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4월 29일 주일 예배
아브라함과 엘 올람 (창세기21:33-22:14)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몇 가지 난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 중에서 가장 곤란한 문제가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한 부분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린다면 성경은 결코 금언록이나 격언록이 아니고 우화집이나 교훈집도 아닙니다. 즉 누구나 보아도 그럴듯하게 여겨질 수 있는 책은 아닙니다. 진실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기에 난감하게 여겨질 수 있는 부분도 들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여서 제사를 지내려고 한 아브라함의 행위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로서는 결코 허용할 수 없는 야만적이며 증오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무슨 말로도 인신공양을 합리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 곤란한 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 행위를 믿음의 극치로 찬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제가 처음 이 기사를 접했을 때는 이 기사가 성경에서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도저히 이 기사를 그대로 믿을 수 없었습니다. 단순히 아들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지를 보기위해서 아들을 죽이라고 명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인신공양의 풍습을 무지무지 싫어하시거든요. 산 사람을 바치는 ‘몰록’신의 풍습을 가증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설마 이러실 리가 없다는 것이 저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풀리지 않는 성경본문을 면밀히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풀 수 없었습니다.
믿음 때문에 우리의 정서와 인성을 포기해야 합니까? 과연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왜 그는 그 거룩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가장 슬프고 또 야만적인 것을 요구하셨을까요?
도대체 아브라함은 어떻게해서 그런 황당한 요구에 응할 생각을 한 것일까요?
오늘 저는 이러한 일들을 염두에 두고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영생하시는 하나님
먼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이유는 아브라함이 과연 아브라함 자신의 말을 그대로 실천하는가를 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게 된 것은 사실 아브라함의 말이 발단이 된것입니다. 입이 화근인 셈이지요.
뭐라고 이야기했는데요?
뭐라고 이야기했는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의 장을 앞쪽으로 좀 넘겨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창세기22장부터 시작해서 이유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문 안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던 이유가 앞장의 뒷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사실 원래의 성경구별은 장절로 나누이지 않고 큰 점으로 나누어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찾아야합니까? 21장이요. 21장 22절에 보면 점이 찍혀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장이 시작된다는 표시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기사는 뜬금없이 22장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이 조약을 맺는 부분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장절의 체계와는 다릅니다만 바로 이 점찍힌 부분이 성경에서 원래 나누어 놓은 부분입니다. 뭐라고 합니까?
33절에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바로 이겁니다. 아브라함은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의 대지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제사를 지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아브라함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우리들도 그런 일을 많이 했습니다. 비록 기도할 때나 설교를 들을 때는 “주여 믿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도 실제로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전혀 믿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인간인 고로 우리는 이런 일을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불신은 우리로 하여금 축복의 장으로 이끌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거하는 손님이었지만 그는 이제 당당하게 아비멜렉과 조약을 맺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비멜렉이라는 (블레셋의) 왕이 그를 단순한 유목민 가정의 가장이 아니라 국가의 군주로, 대부족의 족장으로 인정한 것을 말합니다. 객으로 와서 주인과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마침내 이방인들의 눈에도 굉장한 사람으로 비춰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조약을 맺은 것을 기념하기위해 에셀나무를 심었습니다. 단단하고 오랫동안 사는 에셀나무는 조약의 영원함을 기원하는 아브라함의 염원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나를 이렇게 키워주신 분은 너희들이 아는 ‘엘’신이 아니라 영생하시는 하나님, 엘 올람이다”이렇게 이야기 한 것입니다.
