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2년7월1일/로뎀나무 아래서(열왕기상19:1-8)/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7. 5. 16:09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7월 1일 주일 예배

로뎀나무 아래서 (열왕기상19:1-8)

새파란 하늘과 저 멀리 뭉게구름이 피어 오르는 들판에서 한 사람이 한그루 나무 아래에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찌는 듯한 바깥의 더위와는 달리 나무 그늘아래는 제법 시원합니다. 사방은 고요하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목가적인 풍경입니까?

한낮의 무더위를 피해서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서 잠이 든 사나이는 만성피로에 젖어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입니다. 돈을 많이 벌면 정신없이 바쁘거나 아니면 나쁜짓을 해야 하고, 여유를 가지면 시간은 있는데 쓸 돈이 없고.......근심과 걱정이 끊이지 않고 소음과 공해로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마음의 여유를 잃어 버렸습니다. 시계가 발명되고 난 다음부터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게 됩니다. 그다음부터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하고 우두커니있는 일을 죄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두커니인지 아닌지는 이일이 돈이 되느냐 아니냐로 결판납니다.

휴가라고 가는 곳은 수많은 사람들이 바글대고 바가지가 판을 치며 몸도 마음도 지치게 만들 뿐입니다. 그래도 휴가철에 가지 않을수가 없는게 다른때는 쉴 수가 없습니다. 직장생활 도중에 연가를 함부로 신청하다가 눈밖에 나서 짤릴까봐서 연가를 신청하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휴식이 많이 늘어났지만 아직까지도 OECD국가들 중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길다고 합니다. 여하튼 애들만 신나는 거지요.
참, 애들도 신나지는 않겠네요. 요즘 초등학생들도 공부한다고 학원을 얼마나 다니는지 자유시간이 없을 정도입니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판에 한낮에 나무그늘 아래서 잠이든 이 사람, 우리가 이 사람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이 광경은 정말 부러운 광경입니다. 요즘처럼 여유가 없고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나무 아래 누워서 낮잠을 잘 수 있다면 정말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소위 말하는 ‘팔자’가 좋아서 나무 그늘아래서 자고 있는게 아닙니다. 그는 지금 온몸의 진이 다 빠져서 그대로 낙망하여 나무 아래 앉아 있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멋진 광경은 아닙니다.

그는 지금 한그루 로뎀나무아래 앉아서 낙망하여 잠이 들었습니다.
지금 이 남자가 낙망하여 로뎀나무 아래에서 자고 있다고 해서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왕도, 왕의 군대도 그를 당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으로는 그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인 엘리야입니다. 기도로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오게 한 위대한 선지자! 기도로 죽었던 아이를 다시 살려낸 선지자...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을 한 그가 지금 너무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로뎀나무 아래서 자고 있습니다.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진멸한 역전의 용사인 그는 견딜 수 없는 무력감에 젖어 모든 의욕을 잃고 로뎀나무 아래서 자고 있는 것입니다.

까마귀가 날아와서 그에게 떡과 물을 공급해 주었고 주의 천군천사가 그를 옹위하는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는 이제 그 모든 힘과 의욕을 잃고 텅빈 들판 로뎀나무 아래에서 잠이 들어 있습니다.
왜 일까요?
사실 그는 바로 직전에 엄청난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하나님과 바알 둘 중에서 누가 참신인가를 겨루는 내기를 했는데 여기에서 그가 이기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거든요. 그래서 그는 바알의 선지자 450명을 성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기손시내에서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바알선지자들이 판을 치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승리였습니다. 게다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다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만을 섬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데 상황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1절과 2절에 보면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일과...이세벨에게 고하니...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년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같게 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같게 하겠다’는 말은 너도 저들과 같이 죽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당연히 ‘저들’은 바알의 선지자들입니다. 하루만에 너를 받드시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말을 들은 엘리야는 이제 정말 지치고 힘이 빠집니다.
그렇게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낸 엘리야도 보통 사람인 모양입니다. 해도 해도 안되자 마침내 그는 무력해 집니다. 사람들을 피해 죽으려고 사막 깊숙히 들어가서 한그루 로뎀나무 아래 누워서 죽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과 몇일전까지 펄펄 날았던 엘리야가 급속히 기력이 빠지고 침울해 지는 것을 보고 요즘 일부 학자들은 엘리야가 요즘말로 하면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이죠. 보다 정확하게는 조울증.
이스라엘의 왕 아합은 아내인 이세벨에게 엘리야가 행한 일을 다 이야기 했습니다. 당연히 바알은 선지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해 가지고 하늘에서부터 불을 내린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뿐입니까? 삼년 육개월 동안 계속되던 가뭄이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란 신에 의해 해결된 것도 들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여기서도 엘리야의 활약은 숨길 수 없습니다. 게다가 엘리야가 무시무시한 괴력을 발휘해서 마치 무공의 고수처럼 자기의 허리를 동이고 아합 왕의 마차 앞에서 무려 25km나 되는 먼 거리를 달린 사실도 들었을 것입니다. 왕의 마차 앞을 달려서 가다니! 마치 슈퍼맨같습니다.

