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7월 22일 주일 예배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마태복음14:22-33)
바다에 태풍이 불고 있습니다.
파도가 치고 배는 금방이라도 침몰할 듯이 흔들립니다. 배안에서 사람들은 정신없이 이리구르고 저리 구르며 바다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이때 조타실에서는 따다따다 하면서 무언가 무선 신호를 보냅니다.
sos
우리가 영화에서 자주 보는 광경입니다.
도데체 sos가 무엇인데 사람들은 그 위급한 상황에서 끊임없이 sos를 쳐대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조난을 당하기전에 일어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고는 자기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소동하는 백성들을 뒤로하고 제자들을 서둘러 배에 태워서 호수건너로 보냅니다. 제자들을 백성들과 분리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사막에 음식을 차려놓고 자기의 백성들을 먹이는 메시야! 이러한 메시야는 유대인들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이제 바로 그 메시야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백성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려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는데 백성들은 이분이 왕이 되면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배곯지 않고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습니다. 사실상 당시의 유대인들은 항상 굶주림의 위협아래 있었습니다. 물고기와 빵이라는 기본적인 식사도 이들은 하루에 두끼만을 먹는 매우 궁핍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조금 더 부유한 자는 무화과 즙과 꿀, 그리고 포도주를 마시는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물고기와 떡을 배불리 먹는 경험은 매우 진귀한 것입니다.
정치적인 메시야를 꿈꾸는 백성들의 환호 속에서도 주님은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이루시기위해 백성들과 제자들을 분리하시고는 그들을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제자들도 무리들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백성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할 때 오히려 이들을 부추기고 선동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서둘러서 배에 태워서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호수 건너편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셨지만 제자들과 함께 가지는 않으셨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혼자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갈릴리 호수가 잘보이는 주위 산봉우리쯤에서 기도하셨을까요?
갈릴리 호수는 주위보다 매우 낮은 지역입니다. 주위에 산봉우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수리나 떨어진 곳까지 갔을때 바다가 심상치 않습니다.
갈릴리호수는 너무 넓어서 사람들은 때로 바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특히 갈릴리바다는 지형적으로 너무 낮아서 돌풍이 자주 불어서 어부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잔잔하다가 이제 육지에서 수리나 떨어져서 도저히 되돌아갈 수 없을 지경까지 오게 되자 광풍이 몰아치고 배가 흔들리게 됩니다.
헤엄쳐서 가기는 좀 어려운 거리입니다.
처음부터 광풍이 불었다면 제자들은 아예 배를 타지 않았을 것입니다. 태풍에 배를 출항시키는 정신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육지에서 가까운 곳에서 광풍을 만났다면 도로 되돌아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호수의 가운데서 광풍을 만나서 어쩔 수 없는 처지에서 제자들이 지금 애타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불과 한순간 전에만 해도 예수님이 만드실 새로운 나라의 고관이 될 꿈에 부풀어 있었던 이들은 지금 어쩌면 주님을 원망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주님이 아니었다면 배를 탔을리도 없고 , 그러면 지금 이렇게 괴롭게 되지 않았을 것이기때문입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자기들이 잘되는 것을 싫어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도대체 주님은 지금 어디 계신단 말입니까?
주님은 산위에서 밤새도록 기도하시다가 제자들이 배위에서 아우성치며 고통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시 제자들을 구하러 오신 것은 아닙니다. 그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안계실 때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날터인데 혼자서도 그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낼지를 기대하신 것입니다.
마침내 주님께서 제자들을 구하기 위해 물위로 걸어가자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소리칩니다. 제자들은 풍랑으로 어려움을 겪던 때보다 더 놀란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놀라는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십니다.
