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2년8월19일/그가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애굽기14:1-18)/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8. 23. 21:03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8월 19일 주일 예배

절망가운데 길을 보라 (출애굽기14:1-18)

성도 여러분
혹시 요즘 하는 일이 잘 안되고 별 신통한 일이 없어서 답답하십니까? 아니면 예수 괜히 믿었다 싶습니까? 아니면 예수 믿어도 별 수 없네 싶습니까?

그런데
혹시라도 우리가 예수를 처음 믿을 때가 생각납니까? 우리나라의 성도들 가운데는 대를 이어 어렸을때부터 예수를 믿는 분들도 있겠지만 당대에 예수를 받아 들인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처음 예수를 믿을 때 분명한 각오와 결단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회분위기상 예수를 받아 들인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가진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 문화와는 전혀 거리가 먼 문화였습니다. 무속과 도교와 불교와 유교를 거쳐 무신론이 만연한 우리나라에서 유일신인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일대 변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먼저 술과 담배를 포기하는 것이었으며 주색잡기를 포기하는 것이었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포기하는 것이었으며 십분의 일을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것을 의미하며 매 주일 오전의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사실 이건 최소한의 양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점쟁이나 무당에게 물으러 가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며 반기독교적 분위기의 사회에서 어쩌면 왕따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단호한 결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뇌물을 받는 것과 주는 것을 거부하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할 것을 선언하는 것이었습니다.

불과 30년전만 해도 우리의 신앙선조들은 이러한 온갖 불이익과 비판적인 사회분위기를 뚫고 주님을 선택한 믿음의 거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의 선진들 덕분에 이 땅의 개신교는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독교는 빠르게 성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쇠퇴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땅의 종교들은 모두 상당한 쇠퇴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빈 자리를 무신론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신에 의해서 옳고 그름이 판단되어지고 선악에 대한 포상과 징벌이 주어지는 사회와 인간이 중심이 되어서 스스로 판단하고 주장하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무신론사회는 원칙적으로 내세를 부정하기 때문에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의 사회가 될 수 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 젊음과 돈이 필연적으로 최고의 가치를 가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전 세계적으로 공산국가를 제외하고는 무신론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우리나라가 전형적인 무신론국가에 해당합니다. 돈이 최고라는 천민자본주의적 가치관과 인간의 옮고 그름을 판단하는 신적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이 합쳐진 사회는 한마디로 지옥입니다. 인간의 탐욕을 제어할 정신적인 지주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사회는 젊음과 아름다움과 돈을 위한 무한 경쟁과 각종 범법과 강간과 사기가 판을 치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러한 사회에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희생할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 열심이 식어 졌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가진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서 우리가 결코 세상에서 승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법도 적당히 어겨가며 , 남의 탈법도 눈을 감고 뇌물을 주고 받으며 , 사람과 사람사이에 좋은게 좋은 그런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엄격한 법을 준수한다는 것은 곧 자기의 손발을 묶고 세상이라는 달리기 시합장에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한때 교인이었던 수많은 이들이 다시금 세상으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교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눈을 떴고 이에 회의를 품고 기독교를 등지기도 합니다. 스스로 교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지상 천국의 모형이라고 하는 교회가 추한 인간본연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하는 일부 뜻있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서울에만 이런 사람들이 무려 20만이라고 합니다. 한6년 전에 그랬으니까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참,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독교를 등지는 가장 큰 이유가 예수를 믿어도 별 수가 없더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처음 주님을 받아 들일 때 그들은 수많은 규제와 양보를 각오합니다. 세상사람들과 척을 질 각오를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희생하고 양보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교회를 떠난 교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으로 기대했던 복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금 세상으로 나가서 세상의 방식으로 세상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러한 전제를 가지고 이스라엘백성들이 출애굽할 때의 기사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처음 애굽을 탈출해서 홍해를 건너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함께하던 수많은 이민족들은 새로운 땅에서 나라의 주인으로 살 꿈에 부풀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는 것을 보았고 그랬기 때문에 애굽에서 노예로 죽기보다 새로운 나라의 주인이 되는 꿈을 좇아 이스라엘사람들은 따라 나온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들은 하나님의 징벌로 멸망 직전에 이른 애굽인들에게서 자기네를 위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신 빌어 달라고 제물조로 , 또는 봉사료로 엄청난 재물을 얻어서 나갑니다.
애굽을 멸한 위대한 신의 자녀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 이들은 애굽땅을 나올 때 애굽인들의 앞에서 대열을 지어 나왔습니다. 여기서 대열은 전투대형으로 나왔다는 말입니다. 오와 열을 지어서 질서 정연하게 나온 이스라엘인들은 애굽인들의 눈에는 마치 여호와의 군대처럼 보였습니다. 어제의 노예가 오늘은 승리자의 모습으로 나가는 것이 바로에게는 모욕적이었습니다.

