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2년6월17일/위대한 결단(열왕기상17:1-16)/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6. 25. 23:49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6월 17일 주일 예배

위대한 결단 (열왕기상 17장 1절 부터)

오늘은 결단에 관한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자 합니다. 사실 이 결단은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결단입니다. 그런데 이 결단이 너무 중대한 결단이기 때문에  위대한 결단입니다.

여러분은 이제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목숨을 담보한 결단을 내린 적이 있습니까?
이 시대는 비상한 결단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또 그만큼 위험한 시대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들은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차가 다닐 수 있는 넓고 잘 닦여진 도로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편리한 것만은 아니며 이 도로와 차들로 인하여 우리의 목숨은 직간접적으로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MS사의 게임중에 윈도상에 자동으로 깔리는 지뢰게임이 있습니다. 언제 어느때 터질지 모르는...
사실 우리의 편리를 위하여 만들어진 차와 도로는 우리에게는 지뢰밭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6.25전쟁때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제껏 교통사고로 죽거나 다쳤습니다.
또 거대한 산업시설과 공장은 어떻습니까?
현대사회에 필요한 생필품들을 만들어 내기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마치 톱니바퀴처럼 일하고 있습니다.
뿐입니까? 그곳에 수많은 안전사고와 공해, 오염 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국민의 1/10이 바로 이러한 사고로 인해서 장애인이 되었고 가정이 파괴되었습니다.

우리가 마실 물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자랄 때 우리는 우리나라가 가장 자랑하는 것으로 아름다운 강산을 들었습니다. 이름하여 금수강산이랍니다. 비단으로 수놓은 강산..........옥빛 물이 졸졸 흐르고 낙엽이 뜨다니는 광경을 우리는 너무 익히 보아왔습니다.
파기만 파면 맑고 깨끗한 물이 쏟아져 나왔고 우리는 이 물을 아무 걱정 없이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런 좋은 물들은 존재하기가 힘이 듭니다.
요즘은 물을 팔지만 파는 생수조차 믿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물을 마시기 위해 정수 장치에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 하지만 결코 안전하지는 않습니다.
또 지나친 우주개발로 인해 대기권은 상처투성이로 찢어졌고 이제 태양은 우리에게 더 이상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피부암과 노화를 일으키는 요인 중의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요즘은 오존 주의보도 있지요.

이 나라의 탄광은 너무 깊이 파들어 가서 채산성이 맞지 않아 폐광된지가 오래고 석유는 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엄청난 석유를 수입하고 소비하며 이것은 심각한 대기오염을 불러 일으킵니다.
당연히 이것은 우리의 수명을 단축시킵니다
쌀은 어떻습니까? 수천년간 우리의 주식이었던 쌀도 농약으로 오염되었고 이제 사람들은 농약을 치지 않은 , 아니 조금 덜 친 유기농산물을 비싼 값에 사먹고 있지만 이것도 믿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유기농의 정의는 ‘출하 전 일주일은 약을 치지 않는다’는 것이랍니다. 이러한 독소는 우리의 몸에 쌓여 우리는 아직 한창때에 원치 않는 질병으로 고통받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특히 좋아하는 아파트는 어떻습니까? 이 아파트의 주재료인 세멘트는 산업폐기물을 태워서 만듭니다. 황당하지요. 석회석을 분쇄해서 만드는게 아니라 석회석에 엄청난 산업폐기물을 섞어서 만들기 때문에 더 이상 이건 ‘돌가루’가 아닙니다. 그래서 발암물질 덩어리입니다. 저는 요즘 한국에 암이 급격히 늘어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이 발암물질 덩어리 세멘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새집의 이런 발암물질들을 없애 주는 산업이 있습니다. 어떤 집사님은 그거하는데 무려 400만원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효과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끝이 아닙니다.

이 나라 아니 지금의 시대는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쌓여있어서 일일이 열거하기가 곤란합니다.
소고기에서 돼지고기, 닭고기, 오리고기 심지어 생선까지 수많은 질병들이 나타나 인류의 삶을 위협합니다. 어떤 학자는 이러한 환경적인 공해가 오늘의 암의 주원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바닷속이나 하상에 발암물질이 퇴적되어서 이게 물고기에게 암을 일으킨답니다. 그러니 이걸 먹는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이건 뭐 총체적인 난국입니다. 믿고 먹을게 없네요.