여기서 ‘내니’라는 말은 원문상으로는 ‘나는 나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들이야 이 말을 들어도 별 감흥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말을 듣는 순간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실 때 하신 말씀이라는 걸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나다’ (에고 에이미)
모세앞에 나타나신 하나님 역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셨거든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제자들은 그 옛날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이 바로 눈앞에 계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나는 사람도 아니고 유령도 아니고 바로 너희들의 전능하신 하나님 바로 그 분이다
지금 우리에게 오신 주님도 바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옛날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났던 바로 그 하나님
갈릴리 바다위를 걸어오신 바로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오셔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은 안심했을 까요?
글쎄요, 성경에는 제자들의 반응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의 반응만이 나옵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그러나 여러분 이 말로 우리는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오는 분이 주님인지 아닌지를 확신하지 못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는 먼저 ‘주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주시어든이란 말은 '과연 주님이시므로'의 뜻입니다. 따라서 이말은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오는 사람이 주님이신가를 시험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예수께서 지금 물 위로 걸어 오신다고 하는 사실과 주님의 명령과 그 능력에 의해 그 자신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 베드로가 '나로 하여금 물 위로 걷게 하소서'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의 '명령'에 초점을 맞춘 것은 그분 자신의 말씀보다 그분의 초자연적 능력을 더 신뢰하는 오류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적은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세우기위해, 교회의 건덕을 위해 주신 것이지 개인의 부귀와 영예를 위해서 주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의해 자신이 그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 위를 걸으라고 하는 허락과 능력이 주어지기를 요구하는 베드로의 행동은 비록 순간적이기는 했지만 주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과 그분에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요청에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 오라고 하는 허락은 대자연에 대한 초자연적인 이적에 대한 허락입니다.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인 베드로가 주님의 허락으로 말미암아 자연법칙을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왜냐면 그 법칙을 초월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거든요. 이 세상의 주인께서 허락하셨으므로 베드로는 물위를 걷게 된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갑니다.
여러분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간다는 이 장면이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나가기 전에 잠깐 우리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번 해봅시다.
어릴때 우리에게 어머니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우리에게 어머니는 세상 그 자체였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것도 어머니는 해주시고, 아무리 힘든 것도 어머니는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어떤 일이 닥쳐도 어머니만 있으면 힘들거나 어렵거나 슬픈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어머니는 우리에게 세상 그 자체였습니다. 어릴때 그래요, 우리가 아주 어릴때 우리에게는 어머니의 얼굴만이 보였지 다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미소보다 더 좋은것, 값비싼 것, 귀한 것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하고도 어머니를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품안에서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씩 자라면서 우리는 어머니도 좋지만 다른 좋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도 어머니를 따라다니려 하던 우리는 이제 어머니와 함께 다니면 재미가 없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더 좋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일단 한번 눈을 돌리고 세상을 바라보자 더 좋은 것들이 어찌그리 많은지!
우리는 어머니로부터 눈을 돌리고 세상의 좋은 사람, 좋은 물건, 좋은 것들에 넋을 빼앗깁니다.
이때부터 우리에게는 부족한 것들 필요한 것들이 많아 집니다. 우리에게는 욕심이라는 것, 욕망이라는 것들이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어른은 생각이 많아집니다. 더 이상 순수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이미 욕심이라는 괴물에 사로잡힌 욕망의 덩어리입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세상과의 고단한 투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어머니가 이 세상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세상의 그 어떤 파도와 바람 앞에서도 안전한 성루였을 것입니다. 그가 오라 하는 한마디는 굳센 보장이었습니다.
그가 오라 하셨기 때문에 그는 흉용하게 뛰노는 파도와 거칠게 뛰노는 바다를 무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배에서 뛰어내려 바다로 뛰어들었는데도 그의 발이 바다‘속으로 빠져들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물위로 걸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자연법칙을 이긴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자연법칙의 지배를 벗어나게 했습니까?
주님의 얼굴입니다.
주님 바로 그 자신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뭡니까?
그렇습니다. 믿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주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법칙이 그를 구속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래도 선뜻 믿지 못하고 배위에 남아 있을때 베드로는 주님을 믿고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파도도, 바람도 보이지 않고 오직 사랑하는 주님의 얼굴만이 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은 세상 그 자체였습니다.