애굽 모든 가정의 장자가 죽었고 가축의 첫 번 새끼가 죽은 마당에 각종 자연재해로 인하여 작물도 없어지고 사람들은 병들어 있는 애굽에서 군대처럼 당당하게 오와 열을 지어 애굽을 떠나는 이스라엘사람들의 행진은 애굽인들에게는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거대한 철의 군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와 애굽인들은 눈앞에서 떠나는 이스라엘인들을 보고도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들은 오랜기간을 노예로 살아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즉 이들은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데 익숙해 있지 결코 스스로 뭔가를 찾아서 하고 판단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이들은 전쟁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노예는 그냥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고 주는 밥을 먹고 자는 단순한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일을 더 한다고 해서 주인이 잘했다고 칭찬해 주지도 않고 , 수고의 댓가로 임금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일할 필요도 없고 그냥 주인에게 얻어 맞지 않을 정도로만 일하면 됩니다. 밥을 준다고 해서 주인에게 감사하는 노예는 없겠지요? 자기는 일을 하고 밥을 먹으니까. 오히려 주인에게 큰 원망을 할겁니다. 자기를 노예로 부리니까. 이들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다만 오늘의 평안함과 배부름만이 있을뿐.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라암셋 인근에서 바로 동북방으로 길을 잡으면 지중해의 해안길을 따라 가나안으로 불과 열흘만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길로 가면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해야 합니다. 한번도 무기를 잡거나 싸우는 법을 훈련한 적이 없는 노예들이 블레셋의 철병거를 만나면 지리멸렬해져서 싸우기도 전에 애굽으로 도로 돌아가거나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릴것입니다. 그들의 노예 근성을 너무나 잘아는 하나님은 이들을 아무런 적도 없지만 거친 광야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처음 라암셋을 떠난 이스라엘사람들은 숙곳을 거쳐서 에담을 거쳐서 이제 본격적으로 광야로 접어 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탈출행로는 모세 마음대로 정하는게 아닙니다. 모세 역시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라갈 뿐입니다.

그런데 잘 가던 이스라엘 행렬을 하나님이 갑자기 돌이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은 바닷가입니다. 14:2에 복잡한 지명이 나와 있는데 현재의 지명과는 다르기 때문에 학자들도 정확히 이곳이 어딘지는 알지 못합니다. 지금부터 무려 3500년 전의 지명이 지금하고 다를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이 추정한 장소는 현재의 ‘비터’호수 부근으로 추정합니다. 이곳은 지금은 내륙지역이지만 당시에는 홍해의 일부였을 걸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그 바다의 폭은 약3Km일걸로 추측됩니다.

바다로 말미암아 앞길이 막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에 빠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처지에 빠지게 된 것이 하나님이 고의적으로 그들을 이끌었기 때문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백성들이나 모세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아무 생각없이 그냥 따라간 것 뿐입니다. 모세는 시내광야에서 무려 40년을 보내었고 시내산에서 애굽까지의 길을 잘 압니다. 적어도 두 번은 왔다 갔다 해 본 적이 있습니다. 40년전에 시내산으로 도망갈 때 한번, 그리고 얼마 전에 애굽으로 들어오면서 한번 그는 두 번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아는 길로 얼마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잘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갑자기 방향을 되돌려 가지고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끝없는 광야를 지나왔는데 바다가 앞을 가로막습니다.
돌아가면 안되냐고요? 당연히 되지요. 그런데 문제는 물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고통입니다. 돌아갈 걸 왜 왔냐 말입니다. 안그래도 온갖 무거운 짐을 지고 아이들과 노인들과 여자들이 힘들어 하는데 잘 가던 길을 되돌려서 왜 사막을 다시금 돌아가게 만드냐 말입니다.

