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2년8월26일/마라가 아닌 엘림이다(출애굽기15:22-27)/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9. 4. 23:15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8월 26일 주일 예배

마라가 아닌 엘림이다 (출애굽기15:22-27)

우리는 지금 인생길을 가고 있습니다. 마치 그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그냥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바라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거의 대부분이 사막입니다. 블록이나 돌로 잘 포장되고 차가 위협하지도 않으며 가로수 그늘이 이어지고 중간중간 벤치도 놓여있는 안전하고 아름다운 포도(포장도로)가 아닙니다. 물도 잘 없고 나무도 없으며 너무 덥고 때로는 모래바람이 불고 돌과 흙으로 울퉁불퉁하고 뱀과 전갈과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주 드물게는 강도들이 숨어있다가 위협하기도 합니다. 뭐, 이게 인생길이지요.

때로 우리의 여행길에서 오아시스를 만나지만 우리가 오아시스에서 영원히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가 따로 있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우리가 잠시 쉴 수 있는 오아시스는 우리에게 잠시간의 쉼을 주지만 결코 영원한 안식을 주지는 못합니다. 오아시스는 근본적으로 모든게 구비된 넉넉한 쉼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마라나 엘림조차도 우리의 영원한 목적지는 아닙니다. 그냥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의 조그만 쉼터에 불과합니다.

또한 사막에는 항상 물과 먹을 것이 부족합니다. 또 이동 중이기 때문에 거대하고 화려한 집이나 가재도구는 필요도 없고 가지고 다니기도 어렵습니다. 힘껏 장만해 놓아보았자 다음 목적지로 이동할 때는 모두 다 놓아두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막의 유목민들은 천막을 치고 생활하고 바닥은 카펫을 깝니다. 식기니 가재도구도 몇 개 없습니다. 이동할 때 불편하니까. 우리들처럼 거대한 석조나 콘크리트의 건물에 온돌장치를 마련하지는 않습니다. 가지고 갈 수가 없거든요.

따지고 보면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거대한 부를 쌓아놓고 큰 집을 짓고 살아도 한때뿐 우리가 아버지의 부름을 받아 저세상으로 갈 때는 모두 놓고 가야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지구에서의 여행 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여기가 아니고 그래서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항상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다만 추억과 정만을 남기고 떠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 도중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해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여행길에 대한 평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심판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고 너무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인도자가 있거든요. 이러한 생각을 바탕에 깔고 본문을 이해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던 중에 분명히 목적지라고 왔는데 오히려 더 어렵고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따르기만 하면 내가 다 먹이고 입혀서 너희를 낙원으로 인도하리라고 하셨는데 글쎄요 가보니까 낙원이 아니라 가짜입니다.

보기에는 그럴듯한데 전혀 물도 마실 수 없고 제대로 된게 없습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는 인생이란 광야길을 갑니다. 그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노예들처럼 하나님만을 바라며 그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서 가고 있습니다. 그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실패도 없고 좌절도 없습니다. 물론 때론 조금의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충분히 이겨낼 만 합니다. 또 그가 그정도의 어려움은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래야 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영 아닙니다.

그들이 사흘이나 광야길을 걷고 난 다음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마라’라는 곳은 오아시스인데도 그 물은 써서 마실 수가 없습니다. 백성들은 당장 지도자 모세를 원망합니다. 이것도 웃기지요?
솔직히 모세는 직접적으로는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온겁니다. 그런데 왜 모세를 원망하지요? 그것은 사실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에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막 죽이는 걸 봤거든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원망하려니까 겁이났고 그래서 만만한 모세를 원망하는 겁니다.