그가 주님의 앞에 있는 한 그는 세상의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었고 부러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걸어서 주님가까이 왔을때 그만 베드로는 주님의 얼굴 대신에 주님의 뒤편에서 오는 거대한 파도를 보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주님과 거리가 너무 가까워졌기 때문에 주님의 얼굴이 아니라 주님 뒤편이 자연스럽게 보이게 된 것입니다.
처음 기적에 놀라던 마음도 어느정도 진정이 되고 위기의 순간이 지나가자 그에게 여유가 생긴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의 눈에 예수님외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서 어느 정도나 걸었을까요?
본문에 보면
30절에 베드로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자 31절에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나옵니다.
즉시 베드로의 손을 붙잡을 수 있을 정도로 베드로가 주님에게 가까이까지 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상당한 거리를 물위를 걸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이때까지 베드로는 물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제법 거리가 떨어진 곳까지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서 왔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의심이 신앙의 자리를 대신했을때 세상이 다시 그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의 눈은 두 개입니다.
그래서 멀리 있는 것은 제대로 보여도 우리가 노안이 되면 가까이 있는 것을 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보기가 더 어려워 집니다.
멀리서 주님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던 베드로는 주님과 가까워지면 질수록 주님의 얼굴 대신에 주님의 배경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주님만이 아니라 주님의 뒤에서 몰려오는 거대한 파도를 보게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이 완벽하게 이루어질때까지 마음을 놓아서는 안되는데 우리는 항상 어느정도 위급한 상황이 지나고 한숨놓게 되면 항상 마음을 놓고 실수하게 되며 집중이 흐트러지게 됩니다. 위기는 이럴 때 찾아 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얼굴에서 눈을 돌려서 거대한 파도를 보고 마음속으로 두려워하는 순간, 신기하게도 그는 다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몸뚱이는 사정없이 물속으로 빠져들어갑니다.
그때 한 말이 있습니다.
퀴리에 소손 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SOS, 우리가 잘 아는 SOS가 바로 이 ‘소손’이란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구원하소서!
또 하나 베드로는 주님과 한발짝 정도로 가까이 갈 때 까지는 주님만을 바라보고 믿음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물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한걸음을 남겨두고 물위에 빠져들어갑니다.
그의 마음이 이미 둘로 나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처음 우리가 아주 어려울 때 우리에게 의지할 이가 주님밖에 없을 때는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고 세상의 격랑 속으로 아무 두려움없이 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어려움을 헤쳐내고 완성될 순간이 되어서 우리가 한숨 돌리게 되면 우리는 즉시 주님이 아니라 주님외의 배경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과 세상으로 분산되는 순간 우리는 걷잡을 수 없이 의심하고 회의하게 되면 이 의심은 우리의 믿음을 깎아 먹게 됩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실패하는 원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을 굳게 잡을 때까지 그가 나를 품어 주실 때까지 주님에게 집중된 시선을 분산시켜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려움을 벗어나서 여유가 생기자 마자 하나님 대신에 인간적인 것들에 눈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주님께서는 즉시 베드로의 손을 붙잡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두가지입니다.
믿음이 적은자와 의심
주님은 베드로에게 손을 내미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여!’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믿음이 전혀 없다는 책망의 말은 아닙니다.
다만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믿음의 질에 대한 책망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왜 주님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하였습니까?
마음이 둘로 나뉘었기때문입니다.
“왜 의심하느냐”라는 말에서 ‘의심하다’는 ‘이중으로 하다’는 말이고 이 말은 ‘두 줄로 잡아 당긴다’는 말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베드로는 그 짧고도 긴박한 순간에 조차도 처음 열심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가장 위급한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한 순간 그만 그의 마음이 나뉘어서 한 눈을 팔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집중을 풀어서는 안됩니다. 끝까지 주님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신이 아니고 공격받을 수 있는 허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눈은 지금 누구를 향해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누구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의 눈은 지금 주님에게 고정되어 있습니까?