무거운 짐을 가지고 가는 이들이 물까지 풍부하게 가지고 다니기는 사실상 어렵습니다. 사막에는 물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길잡이들은 다음번에 물을 얻을 곳을 심사숙고해서 가지고 갈 물의 양을 정합니다. 왜냐면 사람의 체력이란게 한정이 있기 때문에 무거운 물을 지고 다닐 수는 없거든요. 게다가 다른 귀중품들 생필품들도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길을 다시 돌아 간다는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의적으로 괴롭히는 것이고 모세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바로에게는 공식적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만일 사막에서 길을 잃고 제사도 지내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면 애굽인들은 얼마나 어이없어 하고 비웃을 까요? 더구나 애굽의 바로는 호시탐탐 자기들을 다시 옭아맬 틈을 엿보고 있는데 이런 허점을 보인다는 것은 안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제 겨우 첫발을 뗀지 얼마 되었다고 벌써부터 시행착오가 일어나고 지도자의 무능이 드러나고 해서 좋을게 뭐있습니까?
사실 사고는 하나님이 쳤는데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인간 지도자 모세를 원망합니다. 모세도 황당합니다. 왜 하나님이 그러셨을까?

우리네 신앙생활도 한번 봅시다. 그냥 우리가 아는 지식으로도 얼마든지 잘 갈 수 있습니다. 아주 아주 큰 어려움에 처하기 전에는 왠만한 어려움은 얼마든지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우리의 진로를 급격하게 되돌립니다. 그런데 그 길의 끝에 나타난건 성공과 행복이 아니라 좌절입니다. 거대한 바다라는 장막이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길에서 가끔가다 이런 일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에게 뭔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우리의 진로를 바꿉니다. 그래놓고는 우리를 내버려 둡니다. 사막과 바다 사이에 내팽겨쳐 버립니다.
엄청나게 황당하고 곤란합니다.

그런데 성경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는 단순히 바닷가가 아닙니다. 곶이나 주변이 거대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그래서 자기들이 들어온 길 이외에는 길이 없는 그런 막다른 곳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 진을 치면 어떻게 됩니까?
도망갈데가 없어서 죽는 겁니다.
모세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애굽의 왕자로, 이디오피아로 원정을 간 그의 어머니를 따라 종군한 전략가입니다. 당연히 그런 곳에 진을 쳤다가 바로의 군대가 뒤를 쫓아오면 큰일 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지만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왜 그곳으로 인도했는지를 설명합니다.

바로의 군대를 유인하기 위해서 랍니다. 바로의 눈에는 바닷가에 진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치 광야에 갖힌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대로 하자 바로의 신하가 이야기 합니다. “저들이 지금 도망을 갑니다. 빨리 뒤따라 가서 저들을 도로 잡아 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하고 바로하고는 생각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가지 재앙으로 바로가 항복하고 자기들을 완전히 해방시켜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는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해진 처소, 즉 광야로 삼일길쯤 가서 몇일 인지는 모르지만 여호와에게 제사를 지내고 다시 돌아올 걸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애굽백성들이 여호와란 강한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자기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재물을 준겁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정상적인 여행로를 이탈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망하는 걸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보통은 삼일거리가 떨어져 있으면 쫓아가서 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도 삼일거리 정도 사막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에 막혀 있게 되자 다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공식적으로는 여호와에게 제사지내기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것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이들이 영영 애굽을 떠날 것이라는 것을 바로도 알고 모세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르던 애굽인들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려고 하다가 바다로 가로막혀서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에 있는 이때 그들을 다시 잡아 오자고 주장합니다. 4,5절에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놓아 보내었는고”하며 후회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처음 대재앙을 맞이하여 여호와의 권능에 눌려서 무조건적인 항복을 한 바로는 이제 시간이 지나면서 눌렸던 기가 살아나면서 자기가 놓친 거대한 재산들이 아깝습니다. 이백만이나 되는 노예들을 다시 잡아 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모든 병거와 특별병거 육백승 그리고 장군들을 거느리고 이스라엘 노예들을 잡으러 가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 애굽을 나올때는 담대히 나왔고 마치 여호와의 군대처럼 오와 열을 맞추어 당당하게 진군해서 나왔습니다.
그것을 보고 애굽인들은 모욕감과 패배감을 함께 느꼈지만 동시에 더욱 깊은 증오심을 가지게 되었겠지요.
그래서 그들은 진퇴양난에 빠진 이스라엘을 보자 병거와 기병을 거느리고 도망 노예들을 잡으러 바닷가에 있는 진으로 갑니다.