지금처럼 건물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야외에서 돌로 단을 쌓고 제물을 태우며 큰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방신의 대지에서 전혀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가나안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신성모독이요 도발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엘 올람”이라고 합니다.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신은 당연히 영원히 살지요. 만일 신이 인간처럼 유한하다면 정말 실망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신을 누가 섬깁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이 말하는 ‘엘 올람’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그분을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죽더라도 다시금 부활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지요. 부활의 주님 아닙니까? 그래요, 아브라함은 ‘죽어도 살겠고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이 자기를 믿는 신도들도 결코 죽지 않게 하실 것을 그가 믿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일러 사랑의 하나님이니 공의의 하나님이니 언약의 하나님이니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이방 가나안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서 나의 하나님을 ‘엘 올람’의 하나님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당신을 믿는 다면 우리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며 죽더라도 다시 살 것입니다 . 당신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믿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을 믿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죽더라도 다시 살리시는 분이심을 우리가 믿습니다. 당신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 말은 아브라함의 여호와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며 그의 여호와 신앙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신앙고백을 그냥 혼자서 속으로 되뇌인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들이 보고 있는 와중에 하나님을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당시 가나안 사람들도 ‘엘’신을 믿고 있었습니다. 엘은 가나안 만신전에서 최고 높은 신으로 숭배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엘 신과는 다른 엘 신을 소개한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아! 내가 섬기는 하나님 ‘엘’신은 너희가 믿는 ‘엘’신과 달리 영생하시는 하나님, ‘엘 올람’이시다” 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찾아 오셔서 과연 아브라함이 자기의 신앙고백대로 믿는 다는 증거를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22:1에 보면 ‘시험하시려고’라고 그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2.슬픈 가족사
음, 이것은 전설입니다. 성경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설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뭐냐면 원래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고향에서 달 신의 신상을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달 신의 신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는데 아들이 달 신을 믿지 않는 것을 보고는 시당국에 아들을 고발합니다. 그래서 아들은 화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아마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거짓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인신공양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런데 달이 차고 기울고 다시 차오르는 과정을 보면 마치 달신도 부활의 신인 듯 합니다. 그래서 데라는 아들이 비록 달신에게 제물로 바쳐졌지만 다시금 살아날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달신에게 바쳐진 아들은 살아 나지 못했고 결국 데라는 달신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고 고향 우르를 떠나서 하란으로 온 것이라고 하는 전설입니다.
이러한 가족사를 배경으로 한 아브라함이라면 그가 에셀나무 아래서 단을 쌓고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부른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여러개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보수하시는 하나님 등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는 이방인들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면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불렀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사람에게 ‘여기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믿음을 아브라함이 과연 가지고 있는가를 보고 싶어 하셨고 아브라함의 믿음에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3.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1절에 ‘그를 부르시되’ 여기서 이 말은 크게 부르는 모습이 아닙니다. 원뜻을 본다면 조용히 다가오셔서 대화하듯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복잡한 설명은 생략하고 여기서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에 즉각적으로 응답한 것을 나타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란 말은 정확하게는 ‘나를 보소서’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구조를 많이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저 그런 구절로 이해하고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부르시자 마자 즉각적으로 응답했다는 말입니다. 이게 쉬운 일 같습니까? 천만에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때에도 항상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기란 어렵습니다. 더구나 요즘처럼 먹고 살기 어려운 현실에서 우리의 신경이 하나님을 향해 있기가 힘듭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고단한 삶속에서 지치고 힘들어 주일이 아니고는 하나님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에 즉각적으로 응답한 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그가 항상 자신의 안테나를 하나님을 향하여 맞추어 두고 있었다고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큰소리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친구와 조용한 가운데 대화하듯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하나님과 긴밀히 대화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교제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 그런 이가 되어야 합니다.
4.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이삭은 2절의 표현대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여기서 ‘독자’라는 표현은 유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극히 소중한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에게도 바로 이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삭은 독자는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만 총 8명 이었고 딸의 숫자는 얼마인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브라함이 가장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아들을 번제로 바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엄청난 고민과 번뇌, 그리고 인륜 때문에 그는 몇 날 몇 일을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이러한 명령이 자기가 생각지도 못했던 깊은 뜻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확신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몰랐겠지만 우리에게 모리아 산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서 희생제물을 삼으실 것을 미리 보여주려는 의도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리아산은 브엘세바에서 사흘길인 곳이고 나중에 모리아 산에는 솔로몬의 성전이 건축되었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인지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성경에는 모리아 땅이라고 했지 모리아 산이라고 한 것이 아니고 게다가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이라고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사마리아인들은 모리아 산을 그리심 산으로 상정합니다. 그래서 사마리안 인들은 여기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네가 모리아 땅으로 가면 여러 산들이 있을 것인데 그중에서 내가 한 산을 너에게 지정해 줄 것이다’ 란 의미입니다.
