참 간절히 기도함으로 개구리들을 애굽 땅에서 하숫가로 물러가게 한 모세를 배신하고 하나님을 격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경고하고 회개하고 약속하는 시간없이 즉시로 ‘이’를 애굽땅에 퍼지게 하셨습니다.

회개의 기회가 점점 줄어 들지요?

제일 처음에는 아침에(그러니까 내일 아침), 두 번째는 바로의 궁전에 찾아가서, 그리고 세 번째는 아무런 사전 경고없이 즉시로 재앙을 내리십니다. 이런 패턴이 세 번씩 되풀이 되고 난 연후에야 열 번째로 직접 장자를 죽이는 재앙을 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기 때문에 그 징계 역시 무시무시합니다. 그냥 죽여버리잖아요.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는 “과연 그분이 계신가?”라고 회의할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는 이들에게도 아무런 벌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은 오래 참으시지만 불의를 보고 끝끝내 잠잠하시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불의를 저지르는데 하는 일이 형통합니까? 아니 아예 죄라는 의식도 희미합니까? 가슴이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두려워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바로처럼 강팍해서 그런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강팍한 가운데서 살다가 심판을 받아서 영원히 멸망하도록 방치하는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를 ‘유기’라고 합니다. 버려두었다.

하나님의 징계가 임할 때까지 나를 버려두시기로 작정하셨단 말이거든요. 그가 정말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미리 경고도 하고 시간도 주고 조금씩 채찍으로 때려서 우리가 정신차리도록 하실터인데 그렇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은 정말 심각한 일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분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기회를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분이 오래 참으시지만 오래 참던 이가 한번 채찍을 들면 더 무섭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기를 아론으로 하여금 그 지팡이로 땅을 세게 내리치도록 하십니다. 그러면 땅의 티끌이 피어오를 것이고 그것이 이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역시 우리들의 상상과는 달리 애굽의 신을 상징합니다. 즉 땅의 신인 ‘겝’을 상징합니다. 이 ‘겝’이란 신은 하늘의 여신 ‘누트’와 합하여 애굽의 주신 ‘오시리스’를 잉태한 신이라고 합니다. 음, 이신이 여성인지 남성인지는 안나와 있네요.

하늘과 땅이 합하여 주신 ‘오시리스’를 낳았다는 신화는 우리나라의 삼신 신화와 비슷합니다.

우리나라의 신화는 이렇습니다. 우리나라의 고대에는 삼신교를 믿었는데 하늘아버지인 ‘천일’과 하늘아버지의 아들인 ‘지일’, 그리고 천지간에 가득한 덕량이라는 ‘태일’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이게 삼위일체의 기독교 교리와 비슷합니다.

하늘 아버지인 하나님 즉 성부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땅에 오신 예수님 즉 성자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나오신 성자 하나님 이렇게 삼위일체를 믿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신앙과 매우 유사합니다.

우리나라의 한글 역시 천지인,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사람을 형상화해서 만들었다고 하니 뭔가 고대에 알 수 없는 비밀이 이 땅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이 ‘겝’신이 이번에는 하나님에게 혼쭐이 납니다. 하나님은 거듭거듭 이러한 것들이 결코 너희의 신이 될 수 없다고 보여주시는데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데야 별 수가 없습니다. 벌만 가중될 뿐입니다. 그래서 고집쟁이는 고통만을 더할 뿐입니다.

‘이’는 우리가 매우 잘 아는 것입니다만 성경은 여기 ‘이’의 정체에 대해서 약간씩 다른 견해를 취합니다. 말 그대로 ‘이’라고 하는 측이 있고 ‘진드기’다 또 ‘각다귀’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각다귀는 모기와 비슷합니다. 모기보다 작지만 날개가 있어서 날아다니며 나일강이 범람하는 지역에 산다고 합니다. 이 각다귀는 사시사철 어느 때라도 물과 적당한 온도만 되면 그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각다귀는 사람을 공격할 때는 머리털, 옷 속, 심지어 눈이나 귀, 코 속까지 들어와서 피를 빨기 때문에 사람에게 엄청난 고통을 줍니다. 그래서 아마 여기서 말하는 ‘이’는 각다귀일 것이라는 설이 제일 유력합니다.

