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창신교회 청년부에 계실 때의, 홍종일 목사님 설교문
예수님의 전도방법 (마태복음4:18-22, 누가복음5:1-11, 요한복음1:35-51)
오늘 저는 전도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솔직히 요즘 전도 참 보기드문 현상입니다. 물론 교회에 신입교인이야 항상 있기는 하지만 이미 예수를 믿고있던 교인의 이동말고 믿지 않는 이를 믿게 하는 전도는 참으로 보기 드문 현상입니다.
요즘 교회들이 많이 쇠퇴한 것을 느낍니다. 특히 요즘 교인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고 하는 대형교회들 보면 대게 새로운 신자가 아니라 옆 교회의 신자들을 흡수하거나 아니면 이중 교적자가 많은 형편입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목사의 책임을 통감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예수님은 어떻게 전도하셨나하는 것을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마태복음4장18절부터
예수님이 처음 제자들을 만드실 때 정말 멋집니다
역시 하나님의 아들 답습니다
마태복음 4:18절에 보면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에수를 좇으니라”
엄청납니다
이정도로 능력있으면 전도도 참 할만합니다
길가다가 마음에 드는 남자나 여자가 있으면 바로 가서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이렇게 할 수 있지않겠습니까?
이러면 모든 교회가 다 차고 넘쳐서 수용할 공간이 모자라서 예배당을 새롭게 지으면 이 나라 건축업이 대 호황일것이고 사람들의 일손이 모자라고 그러면 덩달아 사람들의 살림살이도 참 넉넉해질겁니다.(농담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결코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교회도 전도방법을 배운다 전도훈련을 한다 참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전도가 쉽지않다는것만 배울 뿐입니다
그래서 전도에도 은사가 있다
즉 특별한 사람만이 전도를 한다거나 아니면 ‘우리는 도저히 안돼’ 하는 패배의식만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일수록 전도를 안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나만 믿는것도 대단한데 뭐 남까지…
괜히 남에게 우사만 당하지 씨도 안먹힐거야…
부끄럽게 그런 말을 어떻게해
신앙의 자유가 있는데 뭘 구태여 남에게 믿으라 마라 한단 말이야
아니면 예수믿는게 정말 싫은데 어쩔수 없이 믿기 때문에 남들은 안믿어야 된다고 생각하는건지…
뭐 어쨌든 저는 오늘 우리 주님의 멋진 전도모습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참 신의 아들이라 역시 사람들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느릿느릿 해변을 거닐다가 사람을 살펴보고 쓸만하다 싶으면 바로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한마디만 하면 거절하는 사람이 없어요
모든 사람이 즉시로 무슨 최면이 걸린 사람처럼 바로 모든걸 버리고 주님을 따랐답니다.
여러분
과연 그럴까요?
단 한마디에 모든 이들이 아무런 군소리 없이 주님을 따랐을까요?
정말 주님이 그랬다면 우리는 주님에게서 전도하는 법을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도저히 그런 방법을 쓸 수 없으므로.
2. 누가복음5장1절부터
그런데 멋지게 표현된 마태복음과는 달리 누가복음에서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고독과 슬픔 그리고 노력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처음 갈릴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지만 고향 나사렛에서는 사람들의 배척을 받아서 하마터면 낭떠러지에서 떠밀려 죽을 뻔 한적도 있습니다.
‘내가 쟤 아버지하고 친군데…내가 쟤를 어릴때부터 아는데…기껏 목수일을 하다가 어디좀 갔다오더니만…’
예수님도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배척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다른 마을로 옮기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제자만들기 부분을 봅시다
마태복음4:18절부터 소개된 예수님의 제자만들기는 누가복음 5:1-11절까지에 소개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마태복음 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우선 예수님은 해변가를 산보하다가 사람들이 그물던지는 것을 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호숫가에 서서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도라고 하기는 좀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많은 이들이 자기의 깨달음을 이렇게 대중에게 이야기했고 대중들 역시 랍비들 중의 한 명의 설교로 생각하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들이 점점 많이 모여들자 보다 효과적으로 설교를 하기위하여 배에 오르고자 했던것입니다
이때 눈에 뜨인 배가 바로 시몬 베드로의 배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베드로는 아무런 불평을 하지않고 예수님의 말에 순순히 응해서 예수님에게 자기의 배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는 배를 육지가까이 띄우고는 예수님의 설교가 끝날 때까지 듣고 있습니다.