그리고 이러한 속에서도 제대로 살기위해 우리는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과로에 시달립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일해야 하지만 이런 일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결코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먹고 살기위해서 일자리가 필요한데 문제는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툭하면 구조조정이고 명예퇴직이고... 더 나쁜건 한번 이런 주류에서 떨어져 나가면 다시 주류에 편입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그만 합시다.
일일이 열거하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상 인생이란게 우리가 알든 모르든 간에 불확실과 위기, 시련의 연속인데도 돌이켜보면 딱히 우리의 삶에 목숨을 담보한 결단을 내린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막연히 이대로 있으면 안된다는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자기를 내어놓은 결단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그대로 살아갈 뿐..........한발은 세상에 또 한발은 교회에 우리는 엉거주춤하게 되는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오늘 여기에 우리가 하지는 못했으되 반드시 해야 되는 그런 결단을 내린 한 여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누가복음4:25절에 보면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이 말씀을 하셨지만 저는 이 말씀에서 오늘 전할 말씀의 주제를 찾았습니다.
과연 주님이 말씀하신 이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일까요?

구약시대의 가장 유명한 선지자 엘리야의 기사는 구약성경 열왕기상 하반부에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사렙다 과부의 기사는 17장에 나옵니다.
열왕기상 17:9에 보면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시돈에 속한 ‘사르밧’이 바로 ‘사렙다’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사르밧을 사렙다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란 이름은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엘’이란 단어가 들어가면 하나님과 연관이 됩니다.

1.엘리야와 아합의 대결
디셉사람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기는 이스라엘에서도 가장 악한 왕인 아합왕 시대입니다. 역대의 이스라엘 왕들이 대대로 패역했지만 그 중에서도 아합은 도를 지나치게 악한 왕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6:30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이 사람은 당시 바알 숭배의 본거지였던 이웃나라 시돈(페니키아)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해서는 우상숭배와 세상 쾌락을 본격적으로 즐기고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자기의 궁전을 확장하고 전국에 바알의 산당과 아세라의 목상을 만들어 섬기도록 해서 16:33절에 보면 “그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사실은 바알과 아세라는 나무기둥에 새겨가지고 마을어귀에 세워두었다고 합니다. 이 풍경은 무엇과 좀 비슷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의 옛날 시골마을하고 비슷하지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을 나무기둥에 새겨가지고 마을어귀에 세워두쟎아요.

여하튼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아합이나 정말로 악당이면서도 미련퉁이입니다
악해도 적당히 악해야지 이렇게 표가 나게 악하게 되면 하나님은 바로 징계의 채찍을 드십니다.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큰 채찍을.
아합의 악행을 보다 못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채찍을 드셨는데 바로 가뭄이라는 채찍입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2.왕과 함께 고통당하는 백성들
여러분
원래 이스라엘에는 늦은비와 이른비라는 두 번의 우기가 있습니다. 그리고도 모자란 비는 이슬로 보충합니다. 그런데 비뿐만 아니라 이슬도 내리지 않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것도 수년간이나............사실 이때 무려 삼년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엄청난 기근이 몰려왔습니다.
농사짓는 나라에 농사가 안되면 사람들은 모두 굶을 수 밖에 없습니다.

자, 여러분들 중에 이렇게 반문할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합왕이 악한데 어떻게 백성들이 고통을 받느냐?
그래요. 이건 상당히 모순인 것 같습니다. 왕에게만 채찍을 드셔야지 어떻게 백성들에게까지 고통을 주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아합 왕이 전국에 바알의 산당을 만들고 아세라의 목상을 만들었다는 기사를 보십시오. 비록 왕이 이렇게 산당을 만들고 또 목상들을 곳곳에 세워도 만일 백성들이 그것들을 숭배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별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당하고 목상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극성스럽게 가서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이러한 바알과 아세라 숭배가 계속해서 번성해 가는 것입니다.

