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2년9월2일/바람이 메추라기를 몰아(민수기11:4-35)/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9. 6. 16:23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9월 2일 주일 예배

바람이 메추라기를 몰아 (민수기11:4-35)

우리는 지금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서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 서 있습니다. 이들은 걸핏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비난합니다. 열흘이면 갈 거리를 무려 40년동안이나 헤메고 있는 상황에서 지도자와 자기들의 신을 욕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이들은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많이 불평합니다.

오늘은 메추라기 때문에 일어난 재앙입니다. 그런데요 이 메추라기재앙의 발단은 출애굽기 11:4절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전부가 아니라 일부 사람들이 탐욕을 가진데서 부터 메추라기 사건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몇몇의 선동으로 말미암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평을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요 여기서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는 누구를 말할까요?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학설들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이들이 순수 이스라엘사람들이 아니라 출애굽시에 이스라엘사람들과 함께 나온 다른 노예민족들이나 어머니만 이스라엘 사람인 혼혈아들일 수도 있고 또는 당시의 하층민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하나님의 언약과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아니면 전혀 혈통과는 관계없이 어려울때면 항상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시키는 이스라엘 내의 불만세력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특정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들 모두가 다 포함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탐욕을 품었다는 겁니다. 음식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품고 이것이 채워지지 않자 다른 사람들에게 불평을 전염시키기 시작합니다.

탐욕의 무리들은 힘든 광야생활에 지쳐서 예전에 애굽에서 먹었던 음식을 갈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과거 애굽에서 먹었던 음식이 생각났고 이들은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하면서 통곡하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들 오버가 심합니다. 고기 먹고 싶다고 통곡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왜냐면 이 사람들은 지금 굶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서 아무 수고나 댓가없이 먹고 있습니다. 양도 모자라지 않습니다. 맛도 좋습니다. 처음에 이들은 만나를 맛보고는 꿀과자 같다고 감탄까지 했습니다. 이들이 예전에 먹었던 고기는 사실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죽을 고생을 하고 얻어 먹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들이 죽지 말고 더 힘내서 일하라고 주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에너지를 공급한 것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고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가축은 하나님께 제사지낼려고 먹지는 않았습니다. 사람 먹을 고기도 없는데 하나님에게 드릴 고기가 있다는 것은 이들 불평꾼들에겐 다시 없는 불평거리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고기를 안주시거든요. 그래서 고기가 더 먹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려고 출애굽하고 일개월만에 신광야에서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만족하지 않고 이번에는 기도하지도 않고 불평하며 통곡을 전염시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라는 말은 하나님이 일년전에 메추라기를 내려주신 것을 깡그리 잊은 소리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람은 참 감사를 잘잊는 것 같습니다. 누가 내려주기는요? 이전에 하나님이 내려 주셨으니까 이번에도 하나님이 내려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마치 하나님이 메추라기를 내려 주시지 않은 것처럼, 항상 굶고 있는 것처럼 고기 못먹는 것을 가지고 통곡을 하고 난리를 칩니다.

물이 없으면 없다고 , 먹을 것이 없으면 없다고 불평을 하는 이들은 물과 양식이 충분히 공급되자 마침내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고 불평을 합니다. 이들 소수의 불만은 전체로 확산되었고 마침내 이스라엘 전 백성들은 애굽의 고기가마를 떠올리며 통곡합니다.

마치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이전에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 때에 그들은 바로의 학정과 채찍에 고통받으며 노예에서 왜 해방시켜 주지 않는가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의 약속을 잊어 버리셨다고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노예에서 해방시키자 그들은 물이 없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물이 제공되자 양식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이것을 잘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금씩 조금씩 욕심이 커져만 갔습니다. 결코 주어진 것에 대해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물론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곧 주어진 현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더 좋은 것을 간구합니다.

한마디로 욕심이 계속해서 커지는 것입니다.