이와 같은 엘리야의 활약은 마치 삼박자가 골고루 맞아서 더 이상 완벽할 수 없으리만큼 완벽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자기의 선지자의 체면을 세워준 적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불까지 내려주었고, 그의 기도를 들어서 비도 내려주었지요. 심지어 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죽었던 아이도 살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뿐입니까? 육체강화 능력까지 주어서 사람들앞에서 체면을 세워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전해 들은 이세벨의 반응은 하나님에 대한 감탄도 아니고 엘리야에 대한 존경도 아닙니다. 그녀는 다만 복수심에 불타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하는 선전포고만을 할 뿐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힘이 빠진 겁니다. 엘리야의 생각에는 이정도 했으면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고 자기를 존경하고 나라의 스승처럼 존중받으리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엘리야가 실망하게 된 겁니다.
사실 사람들은 지독한 고집쟁이입니다. 자기 눈으로 보지 않은 것은 결코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심하면 자기눈으로 보고도 자기가 논리적으로 납득하지 못하면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마치 헛것을 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세벨은 남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이제 왕과 왕비와 싸우는데 지쳐버렸습니다. 자기를 보호해 주지 못하는 대중들에 대해서도 실망했습니다. 자기의 말을 듣고 바알의 선지자들을 죽이며 자기를 영웅처럼 따랐던 대중은 금방 변덕이 났는지 왕과 왕비의 이와같은 선전포고에 대해서 전혀 반발하지 않습니다. 이정도면 국민들이 나서서 데모라도 하고 엘리야를 보호하자고 난리를 칠 만도 한데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상황을 이렇게 몰고가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실망했습니다. 힘이 빠집니다. 남은건 이제 도망뿐입니다.

왜냐면 왕비 이세벨이 엘리야를 내일 이맘때에 공개처형하겠다고 공표했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는 잔인한 여인입니다. 물론 엘리야 역시 잔인한 사람입니다. 그도 바알의 선지자들 450명을 죽였고 이세벨 역시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인 여인입니다. 그러므로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말은 단순한 위협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세벨은 엘리야를 잡기위해서 군대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야가 목숨의 위협을 느껴서 도망을 했겠지요.
3절에 보면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돌아가는 형편을 보니 자기가 잡혀서 죽겠기 때문에 그는 도망길에 오른 것입니다. 사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국교인 여호와신의 선지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나라의 스승인 국사나 왕의 스승인 왕사로 존경과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 만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바로 그 여호와 때문에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고 마침내 인간들의 사회에서 떠나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피곤해서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든 것입니다. 사람들이 싫습니다. 그렇게나 자기를 따르며 구국의 영웅인 듯이 설치던 대중은 하루만에 변덕을 일으켜 그의 처지를 방관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 편안하고 목가적인 풍경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치열한 전투와 생명의 위협을 피하여 도주하는 절박하고 위험한 상황 속에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보통 이스라엘의 국토를 이야기할 때 브엘세바에서 단까지라고 이야기 하는데요 그는 지금 브엘세바에 가서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혼자서 사막 안으로 하룻길을 걸어 들어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쪽 국경선까지 와서 사환을 머물게 하고 혼자서 사막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그가 신변정리를 모두 끝냈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이제 엘리야는 싸우기가 지겹습니다. 더 이상 기도도 하기 싫고 하나님의 능력도 필요없습니다. 여호와가 참신이라는 것이 밝혀 지기만 하면 상황이 변할 줄 알았습니다만 여호와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그가 참신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삶을 그만두고 죽기를 각오합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무도 없는 광야의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본문에 나와있는 엘리야입니다.