사실 북쪽 이스라엘 왕국은 태생적으로 우상을 섬기는 것을 장려하는 나라였습니다. 남쪽 예루살렘 성전으로 하나님께 제사드리러 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북조 이스라엘 초대왕인 여로보암이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 때부터 이스라엘은 대대로 우상숭배의 전통이 확고히 뿌리박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정치꾼들은 결코 백성들이 싫어하는 인기 없는 일은 벌이지 않습니다.
왕들이 통치 목적으로 이런 우상숭배 장려책을 폈더라도 백성들이 싫어했다면 당연히 이런 정책들은 없어졌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좋아하니까 이런 우상숭배가 계속되는 겁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비의 신과 대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논리에 현혹되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긴 이스라엘의 백성들도 당연히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산의 신도 아니고 유목민의 신도 아니고 전쟁의 신도 아니다. 나는 유일한 신이다. 나외에 다른 신을 너희에게 두지마라”

끊임없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와서부터 하나님을 수많은 신들 중의 하나로 여겼고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다른 우상들을 섬기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종교다원주의와 비슷합니다. “모든 종교에는 진리가 있고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는 단지 예수믿는 것이 지름길일 따름이다.” 하하, 재미있지요?
이스라엘은 단지 바알과 아세라라는 특별한 신에게 바로 제사지내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생각한 것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매력적인 신이 아닙니다. 목축을 할때야 소잡는 신이 최고였지만 이제 농사를 짓는 입장에서 비의 신과 풍요의 대지의 신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으로 참신과 우상을 구별하는 눈이 없었고 선지자들의 질책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왕의 말만 들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무고하게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백성들 역시 왕 못지않게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고 노를 격발했기 때문에 보응을 받는 것입니다.

3.왜 하필이면 가뭄인가?
또 하나의 의문은 왜 하필이면 가뭄인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벌하시려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뭄이라니?
솔직히 가뭄이란게 인류 역사상 한두번도 아니고 숱하게 있어왔던 것이기 때문에 가뭄이 들었다고 해서 그게 꼭 하나님의 징계라고 말하기도 좀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상을 섬기면 가뭄으로 징치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었습니다.

바알이 어떤 신이냐면 바알은 번개의 신입니다. 바알의 무기는 번개창입니다. 뇌성벼락이 울리고 번개가 치면 비가 옵니다. 그래서 바알은 비를 내리는 신입니다. 당연히 농사에 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의 땅에서 농사를 지으려고 보니까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바알이란 신이 영험해 보입니다. 비가 중요하지요. 그래서 바알을 섬기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능의 신’으로는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신을 추가로 섬기는 것입니다.
게다가 대지의 신이며 풍요의 신인 아세라도 풍년을 불러주는 신입니다. 그러니 바알과 아세라를 함께 섬기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를 버린 것도 아닙니다. 여전히 여호와도 같이 섬깁니다. 한마디로 다신교가 된 겁니다. 유목할 때는 여호와를, 농사지을 때는 바알과 아세라를. 이런 식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가 가뭄을 준다는 것은 굉장한 충격입니다. 그리고 바알이 그 가뭄을 해소하는 비를 내리지 못한다면 바알은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보다 약한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여러 신을 섬길 필요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만 섬겨도 목축과 농사를 다 지어도 되니까 괜히 여러신을 섬길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알의 실상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가뭄이란 징벌을 택한 것입니다.

4.까마귀를 통한 공급
여하튼 이스라엘에 심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점점 양식이 떨어져 갑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그런 예언을 하고는 이제 도망자 신세가 되어서 요단 동편의 그릿시냇가에 숨게 되었습니다.
참나, 아니 예언해서 그 예언이 그대로 맞아 들어가면 “와 엘리야가 참 선지자다!” 라거나 아니면 “하나님은 굉장한 신이시다” 거나 “바알은 가짜다” 이런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 오히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국사범으로 몰려서 지명수배를 받고 있습니다. 마치 엘리야가 이스라엘에 가뭄을 몰고 온 것 같이 생각이 되어 집니다. 어떤 사람이 개인적인 도술로 삼년반의 가뭄을 들게 할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신입니다.
엘리야는 신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을 전한 것 뿐입니다. 회개를 촉구하기위해서지요. 그런데 회개는커녕 지명수배가 되어서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서 시내라고 되어있지만 이곳은 ‘와디’입니다. 마른하천
즉 우기에만 물이 흐르고 건기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그는 여기서 시냇물을 마시고 까마귀가 공급한 떡을 먹으며 보내게 됩니다.
아마 가뭄이 들었어도 시내 바닥에 웅덩이가 조금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시내가 흘러 가다가 가끔보면 바위들 사이에 그림자가 있고 물이 채 마르지 않고 남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물을 마신 겁니다.