모세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러니까 일년전에 메추라기를 내려서 먹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해서 모두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왜냐면 만나와 달리 메추라기가 내린 것은 한번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추라기가 내린 것을 하나님의 역사로 보기 보다는 우연적인 것으로 여겼을 확률이 큽니다.

원래 봄철에는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홍해를 건너 이동하는 메추라기떼가 많았는데 이들이 운좋게도 이스라엘진에 떨어진 것으로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메추라기에 대한 언급도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였다”는 간단한 언급으로 끝이 납니다. 게다가 일년이나 지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까맣게 잊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을 생각지 못하고 고기를 못먹는다고 불평하며 통곡합니다.

이들은 또 고기말고 더 많은 것들을 먹지 못한다고 불평합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여기서 외는 오이를, 부추는 야생 클로버를 말합니다. 어쨌든 이들은 노예생활 도중에 식사시간에 이러한 것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공짜는 아니였지요. 이들은 엄청난 노역에 시달렸고 이것을 먹는 것은 결코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것을 공짜라고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을 더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야채를 먹지 못하는 것이 그렇게나 큰일이었을까요? 여기에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만나 외에는 아무것도 못먹어서 우리 정력이 쇠하여졌다’는 겁니다. 여기서 정력은 영혼과 식욕과 삶의 의욕까지도 일컫는 말입니다. 즉 만나만 먹고 이런 야채와 과일들을 못먹으니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겁니다.

아니 식도락이 그렇게나 중요합니까? 안굶어 죽고 먹고 살 것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감사해야 될 이들은 전혀 감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없는 것을 불평합니다.

그리고는 그냥 불평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온 백성들이 각기 자기 가족의 장막문에 나와서 울었다고 합니다. 모세가 들을 수 있게. 굉장한 인간들입니다.

먹을게 없어서 굶어 죽는 입장도 아니고 맛있는 야채하고 과일 , 고기를 못먹는다고 그렇게나 울어 버립니다. 게다가 노예생활의 고통에서 해방시켜준 것을 감사하기 보다는 그깟 음식을 못먹게 노예에서 풀어줬다고 오히려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까지 합니다. 한두사람도 아니고 일부가 운 것도 아니고 모든 백성들이 식구수대로 자기 집 문앞에서 울었다는 말입니다.

애굽에서는 노예에게도 그러한 맛있는 음식들을 주는데 하나님은 그래 고기하나 주지 않느냐는 항의의 표시입니다. 이들의 울음을 들으시고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이러한 울음소리를 듣고 모세도 기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세가 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자기에게 어려움이 닥치는 것에 대해서 좋지 않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즉 모세 역시 하나님에게 고기를 먹지 못하는 것에 대해 책임추궁 비슷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철부지 백성들을 나에게 맡겨서 제가 죽겠습니다. 왜 제가 저들을 책임져야 합니까?”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압박합니다.

그리고는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외칩니다. 마치 그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가 그렇게 기도했기 때문이지요.

15절에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즉시 자기를 죽이는게 은혜를 베푸는 거랍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 이 짐을 지기가 너무 힘들답니다. 불평과 불평의 이유는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요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모세의 모든 불평과 요구를 다 들어 주십니다. 그가 당초에 요구한 것보다 더 크게,더 엄하게 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할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가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대로 들어 주시면 혹시라도 우리에게 안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도는 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그것을 무시하고 기도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될 것이고 그것은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우리에게 올무로 작용할 것입니다.