그리고 원문을 잘 분석해 보면 하나님은 이삭을 번제로 드릴 것을 강제로 명령한 것은 아닙니다. 2절의 “데리고... 가서”란 표현은 권고의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강제로 이삭을 태워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번제로 드릴 것을 권고하는 것입니다. 즉 판단은 아브라함이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이 말앞에 “너는”이란 말이 있는데 번역에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권고하실 때 아무에게도 의논하지 말고 심지어 너의 아내에게도 말하지 말고 너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란 말을 하신 것입니다.
신앙의 판단에는 항상 이와 같은 외로운 결단이 요구되어 집니다. 그 누구도 나의 일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문자 그래도 하나님과 나와의 단독적인 상황에서 나는 스스로 결단하고 이행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번제라고 해서 단순히 태워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번제물을 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각을 뜹니다. 각이 뭐냐면 목과 팔과 다리를 잘라내고 몸통도 분해해서 안엣 것을 끄집어내는 뭐 그런 것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토막 살인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너무 너무 끔찍한 것입니다. 램브란트의 그림에서는 이 장면을 표시하면서 아브라함이 날카로운 단검으로 이삭의 목을 딸려고 하는 장면으로 묘사했습니다.
너무 끔찍합니다. 너무 잔인합니다. 도저히 못할 짓을 하나님은 지금 아브라함에게 시킨 것입니다.
5.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아브라함은 고민을 참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납니다. 일어나서 한 일은 무엇입니까? 번제물이 될 이삭을 불러서 그의 의사를 물어본 것입니까? 아니면 아내나 심복들을 불러서 의중을 떠본 것입니까? 아니면 아무 말 없이 이삭의 모습을 살펴본 것입니까?
모두 다 아닙니다. 희한하게도 아브라함은 그런 엄청난 명령에 순종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그는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땅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너무너무 힘든 선택이요 명령인데도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묵묵히 그의 명령을 준행하기위해 준비하고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꺼려서 피할려고 했다면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하고 출발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녁 늦게나 출발해서 시간에 맞추지 못하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아예 삼일째 출발해도 됩니다. 가다가 “시간이 늦어서 도저히 안되겠네”하고는 돌아와도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틀거리를 가면서 혹시라도 마음이 변할까봐 일찍이 일어나서 길을 떠납니다. “나는 모르겠지만 무조건 당신만을 믿습니다. 주여 기적을 보여주시옵소서!”
실제로 브엘세바에서 모리아산까지는 약 75km정도가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시간상으로는 사흘 만에 충분히 도착하도고 남습니다. 보통은 이틀거리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사흘만에 당도한 것은 고민으로 그의 발걸음이 느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흘째되는 날 마침내 멀리서 모리아 땅의 산들을 바라봅니다. 과연 저 산들 중에 어디가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인가를 알려고 했습니다. 그는 비록 가슴이 아프지만 , 틀림없이 영생하시는 하나님은 이삭을 그냥 데리고 가지 않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도중에서 혹시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을 체험하기를 원했습니다. 또다른 하나님의 명령이 내리기를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너의 믿음을 보았으니 아들아 이삭과 함께 평안히 돌아가라”“는 명령이 나오기를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기적적이고 신묘한 방안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끝끝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마침내 아브라함은 멀리서 모리아 산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6.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모리아 산에 오르기 전에 아브라함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여기 답이 나와 있습니다. 5절에 보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알 수 없지만 히브리어로 보면 이것은 복수형입니다. 즉 나혼자 돌아오겠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돌아오겠다는 말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사환들은 산아래에서 기다리게 하고 자기와 이삭만이 산에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는 마당에서도 반드시 우리가 함께 돌아오리라는 믿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과연 그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굳게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영생하시는 하나님, ‘엘 올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신의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죽지 않게 해주실 것을 믿었고, 죽어도 다시 살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사환들에게 ‘우리가 돌아오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고백하는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믿었던 것입니다.
이삭과 함께 산을 올라가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이 묻습니다.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삭은 자기가 제물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천진하게 물어 보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마음이 찢어지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여기에 대답을 보세요.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지금 이삭을 불사르기 위해서 가는 아브라함이지만 그는 끝까지 하나님이 친히 다른 제물을 준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물론 거짓으로 아들을 속이려고 이런 말을 했다고 볼 수 있지만 지금이나 옛날에도 거짓말은 하나님 앞에 죄악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굳이 아브라함을 죄인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마침내 다 왔습니다. 이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7.여호와 이레
성경은 모리아 산에 당도한 아브라함과 이삭의 행위를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심리상태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단지 일이 되어지는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때 엄청난 갈등과 번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짐승의 각을 뜨듯 해부해야 하는 그래서 태워야 하는 아브라함의 심정,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당혹감, 혹은 배신감에 어쩔줄 몰라 하며 공포에 젖어있는 이삭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16세가량의 청소년인 이삭이 115세 이상인 아브라함을 과연 힘으로 이기지 못해서 결박당했겠느냐하는 문제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를 차마 어쩌지 못해서 체념했을까요? 아니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 생각해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혹은 의식을 잃고 죽어가고 있었을까요?
