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6월 24일 주일 예배
세상의 가치를 거부하라 (다니엘1:8-17)
여러분
맑은 날 서울의 산에 올라본 적이 있습니까?
도시는 온통 희뿌연 스모그에 잠겨 있습니다. 우리가 도시안에 있을때 전혀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했던 짙은 공해물질이 우리도시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산정상에까지 육박해서 두꺼운 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치 그 속에서는 조금도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 스모그는 몸에 엄청나게 나쁩니다. 그러나 평소에 우리들은 그 속에서 아무런 저항없이 숨쉬며 태연하게 잘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신경쓰고 걱정해야 할건 공기보다 더 많기 때문이지요. 만일 우리가 산위에서 도시를 내려다 볼 기회가 없었다면 그렇게나 유독가스들이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알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그 유독가스에 내성이 생긴 것입니다. 제가 처음 서울에 갔을 때 저는 일년간 기침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서초동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한달간 목이 아파서 고생했습니다. 편도선염. 그러다가 차차 기침도 목이 아픈것도 덜해져 갔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이미 우리는 사탄이 주는 세상가치에 함몰되어서 그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치명적인지도 모른채 죄악의 짙은 스모그안에서 정신없이 이리뛰고 저리뛰고 있는 가여운 존재들입니다.
만일 우리의 영안이 뜨여졌다면 도저히 살 수 없는 죄악된 가치 속에서 우리는 정신없이 앞만을 바라보고 달려갑니다.
우리는 흔히 슈퍼맨을 꿈꿉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돈도 잘벌고 악기 한두개는 기본이고 3-4개 국어를 예사로 구사하는 그런 사람
때론 남의 슬픔에 눈물흘릴 줄도 알고 반면에 강할때는 지극히 강하고, 맡은바 직무는 반드시 완수하는 그런 사람을 꿈꿉니다
적당히 유머스럽기도하며 진지할땐 한없이 진지하고 세상의 모든 지식과 지혜를 통달하고 신념과 용기로 무장한 위에 겸손과 사랑으로 띠를 두른 그런 사람
마치 만화 주인공 같은 사람
교회에서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몸부림치며 때론 그 사랑 때문에 눈물흘리고 , 또 자기보다 약한 이웃을 사랑하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상의 불의에 맞서 싸우면서도 맡은바 직무는 반드시 완수하는 그런 사람
하나님과 사람에게 동시에 칭찬받는 사람
믿음의 슈퍼맨
우린 때로 그런 사람이 되기를 꿈꿉니다
불가능한것 처럼 보입니까?
그러나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지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이어내려온 신앙의 선진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니엘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다니엘이라고 하면 남조 유다의 포로로서 신바벨론제국 느부갓네살왕의 꿈을 해몽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뿐입니까
벨사살의 연회때 벽에 쓰여진 글씨를 해독해서 총리가 되었고 페르시아의 다리오왕때는 총리로 봉직하면서 사자굴의 시련을 이겨낸 믿음의 용사로도 위명을 떨친 그야말로 믿음과 지혜가 뛰어난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자그마한 나라의 포로민으로서 대제국의 재상을 역임하며 이스라엘백성들의 바벨론유수를 끝내게 하는데 큰 공을 세운 다니엘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한마디로 경이적인 존재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니엘도 처음부터 그 놀라운 다니엘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역시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다니엘이 다니엘이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전506년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는 금은으로된 예루살렘의 성전 기명들과 다수의 왕족과 귀족 포로들을 잡아서 바벨론으로 돌아갑니다.
이때 다니엘도 그의 세 친구와 함께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15세에서 20세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포로의 신분으로 적국의 왕궁에서 3년간을 교육받고 왕실의 종교자문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습니다.
당시 신바벨론은 여러 이민족의 왕족이나 귀족의 자제들을 포로로하여 자기나라의 학문과 술법을 가르켜서 이민족 통치의 자문을 맡기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바로 다니엘이 그 중의 한명으로 선발된 것입니다.
그는 바벨론의 왕궁에 끌려가서 제일처음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다니엘이란 히브리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심판자’란 뜻입니다
그런데 적들은 그에게 ‘벨드사살’이란 이름을 주었습니다
‘벨신이여 그의 생명을 보호하소서’
벨신은 바벨론의 주신입니다
바벨의 벨을 주목해 주십시오
그는 지금 타의에 의해서 엘과 벨사이를 왔다갔다합니다.