한편 이스라엘사람들은 난리가 납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기병과 병거들이 쳐들어 오고 앞에는 도망갈 수 없는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더구나 양옆으로 도망가기도 곤란한 지형입니다. 아마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형이던지 아니면 양쪽은 거대한 절벽이었을 것입니다. 여하튼 이들은 도망갈 길이 없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노예들은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두려움과 하나님과 모세에 대한 원망의 말을 쏟아 냅니다.
모세가 비록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 들은 당사자이기는 하지만 닥쳐오는 위기를 피해 낼 수가 없습니다. 바로의 병거와 기병은 도망치는 포로들에게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대재앙입니다. 이들은 그래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뒤에서는 앞으로 도망을 가고 앞에서는 바다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울부짖는 참혹한 광경이 연출됩니다.
포로들은 뭐라고 모세에게 원망합니까? “왜 우리를 애굽에서 끌어내어서 사막에서 죽게 하느냐? 우리를 버려두라 하지 않았느냐, 애굽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굉장한 사람들이지요. 자기들이 노예로 너무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애굽사람들을 죽이고 열가지 재앙을 내리고 모세를 불러서 마침내 오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셨거늘 이제와서 어려움이 닥치자 그들은 왜 우리를 노예에서 해방시켰느냐며 오히려 모세를 원망하며 불평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거세게 불평합니다. 그게 바로 노예근성입니다. 뭐든지 남탓이고 감사보다는 불평과 불만을 달고 삽니다.
하나님도 원망했겠지요. 그들의 어려움은 하나님때문이니까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뭔가 단호한 결심을 하고 하나님을 따르기로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연들과 절연하고 죄악의 습관을 버리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다짐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 비록 약간 과한 감이 있어도 그것을 통하여 더 큰 복을 허락하신다는 그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따라 살아도 별 수 없습니다. 여전히 살기는 어렵고 일은 안됩니다. 처음 우리가 기대했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예수를 믿기 때문에 닥치는 어려움은 여지없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친지들은 우리가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에미 에비도 없는 불효자로 공격합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자기들과 어울리지 않는 우리들을 보고 동료들은 사회성이 없고 이기적이라고 비난합니다. 술자리와 회식보다 하나님의 법을 우선하는 우리를 보고 분위기깨고 사회성이 부족하다고 난립니다.

안그래도 없는 돈에 십일조를 바쳤지만 특별히 우리가 그것 때문에 더 많은 돈을 버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십일조 만큼 생활비가 모자랍니다. 또 환난은 어찌 그리 많은지.......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많이 나오고 , 설교시간마다 들었던 그 수많은 기적들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후회가 됩니다. 내가 괜히 예수를 믿었구나!

비록 힘들기는 하지만 칼에 죽을 염려가 없고 굶어 죽을 염려도 없고 그래도 목숨을 연명할 수 있는 노예의 처지가 더 좋다고 주장합니다. 그냥 그곳에 있을걸, 걸 걸 걸
이게 바로 노예근성을 가진 우리들이 하는 불평입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죄의 노예로 살았기 때문에 자유민은 권리만이 아니라 의무도 가지고 자기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유민이 되어 본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우리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탄의 세력들을 보고 두려워하며 부르짖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왜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와서 죽이느냐?
그때 모세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그래요, 절대 절명의 순간, 뒤에는 바로의 병거와 기병이 쫓아 오고 앞은 바다로 막혀 있는 그 순간에 우리가 정신없이 부르짖으며 원망할 때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아시고 너희는 가만히 서서 보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길이 없는데요? 그래도 길이 있다. 앞으로 전진!