삼일 전에 홍해가 갈라져서 마른땅으로 진행한 신비한 체험을 하고 애굽 군대가 바닷속에서 몰살당한 것을 보고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했던 노예들은 겨우 삼일뒤에 원망과 불평을 쏟아 냅니다. 그동안 조금 힘들었거든요. 이 사람들은 노예에서 해방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해방의 감격과 기쁨은 간데없고 벌써부터 사사건건 불만과 원망을 널어놓습니다. 그리고 툭하면 남탓입니다. 이게 노예의 특징입니다. 이제까지 한번도 책임이란걸 가져 본 적이 없거든요. 시키는 대로 하면 되니까 책임질 일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곳은 ‘모세의 샘’이란 뜻을 가진 ‘아윤 무사’라는 곳입니다. 여기서 마라까지는 약53km정도입니다.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은 하루에 보통 30-40km정도를 갑니다. 하루반 정도 거리. 그런데 이들은 무려 삼일이나 걸려서 이 길을 온 것입니다. 아무래도 노약자들과 가축들 때문에 느릿느릿 걸어서 그럴 겁니다. 그런데 삼일동안 사막을 여행한 이들은 매우 지쳤고 더구나 목이 말랐습니다. 사막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누가뭐래도 물입니다.

그런데 사막을 삼일간 여행하느라 물이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당시에는 거대한 물통이 없습니다. 항아리를 가지고 다니지도 않습니다. 사막의 여행자는 가죽부대에 물을 넣어서 다닙니다. 이걸로 삼일을 버틴다는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게다가 가축들은 물없이 조금만 과하게 몰아 버리면 죽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마침 마라에는 물이 있었습니다. 너무 기쁩니다. 사람들은 오아시스에 도착해서 물을 마음껏 마실 마음에 부풀어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달려 갑니다. 그런데 마라의 물을 마시려고 보니까 너무 씁니다. 글쎄 물이 상했던지 아니면 물맛이 너무 고약했던지......

사막에서 물이 귀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지난 삼일길을 사막을 걸어서 마라에 당도했습니다. 충분히 힘들고 피곤하고 목이 마를겁니다. 그런데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자 바로 모세를 원망합니다.“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여기서 나오는 ‘원망하다’란 말은 원뜻이 ‘경야하다. 수군거리다’란 뜻입니다. 그 말은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고 자기들끼리 앉아서 모세를 비난하고 하나님을 비난했다는 말입니다. 참 질긴 사람들이지요.

우리가 출애굽기를 잘 보면 사막을 여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마실 것과 먹을 것으로 불평하며 걱정하고 근심합니다. 주로 먹는 문제로 시비를 일으킵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문제는 항상 문제입니다. 옛날 사람들이라고 사치를 부리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만 사막민족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하는 문제지요.

백성들의 원망에 직면한 모세는 이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다’는 말은 ‘커다란 고통 가운데서 도움을 요청하며 부르짖거나 몹시 흥분하여 절규를 발하는 모습’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써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물과 지치고 원망만하는 백성들을 앞에 하고 모세는 지금 힘들어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우리네도 그렇지요. 이 풍진세상에서 빼도 박도 못하고 옴짝달싹못하는 상황에서 오로지 하나님께만 부르짖는 겁니다. 그분만이 해결하실 수 있거든요.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겨우 가죽부대에 물을 담아 왔는데 지난 사흘의 사막여행으로 그 물은 다 마셔버렸습니다. 더구나 가축들과 함께 이동하는 유목민족의 특성상 물이 엄청나게 필요합니다. 가축들이 목이 마르다고 잔소리하지는 않지만 비실비실하다가 죽어 버리니까. 그런데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다면 문제가 심각하겠지요. 그러나 이들은 너무 성급합니다. 마치 온몸에 불만이 가득들어차 있어서 약간만 건드려도 불만이 마구 쏟아지는 불만인형같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마라의 쓴 물에 한 나무를 던지라고 합니다. 특별한 나무가 아니라 그냥 한 나무를 던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무의 종류는 전혀 중요한게 아닙니다. 사실상 어떤 나무를 던져도 많은 물을 달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가를 보시는 겁니다.
별말이 없는걸 보면 이 단물을 마시고 불평쟁이 노예들은 아마 입을 닫고 잠잠했던 것 같습니다. 뭐 하나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와 몰려와서 원망부터 해대는 이스라엘족과 잡족들은 노예근성이 깊이 박혀 있습니다. 그 불평쟁이들은 이제 목을 축이고는 잠잠합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을 보시고는 이들을 시험하기로 하십니다. 그래서 율례와 법도를 정하셨습니다. 너희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해 주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치료의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아마 쓴물을 마시고 백성들이 매우 아팠던 것 같습니다. 처음 사막길을 걷고는 이들은 여러 가지로 탈이 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치료의 하나님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릴려고 하는 것은 이게 아닙니다.
이 기사 바로 다음에 어떠한 설명도 없이 27절에 갑자기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진을 칩니다. 엘림은 마라에서 약10Km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영적인 비밀이 있습니다.
사실상 하나님이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려고 한 목적지는 마라가 아니라 엘림입니다. 뭐, 말도 안되는 소리!