이 사람을 보면 얼마전까지 그렇게나 활발하고 열렬하게 하나님을 위해서 일했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왕과 이방신의 선지자들 앞에서 보여주었던 위엄과 추상같은 기개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부질없어 졌습니다.
엘리야는 자기의 사역을 포기하고 목숨까지도 포기하기위해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사막 속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하나님, 이제 미련도 없습니다. 죽고 싶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무엇 때문에 자기가 살고 있던 북이스라엘에서 남쪽 유다를 관통해서 마침내 유다의 남쪽 경계선 밖의 광야길에 와 있습니까? 엘리야는 요즘 말로 하면 종교 개혁가입니다. 사람들의 다신론적인 삶에 일침을 가하고 왕의 악행을 규탄하며 그렇게 원칙을 지키고 약자를 보호하려 한 혁명가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지금 느낄 수 있는 것은 열정도 식어버리고 의지도 없는 무기력한 모습입니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광야속으로 들어와 로뎀나무 아래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실제로 엘리야는 아합앞에서 놀라운 이적을 행하기 전에 무려 삼년반을 사르밧에서 숨어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해서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아니라 페니키아의 한 촌에서 숨어 살았습니다. 그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나 오랜 시간을 숨어 살았습니까?
최후의 영광스런 승리를 위해서 숨어 산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삼년반이 차면 찬란한 영광을 맛보리라는 기대와 희망이 있었기에 그는 도피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그릿시냇가에서 까마귀로부터 물과 떡을 공급받으며 살때도 그는 용기백배했습니다. 그 스스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이방 사르밧으로 가서 가난한 과부의 집에 숨어 살때도 그는 용기백배했습니다. 세상이 가뭄이 심해서 모두 죽어 가고 있을때에도 하나님이 그를 먹이시고 살리시는 것을 그가 느꼈기 때문이지요. 이제 때가 차면 그에게 놀라운 영광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놀라운 이적, 그리고 놀라운 힘, 역사가 모두 일어 났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영광이 아닙니다. 그에게 돌아 온 것은 지명수배입니다. 그것도 사형을 위한 지명수배. 그래서 그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를 뚫고서 내려와 지금 유대광야 로뎀나무 아래 혼자 누워 죽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때 그는 정말 죽기를 원했을까요? 아니면 또 다른 하나님의 놀라운 도움을 바라고 있었을 까요?
글쎄요, 사환도 없이 혼자 광야길을 간 것을 보면 죽으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죽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 뭔가 하나님에 대해서 억울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삶에 미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죽은 사람도 살린 엘리야는 이제 죽음이란 것을 달관 했을까요?

로뎀나무는 결코 큰 나무가 아닙니다. 우리가 길가를 가다가 로뎀나무라는 간판이 달린 건물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뭔가 있어 보이쟎아요. 그 아래에 사람들을 포근하게 품어 줄 것 같은.
하지만 로뎀나무는 실제로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멋진 그늘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다 자라봐야 겨우 키가 2-3m정도에 불과하고 대개는 한1m정도의 키인 관목입니다. 욥기에서는 대싸리라고 번역할 정도입니다. 싸리나무 아시지요. 거기에 콩이 열리는 나무라고 생각하시면 좋습니다. 이파리 대신에 바늘같은 잎을 가지고 있는 나무라고 하기는 그렇고 풀도 아닌 것이...한국으로 치면 싸리비의 재료인 싸리나무를 연상하시면 될 겁니다. 조금 더 큰 정도의...

그러므로 로뎀나무라고 해서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푸른 초원위에 거대한 나무, 푸른 이파리가 있는 그런 나무를 생각하면 정말 큰 오산입니다. 그러나 사막한가운데 한국에서 보듯이 멋진 나무가 자라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물이 없쟎아요. 아마 로뎀나무도 물이 없는 곳에서 산다고 죽을 지경일껍니다. 사막 한가운데 나무가 있다는게 어딥니까?
그러므로 로뎀나무는 분명 엘리야에게는 엄청난 위안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도 최소한 누워있으면 그늘은 어느 정도 되니까. 그러나 엘리야가 누워있는 곳은 결코 오아시스가 아닙니다. 야자수가 자라나고 물이 넘실거리는 풀밭이 아닙니다. 단지 한그루 로뎀나무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나무를 벗아나면 찌는 듯이 내리쬐는 광야의 햇볕뿐이기 때문에 그는 지금 지쳐서 그 작은 나무 아래 앉아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에게 하는 말이 뭡니까?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조상들이 죽었던 것처럼 저도 다만 하나의 시체로 돌아갈 따름입니다. 저는 한계를 체험했고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도 없습니다.” 이런 말이지요. 그에게 임했던 놀라운 성령의 역사는 진정 굉장한 것입니다. 인간세상에서 두 번 다시 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인간의 역사 어디를 봐도 기도해서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왔다는 기사는 없습니다.
십여년 전에 한국에 가뭄이 크게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전국의 용하다는 도인, 무당, 승려들이 자기가 비를 내리게 하겠다고 달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성공하지 못하고 밤사이에 줄행랑을 쳐버렸습니다. 그랬는데 엘리야는 해냈습니다. 그것도 삼년반동안 오지 않던 비를 다시 오게 하는 놀라운 일을.
그러나 그뿐입니다. 사람들이 놀라기는 했지만 그뿐, 엘리야에게 돌아온 영광은 없었습니다. 그는 지금 도망자의 신세입니다. 지명수배자.
그래서 죽여 달라고 , 이제 충분하니까 그만 자기를 죽여달라고 기도합니니다.
그렇게 하나님에게 넋두린지 기돈지 신세한탄인지를 하다가 잠이 들었던 것입니다.