그 옛날 우리가 어릴 때 어머니만 바라보고 한없이 행복해 했던 바로 그때 처럼 주님만을 바라보고 행복하고 만족해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주님과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정작 주님만을 바라보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의 어깨너머 세상이 주는 파도를 보고 낙심하고 좌절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물위를 걷는 것을 당연히 여깁니다.
그러나 그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주님의 명령을 준행하고 물위로 뛰어내린 베드로도 물위를 걸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비록 육신을 입고 있지만 하나님을 바라고 세상을 향해 힘차게 뛰어내린다면 비록 우리를 향해 덥쳐드는 거대한 파도와 거친 바람이, 출렁이는 물결이 우리를 위협해도 우리의 육신은 세상을 이기고 물위에 서게 될 것이며 주님을 향해 물위를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세상에 광풍노도가 쳐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까?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몰하는 배에서 끝까지 결단하지 못하고 남아있다가 배와 함께 침몰하려고 합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물위에 서셔서 지금 우리를 보고 오라 하십니다.
우리의 눈에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무저갱의 입구처럼 보이는 뛰노는 바다라도 주님의 허락만 있다면 그곳은 가장 안온하고 튼튼한 피난처가 됩니다.
지금 주님은 나를 의지하고 과감하게 배에서 물로 뛰어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라는 파고를 헤치며 인생이라는 항해를 무사히 마치려고 한다면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적은 기반이나 재산이나 재능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결국 세상의 파고를 이겨내지 못하고 내가 가진것과 함께 바다의 깊음 속으로 침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피할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결단으로 시작합니다.
인간적으로 의지하는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믿음으로 결단하는 것.
내 이성과 내 지식으로는 불가능한 것 같고 , 세상의 관습과 방법을 좇아야 할 것 같을 때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격랑 속으로 뛰어드는 용기.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주님만을 의지하고 인생의 바다로 뛰어드는 결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7월 22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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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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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물 위를 걷는다는 개념은 어린 시절부터 신기했습니다. 물 위에서 떠다니는 소금쟁이 녀석도 신기하고, 백조처럼 우아하게 물 위에 있으려고 열심히 다리를 움직이는 것도 재밌습니다. 잠깐이나마 물 위를 걸어보려는 실험이 TV나 광고에서 나오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압니다. 물 위를 걷는 다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우리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현실 바깥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그래서 어렵기도 하고, 또 중요하기도 합니다. 상상력이라고 해야하나, 창의력이라고 해야하나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의외로 꽤 대단한 면도 있어서, 네비게이션 같이 평면으로 된 것을 보고도 길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에도, 지갑 속, 휴대폰 속의 소중한 사람의 사진을 잠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전환을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작은 믿음"을 갖는 것이 무슨 의미일지 한참을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힘든 길이라도 걸어가는 것이며, 너무 힘들어 지칠 때에는 SOS를 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가장 조심해야 합니다. 살면서 상처 받거나 힘든 경험이 있다면, 그것으로 인생과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처럼 작은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인생을 용기 있게 살아간다는 것과 같은 게 아닌가 합니다.
괜히 이 길을 왔어... 라고 후회할 때가 살다보면 있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인생을 좀 더 바르고 의미 있게 살아보려고 하는데도, 일이 더 안 풀릴 때는 더욱이 그런 기분이 슬며시 생기기 마련입니다. 비록, 그럴 지라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루를 조금만 더 힘내서 보내는 것. 이러한 작은 믿음, 작은 용기를 내면서 살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소박하게 바라며, 짧은 덧붙임 마칩니다. 현실을 넘어서는 눈으로, 열정적으로 산다면, 그 인생이야말로 불꽃처럼 근사한 법입니다. / 2012. 07.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