17:6에 보면“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라고 합니다.
좀 우스운 이야깁니다만 여기 보니 까마귀는 아침과 저녁에만 떡과 고기를 날라준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점심은?
굶었습니까? 아니면 아침에 먹다 남은걸로...아니면 사냥이나 과일을 따서?
하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에 두 번밖에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건 지금의 삼시 세끼하고 같은 표현입니다. 즉 굶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루에 두 번 떡과 고기를 까마귀들이 공급해 주는 바람에 그는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나날을 보내었지만 이제 가뭄이 점점 심해져서 마침내 그릿시내의 물도 말라버렸습니다. 여기는 와디입니다. 사시사철 물이 흐르는 시내가 아닙니다.
가뭄이 들면 말라 버립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엘리야가 아합왕을 피해 숨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였습니다. 가뭄에 와디에 물이 없을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아합이 생각할 때는 엘리야가 절대로 물이 없는 그곳에는 숨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단 말입니다
그러나 가뭄이 계속되고
그는 이제 새로운 곳으로 떠나야 합니다. 까마귀가 물은 주지 않았거든요.
바로 이때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국경을 넘어 시돈(레바논)땅의 사르밧(사렙다)으로 가서 유하라고 이야기 하십니다.

5.적의 심장부로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말해놨으니까 너는 그곳에 가기만 하면 된다”
참 좋은 말입니다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가 아니라 이방나라! 바알과 아세라를 가장 극렬하게 섬기는 나라!
지금 아합의 왕비 이세벨이 공주로 있었던 나라에서 바알의 선지자도 아니고 하나님의 선지자가 그곳 사람의 도움으로 피난생활을 하게 되었단 말입니다. 좀 웃깁니다. 이스라엘의 신은 여호와입니다. 시돈의 신은 바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신의 선지자가 이스라엘에서 살 수 없어서 바알신의 영역인 시돈으로 피신해서 살아 갈려고 합니다. 엘리야가 도망가는 이유는 사실은 바알신을 반대해서지요.
그는 그의 이름처럼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다’라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나의 하나님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라는 걸 증명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원래 바알과 아세라신을 가지고 온 것은 밧세바입니다. 그녀는 시돈의 공주였고 아합왕과 정략결혼을 한 것입니다. 시집오면서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므로 바알신의 본고장이라 할만한 사르밧에 엘리야가 피신한 것은 상대방의 의표를 찌르는 행동입니다.

자기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부 바알을 섬긴다고 정신이 없고, 자기네 백성들은 자기에게 어떤 것도 주지 않았는데 오히려 가장 바알숭배가 성한 시돈에서 하나님은 엘리야를 먹여 살리실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것도 부자가 아니라 과부에게 가서 그녀의 공궤를 받으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니 안 갈수도 없고..........과부는 당시에 지독히 가난한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일을 할 남자가 없으니 얼마나 먹고 살기가 힘들겠습니까? 그러니 항상 성경에는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라는 말이 나오지요. 더욱이 가뭄이 심해서 중동전체가 고통받고 있습니다.

6.최후의 결단
사르밧에 가서 보니 성문에서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고 있습니다. 직감적으로 저 여인이구나 하고 느낀 엘리야가 그 여자에게 다가가서 물 한그릇을 청합니다
사실 물 한잔 주는 것은 근동지역의 신성한 의무처럼 여겨 졌습니다.
물론 가뭄으로 물이 귀하기는 했지만 레바논 산지의 샘들은 아직 수원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레바논에는 헬몬산이 있잖아요. 산위에 만년설을 이고 있는.
그래서 그 여인은 물 한잔을 공급합니다.

솔직히 이 정도 친절도 굉장한 것 아닙니까?
가뭄에 물 한잔!
그런데 엘리야는 이 물을 마시고는 뻔뻔스럽게도 떡 한조각을 달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떡 한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기가 치지요. 이정도로 뻔뻔스럽게 요구를 당하면 당하는 사람도 좀 황당할 겁니다. 이렇게나 당당하게 자기에게 요구하다니!
그런데 사실은 엘리야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바로 그 과부인지를 시험하기위해 한 요구입니다.
첫 번째는 통과했습니다. 물한잔을 가져 왔거든요.

두 번째는?
과부는 뭐라고 합니까?
일단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하고는
“나는 떡이 없고”
여기서 떡은 ‘마오그’로 표시되었는데 아주 작은 빵을 의미합니다.
그리고는 “가루 한 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랍니다. 그리고는 “만들어 먹고 죽으리라”
이 정도되면 포기해야지요
엘리야의 요청을 받은 이 여인은 정말 진실된 태도로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스라엘의 신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합니다.