우리는 뒤돌아 설 수 없습니다. 좌우를 돌아볼 필요도 없습니다. 오로지 전진입니다. 이제 이 바다를 건너면 다시는 애굽군대를 보지 못하겠답니다. 완전한 죄악과의 절연, 애굽과의 절연이 선포되어 집니다.
하나님도 아시거든요.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죄악의 노예로 살았기 때문에 제대로 할 줄 아는게 없다는 것을. 우리도 모르게 어려움이 닥치면 옛날로 돌아가고자 하는 습성이 나온다는 것을.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죄성과 노예근성을 아시기 때문에 사실 우리가 빨리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지름길을 피하여 사막을 돌고 돌아 겨우 열흘이면 들어갈 가나안길을 무려 40년이나 걸려서 가게 하신 것입니다.
걸핏하면 후회하고 걸핏하면 원망하고 걸핏하면 옛날로 돌아가고자 하는 죄악된 우리를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가만히 서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시는 일을 보기만 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도 사실 우리는 위로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바로의 군대는 보이거든요. 세상의 거대한 파도는 보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이 말을 듣고도 우리는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14절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그래요, 우리는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고 싶어서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서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의 군대를 피해 도망가고 싶은데 도망갈데가 없습니다. 맞서 싸우려고 하니까 무기 하나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싸움이란걸 모르고 살았거든요. 남이 지켜주고 남이 명령하고 남이 먹여주는 것을 먹었지 우리가 주체적으로 뭔가를 결정하고 판단하고 행동해 본적이 없거든요.
가만히 안있고 싶어도 우리가 저 거대한 바로의 군대에 맞서서 할 수 있는게 없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죄악의 노예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 나약합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뭐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싸우리라는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너희는 가만히 서서 내가 너희를 위해서 싸우는 것을 보라는 말씀을 지킬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시간이 너무 없다는 겁니다. 지금 곧 우리 위로 바로의 병거와 기병들이 덮쳐와서 우리를 짖밟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던지는 창과 쏘는 화살로부터 피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절대적 불가능의 상황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가 하는 일을 보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일의 결말을 압니다. 홍해가 갈라졌고 그 길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사히 탈출했고 애굽군대는 홍해 바다에 수장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를 건너려고 하는순간에 하나님의 불기둥이 진의 뒤로 가서 애굽군대의 진격을 막았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포로들이 한 일은 소리짖어 부를짖는 것 하고 모세를 원망한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구원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불평하며 원망해도 결국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불기둥이 이끄는 대로 갔기 때문에 그들은 자손대대로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거대한 기적의 증인들이 된 것입니다. 바다가 갈라지고 바다를 마른땅처럼 건너는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위대한 기적의 산 증인이 된 것입니다.