역시 예수님이라서 베드로가 그 권위에 순복한것일까요?
글쎄요, 전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너무 신화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해서 베드로는 순순히 자기의 일 도중에 주님에게 설교를 위하여 자기의 배를 제공하게 된 것일까요?
3. 요한복음1:35-51
이부분은 요한복음에 보면 잘 나와있습니다. 우선 1장35절에 보면” 요한이 자기 제자중 두사람과 함께 섰다가…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이말을 듣고 요한의 제자 두사람은 즉시로 주님을 좇아가는데 이들이 바로 안드레와 요한입니다. 그런데 이 안드레가 바로 베드로의 형제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 바로 베드로를 전도한 것입니다.
42절에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하고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여러분 베드로는 안드레의 전도로 이미 주님의 게네사렛 호숫가의 강화이전에 주님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마태복음에서는 주님이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처음 주님의 제자가 된 것처럼 소개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메시야에 대한 베드로의 오해때문입니다.
베드로를 전도한 안드레는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소개했습니다. 메시야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는 유대를 독립시키고 다윗의 위를 회복하고 그 옛날 전성기때의 영화를 되찾는 사람을 말합니다
다시말해서 정치적으로 해방자요 혁명가이며 위대한 군왕인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베드로도 주님을 그런 사람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예수님에게서는 혁명가의 냄새가 나지 않았습니다 . 단지 병자를 고치는 이적을 행하고 말씀이 조금 특이하다는 정도지 결코 자기가 소망하던 그런 메시야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시금 주님을 떠났던 것 같습니다.
그는 유대의 독립을 열렬히 소망했으며 무력으로라도 그 일을 이루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능하고 혁명적인 군인이고 정치가며 야심가인 사람을 찾았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비록 배를 타고 있지만 언젠가는 독립된 유대왕국의 관리로서 벼슬한자리를 할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예수님은 따라다녀봤자 별로 나올것도 없습니다. 항상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만 하시니……
요즘 말로 하면 교회 나오다가 ‘뭐 교회다녀봐도 별볼일 없네’ 하면서 그냥 교회 안나오는 사람쯤 될까요?
4.다시 누가복음으로
주님은 떠나갔던 베드로를 다시 찾으시고 그 배에 오르신 것입니다. 심방 정도로 보면 되지 않을까요? 앞에서는 집으로 본문에서는 직장으로.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의 명령에 군소리 없이 순종하게 된 것으로 본다면 앞뒤가 잘 맞아 들어갑니다.
본문의 앞에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 들어가셔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잘보면 예수님은 시몬 즉 사위의 요청으로 장모의 열병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4:38절에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이때 이미 주님을 떠났기 때문에 미안해서 주님에게 자기의 장모를 고쳐달라는 청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병이 나은 장모가 수종들었다는 대목은 있어도 베드로가 예수님께 뭐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이게 뭘 의미할까요?
베드로가 처음으로 주님께 왔던 때를 기억해봅시다.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는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표현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잡히실 때 칼로 말고의 귀를 쳐 떨어뜨린걸 보면 그는 무력에 의한 유대의 독립을 열망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평소에도 메시야, 유대를 로마에서 해방시킬 위대한 전쟁영웅인 메시야를 고대해왔던 것이고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말에 두말없이 예수님을 따를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베드로가 생각하는 메시야는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비록 자기 장모의 열병을 낫게는 하지만 그것뿐으로 전혀 메시야다운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떠났고 이제 다시
주님이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것이며 말씀을 마치시고는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말씀을 마치시고”란 표현은 주님이 설교를 모두 마치신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 뜻은 ‘중간에서 말씀을 끊고’ 정도가 됩니다.
