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04년4월11일/여호와의 산에서 나타나리라(청년설교14)/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5. 14. 21:38
- 2004년 창신교회 청년부에 계실 때의, 홍종일 목사님 설교문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조금 다른 각도에서 부활절을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본문도 창세기22장으로 잡았습니다

솔직히 우리 성경에서 정말 정서적으로 이해 안되는 부분이 두군데가 있는데 바로
이곳하고 또 사사 입다가 딸을 서원의 제물로 바치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오래 예수를 믿은 사람이라면 적어도 서너번은 들어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자, 여러분
아무리 신앙이 중요해도 그렇지 어떻게 자기 자식을 잡아서 태워바치라는 천인공노할 명령을 하실 수가 있을까?
또 설령 사악한 악신이 그런 명령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 명령에 순종하는건 또 뭐냐?
그리고 또 그걸보고 신앙의 결정체니 , 역시 믿음의 조상답다느니 뭐니 하고 떠드는 정신나간 목사들은 또 뭐냐?
아마 많은 사람들이 정말 생각하기 싫은 ,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내용일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엄연히 성경에 나와있고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해할수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고 그리고 기억하기는 싫지만 분명히 소위 믿음의 조상이라는 사람이 한 일로 창세기22장에 당당히 나와있습니다

참 고민입니다
과연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요즘 처럼 인권과 이성이 고도로 발달한 시대에 이런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과연 먹혀 들어갈 것인가
그러나 이걸 생략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실을 부인할 수도 없습니다
자 여러분
과연 하나님은 이 기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일까요?

1.그 일후에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볼때에 항상 장절로 나누어서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좋은 태도는 아닙니다. 솔직히 그런식으로 성경을 읽기 때문에 항상 성경이 이해가 안되고 뜻이 애매모호해 지는 것입니다
우선 1절의 ‘그 일’은 앞장의 33절에 나온 ‘에셀나무를 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부른 일’을 가르킵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 ’
솔직히 신이 그럼 영생하지 뭐 죽기라도 하냐? 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큰 오산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은 신들간의 저주와 투쟁으로 죽기도 하고 사라지기도하며 심지어 인간과 사랑을 나누기도 하는 인간과 비슷한 개념의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가나안의 주신은 바로 엘이란 신이었습니다. 바알의 아버지, 가나안 만신전 중에서 가장 주신, 아세라의 남편
그래서 당시 가나안 사람들에게 엘 이란 신의 이름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이름도 엘 로힘, 엘 솨다이, 엘 엘욘 등으로 앞에는 엘이 들어갑니다
아브라함은 에셀나무 아래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를 ‘엘 올람’ 즉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2.영생하시는 하나님
‘영생하시는 하나님’
이건 아브라함에게 정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이름입니다.
성경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실제로 아브라함에게는 두명의 형제가 있습니다. 하란과 나홀 두사람입니다. 아마 아브라함이 막내가 아니었을까? 적어도 장남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달의 신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었는데 자기의 아들인 하란을 시당국에 고발을 하게 됩니다. 뭣때문인가하면 바로 달신 나나를 섬기지 않는 배교자라는 혐의로.

그래서 하란은 화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밀고해서 화형에 처하게 한다면 그건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아마 당시의 달신교도들은 달의 정기를 받아 죽었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다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하란은 그들의 일반적인 믿음과는 달리 화형되고 난 다음에 결코 다시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달신은 ‘엘 올람’ 즉 영생하는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낸 신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자기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믿는 이는 죽지 않겠고 죽어도 다시 살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3.우르를 떠나며 달신도 버렸다
고대에는 지역신의 개념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우르를 떠날 때 그는 달신도 버렸던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달신의 고장을 떠나온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를 가나안으로 인도한 신은 자신을 엘 올람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에셀나무숲에서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것입니다.

4.인신공양을 요구하는 하나님
하나님을 엘 올람이라고 부르고 나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독자 이삭을 모리아땅에 데리고 가서 내가 지시하는곳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실 이삭이 독자는 아닙니다. 이미 형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독잡니까? 사실 독자로 번역된 이 말은 가장 사랑하는,
아주 소중한 이런 뜻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아들 이삭이라고 번역할 수있겠습니다.

번제는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나 그냥 태우는 것이 아니라 각을 떠서 태우게 됩니다.
즉 손발 머리를 모두 잘라내고 몸통을 썰어서 내장을 끄집어내고...
이 말을 듣고 아브라함은 밤새 고민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찌하여 나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셨을까?
나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겠다고 하셔놓고는 겨우 두명있는 아들중에 정실의 자식,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니!