그래요, 엘림에는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주가 있었다고 하쟎아요. 열두지파에 우물한개씩 그리고 한가문에 종려나무 한그루씩. 이스라엘은 모두 70개 씨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70인의 장로가 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봐도 인위적으로 자기네들을 위해서 준비되어진 것 같습니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습니다.

이걸 보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 부끄러웠을 겁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곳이 있네, 그것도 모르고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나 원망했다니!” 그런데요 이러한 광경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응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특별한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이 써서 못마신다고 그 난리를 쳐놓고 자기들을 위해 예비된 엘림에 대해서는 전혀 감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죄송하다고 모세에게 미안하다고 회개하고 사과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하하, 우리나라 사람들 같습니다. 길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으로 길을 가르쳐주면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아, 예”하고 알았다는 듯이 가버립니다. 황당하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똑 우리나라 사람들 같습니다. 감사도 모르고 사과할 줄도 모르고.
뭐, 인생이 다 그런거지요. 이스라엘의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마라가 아니라 엘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엘림이 아니라 마라에서 물을 찾았지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며 길을 제대로 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처음 하루반 거리를 사흘이나 걸려서 걸어간것부터 이들의 기분이 상했다는 표현입니다. 힘들어 죽겠는데 사막을 끌고 다니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느릿느릿 것는 겁니다. 가기 싫어서 억지로 투덜거리면서 걷는데 진도가 나갈 리가 없지요.

하나님은 자기네들이 블레셋의 강력한 군대에 겁먹고 죽을까 싶어서 군대를 피하려고 인적없는 곳으로 이끌었는데 그건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사막을 끌고 다닌다고 불평합니다.
물론 이해는 갑니다. 온 식구들과 가재도구에 가축들까지 거느리고 겨우 물한가죽부대만 가지고 불타는 대지를 걸어가는게 쉽지는 않지요. 그러나 이들은 농경민족이 아니라 원래부터 조상대대로 가축들과 함께 떠돌아 다니는 유목민들입니다.

이전에는 이들은 하루종일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노예였습니다. 지금 보는 거대한 이집트의 돌로된 건축물을 만들던 노예들입니다. 채찍으로 얻어 맞으면서 일했던 불과 몇주 전의 일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당장의 목마름 때문에 밤새도록 잠도 안자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길을 갈 때도 기쁜마음으로 걷지 않고 불평하며 터덜터덜 천천히 걸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더 걸리고 물은 떨어지고 목은 마르고 피곤하고 지치는 겁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마라에서 가짜 오아시스를 발견합니다. 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가 목적지인지 아닌지 생각지도 않고, 앞뒤 가리지 않고 물을 향해 달려갑니다.