즉 주님은 설교도중에 베드로를 돌아보시고는 이적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보십시오”선생이여 말씀에 의지하여…”라고 합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주님을 무어라고 부릅니까?
선생이여
맞습니다
그는 주님을 자기의 주로 부르지 않고 단순히 선생이라고 부릅니다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선생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을 한때나마 떠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말씀은 조금 복잡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자기의 배에 오르셔서 하신 그 모든 설교말씀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그 말씀도 포함되기는 하지만.
처음 베드로는 예수님을 정치적인 해방자, 위대한 혁명가 메시야로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자 그는 주님을 일시적으로 떠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이 자기의 배에서 하시는 말씀을 묵묵히 듣고는 아마 그의 마음속에 약간은 다른 마음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분이 진정한 메시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다시 한번 저분을 믿어보자는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5장6절 7절에 보면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자 자기의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고 합니다
원문의 의미로는 ‘와서 같이 고기를 잡자’ 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때 달려온 동무들이 바로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 사람들은 실제로는 예수님의 이종사촌들입니다. 물론 성경본문에는 전혀 그런 말이 없지만.
그리고 나자 비로소 베드로가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말합니다
선생에서 주로 예수님에 대한 호칭이 달라진걸 보십시오.
그에게 장모의 열병을 고친 것과 고기를 많이 잡은 것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특히 주님의 말씀을 배에서 강제적으로 듣고 난 다음 나타난 기적은 정말로 주님에 대한 시몬의 인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제 그는 비로소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시몬에서 베드로로 바뀌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갈릴리 어촌의 한 어부가 세계적인 대사도가 된것입니다.
예수님과는 이종사촌간으로 예수님을 알고 있었던 야고보와 요한 역시 비로소 예수님을 다르게 인식하게 됩니다. 단순하게 잘난 자기의 친척에서 정말로 이 땅을 구할 메시야로 , 자기의 일생을 맡길 수 있는 자기의 주님으로.
그들에게 예수님은 더 이상 단순한 선생이 아니라 주님이 된 것입니다.
이제 4명의 갈릴리 벳대다의 어부들은 새로운 눈이 열리게 된 것이며 갈릴리를 넘어선 진정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무리 예수님이지만 단 한마디로 사람들을 따르게 하는 장면이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즉 사람들은 의심이 많아서 거듭되는 예수님의 이적을 겪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며 따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친척들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물고기를 가득 잡아서 엄청난 경제적인 이득을 보게 되자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 어부에게 고기가 많이 잡히는 것
이것을 겪고 난 다음에야 그들은 예수님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했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5.그 전에는 무슨 일이 있었나?
그러면 예수님은 과연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이적을 행하실 수 있었습니까?
“허허, 이사람아
하나님의 아들이 그정도 하는건 당연하지
뭘 그걸 새삼스럽게 문제 삼는단 말이야”
여러분 진정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경을 곡해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단순히 예수님의 한마디에 모든걸 버려두고 좇은 것이 아니듯이 예수님이 이러한 이적을 행하기까지는 간단치 않은 과정이 있었습니다.
노력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러면 여러분에게는 상당히 생경하게 들릴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완전한 사람으로.
자 그럼 이전으로 한번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예수님의 어릴 때 기사는 할례를 받으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이후로는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30이 될 때까지 목수일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느끼셨겠지만 요셉의 기사가 뒤에는 나오지 않죠? 그건 요셉이 나이 많아 죽었기 때문으로 생각합니다
(1) 30 전에는 가족을 위해 목수 일을 하시다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목수일을 하시는 모습이 잘 상상이 안되지요. 하지만 그분은 결코 공기만 먹고 사는 신선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을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상상해 보세요.