여하튼 하나님께서는 무지하게 큰 진노를 발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실컷 먹이고 죽여버리려고 작정하신 겁니다. 고기냄새에 물리도록 무려 한달동안 먹을 수 있도록 고기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엄중한 심판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항상 짜고 울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이스라엘을 더 이상 참으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도자도 더 이상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오히려 왜 이런 짐을 나에게 지웠느냐고 원망하며 차라리 당장 나를 죽여 달라고 외치자 아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성령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래서 바다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옵니다. 아마 이 메추라기들은 봄철을 맞아서 홍해쪽에서 북아프리카로 날아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거센 역풍을 만나서 이 메추라기들은 시나이반도의 이스라엘 진사방으로 곤두박질칩니다. 일년 전에도 메추라기들이 이스라엘 진에 내린 적이있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양이 너무 많고 죽어서 쌓인게 아닙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죽어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힘이 빠져서 땅위 1m정도의 높이에서 잘 날지 못하고 그냥 푸드득거리고 있습니다. 넓이는 이스라엘 진을 중심으로 하룻거리정도의 지경에 퍼져서 날고 있습니다. 새들도 만능은 아니지요. 장거리를 비행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그런데 여기에다 강한 역풍을 만났으니 메추라기들로서는 죽지 않고 살아 있는게 다행입니다. 이들은 기진맥진해서 제대로 날지도 못하고 지면 1m의 높이에서 그냥 푸드득거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명령으로 이 메추라기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희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먹기를 기다리라” 하루 전날부터 이들은 고기가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 메추라기들이 거대한 떼를 이루어 진사방에서 날아 다니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신없이 메추라기를 잡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잡았던지 그날 낮과 밤 그리고 그 다음날 낮까지 무려 이틀에 걸쳐서 새를 잡았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적게 거둔자도 10호멜, 우리식으로 하면 120말, 서양식으로 2200리터를 잡았다고 합니다. 적게 잡은 사람이 그정도입니다. 굉장하지요.

이렇게 메추라기를 많이 잡고서 이들은 과거 애굽에서 고기를 저장하던 방식대로 진사면에 펼쳐서 고기를 말립니다. 하나님이 한달동안 고기가 물릴 정도로 실컷 먹게 하겠다고 하셨는데 이들은 과연 그대로 고기를 엄청나게 잡아서 쌓아둡니다. 아마 실컷 먹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사막에서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200만의 백성에게 줄 고기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짐승 사냥도 한계가 있지 사막에 짐승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런데요 하나님은 하늘의 메추라기를 동원하여 고기의 비를 내린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 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복이 쏟아지면 감사해야 합니다.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신 아버지여 감사합니다’라고 감사의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그런데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청난 고기를 보고는 정신이 나갔습니다. 그 엄청난 고기를 주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찬송과 감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얼마나 정신없이 잡았는지 낮부터 시작해서 밤새도록 잡고 그다음날도 또 잡습니다. 한 마리라도 더 잡으려고 식구수대로 잠도 안자네요. 그리고는 잡은 고기가 너무 많자 자기들의 지식을 이용해서 진 사방에 자기들을 위해 고기를 펴 둔 것입니다. 말려서 두고 두고 먹으려고.

이들은 일년 전에도 메추라기를 먹은 것을 기억지 못합니다. 이제 또 다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메추라기를 먹게 된 것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더 이상 고기를 구할 수 없을까봐 싶어서 한 마리라도 더 잡으려고 밤잠도 자지 않고 발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감사는 없습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기만 하면 다음에도 고기를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먼젓번에 주신 고기도 잊어 버리고 이들은 눈앞의 고기에 정신이 팔려서 , 육체의 소욕에 눈이 멀어서 정신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합니다.

33절에“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여호와의 진노가 내렸다고 합니다. 원문상으로는  ‘고기가 떨어지기 전에’ 라는 말입니다. 아마 한달간이나 고기를 먹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은 이루어 졌을 겁니다. 그 다음에 대재앙이 일어납니다.

성경의 기록에서 재앙의 종류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고기를 저장하는대 잘 못해서 상해서 식중독일 수도 있고, 메추라기 들이 몰고 온 바이러스일 수도 있고, 전염병이 돌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욕심장이들이 죽어서 장사되었다고 합니다.