5절에 보니 천사가 내려옵니다. 그리고는 일어 나라고 합니다. 엘리야가 일어나 보니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물한병이 놓여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돌판에 구운 떡이지만. 이건 이스라엘 유목민들의 주식입니다. 먹고 마시고는 힘을 내어서 새로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위해 돌아갑니까? 아니요. 그는 먹고 마시고는 다시 누웠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포기했거든요. 이제 배도 채웠으니까 정식으로 죽을 준비를 해야지요.
죽을려고 하는 그를 천사가 내려와서 격려하고 위로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받아 들일 힘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떡과 물이 그에게는 큰 힘이었겠지만 엘리야의 마음은 이미 죽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천사가 엘리야를 위로하는 모습을 봅니다. 만일 천사가 말로만 위로했다면 우리는 더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말로만 위로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엘리야가 먹을 떡과 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마음이 죽어버린 엘리야는 기력을 차리지 못하고 다시 로뎀나무 아래 누웠습니다.
그런데 놀랍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런 엘리야를 책망하거나 꾸짖은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서 다시 떡과 물을 가져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신기합니다. 보통 하나님은 그렇게 친절하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떡과 물을 먹고 도로 누운 엘리야에게 주의 사자가 와서 또 다시 떡과 물을 먹입니다. 왜냐면 엘리야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의 포기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를 포기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엘리야가 지금 이 시점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호렙산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솔직히 아무데서나 하나님이 나타나셔도 되는데 왜 굳이 호렙산이냐고 묻는다면 저도 할말이 없네요.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곳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아무곳에서도 엘리야를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호렙이 아닌 곳에서 엘리야를 만나셨습니다. 엘리야는 길르앗사람이므로 호렙산에 가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보통 말하기를 호렙산은 시내반도의 끝에 있는 시내산일거라고 주장되어 집니다. 그러니까 지금 엘리야가 있는 곳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곧 죽으려고 인생을 포기하고 로뎀나무 아래 누운 엘리야를 떡과 물을 먹이면서 까지 기력을 찾게 해서 호렙산으로 보냅니다. 호렙산까지의 날이 무려 40일이 걸렸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엘리야가 두 번째로 주의 사자가 준 음식을 먹고는 호렙산까지 무려 40일간을 금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먹고 쉬면서 가도 부족한 광야길, 사막길을 그는 금식까지 하면서 갔다는 말입니다. 과연 그의 한계는 어디까지입니까? 과연 무엇 때문에 그는 금식을 하면서까지 호렙산에 간 것입니까?