막상 물을 마셔보니 써서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깁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큽니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전력으로 물을 향해 달려간 사람들은 그 기대만큼 실망해서 불평합니다. 더 많이 더 격렬하게.
그런데요 잘 보면 좀 웃깁니다. 여러분 200만의 사람들이 걸어 가면, 한데 뭉쳐서 걸어가는 게 아니라 행군대형으로 길게 늘어서서 걷는다면 이들의 행렬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일개 사단 만명의 병사들이 두줄로 행군하면 아무리 행군을 잘해도 2Km는 넘는답니다. 200만의 사람들이 행군대형으로 걷는 것뿐만 아니라 가축과 가재도구들 달구지들이 함께 간다면 행렬의 길이가 얼마정도 되겠습니까?

만일 이들이 마라를 중심으로 진을 쳤다면 엘림도 발견했을 겁니다. 마라하고 엘림은 겨우 10km밖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엘림을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에 엘림에 대해서 몰랐습니다. 왜냐고요?

왜겠습니까? 이들은 불평과 원망으로 억지로 길을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라의 물을 발견하자 뛰어가서 물을 마셔보고는 이 물이 쓰자 뒷사람들에게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다고 이야기 하고는 그만 그 자리에 앉아 버린 겁니다. 어떤 이들은 마라까지 달려가지도 않습니다. 물이 써서 마실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자 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 앉아서는 “못살겠다. 그냥 여기서 죽자, 아이고 힘들어라!” 그리고는 정황상 엘림쪽이 아니라 반대편 바다건너 애굽 쪽을 바라보고 그때가 좋았다고 넋두리를 했을 겁니다. 이 앞에도 나오쟎아요. 홍해를 건너기 전에 “왜 우리를 끌고 나왔느냐 차라리 애굽이 더 좋았다, 노예로 살던때가 더 좋았다, 그러기에 우리를 놓아두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이들은 홍해를 건넌 후에도 냅다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겁니다. 모세가 애통해 하며 절규하면서 부르짖었다는걸 보니까 이때의 사정이 굉장히 절박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로서는 도대체 왜 이곳으로 인도하셨는지 하나님이 정말 야속했겠지요. 그래서 기도한 겁니다.

보통 일국의 지도자가 백성들의 거처를 마련하기위해 진을 치려고 하면 먼저 순찰병을 보내서 동서남북의 지형과 위험을 먼저 알아보게 하고 안전하다고 판단이 되면 진을 칩니다. 만일 이들이 정찰을 나갔다면 바로 옆에 있는 엘림을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이들이 정찰을 나가지도 않고 선자리에서 실망해서 앉아버렸기 때문에 엘림을 발견하지 못한 겁니다.

나무뿌리로 인해서 달게 된 물을 마시고 마라에서 진을 치고 지내던 중에 우연히 엘림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나무를 하러 갔던지 아니면 주위를 둘러보다가 엘림을 발견했겠지요. 노예근성이 몸에 배여서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하고, 반대로 좋을때는 감사하지 않는 이들은 한며칠 쉬고 난 다음 주위를 둘러본 겁니다.