왕궁에서는 각국 각 민족들에게서 포로로 잡아온 사람들 중에서 용모가 뛰어나고 재주가 있고 지혜와 지식을 갖춘자를 잡아와서는 3년간 갈대아의 학문과 술법을 가르칩니다. 유대인들은 원래 갈대아인의 후손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왔거든요. 이제 그 후손들은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 온 것입니다.
그 동안에는 왕궁에서 공급하는 음식을 먹게 됩니다
포로치고는 지극히 행운아임에 틀림없습니다
옛날의 포로는 지극히 불행했습니다
눈을 뽑거나 엄지발가락, 엄지손가락을 자르는 것을 그래도 양반이고 심지어는 산채로 수십만명을 생매장하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신바벨론의 이전에 근동의 패자였던 앗수르는 포로들을 잔인하게 다루기로 유명했는데 너무나 잔인한 정책 때문에 이민족의 반감을 사서 멸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러한 역사 때문에 신바벨론의 포로정책은 비교적 유화적이었던 것 같지만 그래도 포로를 잡아갈때는 코를 꿰어서 끌고 가거나 아니면 윗입술을 꿰어서 끌고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식으로 끌고 가면 편합니다.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니까?
그리고 강제로 노역을 부과하거나 황무지를 개간하는 일들을 시킨 것을 본다면 다니엘의 처지는 엄청난 특혜일 것입니다. 지옥에서 살아 나온것과 같은 은혜입니다.
더구나 왕의 보호하에 포도주와 왕의 진미를 먹고 왕궁에서 3년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쉽사리 찾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반적인 정황과는 달리 다니엘에게는 큰 고민이 있었는데 바로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어야 한다는 규정입니다.
그는 지금 포로의 신세입니다.
비록 죽음을 면하고 끌려오기는 했지만 언제라도 그 하나쯤 죽이는게 전혀 큰일은 아닙니다.
더구나 포로의 신세임을 생각한다면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 너무나 분에 넘치는 것입니다.
조금의 불편함이 있더라도 충분히 감내할 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율법에 ‘우상에 드린 제물을 먹지 말라’는 그 규정을 어길 수 없었습니다.
당시 바벨론왕궁의 모든 고기는 일단 우상에게 제물로 드렸다가 그걸 물려서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육식을 한다는 것은 곧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비록 강제로 여기에 끌려와 벨드사살이라 이름하지만 나를 보호하시고 심판하시는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다 나는 다니엘이다’
마침내 친구들과 중지를 모으고 환관장 아스그나스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자기의 사정을 설명하고 간절한 자세로 왕의 진미 대신에 채식만을 하게 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사실 요즘은 웰빙 바람이 불어서 채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었지만 그래도 채소만 먹는다는건 분명 비정상적인 일이며 영양상 극히 불합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청은 만일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하나냐,미사엘,아사랴)가 채식만을 하고서는 그 여파로 몸이 마르고 힘이 약해질때 왕실의 법도를 어긴 죄목으로 사형까지 당할 수 있는 큰 일인 것입니다.
이를 허락한 아스그나스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사사로이 왕이 명령을 무시하여 왕의 재산인 포로들의 가치를 떨어뜨렸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관장은 만일 다니엘에게 절묘한 방법만 있다면 그의 청을 매정하게 뿌리치지는 않을 뜻을 비추었습니다. 이 환관장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신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위한 동역자를 발견할때가 있습니다. 그가 믿음의 형제도 아니고 나와 아무런 연고가 없음에도 희한하게 나를 도와주는 그런 일을 가끔씩 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힘을 얻은 다니엘은 술맡은 관원에게 찾아가서 열흘 동안만 우선 자기의 말대로 채식을 하고 그렇지 않은 다른 친구들과 비교해 보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열흘을 채식만 하면 살이 빠집니까?
글쎄요.
여기서 열흘은 반드시 10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단순히 충분한 날짜라는 말입니다.
어찌되었던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들은 이 내기에서 채식만을 한 자기들이 육식을 겸한 자신의 친구들보다 더 튼튼하고 윤기가 나는 모습을 보임으로 마침내 왕궁의 산해진미 대신에 채식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교육을 이수하고 3년뒤에 왕의 앞에서 면접시험을 치를때 아름다운 것이 그들의 외모만이 아니라 그들의 중심까지도 아름다워진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의 숙련도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습니다.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준행하기위해 자기의 목숨도 내어놓자 하나님 역시 그에게 놀라운 것으로 주셨습니다.