절대 절명의 순간, 도저히 솟아날 구멍이 없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오로지 부르짖기만 했습니다. 모세를 원망하고 옛날을 그리워하는 어리석은 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위대한 역사을 맛본 역사의 산증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애굽인들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바다를 건넜고 본격적인 신앙의 광야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역시 거대한 바다를 앞두고 있습니다. 도저히 솟아날 구멍은 안보입니다. 거대한 세상의 파도가 우리를 삼키려 넘실거리고 뒤에서는 사탄의 세력들이 우리를 집어 삼키려고 우수한 무기로 무장하고 추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너무 미약합니다. 오합지졸도 안됩니다. 무기자체가 아예 없습니다. 철제무기와 병거, 기병으로 이루어진 군대 앞에서 돌맹이와 막대기를 들고 뭘 할 수 있습니까? 힛타이트제국과 근동의 패권을 놓고 싸우던 베테랑들과 노예들과는 아예 비교가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가만히 서서 내가 너희를 위해 어떻게 싸우는 지를 보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요 여기 서서 그가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한번 봅시다. 그가 우리를 위해 어떻게 싸울지 한번 봅시다. 그러나 결코 뒤돌아 가지는 맙시다. 그리고 그의 인도를 따릅시다. 바다가 갈라지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출애굽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여러 족속 노예들처럼 아무런 힘도 없고 지혜도 없고 그냥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그 땅의 주인이 된다길래 땅을 준다길레 무턱대고 따라 온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재앙이 몰려 오는데 우리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지 말라고 해도 가만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냥 서있는 겁니다.
우리가 재앙이 닥쳐올 때 하나님께 우리를 도와 달라고 부르짖은게 아닙니다. 그냥 너무 무섭고 힘들어서  소리친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한 것 뿐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벌주시거나 야단치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단지 하나님을 따라왔을 뿐이거든요. 그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우리를 이끄는대로 따라왔기 때문에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내가 그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어도 이제까지의 나를 보시고는 그냥 나의 위기의 순간에 나를 위해서 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지름길을 놔두고 그렇게 광야길로 우리를 끌고 다니시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요 그는 우리를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혹시라도 우리가 전쟁을 보고 두려워 도망갈까봐서 우리를 그렇게 사람없는 곳으로 거칠고 힘든 곳으로 끌고 다닌 것입니다. 길을 가기 좋은 곳은 사람이 살기도 좋고 그러면 그곳에서 사는 사람도 많은 법입니다.그래서 그렇게 사람없는 곳으로만 끌고 다니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런 것이지요.

우리는 뒤에서 쫓아오는 바로의 군대와 앞을 가로막고 있는 바다를 보고 절망합니다. 그것도 그런 외통수로 몰아 넣은 하나님에 대해 절망합니다. 내 모든 것을 다 맡기고 그의 뒤만 따랐는데 문든 보니 나는 위기의 아슬아슬한 순간을 맞이합니다. 사면초가라고 합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그곳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놀라운 일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할까를 보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전진하라고 하십니다. 과연 모세가 지팡이로 바다를 가리키자 바닷물이 갈라지고 마른땅이 생겨납니다.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서 역사하시는 그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해 봅니다. 과연 그는 나를 위해 이번에는 무엇을 예비하셨을까요? 불가능해 보이는 이 곳에서 그는 과연 나를 위한 어떤 멋진 길을 예비하셨을까요?
그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상상과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기도합시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8월 19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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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오늘도 진솔하게 코멘트를 잠깐 덧붙이자면, 저는 애시당초 주인의식 보다는 노예근성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의식적으로 삶의 주인의식을 가지는 것을 자각해 보려고 하는데도, 매번 돈의 노예, 즐거움의 노예로 얽매여 버립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야구 경기 조금만 더 보고 일을 하자... 라고 다짐해놓고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열심히 야구중계를 봅니다 -_-; 심하게 말하자면, 뇌가 없고 생각이 없습니다. 물론 스포츠를 좋아하거나 책을 좋아하거나 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중요한 일을 제쳐두고서, 즐거움부터 구한다는 것은 책임을 망각한다는 측면에서 올바르지 못한 방법입니다. 뭐든지 중요한 것부터 먼저 하는 게 성취의 비결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른바 노예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이 이해가 갑니다. 한 문장으로, "헐, 이렇게 속아서 당하는구나...", 한 마디로 "배신감" 입니다. 작은 사기라도 당해본 사람들은 알 수 있습니다. 그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 믿고 샀는데, 곧 알게되는 진실 같은 허무함. 현대 사람들이 가장 쉽게 공감하도록 각색하자면, 배송이 곧 온다고 해서 기대감이 절정에 이르렀는데, 막상 뜯어보니 완전 이상한 물건이 들어있더라. 이것이 "배.신.감." 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의 높은 기대치는 부메랑 처럼 뒷덜미를 정확하게 가격합니다. 아무것도 아니던 사람들이 신세계를 꿈꾸면서 하루하루 나아가다가, 막다른 벽 앞에서, 어찌할 줄 몰라서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는 것. 모세에게 속았고, 하나님에게 속았다며, 해서는 안 될 말까지 토해냅니다. "이럴꺼면 왜?" 허무함과 허탈감의 절정에서 나온 표현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살다보면 크건 작건 배신감, 허무함, 허탈감을 맛볼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일을 했지만, 티도 안 나고 조금도 인정받지 못하게 되면, 누구나 금방 우울해 지곤 합니다. 집안일을 열심히 하는 분들이 우울증이 있는 경우도 비슷한 예라고 할 수 있겠지요.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고, 알아주는 이도 없으니, 그저 공허한 마음이 스며들 수 있습니다. 아예,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라도 당하면 더욱 허무합니다. 가장 친한 친구가 애인이라도 뺏어간다면, 혹은 내 뒷담화를 하고 다녔다면, 우리는 내가 헛살았나 싶기도 합니다.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면, 그럼에도, 인생에서 이토록 폭우처럼 우울함과 허무함이 쏟아지더라도,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괴로움은 지나간다는 것이고, 인간은 어떤 순간에서라도 태도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위지안이라는 작고한 중국 명문대 여교수가 있습니다. 30대 초반에 교수가 되었고, 출세길의 최정점에서 말기암 판정을 받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항암치료와 블로그 정도 였지만,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남겼고, 베스트셀러 작가로 생을 마감할 수 있었지요. 출세는 하지 못했지만, 그는 유명해졌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커다란 일을 한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절망적인 환경을 맞이하면 자살이나 극단적인 선택을 고민합니다. 당연합니다. 앞이 캄캄하니까요. 위지안 교수는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에서 자살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를 담담하게 말합니다.