아들과 더불어 최후의 만찬을 먹고 죽으려 하는 여인에게 그 마지막 가루로 빵을 만들어 가지고 오라면 그게 어떻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엘리야는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두려워 말고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나를 위하여 떡 하나를 만들어 가져오고 그 후에 너희를 위하여 만들라”고 이야기 합니다
정말로 뻔뻔의 극치입니다.
일단 나부터 주고 그 다음에 너희들이 만들어 먹으랍니다. 마지막 가루라는데, 이거 먹고는 이제는 아들하고 죽으려고 한다는데, 세상에 그걸 나에게 먼저 가지고 오라고 하다니!

하하
아니 자기만 입이고 과부하고 아이는 주딩입니까?
너희 사정은 내가 모르겠고 일단 내가 배가 고프니 나에게 먼저 빵을 가져오고 그 다음에는 죽던지 말던지 알아서 해라 !
이 말 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도 자기가 너무 했다는걸 아는지 그 과부에게 한가지를 제안을 합니다. 뭐 유혹이라고 할까요?
여호와가 비를 내리는 날까지 가루하고 기름이 떨어지지 않을 거랍니다.
지금 통속에 가루하고 병에 기름이 떨어지려고 달랑달랑 하는데 그게 앞으로 비가 와서 다시 농사를 지을 때까지 결코 떨어지지 않을 거랍니다.

자 이제 이 여인은 심각한 고민에 들어 갑니다
만일 이 사람의 말이 맞다면 자기들은 이제 죽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그 보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희생은 실제로 너무 가까이 있고 눈에 확실히 보입니다.
최후의 만찬을 포기해야 합니다.

지금 한끼를 먹으면 혹시 그 다음에 또 무슨 기회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하루에 한끼 먹던 시대니까 이거 한끼 먹으면 내일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내일 또 어떤 좋은 일이 생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사람의 말만 믿고 마지막 빵을 줘버리면 이제 자기하고 아들은 꼼짝없이 굶어 죽는 겁니다.

배고픔이 극에 달하면 사람에게는 예의염치가 없어집니다. 오로지 배고픔을 면하기 위한 욕망 만이 존재할 뿐.
이성이니 문화니 사상이니 하는 건 다 그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사흘 굶어가지고 남의 담 안넘는 사람 없다’는 속담도 있는 판에.
이제 여인은 최후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상이라고 제시한 저 사람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의 믿음이란 것도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 때문에 보이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가 더 큰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바알이 비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비를 내리는 것일까?
만일 저 사람이 사기꾼이라서 마지막 빵을 저사람이 먹어버리고 “배째라”고 하면 도데체 자기들은 어떻게 될까?
차라리 쓸데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보상을 바라지 말고 있는거라도 확실하게 챙기는게 좋지 않을까? 
등등

이 여인은 심각한 고민과 갈등에 빠졌습니다
최후의 결단을 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네 역사를 보면 역대의 통치자들은 심심하면 ‘구국의 결단’을 운운했지만 단 한사람도 자기가 내렸던 그 결단이 구국의 결단이었던 적은 없습니다.
단지 정권유지를 위한 권모술수였을 뿐.
그러나 이 여인은 자기의 목숨을 건 최후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마침내 여인은 결단했습니다.

7.나는 여호와를 선택했다
“그래 선택했어
난 저 사람의 말을 믿는다”
그러고는 마지막 가루로 빵을 만들어 먼저 엘리야를 주고 보니까 아직도 가루가 좀 남았습니다. 기름도 좀 있고.
다시 빵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먹었습니다. 또 다시 통을 뒤져보니 가루가 있습니다. 또 다시 빵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다시 배가 고픕니다. 또 다시 통을 뒤져봅니다. 아직도 가루가 남아있습니다. 또 다시 빵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마침내 그 마을사람들에게 가루가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절망입니다.
그래도 사르밧 과부의 통에는 가루가 남아있습니다. 기름도 그대롭니다.
신기합니다.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과부가 가장 부자보다 더 오래도록 가루를 가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부자가 된 것입니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하나님의 가루통과 기름병을 소유한 부자가 된 것이지요.