다니엘은 특히 이러한 지식뿐만 아니라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게 되는 놀라운 능력까지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의 신앙운동은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지 않는 소극적인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소극적인 저항 때문에 목숨이 위협받을 수도 있지만 분명히 그는 적극적으로 뭔가를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가치를 거부하는 것 역시 무언가 적극적으로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강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세상의 가치에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가치관으로는 해서는 안되는 어떤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 큰일을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무언가를 하지 않음으로서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
자기의 목숨을 내걸고 환관장과 교섭한 다니엘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재능을 더하신 것입니다.
주동자와 가담자는 요즘도 처벌에 차별을 두지 않습니까?
이 사건의 주동자는 다니엘이고 만일 이 사건이 발각되어 처벌을 받는다면 다니엘은 틀림없이 사형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더 큰 위험을 무릅쓴 다니엘에게 더 큰 재능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들의 작지만 큰 의거의 결과를 볼까요?
20절에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이 사람들 십배 참 좋아하지요
그러나 신출내기들의 지혜와 지식이 기존의 종교자문들보다 엄청나게 뛰어났다라는 건 사실입니다.
나중에 이들은 출세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왕왕 이러한 슈퍼맨을 꿈꾸지만 슈퍼맨이 되기위한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물론 전혀 하지 않는다는건 아닙니다만 철저하지 못하다고 해야합니까
아니면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주는 가치를 초월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주는 가치에 자신을 기속시킵니다.
그 옛날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 하나냐, 미사엘,아사랴는 자기의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지마라
포도주를 마시지 마라
사실 오늘날로 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옛날에는 목숨을 걸만한 큰일이었다는게 웃깁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이에게는 이것은 자기의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큰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혹시나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려고하는 이중적인 태도는 없습니까?
세상이 주는 가치를 거부하면 나혼자 왕따가 되고 결국에는 낙오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술을 한번 예로 들어볼까요?
솔직히 술 자체는 가치 중립적인 것입니다.
고기가 가치 중립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면 왜 기독교인은 술을 마셔서는 안됩니까?
술이 악해서요?
글쎄요, 옛날 예수님은 포도주를 물처럼 자주 드셨고, 칼빈 역시 그의 지하실에 포도주를 가득 채워두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술을 가지고 난리를 칩니까?
그건 우리나라 기독교의 선진들이 그것에 기독교라는 가치를 부여했기때문입니다.
예수믿고 새사람이 되는 표로 우리의 신앙선조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문제를 볼까요?
주일도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살기가 어려워요.
회사에서 야유회가 있는데 참석하지 않으면 찍힙니다.
시험을 치는데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교회를 어떻게 가겠어요
내가 쓸 돈도 없는데 이웃을 돌아볼 틈이 어딨습니까?
그건 내가 나중에 돈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면 그때 생각해 보지요.
지금은 너무 바빠서 하나님의 일은 못하겠네요.
직장 상사가 회식자리에서 술을 한잔 권해서 받아마셨어요.
제가 처음엔 안마실려고 ‘저는 예수믿어서 안마십니다 하니까 야야, 목사도 마시더라고 해서 마셨어요’
그리고 제가 술을 안마시면 술맛이 달아난답니다.
분위기 깬다고 하도 그래서 제가 한잔 마셨습니다.
‘목사님은 모르셔서 그렇지 회사생활하려면 술을 안 마실 수 없습니다.
술을 하루에 한잔씩하면 몸에 좋다는 신문기사도 안보셨습니까?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된단 말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이해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술문제는 오히려 작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총으로 리더가 되려고 하십니까?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리더가 되고 싶습니까?
이 풍진세상에서 그분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싶습니까?
그러면 세상이 주는 가치를 거부하십시오
세상사람들이 사탄의 잣대로 우리를 조롱하고 희롱하는것이 두렵습니까?
이게 돈이 되느냐? 이게 얼마짜린데
모든걸 돈으로 환산하는 버릇이 우리도 모르게 몸에 배였습니다.
이게 사탄의 가치입니다. 사람들을 이걸로 조절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주는 가치는 사탄의 잣대로 세상을 잰 것입니다.
여기에는 욕망과 경쟁만이 있고
남보다 나를 우선하는 이기심만이 있으며
목적을 위하여는 수단방법을 가리지않는 합목적적 사고만이 판을 칩니다.
그들은 내세를 믿지 않기 때문에
살아생전에 쾌락을 즐기는 것을 제일로 치며
이것을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요소, 젊음과 돈을 모든 가치에 우선합니다.