물론 단순히 ‘이’일 확률도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이 성경자체는 아니니까요. 번역상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는 아니고 벼룩의 공격에 관해서 제가 조금 들어본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우리가 살펴보듯이 하나님의 재앙들은 모두 애굽의 자연현상 중의 하나로써 그 수가 많거나 정도가 극심해서 그렇지 특별할 것 같지 않습니다. 전혀 상상할 수 없거나, 전혀 새로운 짐승이나 괴수 같은 것이 나와서 애굽의 백성들을 괴롭히거나 공포를 불러 일으킨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앞서의 나일강이 피가 되는 것이나 개구리가 나오는 것이나 오늘의 ‘이’나 다 나올 만 합니다. 평소에도 자주 있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물을 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각다귀가 물에서 나오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물이 아니라 땅의 티끌, 즉 먼지를 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땅을 지팡이로 내려치면 먼지가 피어오르고 그것이 이가 된다고 하십니다. 물이 아니라 땅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땅에서가 아니라 주로 물에서 생기는 것들이 땅을 침으로 생긴다? 이게 바로 이적이라는 것입니다. 자연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거든요.

나일강이 피처럼 붉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애굽의 모든 물이 피가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본래 나일강은 이디오피아를 통과하면서 아비시니아 고원의 붉은 점토질을 많이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혹가다가 피처럼 붉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모든 물이 피가 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황토물이나 핏빛처럼 붉은 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고기들이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고기는 황톳물 속에서도 잘 삽니다. 중국의 황하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원래 나일강가에 그 개구리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신이 된 것입니다. 비옥한 땅에서 잘 기어답니다. 그러니 애굽인들은 그 개구리가 자신들에게 해를 준다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징계를 받자 그 개구리가 자기들에게 피해를 줍니다. 너무 너무 귀찮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래도 이제까지는 있던 것을 가지고 애굽을 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를 만들어 내셨습니다. 티끌을 가지고 이를 만드신 것입니다. 명백한 하나님의 이적입니다. 이제 애굽의 술사들도 따라하지 못합니다.

애굽에 각다귀가 많아서 그들이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모기니 각다귀는 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물이 없는 곳에서는 번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은 땅의 티끌을 각다귀로 만드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초자연적 현상, 즉 기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슷하거나 있을 수 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솔직히 이나 각다귀가 비위생적인 곳에서 대량으로 서식하는 일은 흔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전혀 자연적으로는 일어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물이 아니라 땅에서 발생했다고 하기 때문에 자연적이지 않습니다.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아론의 지팡이가 내려친 부분은 아주 적습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내려쳐진 결과는 자못 심각합니다.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 사람 지도자의 잘못으로 인해 애굽 모든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중요하기도 하고 아주 적은 울림이 거대한 재앙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아론의 지팡이가 애굽을 돌아다니며 땅들을 내려친 것이 아닙니다. 아론은 다만 한 지점의 땅만을 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온 애굽땅에 미치게 되었습니다. 결코 한정된 사람과 한정된 땅에만 그 이가 퍼진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는 히브리 노예도 없고 , 나는 하나님을 비웃거나 경멸한 적이 없어서 이런 형벌을 받는 것이 억울하다고요? 그것이 바로 또 다른 죄악입니다. 세상이 점점 타락하는데 이를 그냥 방관한 죄입니다. 음, 이를 공범이라고 합니까? 정신 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아닌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이 되셔서 자기를 내어 놓게 된 것입니다.

또한 아론의 지팡이가 땅을 쳤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권능이 애굽의 신 ‘겝’을 쳤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겝’이 주신 ‘오시리스’의 어버이란 사실을 생각한다면 머지않아 ‘오시리스’마저도 여호와의 치심을 받는 것으로 일이 진행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는 어느 신이 더 높은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가 그렇게 잘나고 위대한 신이라면 어떻게 자기의 백성들을 수백년간 노예로 놔둘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인들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는 신을 치시는 것입니다.

만일 애굽의 바로가 영안이 있었다면 ‘이’재앙을 보고는 항복해야만 했습니다. 이제 더 큰 재앙이 닥쳐올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가 주는 고통이나 불편함은 그의 자존심과 탐욕보다 약했던 것 같습니다. 노예의 신에게 굴복할 수 없다는 자존심, 돈이 얼만데 어른아이 합해서 무려 200만이나 되는 노예를 풀어 준다니....‘ 어른 노예는 은30세겔이고 미성년은 은20세겔입니다. 그러면 돈이 얼맙니까? 그런 욕심이 ’이‘가 주는 고통을 이겨내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애굽의 술객들이 이 재앙을 흉내 내지 못합니다. 이제부터는 인간들은 이 재앙을 따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시인합니다. 이전까지는 애굽의 술사들이 모세의 재앙을 따라하거나 적어도 흉내는 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그들은 전혀 흉내도 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작품이 아니라 신의 손길임을 시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인간의 과학이 신의 영역을 정복해 간다고 자랑합니다. 유전자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게놈지도를 읽는다, 줄기세포를 이용해서 사라진 팔다리를 만들어 내고 복제인간을 만들어서 장기를 이식하고 심지어 복제인간에 본판 인간의 영혼을 집어 넣어서 영원히 죽지 않는 인간을 만들려는 노력들이 쉬임없이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새로운 우주 탄생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보려는 노력들도 일어납니다. 인간들은 지금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노력들이 금지되어야 된다거나 헛되다 이런 식으로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저는 우습다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왜냐고요?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인 , 신의 특별한 작품과 신적 영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원숭이에서 진화한, 더 나아가서는 단세포 아메바에서 출발한 인간으로 생각한 하찮은 인간이 마침내 스스로를 신으로까지 목표로 하고 있으니 우습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신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이라면 신의 영역에 도전하려는 일들이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보잘 것 없는 단세포 동물로 설정해 놓고 , 스스로를 짐승의 한종류로 설정해 놓고는 신의 영역에 도전한다고 설치는 인간들이 너무 우습습니다. 그래서는 ‘이’를 자기들의 주신 ‘오시리스’의 어버이를 낳은 땅의 신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숭배하는 애굽인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가 신이 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말 웃깁니다. 개구리 보다 더 작습니다.