애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의 물들을 중심으로 진을 쳤다면 엘림도 충분히 발견했을 것입니다. 200만명이 퍼져서 진을 치면 충분히 직경 10km는 넘어 갑니다. 그러나 불평과 원망하는 마음으로 가득찬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발짝이라도 덜 걷기위해서 마라의 물이 써다는 이야기를 듣자 마라로 오던 도중에 퍼지고 앉아 버린겁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마라의 서쪽에만 진을 친겁니다. 한걸음도 더 걷기가 싫다!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원망과 불평만 냅다 쏟아 냅니다. 불과 사흘전에 있었던 위대한 승리의 찬송은 잊어 버렸습니다.
진의 형태가 없이 그냥 마구잡이로 앉아 버린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에게 질서를 부여하시기위해 법도와 율례를 주신겁니다. 행군할때는 이렇게 해라, 진을 칠때는 이렇게 해라, 그리고 여러 가지 생활에서 지켜야 할 법들을 내리신 것입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 물을 발견하고는 원망하고 불평하며 서로 싸우고 빼앗았겠지요. 그리고 모세가 나무를 던져 물이 달게 된 후에도 싸웠을 겁니다. 목이 마르던 차에 물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고 달구지위에 올라타서 편하게 가려고 싸우고...너혼자 물을 그렇게 많이 떠가면 다른 사람은 어쩌냐, 사람 마실 물도 없는데 가축이 그렇게 많이 마시면 어쩌냐는둥...법이 없이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법을 주신 것입니다.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법대로 진을 새로 치고 정찰을 하고 하다 보니까 바로 옆에 엘림이란 곳이 있습니다. 엘림의 뜻은 ‘나무들’입니다. 이곳은 비교적 비가 자주오고 개울과 샘이 많다고 합니다. 게다가 벌써 샘의 숫자와 종려나무의 숫자가 딱 이스라엘 백성들용이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구름기둥으로 인도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엘림이 아니라 마라에서 정지한 걸까요? 구름기둥이 마치 마라에서 멈춘 것 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음, 우리가 하늘의 구름을 한번 보십시다. 높이 떠 있는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 마치 구름이 자를 따라 오는 것 같고 그 구름이 자기위에 있는 것 같은데 사실상 구름은 엄청나게 넓은 지역위에 드리워질 때가 많습니다.

실제로는 구름기둥이 엘림위에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그 구름기둥이 마라를 가리킨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틀림없이 엘림을 주위로 구름기둥이 퍼져서 아마 마라에까지 가장자리가 걸쳐져 있는것처럼 보였을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마라를 발견하고는 하나님에게 묻지도 않고 여기가 그곳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놓고는 뒤늦게 “아차, 이곳이 아니라 엘림이었구나!” 이렇게 깨닫습니다.

제가 예전에 학교에서 공부할 때 밤에 하늘의 달을 보면 마치 내가 움직이는데 따라서 달도 같이 따라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당연히 달이 저를 따라다닐리가 없지만 꼭 그렇게 보입니다. 마찬가지지요. 구름기둥이란게 하늘에 떠서 햇빛을 가리워주는 역할을 하는건데 구름이 이백만을 다 가리워줄려면 얼마나 넓게 퍼져 있어야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름기둥이 엘림위에 있었는지 마라위에 있었는지 다시 생각해 보면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비슷한 위치에 있는 두 곳 위에 걸쳐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발이라도 덜 가려고 마라가 목적지라고 생각하고는 여기서 원망과 불평만을 쏟아 내고 주위를 둘러볼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다가 몇일 뒤에 배부르고 살만하니까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엘림을 발견한 겁니다.

아마 엘림을 발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나 모세나 좀 미안했을 것입니다. 이미 답이 나와 있었는데 우리가 너무 오버했구나! 그래서 아무 말도 없이 엘림에 진을 친 이야기만 나오는 겁니다. 하루도 걸리지 않지요. 슬그머니 옮기는 겁니다. “이쪽이 더 좋네!”

어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엘림을 예비하시고 여기에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주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얘들아, 지난 삼일간 고생많았지, 내가 너희를 위해 예비한 곳에서 편하게 쉬어” 이렇게 하신건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간에 만난 마라에서 여기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니, 신경질나 죽겠니, 다리가 아파서 도저히 더 못가겠니 하고 원망만 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제의 승리의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겨우 한 삼일 힘들었다고 성급하게 제대로 알아 보지도 않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좌절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오아시스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한발짝도 움직이고 희망을 가지고 노력할 생각도 없이 좌절하고 낙심해서 퍼질러 앉은 자리에서 원망만하고 있습니다. 일어 서세요.