세상의 가치는 육체를 사랑하며 물질을 숭배하고
정신적 가치와 영생을 부정합니다.
하나님의 잣대로 잰 하나님이 주는 가치는 세상이 주는 가치와 구별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사랑을 강조하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나를 버리게 하고
물질에 초연하여 정신적인 가치를 숭상하고
영혼과 영생을 믿으며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추구하며
천국본향을 그리워합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가치는 별로 인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해놓고는 그 길을 가는 자가 적답니다.
그러나 그 길이야말로 우리를 삶의 길로 이끄는 길이며 우리로 하여금 다스림을 당하기보다 다스리는 자가 되게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잣대로
하나님이 주는 가치로 그들을 이끌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래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만든 가치로 저들을 이끌 리더가 되십시오.
저들의 가치에 나를 기속시켜 그 가치에 지도받는 수많은 사람중의 한사람이 되지 말고 내가 하나님의 가치로 저들을 줄을 세워 나의 지도를 받게 하십시오.
그것이 어렵다고요?
그것이 말처럼 쉬운것이 아니라고요?
맞습니다.
그러나 리더도 아주 소수에 불과합니다.
모든 이들이 다스릴 수 없고 지도받는 이 없이 많은 이들이 지도할 수도 없습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법
리더가 그렇게나 적고 지도자 되기가 그렇게 어렵기 때문에
그것이 가치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그것의 처음은 세상이 주는 가치를 단호히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때 나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조소와 불이익과 위협은 어떻게 합니까?
하하, 그것이 걱정입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그런 일을 당한다면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역시 우리에게 그렇게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두렵다면 그냥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사십시오
그래서 세상의 가치에 지배받는 수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리더가 된다고 나서도 곤란한 일이니까
크게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적당히 타협하고 사는 것도 별로 나쁠 것도 없다는 생각이듭니다.
그러나 나는 절대로 평범하지 않고
나는 결코 이대로 남의 지배를 받고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과감하게 세상의 가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의 가치 속으로 온몸을 던지십시오
그분에게 올인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과연 나를 위해 역사하시나 아니하시나 살펴보십시오그리고 그러기에 이미 나는 너무 늦어버렸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크게 실수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80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비하면 아직 엄청나게 많은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린 아직도 늦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아직 많은 기회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 가치를 좇아 정신없이 이리뛰고 저리뛸수록 우리는 지쳐가고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며 우리에게 남겨진 기회조차 조금씩 잃어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현실이 비록 암울하고 답답해도 좌절하지않고 하나님만을 바라고 앞으로 나간다면 반드시 광명의 날이 오리라는 꿈말입니다
언젠가는 이 땅의 건강한 젊음들이 이 세상의 구악과 폐습을 몰아내고 이기와 욕심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이끌고 가는 날이 오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 가치를 거부하고 죄악의 짙은 스모그층을 벗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가치로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경쟁하려 하지말고
하나님의 가치로 세상을 이끌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그것은 즉각적이며 단호한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거부하라’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6월 24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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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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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오늘날 우리는 기술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즉답"하지 않으면 태만하다라는 평가를 듣기에 이르렀습니다. 전화를 잠깐 못 받을 수도 있지만, 왜 못 받았냐고, 놀랍고 당혹스럽다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기술은 우리를 24시간 감시할 수 있고,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스모그 같기도 합니다. 스마트한 세상에서 스마트를 끊고 산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지요.
고백합니다. 저는 인터넷 동호회를 아주 오랜기간 (무려 10년!) 운영했었기 때문에, 매일 이메일과 쪽지를 확인하고 덧글과 피드백들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은 고단한 일상과 노동 속에서 하루 하루 보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중단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고립과 단절감이 몰아치고, 미칠 것만 같았는데... 결국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세상은 그대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깨달았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삶을 과제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매일 밤 숙제처럼, 산더미처럼 수북하게 쌓여있는 과제가 나를 짓누른다고 생각한다면, 그 얼마나 무거운 짐입니까? 그런데, 다들 그렇게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을 떠안고, 자식을 위해, 가족을 위해, 회사를 위해, 인생을 허비하다가, 병을 얻어서 허무하게 생을 달리하곤 합니다.