드디어 아브라함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합니다. 이때까지 하나님의 도움이나 다른 지시는 전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지시하실 땅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결코 중간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이삭을 칼로 죽여야 합니다. 오, 주여!
그때 바로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부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렇게 두 번 연속하여 부르는 것은 친밀한 사이라는 말도 되고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다는 의미도 됩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아브라함을 막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물은 어쩌지요?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제물이 필요합니다. 13절에 보면 “한 수양(lyIa;)”이 수풀에 걸려있답니다. 이 말에는 몇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앞 절에서 본 아브라함의 대답을 기억합니다. 이삭이 “아버지 제물은 어디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아브라함의 대답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말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이걸 히브리어로 읽으면 AL ha,r>yI ~yhli{a/가 됩니다. 각 단어의 맨앞글자를 붙이면 바로 “한 수양”이 되는 것입니다.
말장난입니까?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이 일을 얘기하신 것입니다. 무심코 이야기하는 아브라함과 이삭은 알지 못했지만 이미 그들의 말속에 하나님은 해법을 주신 것입니다.
자,우리가 마지막으로 살펴 볼 것은 ‘여호와 이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 말을 하나님이 다 준비해 주실 것이라 라고 해석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여호와 이레되신 하나님, 우리가 필요할 것을 다 아시고 미리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은 목사님들의 설교에 단골 메뉴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약간 다른 뜻이 있습니다. 뭐냐면 “여호와께서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말입니다. 또는 “여호와의 산에서 나타나리라”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잠깐 언급했지만 모리아산에서 결박당하고 번제물이 될 뻔한 이삭은 신약시대 예수님의 모형으로 많이 언급되어 집니다. 그런데 수풀에 뿔이 걸린 수양을 보면 우리는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어린양, 십자가를 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제물을 친히 마련하셨습니다. 그 제물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장차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자기의 백성들을 위해 대속의 제물로 죽으실 것을 예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산에서 하나님의 아들 , 독생자 예수가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을 맞이해야할 대속의 제물을 친히 준비하셨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리아산에서 나타난 수풀에 뿔이 걸린 어린양으로 예표됩니다. 어떻습니까?
여호와 이레의 뜻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8.맺는 말
이제 말씀을 맺어야 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태워서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신 하나님은 사실 아브라함이 “당신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입니다”라고 외쳤을 때 그러한 믿음을 실제로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말로만 그렇게 이야기 하는 지를 아시고자 하셔서 그를 시험코자 이삭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아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지를 시험코자 아들을 죽여보라고 하신 것이아닙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 우리의 호언장담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험을 부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여러분에게 아들을 잡아서 번제로 드려라는 시험이 올까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삭이 제물이 되지 않고 그가 다시 산 아래 사환들에게로 돌아 올 수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건을 믿음의 최고봉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당시에 아브라함도, 이삭도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단순히 죽이는 것이 아니라 각을 뜨는 잔인함이 요구되어지는 제물로 이삭을 올려놓고 아브라함은 그래도 하나님의 간섭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거짓된 우상처럼 , 달신 나나처럼 자기의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다면 그는 어떠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 엘 올람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는 영원히 사시고 죽지도 않으시며, 죽어도 다시 사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것을 믿습니다. 아브라함의 결단, 이삭의 순종, 하나님의 역사
다 좋습니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라도 빠졌다면 오늘 이 사건은 비극적인 결말을 맺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쁩니다. 전능하신 참신을 믿고 있어서 기쁩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며 죽어도 다시 살 것이며 그와 더불어 영생할 것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적은 함부로 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험들을 이겨낼 때에야 만이 진정한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어떠합니까?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까? 아니면 말로만 믿는다고 하고 시늉만 합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실상 참 어려운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엘 올람’을 부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세력이 가나안 토착세력과 비슷할 만큼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왕이 아브라함의 세력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교류하면 뭔가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껏 부를수 있을 만큼 우리의 세력이 성장했습니까? 세상이 우리를 보고 저들과 함께하면 뭔가 세상에 좋은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할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지금처럼 마음대로 부르지 못할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세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행위가 악해서. 우리가 이대로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악행을 계속한다면, 회개할 줄 모르고 후안무치한 행위를 계속한다면 어느날 세상 사람들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할 시기가 올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을 엘 올람 ,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지요, 만일 우리가 이대로 계속 간다면 세상은 우리를 향하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을 향하여 뭐라고 부를까요?