이 소식을 듣고 사르밧 과부의 친척들이 몰려 옵니다. 그 사람들에게도 빵을 만들어 먹이고 베풀었지만 역시 가루가 그대로 있습니다. 이제 모든 이들이 사르밧 과부의 가루 통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이제 이 성에서 가장 부자입니다. 너무 너무 가난해서 성문 앞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던 이 과부는 이제 이 성의 생존을 책임지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여인의 결단이 옳았던 겁니다.
이 여인의 결단은 자기와 아들의 목숨뿐만 아니라 친척들의 목숨까지도 살린 진정한 ‘구국의 결단’이 된 것입니다. 이 여인이 베푼 한덩이 떡은 수만, 수십만 덩이의 떡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제 여호와는 더 이상 ‘당신의 하나님’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아니고‘ 나의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에는 결단이 요구되어 집니다
그리고 축복에는
희생이 요구되어 집니다.
기독교는 항상 그렇게 발전해 왔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희생함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
그것은 소망이며 믿음입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내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가 나를 사랑하심을 믿고
그가 사랑하는 나를 이대로 두지 않으실 거라는 소망을 가지고
환란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그렇게 기독교는 확산되어 왔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놀라운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놀라운 축복에는
놀라운 결단이 요구되어 집니다
그것은 자기희생이 수반됩니다.
축복만을 바라고
자기를 희생하지 않으려는 것은 진정한 기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자기 아들까지 내어주셨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
놀라운 꿈을 꾸고 계십니까?
하나님 앞에 결단하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앞에 헌신하십시오
눈에 보이는 희생은 비록 크지만
보이지 않는 축복은 더욱 더 클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때의 그 결단이 나와 모두를 구하는 ‘구국의 결단’이었다고
‘위대한 결단’이었다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더 늦기 전에 결단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6월 17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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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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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빅터 프랑클의 말을 빌려오고 싶은 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최악의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도「그 상황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자유」, 그것만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나고, 어떤 경험을 하든지, 거기서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취할지 결정하고, 결단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 입니다. 빅터 프랑클이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다가 가족들이 모두 죽고, 모든게 무너져 내리는 절망을 경험했음에도, 삶이 끝날 때까지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유지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가 미쳤다? 그가 실성했다? 아니면 그는 신적인 인간이다? 아니요. 제가 생각해본 답은 이렇습니다. "그는 결단한 인간이다" 라는 점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겠다" 라고 결단을 내린 인간은 대단히 근사하고 멋있습니다. 실제로 수용소에서 빅터 프랑클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자신의 어떤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을 보고 인간성에 대한 커다란 감동을 했다고 합니다. 한편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노예처럼 부리고, 기계 부품처럼 여기고, 일회용품처럼 생각하는 환경. 그런데, 반대편에서는 극한 환경 속에서도, 사람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이토록 근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마음의 감옥을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밖에 안돼 라는 절망감. 앞이 안 보인다는 절망감. 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우리의 결단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늘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마음 먹은 것을 이루어 나가는 존재라는 의미 입니다.

나누어 주는 것, 함께 살아가는 것을 생각해봐도 그렇습니다. 솔직히 나만 잘 먹으면 배도 부르고, 하고 싶은 것도 더 누릴 수 있고 좋아 보입니다. 가뜩이나 가난할 때는, 더욱이 누군가를 돕는 다는게 무척이나 용기가 필요하고, 괴로움을 참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렇게 남을 돕는 것이, 이웃에게 기쁨을 선물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유쾌한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몇 달전부터 월급의 3% 남짓의 아주 작은 돈을 남을 위해서 써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워낙 작은 금액이라, 솔직히 거의 표도 안 나고, 이것도 도움이 되기나 하는지 창피하기도 하고...... 그런데 결국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갚아주시고, 채워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당연한 속담하나 덧붙이자면, 콩 심은데 콩이 나지, 콩 심었던 자리에 냄새나는 산업폐기물이 나오지는 않겠지요? 혹여 스스로의 모습이 냄새나는 폐기물이 되지 않을까... 늘 조심스러운 자세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만 받던 사람이었던 터라,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들을 하면서 살아갈 수 없을까? 를 고민하고, 또 고민합니다. 욕심같아서는 생계도 해결하면서, 마음껏 글도 써보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에 빅터 프랭클의 이야기를 꺼내봤습니다. 결국 어떤 태도로 살아갈 지는 지금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라는 것입니다.

하루 10시간 가까이 일하고, 계속 해서 일이 돌아가도록 신경을 써야 하는 지금의 상황. 허무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서,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다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인생의 순간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겠다 싶은 상황 에서조차, 위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용기. 그러한 근사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열망하는 무더운 여름의 늦은 밤입니다. / 2012. 06.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