"어떠한 순간에서라도 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나는 내 아이에게 생을 포기한 사람으로 기억되기 보다는, 끝까지 투쟁을 하고, 열심히 암과 싸워나가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설령 인생이 싸우다가 끝나게 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제 기억에 의한 글 인용이라, 원문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인의식이라는 것은 결국 "선택하는 권리" 라고 감히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인의식이 조금이나마 있다면, 투표하고, 선택하고, 이러한 행동들을 통해서 타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노예들은 언제나 "나 하나 바뀐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라면서 합리화합니다. 당연히 그들의 처지는 변하지 않겠지요. 사람들의 시선도 변하지 않겠지요. 그가 살아왔고, 지나왔던 삶을 돌이켜봐도 그의 주변은 변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어쩌면 슬픈 인생이 될 것입니다.

세상이 등을 돌리고, 배신을 당하고, 허무함을 맛볼 때라도, 우리는 냉정하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올바른 선택을 하고, 또한 그 길을 매일 걸어갈 수 있는 용기를 갖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작가 레지넛 브릿의 책제목처럼 "삶은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책 파트에 이렇게 써 있습니다. "나쁜 인생이란 없다. 나쁜 하루도 없다. 다만 나쁜 순간들이 있을 뿐이다. 그 순간을 이겨내라" 나쁜 일을 맞이했습니까. 그 순간만 어떻게든 힘내십시오. 참, 몰랐는데, 레지너 브릿의 책 원제가 "GOD NEVER BLINKS" 라고 하네요. 신은 결코 한눈팔지 않습니다. 네? 지금 책광고 하냐고요. 하하. 아닙니다. 제가 워낙 내공이 부족해서, 이렇게 남의 말을 빌려와서라도 표현을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한 문장. 빅터 프랭클과 위지안이 죽음 그 문턱, 그 마지막 순간 앞에서 얻었던 깨달음.

"인생은 어떤 순간에서도, 선택할 수 있다."

사면초가, 진퇴양난, 앞이 캄캄하고, 하늘이 무너질 때, 할 수 있는 그 길을 바라보고, 묵상하고, 깊이 생각하세요. 그 순간에서도, 우리는 삶을 변화시킬 수고, 누군가의 인생을 더 근사하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산을 옮긴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좋은 것이며,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게 믿는다면, 우리는 산보다도 더 엄청난 것을 옮길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누군가의 인생을 선하고 아름답고 즐겁게 만들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인생은 결국 가능성 입니다. 용기 있게 사세요. 원망하면서 울고 있는다고 해서, 지나간 오늘은 결코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담대함과 평안이 함께 하길 기도하며... / 2012.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