그는 아마 밤에 이미 고향에서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한 그의 형 하란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때도 그들은 달신의 명령을 잘 들었지만 결국 그의 형은 다시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한번 죽으면 그걸로 그뿐 부활이란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달신에 환멸을 품고 하란의 아들인 롯과 함께 아버지 데라를 모시고 고향을 떠났던 것입니다.
새로운 신을 섬기고 그가 지시하는 땅에서 영원히 살기위하여............

그런데 이제 그 새로운 신 역시 자기가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고 이야기 합니다
태워 죽이랍니다
그것도 자기손으로 각을 떠서 죽이랍니다

5.약속의 땅으로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준비를 서두릅니다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 나무를 쪼개고 그리고는 종들과 함께 이삭을 데리고 길을 떠납니다
그는 결코 그 명령에 지체치 않았습니다.
모리아땅은 아브라함이 살고있는 브엘세바에서 약 75Km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한 삼일정도를 걷는다면 딱 적당한 거리입니다. 한낮에 걷고 해지면 쉬고
그러면 삼일이면 당도하는 곳입니다.

멀리서 모리아산을 바라봅니다. “내가 네게 말할 그 산들 중에 한 곳에서”라는 표현으로 보아
하나님은 모리아땅에서 하나님이 특별히 선별하신 산을 정해주셨을것입니다.
모리아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선별하셨다는 말입니다.
저 산들중에 한곳에서 내 아들 이삭을 잡아야 되는구나! 참 가슴이 아픕니다.

6.우리가 돌아오리라
아브라함은 이때 종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 남아있으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우리성경에는 우리가 돌아오는지 나만 돌아오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마치 경배는 함께하고 돌아오는건 나만 돌아오는것처럼 되어있지만
원문에는 우리가 돌아오겠다는 말이 분명히 나와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솔직히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란걸 믿습니다.
당신을 믿으면 영원히 죽지않을 것이고 죽어도 다시 살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저 산들중 어디에선가 나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고민과 의혹을 해결해 주실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아들과 함께 떠난것 처럼 아들과 함께 여기로 돌아올것도 믿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물론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산을 지시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산을 오르는 도중에 이삭이 묻습니다
어린양은 어디있나이까?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마침내 단을 쌓고 갑자기 믿었던 아버지가 아들을 결박하고 아들의 목을 따기위하여 칼을 높이 듭니다
여러분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지요
단순히 잡으려 하는 정도가 아니라 각을 뜬다고.............
아들을 단순히 찔러 죽이는 것도 서러운데 세상에 짐승처럼 각을 뜨다니.........

7.마침내 나타나신 하나님
그때 보라! 성경원문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때 보라!
갑자기 하늘로부터 음성이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말라”
과연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보니 수풀 속에 뿔이 걸려있는 한 수양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만히 보면 바로 이 수양이란 단어가
한 수양인데
이말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라는 말의 단어
앞글자를 딴 글자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그냥 자기의 믿음만을 무심코 이야기했는데 하나님은 그걸 들으시고
정확하게 그 말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수양으로 이삭대신 제사를 드리고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종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이것도 그의 말대로 되었습니다

8.여호와 이레
아브라함은 그 땅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그 뜻은 미안하지만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가 아니라 “여호와의 산에서 나타나리라”입니다.
무엇이 나타났습니까?
어린양입니다

어린양하면 우리에겐 주님이 떠오릅니다. 바로 그가 그 산에서 나타났다 이말입니다.
모리아가 ‘나타난다’는 뜻이 있다고 이미 말씀드렸죠.
과연 그곳에는 어린양이 나타났습니다.

그곳은 지금의 예루 살렘성내 회교성지인 황금사원이 있는 장소이고
과거에 성전이 있던 장소이며 우리의 주님 역시
바로 그 모리아산중의 한 언덕 해골곳에서 돌아가셨던곳이며
다윗시대에 여호와의 사자가 멈추어섰던 곳입니다.

정말로 여호와 이레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기 위하여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이삭을 대신해서 죽으시기 위하여 나타난 어린양처럼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의 어린양!
오늘은 바로 그분의 부활절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껏 기쁘하고 감사해야할 날입니다

9.초대교회에 대한 몇가지 오해

초대교회에서는 몇가지의 민간에 잘못알려진 속설 때문에 기독교도들이 크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로마는 다신교 국가입니다. 그 수많은 신들가운데 유대교의 하나님이나 예수님 정도 더
추가한다고 해서 뭐 크게 별다를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신들에 대해서도 관대했고 죽은 황제들은 하늘의 신이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유독 기독교에 대해서는 그들은 철저한 증오로 일관했고 핍박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그랬는지.