그곳의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고 한 것은 ‘욕심의 무덤’이란 뜻입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대로입니다. 이들은 먹는것에 대한 욕망 때문에 죄를 짓게 되었고 그 죄 때문에 결국 죽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은 자를 기브롯 핫다아와에 묻고 하세롯으로 가서 거합니다.

우리는 이 기사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하나님의 신통한 능력, 이스라엘 백성들의 욕심, 지도자의 좌절과 한탄.......글쎄요, 사람마다 같은 본문을 보고도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진 사방이 새카맣게 될 정도로 몰려온 메추라기 떼들과 이를 잡으려고 정신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람들, 그리고 수십km거리 안에 늘어 놓은 메추라기 떼들은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 놓은 진풍경입니다.

한 마리라도 더 잡아서 먹으려는 사람들의 눈에 하나님도 없었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찬송도 없었고 그의 신의에 대한 감사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실망하셨고 그들에게 교훈을 내리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섬기는 아버지 하나님은 사막에서 200만명을 먹일 , 그것도 맛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한달동안 아주 물릴 정도로 먹일 고기를 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습니까? 그리고 막상 그 고기가 주어졌을 때 고기맛을 보기에 급급해서 감사도 찬송도 잊어 버리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할 자신이 있습니까?

그래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감사해야 하고 아버지를 끊임없이 믿어야 합니다. 그의 눈에는 불가능이 없지만 우리의 불신의 눈이 아버지의 능력을 제한합니다.

그보다 먼저 노예에서 해방된 것이 기껏 오이나 부추나 수박보다 더 가치없는 일입니까? 그깟 고기 좀 안먹는다고 그게 그렇게나 슬피 울며 집단적으로 데모하고 난리 칠 일입니까?

그렇지 않지요. 중요한 것은 그깟 음식이 아닙니다.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만나를 공짜로 먹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만나에다 고기를 먹기 원했고 여기에 각종 야채와 과일들로 입을 즐겁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있으면 먹으면 좋지요 그러나 뻔히 사막생활에서 불가능한데도 그들은 막무가내로 요구합니다. 우리는 그걸 먹어야 겠다.

이유도 정말 조잡하지요? 정력이 쇠할까 걱정된다. 조금 더 이야기 하면 그 음식들을 못먹으니까 살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때 우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정신이 나갔구나!” 그래요, 죽어라고 채찍에 맞고 돌을깨고 옮기면서 과일과 야채와 고기를 먹는게 나을까요 아니면 노예에서 해방되어서 채찍에도 맞지 않고 중노동에도 시달리지 않는 것이 더 중할까요? 제대로 정신이 박혔다면 답은 뻔합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의 일부 탐욕에 눈먼 이들이 전체 백성들을 선동해서 모세에게 먹을 걸로 데모를 하게 한 겁니다. 세상에 고기 못먹어서 정력이 약해진다고 식구수대로 문앞에서 울고 있는 이 쓰레기 집단들을 보신 하나님은 이들에게 너무 너무 화가 나셨지요.

“도대체 누가 고기를 줄수 있느냐고? 일년전에 내가 줬쟎아. 그때 메추라기 누가 준건지 아니?” 이게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백성들은 무식해서 그렇다 칩시다. 모세는 기억해야 지요. 그런데 모세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니 아예 처음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메추라기를 보내 주었다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것을 확실하게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먹여 주기 전에 모두 거룩하게 하고 하룻동안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성령의 바람을 동원하여 거대한 메추라기떼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래도 감사하지 않는다고요? 그래도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을 때 더 잡으려고 정신없이 밤잠도 안자고 뛰어다니는 저 가여운 노예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만 하면 아무리 사막이라도 우리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걸 주신 하나님이 다른 것도 다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에 집중해야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에 집중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과연 이제까지는 그가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역사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까지 살아 오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을 보십시오.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 먹을까하는게 제일 큰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만나가 공짜로 주어지자 이제는 그들은 배가 불러서 뭐로 내 입을 즐겁게 할까를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내 몸이 좋아질까를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식도락을 즐길까 생각하고 마침내는 노예라도 좋으니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부득 부득 하면서 문앞에서 울어 제낍니다. 정말이지 황당하고 실망스러운 이런 모습을 우리는 보이지 않겠지요?