그러나 처음은 몇 개를 따라해도 결코 따라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술사들이 말한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란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에 굴복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말은 우리에게 신이 있듯이 히브리인들도 도와주는 신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말일뿐입니다. 왜냐면 여기서의 하나님은 ‘엘로힘’이고 이 엘로힘의 원뜻은 단순히 ‘신, 또는 신의 복수형인 신들’이거든요. 이제 겨우 애굽의 술사들은 ‘이’재앙이 인간의 트릭이 아니라 신적인 역사임을 인정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제부터 시작이지요. 그 신은 애굽의 술사들이 생각하는 여러 신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하며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란 사실을 이제부터 애굽인들은 질릴 정도로 , 뼈에 아로 새겨지도록 깨닫기 시작할테니까요.

그런데 더 놀랍고 황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애굽의 술사들도 두 손 들고 포기한 이 거대한 ‘신적 이적’을 보고도 바로는 히브리인들을 풀어 주겠다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마음이 더 강팍하여져서 그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합니다. 인간은 그렇습니다.

너무도 명명백백한 사실일지라도 자기의 목숨이 직접적으로 위협받지 않으면 끝까지 고집을 부립니다. 부득부득 하나님이 없다고 우깁니다.

눈앞에서 고통받는 현실을 보고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고통이 아니라고 외면합니다. 나는 아직 살만하거든요.

눈앞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초자연적 현상을 보고서도 돌이키지 않습니다. 약간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바로가 굳이 고집을 부리고 마음이 강팍해서 말을 안듣는 이유는 마음속의 욕심 때문이고,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 때문이고, 자기가 신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신이 조종하도록 하지 않으려 하는 자존심 때문입니다. 강팍한 인간의 마음을 사탄은 참 잘 이용합니다. 처음부터 사탄은 자기를 섬기게 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것은 먼저 여호와 하나님의 유일성을 해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 아니라 다른 신도 있다. 그러니 하나님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다른 신을 섬겨도 된다. 신이 여럿 있으니까 인간은 이 신 저 신을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란 신에 절대적으로 구속되는 것보다 훨씬 인간에게는 숨쉴 공간이 넓어지게 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바로와 같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적이라고, 신의 권능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지, 우연이지........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며 살아갈 것입니까?

하나님이 항상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그의 구원의 방주문이 닫히고 무서운 심판이 벌어질 때가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영을 민감하게 하고 하나님에게 우리의 영적인 안테나를 고정해야 합니다. 그가 우리에게 뭐라고 하시는지 그의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속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4월 22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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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마태복음 11장을 보면,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무감각에 대한 경고 입니다. 병든 사회를 알 수 있는 기준은, 춤추지 않는 사회, 기쁨을 억압하는 사회, 표현을 말살하는 사회가 되면, 틀림없이 고여있어 썩은 물과 같이 악취가 나기 시작합니다. 높은 위치에 있으면 향수를 뿌려댈 수 있으니 느끼지 못하겠지요. 흡사 바로 처럼, 사람들이 아무리 울고 있어도, 귀가 먹은 것처럼 들리지가 않습니다. 다니엘 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손길이 경고를 해도, 벽에 낙서를 보듯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한 마디로 유행가 제목처럼 I Don`t Care 가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길을 걷다가, 춤출 일이 있다면 신나게 춤을 추고, 슬픈 일을 만나면 함께 울 수 있고, 경고 앞에서는 스스로를 돌아볼 줄 아는 소박한 기독교인이 되기를, 다만 그것만을 바랄 뿐입니다. / 2012. 04. 25.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