그분은 오랜기간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일하다가 동생들이 자라서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아도 가정경제가 꾸려진다고 생각한 시점, 그리고 유대의 전통에 따라 30에 비로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전통에 따라 세례요한을 찾아갑니다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서
(2) 공생애 첫번 일은 세례 받으신 것이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당시 죄에 대한 고백과 더불어 행해졌지만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이러한 절차는 생략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당연히 죄를 회개해야 되겠죠
주님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뭍으로 올라오시면서 비로소 하늘아버지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비둘기의 모양으로 그분의 위에 내려오게 됩니다
(3)성령이 임하시다
성령은 세례를 받음으로 자동적으로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주님은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렇습니다. 불세례가 바로 성령세례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반드시 선행하는 것이 죄의 고백입니다. 죄를 회개하고 마음이 깨끗해 질때만이 비로소 성령님이 그 깨끗한 곳에 임하셔서 거할 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성령의 거하시는 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야 됩니다.
(4)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이 부분이 바로 오늘 예수님을 예수님되게한 주 원인입니다. 그분이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비둘기의 형태로 임하신 것에서 그친다면 단순한 신자에 불과했을 것이며 놀라운 이적을 행하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주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유대광야로 가셔서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시며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셨는지 기도하시는 동안에는 육체적인 배고픔도 모르셨다고 합니다
솔직히 우리가 성령에 이끌리어 기도한다면 이럴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몇시간씩 열정적으로 기도하기도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러나 40일을 밤낮으로 기도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금식까지…물도 마시지 않고…그 뜨거운 사막에서…보통일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5)성령충만후에 사단의 시험을 치르다
사람이 배고픔과 영적인 충만의 상태를 경험한다면 우선은 먹는것에 대한 유혹이 있을것이고 다음으로는 교만해질려는 유혹이 기다리게 될것입니다.
배고픔과 교만은 인간이 빠질수 있는 가장 큰 덫입니다.
특히 정신적이거나 영적인 일에 종사하는 자, 자기가 세상사람들을 구제하고 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예외없이 바로 이러한 시험에 직면하게됩니다
즉 인간적인 식욕이 충족되면 성욕으로 이게 충족되면 권력욕으로 다시 명예욕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영적인 교만으로 사람은 끊임없는 시험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험에 이기지 못하면 하나님은 자기의 일을 하도록 허락지 아니하시고 그래도 우리가 억지로 그 일을 하고자 한다면 엄청난 어려움과 시련이 닥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 시련 역시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때가 준비되지 않음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오랜 연단을 거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예수님은 놀라운 역사를 행하는 우리의 주님으로 능력의 공생애를 시작하시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 거저 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와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법칙이기때문입니다
- 홍종일 목사 (現 정관영암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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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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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홍목사님 설교중에도 예수님의 전도방법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2004년 설교에서는 마무리에서 강조하는 지점이, 다른 느낌이 있어서 올려둡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이며, 다니엘도 마찬가지이며, 심지어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갑자기 위대한 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따라서 일확천금, 자고나니 유명해졌다 식의 이야기는 통용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오직 마음을 정하고, 뜻을 정하고, 계속해서 정진하고 노력하는 모습 속에서 인간의 어떤 가치가 빛나는 것이 아닐까 저는 자주 생각합니다. 여담으로 덧붙이자면, 괴테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다 라고 썼습니다. 베드로 역시 믿을지 말지를 갑자기 정하지 않았고, 속으로 계속 고민하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다시말해, 베드로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었고, 그러한 꿈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만나고, 대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고민하지 않는 인생, 방황하지 않는 인생이란, 더욱 위험한게 아닐까, 더욱 교만한 게 아닐까, 종종 경계도 합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베드로의 삶이, 어쩌면 때때로 우리의 신앙이거나 인생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대로 계속 노력하는 모습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이루어 낼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의미와, 자신이 추구하던 꿈을 이룰 것입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 노력하는 것입니다. / 2012. 07.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