바로 잘못 알려진 몇가지 속설때문입니다
로마인들은 기독교도들이 어린아이를 잡아서 신에게 바치는 인신공양의 풍습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집회장소에서 사람을 잡아서 고기를 먹고 피를 마시며 집단 혼음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이정도면 아니 이중에 단 한개라도 저지른다면 그건 이미 종교의 차원을 넘어서서 박멸해야할 쓰레기집단, 광신집단입니다
바로 그런 오해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끊임없이 로마인의 미움거리와 당국의 박해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10.오해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 말이 나게된 배경은 간단합니다
오늘 본문처럼 이삭을 바치려 한 이야기가 와전된 것입니다 .
또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시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은 내살이요 피다 . 이것을 먹고 마심으로 나를 기념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람들은 그로부터 성찬식을 베풀며 이것이 우리 주님의 살이요 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심지어 천주교에서는 이것은 눈에는 비록 빵과 포도주로 보이지만 사제가 축도하고난 다음에는 실제로 빵과 포도주로 변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제가 서있는 상앞에 황금빛 그릇에 빵을 썰어놓고 포도주잔을 벌여놓았습니다.
멀리서는 그게 빵인지 포도준지 알 수 없습니다.
단지 멀리서 듣기로는 이것이 누구의 살과 피라고 하고 이것을 먹는자는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는답니다.
그리고는 그걸 먹고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무슨무슨 형제, 자매라고 부르니
제3자가 봐서는 저것들이 사람의 살과 고기를 먹고 아무나 보고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걸로 봐서는 집단 혼음을 하는 사악한 것들이구나 하고 생각지 않겠습니까?

11.부활의 재현
우리주님의 죽으심은 참 놀라운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놀라운 일이며 사람으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다시 하늘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신 기적적인 이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걸 믿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합리적인 마음으로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우리가운데 내주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십니다
성령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부활과 죽으심과 성찬에 참여하고 감격하며 슬퍼하게 하십니다
한쪽에 피가 뚝뚝흐르는 예수님의 살을 잘 썰어서 접시에 담아놓았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그분의 피를 따로 받아서 포도주잔에 따라놓았습니다
그리고 그걸 먹어라고 하십니다
그걸 마시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너의 죄가 사해지고 죽음이 너를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사망의 권세를 이기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피묻은 손으로 우리를 그분이 준비하신 만찬에 초대하십니다
채찍으로 만신창이가 되신 몸으로 그래도 우리를 보고 웃으시며 우리를 이끄십니다
옆구리에 피가 흐르는채로
그 못자국과 창자욱에서 피가 흐르는 채로.
‘이걸 먹고 마셔라
그리고 내가 주는 영생을 누려라
그리고는 나가서 나의 명령을 준행하라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 홍종일 목사 (現 정관영암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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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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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개인적인 이야기이며, 아래부터는 시북군의 이야기 입니다.)

저는 합리성과 효율성이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최단거리, 최적화 같은 말에 매력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끔 스스로가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일단은 비합리적인 (초자연적인) 일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홍해를 갈랐다던가, 부활했다던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다거나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연적인 사건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보려고 하고, 기도하는 것의 소중함과 힘을 믿는 것입니다. 종교를 가지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오래 사는 것을 심리학적으로 생각해 볼 수는 있습니다. 의미 중심의 프레임(세계관)을 가지기 때문에, 사건 중심의 프레임을 가지는 것 보다는, 훨씬 삶을 충만하게 보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 ㅇㅇ같은 일이 일어났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 ㅇㅇ같은 일을 통해서 내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게 있을까? 를 고민하는 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찬식을 보게 되면, 단순히 떡과 포도주를 먹는 형식적인 사건이 아니라, 살과 피를 먹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운명 공동체적인 성스러운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동참하면서 한 가지 질문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가 하루 아침에 성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렇게 조금씩 예수님과 닮아가고자 노력하는 것이고,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성화되어 간다고 표현합니다. 삶이 올바르게 변해가고, 평안함을 그 댓가로 얻는 것입니다. 불안함으로 부터의 해방, 그 얼마나 근사한 삶일까를 한 번씩 상상해 봅니다.

아브라함은 지독한 시험을 받았지만, 그것을 통해서 그의 신앙의 순수성이 인정받았고, 필히 그 후 행복하게 삶을 마무리 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하고,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올바르지 않게 행동하는 것은, 신앙이 없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불평과 원망에 사로 잡힌채 기쁘게 살고 있지 않음을 반성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인 답게 행동하고 있는지 돌아보면서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주는 행동이 조금도 없다면, 사리 사욕에 눈이 멀어 있다면, 그렇게 계속해서 위선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언젠가 떠나실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깨끗한 삶을 향해서 나아가는, 그 한 걸음을 내딛을 줄 아는 기독교인이 된다면, 그러한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면, 비로소 세상은 밝아지기 시작할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 2012. 05.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