말이란건 참 중요합니다. 엘 올람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잡아 바치라는 시험에 처해 집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엘 올람,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그는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바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하나님을 과연 뭐라고 부를까요?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 앞에 우리의 하나님의 이름을 뭐라고 소개할까요? 오늘 세상은 우리가 소개하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하나님일지를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뭐라고 부를 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뭐라고 소개할 지를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또 하나 뭐라고 부를지를 고민하기에 앞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부르는 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칭호의 진정성을 물어보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결정해야 할 때입니다. 그는 나에게 어떤 하나님입니까?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4월 29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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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고백합니다. 설교를 듣고, 또 읽고, 깊게 생각에 잠기고, 마음 속에 두려움이 생깁니다. 너무 어려운 질문 앞에 혼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이란, 절망 속에서도 행복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참으로 약하고, 못나고, 부족한 모습 속에서 자학적으로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생, 마치 아Q 같은 인생을 사는 한심한 저이지만, 그럼에도 너는 소중하고, 일상은 특별하고,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하는 하나님 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고,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없고, 끈기와 성실 같은 성공적인 미덕도 찾아볼 수 없지만, 삶이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히브리어를 못하기에 한글로 표현하자면, "삶을 주신 하나님" 이라고 표현하면 제일 좋겠네요. 그 전까지는 살아도 산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살아있는 시체 같은 인생은 참으로 슬펐습니다.
지금은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더 많이 가져도, 더 많은 재능이 있어도, 행복하지는 않을 것임을. 오직 주어진 일들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면서, 의미 있는 일들을 하나 둘 해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다만 바람이 있다면, 첫째는, 안테나를 잘 맞춰서 아브라함처럼 즉각적인 피드백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과 귀를 멀게 하는 탐욕을 경계해야 겠지요.
아기는 어머니의 즉각적인 피드백을 받는 상황에서는, 용감무쌍하게 행동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잠시 침묵하고 계실 때, 고민에 고민을 하면서 느린 발걸음을 걸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진실의 역사다, 그 점이 참으로 마음에 와닿습니다. 아브라함의 위대함은 아이의 신앙이 아니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피드백이 없을 때에도 용기를 내고 결단을 하고, 아침에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그럼에도 고뇌하는 아브라함은 너무나 인간적으로 느껴집니다. 마침내 그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합니다. 목적지까지 keep going 하는 것, 다시 말해 그래도 계속 가는 것 입니다. 두 번째 바람은 이러한 믿음의 발걸음을 걸어가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거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것, 이것을 버릴 수 있는가?" 게다가 이것을 버리기 위해서, 며칠을 계속해서 갈 수 있는가. 백명이 있다면 아무도 가지 않을 것이고, 천명이 있다면 아무도 가지 않을 것이고, 만명이 있다면 아무도 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사랑하는 것을 얻기 위한 경쟁적인 사회시스템 속에서 우리 모두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랑하는 것을 버리기 위한 여행" 같은 혼란스러운 질문은 터부(금기)시 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는 입으로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 말에 대해서는 전혀 책임지지 않는, 조금도 증명하지 않는, 한 마디로 겉으로 그럴싸한 신앙만을 다들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내가 생명력 넘치는 삶을 주었는데 하루를 멋지게 보냈는가? 의미있게 보냈는가?" 라고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무엇을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고개를 푹 숙이고 벽에다가 머리를 쾅쾅 박아대지 않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오늘도 할 수 있는 최선을 생각하면서 살아보려고 합니다. 그것이 오늘 이 장문의 덧붙임 글 마침입니다. / 2012. 05. 03.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