그래서 삶을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그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는 사르트르의 말이 있습니다. 예컨대 의자는 의자로서의 본질인 앉는 기능이 망가져서, 다리가 몇 개 없다고 칩시다. 그 의자는 대부분 폐기되거나 재활용됩니다. 부서진 의자로서는 존재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다리가 하나 없어도, 그는 존재가치가 있는 인간입니다. 직장이 없어도 그는 당연히 인간이며, 사랑받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져도 그는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인간입니다. 우리는 너무도 당연히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근사함은 바로 "선택하는 존재", "생각하는 존재" 로서의 인간입니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동물의 경우 자신이 보이는 세계가 전부로 생각하고, 그 세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담 넘어서 무슨 세상이 있는지 상상할 수 있는 힘이 동물에게는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지식보다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발언한 것은, 인간만이 가지는 어떤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그 너머"를 생각하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시스템은 좀 거칠게 말하면 단순합니다. "가치 있는 것은 귀하다. 이것은 희귀하고, 좋고 편안한 것이다. 돈으로 매기려면 엄청나다, 한정품이라 몇 개 없다. 어쩔꺼냐." 뭘 어쩝니까? 죽어라 그것을 가지려고 발버둥 치다가 대부분 사람들은 절망하고, 가진 사람들은 허무함에 함몰되거나, 어떻게든 남이 알아줘야 의미가 생기므로 자랑하기에 급급하고... 그렇게 인생을 소모해 나갑니다.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을 거칠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가치 있는 것은 항상 주변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가치롭고 의미 있게 인생을 살 수 있다. 바로 지금부터, 바로 오늘부터 가능하다. 물론, 조금은 어렵고, 귀찮고, 힘이들 때도 있지만, 매일을 축복처럼 만끽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즐겁고,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생을 선물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많은 돈이 필요합니까? 고급 차가 필요합니까? 한 상에 어울려서 함께 식사하면서 웃을 수 있는 것. 이것보다 즐거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차범근은 인생에서의 행복한 순간으로 팀의 우승도 아닌, 이른 아침에 독일의 빵가게에서 빵을 사서 가족과 함께 둘러 앉아서 식사를 하는게 너무나 특별한 행복이었다고 말합니다.
유명해지면 행복하고, 부자가 되면 행복하고 그럴 것 같지만... 뭐 부자가 되면 조금은 더 삶이 편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 유명해지면, 어쩐지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사람이 듭니다. 아들러가 말한 권력지향의 인간답게 인간은 높은 자리에 있으면 어찌나 기분이 좋아지는지... 순간의 만족(아니 쾌락?)은 주겠지만, 마음 한가득 행복을 안겨주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로또가 맞고, 유명세를 타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쟁에서의 1등은 행복이 아닙니다. 책제목으로도 있는데, 여하튼 행복은 혼자 오지 않습니다. 하하.
이 어지럽고,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에서, 우리의 삶의 의미를 계속해서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태도로 인생을, 하루를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도움이 되고자 하는 진정성을 가지고 삶을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든지 상관 없이, 올바른 일들을 그저 조용하고 묵묵하게 해나갑니다. 그래서 그들을 바보라고 부르면서도 한편으로 존경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치 있는 일에 올인하고, 쓸데 없는 일에 세월을 낭비하지 않는다면, 인생은 조금씩 변화되어 나갈 것입니다. 탁월한 삶의 비밀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의미 있는 일에 헌신하고, 모든 것을 걸고, 삶을 축복과 사명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사람은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하면서 하루를 마감합니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마지막 남은 빵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바보같은) 그런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는 모든 것을 빼앗아가도 단 한 가지만은 빼앗아갈 수 없음을 증명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하고, 욕하면서 하루를 처절하게 보낼지, 주어진 일들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보다 나은 인생의 근사함을 그려나갈지, 오늘을 그저 욕망 속에서 보낼지, 아니면 인간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멋진 삶을 택할지, 이것을 결정하는 태도는, 결코 앗아갈 수 없는 인간의 자유며, 선택이며, 경이 라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의 명언을 조금 각색해 봤습니다.
생각하면서 삽시다. 기술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 지 생각하면서 삽시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면서, 의미 있는 일들을 해나가면서 살아가기에도, 인생은 참 짧으며, 감동적이며, 벅찬 것입니다. 거대 자본과 황금빛 문명은 우리에게 많이 벌어서, 멋진 것들을 사서, 근사한 인간이 되라고 달콤하게 속삭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웃음, 과일 한 접시, 소박한 일상의 기쁨, 그리고 이것을 함께 나눌 사람. 그것 말고는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음을.... 늘 겸손한 마음을 위해 노력하고, 낮은 자리를 생각하고, 그렇게 걸어가면서, 마음이 풍요롭고 즐겁게, 그렇게 신나게 살기를 소망합니다. / 2012. 06.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