그곳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목적지가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힘이 없다고 우리로 하여금 싸우게 하지 않고 대신 싸우시며 단지 가만히 여호와의 역사를 보기만 하라고 하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너무 성급하게 “내가 예수를 괜히 믿었네, 하나님의 인도가 뭐 이따위네” 하기 전에 하나님이 주신 곳이 정말 여기가 맞는지 먼저 믿음의 눈으로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나를 위해 진설하신 엘림의 모든 물과 나무열매를 즐기십시오. 종려 칠십주가 너무 적다고요? 물샘 열둘이 너무 모자라요? 그럴수도 있지요. 그러나 여기가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목표하고 길을 가는 나그네들입니다. 단지 가는 도중에 오아시스를 만나 잠시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워낙 힘든 여행길이니까 잠시 쉬면서 새로운 힘을 북돋우는 겁니다. 그리고는 새롭게 힘을 내서 또 여행길을 계속하는 겁니다. 사흘 힘들게 걷고 난 다음 엘림에서의 달콤한 휴식을 즐기십시오. 여기서 힘을 내서 또 가야할 곳이 있거든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그가 결코 나에게 이렇게 하실 리가 없다고 믿고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는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어려움 속에서 나를 버리실 리가 없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현실은 ‘마라’지만 눈을 들어 바라보면 ‘엘림’이 보일 것입니다. 희망의 눈으로 멀리 보십시오. 눈에 보이는 현실에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주실려고 준비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저 너머에 있는 것입니다. 엘림조차도 아버지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실 것은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약속받고 있습니다. 다만 엘림에서 쉬고 다시 걸어 가는 겁니다. 그러므로 결코 현실에 안주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상급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믿음을 가지고 인생길을 걷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8월 26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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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매우 영감으로 가득찬 이 설교는 제 인상에 오래도록 남아서 매일 매일 생각을 해봤습니다. 설교가 끝났을 때만 해도, 저는 다짜고짜 "아니 그럼 왜 좋은 엘림 앞에, 하필 쓰디쓴 마라가 있어요?" 라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짧막하게 "그게 시험이지" 라고 답하시고, 식사 준비를 하시더군요. 하하.

저는 몸은 어느덧 30대가 넘어버렸지만, 마음만은 10대라서 가끔 한가로울 때 만화책도 봅니다. 돈을 함부로 빌려쓰면 큰일난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채꾼 우시지마"라는 만화책에는 이런 재밌는 대사들이 있습니다. "돈을 쉽게 얻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줄께. 다른 게 아냐. 그저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되지. 그래서 쉽게 얻으면, 마음이 병들 수 있으니 조심해야 돼"

그제서야 마라가 있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네 인생에 어려움이 있는 이유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어렵고, 괴로운 시간을 겪음으로서, 우리는 성숙하게 되고, 감사하는 마음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 고마운 사건에도 적극적으로 감사를 표하고 살아가는 겸손한 인생과, 다른 사람의 호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뻔뻔한 인생은 그 깊이가 다를 수 밖에요. 그래서 우리는 너무 쉽게 얻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감사하다는 말을 쑥쓰럽더라도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저도 이게 잘 안 되는데... 오늘부터라도 더욱 연습하고, 연습할 겁니다!

두 번째로, 제 블로그 우상단에 그림과 함께 문구를 올려놨지요. 제가 워낙 좋아하는 영감의 빙하그림과 헬렌켈러의 문구입니다. "행복의 문 하나가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닫힌 문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우리를 향해 열려 있는 다른 문을 보지 못한다." 마라만 바라보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흔들리는 마음을 고쳐잡아야 합니다. 저 앞에 엘림이 있다는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것도 가까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힘을 내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을 볼 것인가? 보이지 않는 것까지 믿음으로 볼 것인가? 결단해야 하겠지요.

서양 우화에 행복을 주는 파랑새 이야기가 있습니다. 찾아도 찾아도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는데, 알고보니 집에 그 행복의 파랑새가 있었다는 이야기. 우리에게 행복이란, 언제나 이토록 가까이에 있습니다. 고난과 쓰라림의 마라 옆에는, 언제나 위로와 휴식을 주는 엘림도 함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라와 엘림 이야기는 앞으로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서, 인생의 한 교훈이 되어 줄 것 같네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 2012. 0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