사실상 브엘세바에서 호렙산까지는 약 350km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가 이미 하룻길 광야로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면 약 9일정도면 호렙산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무려 40일동안이나 걸려서 호렙산에 도착하는데 이는 그가 금식중이라서 힘이 없어서 일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를 염두에 두고 한 행동입니다. 엘리야는 지금 너무나 절박합니다. 그래서 그 옛날 호렙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던 모세를 본받아서 그 역시 호렙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기 위하여 40일간을 금식하며 호렙산으로 가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의 죄를 속죄하기위해서입니다. 엘리야는 할만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의 죄로 몰살당할까봐서 그에게 속죄의 기도를 드리고있습니다. 아마 이스라엘에 있던 위정자나 왕과 왕비는 꿈에도 알지도 못하고 흉내내지도 못하는 행동을 지금 엘리야는 하고 있습니다. 고독한 가운데서도 엘리야는 지금 하나님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기 전에 하나님을 향한 자기의 절규에 응답해 달라고 몸부림치는 금식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이 주실 말씀이 있으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결국 엘리야는 40주 40야를 걸어서 결국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다시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은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나님을 따라 살 것을 맹세했습니다. 처음에는 솔직히 무서운게 없습니다. 겁날게 없지요. 젊었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겁나는게 없었습니다. 착오는 있을지언정 좌절은 없었습니다. 젊음이 모든 것을 가능케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황금시대가 지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두렵습니다. 왜냐면 이제는 시행착오에서 돌이킬 시간이 없는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난 다음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세상에 나가서 한번 외치면 삼천명이 또 한번 외치면 오천명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것 같습니다. 세상은 나의 외침에 귀기울이고 나는 민족의 큰 스승이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산에 가서 신비한 체험도 했고 세상에 나와서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기도로 고치고 예언을 하고 제대로 된 길을 제시하며 놀라운 체험들을 나눕니다. 하나님이 나만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살기 어렵다고 해도 나는 그분의 보호 속에 있기 때문에 세상사는 걱정도 하지 않습니다. 이제 뭔가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그런데요 실제로 세상에서 막상 주의 일을 해보면 그렇지 않을 경우가 더 많습니다. 막 힘이 나고 열정적으로 달려들다가 갑자기 힘이 빠지고 낙심이 되어서 무기력하게 변하게도 됩니다. 어제까지 그렇게 열심이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입니다. 마치 조울증 같습니다.
실제로 어떤 이들은 엘리야가 조울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글쎄요, 제가 그건 잘 모르겠고 여하튼 우리네 삶이 결코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현실이라고 해야 합니까?
그래서 우리는 항상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있기를 원합니다. 내 몸속에서 성령이 떠나시면 내가 견딜 수 없을만큼 이 세상은 각박하고 무시무시하며 냉혹합니다. 내가 방방 뜰 수 있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셨기 때문이지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한때 그렇게나 잘나가던 엘리야는 죽음을 위해서 그 먼 유대광야깊은 곳 까지 가서 로뎀나무 아래 누웠잖아요.
그곳에서 그는 주의 천사를 만납니다. 엘리야는 행복한 사람이지요. 자꾸 뭘 갖다 줘요. 새도, 사람도, 천사도 자꾸 뭘 가져다 줍니다.
그럼 우리는 불행합니까? 천만에요. 우리 역시 하나님의 공급하심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수많은 까마귀들이 먹을 것을 공급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설마 내가 잘나서, 내가 유능해서 지금까지 내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안계시겠지요?