우리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너무 어리석어서 비웃고 있는데 우리마저 욕심에 눈이 멀어 있다면 사탄은 얼마나 우리를 비웃을 것이며 하나님은 또 얼마나 실망하시겠습니까?

무엇이 더 중요한지 잘 생각해 봅시다. 무엇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는지 잘 판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말은 결코 구호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이고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욕심은 끊임없이 커져서 마침내는 그 욕심이 우리를 몰아서 죄를 짓게 하고 그 죄로 말미암아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끔 할 것입니다. 그 전에 우리의 욕심은 멈추어져야 합니다. 절제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살피면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에게 꼭 없어서는 안될 것들은 반드시 주십니다. 그러나 욕심으로 구하는 것은 잘 주시지 않습니다. 주셨다가도 그것에 대한 죄와 징벌을 내리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광야에서도 기적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먹이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그를 따라가기만 하면 마침내 가나안 복지에 당도하게 될 것임을 믿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자유민이 되게 하실 것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주님을 따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 전능의 하나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무엇보다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잠시 잠깐의 즐거움보다 쾌락보다 나의 욕심보다 정욕보다 더 중함을 믿습니까?

사람들은 인생을 광야길이라고 하지만 그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그치지 않습니다. 나는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 교우들도 그 하나님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9월 2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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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지난 달 대형마트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사람들이 야채코너에 우르르 몰려있길래 유심히 살펴봤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가뜩이나 요즘 야채값 엄청 비싼데...) 특별행사로 대파를 반값에 판다는 것이었지요. 이때다 싶어서, 알뜰한 주부분들은 물론이고, 아저씨들도 많이들 기다렸다가 대파를 사갔습니다. 이유는 당연합니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 오지 못할 싼 가격이었기에, 모두가 몰려갔던 것입니다. 기회를 잡아라! 같은 느낌이랄까...

메추라기를 가득 잡을 기회가 오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겠지요. 이런 대박찬스는 오늘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잡고, 또 잡고, 계속 잡고... 아마 어느날 갑자기 대형마트에 모든 물건이 반값이라고 써붙인다면, 수 많은 사람들이 대형마트에서 하루 종일 쇼핑을 할 것 입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처럼 욕심에 약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반문할 것입니다. "그럼 인간이 욕심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나? 인간이 무슨 성자인가?" 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면 좋겠지요. 욕심과 만족은 같은 방에서 화목하게 잘 지낼 수 없다 라는 것. 우리가 익숙하게 알다시피 욕심은 인간의 눈을 멀게 하고, 만족은 인간을 감사의 길로 이끕니다. 욕심이 커질수록, 우리는 이 욕심이 우리를 만족으로 데려다주지 않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나 성공했다고 입을 모으는 미국 대학의 의대교수님이 있었습니다. 차를 좋아해서 벤츠를 샀는데, 어쩐지 만족이 되지 않아서, 또 다른 버전의 벤츠를 한 대 더 샀답니다. 그래도 만족이 안 되서, 세 번째 벤츠까지 사고 나니 이번에는 만족 대신 허무한 생각마저 들었다고 합니다. 사고 싶은 것을 사고, 얻고 싶은 것을 얻어도, 사람의 마음은 좀처럼 만족을 모릅니다. 참, 신기하기도 하고... 하하.

결국 만족과 가까이 있는 것은 애정이겠지요. 인간에 대한 애정, 일에 대한 애정, 신에 대한 애정. 이런 특별한 감정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줍니다. 아무도 믿지 않으며,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으며, 머리 속에 욕심만 가득차 있는 인생이 되지 않도록, 우리의 삶을 한 번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 2012. 09. 시북.