사람에게는 수많은 위기와 기회가 찾아 옵니다. 인간의 삶이 굴곡이 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의 이치인지도 모릅니다. 항상 순경만 있지도 않지만 항상 역경만 있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역전의 용사도 현실에 절망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막 가운데 로뎀나무 아래 누워서 죽기만을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이 있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주의 천사가 내려와서 떡과 물로 우리를 어루만집니다. 우리의 기력을 돕습니다. 우리가 그걸 받아 먹고도 힘이 없어 도로 누워도 다시금 주께서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엘리야가 기력을 차리고 40일간을 금식하며 하나님의 산 호렙을 향하여 간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만나서 사명을 받을 곳이 있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고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내가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나를 죽게 하지 않으시고 하늘로 사자를 보내셔서 나에게 떡과 물을 공급하시고 나를 어루만지시며 위로하시고 힘을 더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따라 가기가 너무 힘듭니까? 그래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그냥 로뎀나무 아래서 눕고 싶습니까? 세상에 도전하는 것도 지치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도 지칩니까? 다 귀찮고 그냥 이대로 쉬고 싶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와 어루만짐을 기대해 보세요.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피곤에 지친 사람에게 말로만 일어나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너무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나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들 때문에 내가 인생을 포기할만큼 힘들어 할 때 말로만 나를 위로하시며 감동시키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는 나의 삶을 돌아보시고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아마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 누웠을 때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에게 무슨 남은게 있을까요? 모든 것을 포기한 그에게 하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말로만 그를 어루만지고 위로하신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가지고 그에게 오셨지요. 그가 다시금 도로 자리에 눕자 하나님은 사자를 통하여 다시 그에게 떡과 물을 공급하셨지요. 왜일까요?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야 할 것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현실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너무 힘들어 죽고 싶을때가 한두번이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마지막 자비와 은총을 기대하며 혹시나 그가 나에게 찾아 오실까 기대합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봐서는 절망인데 그래도 하나님을 포기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 잘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기를 잘하셨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신 적이 없거든요. 단지 그는 우리를 만날때를 기다리시는 것 뿐입니다. 로뎀나무 아래서 엘리야를 일으켜 세우시고 힘을 주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로 하여금 절망적인 세상에서 결코 절망하지 말고 힘을내어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올 것을 명하십니다. 당연히 호렙으로 가기까지 우리가 버틸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것도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싫고 이미 포기했다고 생각한 이 순간에도 우리는 해야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이 끝날 때까지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삶이 때로는 힘들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람들과 고립된 로뎀나무 아래 누워있다면 하나님은 나를 찾아 오셔서 떡과 물을 주시고 나에게 힘을 얻게 하셔서 일어서게 하실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약속의 장소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이 결코 끝이 아님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 로뎀나무 아래서 쉼을 얻고 힘을 얻어서 다시 일어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가 그러한 로뎀나무가 되도록 만듭시다. 세상에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거대한 교회, 사람들이 많은 교회, 유명한 교회, 아름다운 교회........ 그러한 모든 교회들도 나름대로 귀하고 좋겠지만 우리는 여기서 힘들고 지친 이들에게 쉼과 위로를 주는 로뎀나무같은 교회를 만듭시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7월 1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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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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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사람은 언제 희망을 잃는가? 를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수용소 같은 극단적인 환경을 예로 든다면, 크리스마스나 특별한 기념일에 사람들이 많이 목숨을 잃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는 기대치가 있거든요. 그 때까지만 견뎌보자, 때가 되면 해결될꺼야, 그런 실낱 같은 위태로운 희망에 의지해서 생을 이어갑니다. 그 날을 기대하며... 자, 이제 그 날이 왔습니다. 빰빰 멋진 일들도 있었고, 희망적인 느낌도 어느 때보다 강합니다. 용기도 납니다. 그런데?

현실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마지막 잎새, 그 위태롭던 실낱 마저 툭 하고 끊어집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모든 희망을 뒤로한 채,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한없는 무기력 속에서 삶을 마치는 것입니다. 적고보니 꽤나 슬픈 이야기 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아무리 열심을 내고, 기대를 하고, 최선을 다해도, 그 결과가 내 예상과 전혀 다르게, 처참하게 나오면 사람은 견디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일부 수험생들이 시험지를 매기다가, 울거나, 욕하거나, 생을 달리하는 것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커다란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사람은 아무리 강한 척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매일 사랑받으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약한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홀로 우뚝 서서 철인처럼 강하고 근사한, 초인 같은 삶은... 사실상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먼 이야기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엘리야 같은 사람도 절망하는 것이 사람다운 모습이 아닐까요. 따라서, 이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하나의 희망을 줍니다.

바로, 노력해도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을 때, 실패하고, 실수하고, 넘어지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을 때, 바로 그 때,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그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입니다. 과거 쇼생크 탈출 영화의 한 장면을 묘사해 보겠습니다.

"머리로 생각해 보고 집어치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능성을 바라 보고 계속 계속 하루를 쌓아나가는 사람만이 마침내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듀프레인은 미친 짓을 시도합니다. 벽을 팝니다. 하루, 한 달, 1년, 2년, 3년... 얼마나 팠을까요. 그리고 10년... 15년... 얼마나 팠을까요. 숨 죽이면서 그는 밤마다 벽을 파들어갑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말입니다. 20년이 다 되어갈 무렵, 그는 마침내 반대편을 향해서 탈출하게 됩니다. 그는 더럽고 역겨운 하수구를 기고, 기면서, 마침내 자유를 만끽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의 삶이란 지금 더럽고 역겨운 하수구 즈음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하자면, 멋진 삶이 눈 앞에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앞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고, 기어서라도, 인생을 힘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루에 몇 번씩이나 마음이 무너지고, 가끔은 숟가락을 들 힘조차 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힘을 내야 합니다. 꿈을 향해서, 계속해서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꿈도 없고, 희망도 없고, 목표도 없습니까? 괜찮습니다. 힘을 내세요. 그럼에도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시므로... 노래 한 곡 들으면서 힘을 내세요. 화려한 그 무엇도 없어도 우리는 청아한 목소리만 있어도 아름다움을 알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삶을 꿈꾸면서, 우리 모두 힘을 내어 봅시다. 그리고, 그리고, 계속 걸어가면 충분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